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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박근혜의 對北觀 변천사

호전적 집단→햇볕정책 지지→主敵槪念 유효→통일대박→북, 바꾸겠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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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a dream’ 과 같은 박 대통령의 기대와 남북한 최고지도자의 2~3세란 동류의식이 대북정책에 자신감을 가져다주었지만 끝내 북한의 변화를 아직 끌어내지 못했다. 어쩌면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실패는 박 대통령의 불안한 내면심리의 귀결일지 모른다

⊙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집단”(1997년 1월)
⊙ “김정일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더라”(2002년 5월)
⊙ “군사적으로 북한은 한국의 主敵”(2005년 3월)
⊙ “나는 햇볕정책 지지자”(2006년 10월)
⊙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북한의 先 핵포기를 전제로 하지 않아”(2013년 6월, 길정우 의원 전언)
⊙ “한마디로 통일은 대박”(2014년 1월)
군복 입은 박근혜 대통령. 왼쪽부터 김요환 육군참모총장, 한민구 국방장관, 박근혜 대통령,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 본 남한의 대통령선거 후보자급 이상 정치지도자는 김대중(金大中)과 노무현(盧武鉉), 박근혜(朴槿惠), 정동영(鄭東泳) 등 4명이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으니 박근혜 대통령과 정동영 전 의원뿐이다. 박 대통령에게 있어 북한 최고지도자와 만난 경험은 엄청난 자산(資産)이다.
 
  남한 최고지도자의 2세라는 점에서 김일성에서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권력승계를 유연하게 볼 수 있다는 점 역시 남북 간 진전된 대화가 가능할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박 대통령은 자신감에 넘쳤고 예상대로 박근혜 정부는 적극적이었다. 집권 초부터 남북관계 개선에 광폭행보를 이어갔다. 이명박(李明博) 정부의 대북정책을 답습하지 않았다. 2013년 2월 ‘평화통일 기반구축’을 4대 국정기조로 꼽았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를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2014년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통일대박론’을, 3월엔 ‘드레스덴 선언’을 통해 인도적 문제해결 등 남북협력 3대 의제를 제시했다. 또 2010년 천안함 폭침 이후 취해진 5·24 대북제재 조치 이후 처음으로 민간단체의 대북 농업지원을 승인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통일부는 그해(2014년) 6월 4일 경남통일농업협회가 신청한 딸기모종과 재배용 흙, 소독약 등 3300만원어치 물품의 대북 반출을 승인했다. 민간단체의 대북 농업지원 승인은 2010년 1월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던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의 5·24 대북제재 해제였다. 박 대통령은 내심 이명박 대통령이 마련했던 5·24 조치를 하루빨리 걷어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5·24 조치는 북한 선박의 남측 해역 운항 불허, 남북교역 중단, 대북 신규투자 금지 및 대북 지원사업의 원칙적 보류를 담고 있다.
 
  2014년 7월에는 ‘통일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통일준비위는 석 달 뒤인 10월 13일 제2차 회의에서 ‘연해주 농업단지 공동개발 등 남·북·러 삼각협력’을 제안했다. 3국이 농업단지를 공동 개발하자는 의미는 북한의 부족한 식량 자급을 돕는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 같은 대북정책은 집권 4년차를 맞아 벼랑 끝에 내몰렸다. 북한이 지난 2월 7일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린 후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 배치를 위한 한·미 협의가 시작되고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도 예상보다 신속하게 이뤄졌다. 현상만으로 볼 때, 집권 초기보다 남북관계가 더 험악해졌다.
 
 
  ‘햇볕정책의 아류’
 
  박 대통령의 대북관은 보수적 지지층조차 ‘햇볕정책의 아류’라는 지적이 드셌지만 국회의원 시절, 보수적 안보관과 탈(脫)냉전적 시각을 쏟아내는 등 종잡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결말이란 해석도 나온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했던 경남대 정외과 김근식 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는 ‘DJ(김대중)의 그림자’와 ‘MB(이명박)의 그림자’가 동시에 어른거린다”고 말했다.
 
  심리학자들은 ‘생각만 앞선’ 자신감이 외부충격으로 꺾이면 회복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다고 불안해하면서 노력하는 사람이 불안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뢰외교(Park's Trustpolitik)를 기조로 한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소용돌이치는 북풍(北核)에 따라 불신, 배신으로 돌변하는 유전인자를 지니고 있다. 사실, 박 대통령은 상처가 많은 ‘배신의 트라우마’를 지닌 정치인이다. 측근에게 배신당한 선친의 기억 탓에 사람을 못 믿고, 한 번 비틀어진 관계는 복원하기 어려운 경직된 심리적 잣대를 지닌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붕괴 직전인 대북관계에서도 그런 트라우마가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박 대통령의 불안한 내면심리의 귀결이 대북정책 실패의 반복을 재연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관은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냉전적 시각과 탈냉전적 사고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고 할까. 어쩌면 어머니를 북한의 흉탄에 보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냉전적 사고의 극복은 인간적 성숙의 깊이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 박 대통령은 1997년 《한국논단》 1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보수주의적 안보관에 충실한 대북관을 밝혔다.
 
  〈… 지금까지도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집단이며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면서 (중략) 당시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하게 대처해야 했던 필요성을 굳이 외면하는 모순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p.167)
 
  국회의원 시절인 2000년 10월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서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과 관련, “북한이 100만t의 식량지원을 요청하고 일본이 50만t을 지원하겠다고 하니까 정부는 60만t을 보내겠다고 하는 것 같은데 국민세금을 아무런 산출근거도 없이 북한에 퍼주어도 되는 것이냐”고 추궁한 일도 있다.
 
  또 2001년 2월 국회 통일외교안보분야 대정부질문에서는 “북한의 실질변화 여부가 정부의 대북정책 성패에 큰 영향을 준다. 북한이 정말 실질적으로 변화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 같은 발언은 한나라당의 보수적 이념성과 다르지 않다.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아버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대북관에서 비롯됐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사고는 2002년 이후 변화가 일어났다. 그해 3월 18일자 《주간동아》 인터뷰에서 ‘국회의원 박근혜’는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대북정책을 펼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아버님은 반공정책을 폈다. 그러나 각 시대 정신에 따라 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 정부는 대북 포용정책에 적극적이었다. 차기 국가지도자도 대북 포용정책을 펴서 전쟁이 아닌 평화 국면으로 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포함한 북한 당국과의 신뢰구축이다.”
 
 
  DJ식 포용정책 기조 변함없다고 밝혔던 박근혜
 
  여기서 ‘대북 포용정책’이란 바로 DJ식(式) 햇볕정책을 뜻한다.
 
  그리고 한나라당을 탈당, 그해 4월에는 무소속 신분으로 민주당 김근태·함승희,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과 함께 영국 케임브리지대 동아시아연구소 주최 한반도문제 관련 학술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그의 발언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한국도 탈이념적, 탈냉전적 국제사회의 변화에 맞춰 극단적 정치세력이 아닌 합리적 중도세력이 통일을 주도해 나갈 때다. (DJ의 햇볕정책이) 포용만 강조하고 있고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되는 측면이 있지만 남북한의 화해와 교류, 협력을 추진하는 정책기조는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계승될 것으로 생각한다.”
 
  대북 포용정책 기조는 물론 좌우 이념적 편향성을 배제한 중도세력의 역할론까지 강조한 것이다. 귀국 후 4월 26일 그는 보란 듯 한국미래연합(韓國未來聯合)을 창당하고 말았다.
 
 
  김정일, “위대한 지도자의 자녀끼리 선친의 목표를 달성하자”
 
2002년 5월 평양을 방문한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 숙소인 평양 백화원 초대소를 찾아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면담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미래연합 시절인 2002년 5월 11일 ‘박근혜 대표’는 북한을 방문했다. 14일까지 3박4일간 북한에 머무르며 김정일을 만났다. 그의 방북은 한나라당과 보수 지지층에게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한나라당에 머물렀다면 가능하지 않은 행보일지 모른다.
 
  박 대표는 김정일의 특별 전용기를 탔고, DJ가 2000년 머물렀던 백화원 초대소에 여장을 풀었다. 파격적 대우였다. 그는 김정일과 1시간가량 단독면담을, 2시간가량 합동만찬을 가졌다.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http://wikileaks.org)’는 지난 2011년 9월 2일 공개한 외교전문에서, 김정일이 2002년 5월 방북한 박근혜 대표에게 “위대한 지도자의 자녀끼리 선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김정일의 이 발언은, 2008년 11월 국회의원 시절 박 대통령이 캐슬린 스티븐스 미 대사와 오찬을 함께 하면서 소개한 것으로 외교전문에 기록됐다.
 
  이와 관련, ‘국회의원 박근혜’는 2004년 《월간조선》 8월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가 둘 다 2세잖아요. ‘7·4 공동성명이 선대(先代)에 발표가 됐는데, 정신은 좋은데 평화정착이 아직 안 됐다’ ‘우리가 2세로서 같이 노력해서 공동성명의 정신이 한반도에 실현되도록 노력하자’ ‘ 평화정착에 힘쓰자’고 했고요.”(중략)
 
  —김대중 정부의 노력이 부족해 국군포로 송환 등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건가요.
 
  “적극적으로 하면 되지요. 그동안 우리 쪽에서 꺼내지도 않은 것을 그쪽(김정일)이 약속을 했어요. 적십자회담, 경제장관회담하면서 국군포로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잖아요. (중략)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돌아가시게 한 김정일을 만나고 사진을 찍은 사실이 국민들의 정서에 맞는다고 생각합니까.
 
  “평양에 가면 사진 찍고 그렇게 되는 것 아닙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피살되셨고, 제가 그 아픔을 겪었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원한(怨恨)을 가지고 남북관계를 다뤄가는 게 제대로 가는 길이냐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남북관계가 잘못되면 그런 비극을 계속 많이 겪을 것 아닙니까. 제 아픔을 앞으로 다른 사람이 겪지 않아야 합니다. 남북 사이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노력을 계속할 겁니다.”
 
  —북한에 다녀와서 ‘김정일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더라’고 했는데 앞으로 두 사람이 대화를 하면 잘되겠습니다.
 
  “….”
 
  —혹시 300만의 주민을 굶어 죽게 한 김정일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제 정신은 멀쩡해요.(웃음) 저는 누구보다 확고한 국가관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이하 생략)〉
 
  ‘유신의 딸’이 냉전시대 극단적 반공정책을 추진한 아버지와 정반대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피살과 김정일의 면담을 분리할 만큼 성숙된, 유연한 사고를 지닌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방북 후 여러 차례 김정일을 “시원시원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남북한 최고지도자의 2세라는 점도 은연중에 내비쳤다.
 
  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인 2007년 7월 펴낸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에서 당시 방북을 이렇게 평가했다.
 
  〈북한에 다녀온 이후 나는 남북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것은 진심을 바탕으로 상호 신뢰를 쌓아야만 발전적인 협상과 약속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북의 눈치를 살피거나 정치적 계산에 밀려 신뢰를 쌓지 못한다면, 만난 횟수나 대화시간은 무의미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식의 만남이 많아질수록 양측이 신뢰를 쌓을 가능성은 적어질 것이다.
 
  그런데 왜 정부 대 정부끼리 만나면 약속이 안 지켜지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그동안 뭔가 투명하지 않은 것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p.203)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박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밝힌 ‘뭔가 투명하지 않은 것’이 지금의 남북관계에 어떻게 개입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하는 상황이다.
 
  2002년 방북 이후 박 대통령의 대북관은 확실히 유연해졌다.
 
  2004년 6월 15일 서울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4주년 기념 국제토론회’에 야당 대표로는 이례적으로 참석했다. 과거 이회창(李會昌) 총재는 DJ의 6·15 정상회담 귀국행사는 물론 기타 국가적 공식행사에도 거의 참석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표가 참석하자 한나라당내 소장파 권오을·원희룡·이혜훈·진영 의원 등이 자리를 같이했다.
 
  그해 8월 8일에는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와의 인터뷰에서 “당분간 북한을 방문할 계획은 없지만 (김정일과) 연락을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며 독자적인 대화루트가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보유와 6자회담 무기한 중단’을 선언한 2005년 2월 10일부터는 다시 보수적 안보관으로 복귀한다.
 
  그해 3월 17일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오찬간담회에서 “한국은 누가 적인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언급했던 헨리 하이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의 북핵 청문회 발언에 대한 질문을 받고 “통일의 대상이자 한국의 안보위협이라는 이중성이 있지만 군사적으로 북한은 한국의 주적(主敵)”이라고 밝혔다.
 
 
  主敵개념 삭제 반대
 
  박 대표는 또 《국방백서》의 주적개념 삭제와 관련, “주적개념이 필요 없으려면 북한의 군사적 의지와 군사적 능력, 군사적 대치에 있어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면서 “그러나 북한은 한반도 적화통일을 규정한 노동당 규약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재래식 무기의 40%를 휴전선 인근에 배치하고 장사정포로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며 주적개념 삭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김정일과 만나 (핵포기를)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드러냈다.
 
  이틀 뒤인 3월 19일 로스앤젤레스(LA)에서 수행기자단에게 “김정일을 만나면 핵을 갖고서는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적극 설득해 내겠다”고 말했다.
 
  이듬해(2006년) 2월 10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정부가 남북관계를 우려해 한미연합 훈련을 연기하려 하자 강도 높게 비난한다. 국방위원회 제258차 회의록을 들여다보자.
 
  〈박근혜=국방부는 해마다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해 한미연합 독수리 훈련과 전시 증원훈련을 연례행사같이 죽 해 왔습니다. 장관께서는 연합사령관과 협의하는 등 훈련연기를 추진했다가 군 일각과 주한미군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훈련을 예정대로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NSC와 통일부가 훈련연기 요청을 해 온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윤광웅(국방부 장관)=아마 남북관계에서 그렇게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 냈습니다.
 
  박근혜=한미연합훈련의 경우는 한반도 우리 한국의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으로 한미 양국 병력과 장비이동 예산계획 등 1년 전부터 준비해 온 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 군과 주한미군의 반발로 마지못해서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로 생각합니다. 한반도 평화나 남북대화는 국방과 안보가 먼저 튼튼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꼭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2006년 10월 18일 DJ의 고향인 전남 신안을 비롯해 화순, 해남 등을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햇볕정책 지지자”,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포용정책의 정신과 기조는 줄곧 찬성해 왔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전남지역 재·보선 지원유세 도중 나온 것으로 다분히 호남표와 중도이념 성향의 지지층을 겨냥한 것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박근혜’는 햇볕정책에 대해 “시대적 형편과 경제력의 차이만 있었지 대북 포용정책은 특정 정권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7·4 남북공동성명이나 남북기본합의서 등의 사례에서 보듯 매 정권마다 추진했다. DJ가 경제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북한에 많은 지원을 해 왔고 이를 ‘햇볕정책’이라고 네이밍한 것”이라고 했다.
 
  DJ의 햇볕정책을 박정희 정권 시절에 이뤄진 7·4 남북공동성명의 연장선상에 위치지운 발언이었다. 이후 “한나라당과 박근혜는 노선정립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는 보수진영의 비난이 터져 나왔다.
 
 
  통일은 ‘I have a dream’
 
  2007년 4월 9일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3단계 평화통일론’을 제시했다.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외신기자클럽 연설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은 ‘평화정착 → 경제통일 → 정치통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 제거하고 군사적 대립구조를 해소한 뒤, 남북을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건설하고 정치적·영토적 큰 통일을 실현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북한의 변화”라며 “북한의 개혁·개방을 위해 큰 인센티브를 줘야 하고 북한이 약속을 이행하면 보상하고 합의를 깨면 불이익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대북관은 기존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 강온(强溫) 기조를 뛰어넘는 균형정책(Alignment Policy)으로 이어졌다. 그는 2011년 미국의 외교전문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9·10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균형정책은 단순히 강경과 유화의 중간적 입장이 아니라 남북한 간 안보와 교류협력 사이의 균형, 남북대화와 국제공조의 균형을 의미한다’고 했다. 즉, 대북관계에 단호한 입장이 요구될 때는 더욱 강경하게 대응하고, 동시에 협상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매우 개방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북관은 DJ의 대북관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1999년 6월 15일 서해교전(제1연평해전)이 발발하자 김대중 정부는 북측에 엄중 항의하면서도 금강산 관광은 지속하는 두 가지 접근법을 병행했다. 군사적 대결상황에서도 다른 한쪽의 경제적 협력과 화해교류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DJ의 햇볕정책은 ‘퍼주기’라는 논란에 직면해야 했고, 정상회담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불법 대북송금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2008년 출범한 MB정부는 상호주의 원칙을 토대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에 나선다면 대북투자를 통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10년 후 3000달러로 끌어올린다는 ‘비핵·개방·3000 구상’을 내놓았다. 그러나 MB정부는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인 박왕자씨가 피격되자 금강산 관광을 중단시켰다. 이듬해 8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평양 방문 당시, 김정일이 “금강산 관광객들의 신변안전 보장 문제에 대해 최고 수준의 담보를 약속”했지만 MB는 금강산 관광 재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DJ식의 대북포용과 MB식 강경노선을 섞어 ‘북한의 비핵화는 단호하게, 인도적 지원은 최대한 범위’로 열어 놓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정책목표로 내세웠다.
 
  대선후보 시절인 2012년 11월 8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울외신기자클럽’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가동하고자 한다”며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는 자위권의 범위 내에서 모든 가능한 수단을 강구하되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계속하고 경제·사회·문화 교류를 호혜적으로 업그레이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실체
 
북한의 4차 핵실험(1월 6일) 보름 뒤인 1월 2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외교·국방·통일부 신년 업무보고회를 주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실체는 무엇인가.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통일외교안보팀에 참여했던 길정우 의원의 얘기를 들어 보자. 당시 캠프 통일외교안보팀에는 최대석 전 대통령직 인수위원, 윤병세 현 외교부 장관과 류길재 전 통일부 장관, 홍영표 현 통일부 장관, 한기범 전 국정원 1차장, 백승주 전 국방차관 등이 참여했다.
 
  길정우 의원은 2013년 《신동아》 6월호에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박 대통령에게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 같은 것으로 박 대통령이 가슴 벅차게 이루고 싶어하는 사안”이라며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북한의 선(先) 핵포기를 전제로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전제를 남북관계의 조건으로 삼고선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게 박 대통령의 인식”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박 대통령의 인식은 한나라당 대표시절인 2007년 《월간조선》 1월호 인터뷰에서 “앞으로 대북 정책, 외교안보 정책의 출발점은 북한 핵무기를 없애는 일에 두어야 한다. 현 정권(노무현)이 핵무기 폐기라는 목표를 추구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한 발언과 상당히 다르다. 계속된 길 의원의 말이다.
 
  “핵문제 해결을 우선한다는 게 허망하다는 것을 20년의 노력을 통해 확인했잖아요. ‘비핵화 과정, 남북관계 개선 과정이 함께 간다. 안보 문제와 경제 관계를 병행해서 풀어 간다’는 겁니다. 그 밑바닥에는 (쌀, 비료 등) 인도주의적 지원을 통해 물꼬를 튼다는 게 있습니다.”
 
  길 의원은 또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햇볕정책의 아류’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햇볕정책의 아류라는 표현도 적절하다. 북한을 고립시키는 게 아니라 엮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인게이지먼트 정책(Engagement Policy·포용정책 혹은 관여정책)을 햇볕정책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햇볕정책의 아류”라고도 했다.
 
  길 의원이 내비친 박 대통령의 대북관은 군사적 충돌상황에서도 화해협력을 지속하려 했던 DJ식 대북 포용정책과 닮았다.
 
 
  北, 강온 양면전술 주기는 짧아지고 변동폭은 넓어져
 
  대통령 취임 이후 새로운 대화의 물꼬를 터 보려는 박 대통령의 적극적 움직임에, 북한은 강온 양면전술로 강경책과 유화책을 번갈아 사용해 왔다.
 
  북한은 2012년 12월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장거리 로켓(‘광명성 3호’ 2호기)을 발사하더니 이듬해 2월 12일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제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2013년 3월에는 정전협정 백지화(3월 5일),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 및 판문점 연락선 차단(3월 8일), 서해 군 통신선 차단(3월 27일), 개성공단 입경 불허(4월 3일) 및 개성공단 잠정 중단(4월 8일) 등으로 위협수위를 높였다.
 
  7차례나 계속된 개성공단 실무회담 끝에 9월 11일 개성공단 재가동에 합의, 166일 만에 정상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박 대통령의 계속된 대화제의와 설득 덕분이었다. 집권 첫해 박근혜 정부가 이뤄 낸 쾌거였다.
 
  그러나 점점 강온 양면전술의 주기가 과거에 비해 짧아지고 변동폭은 넓어지는 등 성급하고 과격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박종채의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의 대남태도 평가와 전망〉 참조)
 
  특히 장성택 처형(2013년 12월 12일),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2014년 1월 6일), ‘드레스덴 구상’(2014년 3월 28일) 이후 북한은 더욱 대담하게 대남도발 수위를 높이는 상황이다.
 
 
  신뢰의 빈곤과 원칙의 과잉
 
  2014년 ‘키리졸브’ 독수리 한미 합동군사훈련(2월 24일~3월 1일)을 구실로 미사일을 발사하고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을 경고(3월 30일 외무성 성명)하는가 하면 2015년 ‘을지 프리덤가디언’ 한미 합동군사훈련(8월 18~28일)을 “핵전쟁 연습”이라며 선제 타격을 외쳤다. 그나마 우여곡절 끝에 두 달 뒤인 10월 20일부터 제20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지난 1월 6일 북한이 제4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또다시 남북이 대치 국면에 접어들었다. 박 대통령은 이틀 뒤인 8일 대북 확성기 방송이 136일 만에 재개했고, 2월 7일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쏘자,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그렇게 공을 들였던 중국과의 관계도 불과 몇 달 만에 배신감을 토로하는 상황으로 반전됐다.
 
  “대북 제재에 사용할 수 있는 사실상 최후의 카드가 개성공단 폐쇄”라는 시각에 청와대도 상당 부분 동의하고 있다.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김근식 교수는 박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신뢰의 빈곤과 원칙의 과잉’으로 평가한다. “박근혜 정부는 남북 간 신뢰형성에 미약했고 원칙은 갈수록 고집으로 진화했다”며 “통일 대박론이나 드레스덴 선언 같은 우리 식의 대화 제의에만 골몰했다”는 것이다.
 
  ‘I have a dream’과 같은 박 대통령의 기대와 남북한 최고지도자의 2~3세란 동류의식이 대북정책의 자신감을 가져다주었지만 북한의 변화를 아직 끌어내지 못했다. 어쩌면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실패는 박 대통령의 불안한 내면심리의 귀결일지 모른다.
 
  보수적 지지층을 자극했던 탈냉전적 사고와, 진보적 진영을 끌어내지 못했던 ‘원칙’이란 이름의 대북 강경책, 여기다 북한의 선 핵포기를 전제하지 않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불행한 파국을 내포하고 있었던 셈이다. 겉으론 자신감에 찬 모습이었지만 속내는 북한에 매달리는 듯한 인상이 역력했었다.
 
  이제 집권 4년 차에 접어든 박 대통령이 어떤 카드를 꺼낼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월 16일 국회에서 “북한 정권을 반드시 변화시켜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도록 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인권, 번영의 과실을 북녘 땅의 주민들도 함께 누리도록 해나갈 것”이라며 “개성공단 전면중단은 앞으로 우리가 국제사회와 함께 취해 나갈 제반 조치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금부터 정부는 북한 정권이 핵개발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겠다”고 했다.
 
  보수진영은 핵문제의 해법으로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 교체)’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심지어 사드 배치 이상의 핵무장론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신뢰의 빈곤과 원칙의 과잉’ 사이에서 과연 어떤 행보를 이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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