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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발굴

일본 국회 회의록에 나타난 독도침탈 야욕

일본 ‘1952년 독도 폭격 사건’ 기획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johh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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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프란시스코 조약, 일본 주장 빌미 제공
⊙ 일본 ‘독도 폭격 사건’으로 반전 노려
⊙ 일본 미군폭격 훈련구역 지정 원해
⊙ 상황 불리해지자, 日 의원 “미국의 계략”이라고 주장
  한국전쟁(1950년6월~1953년7월)으로 한반도가 일대 혼란을 겪고 있던 시절, 독도 영유권(領有權)을 노린 일본의 노골적 음모(陰謀)가 극심했다.
 
  1952년 7월 26일 일본 관보(官報)에 고시(告示)된 외무성 고시 제34호에 이런 내용이 실렸다. 독도를 미(美) 공군의 폭격 훈련지로 제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일본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안전보장조약 제3조에 기초한 행정협정 제2조에 의해 재일(在日) 합중국 군에 제공하는 시설 및 구역을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소화27년(1952년) 7월 26일
 
  외무대신 오카자키 가쓰오(岡崎勝男)
 
  9. 죽도(독도의 일본측 표현) 폭격훈련 구역
  * 구역: 북위 37도15분 동경131도52분의 지점으로부터 직경 10마일 원내
  * 연습시간: 매일 24시간〉
 
  당시 일본은 12곳을 미군 훈련을 위한 구역으로 설정했는데, 그중 하나가 독도였다. 남의 나라 땅을 훈련 구역으로 지정한 어이없는 고시였지만 당시 한국은 관보 고시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과연 일본의 관보 고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전쟁의 혼란기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었던 독도를 둘러싼 외교전쟁을 정리하기 위해, 기자는 동북아역사재단 홍성근 독도연구소장에게 관련 자료와 자문을 요청했다. 1951~1953년 사이 일본 중의원(衆議院) 회의록, 한일 사이에 오고갔던 외교 구술서(口述書·note verbale), 비밀해제된 미국 외교전문, 주요 일간지 기사를 바탕으로 1952년 독도 폭격 사건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일본 주장 빌미 제공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he Peace Treaty with Japan·대일강화조약) 체결(締結)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빌미가 됐다. 해당 조약은 일본과 연합국의 전쟁을 종료하고,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독도와 관련해 논란이 된 것은 강화조약 제2조의 해석이었다.
 
  조약 체결 두 달 전(1951년 7월 3일)에 한국에 배포된 초안에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그리고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초안에 ‘독도’가 빠져 있음을 확인한 당시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는 7월 19일 강화조약 체결의 주요 국가인 미국 측에 “대일강화조약 제2조의 규정안을 수정하여,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에 독도를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우리(한국) 정부는 제2조 a항 ‘포기한다’(renounce)라는 단어를 ‘한국과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 및 파랑도를 포함한 일본의 한국 합병 이전에 한국의 일부였던 도서들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그리고 청구권을 1945년 8월 9일자로 포기했다는 것을 확인한다’로 대체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미국 측은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답장을 우리 측에 보냈다. 1951년 8월 10일 딘 러스크(Dean Rusk) 국무차관보 명의로 한국 측에 보낸 답신의 내용은 이렇다.
 
  〈한국의 요청과 관련하여(중략) 미국 정부는 유감스럽게도 제안된 수정안에 동의할 수 없다.(중략) 독도라는 섬, 달리 말하면 다케시마 또는 리앙쿠르 록스라고도 알려져 있는 이 섬과 관련하여, 통상적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이 바위섬은 우리의 정보에 의하면 결코 한국의 일부로 다루어진 적이 없고, 약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 지청의 관할하에 있었다. 한국은 이 섬에 대해 이전에 전혀 주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측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일본 측은 평화조약이라 지칭)에 독도가 빠진 것에 상당히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1951년 10월 22일 일본 중의원 ‘평화조약 및 일미안전보장조약 특별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독도 영유권에 대한 입장을 묻는 의원의 질문에 “평화조약에서 죽도는 일본 영토라는 점이 분명히 확인된 것으로 생각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 독도 문제 불개입으로 입장 선회
 
  아마도, 당시 미국 측이 한국의 주장을 받아들였다면, 그 이후 한국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쟁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조약 서명으로 일본이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대일강화조약에서 독도가 제외되었고,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이다.
 
  〈1.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 규정은 예시적 규정에 불과하다. 한국의 섬이 3000개가 있어 모두 표기하기는 어렵다.
 
  2.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간주된다.
 
  3. 우리는 대일강화조약의 당사자가 아니어서, 구속을 받지 않는다.〉
 
  독도에 대한 미국 측의 입장은 1951년 8월 러스크 서한 이후 일시적으로 일본 측 입장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러스크 서한은 한국 정부에만 전달되었을 뿐, 일본 정부에는 전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은 관련 내용(독도는 일본 영토)을 공개하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공개하지 않았다.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모두를 잃지 않겠다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 이후 미국은 독도 문제에 대해 불개입(不介入)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최근 1952~1953년 사이의 미국 측 외교전문을 검토한 홍성근 독도연구소장은 “1952년 11월 26일 자로 미국 국무부가 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낸 전문에 따르면, ‘미국은 독도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불개입 입장을 취하고 있다”며 “한편으로는 한국에 우호적인 듯하다가,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평화선 선언으로 독도는 한국 땅
 
미군 측으로부터 독도에서 포격 연습을 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은 사실을 보도한, 1953년 3월 1일 《조선일보》.
  당시 한국은 전쟁 중이었다. 이런 혼란으로 독도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선포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일본으로서는 허를 찔린 것이다.
 
  1952년 1월 30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당시 일본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사사키 (佐々木盛雄) 의원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의 선언에 대해 질문 드리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국방상의 필요에 따라, 한국 영해 외 공해의 광대한 수역에 국가 주권을 행사한다는 취지의 선언을 했습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쪽으로는 시마네현의 죽도로부터 서쪽은 황해의 중앙, 남쪽으로는 맥아더 라인보다 한층 일본에 가까운 수역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경계선을 만들어, 이 수역 내에서 선박의 자유 항해는 인정하지만, 자원 보호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외무성은 담화를 발표해, 해당 선언(평화선)은 해양자유의 원칙을 파괴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국제 어업협력의 기본개념과도 서로 맞지 않는 것이며, 국제사회의 통념으로서도 인정할 수 없다는 성명을 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외무당국은 다시 선언을 내어, 이승만 선언은 항구적인 것으로 한국의 국가주권이 다른 나라에 의해 침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며, 우리(일본) 외무성의 반론에 대해 오히려 일본의 침략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선언을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행한다면, 같은 입장에서 일본도 동일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일본도 이러한 선언을 할 권리가 있다는 점과 더 나아가 외무성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해결하려 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 이시하라(石原幹市郞) 외무정무 차관
  이승만 선언에 대해 우리 측에서 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정부 성명을 통해 발표했습니다만, 자세한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한일협정에서 어업 부문을 논의할 때,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절충하고 협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죽도의 영토 문제에 대해 아무리 해도 의견이 맞지 않을 경우, 상대방도 이쪽도 충분한 반성과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지만, 이른바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규정에 따라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성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평화조약의 규정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일본은 지금까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독도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독도 영유권 주장의 주요 근거로 들고 있다.
 
 
  일본 ‘독도 폭격 사건’으로 반전 노려
 
  상황이 수세에 밀리자, 일본은 1952년 이른바 ‘주일 미군 독도 폭격연습지 지정’ 절차를 통해 상황 반전을 노렸다. 1952년 독도 폭격연습지 사건이란, 그해 9월 15일 오전 11시경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의 폭격기가 독도 상공에 출현하여 독도를 2차례나 선회한 뒤 4개의 폭탄을 투하하고 남쪽으로 날아간 사건을 말한다. 폭격은 9월 22일, 24일 두 차례 계속됐다. 주요 언론은 당시 상황을 보도했다.
 
  1952년 9월 25일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 상황은 이렇다.
 
  〈방금 울릉도에 머물고 있는 산악회 학술조사단은 지난 15일 소속 불명의 비행기가 해상을 폭격하기 때문에 독도 상륙을 중지하고 22일 제2차로 독도로 향해서 출발하여 상오(上午) 11시경 독도 2키로 해상에 접근하였으나 돌연 4대의 비행기가 나타나 해상에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연습을 하기 때문에 이날도 독도에 상륙을 못하고 0시45분경 울릉도에 귀환하였다고 한다. 동조사단장 홍종인씨가 정부에 타전한 보고에 의하면, 당일 확인된 비행기의 정체는 연녹색의 쌍발기로서 우익에 두개의 흰줄이 그어져 있었으며 날개 끝에 녹백색의 표식이 붙어 있는데 처음에는 약 천 야드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였으나 점점 고도를 높이고 나중에는 두 대가 울릉도 방향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산악회 학술조사단은 독도상륙을 연기하여 24일 상륙키로 하였다 한다.〉
 
  이미 일본은 1952년 7월 26일 일본 관보를 통해 독도를, 미군 폭격연습지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미국 공군이 폭격연습을 진행한 것이다. 일본 측은 미군의 폭격훈련 과정에서 행정절차 협의를 자국(自國)과 했다는 점을 들어, 미국에 의해 독도가 자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인정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의 주장
 
  일본은 약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당 사건을 독도 영유권 주장의 중요한 근거로 들고 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미군 폭격훈련 구역으로서의 독도’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1. 우리나라(일본)가 아직까지 점령하에 있었던 1951년 7월 연합국총사령부는 연합국총사령부 각서(SCAPIN) 제2160호를 가지고 죽도를 미군의 폭격훈련 구역으로서 지정하였습니다.
 
  2.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표 직후인 1952년 7월, 미군이 이어서 죽도를 훈련구역으로서 사용할 것을 희망한 것을 받아, 미일행정협정에 기초하여 동 협정의 실시에 관한 미일간 협의기관으로서 설립된 합동위원회는 주일미군이 사용하는 폭격훈련 구역의 하나로서 죽도를 지정함과 동시에 외무성은 그 점을 고시하였습니다.
 
  3. 그러나, 죽도 주변 해역에 있어서 강치 포획, 전복 및 미역의 채취를 바라는 차원에서의 강한 요청이 있은 점, 또 미군도 같은 해 겨울부터 죽도를 폭격훈련 구역으로 사용하는 것을 중지하였다는 점에서, 1953년 3월의 합동위원회에 있어서 이 섬을 폭격훈련 구역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4. 미일행정협정에 의하면, 합동위원회는 ‘일본 국내의 시설 또는 구역을 결정하는 협의기관으로서 임무를 다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죽도가 합동위원회에서 협의되고, 나아가 주일미군이 사용하는 구역으로 결정했다는 것을 바꾸어 말하면, 죽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본의 주장을 살펴보면, 독도 폭격 연습지 지정 및 해제를 독도 영유권 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폭격연습지 지정 원해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미군의 훈련연습지로 독도를 쓰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2년 5월 23일 중의원 외무위원회 녹취록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야마모토(山本 利壽) 의원
  이번 일본의 주둔군 연습지 지정에 있어 죽도 주변이 연습지로 지정된다면, 이 영토권을 일본의 것으로 확인받기 쉽다는 생각에서 외무성이 연습지 지정을 바라고 계신다거나 하는 점이 있는지, 그 점에 대해 질문 드리겠습니다.
 
  *이시하라(石原幹市郞) 외무정무 차관
  대체로 그런 발상에서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습니다.〉
 
  결국 연습지 지정으로 독도 영유권을 확보하자는 것이 일본 측의 의도였다.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알 수 있는 다른 근거도 있다. 미국의 폭격연습은 공교롭게도 우리 측 학술조사단의 독도 상륙 시점에 맞춰서 이뤄졌다. 한국 학술조사단의 독도 상륙을 방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군 훈련 일정을 조정했다는 의혹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으로서 당황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미군이 한국 측의 항의를 받고, 향후 폭격연습을 하지 않겠다고 ‘한국 측에만’ 통보한 것이다. 만일 미군이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일본 측과 상의를 했어야 했으나 일본 측에는 이와 관련 일체의 상의가 없었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1953년 3월 1일 《조선일보》 기사의 내용은 이러하다.
 
  〈보장된 독도 근역의 어로, 미군 당국서 불폭격 통고(通告)
 
  독도는 8·15 이래 그 귀속 문제로서 한·일간의 많이 논의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격연습으로 어민들의 어로작업에 적지 않은 불안을 준 바 있는데 27일 국방부 당국에서 반포한 바에 의하면 독도는 앞서 우리 정부가 유엔군사령관과 그 귀속 문제에 있어 합의를 보았으므로 앞으로는 독도 부근에서의 폭격연습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웨어랜드 미 극동공군사령관의 정식 통고에 의하여 보장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오랫동안 폭격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아 오던 많은 어민들이 앞으로는 안심하고 어로작업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이 밝혀진 것이다.〉
 
 
  일본 의원, “미국의 계략”
 
  한국은 폭격 사건 직후에 상황파악을 마치고, 1952년 11월 주한 미국대사관에 폭격 재발 방지를 요청했다. 미국은 우리 측의 요구를 수용해 그해 12월 4일 더 이상 폭격연습을 하지 않겠다고 한국에만 알려왔다. 일본은 미국이 한국에 이러한 통보를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1953년 한국 국방부가 관련 내용을 언론에 공개한 이후에야 사실을 파악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미국이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인정해 줄 것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한국 영토라고 손들어 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1953년 11월 4일 중의원 녹취록을 보면, 일본의 난처한 상황을 알 수 있다. 특히 “미국이 아시아인들이 서로 싸우게 하려는 계략”이라고 주장하는 의원도 있었다.
 
  〈*가와카미(川上貫一) 의원
  저는 애매한 상태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훈련지 지정·제외 문제는 죽도가 미군의 훈련지로 지정된 것에 대해 한국이 항의했고, 그 와중에 한국 어민이 폭격 때문에 죽었고, 이런 사태까지 발생하자 한국은 미국 당국에 더 거세게 항의했기 때문에 미국 공군사령관은 일본의 (훈련)리스트에 들어가 있는 죽도를 훈련지에서 제외한 후에 이 사실을 한국에 통고한 것입니다.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 볼 때 확실히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도대체 미국의 의중(意中)은 어떤 것일까요. 이승만은 미국의 이런 태도를 보며, 죽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것을 미국 측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폭격에 대한 항의가 있었기 때문에 제외했다고 하지만 (죽도가)일본의 영토라면 일본 영토에 한국이 제멋대로 들어와서 폭격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항의를 받고 죽도를 리스트에서 제외한 것은 미국이 죽도를 한국의 영토라고 생각했다는 해석이 성립하는 것이죠. 이것은 완전히 미국이 아시아인들이 서로 싸우게 하려는 계략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애써 의미를 축소해석한 일본
 
  그렇다면 일련의 상황에 대한 일본의 입장은 무엇인가. 일본 정부는 ‘한국의 항의로 폭격지 훈련이 중단됐다’는 기본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의원의 추궁에도, 한국의 항의로 독도가 훈련구역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다.
 
  〈*가와카미(川上貫一) 의원
  한국의 항의가 있었기 때문에 훈련지에서 제외되었던 것이죠. 한국으로부터 항의가 있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한국으로부터 항의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죽도를 훈련지에서 제외한 것 아닙니까?
 
  *고다키(小瀧彬) 정부위원
  그렇지 않습니다. 미군은 해군 훈련을 거기서 더 이상 하지 않기 때문에 훈련지에서 제외하겠다고 얘기를 해 온 것입니다.〉
 
  당시 일본 역시 미국 측에 ‘왜 일본에는 관련 통보를 하지 않았는지’ 문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녹취록을 보면, 미국의 애매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같은 날 중의원 녹취록을 보면, 일본의 대응을 알 수 있다.
 
  〈*가와카미(川上貫一) 의원
  죽도가 미군의 훈련지로 일본이 제공한 구역 중의 하나로 추가되었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한국이 항의를 했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이 항의 때문인지 미국은 이곳을 리스트에서 제외하였고 게다가 이 제외 사실을 미국 당국이 한국에 통고했다고 합니다. 일본 정부는 미국 당국에 물어보니 한국에 통고했다는 답변이 왔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어째서 한국에 먼저 통고해야 하는 것인지요. 또 (미국은)왜 리스트에서 제외했을까요. 제가 이런 것을 묻는 이유는 미국이 죽도가 어느 쪽의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분명히 밝힌 것이 아닌지, 또 이런 의견을 명시한 문서를 남기지는 않았을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고다키(小瀧彬) 정부위원
  죽도가 어째서 (훈련구역에서)제외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가와카미 의원이 정부(일본)에서 미국 당국에 확인하여 발표한 사항인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 측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이상하게 여겨 미국 사령부에 문의한 결과, 그런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측에 죽도를 훈련지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알려 왔습니다.〉
 
  미국은 한국 측의 항의를 받고 더 이상 훈련을 하지 않겠다고 확답을 했다. 그러나 일본 측의 문의에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미군 입장에서는 독도 영유권 문제를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우선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주한 미군과 주일 미군의 구분도 크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의 적극적인 외교전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독도 폭격지 사건 이후 한국 외교관이 미국 관리를 만나 독도 등 영유권 문제에 대해 설명하며, 바로 그날 저녁 일본 외교관이 해당 미국 관리를 만나 독도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설명하는 일이 발생했다. 자연스럽게 미국은 중립적 태도가 되었다.
 
 
  〈일본영역참고도〉 한국 독도 영토 확인
 
독도 폭격 상황을 보도한, 1952년 9월 25일 《조선일보》.
  최근 독도 관련 학계의 관심을 끈 자료 발굴 가운데, 〈일본영역참고도(日本領域參考圖)〉가 있다. 해당 지도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조인 후 일본 정부가 일본 국회에 제출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비준요청서에 첨부되었다. 조약이 발효되는데, 일본의 영토가 이러하니 비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영역참고도〉를 보면,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 일본 측은 이러한 증거자료에 대해 미군 통치 시절 일본을 통제하기 위해 설정된 맥아더라인을 혼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53년 11월 4일 중의원 녹취록을 보면, 일본 의원으로부터 “〈일본영역참고도〉에 죽도가 없다”는 항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수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 역시,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묵시적으로 승인했다는 결론이 가능한 대목이다. 해당 의원의 항의 내용은 이렇다.
 
  〈*가와카미(川上貫一) 의원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비준할 때 국회에 제출된 부속지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부속지도를 봐도 죽도는 분명히 제외되어 있습니다. 다른 라인이 그어져 있습니다. 맥아더라인이 아닙니다. 별도의 선이 붙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정부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일본 측의 자료를 통해 분석해 보면, 일본 주장의 허점이 보인다. 일본의 중의원 회의록 등을 살펴보면 일본 측의 주장이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1950년대의 다양한 문건이 발굴되고 있다. 자료가 발굴되면 될수록 일본 측의 논리는 힘을 잃고 있다.
 
  현재도 일본은 워싱턴을 중심으로 독도 영유권과 일본 과거사 문제에 대해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한 로비를 강화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사 문제, 한국·중국과의 영유권 문제, 군비확장 등을 직접 해결하려 하지 않고, 미국을 끌어들여 해결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미국은 초반에는 한국의 영토로 간주했다가, 다시 일본 측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했으나, 그 후 불개입으로 선회했다. 나아가 설령 미국이 일본에 유리한 입장을 표명한다고 해서, 한국이 독도의 정당한 영유권을 가지고 있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국의 지지를 얻어 관련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독도 영유권을 노리는 일본은 자국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홍보에 나서고 있다. 차분하게 사실에 근거한 연구와 홍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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