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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증언

북한군 중위가 겪은 6·25

“北, 1948년부터 학생들에게도 군사훈련시켜”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사진 : 조준우  월간조선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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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들어 ‘남반부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구호 빗발쳐
⊙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지리산 빨치산과 합류하기 위해 땅굴 팠다”
⊙ “전쟁 중에 남한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포로 시절 미군과 극렬히 대립”

玄東和
⊙ 83세. 함경북도 청진 출생. 김화高, 원산해양전문학교, 평양 사동군관학교 졸업.
    인도 낙푸르大 정치학과 중퇴. 인도한국총영사관 근무.
    現 뉴코리아트레이더스 회장·가야여행사 회장·인도한인회장.
⊙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수상.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에 은빛의 미군 B29 폭격기가 솜구름 같은 비행운을 네 줄 남기며 청진(함경북도) 상공을 날아다녔다. 1944년 가을, 미군이 만주로 정찰을 왔다가 남쪽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면 나남(함경북도 항구도시)의 일본군 기지에서 이 비행기를 향해 고사포를 쏘아댔다. 상공에서 솜이 터지듯 고사포가 폭발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누비며 날아다니는 저 비행기를 타 보는 것, 소년의 꿈은 비행사였다.
 
  광복 이후 소년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를 지나 모스크바로 가는 꿈을 꿨다. 동경의 대상이 일본에서 모스크바로 옮아간 것이다. 모스크바로 가는 지름길로 군관학교를 택했다. 하지만 평양의 이 군관학교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지름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현동화(玄東和) 인도한인회장의 얘기다. 현 회장은 일제 시대, 6·25 전쟁, 거제포로수용소 생활, 무국적자 난민 생활을 거친 현대사의 증인이다. 그는 평양의 사동군관학교에 입학한 지 7개월 만에 북한군 중위로 임관해 6·25에 참전했다. 이후 북한군 포로가 돼 서대문형무소, 거제포로수용소, 부산수용소에서 3년을 지냈다. 전쟁 포로로서 북한도 남한도 아닌 제3국행을 택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20대 초반. 우여곡절 끝에 인도에 정착한 그는 어느새 여든이 넘은 노인이 됐다. 6·25 전쟁 통에 얻은 눈 밑의 흉터는 평생 그에게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66년째를 맞는 시점에서 사업차 방한한 그에게 현대사의 한 자락을 들었다.
 
 
  인민위원회가 全 재산 몰수
 
  청진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강원도 통천군 고저면에서 해방을 맞았다. 청진에 비행기 폭격이 빈발하는 등 조짐이 심상치 않자, 그의 부모는 이모부가 사는 강원도로 이사를 했다. 당시에는 전쟁이 막바지라 수업은 뒷전이고, 중학생들까지 근로 공사에 동원되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하루는 거리에서 뛰놀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해방됐다고 합디다. 정말 일본이 망했나 싶어서 멍하게 허공을 바라봤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북한의 상황이 급속도로 뒤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분위기가 계속 어수선했습니다. 김일성 장군이 돌아온다는 소문이 있었고, 김일성은 가짜라는 소문도 있었어요. 북한에 무슨 위원회라는 이름의 단체들이 그렇게 많이 생겼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 자치위원회, 보안위원회, 인민위원회 등이었어요. 그중에 인민위원회가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시·군·면·리까지 조직이 확대됐습니다.”
 
  —위원회들이 생긴 뒤 바뀐 점이 있었습니까.
 
  “토지개혁, 친일파 처단, 중요산업 국유화, 남녀평등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로 인해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부모님이 청진의 신암동 시장에서 양품점과 빙과점을 운영했고, 큰삼촌은 청진과 나남의 중간 지점에서 주물 공장을 운영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습니다. 그런데 위원회가 들어와서 우리가 소유한 부동산 등 모든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제 눈으로 소련군을 처음 본 것도 이즈음이었습니다.”
 
  —1940년대 후반이군요.
 
  “강원도 고저에 배치된 소련군이 점심 먹는 것을 종종 봤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들을 ‘마오제’라고 불렀습니다. 함경도 사투리인데 ‘막 굴러먹는 놈’이라는 뜻입니다. 소련군이 희한한 음식을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를 바다에 그냥 막 버리고, 부녀자를 겁탈해서 우리 눈에는 아주 미개한 족속들로 보였거든요.”
 
  —소련군의 행태가 그랬군요.
 
  “해방 후 처음엔 북한에 물자가 풍족했어요. 특히 청진은 만주의 하얼빈으로 연결되는 철도가 관통한 교통의 요충지인 데다 공업이 발달하고, 정어리의 최대 산지였습니다. 함경도 음식들은 맵고 짜지 않고 싱거워요. 식재료가 풍부하다 보니 짜게 절여서 보관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먹고살기가 이남보다 좋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한번은 청진 토박이들이 청진으로 이사온 전라도 사람들과 싸우면서 이런 말을 했거든요. ‘니나, 청진에 돈 벌러 왔지 싸움하러 왔나’고요. 청진에 돈 벌러 왔으면 조용히 돈이나 벌 것이지 왜 풍파를 일으키냐는 소리인데, 아무튼 먹을 것이 많았어요. 그러니 함경도 사람들 눈에 소련군의 행동이 희한할 밖에요.”
 
  현동화 회장에 따르면 1940년대 후반, 학교에서 러시아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스탈린의 노래’, 김일성의 ‘장백산 노래’를 젊은이들이 흥얼거리고 다녔단다. 그 시절, 현 회장을 비롯해 젊은이들의 꿈은 모스크바로 가는 것이었다.
 
 
  1949년부터 이주 통제 엄격
 
1945년 8·15해방 직후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 북한 사람들은 이들을 ‘마오제’라고 불렀다.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위원회로부터 전(全) 재산을 몰수당한 그의 가족은 남쪽행을 추진했다. 강원도 통천에서 다시 김화로 이사를 갔다. 현동화 회장은 “38선에서 가까운 곳으로 우선 옮긴 뒤에 다음을 대비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금붙이 등 끝까지 숨겨 뒀던 자산을 처분하면서 월남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 내에서 주민의 거주지 이동은 자유로운 편이었다는 것이 그의 증언이다. 영세한 규모의 상점을 운영하는 것도 허용됐다. 그런데 1948년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현 회장의 얘기다.
 
  “현준혁이라는 가까운 친척 한 분이 위원회에 끌려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숙청이라는 것에 대해 공포가 시작됐죠. 사람들이 위원회 눈치를 보면서 숨죽여 지내는 날이 늘었습니다.
 
  한번은 형님이 무슨 구호를 잘못 말했다가 정치보위부에 불려 갔습니다. 어머니께서 ‘내 목숨을 걸고 구명 작전 벌여 형을 빼내 왔다’고 말했습니다. 1948년부터는 보위부에 불려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이즈음 이주 통제도 시작됐습니까.
 
  “이주 통제는 1949년에 엄격해졌습니다. 관공서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출장 이외에 다른 지방으로 가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연로하신 조부모님은 청진에 남았고, 큰삼촌은 청진으로 돌아간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이때부터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즈음 현동화 회장은 김화고급중학교(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북한의 학제는 6·3·3·4였는데 중학교 과정은 초급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은 고급중학교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 회장은 이후 원산해양전문학교에 진학했다가 다시 김화고등학교에 적을 둔 채 원산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평양의 사동군관학교에 지원했다. 사동은 평양에서 대동강을 건너 동북쪽으로 40~50km가량 떨어진 무연탄 탄광도시로 일본군 병참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평양 군관학교를 우수하게 졸업한다는 것은 모스크바로 가는 지름길의 하나였다는 것이 현 회장의 얘기다.
 
 
  군관학교 입학
 
  현 회장은 “북한이 6·25 전쟁을 준비한 것은 1948년부터로 보인다”고 증언했다.
 
  “고급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인민군 장교들이 학교에 와서 군사 훈련을 시켰습니다. 일주일에 4~5시간씩은 꼭 받았어요. 고급중학교 이상의 모든 교육기관에는 인민군 장교들이 배속됐습니다. 사동군관학교에 들어간(1950년) 이후에는 훈련이 더욱 심해졌고요.”
 
  —어떤 훈련을 받았나요.
 
  “군관학교에서 새벽 4시반에 일어나서 밤 10시까지 고된 훈련을 받았는데 낮에는 사격훈련, 독도법, 수류탄 던지기, 참호 파기 등 필드훈련을 중점적으로 받았습니다. 저녁식사 후에는 10시까지 사상교육이 실시됐습니다. 하루 40km 이상을 걷는 행군 때는 속도 조절과 휴식 요령을 배웠습니다. 때로는 한밤중에 비상을 걸어 야간훈련을 시켰습니다. 교육은 대부분 중령급의 직업장교들이 담당했습니다. 본격적인 전시 준비에 들어갔던 거죠.”
 
  —사상교육이라 함은요.
 
  “‘미제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 ‘남반부를 해방해야 한다’는 구호가 빗발쳤습니다. 군관학교에 입교할 때부터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생도들은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을 직감했습니다. 군관학교는 원래 3년제인데 전쟁이 터지자 부족한 초급장교를 충원하기 위해 6개월 이하의 단기교육만으로 소위나 중위, 또는 대위로 임관시켜 전선에 내보냈습니다.”
 
 
  “한강철교 끊을 수밖에 없었을 것”
 
6·25 당시 서울에 입성하는 북한군.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현동화 회장은 군관학교에 입학한 지 7개월 만에 북한군 중위로 전쟁에 내보내졌다. 1950년 6월 25일, 그는 평양에 있었다. 연천·철원·화천의 포병부대를 지원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리고 새벽 4시, 38선 이남 전역을 대상으로 한 기습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현 회장의 기억이다.
 
  “개성 쪽은 전투력이 강한 인민군 5, 6사단이 진격했습니다. 5, 6사단은 중국 팔로군 출신의 전투 경력이 풍부한 정예부대였죠. 이들은 1949년에 이미 38선 위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탱크여단이 있었는데, 그때 북한에 탱크가 200대 이상 있었습니다. 소련군 군사고문들은 대대까지 나와 있었고요. 포 배치, 작전을 어떻게 하는지를 소련군들이 전부 다 지휘했습니다. 당시 소련의 주력포가 75mm였는데 그걸 디립따 남한에 쏜 겁니다. 그리고 지프차를 타고 이남까지 내려왔죠. 인민군이 의정부까지 내려왔을 때 평양에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남에서 쳐들어왔기 때문에 영용한 인민군 용사들이 응징하느라 이남으로 진격하고 있다’고요.”
 
  —북한군이 벌써 의정부까지 갔는데요.
 
  “인민군이 서울 가까이 갔는데 평양에서 그 방송이 나왔습니다. 6·25 전쟁을 두고 한국에서 북침설이 있다는 얘기를 저는 인도에서 들었습니다. 정말 얼토당토 않은 얘기입니다. 그때 저는 평양에서 방송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6·25 전쟁은 북한이 철저하게 준비해 일으킨 전쟁입니다. 개성을 무너뜨리고 난 뒤 서울은 쉽게 점령했습니다. 북한군이 3일 만에 서울에 입성했는데 진격이 계획보다 너무 빨라서 보급이 뒤따르지 못했잖습니까. 평양에서도 이렇게 손쉽게 서울을 손에 넣을 줄 몰랐다는 얘기들이 많았습니다. 영등포에서의 이틀이 인민군의 운명을 바꿨지만요.”
 
  —익히 알려진 바지만 북한군이 단숨에 밀고 내려왔다는 것 아닙니까.
 
  “국군 한 대대가 영등포에서 방어하면서 대항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대항 부대가 하나도 없었어요. 군사작전상 제일 힘든 것이 상륙작전이라면 그 다음은 도하작전쯤 될 겁니다. 아마 인민군이 전승 기분에 취해 해이해지지 않았다면, 또 후방 보급이 늦어져 영등포에서 이틀을 쉬지 않았다면 아마 남한이 낙동강 전선에서 방어를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틀이 아니었다면요.
 
  “한국에서 한강철교를 끊은 얘기를 두고 여러 말들이 오간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때는 그렇게밖에 판단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그 지점에서 인민군을 차단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겁니다. 당시 남한 전력으로는 전쟁을 할 수가 없었어요. 팔로군 출신의 정예 사단이 포진해서 포를 갈기면서 내려오는데 대전차포 하나 없는 나라가 무슨 수로 막습니까.”
 
  —전쟁 소식은 실시간으로 들었습니까.
 
  “네. 평양에서 서울 점령 소식을 실시간으로요. 그때 평양에서는 인민군이 대구까지 쉽게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팔공산 전투에서 인민군이 패배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요.”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 끝나니 서울서 봅시다”
 
  현동화 회장은 1950년 7월 말, 제 26 방어여단에 소속돼 황해도 사리원을 거쳐 철원·화천으로 내려왔다. 25·26·27 여단은 남으로 진격한 북한군이 퇴각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 38선 지대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급히 만들어진 전투부대였다. 그리고 그해 8월 말, 현 회장은 강원도 남천에서 미군 B24의 폭격으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 벌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조그만 강가에 모여 있던 북한군을 발견한 미군기가 융단 폭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음을 들으면서 현 회장은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상에 누워 있었단다. 현 회장의 얘기다.
 
  “비행기가 한바탕 폭탄 세례를 퍼붓고 지나갔는데 저와 연락병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답니다. 머리와 등에 파편이 박혔습니다. 나중에 인도에서 X레이를 찍어 보니 정면에서 보면 심장의 중심에, 측면에서 보면 심장에서 불과 몇 mm 떨어진 뼈에 파편이 박혀 있더군요. 죽을 뻔했는데 천우신조로 살아난 거죠. 모스크바행 직행 열차로 생각했던 군관학교가 저승길의 직행 열차가 될 뻔한 겁니다.”
 
  현동화 회장은 야전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소속부대가 옮겨갔다는 경기도 연천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도착해 보니 부대가 강원도 화천으로 이동한 뒤여서 다시 그리로 이동했다. 연천을 출발해 철원을 지날 즈음, 그는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부대에 들렀다. 바로 옆 학교 건물에 붙잡힌 미군 포로들이 보였다. 현 회장의 얘기다.
 
  “목욕을 못해 심한 냄새가 났습니다. 짚신을 새끼줄로 동여맸는데 상처 난 발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 차마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는지, 왜 저들은 이 먼 나라까지 와서 어이없는 꼴을 당하는지 싶은 심정이 어린 마음에도 들더군요.”
 
  그렇게 연천에서 화천으로 이동하면서, 그는 ‘쌕쌕이(제트기)’라는 것도 처음 봤다. 현 회장은 “쌕쌕이의 속도나 위력이 어찌나 강력한지,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 번은 도보로 이동 중일 때, 순식간에 ‘쌕쌕이’들이 날아오면서 기관총을 쏘아댄 적이 있었다고 한다. 현 회장이 논두렁이 엎드렸다가 일어나 보니 논두렁 언덕 위에 기관총 자국이 촘촘히 나 있었다. 그와 함께 이동 중이던 다섯 명 중 셋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는 1950년 9월 20일 경에 소속부대가 있는 화천에 도착했다. 그때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1950년 9월 15일)으로 미군의 반격이 시작된 뒤였다. 현 회장은 여기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오른쪽 눈 밑 상처를 얻게 된다. 현 회장의 얘기다.
 
  “하루는 참호에 있는데 미군 폭격으로 참호 천장의 나무 받침대가 내려앉았습니다. 그때 머리와 눈에 큰 상처를 입었죠. 그 상처 때문에 제3국행을 택하게 됐으니 제 운명을 바꾼 날입니다.”
 
  현 회장은 응급조치를 받고 김화에 있던 부모에게 돌아왔다. 집으로 와서 이틀이 지나자, 국군이 그 일대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국군 6사단에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다발총과 권총을 반납하고 귀순했다.
 
  마침 국군 제6사단의 정훈장교였던 정창모 소령은 김화 출신으로 그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현 회장은 “정 소령의 주선으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그가 그 부대에서 벌이고 있던 ‘선무 사업’에 동참하라기에 이를 수락했다”고 말했다. 그의 ‘선무 사업’ 임무는 산에 숨어 있는 패잔병들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미군의 반격으로 인해 북한군 대열이 지리멸렬 패퇴하고 있었다. 현 회장은 국군 6사단과 함께 압록강으로 이동하던 즈음에 다시 부상 후유증을 심하게 앓게 된다. 압록강이 불과 몇 십 km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의 얘기다.
 
  “정 소령이 제 상태로는 더 이상 무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이 끝날 테니 서울에서 만납시다’라고 연락처를 주면서 저를 후송시켰습니다. 그때는 유엔군의 승리가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고 보였거든요.”
 
 
  빨치산과 합류하려 땅굴 파
 
  현동화 회장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로 후송됐다. 북한군 포로가 된 그는 인천형무소, 부산형무소에 머물렀다. 미군 수송선을 타고 거제도의 북한 장교 포로수용소인 ‘66 수용소’로 옮겨진 것은 1951년 3월경이었다. 이때부터 포로들은 친공(親共)과 반공(反共)으로 분류돼 각기 다른 캠프에 수용됐다.
 
  현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수용소 내의 생활은 일반 군 생활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미군과 한국군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수용소의 바깥 경비만을 담당하고, 내부는 포로들이 스스로 구성한 조직과 기구가 관리했다. 식사도 자기들이 만들어서 알아서 배급하게끔 했다. 현 회장의 얘기다.
 
  “캠프의 수장이 어떤 성향이냐에 따라서 캠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친공 캠프에서는 매일 군사훈련을 시키고, 인민군 군가 부르고, 자아비판을 매일같이 했습니다. 반공 캠프의 분위기는 정반대였고요.”
 
  —‘66 수용소’는요.
 
  “장교 수용소였던 만큼 철저한 친공 캠프였습니다. 장교들 중에는 반공이 없다고 보고 모두 친공으로 간주한 겁니다.
 
  거제수용소로 옮겨온 뒤 2~3개월이 지난 여름부터는 본격적으로 군사훈련이 시작됐습니다. 캠프에서 군가를 부르고 훈련을 했죠. 자아비판을 하면서 정신무장 교육도 함께 했습니다. 전투 자세로 수용소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66 수용소’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형을 이용해서 땅굴을 팠습니다. 지리산 빨치산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탈출로를 만들기로 한 겁니다.”
 
  —얼마나 팠습니까.
 
  “몇 달에 걸쳐 꽤 팠습니다. 내부 고발자가 미군에 고발하는 바람에 들통이 났지만요. 땅굴을 발견한 미군이 탱크를 동원해서 강력히 차단했기 때문에 끝났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親共이 反共 살해해 땅에 묻어
 
  —내부 고발자가 있었다는 것은 장교 캠프 내에도 반공이 있었다는 소리 아닙니까.
 
  “저도 반공이었으니까요. 이북에서도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싫어했습니다. 우리집처럼 전 재산을 몰수당한 곳은 더했습니다. 좀 있는 집안의 아들들은 전부 반공이었습니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요. 이북에서 체제에 불평, 불만을 하면 무조건 아오지로 보냈습니다. 저는 이북의 통치 힘은 커뮤니케이션 차단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동무니까, 동무들끼리 감시하면서 체제를 이어 가는 겁니다. ‘66 수용소’에서도 저와 같은 반공 인사들이 철저하게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함께 인도에 남은 지기철씨를 만난 것도 이때였습니다. 물론 친공 포로들이 반공 포로들을 색출하려는 작업 역시 계속됐죠.”
 
  —수용소 내에서 이념 갈등이 계속됐군요.
 
  “굉장히 추운 겨울 아침이었는데 옆 막사의 포로 한 명이 저보고 나와 보라고 하더군요. 며칠 전에 저와 모래 씨름을 했던 포로가 죽어 있었습니다. 다른 포로들에 의해 살해당한 흔적이 역력하더군요. 순간 ‘왜 나한테 이 모습을 보여줄까’ 싶은 생각이 스쳤는데 서로 친공, 반공을 테스트하고 있다 싶었습니다. 시체를 보면서 태연하게 ‘그 새끼 잘 죽었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저한테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친공’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겠죠.
 
  나중에 모래 씨름을 했던 이와의 대화를 곰곰이 곱씹어 봤습니다. 그가 ‘연전 출신의 대위가 남로당 계열이기 때문에 대위 계급장밖에 달 수 없었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자신이 우익임을 전달하려는 반어법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서로의 사상을 의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시체처리는요.
 
  “수용소 내의 땅 밑에 매장했습니다. ‘66 수용소’는 막사 옆에 영화나 연극을 하는, 노래자랑을 했던 콘셋(원통 막사) 건물이 있었는데 그 무대 뒤에 땅을 파고 묻었습니다.”
 
 
  북한의 지령 받아 수용소 내에서 말썽 일으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한국군 경비병이 포로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들을 보여주고 있다.
  현 회장은 “사상 검증 이외에 비교적 평화로웠던 수용소의 분위기가 중공군의 공세로 한국군과 미군이 쫓기게 되자 돌변하기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또 하나의 전장으로 변했다’고 표현했다. 그의 얘기다.
 
  “중공군의 반격으로 한국군과 미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잠잠하던 공산 과격파들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포로들 중에는 반공 포로로 위장한 이북 첩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인민군 수뇌부와 연결이 있어서 북측 지령을 받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지령받기가 쉬웠나요.
 
  “여러 루트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회의를 하거나 지령을 전달할 때 막사 사이에 연결하는 굴을 파서 지하 비밀통로로 사용했습니다. 철조망을 뛰어넘어 탈출하는 훈련도 했습니다. 강당에 있는 널빤지를 가져다 철조망 위에 얹고는 이를 딛고 철조망 울타리를 넘는 연습을 했습니다.
 
  수용소 안에 무기, 흉기들이 꽤 많았습니다. 우선 좌우 양측의 포로 대표들은 대개 권총이 있었습니다. 안에서 만들기도 했습니다. 드럼통 뚜껑을 떼내어 날을 갈고 나무 자루에 끼워서 창을 만들었습니다. 군화를 뜯어서 끄집어낸 쇠를 갈아 단도를 만들었습니다. 미군이 가끔 무기와 흉기를 찾아내기 위해 막사를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지령받고 움직인 사례를 든다면요.
 
  “‘66 수용소’에서 미군이 포로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처럼 꾸민 적이 있습니다. 이북에서 ‘한국전쟁은 어차피 이데올로기 전쟁이다. 포로들을 이용해 폭동을 일으켜서 전 세계에 선전을 하라’고 했습니다.
 
  포로들은 수용소의 돗드 소장을 납치하기로 하고 면회를 요청했습니다. 돗드 소장이 정문 앞에 미군 5~6명을 데리고 나왔는데, 거기서 포로들이 덮어놓고 소장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소장이 끌려가니까 미군들도 속수무책이었죠. 그때 포로가 ‘미군이 이런 잘못을 했다’고 얘기하라는 조건들을 제시했습니다. 실제로 돗드 소장이 포로들이 쓴 대로 읽었는데, 포로들이 이런 식으로 선전을 했습니다.”
 
  —소장을 납치했으니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돗드 수용소장이 납치된 후에 포로들의 소동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결국 미군이 전투부대로부터 탱크를 이동시켜서 수용소 뒤편 산에 배치하고, 폭격기가 위협 비행을 해서 소동을 진압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포로들은 ‘후방교란의 효과가 컸다’고 스스로 평가했습니다.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전방으로부터 탱크 등 전투장비와 인력이 투입됐으니 전선의 미군 전력을 약화시켰다는 겁니다. 공산 포로들은 기회만 있으면 말썽을 부려 댔습니다. 미군과 심하게 대립한 과격파들 대부분은 전쟁 도중에 남한 지역에서 모병을 통해 동원됐거나, 자원 입대한 의용군 출신이었습니다.”
 
 
  “현실적인 이유로 제3국행 선택”
 
북한으로 돌아가는 포로들은 유엔군으로부터 받은 옷가지 등을 길에 버리는 것으로 자기들의 충성심을 표시했다.
  현동화 회장과 함께 수용된 ‘66 수용소’에는 문화부 부사단장으로서 38선을 넘어 서울에 제일 먼저 입성한 사람이 있었다. 현 회장은 “이 사람을 비롯해, 북한 출신의 장교들은 남쪽의 빨치산 출신이나, 남로당 계열의 사람들을 무시했다”고 기억했다.
 
  “북한 장교들은 식민지 점령군과 같은 우월감이 있었다고 봅니다. 문화부 부사단장이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신촌에 있는 한 대학 강당에 남로당 핵심 간부와 노동자, 농민, 학생 대표들을 모아 놓고 공산혁명의 당위성과 앞으로의 시책 등을 얘기했다고 합니다.
 
  설명을 마친 다음에 참석자들에게 ‘기탄없이 질문하라’고 했는데 그 질문의 내용이 빈약하더라는 겁니다. 부사단장은 ‘북한의 초급중학생 정도밖에 안 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즉시 중앙당에 그 내용을 정리해서 ‘남로당 출신들을 중용하거나 믿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보고문을 제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거제포로수용소는 제3의 전장이 되어 갔다. 현동화 회장 역시 자신이 반공임을 숨긴 채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늑막염을 앓게 되어 수용소 내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군의관들은 성의껏 치료를 해 주면서 늑막염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니, 몸을 많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일러줬다고 한다. 현 회장은 이것을 ‘기회’라고 받아들였다. 그의 얘기다.
 
  “지금 생각하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미련한 행동이었지만, 그때는 어떻게 해서든 거제도 수용소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일부러 병을 덧나게 하려고 받아 온 약을 조금씩만 먹고, 몸을 심하게 움직였습니다. 치료를 계속해도 회복이 될 리가 없죠. 군의관들이 늑막에서 물을 빼다가 ‘안 되겠다.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해서 수용소에서 조금 떨어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공산 캠프에서 우익이라는 색채가 발각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지냈던 포로들이 반공 캠프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66 수용소’에 계속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동화 회장은 거제도의 병원을 퇴원하면서 가야 수용소로 옮겨졌다. 수용소 내에서도 바깥 소식은 대충 들을 수 있었다. 가끔 신문이 들어오고, 라디오를 통해 윤곽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 현 회장의 얘기다.
 
  “휴전 회담이 타결을 보지 못하고 지연되는 이유가 포로의 자유 송환 문제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아서라는 것을 듣게 됐습니다. 들려온 바로는 멕시코 대표가 유엔(UN)에서 ‘포로들의 선택은 자유의사에 맡기자’는 주장을 폈고, 또 멕시코로 오겠다던 희망자들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도 있다고 합디다. 그 얘기를 듣고서 멕시코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반공인데 왜 남한을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현실적인 이유로 제3국을 택했습니다. 무슨 이념이나 가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북에는 죽어도 가기 싫었고, 남에는 아무 연고가 없었습니다.
 
  미국에 가면 제 눈 밑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상으로 심하게 남아 있는 상처를 없앨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은 의술이 훨씬 발달돼 있을 테니까’라고 생각했죠. 그때는 멕시코를 가면 미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합법적인 미국행이 여의치 않으면 밀입국을 할 수 있다고도 했고요. 해방 후에 공부다운 공부를 못한 것이 아쉬워서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를 닦더라도 공부 한번 해 보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중립지대 수용소에서 가장 불안”
 
반공 포로 문제를 다룬 인도 신문 《The Sunday Stateman》의 1956년 2월 6일자 기사. 오른쪽 선글라스를 쓴 이가 현동화 회장이다.
  심정적으로 ‘멕시코행’을 선택한 현동화 회장은 다시 영천 수용소로 이송됐고, 장교 출신들은 그곳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도쿄제대를 나와 김일성 대학에서 미학을 가르치던 김모 교수가 월간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교재로 강의를 했다. 미군 수용소장의 통역 담당도 그의 몫이었다.
 
  현 회장에 따르면, 영천 수용소에는 쟁쟁한 인사들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하루는 도쿄의 유엔군 사령관에게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호소문을 보내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현 회장의 얘기다.
 
  “내용은 이랬어요. ‘우리가 왜 자유를 선택하게 되었는가? 앞으로 우리는 자유 대한의 일꾼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인데 처우가 너무 나쁘다. 거제도의 공산 수용소에 있을 때보다 처우가 더 못해졌다. 개선을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원고를 넘겨받은 김 교수가 영일(英日) 사전과 일영(日英) 사전을 뒤적거리면서 사흘을 고민해 작성했습니다.
 
  이 종이가 수용소장이었던 미군 대령에게 전달됐는데 그 대령이 깜짝 놀라더랬습니다. 《타임》지 논설위원도 무색할 정도의 영어 작문 실력이라면서 말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눈에 띄게 처우가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영천 수용소에 머물렀던 현 회장은 부산으로 가서 중립 지대에 수용소가 마련될 때까지 대기했다가 다시 기차편으로 문산으로 이송됐다. 3개월의 유예 기간을 주어서 자유 선택을 하도록 한다는 협정에 따라, 약 8000명의 포로들이 중립지대로 옮겨졌다. 문산 중립지대에서는 장교와 사병을 구별하지 않고 섞어서 30~40명씩 편성한 한 조가 같은 텐트 안에서 생활을 했다.
 
  현 회장은 “수용소 바깥으로는 이중으로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는데 캠프의 규모는 거제도나 부산에 비해 훨씬 작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중립지대 수용소에서의 생활도 이전의 수용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산에 도착했을 때 포로들의 마음은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1950년 10월부터 만 3년 동안 포로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중립 지대에 온 포로들이 가장 불안해했습니다. ‘당초의 약속대로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고 북으로 송환되는 것은 아닐까’, ‘북한군이 수용소를 공격해 강제로 끌고 가지 않을까’ 하며 불안해했습니다. 문산까지 왔던 포로 중에서 일부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북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저를 비롯해 제3국행을 선택했던 88명은 끝까지 남았습니다.”
 
  6·25 전쟁의 포로로 ‘제3국’으로 가겠다는 이들을 받아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들은 지난 1954년 2월 인도로 향해 인천항을 떠났다. 현 회장은 “아스트라호는 홍콩, 싱가포르를 거쳐 14~15일 만에 인도에 도착했다”고 기억했다.
 
 
  멕시코行 꿈꾸다 끝내 인도에 둥지 틀어
 
  현동화 회장은 항구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던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현 회장은 “기다리고 있던 군악대가 연주를 하는 가운데 우리의 인도 도착을 환영하는 대회가 열렸다”고 말했다.
 
  “인도는 여러분을 환영한다. 인도 역시 가난한 나라여서 여러분들에게 만족스럽지는 못하겠지만 최선의 성의를 다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인도 남부 사령관은 자신 역시 과거에 포로였던 경험이 있다면서 우리에게 친근감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어요. 시인 타고르가 인도 사람이라 것 외에는요.”
 
  —낯선 곳에서 두려웠을 텐데요.
 
  “언젠가 멕시코로 갈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인도 정부의 관리를 받으면서 생활했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지 2년이 지난 다음에야 브라질이 처음으로 석방 포로들을 받아들이겠다고 했고, 곧이어 아르헨티나가 인수 의사를 알려 왔습니다. 인도에 정착하기를 희망했던 12명은 남았고, 나머지 66명은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떠났습니다. 저와 몇몇은 멕시코 정부로부터 소식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끝내 소식이 오지 않았죠.
 
  “운명인 거죠. 소식을 기다리다 끝내 뉴델리에 잔류했으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인도에 남게 된 현동화 회장은 인도 정부로부터 한 달에 50루피(약 15달러)를 지급 받았다. 당시 인도에서 한 달간 생활하는데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단다.
 
  하지만 그는 국적 없는 난민이었다. 현 회장은 인도 정부로부터 융자를 받아 도시 외곽에서 닭 5000여 마리와 돼지 30~40마리를 기르며 인도 생활을 시작했다. 인도의 여름 기온은 섭씨 46~47도까지 치솟았다. 이 기온에서는 닭들이 폐사하기 때문에 닭집을 볏짚으로 덮었다 벗겼다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새벽 3시까지 무더웠던 기온은 새벽 4시가 되면 이불을 덮지 않으면 추워서 못 잘 정도로 돌변했다.
 
  현 회장을 비롯해 다섯 명이 양계장을 시작했는데, 두 명은 질병을 얻었고, 다른 한 명은 사망했다. 부지런히 일한 덕분에 5년 뒤에 정부로부터 융자받은 원금을 모두 갚았다.
 
  그리고 1962년 4월, 남북한이 동시에 인도와 총영사 관계를 맺었다. 한국 정부는 인도 뉴델리에 바로 총영사관을 설치했고, 인도는 1968년 10월에야 서울 총영사관을 개설했다. 현동화 회장은 외교 채널을 통해 다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1969년 남한 땅 밟아
 
  “난민 생활 뭐, 비참하지요. 1969년에야 다시 남한 땅을 밟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족들이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합디다. 가족이 월남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제3국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겠지요. 이런 게 운명인가 싶었습니다. 격동의 세월을 산 것도 운명이지요.”
 
  현동화 회장은 이후 한국총영사관에 잠시 근무했다가, 이후 ‘인도 코리아 트레이더스’라는 무역 회사를 만들어 한국과 인도 양국간의 무역 사업을 시작했고 인도한인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종종 한국에 올 때마다 포로수용소, 전쟁기념비를 찾곤 한다는 그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묻고 들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사람들이 저한테 전쟁, 포로수용소 얘기를 많이 묻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에 더 선명한 것은 철원 근처를 지날 때 봤던 미군 포로들입니다. 인민군에 잡혀서 처참한 몰골로 있던 그 사람들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이 현동화를 위해서, 생면부지인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단 말입니다. 그걸 잊으면 안 됩니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돼요. 겪어 본 사람은 압니다. 그 처참함은 60년 넘도록 지워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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