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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발굴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 가능성 무시하고 北進한 이유 밝혀지다!

맥아더, 중공군 끌어들이려고 트루먼에 허위 보고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글 : 김영남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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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 정보기관, 맥아더-스페인 대사 대화록 감청, 擴戰 꾀하는 맥아더의 본심 파악해 트루먼에게
    보고, 해임
⊙ 丁一權, “맥아더는 이승만과 교감하에 중공군 개입 확신하고도 트루먼에게 이를 부인”
⊙ 폴 니츠, “맥아더의 교신 감청 자료에 의해 그의 진정한 목표는 중국으로 전쟁 확대임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과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元帥)는 전략가로서 그의 명성에 금이 가는 실수들을 되풀이했다. 북진(北進)하는 미군의 지휘권을 8군(서부전선)과 10군단(동부전선)으로 나누었고, 양자 간에 공간이 발생하도록 해 중공군이 그 빈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다.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무시했고, 중공군이 개입한 후에는 30만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병력을 1만6500명에 불과하다고 과소평가했다. 1950년 10월 25일 이후 중공군이 출현해 교전을 벌였음에도, 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라는 이름으로 유엔군을 계속 북진하도록 했다가 11월 28일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해하던 맥아더는 후퇴를 거듭하면서, 한때 한반도 철수 가능성까지 내비치는 등 패배주의적 태도를 취한다(《월간조선》 7월호, 〈현대사 발굴/ 대한민국이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한국전쟁 5일간〉 참조).
 
  이러한 맥아더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북진통일이 성사되기 직전, 중공군의 남침을 예측, 대비하지 못한 책임은 맥아더에게 있다. 전역(戰域)의 최고 사령관이었고, 유엔군 사령부로 들어온 수많은 정보가 남침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 섬까지 날아온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군 약 30만명이 만주에 집결해 있지만 개입의 시기를 놓쳤다.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공군력으로 도륙하겠다”고 안심시켰다.
 
 
  李承晩, “맥아더와 나는 중공군이 나온다고 보아 왔다”
 
정일권 전 육군참모총장.
  맥아더의 이 보고가 의도된 거짓말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참모총장 및 3군 총사령관을 지낸 고(故) 정일권(丁一權) 장군의 회고록이다. 정 장군은 1996년 1월 15일 《정일권 회고록》 304~307페이지에서 이런 비화(話)를 소개했다.
 
  〈(중공군의 출현 후) 노(老)대통령(이승만 대통령을 지칭)은 내 보고를 듣고 나서 “역시 나왔구먼. 이젠 겁쟁이 트루먼도 배꼽에 힘 좀 넣겠지” 하고 지극히 태평이었다. 전국(戰局)의 앞날에 대해서도 낙관하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맥아더가 잘 알아서 할 것이오” 하고, “정 총장, 맥아더와 나는 중공군이 나온다고 보아 왔습니다. 장군, 그(맥아더를 지칭)는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겉으로는 부인했으나 북진 전략에 대한 트루먼의 잔소리를 막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맥아더, 그는 훨씬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니 경우에 따라서는 원폭(原爆) 사용도 불사할 각오라고 내게 굳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의 전략가로서의 심모(深謀)는 참으로 탁월합니다” 하고 격찬해 마지않았다.〉
 
  정일권 총장에게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두 통의 편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 통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이 대통령의 편지 사본(寫本)이었다. 정 총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사본의 요지는 이러했다고 한다.
 
  〈북진이 순조롭게 진행됨에 따라 워싱턴과 영불(英佛)은 소련 및 중공의 군사개입을 겁내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본직(本職)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의 개입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 해서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상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은 거족적(擧族的)으로 북진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하의 영매(英邁)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맥아더의 답장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 원수와 트루먼 대통령은 웨이크섬에서 만나, 한국전에 대해 논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보여준 또 다른 한 통의 편지는 맥아더가 이 대통령에게 보낸 답장이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고 한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직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건널 것입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 삼아, 가까운 장래 아시아에 있어서 데모크라시의 최대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어디까지 본직의 전략을 뒷받침해 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센 반대에 부딪힐 것입니다. 하지만 불퇴전의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원폭도 불사할 것입니다…〉
 
  정일권은 회고록에서 이 맥아더의 편지 날짜까지 기억했다. 1950년 10월 13일이었다고 한다. 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맥아더 사령관의 회담이 있은 날이 이틀 뒤인 15일이었다. 정 장군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이 두 통의 사신(私信)을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는지 확실치 않다. 극비(極) 중의 극비였다. 사가(史家)들이나 비평가들이 이 극비를 알 까닭이 없었다. 맥아더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비판의 소리, 즉 “중공군 개입의 가능성을 오판하여 유엔군의 북조선 철수를 자초했다”는 책임 추궁에도 이 비밀 서한만큼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정일권이 본 편지가 맥아더의 본심을 드러낸 것이라면 이렇게 추리할 수 있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예상하고도 트루먼 대통령에게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여 북진을 강행한다. 예상대로 중공군이 개입, 한국군을 공격하자 개입 규모를 실제의 10분의 1 정도로 축소 보고한다. 30만명이 들어왔다고 보고하면 11월 말로 예정된 유엔군의 총공세를 워싱턴에서 막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축소 보고한 것이다. 맥아더는 중공군과 미군이 본격적으로 붙어 싸우는 상황을 만들어야 중국으로 확전(擴戰)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정일권이 보았다는 편지 내용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았다.
 
 
  미군 정보기관, 맥아더 감청
 
매튜 에이드의 《비밀의 보초》.
  당시 미국 정보기관 AFSA(미군정보사령부·NSA의 전신)는 맥아더의 전화와 주일(駐日) 외국대사들의 교신을 감청(監聽)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반공 성향이 강한 스페인, 포르투갈, 브라질 대사를 자주 만났다. AFSA는 감청 기록을 워싱턴에 보고하였다. 1950년 11월 11일 로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정치적 발언을 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는데 맥아더가 부인하자 맥아더가 브라질 대사와 나눈 대화 기록을 보여주었다. 이 기록은 가스토 도 리오 브랑코(Gastao Do Rio Branco) 대사가 본국에 보낸 맥아더 면담록이었다. 맥아더는 대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그(맥아더)가 대통령(트루먼을 지칭하는 듯)에게 2~3년 후보다는 지금 전쟁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지난 5년간을 지켜봤을 때 크렘린의 사람들과 함께 협조적으로 일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화를 찾기 위해선 국제적 볼셰비즘의 중심인 모스크바를 파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는 미국의 역사학도인 매튜 에이드의 책 《비밀의 보초, 알려지지 않은 미국국가안보국(NSA)》에 실려 있다. 에이드 씨는 기자와 나눈 이메일에서 “버지니아 노퍽의 맥아더 기념관에서 콜린스가 맥아더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제시한 문서를 직접 확인했다”고 했다. 콜린스는 맥아더에게 정치적 발언에 대하여 경고했지만 맥아더가 부인하자 감청한 브라질 대사 문서를 보여준 것이라고 에이드 씨는 설명했다.
 
  이 시점이 중요하다. 중공군의 개입 규모를 축소 보고한 맥아더는 중공군과 본격적 전투가 될 11월 하순의 공세를 앞두고 소련이 개입하여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중공군 개입에 대비하여 조심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돌변한 맥아더의 悲鳴
 
  11월 24일 맥아더는 또 다시 총공세를 명령했다. 언론이 ‘크리스마스 공세(攻勢)’라고 이름 붙인 것은 맥아더가 이 작전에 성공하면 장병들이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은 11월 24일 하루 별다른 저항 없이 15km를 진격했다. 다음 날 중공군 30만명의 대반격이 서부와 동부전선에서 시작되었다. 11월 28일, 한국전의 흐름이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중공군 제38군과 42군이 미8군과 10군단 사이의 텅 빈 간극을 뚫고 남하, 한국군 2군단 지역을 돌파, 미8군의 배후(背後)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에서 적군(敵軍)이 등 뒤에 나타나는 날은 비극의 시작이다.
 
  도쿄 시간으로 11월 28일 오후 4시45분, 맥아더는 합참(合參)에 전황(戰況)을 보고하였다. 중공군의 대공세가 있은 지 3일이나 지나서였다. 세계 언론은, 미군과 한국군이 기습을 받아 포위당한 사태를 긴급하게 보도하는데도 맥아더는 그 귀중한 3일간을 지체하였다. 그의 뒤늦은 보고는, 중공군에 대한 종전의 축소평가를 180도로 뒤집는 내용이었다.
 
  〈중국의 군사력이 대규모로 투입되었고 매시간 증강되고 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였다.〉
 
  그는 자신의 줄기찬 오판(誤判)에 대한 사과나 변명을 하지 않았다. “중공군의 목표는 한국에서 작전 중인 유엔군을 완전히 궤멸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전력(戰力)은 선전포고 없는 이 전쟁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했다. 맥아더는 또 “지역 사령관의 영역을 넘는 세계적인 고려를 해야 할 사태 발전이므로 새로운 지침을 결정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맥아더는 이 전문에서 비로소 중공군의 추정 병력을 20만(실제로는 30만), 북한군의 병력을 5만으로 상향 평가했다.
 
 
  백악관 참모회의의 트루먼
 
  합참은 맥아더가 건의한 후퇴 작전을 승인하고 평양-원산 선에 저지선을 칠 것을 권고하였다. 맥아더는 이를 거부하였다. 약한 저지선밖에 칠 수 없고, 돌파당할 것이라면서 8군은 부산을 향하여, 10군단은 흥남으로 철수, 재정비하든지 철수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했다. 불과 1주일 전까지만 해도 승리를 자신하던 맥아더는 엄살에 가까운 패배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이 또한 미국의 강력한 응징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의심이 정당화된다. 11월 28일 밤 맥아더는 도쿄에서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워커 8군 사령관과 앨먼드 10군단장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서부의 미8군과 동부를 맡은 10군단의 후퇴를 승인하였다. 대공세 4일 만에 유엔군은 수세(守勢)로 전환한 것이다.
 
  맥아더의 급전(急電)이 미 합참에 접수된 것은 워싱턴 시간으로 28일 오전 4시46분이었다. 1시간30분 뒤인 오전 6시15분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각하,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아주 비관적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날 아침 백악관 참모회의에서 트루먼은 “우리는 참담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말을 꺼냈다. 회의에는 작가인 존 허시도 배석했다. 그는 《뉴요커》 잡지에 트루먼 대통령의 근황(近況)을 기고하기로 되어 있었다. 트루먼은 허시의 동석(同席)을 허가했다. 미국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특혜였다. 허시는 이렇게 썼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볼이 붉어졌다. 흐느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곤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한, 그러나 용기에 찬 말투로 이야기했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우리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 가는 수밖에 없다.”〉
 
  트루먼 대통령은 총공세에서 총퇴각으로 급변한 한국사태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한테도 돌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참전, 인천상륙작전, 38선 돌파, 맥아더에 대한 신임 등 모든 결정은 그 자신이 내린 것이었다. 맥아더에게 속았다는 억울한 심정이야 있었겠지만 그런 불만은 발설할 수 없었다.
 
 
  ‘트루먼 시대의 가장 중요한 회의들 중 하나’
 
  11월 28일은 마오쩌둥(毛澤東) 판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중공군이 청천강을 건너 군우리로 진출, 8군의 배후를 친 것을 1940년 5월 나치 독일군의 아르덴 숲 돌파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전략적 승리였다는 이야기이다. 11월 28일 밤 마오쩌둥은 흥분했다. 그는 중공군 현지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앞으로 보낸 전보에서 “7개 미국과 영국 사단, 5개 한국군 사단을 섬멸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호기(好機)가 왔다”라고 했다.
 
  11월 28일 오후 3시 백악관은 국가안보회의(NSC)를 열었다. 트루먼 전기(傳記)의 저자 데이비드 매클러프는 이 회의가 트루먼 시대의 가장 중요한 회의들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날 아침 맥아더는 워싱턴으로 보낸 전문에서 최대한의 추가 파병, 대만 장제스 군대의 투입, 중국의 해상봉쇄, 중국 본토 폭격, 확전의 권한 등을 요구하였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 문서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날의 NSC 회의록은 공개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한국 지도(地圖)를 준비한 것을 보고는 각료회담이 열리는 4시까지는 설명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첫 발언을 요청하였다. 애치슨은 종일 의회에 나가 있었으므로 한국 상황에 대한 최신 동향을 알지 못한다면서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브래들리에게 발언을 요청하였다.
 
  합참의장은 전선(戰線)의 다급한 상황과는 동떨어진 낙관적 분석을 내어놓았다. 그는 맥아더가 새로운 전쟁 지침을 요구하였으나 상황이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서 2~3일 내로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브래들리는 또 신문과 방송의 중공군 전력에 대한 보도는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방어에 유리한 지형과 수송의 문제로 해서 중공군이 그렇게 깊숙이 진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트루먼, “맥아더를 욕해선 안 된다”
 
조지 마셜 국방장관.
  이 분석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판명난다. 조지 마셜 국방장관은 “유엔군이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논의를 해야 한다”면서 “한국 문제에서 미국은 단독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고 유엔과 같이 가야 한다”는 취지의 강조를 했다.
 
  그는 “8000마일이나 떨어진 워싱턴에서 맥아더에 대하여 전술적 지시를 이러쿵저러쿵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발지 전투에서 전쟁부(국방부)는 전선 사령관들에게 단 한마디의 전술적 질문을 한 적이 없다”면서 “중공군의 개입에 대하여 면밀한 관찰을 계속하되 맥아더에게 전술적 계획에 대하여는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페이스 육군장관은 “지금 미국 내에서 쓸 수 있는 사단은 제83공수사단뿐이다”고 상기시켰다.
 
  이때 부통령 앨번 바클리가 나섰다. 그는 이런 자리에선 발언을 삼가던 이였지만 이날은 달랐다. 부통령은, “맥아더가 왜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떠벌렸는가” 하고 따지기 시작하였다. 11월 24일 대공세에 즈음하여,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적을 섬멸하고 미군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한 말을 비판한 것이다. 페이스 육군장관이 “맥아더는 공식적으로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없다”고 변호하였지만 로벳 국방차관은 “그의 기자회견 기록에는 분명히 그런 표현이 있다”고 했다. 브래들리는 또 맥아더를 변호한다.
 
  “맥아더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중국을 향하여 던진 메시지일 것이다. 우리는 한반도에 오래 머물거나, 만주로 확전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바클리 부통령은 “맥아더 장군은 그의 발언을 미국인이 듣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트루먼 대통령이 나섰다.
 
  “그의 발언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하든 그가 밟고 있는 양탄자를 끌어당겨 넘어지도록 해선 안 된다는 점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맥아더의 명성을 훼손해선 안 됩니다.”
 
 
  바클리 부통령, “이건 믿을 수 없는 사기”
 
앨번 바클리 부통령.
  그래도 부통령은 화가 풀리지 않는 듯했다.
 
  “이건 믿을 수 없는 사기예요. 여러 가지 의혹을 불러일으킵니다. 내가 의회에 가면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브래들리가 “맥아더가 중공군이 전선의 중앙부에서 매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진격한 것 같다”고 하니 부통령이 또 나섰다.
 
  “그렇다면 왜 수색을 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곳에 공산군이 있다는 걸 몰랐습니까?”
 
  마셜 장관은 “맥아더는 10만명 정도의 중공군만 상대한다고 생각한 듯하다”고 브래들리 편을 들었다.
 
  부통령은 설득당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맥아더를 믿을 수 있습니까? 일주일 전에는 10만이라고 한 사람이 지금은 20만이라고 하니. 20만명이 아니고 30만명과 싸우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중공군이 총공세로 나오면 우리는 전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인과 관료들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였지만 부통령 바클리의 직격탄이 핵심을 찌른 말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부통령의 추궁에 마셜 국방장관은 “즉답을 드릴 순 없지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입하는 식으로 한국에 붙들려 매여선 안 된다”고 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우리가 새로운 증원 부대를 한국으로 보낼 순 없지만 손실 인원을 대체할 순 있다”면서 “이미 맥아더 휘하 부대는 30% 정도의 병력 부족 상태이다”고 했다. 누군가가 맥아더가 지휘하는 총병력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자신 있게 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콜린스는 “10군단이 고립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선을 지킬 수 있다”고 했고, 트루먼 대통령도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애치슨, “한국에선 중국을 이길 수 없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
  애치슨 장관이 처음으로 발언을 시작하였다. 그는 세계적 관점에서 한국전을 바라보아야 한다면서 “중국의 뒤에는 소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중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우리는 중국이 투입하는 병력만큼 보낼 수 없으므로 이길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이 모든 사태 뒤에 소련이 있지만 그렇게 말해선 안 됩니다. 그렇게 말을 해 놓고 소련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계적으로 평판이 약해질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소련이 만든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만주를 폭격할 일이 있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처음엔 성공하겠지만 소련은 즐겁게 대응할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투입할수록 그들은 더 많이 그것도 즐기면서 그렇게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덩이로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는 출혈(出血)로 하얗게 될 겁니다.”
 
  그는 한국전에서 미국이 빠져나오기 위한 전략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는 한국의 한구석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러고는 이 지역을 한국 정부에 넘겨주곤 나와야 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특히 유럽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재무장관의 의견을 물었다. 장관은 “미국의 재정 상태는 튼튼하므로 비상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한국전을 계기로 미국의 국방비는 네 배로 늘어 소련과 본격적인 군비(軍備)경쟁이 시작된다. 40년 뒤 소련은 군비(軍費) 부담으로 무너진다.
 
  고참 외교관 해리먼은 트루먼 대통령이 발언을 권하자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지도력이 결정적이다”면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에 나가 특별연설을 할까 생각했다가 취소하였다. 그런 개별적 접근방법은 세계적 중요성을 가진 문제해결엔 맞지 않다”고 했다. 그는 국가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을 헐뜯는 정파적(政派的) 언론의 선동과 왜곡을 비판하였다. 해리먼은 “대통령의 지도력이 있어야 미국이 단합할 것이다”고 했다.
 
 
  먹히지 않는 맥아더의 擴戰論
 
‘전략두뇌’ 소리를 들었던 전략가 폴 니츠.
  트루먼 대통령이 사이밍턴 상원의원에게 발언권을 주자 그는 “최대한 빨리 한국에서 나와야 한다”면서 “노동자와 기업인들에게도 우리가 지금 얼마나 위급한지를 알리고 국력(國力)을 증강시키는 일에 협조하도록 호소하자”고 했다. 베델 스미스 CIA 국장은 “중공군이 우리를 수세로 몰아갈 수 있지만 쫓아내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진단하였다.
 
  부통령은 애치슨에게 “우리가 체면을 구기지 않고 한국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애치슨은 “없다”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우리는 한국에서 오래 버텨야 할 것이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제섭 국무부 순회대사는 “인도가 휴전안을 마련할 것 같은데, 현 위치 휴전이 아니라면 반대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로벳 국방차관은 전략문서 NSC-68에 따른 군비 증강은 너무 늦다면서 최대한 빨리 전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바클리 부통령은 “이번 회기의 국회는 대통령이 무엇을 요구하든 다 들어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이날 회의는 결론이나 결정 없이 끝났지만 한국전을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냐를 놓고 벌인 최고위급의 토론회로서, “한국전에 참전하는 결정을 내린 회의에 버금가는 회의였다”(트루먼 전기작가 매클러프)고 했다.
 
  ‘아무리 한국전이 참혹해지더라도 세계전쟁으로 악화되도록 해선 안 된다는 결론’이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하여 저절로 도출되었다.
 
  미국의 지도부가 총망라된 회의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된 전쟁 지도 방향을 뒤집으려는 노력이 맥아더에 의하여 그 뒤 수개월간 진행된다. 중국 봉쇄, 만주 폭격, 장제스 군대의 투입 등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으면 한국 방어가 불가능하니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그의 압박은 먹히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8군 사령관의 후임인 매튜 리지웨이가 평택-삼척 선까지 내려온 전선에 대한 반격을 개시, 두 달 만에 서울을 다시 수복하여 맥아더의 아우성이 과장임을 증명하였다. 맥아더에게 끌려가던 합참과 국방부도 돌아섰다. 맥아더의 중공군 개입에 대한 오판, 부정확한 정보보고, 잇단 항명(抗命)이 워싱턴에서 그의 권위와 신용을 떨어뜨렸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운명은 몇 차례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생환한다(《월간조선》 7월호, 〈현대사 발굴/ 대한민국이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한국전쟁 5일간〉 참조).
 
  맥아더가 ‘정일권이 본 편지 내용과 비슷한 맥락에서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한 이가 또 있다. 트루먼부터 레이건 행정부 시절까지 미국의 외교정책 수립과 집행에 핵심적으로 관여해 온 폴 H 니츠(전 국방차관)의 《히로시마로부터 글라스노스트까지》란 회고록이 그것이다. 니츠는 대소(對蘇)전략과 안보정책 수립, 그리고 미소(美蘇) 전략무기 감축 협상 등에 핵심적으로 종사해 왔다. 조지 캐넌과 함께 가장 명석한 ‘전략 두뇌’로 평가 받는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 밑에서 정책기획실장 자리에 있을 때 그가 입안한 대소전략 기본계획서인 ‘NSC-68’이란 문서는, “이 전략으로 미국이 냉전(冷戰)에서 이겼다”는 평가까지 들을 정도이다. 정책기획실장 시절에 그는 한국전을 겪었다. 회고록엔 이런 대목이 있다.
 
  〈내 책상에 올라오는 맥아더의 교신 감청 자료에 의하여 맥아더의 진정한 목표는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시켜 마오쩌둥을 몰아내고 장제스를 복귀시키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맥아더가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이 확실했다. 나는 언젠가는 대통령이 맥아더를 해임해야 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 일이 아무리 인기 없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퇴임 후인 1975년 8월 6일에 진행된 트루먼 도서관의 구술역사(口述 歷史·Oral History) 인터뷰에서 니츠는 ‘교신 감청 자료’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구술 내용은, 트루먼 도서관 인터넷에도 올라 있다).
 
 
  “맥아더‑스페인 대사 대화록에서 본심이 드러났다”
 
맥아더와 주일 스페인대사 간의 교신 감청에 대한 폴 니츠의 구술 역사 기록.
  리처드 D. 매킨지라는 인물이 질문을 한다.
 
  〈—38선을 넘는다는 결정을 하고 북진이 시작되자 전혀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습니까.
 
  니츠: 그렇습니다.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기간에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깊은 걱정이 생겼습니다. 사실은 중국군이 우리 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1950년 10월 하순 이후를 가리키는 듯). 중공군이 개입한 증거가 드러나고 청천강에서 공세를 펼칠 때까지 5주(週)가 지나갔습니다.
 
  이 5주간 맥아더 장군은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고 우리에게 보고를 하였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잘되어 가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셜 국방장관을 통하여 맥아더에게 북진을 중단하고 방어력을 강화하고 증강하길 명령하도록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두 방향으로 병력을 분산시켜 진격을 하고 있었는데 양군(兩軍·서부전선의 8군과 동부전선의 10군단) 사이엔 아무런 연결이 없었어요. 맥아더가 정말 위험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쿄 주재 대사들의 외교 교신 기록을 읽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스페인 대사가 맥아더와 나눈 대화를 보고한 내용을 읽어 보고는, 그가 직접 보내 오는 보고에서는 볼 수 없는, 맥아더 장군이 진정으로 의도하는 것에 대한 더 정확한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 교신 감청 기록으로부터 맥아더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든지, 중국이 개입할 경우엔 중국 본토로 전쟁을 확대하여 전쟁의 목적을 마오쩌둥의 축출과 장제스의 복귀로 변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원한다면 원자폭탄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쳐부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맥아더의 의도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그가 너무 심하게 모험을 감수한 이유의 일부는 우리가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전쟁 상태로 들어가도록 하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Part of the reason he took these excessive risks was to create a situation in which we would be involved in a war with the Chinese Communists). 그 방향으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할 겁니다. 나는 재앙적 결과가 빚어졌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니츠와 丁一權 증언의 공통점들
 
  폴 니츠의 회고담은 맥아더의 미스터리를 푸는 데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한다. 동시에 정일권이 보았다는 그 충격적 편지 내용과 맞아떨어져 편지의 실재(實在) 가능성을 높인다.
 
  1. 니츠는 맥아더의 전략 의도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길이었다고 했다. 중공군의 개입 없이 북한군을 섬멸하면 한반도 통일의 영웅이 되는 것이고, 중공군이 개입하면 전쟁을 중국 본토로 확대, 마오쩌둥을 일소, 중국을 수복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정치에 야망이 있었던 맥아더는 그렇게 하면 공화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추대할 것이라고 계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군 개입 가능성은 없다”고 단정적으로 보고할 때도 맥아더는 “설사 이 보고가 틀려 중공군이 개입할 경우엔 중국 본토로 확전하면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3. 1950년 10월 하순 중공군이 한국군을 표적으로 삼아 대규모 기습을 하였는데도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 규모를 실제의 10분의 1로 축소, 전면적 개입이 아니라는 보고를 하였는데, 이는 오판이 아니라 의도된 허위 보고일 가능성이 높다. 전면적 개입을 하였다고 보고하면 워싱턴에서 북진을 중단시킬 것이기 때문에 축소 보고를 하고는 11월 말의 크리스마스 공세를 명령, 미군과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대결하는 상황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 워싱턴에서도 맥아더에게 원폭 사용 권한을 주고 중국 본토를 공격하도록 허용할 것이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10월의 중공군 개입을 몰랐다는 것은 정보 오판이지만, 중공군의 개입 규모를 엄청나게 축소 보고, 대공세를 재개하여 대재앙을 부른 것은 범죄적 행동이다.
 
  4. ‘그가 너무 심하게 모험을 감수한 이유의 일부는 우리가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전쟁 상태로 들어가도록 하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니츠의 평이 핵심적이다. ‘너무 심하게 모험을 감수한’ 것들의 목록은 길다. 트루먼에게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부정한 보고, 8군과 10군단을 분리시켜 V자로 진격하게 하여 중공군이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것, 10월 하순에 기습을 가한 중공군의 병력을 축소 보고하고 11월 말의 대공세를 강행한 것 등이다.
 
  5. 당시 워싱턴의 국가지도부는 맥아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인천상륙 작전 성공의 위광(威光)과 전선 사령관에 재량권을 주는 미국의 전통 등으로 조지 마셜, 딘 애치슨 같은 거물들조차 11월 공세를 중단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니츠도 감청 정보를 통하여 맥아더의 속셈을 파악하였지만 대세(大勢)를 돌릴 수 없었다.
 
  6. 맥아더의 중국 수복 야망이 좌절되는 것은 중공군의 대공세로 유엔군이 총퇴각하면서 맥아더의 권위가 실추된 이후였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대공세를 빌미로 중국 본토 확전을 건의하였으나 트루먼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이를 거부하였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결전을 벌일 만한 군사력이 준비되지 않았다. 트루먼을 무시하였던 맥아더는 트루먼의 관점에서 한국전을 보는 연습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美 국립문서보관소를 화나게 한 역사 탐정’ 매튜 에이드

 
  한국전쟁 당시 정보전을 집중 연구한 매튜 에이드 씨는 미 공군 출신이다.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는 2006년 1월 ‘미 국립문서보관소를 화나게 한 아마추어 탐정’이라는 제목으로 에이드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20년간 ‘역사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국립문서보관서로 출퇴근했던 에이드 씨는 비밀해제가 돼야 했던 문서들이 공개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사서에 문의한 결과 미 중앙정보국(CIA) 등 국가기관이 비밀문서를 은폐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WP에 의하면 그는 비밀문서를 통해 특정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매일 국립문서보관소를 찾다 보니 개별 문서에 대한 비밀해제 시기를 알게 됐고 그 날만을 기다렸는데도 공개되지 않자 의문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이후 《뉴욕타임스(NYT)》는 에이드의 증언을 토대로 CIA 등 미 정부 당국이 비밀문서를 숨기고 있다는 특종 보도를 했다. NYT 보도 후 문서보관서는 자체 감사를 진행했고 CIA·공군·에너지부(DOE)·연방긴급사태관리청(FEMA)·문서보관서 등 다섯 곳의 정부기관이 1999년부터 2만5515건의 문서를 은폐했다고 밝혔다. 에이드는 미 공군 복무 당시 비밀문서 불법 소지죄로 1년간 복역한 뒤 불명예 제대했다. 그는 기자가 맥아더 해임과 관련된 감청 건을 문의하자 “엄청나게 중요한 이 문제에 대해 물어 온 기자는 당신이 처음”이라며 책 본문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소개했다.
 
  트루먼에게 보고된 암호 해독 문서
 
트루먼의 해군 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데니슨 제독.
  폴 니츠가 보았다는 주일 스페인 대사와 맥아더의 대화 기록에 대하여 더 알아본다. 앞에서 인용한, 비밀문서 발굴이 전문인 미국 역사학도 매튜 에이드가 쓴 《비밀의 보초(Secret Sentry)》에서 관련 대목을 발견하였다.
 
  〈맥아더를 해임한 트루먼의 결정은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알링턴홀에 있는 미군 정보사(AFSA)의 암호 해독가들이 미국의 가장 인기 있는 장군을 해임한 트루먼의 결정에 큰 역할을 하였음이 밝혀졌다.
 
  1950년에서 1951년 사이 AFSA는 도쿄에 주재하는 여러 외교관들의 전보를 가로채고 해독하고 있었다. 가장 저명한 표적은 스페인, 포르투갈, 브라질 대사의 외교 전문이었다. 맥아더와 윌로비 정보참모는 이들 세 대사들에게 중국과 소련에 대한 자신들의 극단적인 정치적 견해를 털어놓는 실수를 범하였다. 소련이 한국에 군사적 개입을 하는 것을 바라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 미국이 그걸 빌미로 삼아 베이징의 마오쩌둥 공산정권을 끝장내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맥아더의 말도 있었다.
 
  맥아더는 대사들에게 러시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951년 3월 중순 트루먼의 해군 보좌관 로버트 데니슨 제독은 대통령에게 앞 주(週)에 해독한 네 개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는 도쿄 주재 스페인 대사 프란시스코 호세 델 카시티요가 맥아더와 사적으로 나눈 대화를 (본국에) 보고한 것이었다. 맥아더가 고의로 워싱턴의 명령을 무시하였다는 압도적 양의 증거들과 그가 비밀리에 소련 및 중국을 상대로 한 전면전을 바라고 있다는 감청 정보를 근거로 하여 그를 해임한 것이다.〉
 
  기독교적 반공주의의 화신(化身)인 맥아더는 이념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에게는 본심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였다. 그와 정보참모 윌로비는 스페인 내전 때 공산세력을 일소한 프랑코를 높게 평가하였다는데, 그 스페인 대사에겐 특별한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편지(정일권 증언) 내용이 너무 솔직한 것도 동지적 관계의 토로였다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트루먼의 해군 보좌관 증언
 
  트루먼에게 결정적 제보(提報)를 한 데니슨 해군 보좌관이 남긴 자료를 찾아보았다.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시에 있는 트루먼 도서관에는 문제의 암호문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되는 2400장 분량의 〈데니슨 리포트〉가 소장돼 있다. 도서관에 열람 여부를 문의하자 랜디 소웰 사서(司書)는 “안타깝게도 인터넷으로는 열람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트루먼 도서관에서 작성한 데니슨의 구술 역사 전문(全文)은 인터넷에 공개돼 있다. 1971년에 진행된 인터뷰의 맥아더 해임 관련 부분이다.
 
  〈질문자: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장군이 해임됐는데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데니슨: 맥아더가 재향군인회에 보낸 편지 때문이 아닌가요?
 
  질문자: (재향군인회가 아니라) 미해외참전용사모임(VFW)입니다.
 
  데니슨: 그것만으로 해임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편지 뒤에도 여러 일이 발생했습니다.
 
  질문자: VFW 편지는 조금 전의 일 아닌가요? 8월에 보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데니슨: 맞아요. 어쨌든 어떤 일이 있었습니다.
 
  질문자: 그러고는 조 마틴 연방하원의원과의 편지도 있었죠.
 
  데니슨: 네.
 
  질문자: 그 일이 해임 결정과는 시기적으로 가깝기도 하고요.
 
  데니슨: 하지만 대통령은 오랫동안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맥아더를 잘 아는 사람들과 이러한 사안에 대해 상담을 하는 괴로운 시간을 보낸 걸 내가 알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맥아더는 VFW와 마틴 의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 정부의 한국전 정책을 비판, 트루먼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현직 군인이 대통령의 문민(文民)통제 원칙에 도전하는 모습이었다. 데니슨은 이렇게 잘 알려진 이유 말고도 “어쨌든 어떤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스페인 대사와 맥아더의 대화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승만, “중공군 개입은 하나님이 한국을 구하려는 방법”
 
  북한군 남침(南侵)에 이은 중공군 개입은 현대사를 바꾸었다. 북진통일을 좌절시키고 1·4 후퇴와 이산가족 문제라는 민족적 비극을 초래하였다. 중국은 유엔에서 침략자로 규정되어 약 20년간 고립되었다. 미국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 국방예산을 늘리고 군사력 강화를 추진, 본격적인 대소 군비경쟁에 돌입한다. 미국은 대만의 보호를 확실히 하였고, 일본은 전쟁특수로 경제가 회복되었으며 독일의 재무장이 허용되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군사동맹으로 강화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자유진영에 득이 되는 결과가 빚어졌다. 맥아더의 음모가 결과적으로는 자유진영을 강화시킨 것인가? 한국은 손해만 본 것인가?
 
  북진통일 달성을 앞두고 중공군이 개입,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충격을 받았을 이승만 대통령의 예언적 논평이 있다. 1950년 11월 29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상한 이야기를 하였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6·25와 이승만》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중공군이 지금 침략한 것은 하나님이 한국을 구하려는 방법인지 모른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북진통일이 성공한 이후 한반도가 당면하였을 위기를 설명한다.
 
  “만일 소련(이 대통령은 북한군을 소련의 괴뢰라고 보았기에 이런 표현을 쓴 듯하다)이 한국 국경 너머로 후퇴하고, 국제연합에서 이제는 특권이나 이권들을 흥정하게 되었더라면, 국제연합과 미국 사람들은 소련과의 협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무슨 일이라도 했을 것이며 군사상의 승리만이 아니라 외교상의 승리라고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국제연합군 부대와 장비들은 조만간 철수되었을 것이며, 한국군은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는 너무나 긴 국경선을 점령하도록 남겨 놓았을 것입니다.
 
  미국 국민의 분노가 가라앉고 공산당의 평화선전 공세로 국민들이 잠잠해진 가운데 중공군의 준비가 끝났다면, 이들의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 현대적인 항공지원, 그리고 한국의 전 해안선을 둘러싼 해군작전 등을 저지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현재 해안선을 봉쇄하고 있는 함선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한국 지배가 소련의 계획 안에 들어 있고, 북한군의 실패가 그들 계획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한국에 중공군을 끌어들인 것은, 국제연합군이 철수한 뒤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가 닥칠지 모르나 민주주의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북진통일 됐어도 평화가 오지는 않았을 것
 
  무초 미국대사로부터 ‘세계정세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이해한 사람’이란 평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이 분석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고 북진통일이 되었더라면 곧 바로 평화가 찾아왔을 것인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유엔군의 주력(主力)이 철수하면 산악지방에 숨어 있던 공산 게릴라들이 월남식으로 준동하였을 것이다. 만주로 쫓겨난 김일성 일당도 중공의 비호 아래 병력을 투입하였을 것이다. 이런 식의 간접침략에 미국이 또다시 파병하는 것은 국민 여론상 불가능하였을 것이다(한미동맹 조약도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되면 한국은 월남처럼 적화(赤化)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예언대로 중공군 개입은 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이었을지 모른다. 중공군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한국군은 증강되었고, 한미동맹의 필요성을 두 나라 지도부가 절감하게 되었다. 중공군 개입이 선물한 것이 국군의 강화와 한미동맹이었다.
 
  월남은 17도선으로 일단 분단(分斷)되었다가 북쪽의 월맹이 정규군을 내려보내 남쪽의 게릴라를 돕는 월남전을 시작, 결국 공산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북진통일을 하였더라도 중공과 김일성 세력이 만주에서 공산 게릴라를 들여보내고, 남한 내부의 공산세력을 조종하였더라면 한국의 힘만으로는 대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공군 개입의 불법성(不法性)과 침략성을 용서할 순 없다.
 
 
  ‘축복으로 위장한 재앙’
 
  역사는 도전(挑戰)과 응전(應戰),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서 많은 기적과 역전(逆轉)의 드라마를 만들면서 흘러간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 게 역사이다. ‘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이 있지만, ‘축복으로 위장한 재앙’도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가난을 물리치고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었지만 국민들의 정신력을 타락시킨 점은 없는가? 국가적 생존투쟁 의지, 특히 자주국방 의식이 약해지니 사소한 데 목숨 거는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그런 가운데 북한은 핵무장에 성공하고 한국 안에 거대한 종북(從北)세력을 심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 자위적 핵무장을 포기한 한국은, 미국이 주한미군을 북(北)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망)를 배치하겠다고 해도 중국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리는 나라로 전락하였다.
 
  북한의 핵개발을 돕고, 북한의 인권탄압을 비호하고, 종북세력과 연대(連帶)한 세력이 선거를 통하여 집권하면 한국의 반공 자유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없게 될 것이다. 4조 달러의 외환(外換) 보유고를 가진 중국, 핵무장한 북한 정권, 권력을 잡은 종북연대세력이 한편으로 정렬할 때 권력을 놓친 보수(保守)세력이 냉소적으로 변한 일본과 태평양 너머에 있는 미국과 손잡고 대항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한국인이 1953년 휴전 이후 수백만 명이 흘린 피를 딛고 누린 번영과 자유는 ‘축복으로 위장한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 수고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생존투쟁의 의지를 잃은 부자 나라의 배부른 군대가 야윈 늑대 같은 거지 군대에 먹힌 사례는 역사책에서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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