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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리포트

生前 ‘수소폭탄’ 언급한 황장엽의 육성 테이프 단독입수

“핵개발 마치고, 수소탄 개발 시작” (2006년 10월 11일·2007년 3월 14일 연구모임)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johh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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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장엽, 북한전문가·철학연구자·시민사회단체 등 세 그룹 대상으로 2004년부터 死亡 일주일 전까지
    강의
⊙ 120분짜리 육성 테이프 180여 개에 자신의 정치철학, 北核문제, 국제정세 견해 밝혀
⊙ “북, 1994년 김일성 사망 이전에 핵실험 준비 마쳐”
⊙ “중국·소련은 핵개발 반대했지만 북한은 파키스탄 도움으로 핵개발 계속”
⊙ “6자회담 통해 北核 해결하려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나…中國은 北제재 반대할 것”
황장엽 스터디 강의 테이프.
  2010년 10월 사망한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사망하기 전 ‘북한의 원자탄·수소폭탄 개발 야욕’을 폭로한 육성 녹음 테이프를 《월간조선》이 단독 입수했다.
 
황장엽 육성 테이프와 스터디 강의 교재.
  1997년 한국으로 넘어온 황 전 비서는 망명 직후부터 줄곧 북한의 핵개발 음모와 핵무기 보유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망명 이듬해인 1998년 ‘햇볕정책’을 내건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실상의 연금상태에 들어가 대외활동을 거의 못 했다. 노무현(盧武鉉) 정권 때도 비슷했다. 다만, 전 정권과 달리 비공식 활동에 한해 어느 정도 활동할 수 있었다.
 
  황 전 비서는 2004년부터 북한전문가, 북한철학연구자, 시민사회단체 등 세 그룹의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토론을 벌여왔다. 장소는 서울시 강남 소재 안가(安家), 대학 부설 강의실 등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수차례 변경했다. 황 전 비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5~20명 규모로 구성한 스터디 그룹에 참석해 자신의 인간 중심 철학을 강의하고, 북한의 주요 이슈에 대해 견해를 밝혔다. 그의 강연활동은 2010년 10월 사망 일주일 전까지 계속됐다.
 
 
  육성 테이프 180여 개 중 핵·수소탄 언급은 2개
 
2009년 11월 강의 중인 황장엽 전 비서. 사진=서정수 민주주의 정치철학연구소장
  이번에 《월간조선》이 입수한 육성 테이프는 120분짜리 두 개다. 2006년 10월 11일과 2007년 3월 14일자 강연·토론을 각각 녹음한 것이다. 지난 1월 중순 기자는 강태욱 민주주의이념 연구회 회장, 서정수 민주주의 정치철학연구소장,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 등 황장엽 스터디 주요 참여자들을 접촉해 강연 테이프와 강의 교재 등을 입수(入手)했다.
 
  육성 녹음은 강태욱 회장, 서정수 소장이 도맡았다. 강태욱 회장은 “황 비서의 강연 내용이 워낙 뛰어나고 앞으로 역사적 자료가 될 것 같아 황 선생님의 허락하에 그의 육성을 테이프에 담았다”고 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육성 테이프는 총 180여 개에 달하는데, 2004년도부터 사망 시점 때까지 녹음한 것이다.
 
  황 비서가 북핵 관련 언급을 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월간조선》은 180여 개의 테이프 중에서 현 시점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내용이 담긴 두 개를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황 비서는 2007년 3월 14일 강연에서 북한의 수소폭탄 개발 능력에 대한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플루토늄은 우라늄을 2번 재가공해야 됩니다. 재처리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몇 번 재탕을 해야 하는데 그 플루토늄은 자연 발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재탕을 하면 우라늄 239가 되고 이것은 우라늄 235와 같이 일정한 양만 모아 놓으면 자연 분열됩니다. 이것을 이용하는 것이 원자탄입니다.
 
  삼중수소라는 것이 있습니다. 삼중수소는 수소 원자 1개에 중성자 2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이 아주 잘 붙습니다. 100g의 삼중수소를 만들려면 1억 달러가 듭니다. 그런데 삼중수소는 12년밖에는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중수소 1t과 삼중수소 100g을 합하면 수소탄이 됩니다. 수소탄이 되면 원자탄 1000배의 위력이 나옵니다. (중략) 지금 한창 핵융합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힘든 것은 그렇게 높은 온도를 용기에 넣어서 쌀 수가 없어요. 자석을 이용해서 싸지 않고서도 1억5000만 도까지 올라가게 만들었어요. 그것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이용하겠는가 하는 기술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아서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만 해도 한 15년이면 완성될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안 되고 있어요. 내가 온 지 10년이 벌써 넘었는데…〉

 
  〈보도 시, 출처 표기〉
 
  강의 내용에 따르면, 황 비서는 1997년 2월 망명하기 전에 이미 북한이 수소폭탄을 개발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 비서와 오랫동안 교류했고, 실제 그의 강의를 들었던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당시 북한이 수소폭탄을 개발 중이라는 언론 보도가 있었는데 그와 관련해 황 선생은 자신의 소중한 정보를 밝힌 것”이라며 “황 선생은 북한이 핵은 이미 개발을 마무리했고, 수소폭탄도 개발 중이라고 털어놨다”고 말했다. 당시 강의에 참석했던 몇몇 관계자는 북한이 지난 1월 6일 “수소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하자, 황 비서의 관련 발언을 SNS 등에 일부 소개하기도 했다.
 
  황장엽 비서 사후(死後), 그의 학문 세계를 정리하는 작업은 주로 스터디 관계자들을 통해 이뤄졌다. 그들은 황 비서의 정치철학을 집대성한 논집(論集), 강연 내용 가운데 의미 있는 부분을 정리한 육성 녹취록 등을 발간했다. 주요 논집으로는 《인간중심철학과 남북통합의 정치이념 논집(서정수 저)》이 있고, 그의 강의 내용 가운데 핵심적인 사항을 정리한 《인간중심 철학 육성 강의 녹취록(강태욱 정리)》 역시 중요한 자료다.
 
 
  2006년 북한의 수소폭탄 협박
 
  2006년 10월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강행한 직후, 일부 친북인사는 “북한의 다음 목표는 수소폭탄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당시 김정일의 ‘비공식 대변인’으로 불렸던 재일교포 김명철 조미평화센터 소장은 “규모를 확대해서 추가 핵실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수소폭탄도 실험할 수 있다”고 한 라디오방송을 통해 주장했다. 당시 방송에서 김명철은 수소폭탄 실험의 근거를 묻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우리는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전쟁을 한다는 것은 도쿄도 뉴욕도 불바다가 된다는 것이다. 헛소리인가 아닌가 진짜로 해보자는 것이다”고 협박했다.
 
  황 비서의 수소폭탄 개발 가능성 언급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
 
 
  7년 강의 자료에 북한 핵심 정보 가득
 
  7년치 황 비서의 육성 테이프 내용은 실로 방대했다. 기자는 녹음 테이프를 통해, 그의 육성 강의를 들으며 그의 ‘정보’와 ‘예측’이 정확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특히 북한 핵능력에 대한 말은 정확했다.
 
  황 비서는 1923년 1월 평안남도 강동에서 출생해 평양상업학교, 일본 주오(中央)대학 야간 전문부 법학과, 소련 모스크바국립대학 철학 연구소 등에서 사회주의 철학을 연구하고 주체사상을 창시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총장(14년), 최고인민회의 의장(11년), 조선노동당 비서(18년),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북한 권부의 핵심에 있었던 경력을 바탕으로, 황 전 비서는 북한 내부의 은밀한 실체를 고발했다.
 
  7년간 운영한 스터디에서 황 비서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 강연이 끝나면 참석자들은 북한 핵 문제, 국제 정세 등 시사적인 내용으로 질문했고, 황 비서는 이에 답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육성 테이프 중 현재 상황에서 의미가 있는 내용을 정리했다.
 
 
  북한 핵실험은 虛風인가?
 
  북한은 2006년 10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지하 실험장에서 1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2009년 5월 2차, 2013년 2월 3차, 2016년 1월 4차까지 북한의 핵실험은 그 후 계속되고 있다.
 
  2015년 12월 10일 김정은이 평천혁명사적지 시찰에서 “수소탄의 거대한 폭음을 울릴 수 있는 강대한 핵보유국”이라고 말했다. 가볍게 볼 발언은 아니었으나, 당시 정보당국의 반응은 “수소폭탄 기술은 아직 갖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갑작스런 ‘수소폭탄’ 주장에 대체적인 분위기는 ‘허풍(虛風)’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북한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4차 핵실험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2013년 2월 이후 3년여 만에 4차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은 ‘수소탄 시험 성공’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부는 수소폭탄 전 단계인 증폭핵분열탄 실험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1차 핵실험 이후의 상황을 보면, 대체로 북한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황 전 비서는 1997년 망명 직후부터, 북한이 이미 핵무기 개발을 마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정보당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황 전 비서의 주장이 조명받은 것은 북한이 2006년 핵실험을 실시한 직후이다. 2006년 1차 핵실험 직후 황 전 비서는 북한의 핵 능력에 대해 종합적으로 설명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1946년부터 핵개발 준비
 
  〈핵무기 개발 문제를 언제부터 시작했는가 하는 것은 똑똑히 알 수 없는데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소련의 모스크바 교외, 드브나이에 있는 핵 연구소에 가서 공부를 시켰어요. 처음 간 사람이 소립자를 하나 발견했어요. 그래서 상까지 타고 그랬는데, 그렇게 핵물리학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은 공부들을 처음부터 했어요. 1946년부터 보내서 공부를 시켰어요. 그런데 핵무기를 꼭 가져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어요.
 
  내가 알게 된 것은 핵 문제를 가지고 오히려 소련 사람들이 더 신경을 썼어요. 내가 국제담당비서를 할 때 소련 대사가 와서 얘기를 해요. 지금 핵무기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을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요. 그래서 김정일에게 보고하니까 그냥 묵살하라고 해요. 그러니까 내가 국제비서를 시작한 것이 1984년부터거든요. 얘기가 된 것은 내가 국제비서로 있을 때 되었으니까. 그러다가 핵사찰 문제가 제기되었어요. 그 핵사찰 문제는 지금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1993년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때 핵사찰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핵사찰을 자꾸 하겠다고 하니까 NPT조약에서 탈퇴한다고 성명을 냈거든요. 성명을 내고도 핵사찰 문제가 계속되었는데 특수 핵사찰 대상이 있었어요. 북한 측에서 제일 걱정하는 것이 이것이었어요. 그것을 군수 담당 공업비서가 걱정하기에 물어봤어요. 특수 핵사찰 대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요.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면 축구장만 한 크기의 공지가 있는데 저것이 무엇이냐고 사찰 측에서 제기하고 미국이 또 이것을 어떻게든지 사찰해야겠다고 제기한다는 것입니다.(2006년 10월 11일)〉

 
  〈보도 시, 출처 표기〉
 
  →(편집자주·이하 같음)해방 직후부터, 북한에서 핵무기 개발을 준비해 왔다는 증언이다. 소련, 중국 등의 지원을 받았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부분, 구(舊)소련이 핵개발을 막으려 했다는 부분이 특히 의미가 있다.
 
 
  핵개발 정보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황 전 비서는 핵개발 계획의 지휘라인에 참여한 적이 없다. 그런 이유에서, 1997년 망명 이후 그가 줄곧 증언하던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 증언에 대해 의문이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황 전 비서는 구체적으로 핵 관련 정보를 얻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핵개발 정보 입수 배경
 
  〈핵무기 제조를 성공했다는 것을 김정일이 나한테 전화로 얘기를 했어요. 핵무기 제조를 성공했는데 그것을 지휘한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인 박성봉을 표창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해요. 박성봉이 지휘를 해서 이렇게 성공을 했다고 그래요.
 
  박성봉이란 사람은 내가 교육비서를 할 때 교육부장을 했거든. 그런데 군수공업부의 제1부부장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그 군수공업부 부장을 하는 전병호라는 비서가 뇌졸중으로 두어 번 넘어졌어요. 그래서 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박성봉을 데려다 제1부부장으로 했는데 제1부부장은 부장과 같습니다. 아무 차이가 없어요. 제1부부장이라는 말만 그렇지 상징적으로 부장과 월급이 10원 차이가 있어요. 김정일과 직접 통화할 수 있는 전화도 가지고 있고 보고할 권한도 가지고 있고 다른 차나 모든 대우가 부장하고 같아요.
 
  학습반도 같은 데 있고, 부서가 크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담당비서가 부장 겸 비서로 되는데 비서나 부장이 나이가 많아 일을 잘못할 때 제1부부장을 두는데 박성봉이는 소련 유학생으로 기사 경제 대학을 나왔어요. 경제학과 기술을 같이 배워주는 대학이 있어요. 경제학의 생산 관계만이 아니고 기술도 배워주면서 경제학도 배워준다고 해서 기사 경제 대학이라고 해요. 그리고 전병호는 스웨르 도르프스키의 공과대학의 중문학과를 나온 사람입니다. 그 둘이 빨치산 간부들의 자녀들이어서 만경대학을 나온 사람들입니다. 김일성의 호위원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박성봉이 지휘를 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박성봉을 표창해야겠다고 말을 해요.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다음에 사찰 문제가 자꾸 제기되니까 김정일이 NPT조약에서 탈퇴한다고 성명을 냈거든. 그러고는 또 자꾸 교섭이 되었지요.(2006년 10월 11일)〉

 
  〈보도 시, 출처 표기〉
 
  →북한 핵개발 정보는 김정일과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인 박성봉에게 들었다는 설명이다. 북한 핵개발 정보는 북한 내에서도 극히 한정된 최고위층만 접할 수 있다. 북한전문가들에 따르면 김정일, 군수담당비서, 제2경제위원장, 원자력총국장 정도만 알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황 전 비서는 직책상 핵개발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북한의 핵개발 능력을 파악하게 된 것은 김정일의 핵개발 능력 과시와 자신과 친분이 있던 박성봉으로부터 비공식적으로 관련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사가 있었나?
 
2009년 4월 황장엽 전 비서 출판기념회.
  1993년 북한은 NPT를 탈퇴했다. 본격적으로 핵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국내는 북한의 핵개발은 협상용이라는 주장과 북한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북은 처음부터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북한의 ‘핵사찰’ 해결 방안
 
  〈(1993년 NPT 탈퇴로) 핵사찰 문제가 제기되니까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회의를 했어요. 회의를 하는 데는 원래 그런 중요한 대외관계 문제들은 세 사람이 기본 성원입니다. 중앙당 국제비서와 외무상, 그리고 대남관계 통일전선 담당비서, 이렇게 세 사람이 대외관계 심의위원회 정식 위원들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제기되니까 세 사람 외에 군수공업 담당비서가 참가하고 원자력연구총국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총국장이 참가하고, 그 산하에 있는 기술자도 참가했어요. 그렇게 논의를 하는 회의를 두 번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우리가 연료봉이라는 것이 1800개가 되는데 그것을 얼마나 재처리를 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략) 그러니까 플루토늄을 이용하는 것이 상당히 유리하지요. 그런데 북한에서는 흑연료에서 나오는 플루토늄으로 핵무기를 만드는 것을 시작했거든. 그런데 그것도 무엇이 유리한가 많은 논의를 합니다. 핵사찰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일단 수습이 되어서 제네바 회의를 하기 위해서 떠났어요. 그런데 두 번 회의를 하고서는 김정일이 이러다가는 비밀이 나가서 안 되겠다고 자기하고 강석주 둘만 하겠다고 해서 강석주가 전문 일꾼들을 데리고서 초대소로 나가서 직접 연계를(김정일과) 가지고서 해결하고 제네바 회의에는 강석주를 내보냈어요. 강석주가 미국의 카루치하고 만나서 회담을 했어요. 회담을 위해서 떠난 다음에 군수공업 담당비서인 전병호가 걱정을 했어요. 제네바에서 5년 후에는 핵사찰을 하기로 했는데 야단났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당신이 정신이 있어요? 5년 후에 있는 것을 지금 왜 걱정을 하느냐고 했어요. 5년 후라면 그것을 옮길 수 있지 않는가 했더니 50년이 가도 옮길 수 없다는 거요. 절대 옮기지 못한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그 특수 핵사찰 대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2006년 10월 11일)〉
 
  〈보도 시, 출처 표기〉
 
  →1993년 북한이 NPT를 탈퇴하고, 핵사찰을 거부하며 노골적인 핵개발을 추진할 당시 한반도는 전쟁 직전의 상황이었다. 후에 알려졌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위기 당시 동해에 미국 항공모함 2척과 군함 33척이 와서 북핵 시설을 공습하려고 했는데, 2시간의 전화통화로 클린턴 대통령을 만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차 핵위기로 알려진 1994년 상황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봉합됐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는 결과적으로 북한이 핵개발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김일성 통치 시에 이미 핵실험 준비 완료
 
  〈전병호가 나보고 그래요. 지하 핵폭발 장치를 다 해놓고서 지하 핵폭발 실험을 하기로 제의서를 올렸는데 왜 승인을 안 하느냐고요. 그것은 국제관계 때문에 안 하느냐고 물어요. 내가 국제비서라고 해서 나한테 물어보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있는가, 두 분(김일성, 김정일)이 토론해서 결론을 줄 것이 아닌가 했어요. 그러니까 이 사실은 김일성이 1994년에 죽었으니까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거든요. 살아 있을 때라는 것은 틀림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그랬거든요. 두 분이 토론해서 결론을 줄 테니까 기다리라고 분명히 말했으니까요. 종래 결론을 안 주었지요. 그러니까 그때는 아직 못했지만 벌써 지하 핵실험은 하기로 장치가 다 되어 있다고 보고를 했어요. 곁들여 얘기하고 싶은 것은 여기 사람들(남한)이 얼마나 건방지고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와서 그래요. 북조선 같은 데서는 지하 핵실험을 하면 전체 지하수가 어떻게 되고 파괴되어 절대 불가능한데 그것이 가능하냐고요. 그래서 나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이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것이 큰일입니다.(2006년 10월 11일)〉
 
  〈보도 시, 출처 표기〉
 
  →김일성이 사망하기 이전에 이미 핵실험 준비를 마쳤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인 기억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북한의 핵개발 능력에 대해 증언을 했음에도, 이를 믿지 않는 남한 정보당국에 대한 불만도 토로하고 있다.
 
 
  핵무기 기술은 어떻게 개발했나?
 
  북한의 핵기술과 관련해, 소련과 중국이 기술을 이전했다는 주장이 과거부터 있었다. 이와 관련해 황 전 비서는 순수하게 북한 국내 기술로 개발했으며, 기술적인 일부 한계는 파키스탄의 도움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파키스탄 북한에 핵기술 이전
 
황장엽 전 비서 출판 저서들. 황 전 비서는 말년에 책 집필에 몰두했다.
  〈제네바 회담이 끝난 다음에 군수공업 담당비서가 거기는 체계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신형무기, 핵무기, 미사일 이런 것은 군수공업부가 주관합니다. 그것을 행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제2경제위원회이고 내각에서는 전혀 관계를 안 합니다. 다 만들어져서 군대에 넘긴 다음에는 군대가 관리를 합니다. 그런데 전병호 군수공업 담당비서가 나를 만날 때마다 그래요. 국제비서가 왜 그렇게 무관심하냐고요. 플루토늄을 좀 사다주지 않겠느냐고 해요. 그래서 아직도 부족해서 그런가 했더니, 그래도 몇 알 더 만들어 놓으면 좋지요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만큼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김정일도 나한테도 얘기를 했고 거기 중요한 간부들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하루는 회의를 하는데 전병호 비서가 보이지를 않아요. 20일 있다가 왔는데 나보고 그래요. 이제는 플루토늄이 필요 없어요. 구할 필요 없어요. 이제 우라늄 235로 만들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했더니 내가 이번에 파키스탄에 가서 다 협정 체결을 하고 거기 기술을 다 넘겨받아서 우라늄 235로 만들기로 했다고 해요. 그것이 1996년 여름인가, 가을인가 그래요.(2006년 10월 11일)〉
 
  〈보도 시, 출처 표기〉
 
  →1996년 이미 핵개발을 마쳤다는 주장이다. 파키스탄이 북한에 핵기술을 넘겼다는 의혹은 과거부터 계속됐다. 북한은 핵개발 과정에서, 일부 기술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 전 비서는 파키스탄의 기술 지원을 통해 이러한 기술적 한계를 극복했다고 주장했다.
 
  〈소련에서 기술적으로 원조를 해주었다, 중국에서 해주었다 하는데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련에서 이 핵무기를 만드는 것을 얼마나 반대했어요. 또 중국에 핵무기를 만드는 소식이 들어갈까 해서 중국에 친척 있는 사람들을 감시까지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정보당국)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남을 깔보기를 잘하다가 뭘 했다고 하면 겁이 나서 벌벌 떨고. 떨지 않아도 될 것을 자꾸 떨거든요. 그러면서 깔보기는 왜 깔보는지.(2006년 10월 11일)〉
 
  〈보도 시, 출처 표기〉
 
  →중국, 소련이 핵기술을 이전했다는 의혹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북핵 문제 해결 해법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기정사실이 되면서, 해결 방안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햇볕정책, 6자회담 등의 방법이 제시됐다. 황 전 비서는 이러한 대북유화 정책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북한 핵무기 사용 못 해
 
  〈중국이 북한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절대로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중략) 중국이 북한의 김정일과의 관계를 절대로 고치지 않습니다.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데 조금 동조했다면, 중국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달라지기는 왜 달라지겠어요. (중략) 무엇 때문에 김정일을 미국의 국무장관이 찾아갑니까. 고이즈미 같은 놈이 왜 찾아가는가 그거요. 그렇게 너절하다고요. 김정일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체면 없이 행동한다고요. 그런데 또 대통령까지 가서 만나라고 말하지 않는가. 자기 몸값을 올리고 자기 지위를 공고화하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하는데 왜 거기에 응하는가. 그냥 가만 내버려두면 곤란해질 텐데. 핵무기를 못 씁니다. 어떻게 쏩니까. 아무리 김정일이 미친놈이라고 해도 어떻게 쓰겠어요.(2006년 10월 11일)〉
 
  〈보도 시, 출처 표기〉
 
  →2000년 10월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2002년 9월 일본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북한 방문을 비판하고 있다. 황 전 비서는 이러한 행동은 김정일의 몸값을 올리는 것이라 평가했다.
 
 
  6자회담 평가
 
  〈6자회담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합니까. 중국이 김정일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조건에서 중국이 김정일을 제재하는 것을 찬성합니까. 중립을 취하는 것처럼 하면서 현상 유지하자는 것밖에는 안 된다고요. 지금 중국의 절대적인 방침은 현상 유지라고요. 또 여기의 좌파들도 현상 유지하면서 김정일을 봐주어야 한다고 하는 방향 아닙니까. 그렇다면 6자회담이지만 실제로는 4대 2입니다. 그래도 김정일에게 제재를 가하고 제한한다고 하는 것은 미국과 일본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현상 유지이고, 더구나 남한은 계속 원조를 해주어야 되겠다고 하고. 거기서 어떻게 무엇을 해결하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그전부터 그랬어요. 6자회담에 관한 기록은 보지도 않는다고. 아무것도 해결될 수가 없어요. 미국도 아마 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 경제적으로 어떻게 못 한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체면 차리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우리도 김정일을 미워한다는 체면 차리기 위한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노골적으로 얘기한다면 6자회담이라는 것은 미국 국무부 직원들 월급 주기 위한 것이지 무슨 소용 있나요. 6자회담이 자기의 기능을 수행하자면 그 회담이 김정일을 고립시키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김정일이 나쁘다는 것을 폭로하는 회담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 중국에 압력을 가하는 그런 회의가 되어야 효과가 있지요. 거기서 핵무기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바보가 어디에 있습니까.(2006년 10월 11일)〉
 
  〈보도 시, 출처 표기〉
 
  →6자회담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기본적으로 중국이 북한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정상회담·햇볕정책에 대한 평가
 
  황 전 비서 망명 직후,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다. 새로운 정부는 북핵 문제 해결 방안으로, 햇볕정책을 제시했다. 황 전 비서는 햇볕정책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황 전 비서 스터디 수강생에 따르면 그는 평소 “내가 북한의 상황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망명했는데, 남한은 잘 몰랐다”고 말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된 가운데, 황 전 비서는 탈북자 단체와 대북매체에 북한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대중 강연에서의 북한 비판 강도 역시 높았다. 당연히 정부 입장에서는 껄끄러워 했다. 분위기가 이러니, 황 전 비서의 활동 영역도 지속적으로 축소되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황 전 비서 측 인사들은 경호 등의 핑계로 행동에 상당히 제약이 있었다고 했다.
 
  아직까지 논란이 되는 부분은 황 전 비서가 아들 경모씨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았다는 부분이다. 당시 황 전 비서는 미국 청문회 등에 참석해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해 고발하려고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논란은 두 가지였다.
 
  첫째, 황 전 비서 전화번호를 북측이 어떻게 알 수 있었나, 다음으로 이러한 전화가 황 전 비서에게 연결되도록 정부 측이 방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평소의 소신을 바탕으로 황 전 비서는 햇볕정책 등 일련의 대북유화책에 반대했다.
 
 
  “미국과 한국을 이간시키려 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의견을 묻자) 김정일의 목적은 남한을 먹자는 것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니까 이놈이 자꾸 미국하고 한국을 이간시켜 놓고는 우리하고 친합시다고 그래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우둔하니까 한국이 천하에 고얀 놈들이다, 전쟁 때도 싸워주고 군대도 주둔시키고 했는데, 미국 군대 주둔하지 않고서 한강의 기적이 가능한가. 그런데 지금 자꾸 반대하고 촛불 시위만 한다. 그런데 김정일은 자꾸 친합시다면서 미국 군대만 철수하면 절대로 전쟁을 안 하고 논의해서 해결할 테니까 간섭만 하지 말라는 것이 그놈들의 전략입니다. 여기서 햇볕정책 지지하는 놈들이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좌경화되면 남부 월남같이 됩니다. 1973년에 남부 월남도 그렇게 되었어요. 키신저라는 놈이 가서 한 것을 보십시오. 자본주의 외교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가 하는 것을. 평화협정 체결하고 온갖 사람들을 데려다 보증을 세워서 다시는 절대로 평화가 파괴되지 않는다 했지요. 그래서 DJ와 같이 평화상을 탔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람들은 (상을) 타지 않았어요. 여덕수는 거부하고 말았어요. 이따위 협잡꾼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좀 괜찮게 나오면 평화협정 체결하고 다시는 여기서 전쟁도 일어나지 않게 해놓고서 가버리면 그만입니다.(2007년 3월 14일)〉
 
  〈보도 시, 출처 표기〉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 중인 당시, 정상회담은 한국과 미국을 분리시키기 위한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평화협정으로 붕괴한 과거 베트남 사례를 설명했다.
 
 
  “햇볕정책 지지하는 놈 北으로 가라”
 
  〈우리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야 됩니다. 단결해야 됩니다. 걱정만 하지 말고 단결해서 싸워야 합니다. 제일 나쁜 것이 햇볕정책입니다. 싱거운 놈 아니요. 햇볕정책은 햇볕을 쬐어서 옷을 벗기는 것이지만 이것과는 다른 이솝 우화가 하나 있어요. 개구리들이 모여서 평화롭게 살았어요. 누가 통제하는 것도 없고 하니까 너무 평화로워서 재미가 없었어요. 통제하는 것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느님한테 자꾸 요구하니까 몽둥이를 하나 내려보냈어요. 그런데 이 몽둥이를 타고 앉아 있어도 가만있어요. 그래서 또 재미가 없었어요. 그래 더 강한 지도자를 내려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백로를 내려보냈어요. 물고기를 잡아먹는 백로를 내려보냈어요. 그러니까 다 잡아먹고 말았어요. 그래서 자꾸 평화롭게 지내게 되면 오히려 독재자를 요구하게 됩니다. 발전 방향을 주어야 됩니다. 발전 방향을 주어서 몇 배나 더 행복한 생활을 창조하기 위해서 노력하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자꾸 평화롭게만 살게 되면 그런 햇볕정책을 요구하지요.(중략) 원자탄 쓰는 것보다도 몇 배나 사람이 굶어 죽고 또 정신없이 된 상태인데, 미국 사람들은 그것은 문제시 안 하고 앞으로 원자탄을 쓰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만 가지고, 강도가 들어와서 지금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문제시 안 하고 앞으로 저놈이 강도질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문제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햇볕정책 지지하는 놈들은 북한으로 다 가라고 하면 됩니다. 가라면 또 안 갑니다.(2007년 3월 14일)〉
 
  〈보도 시, 출처 표기〉
 
  →황 전 비서의 강의를 들었던 수강생들에 따르면, 황 선생은 햇볕정책에 반대하면서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 우선 한중FTA를 빠른 시일 내에 체결하고, 가능하면 한일FTA도 좋다고 주장했다. 경제 교류를 통해 북한을 고립시키자는 주장이었다. 다음으로 황 전 비서 본인이 중국에 가서 북한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황 전 비서는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勛)과 친분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활동을 위한 구체적인 자금(資金) 액수까지 이야기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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