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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金泳三 정부가 선택한 자위적 핵개발 계획의 實相

YS 정부 때 재처리 對美로비 성사직전까지 갔으나…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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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IAEA의 한국 핵사찰로 YS 정부 시절의 우라늄 농축실험이 드러난 것
⊙ 朴寬用 전 대통령 비서실장, 한전 통해 핵연료 재처리 로비 시도… DJ 정부 출범 직후 중단
⊙ 클린턴의 北爆 만류하던 YS, “그때 미국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더라면…”이라며 후회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본부 건물.
  2004년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절,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한국의 핵개발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사찰을 실시하는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북한은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두 번째로 탈퇴했고, 핵실험을 눈앞에 두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IAEA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한국 핵 과학자들의 우라늄 농축실험(2000년), 플루토늄 미량(微量) 추출(1982년) 사실이 미국 측의 강력한 자료제출 요구에 의해 드러났고, 2004년 9월 13일 열린 IAEA 정기이사회는 한국의 ‘핵개발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은 우라늄 분리실험과 관련, 한국 정부가 1980년대 IAEA에 공개하지 않은 시설 3곳에서 150kg의 금속우라늄을 생산한 뒤 이 중 ‘소량’을, 레이저를 이용한 농축에 사용했다고 밝힌 뒤 ‘심각한 우려(serious concern)’를 표명했다. 또 한국의 농축실험에 정통한 한 외교관은 2000년 레이저 농축 당시 약 2.5kg의 금속우라늄이 사용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오명(吳明)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은 핵실험 의혹 등과 관련, “원자력연구소가 지난 2000년 1~2월 한 차례 우라늄 분리실험을 한 것과 지난 1982년 화학적 실험 과정에서 플루토늄을 한 차례 극미량 추출한 것 이외에 추가로 의혹을 살 만한 핵 관련 실험은 없다”고 해명했다.
 
  IAEA는 3차에 걸쳐 사찰단을 파견하는 등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IAEA는 2004년 8월 31일~9월 4일, 9월 19~26일 등 두 차례에 걸쳐 조사단을 보내 대덕 한국원자력연구소와 공릉동 연구센터 등 과거 우라늄 분리와 플루토늄 추출실험 등을 한 현장을 방문해 핵물질 실험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이 추출·분리한 플루토늄과 우라늄 일부를 채취해 갔다. IAEA는 그해 11월 2일부터 7일까지 3차 조사까지 실시했다.
 
 
  日本, ‘YS 정부 때 시작’ IAEA에 문제 제기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
  미국이 실험실 차원의 핵기술을 연구한 동맹국 한국을 호되게 몰아붙이자, 한국의 핵 과학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은 2004년 2월 핵안전협정 추가의정서에 비준했다. 의정서는 ‘연구시설’을 새로 신고시설에 포함하고, 핵물질을 이용한 연구에 대해 상세하게 IAEA에 보고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핵 과학자들은 “의정서 비준 이전의 연구는 신고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1980~1990년대의 실험용 핵물질 추출은 면죄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자력연구소장을 지낸 신재인(申載仁) 초대 국가핵융합연구소장은 “연구용 원자로는 사찰대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우라늄 분리실험을 한 것은 협정위반이 아니다”라고 했다.
 
  2004년 11월 2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IAEA 이사회는 한국 원자력 역사에서 가장 곤혹스런 날로 기록됐다. 이날은 ‘IAEA의 단골 문제아’인 이란·북한과 함께 세계 5위의 원자력 선진국인 한국이 도마 위에 오른 날이다. 의제는 ‘한국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이사회의 결론은 ‘안보리에 회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IAEA는 “관련된 핵물질이 소량이고, 실험이 계속되는 징후가 없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은 ‘핵(核) 불량국가’로 취급받는 것은 면했지만, 원자력 분야에서 쌓아 온 국제적인 신뢰도에 상당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굴욕의 발단이 된 것은 다 합쳐도 단 1g이 안 되는 플루토늄과 우라늄이었다.
 
  한국의 핵물질 실험 문제가 최초로 불거진 것은 2004년 9월이었다. 당시 과학기술부 조청원(趙靑遠) 원자력국장이 “국내 소수의 과학자가 지난 2000년 1~2월 자체적으로 극소량의 우라늄 분리실험이 포함된 과학실험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실험 성격에 대해 조 국장은 “원자력연구원의 과학자들이 핵연료 국산화 차원에서 연구하다가 순수한 호기심에서 우라늄 235를 분리해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분리된 우라늄은 단 0.2g.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최소량인 15~20kg의 1만분의 1에 불과한 양이었다.
 
  조 국장의 발표 당시 IAEA는 사찰단을 원자력연구원으로 보내 확인에 나선 상태였다. 한국과 IAEA는 7개월 전 ‘순수 연구 차원에서 이뤄진 과거의 핵물질 실험이라도 모두 신고한다’는 핵안전협정 추가의정서에 합의했고, 그에 따라 과거 사례를 점검하던 정부가 4년 전 미처 보고되지 않은 실험을 알게 된 것이다.
 
  이어 전두환(全斗煥) 정부 시절 한국의 연구자들이 플루토늄을 추출한 사실이 외신에 의해 추가로 알려지면서 한국의 핵물질 실험은 국제사회에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1982년 서울 노원구 공릉동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용 원자로에서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실시됐고, mg(밀리그램·1000분의 1g) 단위의 플루토늄이 추출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추출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장인순(張仁順) 전 원자력연구소장은 “순수한 과학연구 차원에서 단 86mg(0.086g)을 추출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 실험 역시 보고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두 실험 사이에는 무려 18년의 시차가 있었고, 추출량으로 볼 때 핵무기 개발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언론들은 핵개발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특히 일본 언론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사히신문》과 《요미우리신문》은 “한국에서 핵물질 실험을 했다는 것 자체가 핵확산을 방지하려는 국제사회에 깊은 충격을 던졌다”고 보도했다.
 
  특히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한국이 지난 1990년대에도 우라늄 농축과 관련된 실험을 했다”고 했고,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2000년의 우라늄 농축실험이 드러난 것은 최소한 10년 전 김영삼 정부 때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정부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한 것인지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며 안건을 IAEA에 상정했던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 재처리시설 확보에 총력
 
1982년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했던 서울 노원구 공릉동 옛 원자력연구소 내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Ⅲ. 트리가Ⅲ는 해체돼 없어졌다.
  일본이 이렇게 나온 데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핵무장을 추진했던 역사가 영향을 미쳤다. 박 대통령은 1970년대 미국 정부가 ‘닉슨 독트린(아시아에서의 미군 역할 축소)’에 따라 1971년 주한미군 7사단의 철수를 일방적으로 추진하자 핵무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원자력연구소 등은 연구용 원자로와 재처리시설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한국은 프랑스와 비밀리에 핵 재처리 시설과 기술공급 계약까지 체결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 재처리 시설 도입 계획은 무산됐다.
 
  1979년 6월, 카터는 한국을 방문하면서 1978년 철수한 병력 3400명을 제외하고는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사실상 철회했다. 박 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면 한국은 미사일을 비롯한 핵개발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압박카드를 카터 행정부에 전달한 결과였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압박 때문에 1976년 ‘핵개발 포기’ 의사를 통보했다. 미국 CIA 등이 공개한 문건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10·26 사태로 숨을 거둘 때까지도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했으며, 미국은 계속해서 이런 움직임을 ‘감시’했었다.
 
  1979년 10월 박 대통령이 피살되자 한국의 원자력 연구는 강력한 후견인을 잃었다. 핵공단이 원자력연구소로 통합됐고, 에너지연구소로 명칭마저 바뀌었다(10년 만인 1991년 원자력연구소로 명칭 회복). 전두환 정권은 출범 초기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나마 남아 있던 싹을 형식적으로나마 잘라 버렸다. 핵개발 포기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연구소의 이름에서 ‘원자력’이란 말을 떼어 버린 것이다. 1991년 노태우(盧泰愚)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요동치던 핵 문제는 수면 아래로 잠수하게 됐다.
 
 
  金泳三 정부, 핵무기가 아니라 핵기술 개발 목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카터는 미군 철수를 압박카드로 썼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박 전 대통령은 핵개발 검토로 맞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이 1993년 3월 NPT를 탈퇴하자, 자위적 차원에서 핵기술 연구를 추진했다. 북한의 핵보유에 대비해 핵무기를 보유하지는 않더라도, 관련 기술을 ‘핵보유 직전 수준’까지 끌어올리자는 구상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핵무기 제조 능력은 물론이고 재처리 능력에도 함께 관심을 가졌다.
 
  한국원자력연구소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1993년 초부터 1994년 말까지 우라늄 농축 연구를 진행했고, 소량의 우라늄을 농축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늄 농축에는 레이저를 이용해 추출하는 ‘아블리스(AVLIS)’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핵기술 개발에 참여했던 복수의 핵 과학자, 김영삼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이 비밀 핵기술 개발 프로젝트는 초기에 김영삼 정부의 고위층에 보고됐고, 정부의 암묵적 승인하에 진행됐다.
 
  레이저 농축법은 우라늄235 원자의 최외곽을 돌고 있는 전자(-)에 레이저를 쏘아 공명현상을 일으켜 이탈시킨 후, 양쪽에 (+)와 (-) 성질을 갖는 전기판을 설치해 우라늄235와 우라늄238을 분리하는 농축방법이다. 원심분리법, 기체확산법과 함께 대표적인 우라늄 농축방법으로, 미국 등 핵개발 선진국들이 사용하는 고난도 농축기술이다. 정확한 명칭은 증기레이저동위원소분리법(AVLIS, atomic vapour laser isotope separation). 원심분리법에 비해 성능이 뛰어나 고농도 우라늄을 농축할 수 있고, 작은 공간에서도 농축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핵기술 개발에 참여했던 핵공학자 A씨는 당시 농축했던 우라늄 양에 대해, “U-235가 스펙트럼을 통해 툭 튀어나온 것을 보고 성공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더 이상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1994년 12월 김시중(金始中) 장관 후임으로 과학기술처 장관에 취임한 정근모(鄭根謨) 박사는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실험장비와 실험자료의 전면 폐기, 실험실 폐쇄를 지시했다. 우라늄 분리 성공 사실을 알게 된 정 장관은 ‘한미원자력협정’을 들어 프로젝트를 전면 폐기했다. 이로써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한 핵기술 개발 프로그램은 전면 폐기됐다.
 
  개발에 참여했던 핵공학자 B씨는 “정근모 장관은 ‘핵개발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게 우리의 살길이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더라도, 우리는 미국의 핵우산에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면서 “전임 김시중 과기처 장관, 신재인 당시 원자력연구소장과 생각이 완전히 달랐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부의 고위 관계자 C씨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한 직후인 1993년 3월 원자력연구소 연구팀이 ‘실험실 차원에서 핵기술 개발을 하겠다’고 보고했다”면서 “‘과학자들의 판단이 그렇다면 그렇게 진행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C씨의 말이다.
 
  “과학자들은 ‘핵무기 개발에는 쉬운 페이스와 어려운 페이스가 있다’고 했죠. 국제적 규제를 벗어나, 어려운 페이스를 넘겨 놓으면 북한이 핵보유를 선언할 때 언제든지 핵무장에 나설 기술적 기반을 갖추게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당장 핵무기를 보유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한 것이 아니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하겠다는 얘기였죠.”
 
  —‘당시 과기처 장관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프로젝트에 관해 보고를 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데요.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은 차후에 국가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고 판단해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정근모 장관이 그 프로젝트를 파기하기 위해 김영삼 대통령을 면담한 것이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나 싶어요.”
 
  —왜 위험스러운 핵기술 개발 프로젝트를 용인했나요.
 
  “북한이 NPT를 탈퇴하고 언제 핵을 보유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는 즉시 우리도 바로 핵무기 제조에 착수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죠. 미국과 우리의 관계, 중국과 우리의 관계가 언제 돌발적으로 변할지 몰라 준비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핵무기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수준을 100%라고 한다면 86% 혹은 87%까지 기술을 갖춰 놓자는 것이었죠. 그래서 프로젝트 이름이 ‘88 프로젝트’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핵폭탄 제조를 위한 핵기술 확보 차원에서 진행했습니다.”
 
  —레이저 추출법으로 소량의 우라늄을 농축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까.
 
  “사실 기술적인 부분은 모릅니다. 과학자들이 실험실 수준에서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가 볼 생각도 안 했죠. 정근모 박사가 완전 폐기를 지시할 때까지 연구를 계속한 것으로 압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연구는 핵무기 제조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순수하게 실험실 차원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폐기했습니다.”
 
  —프로젝트가 진행됐었다는 사실을 다음 정권인 김대중 정부는 몰랐습니까.
 
  “김대중 정부의 핵심 관계자에게 이 같은 프로젝트가 진행됐다는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국가를 위한 자위적인 대응이었습니다. 오해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재처리 능력은 어느 정도로 봅니까.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능력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李宗勳 한전 사장, 영국으로부터 재처리 제안받아
 
1977년 3월 2일 한국핵연료공단 현판식. 최형서 장관(왼쪽)과 주재양 핵연료공단 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연구소에서 열렸다.
  김영삼 정부 시절, 원자력계의 숙원사업인 재처리 문제의 돌파구가 마련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차관급 이상 공직을 지낸 인사 130여 명이 1995년 4월 마포포럼을 창립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은 회고록 《나는 영원한 의회인으로 기억되고 싶다》에서 재처리 사업의 시작을 이렇게 적었다.
 
  〈국록(國祿)을 먹었던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리하고 있는데, 김시중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핵 재처리 문제를 꺼냈다. ‘북한은 NPT를 탈퇴한 후 핵개발에 나서고 있다. 반면 우리는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선언으로 플루토늄·우라늄 재처리 등 평화적 목적의 핵개발까지 포기하고 말았다. 평화적 핵 주권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긴요한 국가적 과제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우리와 같은 민간단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김 전 장관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데도 핵 재처리 권리를 갖게 된 데에는 일본 내 민간단체들이 여론을 환기시키고 미국과의 교섭에 앞장선 덕분’이라고 했다.〉
 
  마포포럼은 신재인 한국원자력연구소장을 초빙해 핵 재처리 문제에 대해 청취했다. 이종훈(李宗勳) 한국전력 사장을 불러 사업의 취지를 이야기했더니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고 한다. 이종훈 사장은 “재처리를 하지 못해 쌓여 가고 있는 핵연료들을 재처리하기만 해도 100억 달러 상당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한국전력은 플루토늄 재처리를 통해 원자력 기술을 한 단계 높이고, 폐연료봉에서 타지 않은 우라늄을 회수해 경제성을 높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이종훈 사장은 그의 자서전 《한국은 어떻게 원자력 강국이 되었나》에서 1995년 4월 26일 영국의 원전 연료회사인 BNFL(British Nuclear Fuels pic)의 사용후 재처리공장인 THORP(Thermal Oxide Reprocessing Plant) 준공식에 참석한 일화를 기록했다. 준공식 행사 이튿날, 이 사장은 존 메이저 영국 총리가 참석한 만찬에 초대됐고, 그곳에서 주한 영국대사를 지낸 라이트 외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와 재처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라이트 차관보는 한국도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목스 연료(MOX, 이산화 우라늄과 이산화 플루토늄의 혼합물을 주원료로 한 핵연료. 순수 플루토늄과 달리 혼합원료는 핵무기 전용 가능성이 없어 NPT 조약 위반이 아니다)로 만들어 사용하기를 권하며,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이 개정을 원하면, 영국이 미국을 설득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측면지원하겠다고 했다. 라이트 차관보는 나를 메이저 수상에게 소개하면서 한국의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문제와 관련, 영국정부가 지원해야 할 당위성을 설명했고, 수상은 매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1995년 5월 25일 이종훈 사장은 한국전력을 내방한 해리스 영국대사와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해리스 대사는 “북한 흑연로에서 빼낸 사용후 핵연료의 처리 문제는 미국정부도 걱정거리일 것”이라며 “이를 해외로 반출해도 보관장소가 마땅치 않고 받아 줄 나라도 없으니 이를 재처리해 플루토늄과 U-235로 재생한 후 북한 경수로에서 태워 버리는 것이 상책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영국이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와 플루토늄을 이용한 목스 연료를 만들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북한에 공급하면 북한도 연료비를 절감할 수 있고, 미국의 걱정도 덜게 될 것”이라며 “영국이 한국의 경수로에 시범적으로 목스 연료를 제공할 터이니 시험적으로 연소해 보라”고 했다.
 
  이종훈 사장은 해리스 대사에게 “현재 한미원자력협정은 플루토늄 연료의 사용을 금하고 있으니 한국이 앞장서 이 문제를 거론하면 국제사회가 한국의 의도를 핵무기 개발과 연계해 의심할 수도 있다”며 “영국이 먼저 미국을 설득해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할 수 있도록 정지작업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1996년 3월 이종훈 사장은 정근모 과기처장관·권영해 안기부장과 함께 저녁식사 자리에서 영국의 제의를 설명하고, 국내 경수로에 플루토늄이 들어가는 목스 연료를 도입해 사용하는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추진해 줄 것을 건의한다. 정 장관은 “이 문제는 한전이 독자적으로 처리하기엔 민감한 사항이니 마포포럼의 국가발전연구원(NDI)과 협조하도록 박관용 전 비서실장과 김시중 전 과기부장관 등과 협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핵 재처리 로비 담당한 반스 변호사
 
1995년 3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로 원전 휘호석 제막식 참석차 원자력연구소를 방문해 신재인 소장(왼쪽)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이종훈 한전 사장, 김 대통령, 정근모 과학기술처 장관, 김화섭 단장.
  마포포럼은 미국 민주당 정책개발연구소 CNP(Center for National Policy) 소장이며 변호사인 마이클 반스 전 미 하원의원과 접촉해 공동연구를 위한 교섭을 벌였다. CNP는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 토머스 폴리 하원의장 등 민주당 핵심인사들이 거쳐 간 기관이었다.
 
  1997년 1월 20일 클린턴 2기 행정부 출범식에 마포포럼 요원, 정근모 전 과기처 장관, 박건우(朴健雨) 주미 한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다음 날 마포포럼 인사들과 CNP 소속 정계인사들이 모여 한미 간 정책조율을 시작했다. 마포포럼은 클린턴 정부의 ‘100일 계획’ 안에 한국의 핵 재처리 허용이라는 의제를 집어넣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클린턴의 동북아 정책 브레인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고, 그는 “한국의 입장은 이해하나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위한 미국의 정책변경은 어려울 것”이라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피력했다.
 
  한국전력은 반스 변호사의 소개로 1997년 4월 미국의 유력 로펌인 ‘호건 앤드 하츠(H&H)’와 로비스트 계약을 맺고, 이 사실은 비공개로 하기로 했다. 이 계약은 또 한국의 사용후 핵연료를 영국 BNFL사에서 재처리해 거기서 나온 핵연료를 한국에 반입하는 프로젝트를 H&H사가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소요경비는 한국전력이 댔다.
 
  한창 일을 진행하고 있을 무렵,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다. 마포포럼은 더 이상 민간차원에서 추진한다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박관용 전 비서실장은 이종찬(李鍾贊) 국정원장을 만나 그동안 해 온 일을 설명하며 “이제 정권이 바뀌었으니 더 이상 내가 이 문제를 추진하기는 어렵다”며 “관련되는 자료를 모두 넘겨 드리겠으니, 새 정부에서 알아서 해 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이종찬 원장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박 의원께서 해 오셨다니 정말 훌륭하시다”며 “관계기관과 협의하고 검토해서 조치하겠다”고 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박관용 전 실장에게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종찬 원장은 박 실장에게 얘기를 들은 후 장영식(張榮植) 한전 사장을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장영식 사장은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로, 원전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장 사장은 이 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미국이 알게 되면 큰일 난다”며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장 사장으로부터 “큰일 난다”는 말을 듣고 이 프로젝트를 중단시키라고 지시했다. 박 전 실장은 “결국 김대중 정부는 그해 6월 임동원(林東源) 외교안보수석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이 사업을 전면 중단키로 결정했다”며 “김대중 정권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미국과의 관계도 있지만, 핵 재처리 기술 확보가 북한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했다.
 
  1998년 5월 5일 장영식 사장은 프로젝트 재계약을 희망하는 H&H사 반스 변호사의 방문을 받고, 지난 정부가 재처리 로비를 추진하는 것을 알았다. 장 사장은 신문사에 로비계약 내용 사본과 관계 서신 등 자료 일체를 넘겼고, 1998년 7월 15일 자 《동아일보》에 마포포럼의 핵 재처리 추진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이종훈 전 사장은 “이로써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위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 후유증으로 한국의 대미 로비에 대한 신뢰도도 크게 추락했다”면서 “북한의 KEDO 사업이 중단되고 북한이 핵실험까지 강행한 마당이라 대북관계 여건이 훨씬 복잡해져 그때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아쉬워했다.
 
  원전 기술 세계 6~7위, 원자력 기술 세계 5위, 동위원소 생산 세계 10위권의 원자력 강국인 한국은 핵연료 농축도 재처리도 할 수 없다. 2015년 11월 25일 발효된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으로 미국산 우라늄의 20% 미만 저농축과 사용후 핵연료에 대한 파이로프로세싱(건식 재처리)의 향후 ‘추진 경로(pathway)’를 마련한 것이 최대 성과라고 하지만, 쌓여만 가는 고준위 폐기물 처리 문제로 골치를 썩기는 마찬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戰犯國)만도 못한 핵 자주권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YS, 클린턴과 “전쟁 안 된다”며 40분씩 전화통화
 
1996년 3월 5일 김영삼 대통령과 방한 중인 존 메이저 영국총리가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정치·안보·경제협력 증진방안과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발전방향 등 공동관심사에 관해 논의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북한의 NPT 탈퇴선언 이후 제네바 핵합의(1994년 10월)에 이를 때까지 1년7개월 동안 북한 핵 문제를 안고 씨름했다. 그는 “핵을 가진 자와 손을 잡지 않겠다”며 한미군사동맹을 토대로 북한을 강하게 압박했고, 북한 핵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 가져갔다. 결국 클린턴 행정부는 1994년 여름 북한에 대한 군사적 제재에 나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미국의 앞길을 가로막고 설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핵무장을 막아야 하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아야 한다’는 대통령으로서의 또 다른 책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IAEA 사찰단을 내쫓겠다는 협박과 함께 북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촉발된 것이지만, 미국은 단시간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북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이른바 ‘작전계획 5027’까지 공개하면서 1차 경고 시그널을 보냈고, 다시 1994년 3월 핵추진 항공모함인 칼빈슨호를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기지에 입항시키면서 최후통첩의 시그널을 보냈던 것이다.
 
  북한 핵 위기가 확산하면서 제2의 6·25전쟁 발발 위기까지 왔지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방북해 6월 18일 김일성과 만나 두 차례 회담을 가졌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미·북회담을 재개하고 경수로 대북지원을 약속하면 핵개발 프로그램을 동결시킬 수 있다”면서 동시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김영삼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불과 2주 전인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부상이 2002년 10월 방북한 켈리 전 차관보에게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을 시인하면서 이른바 ‘2차 핵 위기’가 불거졌다. 이듬해 1월 북한은 NPT를 다시 탈퇴했고, 핵시설에 설치된 IAEA의 봉인(封印)을 떼어내고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해 3월 14일, 기자는 북핵 위기의 해법을 듣기 위해 상도동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았다. 그는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긴박한 당시의 상황을 먼저 얘기했다.
 
  “북한이 핵은 못 만들도록 하겠다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었어요. 미국은 전쟁하겠다고 항공모함을 끌고 왔으니까. 북한은 2분30초 만에 지하 땅굴에서 포를 끌고 나와 서울을 향해 쏠 수 있어요. 몇 방만 서울에 떨어져도 아수라장이 됐을 거 아니에요. 클린턴 대통령하고 ‘한국군은 한 명도 못 움직이게 하겠다’, ‘전쟁은 절대 안 된다’고 40분씩 전화통화를 하면서 싸웠어요. 갈 때까지 다 가서 카터가 나타난 거예요. 그렇게까지 갔으니까 김일성이가 ‘핵개발 포기하겠다’, ‘김영삼 대통령하고 회담을 하겠다’고 항복을 한 거예요.”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 핵 문제에 대해서는 무척 강경했군요.
 
  “절대 안 된다는 거지.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 가족과 주한 미군 가족을 소개시키기 하루 전날 내가 그걸 알았고,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던 거예요. 내가 안 막고, 주한 미국대사가 소개령을 내렸으면, 한국이 어떻게 됐겠어요. 북한이 핵무기를 못 갖게 한다는 생각엔 미국이 단호해요. 양보가 없어요.”
 
  —한국의 대통령도 ‘북한의 핵보유는 안 된다’는 원칙을 양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절대 안 되는 거죠. 우리 안보가 깨지고, 일본이 핵무장을 해요. 대통령으로서 모든 걸 각오하고 단호하게 밀어붙였어요. 미국이 북한을 치겠다고 나설 때, 속으로는 ‘이제 김일성이가 굴복을 하겠구나’ 했어요. 그런데 참 북한 사람들이 지독해요. 끝까지 버티는 거야. ‘전쟁하겠다’고 압박은 할 수 있지만, 전쟁이 터지는 걸 내가 놔둘 수는 없잖아요.”
 
마이클 반스 미국 국가정책센터(CNP) 이사. 민주당 의원 출신인 그는 한국전력이 맡긴 재처리 프로젝트의 로비스트로 활약했다.
  —길게 보면 한미 양국의 제재와 압박이 북한을 굴복시킨 것이겠죠.
 
  “김일성, 김정일에게 먹히는 건 제재와 압박이에요.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미국하고 손을 잡고 김정일이를 벼랑 끝으로 밀어야 해요. 그렇게 몰아가야 북한 핵 문제는 해결이 될 거예요.”
 
  —미국이 최종단계에 이르러 ‘북한을 치겠다’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 한미군사동맹은 완벽하게 작동했던 건가요.
 
  “재임 기간 동안 여덟 번인가 아홉 번인가 클린턴 대통령하고 정상회담을 했어요. 클린턴 대통령이 먼저 나를 찾아와서 청와대에서 조깅을 함께 했어요. 김대중씨 때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집사람(손명순 여사)이 힐러리 여사하고 정이 들었을 정도예요. 르윈스키 사건이 났을 때 집사람이 ‘힐러리가 불쌍하다’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김 전 대통령은 당시에 김일성이 주도했던 ‘북핵 1라운드’보다, 김정일이 주도하는 ‘북핵 제2라운드’가 해결하기 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김일성, 김정일에게 통하는 건 제재와 압박”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만주까지 도망을 갔었고, 미국의 공습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요. 황장엽(黃長燁)씨를 나중에 만났더니 ‘그때 김일성이 미국에 어떻게 대처할까, 남북 정상회담을 어떻게 할까 논의하느라 매일 두 번씩 노동당 비서회의를 했다’고 해요. (김일성이) 그렇게 신경을 썼어요. 너무 신경을 쓰다가 건강이 나빠지고 쓰러졌잖아요.”
 
  —김대중 정부는 북한이 핵개발을 재개하고, ‘제네바 핵 합의’를 파기하는데도 금강산관광과 교류협력 사업을 지속했습니다.
 
  “우리는 절대 대화다, 너희가 무슨 나쁜 일을 해도 교류협력을 계속한다, 그러니까 김정일이가 남한을 완전히 무시하는 거예요. 필요에 따라 대화가 안 되면 전쟁도 한다는 걸 북한에 압박해야죠. 강릉에 무장공비가 침투했을 때(1996년 10월) 내가 단호하게 했어요. 북한이 사과를 했어요. 북한은 강한 사람에게만 머리를 숙여요.”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지난 2008년 4월 29일 자 주한 미 대사관 전문에 따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이 북한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말린 것을 후회하며 “그때 미국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더라면 북핵 문제가 해결됐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이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대사와 만나 오찬을 함께 하면서 “클린턴 행정부의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1994년 북한 영변의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원했는데 내가 그걸 말렸다”면서 “돌이켜 보건대 폭격을 허락했으면 모두에게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재인 박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 원자력 과학자들의 실력을 믿고 대외적으로 당당했다”며 “대전엑스포 때 ‘안전하게 내릴 장소가 없다’는 핑계로 헬기를 타고 원자력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고 했다. 그는 “만일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했더라면 북의 핵개발에 대해 당당하게 따졌을 것”이라면서 “재임 기간 중 북한 핵 위기의 와중에 우리의 핵 주권을 찾으려고 애쓴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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