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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증언

이승만, 판문점 파괴 지시 비화

HID, 1951년 7월부터 세 차례 판문점 휴전회담장 파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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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선 남북통일이 어렵습니다. 자네들을 부른 것은 판문점 회담을 어떻게든 깨버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휴전이 성립되면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되지만, (휴전이) 깨지면 前進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모릅니다”(李承晩)

⊙ 판문점 중립 지역에서 공산군 측 중공군 장교와 병사 8명 납치
⊙ “李承晩은 휴전으로 분단이 되면 통일이 어렵다고 예감했다”
판문점 중립 지역에 설치된 회담장 천막.
  1951년 7월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휴전회담을 시작, 휴전과 분단 가능성이 커지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비밀리에 판문점 회담장 파괴를 지시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판문점 무장공격은 1951년 초 창설된 육군 4863부대(육군첩보부대)가 주도했으며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약 한 달 간격으로 3차례 진행했다.
 
  판문점 회담장 공격은 이 대통령의 지시로 육군첩보부대장 이극성(李極星) 중령과 김진수(金晋洙) 소위가 주도했다. 당시 국내 언론에는 비밀에 부쳐졌던 사안이다.
 
  《월간조선》은 당시 판문점 습격을 직접 지휘했던 김진수(86·육군본부 공작처장 역임·예비역대령)씨를 만났다. 육군 보병학교 갑종간부 제2기로 입교,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는 1951년 3월부터 HID에 복무하면서 모두 250여 차례 북한에 침투, 공작활동을 벌여 20여 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월간조선》 2006년 4월호 참조). 특히 적진에 침투해 인민군 부사단장 이영희 대좌를 생포해 귀환시킨 일도 있다.
 
  그는 “가슴에 묻어둔 비밀 하나를 털어놓고 싶다”며 60여 년간 봉인된 판문점 회담장 파괴의 진상을 고백했다.
 
  “1951년 7월 12일쯤 이극성 첩보부대장이 저를 불러서 갔더니 ‘내일 경무대에 들어가자’는 겁니다. 그땐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리라 생각도 못 했어요. 이튿날 새벽 대구에서 출발, 경무대에 오전 11시쯤 도착했어요. 그 시절엔 요즘 같은 고속도로도 없었고 포장구간마저 적었지만 무척 긴장하며 서둘러 지프를 몰았어요.”
 
  경무대에 도착한 그들은 비서실의 안내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는 “다른 배석자 없이 4명이 마주 앉았는데 대통령과 이극성 중령, 나,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당시 高在鳳) 아니면 경무대 서장(당시 金國振)이 배석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곽영주(郭永周) 경무관(당시 경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뭐라고 하던가요?
 
  “판문점 회담으로 휴전이 되고 분단이 되면 민족통일이 어렵다는 취지의 말씀이었어요. 어떻게 해서든 휴전을 반대해, 아니 못 하게 막아 북진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말씀이었죠. 또 휴전회담이 성립되면 영원히 통일을 못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육군본부 공작처장 출신의 김진수씨.
  잠시 후 이 대통령은 두 사람을 부른 속내를 털어놨다. 김진수씨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이 대통령의 발언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현재로선 남북통일이 어렵습니다. 자네들을 부른 것은 판문점 회담을 어떻게든 깨버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휴전이 성립되면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되지만, (휴전이) 깨지면 전진(前進)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모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를 내렸나요.
 
  김진수 예비역대령의 말이다.
 
  “이 대통령께서 ‘회담장소를 야간에 침투해 파괴하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는데 저는 ‘문제없습니다. 그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죠. 그랬더니 ‘그럼 부탁하네. 가까운 시일 내에 휴전회담을 못 하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는 “경무대 한 인사가 ‘사단장에게 보고도 하지 말고 대통령과 우리 세 사람만 아는 비밀로 하자’고 제안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속으론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일촉즉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판문점 회담장을 파괴하라니…’
 
 
  1차 擧事는 1951년 7월 16일… 휴전합의를 깨라!
 
이승만 대통령과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왼쪽).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측 사이의 휴전회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을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1년간의 치열한 전쟁을 통해 공산군 측은 자력으로 한반도를 적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엔군 측도 힘에 의한 응징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결국 1951년 6월 30일 유엔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이 휴전회담 제의를 했고 7월 8일 개성 광문동(光文洞)의 한 민가에서 예비회담이 열렸다. 장소를 옮겨가며 진행된 회담은 유엔군과 공산군 측의 거친 신경전으로 소득없는 논쟁만 되풀이되었다. 유엔군 측은 국제적십자의 포로수용소 방문과 전쟁포로에 관한 협의를, 공산군 측은 38도선 문제와 유엔군 철수 문제를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첫 판문점 습격은 언제인가요?
 
  판문점의 원래 이름은 ‘널문리’다. 널문리란 널빤지로 만든 문짝마을이란 뜻. 그러나 널문리는 회담의 공용어(한글·중국어·영어) 가운데 중국어로 표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널문을 한자로 쓰면 ‘판문(板門)’인데 구멍가게를 의미하는 ‘점(店)’이라는 글자를 넣어 판문점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널문리는 구부러진 밭뙈기와 초가 몇 채, 작은 주막이 전부인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으나 판문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세계 전사에 남은 현장이 되었다.
 
  “7월 16일 아직 야심한 새벽이었을 겁니다. 민간인 복장의 대원 10명을 이끌고 판문점 남쪽 철조망을 절단기로 끊고 판문점 회담장으로 진입했어요. 다행히 회담장은 텅텅 비었고 초소에도 사람이 없었어요. 회담장 앞에 중공군 지프인지, 인민군 지프인지 모르겠지만 주차된 지프를 미제 칼빈 총으로 쏴 전소시켰어요. 회담장 주변엔 4~5개의 천막이 있었는데 한쪽은 유엔군 측이 쓰고 다른 한쪽은 공산군 측이 썼어요. 총을 난사해 회담장 천막을 모두 쓰러뜨리고 탁자니 의자니 기물도 부쉈어요. 불탄 천막이 주저앉는 것을 보고 복귀했어요.”
 
  주변에 중공군 1개 소대가 경비를 서고 있었고, 아군(유엔군)도 판문점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누구도 대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인명 피해나 살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김진수 소위와 함께 파괴공작에 참여한 대원들은 HID 문산파견대(제2파견대) 장단분견대 소속이었다. 판문점 공격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장단분견대와 함께 대덕산분견대, 두매리분견대도 조직돼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현역 군인 신분이 아니었다. 판문점 근처 장단군(長湍郡·지금은 파주시와 연천군에 모두 편입)과 대성동(大城洞) 마을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재 파주 장단에 ‘도라산 전망대’가 있고, 대성동은 군사분계선 남쪽 DMZ 안에 위치한 유일한 민간인 거주 지역이다.
 
  김진수 소위와 장단분견대는 왜 하필 7월 16일을 거사일(擧事日)로 정했을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전날인 7월 15일은 유엔군과 공산군 간 휴전회담장 통제규칙을 두고 합의가 성사된 날이었다. 양측은 ‘개성 중심으로 반경 5마일 내에 중립지대를 설정하고 회담장 주변에 무장병력도 두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바로 이 합의를 깨뜨리려 했던 것이다.
 
 
  판문점 일대에 민간인 유격대 출몰… 2차 판문점 공격 감행
 
육군첩보부대 장교 시절의 김진수(뒷줄 오른쪽 끝).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강석. 젊은 시절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으로 구성된 공산군 측은 판문점 회담장이 쑥대밭이 되자 분기탱천했다. “유엔군 병사들이 판문점을 향해 사격했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휴전회담은 경색될 수밖에 없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전사(戰史)에는 공산군 측이 ‘비록 부상자나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중립 지역 내의 무장행위라고 비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반면 유엔군 측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합의문 서명 직후 발생한 ‘중립협정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즉각 조사에 착수했으나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고, 공산군 측도 내심 휴전을 바랐던지 더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김진수 소위는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경무대로 찾아가 작전 성공을 보고했다고 한다. 직접 이 대통령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경무대 한 인사로부터 “이 대통령 뜻을 받들어 목숨 바쳐 싸워줘 고맙다”는 격려를 받았다.
 
  1951년 8월이 시작되자 휴전회담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됐다. 유엔군과 공산군 측 간 신경전이 치열했다. 그해 8월 4일에는 중공군 1개 중대가 휴전회담 지역을 침범, 유엔군 측이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8월 13일에는 공산군 측이 “판문점 교량 부근에서 40명의 유엔군 부대가 교량을 봉쇄하고 비무장 공산군에게 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유엔군 측은 조사에 착수했으나 관련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공식 성명을 통해 “그때 그곳에 유엔군 부대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유엔군이나 공산군 측도 모르는 군사적 충돌을 누가 일으키고 기획한 것일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 전쟁사》를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나왔다.
 
  〈(1951년) 8월 19일 중립 지역인 송곡리(판문점 서쪽 1km 지점)에서 중공군 헌병소대가 순찰 도중에 습격을 받아 소대장이 사망하고 소대원 1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산군 측은 즉각 유엔군 측이 중립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유엔군 측의 조사결과 그 시간에 송곡리 근처에 유엔군 부대는 없었다.
 
  그런데 민간인 목격자에 의하면 “중공군을 기습한 대원들은 민간복장을 하고 있었고, 전에도 이곳에 나타난 적이 있다”는 증언을 하였다. 이에 유엔군 측에서는 대한민국에 우호적인 유격대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판단하였다.〉(p155, 《6·25 전쟁사》 9권)
 
  ―‘대한민국에 우호적인 유격대의 독자적인 행동’을 한 이들이 HID 대원들이죠?
 
  김진수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모두 우리가 한 일입니다. 민간인 복장으로 아군이나 유엔군의 지시 없이 독자 행동한 것이죠.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 있고 그해 8월 중순쯤, HID 장단분견대는 2차 판문점 회담장을 파괴했어요. 구체적 날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2차 판문점 회담장 공격은 어떤 방식이었나요?
 
  “1차 공격 때와 같은 방식으로 판문점 주변 철조망을 끊고 침투해 회담장 천막을 쓰러뜨리고 주변을 총으로 난사, 무력시위를 했어요. 추측건대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비난했을 겁니다.”
 
  1951년 8월 하순 들어 유엔군과 공산군 측 간 충돌과 분쟁이 계속됐다. 서로가 무장병력을 동원, 중립협정을 위반했다며 비난했고 상대방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조작”이라고 반박했다.
 
  결국 양측은 8월 24일 휴전회담 중단을 선언하고 말았다.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 한 단락이다.
 
  〈이로써 공산군 측에 의한 중립협정 위반사건의 날조와 이에 대한 비난이 거듭된 끝에 결국 공산군 측이 유엔군 측에 휴전회담을 중단한다고 통보함으로써 8월 24일부터 무기휴회로 들어갔다.
 
  공산군 측은 “8월 29일 유엔군 항공기가 개성 중립 지역에 조명탄을 투하했고 30일에는 유엔군 부대가 판문점 교량 너머로 사격하여 공산군 순찰대를 공격했으며 9월 1일에는 유엔군 항공기가 두 번째로 개성을 폭격했다”고 비난하였다.
 
  이때마다 유엔군 측은 “현장조사 후 어떠한 유엔군 항공기도 결코 그러한 사건을 범한 일이 없으며 지상사건에 관해서는 아마 유격대원의 소행일 수도 있다”고 해명하였다.〉(p156~157, 《6·25 전쟁사》 9권)
 
 
  3차 공격, 공산군 측 장교와 병사 8명 생포
 
1951년 7월 휴전회담장인 개성 내봉장(來鳳莊) 앞뜰에 선 공산군 측 휴전회담 대표들. 왼쪽부터 중공군 대표 셰팡(解方), 덩화(鄧華),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 북한군 대표 이상조와 장평산.
  1951년 9월 초 김진수 소위와 HID 장단분견대는 3차 판문점 공격을 감행한다. 대원들은 판문점 주변에 쳐진 철조망을 끊고 회담장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판문점 외곽 경비를 맡고 있던 공산군 측 장교와 병사 8명과 마주쳤다. 수적으로 우세한 HID 부대원들은 이들을 모두 생포했다.
 
  “제 기억으로 성이 위(偉)씨인 중공군 소위가 기억납니다. 모두 납치해 아군(육군 1사단)에 넘기고 우리도 이들을 심문한 기억이 납니다. 이들은 나중 포로수용소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어요.”
 
  ―공산군 측 경비대를 납치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물론입니다. 다만 유엔군 측이 HID 장단분견대가 주도한 것을 알게 됐어요. 어느 날 미 8군이 우리 부대에 오더니 대원들을 강제로 두 대의 트럭에 나눠 실었어요. 한참을 달려 임진강을 건너자 대원들을 내리게 하고선 ‘판문점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고 경고하곤 떠났어요.”
 
  김진수 소위는 그 후 다시 경무대를 찾아갔다. 전후 과정을 설명했더니 경무대 한 인사가 이런 말을 하더란 것이다.
 
  “‘이젠 더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이 대통령께서 ‘그 정도 했는데도 휴전회담이 계속되니 할 수 없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저도 안타까웠지만 그게 민족의 운명이라 생각했어요.”
 
  ―이 사실을 지금 공개하는 이유는 뭔가요.
 
  “휴전회담 당시 이 대통령께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밝히고 싶었습니다. 그분은 휴전으로 분단이 되면 통일이 어렵다고 예감했던 겁니다. 통일을 위해 휴전회담을 망치고 싶었던 것이죠. 당시의 절절하고 급박했던 대통령 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HID 부대가 후방으로 물러나자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의 관계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1951년 9월 10일 미군 폭격기 한 대가 항로이탈로 북측 개성지구에 진입, 보호차 기총사격을 했다. 공산군 측이 항의하자 유엔군 C·조이 중장은 9월 11일 유감을 표명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번에는 9월 18일 DDT를 실은 한국군 트럭이 판문점을 넘었지만 공산군 측은 항의 없이 간단한 조사만으로 병사 4명과 트럭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후 2년여의 오랜 줄다리기 끝에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의 종식을 위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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