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현대사자료

전두환 정부, 김일성 조기퇴진에 대비한 회의 열어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전두환 정권, 東歐圈 정보 근거로 김일성 조기퇴진 기정사실화
⊙ 1984년 7월부터 10월까지 3개월간 대책 마련… 시나리오별 대북성명까지 작성
⊙ 김일성 생존 시 ‘김정일 포악성’을, 사후엔 ‘6·25 戰犯 김일성’을 부각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4년 5월 16일 김일성은 특별열차 편으로 함경북도 청진(淸津)을 출발, 46일간 소련,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8개국을 순방했다. 우리 정부는 김일성의 순방 목적이 무엇인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간 대부분의 공산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외국 순방을 좋아하지 않았던 김일성이 17년 만에 8개국을 방문한 만큼 배경에 주목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가동할 수 있는 라인을 총동원해 철저한 베일에 가려진 김일성의 행적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동구(東歐)순방 목적이 아들 김정일을 잘 부탁하기 위한 인사외교(人事外交)였던 사실이 드러났다. 건강에 문제가 있던 김일성이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방문한 자리에서 내년(1985년)까지는 김정일에게 주석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현역에서 은퇴, 명예직만 유지할 것이라고 공언했다는 내용을 외무부 정보라인이 입수한 것이다. 비밀해제된 외교부 자료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구성했다.
 
 
  불가리아·루마니아에서 흘러나온 김일성 조기퇴진론
 
  1984년 6월 23일 주일 대사관의 유병우 1등 서기관은 일본 외무성 관계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첩보를 입수했다.
 
  〈①최근 불가리아 정계 내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김일성의 건강은 반드시 양호하지만은 않다고 함. 이미 명예 있는 정권승계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으며 김정일로의 정권 이양 시기가 일반이 추측하는 것보다 상당히 빠르지 않을까 생각됨.
 
  ②불가리아 지브코프 의장(국가원수)은 명년(明年) 중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나 그때 김일성이 주석으로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음.
 
  ③나(일본 외무성 관계자)에게 6월 20일 이런 이야기를 전달한 불가리아 외무성 부장은 소문이라고 말하였으나 이는 단순한 소문이라기보다는 금번 김일성의 소련 및 동구 순방 시기의 건강상태 및 권력이양 시기에 대해 동구 측이 감촉한 바를 상기와 같이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됨.〉
 
  루마니아 쪽에서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정보가 돌았다. 주일 대사관의 김용규 정무과장이 일본 외무성의 다른 관계자로부터 파악한 내용이다.
 
  〈6월 21일 루마니아 외무성 고관은 현지 일본대사관 고위 직원에게 김일성의 금번 소련, 동구 방문은 그가 멀지 않아 은퇴, 김정일에게 뒤를 물려주기 위한 준비의 의미가 있다.〉
 
  이에 최경록(崔慶祿) 주일대사는 두 내용을 취합, 이날(6월 23일) 곧바로 외무부 장관에게 전보를 보냈다. 최 대사가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전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가리아 외무성 고관-김일성의 건강은 반드시 좋다고만은 할 수 없으며 주석직을 물러나 명예적인 지위에 취임할 것이라 함. 그 시기는 연내라고 하는바 지브코프 대통령이 북한 방문을 예정한 1985년에는 장남인 김정일이 주석이 되어 있을 것임.
 
  ○루마니아 외무성 고관-금번 김일성의 소련 동구 순방은 그가 멀지 않아 은퇴, 김정일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준비의 의미가 있음.
 
  *동 사실에 대한 출처 보안을 각별히 유념 바람.〉
 
 
  김정일과 김평일 대결 두려워했던 김일성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일성은 생전 김정일과 둘째 부인 아들인 김평일이 대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김일성이 46일간 순방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온 후(1984년 7월 1일)에도 ‘김일성 조기퇴진’ 정보는 계속 돌았다. 7월 4일 최상섭(崔常燮) 주 인니(印尼·인도네시아) 한국대사도 주 소피아(Sofia·불가리아에 있는 도시) 인니대사로부터 김일성 조기퇴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일성의 건강이 매우 나쁘다. 1~2년 이내에 물러날 것 같다. 또 김일성은 첫째 처의 아들인 김정일과 둘째 처의 아들인 김평일이 대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최 대사는 이날 들은 정보를 정리해 외무부 장관에게 보냈다.
 
  〈◆김일성은 1984년 6월 15~17일간 불가리아를 방문하고 우호협력협정에 서명함. 우호협정 내용은 막스·레닌주의 및 국제 프롤레타리아 이즘 원칙에 따라 우호, 단결, 협력, 학술, 문화, 교육, 통신, 사회생활에 관한 상호보완적 협력강화, 사회주의 단결, 제국주의의 정치공세 및 무력도발 대항, 무기감축, 세계 여러 지역에 비핵지대 설치 등을 위해 양국이 협력함(김일성이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 평화적 민주적 한반도 통일내용이 협정문에 포함).
 
  ◆김일성은 1~2년 이내에 정권을 이양할 것으로 보임. 그 이유로는 김일성의 건강이 매우 나쁘고(걸음이 부자유스러움), 비록 둘째 처(김성애) 아들(김평일)이 어리지만 첫째 처(김정숙) 아들(김정일)과 정권대결을 두려워하기 때문으로 보임. 김은 명예직에서 아들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추측.
 
  ◆김일성 일행은 300명이 넘었으며, 200여 명은 경호원들로 보였음.〉
 
 
  전두환 정부, 김일성 사후대책 논의
 
  김일성의 조기 은퇴 보고가 여러 루트를 통해 들어오고, 북한도 권력이양이 임박해 있는 듯한 분위기(《노동신문》은 김일성의 동구권 방문기간 중인 6월 20일 김정일의 노동당에 대한 지도를 대대적으로 찬양, 김정일의 지도가 정치 건설 경제 문화 군사 외교 등 국정분야에 미치고 있다고 지적함과 동시에 김정일의 이른바 사상 이론을 당의 혁명사상으로 격상. 이는 그간 계속돼 온 김정일 찬양 캠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담성을 보인 내용이었음)를 조성하자 7월 11일 박세직(朴世直) 안기부 제2차장은 ‘김일성 사후대책 관련 실무국장회의를 열었다. 당시 회의에는 박 차장을 비롯하여 홍순영(洪淳瑛) 청와대 정무비서관, 이연택(李衍澤) 총리실 조정관, 권동만(權東萬) 외무부 정보문화국장, 임사빈(任仕彬) 내무부 민방위국장, 홍세기(洪世基) 내무부 치안본부 제2부장, 정탁(鄭濯) 국방부 정훈국장, 원용호(元容虎) 국방부 정보본부차장, 이경식(李庚植) 문공부 홍보조정실장, 김찬재(金贊宰) 문교부 교육정책실장, 박찬세(朴贊世) 통일원 교육홍보실장, 송한호(宋漢虎) 통일원 남북대화사무국장, 안기부 3, 5, 6국장이 참석했다.
 
  회의는 14시30분부터 17시30분까지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회의에서는 권력승계 비판·대남도발 대비·남북교류 검토 등 다양한 내용의 이야기가 오갔다. 외무부 외교문서를 토대로 당시 회의를 재구성했다.
 
  〈박세직 안기부 제2차장〉-“김일성의 이번 동구 순방은 김일성시대를 종식하는 고별 순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노동신문》 논설에도 김일성이 평생 신었던 혁명의 장화를 벗겨 드려야 한다는 것이 김정일의 의지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김일성 동구 국가 방문 기간에 총 17편의 사설, 논설을 통해 김정일의 치적 및 지시 관철을 선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징후로 봤을 때 조기에 권력이양이 이뤄질 것으로 보입니다. 김일성이 퇴진하면 한반도 정세 변동이 불가합니다. 저희 쪽에서 분석한 바로는 우선 신진세대(김정일 세력)와 소외세력(김일성 세력) 간 갈등이 생길 것으로 예상합니다. 또 군사 강경노선을 지속할 것이며 강력한 주민통제 사업과 주민복지의식 과시를 병행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정일이 기만적 위장 평화공세를 펼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1988년 한미 대통령 교체기, 1988년 올림픽 개최 및 북한군 훈련 양상 등의 면에서 1988년 4월이 가장 취약합니다. 이에 우리의 대안은 첫째 우리는 우선 김정일에 대한 도전세력을 선동, 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대한 회의를 유도해 ‘김정일 체제’ 북한 폐쇄주의를 점진 파괴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변 4강과 전쟁억지를 위한 외교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소련과는 친소 유동 정책, 중공과는 현 수준 대북 영향력 유지를 목표로 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미국과는 북한의 대외개방 유도를 둘러싼 이견을 조정해야 하며,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역할 증대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세 번째는 친북 교포 조직을 와해하고, 남한의 국력이 절대적 우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국방정보본부 자료를 보면 남한의 최대군사비 지출능력이 84년 400억 불인데 반해 북한은 75억 불밖에 안 됩니다. 4년 뒤인 88년에는 540억 불(남한) 대 90억 불(북한)로 그 격차가 더 벌어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일성이 병고로 퇴진할 시에는 김정일로의 순조로운 이행이 가능하겠지만, 테러 등의 사망 시에는 북한 내에서도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인 만큼 위기관리 기구를 설치할 방침입니다.”
 
  안기부의 김일성 시대 종식 이후와 우리의 대응방안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홍순영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입을 열었다.
 
  〈홍순영 청와대 정무비서관〉-“김일성이 퇴진하면 비상국무회의를 열고 대통령 각하의 특별담화(시국선언문)를 발표할 것입니다. 저도 안기부 생각과 비슷한데 김일성이 병고로 퇴진할 시에는 김정일이 정권강화 조치에 주력할 가능성이 커 도발을 자제할 것 같은데, 사망 시에는 평화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화전양면 전법을 사용하여 도발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송한호 통일원 남북대화사무국장이 홍 비서관의 말을 받았다.
 
  〈송한호 통일원 남북대화사무국장〉 -“정부 차원에서는 평화적 남북관계 개설, 평화추구 정책 불변을 골자로 한 온건론적 입장의 논평, 성명을 낼 것입니다. 이 논평, 성명에는 우리의 안보태세를 신뢰해도 된다는 대국민 홍보도 포함할 것입니다. 다만 언론매체를 통해서는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이 저지른 6·25 도발 등 역사적 죄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성 기사가 나가게 할 것입니다.”
 
 
  “김일성, 민족의 반역자인 것 홍보해야”
 

  이경식 문공부 홍보조정실장의 의견은 송한호 통일원 국장과 달랐다. 온건론적인 입장표명보다는 김정일의 잔인, 포악성을 폭로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경식 문공부 홍보조정실장〉-“김일성의 죽음은 건국 이후 최대의 홍보 기회입니다. 홍보를 잘하면 범국민적 승공(勝共)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남도발 폭로 규탄(북한국민탄압 등 반민족적 행위 포함)을 해야 하며 북한 공산집단의 본질은 불변한 만큼 김정일의 잔인, 포악성을 알려야 합니다. 김일성이 병고로 퇴진할 시에는 평화적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평화공세를 전개할 가능성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전략적으로 역이용해야 합니다. 공세적인 홍보를 펼 것입니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경우 김일성이 민족의 반역자였다는 사실을 홍보할 것입니다. 모택동 사망 시 자유중국의 반응을 보면 처음에는 침묵했지만, 나중에는 통일의 방해자, 반민족주의자라는 평이 나왔습니다.”
 
  권동만 외무부 정보문화국장도 비슷한 견해를 내놨다.
 
  〈권동만 외무부 정보문화국장〉-“권력승계 시 세습왕조를 규탄하는 대북성명을 발표해야 합니다. ▲김일성의 역사조작을 통한 가계 우상화 ▲공산주의 사회 최초의 세습왕조 구축 ▲김정일의 포악성을 집중폭로 및 인권유린 등을 대북성명에 포함해야 합니다. 외무부는 북한의 대남도발을 막기 위해 주한미군에 경계태세 강화를 요청하고, 주요 우방 주재공관(미국·일본·영국·프랑스·독일·핀란드·호주 등)에 북괴권력 내부동향 파악을 지시할 방침입니다.”
 
  홍세기 내무부 치안본부 제2부장은 “유언비어 막는 대국민 계도와 주민신고 체제를 강화하는 등의 후방방위에 신경 쓰겠다”며 이같이 이야기했다.
 
  〈홍세기 내무부 치안본부 제2부장〉 -“김일성 퇴진으로 권력을 잡은 김정일은 권위 과시를 위한 모험을 자행할 가능성이 큽니다. 소련으로부터 공격형 무기 도입을 하고, 88올림픽을 방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경우 대공활동을 강화해야 합니다. 대공 위해 요소를 특별관리하고, 해외여행자에 대한 보안교육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신고체제 강화는 물론 불순분자 우회침투를 대비하기 위해 경찰 작전능력을 제고해야 합니다. 동시에 내륙 작전훈련을 강화, 동서 어로를 보호하고 피랍을 방지해야 합니다. 이 밖에 요인경호, 폭발물 유출방지, 방호시설물 설치 등 주요시설 경계를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원용호 국방부 정보본부차장은 “부분전, 전면전 모두 대비할 것이며, 80년대 대남 경쟁에서 완전히 패한 김정일이 86년 아시안, 88년 서울올림픽 등 우리의 국제행사를 파탄시키고자 충격적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는 만큼 이를 위한 대처방안을 확실히 마련할 것”이라고 했다.
 
  정탁 국방부 정훈국장은 군인 교육은 정부방침에 따를 것이며 전투 대세 방비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했다.
 
 
  “랑군사건 들춰내면 불리할 것”
 
김일성이 생전 김정일과 함께 서해갑문 건설현장을 지도하는 모습.
  이날 회의에서는 ‘랑군’ 사건이 남북회담의 장애요소가 될 것이란 이야기도 오갔다. 랑군 사건은 1983년 버마(現 미얀마)의 수도 랑군(現 양곤)에서 일어난 아웅산 테러 사건을 뜻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 대통령을 노린 북한의 테러였다. 당시 전 대통령은 5분 정도 행사장에 늦게 도착해 목숨을 건졌으나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안기부 6국장은 “랑군 문제 처리가 난제”라며 “전진적이고 의연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홍순영 청와대 정무비서관은 “남북회담에 장애요소가 될 것 같다. 들춰내면 불리하게 작용할 듯하다”고 했다. 권동만 외무부 정보문화국장은 “랑군 사건 1주기(1984년 10월 9일) 때 정부 대변인의 대북성명을 통한 대화 재개를 제의하겠지만, 북괴 측의 공식 시인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며 “김일성이 84년 5월 시아누크 방북 시 자신은 랑군 사건을 인지하지 못하였다고 언급함으로써 랑군 사건의 책임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만큼 공식 시인을 거듭 주장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아국의 대화 자세에 부정적 인식을 심을 수 있다”고 했다.
 
 
  김일성 사후대책 보고서
 
  외무부는 이날 회의에서 나온 내용을 취합, A4 용지 8장 분량의 〈김일성 사후 대책〉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서 내용 중 주요 부분만 발췌해 소개한다.
 
  〈김일성 사후 대책
 
  ①대(對)북한 경계태세 강화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비한 아국군의 경계태세 강화 및 주한미군 경계태세 강화 요청.
  -미·일 주요 우방국들과의 긴밀한 안보협조 체제 유지(한·미 상호방위조약 이행 재확인, 미·일 정부 및 의회 지도층과의 접촉 교섭).
  -미·일로 하여금 소련 및 중공이 북한에 대해 전쟁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교섭.
 
  ②김정일 내부 권력변동 추이 관찰 및 신중 대처
  -전 재외공관을 통한 대북한 정보수집 활동 강화.
  -중립국에서의 북한 공관원 활동 파악.
  -평양 상주공관을 가진 중립국과 군사정전위 중립국 감시위원단에 북한 내부상황 파악 요청.
 
  ③김정일 정권의 비(非)정통성에 대한 은밀한 홍보활동 전개
  -간접적인 방법으로 서방권은 물론 공산권 사회에서도 김정일 권력세습을 인정치 않도록 하는 분위기 조성.
  -김정일은 김일성 왕조의 연장선상에서 김일성의 권력을 개인적으로 세습하여 최고권력을 장악한 것이며 북한 대중의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님을 강조.
  -김정일 정권은 반민족적, 반민주적 정권이라는 점에서 김일성의 경우와 전혀 다를 바 없음을 설명.
  -서방국가는 물론 비동맹 및 중립국 국가들의 정부관계자들에게 상기 내용의 발언 유도.
  -주요 외신(AP·AFT·UPI·REUTER 등)의 김정일 정권 비난 기사 게재 노력.
 
  ④대(對)동구권 관계개선 노력 강화
  -실질적 대동구권 관계개선 적극 추진(직접교역, 국내투자 허용 및 현지상사 설립, 동구권 상사 국내 진출 허용)〉
 
 
  시나리오별 대북성명
 
1985년 11월 13일 새벽 전두환 대통령이 중서부전선에 있는 육군부대를 예고없이 찾아 부대장으로부터 최근 북한군의 동향과 이에 따른 대비태세를 보고받고 장병들을 격려하는 모습.
  보고서에는 시나리오별 대북성명도 담겼다. 김정일 권력승계가 이뤄질 시 문공부 장관이 발표할 대북성명을 김일성 생존 시와 사망 시 두 경우로 나눠 마련한 것이다.
 
  김일성 생존 시 성명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 정권은 해방 후 지금까지 김일성의 신격화 및 김일성 부모 우상화 작업 등을 통하여 김일성 일가의 가계를 조작함으로써 신성한 민족의 항일투쟁사 등의 민족역사를 날조해 왔다. 더구나 북한은 최근 김정일 권력승계로 공산주의 사회에서조차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습 왕조를 구축하였는바, 이는 북한 백성의 뜻을 외면한 반민족적, 비합법적 행위이다. 김정일은 지난 83년 10월에 있었던 랑군 테러 사건 등의 무자비한 대남도발을 주모해 왔던 인물로서 알려졌는바, 앞으로도 그가 그와 같이 무모한 도발을 해 온다면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될 것이며 우리도 또한 그의 반민족적인 행위를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을 경고한다. 김정일 정권은 하루빨리 민족 앞에 사죄하고 민주 한국을 건설하는 데 동참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김일성 사후 시 성명 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염원인 남북한 통일을 외면하고 한반도 분단을 획책하여 이를 영구화시켰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야기시켰던 민족의 배반자 및 전쟁범죄자로서 김일성을 규탄한다. 조국강토의 절반을 땀 흘려 가꾸어 오늘의 성장을 이룩하면서 우리는 북쪽의 동포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해방 후 지금까지 2000만 북한 동포들에 대해 무자비한 집단탄압을 해 온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그릇된 자세를 하루속히 시정할 것을 촉구한다. 한반도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들의 인도적 고통을 해소하고 민족을 전쟁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 통일이 하루빨리 달성되어야 하는바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북한은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민족통일을 위한 대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전두환, 對美 유대 희생으로 하는 韓蘇 관계개선 금지 명령
 
  두 성명은 비난 대상 및 내용, 강도(强度) 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우선 김일성 생존 시 성명의 공격 대상은 사실상 김정일이다. 그리고 2대 세습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거론하지 않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던 랑군 문제와 관련한 이야기도 나온다. 반면 김일성 사망 시 타깃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이 6·25 전범(戰犯), 독재자, 북한 주민을 도탄에 빠트린 장본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비난의 강도는 김일성 생존 시보다 덜했다. 전두환 정부의 이런 결정은 김정일이 김일성 사망 시 위기상황 조성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외무부는 〈김일성 사후 대책〉 보고서와는 별도로 1984년 8월 〈김일성 퇴진에 대비〉라는 제목의 문건도 마련했다.
 
  ◇북한 공관원 접촉, 회유 활동 강화 ◇전략문제연구소 및 저명 국제정치학자 또는 북한 문제 접촉, 김정일 후계체제 향방 추이 중점 탐색 ◇김일성 사망 시 김정일 대권승계 행사 관련 동향 파악, 생존 시에는 권력이양 동향 파악 ◇김정일 신정권에 대한 각국 반응 조사 ◇김일성 퇴진 직후 1개월간 김일성 집중 규탄 후 1~2개월간 대북비방 전면 금지 ◇김일성 퇴진 2~3개월 후 정부 차원의 대북성명을 통해 남북 대화 재개 강력 요청 등의 내용이 눈에 띄었다.
 
  전 대통령은 외무부의 〈김일성 퇴진에 대비〉 문건을 검토하고 각계 정부 부처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했다.
 
  〈○안보정세 보고는 청취에만 그치지 말고 이를 참고해 각 부처는 대비책을 작성, 시행토록 하라.
 
  ○본인은 김정일이 실질적 통치자이며, 김일성은 형식적 통치자라고 본다. 김정일 반대세력은 김일성 추종세력으로 생각하라.
 
  ○대륙세력은 침략적이나, 미국은 영구한 우방이 될 수 있다. 미국을 우리 안보의 주축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정부 각 부처가 총동원하여 대미 유대 강화에 노력하라.
 
  ○일본은 한일 관계가 그들에게 불리하면 북한을 카드로 이용하는 기회주의적 정책을 써 왔다. 때문에 우리가 일본을 진정한 우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도 안전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 이것은 본인의 가장 중요한 방일 목적이기도 했다.
 
  ○대미 유대를 희생으로 하는 한소 관계 개선은 절대 금물이다. 소련을 자극할 필요는 없지만,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다.〉
 
 
  동구권 정보로 김일성 조기퇴진설 기정사실화했지만…
 
1994년 7월 10일 《조선일보》에 실린 김일성 사망 기사.
  정부는 김일성이 방문했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외무성 고위 관리가 일본 외무성 고위직에 말한 정보를 근거로 김일성의 조기퇴진을 기정사실화하고, 1984년 6월 말부터 9월 말까지 3개월간 대비책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했다. 1984년 10월 4일 미국 국무부 관계자가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에게 “최근 일련의 동향으로 볼 때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했다는 일반적 평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며 “외교 문제에 관해서는 김일성이 강력한 권한을 계속 행사하겠다는 조짐도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미국 국무부 관계자는 그 근거로 김정일이 주 평양 소련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국제 문제를 취급하지 않은 점과 이시바시 마사시 일본 사회당 위원장이 김정일을 면담하지 못한 것을 꼽았다.
 
  이후 잠잠해졌던 김일성 조기 퇴임설은 1년 뒤인 1986년 11월 17일 ‘김일성 사망설’이 돌면서 다시금 불거졌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김일성 사망설’이 해프닝으로 끝이 났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1994년까지 생존했고, 사망 전까지 김정일로의 공식적 정권이양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일성 사망 직후 정권을 이어받은 김정일은 죽을 때까지(2011년 12월 17일) 독재를 했다. 김정일로부터 독재권력을 세습한 아들 김정은도 현재 할아버지, 아버지의 길을 걷고 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5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