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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영화 〈연평해전〉 제작한 김학순 감독

“大韓民國과 海軍 위해 할 일 다 했다고 생각”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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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해전〉은 국민이 만든 영화… 기부자 엔딩크레딧만 20분 분량”

⊙ 25억 저예산 영화가 100억 규모로… “농부의 돼지저금통 기부는 차마 뜯지 못해”
⊙ 전쟁영화 최초 3D 제작… “참수리호 선상에서 6용사와 함께 싸우는 느낌”
⊙ 知人의 핀잔 듣고 영화촬영 결심… 《월간조선》 보도한 북한군 交信기록도 영화에 삽입
⊙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젊은이들, 左右·與野 차원 문제 아니다”

金學詢
⊙ 57세. 홍익대대학원 미학과 졸업, 뉴욕대대학원 영화학 석사, 미 템플대 영화제작 석사.
⊙ 서울예술대 영화과 교수, 대종상영화제 예심위원, 사단법인 영상기술학회 회장,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역임.
⊙ 現 서강대 영상대학원장, (주)로제타시네마 대표.
⊙ 상훈: 휴스턴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최우수신인감독상), 하와이국제영화제 넷팩상,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 신인감독상, 에딘버러국제영화제 Best of the Fest.
⊙ 작품: 〈비디오를 보는 남자〉 〈초롤케의 딸〉 〈백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후원금이 모일 때마다 굉장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 성원이 압박이면서도 영화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어요. 이 영화를 무조건 감동적으로 만들어 국민 한 사람이라도 더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4월 29일 서강대 영상대학원에서 만난 김학순(金學詢·57) 감독은 “이 영화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면서 “돈이 없어서 중단하고 배우도 중간에 교체하는 등 곡절은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해군과 유가족,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이제야 터널 끝이 보인다”고 했다.
 
  서해 연평도 근해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지키다 교전 중 사망한 6용사의 실화를 담은 〈연평해전〉은 6월 11일 개봉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연평해전〉 포스터가 붙은 교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최종 편집 중인 컴퓨터와 모니터, 카메라와 야전침대 등이 눈에 띄었다. 김학순 감독은 때꾼한 얼굴로 “어제 밤샘 작업을 하며 가까스로 최종 편집을 끝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 감독은 모니터에 영화 속 한 장면을 띄웠다. 윤영하 소령(정장),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한상국 중사, 박동혁 병장 등 승조원들이 모여 2002 월드컵 3~4위전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날 북한이 NLL을 침범해 교전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평화롭게 흘러갔을 일상적 풍경이었다.
 
  〈연평해전〉은 지난 4월 23일 1차 예고편 〈그날의 기억〉을 공개하자마자 2015년 상반기 화제작답게 네이버 등 온라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랭크되는 한편, 누적 조회수 100만명을 단숨에 돌파하며 관객몰이를 예고하고 있었다. 1분47초 분량의 예고편은 연평해전 생존 대원들의 그날의 회고와 영화 속 장면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구조다.
 
  통신병이었던 김용태(당시 21세)씨는 “사람들, 비명들, 살려달라는 외침들…. 그 생생했던 현장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고 했고, 통신장 이철규(당시 27세)씨는 “지금까지도 고맙고, 많이 생각나고, 많이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해 뭉클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知人의 ‘핀잔’ 듣고 촬영 결심
 
영화 〈연평해전〉을 제작한 김학순 감독이 서강대 영상대학원 연구실에서 시나리오를 보여주며 제작과정을 이야기했다.
  〈연평해전〉은 지난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25분 무렵 서해 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일어난 남북 간 해전을 담은 작품이다. 1999년 6월 15일 오전에 발생한 ‘제1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만에 같은 지역에서 일어나 ‘제2연평해전’으로 불린다.
 
  북한 경비정 2척이 남한 측 NLL을 침범하면서 벌어진 25분간의 해전으로 한국 해군 윤영하 대위, 한상국 하사, 조천형 하사, 황도현 하사, 서후원 하사, 박동혁 상병 등 6명이 전사하였으며, 19명이 부상했다. 그리고 참수리 357호는 침몰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군인들의 희생은 월드컵 열기로 인해 뒤로 밀려났다. 모두가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기억하지만, 연평해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영화 한 편이 만들어졌다. 영화 〈연평해전〉은 이들의 희생에 감사하고,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한 작품이다.
 
  김학순 감독은 2007년 최순조 작가의 소설 《연평해전》의 판권을 사들여 영화화를 시도했으나 희생 용사 유가족이 고사해 오랜 설득을 거쳤다. 김학순 감독은 뜻하지 않게 천안함 침몰 사건의 다음 날인 2010년 3월 27일 ‘연평해전’ 희생 용사의 유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영화화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영화 〈연평해전〉 포스터.
  김 감독은 “2002년 6월 29일 한·일 월드컵 3-4위전이 열리던 날, 우리나라에는 두 개의 상반된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한쪽에서는 월드컵으로 국위선양하며 온 국민이 흥분과 기쁨에 들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서는 젊은 용사들이 적과 싸우다 차가운 바다 한복판에서 죽어 가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같은 태극기 아래에서 180도 다른 일이 동시에 발생한 거죠. 월드컵 4강으로 들떠 있는 국민들을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국민들을 위해 희생한 젊은이들도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좌든 우든 나라가 뭔지 되새겨 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평양 출신 실향민 부모를 둔 김 감독은 뉴욕대와 템플대 대학원, LA 아메리칸 필름 인스티튜트(AFI)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2003년 영화 〈비디오를 보는 남자〉로 데뷔해 휴스턴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신인 감독상을 받았다. 주로 다큐를 촬영해 오던 그가 제2연평해전 영화를 촬영하게 된 것은 지인의 ‘핀잔’이 계기가 됐다.
 
  “2007년쯤이었습니다. 지인들과 대화 도중 제2연평해전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 사람이 ‘영화인들은 뭐하느냐’고 하더군요. 6·25전쟁 이후 최대 규모 전투였고, 우리의 꽃다운 6용사가 전사한 사건임에도 대다수 국민들이 잊어가는 이 스토리를 왜 영화로 다루지 않느냐는 이야기였어요.”
 
  해군 병장 출신인 김 감독은 “고속정 ‘참수리 357호’에서 산화한 6용사 유가족들의 기막힌 사연과 눈물을 지켜보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화도 나고 안타까움도 느꼈지만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지만, 이 영화를 만드는 게 내 운명처럼 느껴져 결국 메가폰을 잡았다”고 했다.
 
  —그래도 감독의 입장에선 영화의 의미보다 상업성도 중요했을 텐데요.
 
  “솔직히 처음엔 투자를 기대할 수 없어 상업성까지는 생각 못했습니다. 다큐멘터리라도 좋으니 연평해전 스토리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처럼 크라우드펀딩(소셜미디어나 인터넷 등의 매체를 활용해 자금을 모으는 투자 방식)을 통해 꾸려 갈 생각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고려하게 된 것은 기업은행과 배급사가 붙고 나서였습니다.”
 
 
  장교–부사관–병사 상징인물 중심으로 스토리 전개
 
윤영하 대위(가운데)를 중심으로 참수리 357호 대원들이 2002 한일월드컵 3-4위전을 응원하고 있다.(사진=NEW)
  영화제작을 위해 6년 동안 전국의 추모행사를 찾아다니며 유가족과 만남을 이어 온 김학순 감독은 2007년 소설 《연평해전》 판권 인수와 더불어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했다. 다행히 2010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3D 촬영을 위한 10억원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천안함 사건 등으로 제작을 무기 연기했다가 201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10주기 전사상자 후원의 밤’에서 영화제작을 공식화했다.
 
  〈연평해전〉은 기본적으로 전쟁영화다. 아버지를 이어 해군 장교가 된 윤영하 대위, 신혼생활 중이었던 한상국 하사, 어머니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박동혁 상병 등 영화는 이들이 꼭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이 있는 인물로 그린 뒤, 처절한 전투로 이어지는 전쟁영화의 기본 공식을 따르고 있다.
 
  —관객들에게 영화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하려고 했습니까.
 
  “한반도의 현실을 가급적 많은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시나리오를 여러 차례 수정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가 교묘하게 애국심과 휴머니즘을 고취하듯, 〈연평해전〉도 6용사의 휴먼 감동 실화를 시나리오에 테크니컬하게 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어요. 콘티 짜고 배우 캐스팅은 그 다음 일이니까요.”
 
  영화는 박동혁 상병과 윤영하 대위, 한상국 하사가 중심인물이다. 박 상병은 모든 병(兵),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의 마음과 맞물려 있다. 윤 대위는 장교, 한 하사는 부사관을 대표한다.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84일을 병상에 누워 있다가 떠난 박동혁 상병. 승조원 모두를 끝까지 보살펴야 하는 의무병이었다.
 
정장 윤영하 대위 역을 맡은 김무열. 전역 직후 처음으로 고른 작품에서 그는 윤영하 대위를 카리스마 있고 원칙있는 리더로 그리고 있다.(사진=NEW)
  김 감독은 “천안함에서 의무병을 지낸 박동혁 상병은 2002년 4월부터 참수리 357호에서 근무하다 연평해전을 맞았다” “티 없이 맑고 책임감이 강한 청년이 포탄과 총탄 세례 속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부상자들을 향해 달려갔다”고 했다.
 
  특히 6인의 전사자 중 침몰한 참수리 357호에서 조타키를 움켜쥔 상태로 발견돼 구조대원들을 숙연하게 한 한상국 하사 역은 〈명량〉 〈세시봉〉에 출연한 배우 진구가 맡았고,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함교를 뛰어다니며 부상병들을 돌본 박동혁 상병 역은 이현우가 맡았다.
 
  백일된 딸 시은이를 남기고 전사한 조천형 하사, 벌컨포 사수로 전사해서도 방아쇠를 당기고 있어 해군을 오열하게 한 황도현 하사도 주요 인물이다. 김 감독은 “윤영하 대위 역의 김무열씨는 제대를 앞둔 배우여서 사방에서 달려드는 바람에 캐스팅이 쉽지 않았다”면서 “워밍업 시간이 부족했음에도 촬영장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을 척척 해 냈고, 진구와 이현우도 형과 동생처럼 호흡이 잘 맞았다”고 했다.
 
  —처음엔 출연배우들이 재능기부로 참여했다죠.
 
  “윤영하 대위 역에 정석원씨, 박동혁 상병 어머니 역에 양미경씨 등이 재능기부로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제작을 7년이나 끌다 보니 소속사의 촬영 스케줄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차하는 분들도 무척이나 아쉽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양미경씨는 촬영 중간에 기업은행 투자유치와 배급사가 결정돼 개런티를 드리겠다고 했음에도 계속 노개런티로 촬영하겠다고 할 정도였어요.”
 
 
  3D는 메시지 전달하기 위한 ‘툴’
 
2014년 6월 29일 오전 경기 평택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12주년 기념식에서 고 조천형 중사의 유가족으로 보이는 한 어린이가 조 중사의 부조에 손을 대고 몸을 기울인 채 입을 맞추고 있다.
  2013년 4월 중순부터 2개월여 경남 진해 군항부두의 촬영장에서 전투신을 촬영했다. 해군에서 초계함(PCC) 2척과 고속정(PKM) 6척, 공군에서 폭격기와 헬기를 지원받아 항공·해상 촬영 등에 몰두했다.
 
  김 감독은 “세트에서 촬영하면 정해진 기일 내에 책정된 예산 범위 내에서 찍을 수 있다”면서 “세트장이 확보되지 않으면 해군 선박으로 3~4배의 시간과 인력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세트장에서 촬영한 것보다 편집과정에서 박력 있고 라이브한 장면은 거의 흔들리는 해군 선박이나 헬기에 생명줄 걸고 항공 촬영한 것들이었다”며 “처음엔 하루 종일 배 타고 촬영하는 게 어찌나 심하게 멀미가 나던지 죽을 지경이었는데, 조금 지나니 뱃사람이 다 됐다”며 껄껄 웃는다.
 
  〈연평해전〉은 2014년 여름부터 2015년 초까지 진해·부산 등에서 촬영했다. 김학순 감독은 이 교전의 처절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투 장면의 리얼리즘을 높였다. 그 방법으로 사용한 게 3D 촬영이다. 김 감독은 “본편 118분 중 교전 장면을 담은 30분이 하이라이트”라며 “바다 위 사방에서 포탄과 총탄이 날아와 마치 관객이 참수리 357호에 승선한 듯한 느낌을 생생하게 줄 것”이라고 했다.
 
  “이건 실화니까 리얼리티가 중요하다고 봤어요. 전투가 시작돼서 끝날 때까지의 상황을 철저히 조사했고, 그것대로 촬영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딱 30분이 되더라고요. 3D 촬영은 그들의 아픔과 공포를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툴(tool)’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투영화를 3D로 제작한 건 〈연평해전〉이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할리우드 영화들도 SF물들이나 주로 3D로 촬영하지, 전쟁영화는 3D로 제작한 역사가 없어요. 배급사나 투자자들은 3D가 효과는 좋지만, 컨버팅 비용 8억~15억원 부담 때문에 섣불리 제작을 못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선 김용화 감독이 〈미스터고〉를 수준급으로 제작했으나, 아쉽게도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3D 성공의 열쇠는 3D로 제작하는 영화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아비규환이 무슨 엔터테인먼트냐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을 듯해요.
 
  “누리꾼들 중에 그런 지적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연평해전〉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참수리호 장병들과 함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윤영하 대위가 교전 중 전사하면서 부하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 흘리는 눈물을 3D로 보면, 함께 울지 않을 수 없어요. 관객들이 3D를 통해 보는 것이 훨씬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북한군 교신기록 생생하게 소개
 
조타장 한상국 하사 역은 영화 〈명량〉 〈세시봉〉에서 좋은 연기를 보였던 진구가 맡았다.(사진=NEW)
  《월간조선》은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우리 측의 참수리 357호 고속정과 교전을 벌인 북한 경비정들이 북한 군부와 나눈 교신내용을 단독으로 입수해 2012년 7월호에 보도한 바 있다. 김 감독은 “교전 부분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였던 만큼, 《월간조선》에서 보도한 교신내용은 상당히 영화에 유용하게 쓰였다”고 했다.
 
  교신내용은 제2 연평해전 당시 대북(對北) 감시부대가 수집해 국방부장관, 국방정보본부, 합참작전본부, 해군작전사령부 등 관련 부대에 통보한 내용으로, 통상 특수정보(SI·Special Intelligence)라고 불린다.
 
  북한은 참수리 357호를 기습공격하기 얼마 전 두 차례의 결정적 도발정보를 노출했다. 북한 감시부대장을 지낸 한철용(韓哲鏞) 장군(육사 26기·예비역 육군소장)은 “6월 13일부터 우리 측 경비정을 공격하려고 상부에 계속 허가를 구했던 그 경비정이 바로 1999년 해전 때 우리에게 얻어맞았던 경비정이었다”면서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대비를 하지 않은 우리 군 지휘부는 부하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함교를 뛰어다니며 부상병을 치료하고 있는 의무병 박동혁 상병 역은 배우 이현우가 맡았다.(사진=NEW)
  6월 13일 대북 감시부대는 북한 해군의 8전대사령부와 북한 경비정 간의 교신내용 중에 매우 중요한 도발정보를 감청했다. 우리 고속정을 목표로 ‘발포’라는 결정적 도발용어가 포함된 북한의 도발정보였다. 이는 14자로 구성된 도발정보(SI 14자)로, 거기에는 당시 해안포로 우리 경비정을 공격하겠다는 것이 언급돼 있었다. 이어 연평해전 이틀 전인 6월 27일, 우리의 북한 감시부대는 북한 경비정이 참수리호를 공격하기 위해 상부의 명령을 요청하는 결정적 도발징후(SI 15자), 즉 ‘발포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를 감청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교전 당일 교신내용은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긴박하게 흘러간다. 제2연평해전 당일 해전이 종료되기 직전, 황해도 소재 신천통신중계소가 북한군 해군사령부의 지시사항을 8전대사령부로 중계하고 있었다.
 
  북 경비정 684호(참수리호를 공격한 경비정)와 또 다른 경비정 388호 등 총 2척이 NLL을 월선해 침범하면서 제2연평해전은 시작됐다. 교신내용에 따르면, 북 8전대사령부는 신천중계소를 통해 오전 10시25분 교전이 벌어지기 약 1시간 전에 이미 “684호 등산곶 동남 4NM 구역 차지할 것”(오전 9시28분), “388호 등산곶 동남 6NM 구역 차지할 것”(오전 9시31분) 등 이미 경비정의 기동지시 구역을 NLL 이남 지역으로 지정하고 있어, 명백하게 의도적 도발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388호는 우리 고속정 편대(2척)를 유인해 분산시킨 후 안전을 위해 기동하겠다고 8전대에 보고한다. 교전 직전인 오전 10시15분, 경비정 684호는 교전 직전 8전대사령부에 “고속정(참수리 357호)이 3NM까지 접근했다”고 보고했고, 오전 10시20분 경비정 388호가 8전대사령부에 “고속정 두 척이 대기동하므로 혼란스럽다”고 보고한다. 이는 교전을 중계하려는 388호가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 “보호하기 위해 기동하겠다”고 보고한 것이다.
 
 
  “불당소리 들리냐”
 
2002년 8월 21일, 해군이 제2연평해전에서 침몰한 참수리 357호를 인양하고 있다.
  우리 해군 고속정의 차단기동이 시작되던 오전 10시25분에 252편대 고속정 2척이 북한 경비정을 향해 북진하다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동쪽으로 함수를 돌리는 순간, 북한 경비정 684호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를 향해 기습적으로 선제공격을 했다.
 
  같은 편대 참수리 358호를 먼저 지나가게 한 다음, 뒤이어 동쪽으로 함수를 돌리던 참수리 357호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앞서 간 참수리 358호가 응전을 못하도록 해 놓고 뒤를 따르던 참수리 357호에 전차포 등을 동원해 집중포격을 가했다. 매복 작전에서 후미를 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앞서 가던 참수리 358호가 대응사격을 하기 위해 선수를 돌리는 사이에 북한 경비정은 4~5분간에 걸쳐 참수리 357호를 표적 삼아 무차별 난타했던 것이다.
 
  북 경비정 388호는 684호 뒤쪽으로 빠져서 위치한 다음, 전투상황을 중계했다. 오전 10시25분 8전대사령부가 “불당소리(포성) 들리냐”고 하자, 388호가 10시30분 다급하게 “포성소리 들린다”고 보고한다.
 
  8전대사령부는 388호 경비정에 10시50분 “684호와 같이 북상하라”고 지시했고, 아군도 당시 등산곶 경비정 684호가 화염과 연기를 자욱하게 피우며 경비정 388호에 예인되는 것을 지켜봤다. 그 직후인 10시56분, 2함대사령부는 ‘현장 전 전력 사격중지’를 지시하고, 11시가 되자 NLL 선상의 모든 함정에 전속력으로 남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1시5분, 순위도 전탐초소는 경비정 684호에 “8전대에서 표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통보한다. 북 경비정 684호가 참수리 357고속정 공격에 의해 기관 고장이 났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표류는 기관 고장으로 항해를 못하는 상황을 뜻한다. 8전대사령부는 388호에 “684호는 사곶으로 입항시키고 대기하라”고 지시한다.
 
  사곶항은 북한 경비정이 출항한 모항(母港)으로 388호에 684호 예인을 맡으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684호는 통신장비도 피탄(被彈)당한 듯했다. 북한 경비정 388호가 11시20분 “684호가 통신 결속이 되지 않는다”라고 8전대사령부에 보고하고 있다. 11시35분, 북 경비정 388호는 “684호, 침몰 위험은 없다”라고 8전대사령부에 최종 보고했다. 경비정 388호는 기동 불능인 경비정 684호를 예인해 북으로 돌아갔다.
 
  한철용 장군은 “북한의 결정적인 도발정보가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이나 있었으나, 국방부가 의도적으로 묵살해 해군에 하달하지 않았다”면서 “그 결과로 우리 해군은 북한의 도발의도를 전혀 모른 채 평상시와 같이 교전규칙대로 차단기동에 나섰다가 기습공격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불당소리(포성) 들리냐”는 등 교전 당일 북한군 교신내용도 영화에 들어갑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민감한 내용이라 국방부와 합참, 해군과 조율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국방부도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고심 끝에 허락했습니다.”
 
  —북한군 교신내용에 보면, 경비정 388호에 우리 참수리호와 교전해 침몰 위험이 있는 684호를 모항인 사곶항으로 예인하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 측 참수리 고속정의 공격을 받은 북한 선박도 묘사가 됩니까.
 
  “컴퓨터그래픽(CG)으로 연기가 나는 상황을 표현하도록 했습니다. 배급사가 우리 고속정과 교전한 북한 경비정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묻더군요. 배급사에서도 설명을 요구하고 있어, 예인되는 상황까지 넣을 생각입니다.”
 
  김 감독은 “영화판에서 애국(愛國)을 강조하는 영화를 찍으면 앞으로 일하는 데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젊은이들은 좌우(左右), 여야(與野)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이며 자식들입니다. 유족에게는 둘도 없는 소중한 자식들이죠. 이건 팩트(사실)의 문제입니다. 이데올로기는 달라도 자신이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 땅을 부정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3차에 걸쳐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비 조달
 
김학순 감독이 “포천의 김종호씨가 보낸 돼지저금통은 이번 영화를 제작하는 데 큰 활력소가 됐다”고 말하고 있다.
  〈연평해전〉은 당초 25억원의 저예산 영화로 기획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룬다는 이유로 대형 투자를 받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다.
 
  최초 영화 제작비는 국민이 참여하는 3차에 걸친 크라우드펀딩으로 조달했다. 1차 크라우드펀딩에서 약 1억원, 2차 펀딩에서 2000여만원, 3차 모금에서 7억원에 가까운 돈을 조달했다. 여기에 해군 바자회 수익금과 후원금, 개인 소액투자 등을 합해 모두 27억5000만원을 모았다.
 
  여기에다 IBK기업은행이 20억원을 투자하고, 영화제작에 필요한 자금조달을 관리하는 투자 주관사로도 나서기로 하는 등 영화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제작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국민성금과 IBK기업은행 투자로 당초 25억원 정도를 목표로 했던 영화 제작비는 현재 100억원대 규모의 큰 영화가 된 상태다. 국방부 지원을 돈으로 환산할 순 없지만,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걸 어림잡아 합한 수치다. 이에 영화 시나리오도 일부 수정하고, 비용 때문에 포기했던 장면들도 살려낼 수 있었다.
 
  김학순 감독은 “당초 많은 인원이 필요해 엄두를 못 냈던 영결식 장면이나 박동혁 상병 투병과정 당시 병원 모습, 유가족 이야기 등도 감동적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촬영감독, 무술감독, 특수효과 및 CG 담당들도 국내 최고 수준의 스태프로 새로 구성했다.
 
  그러나 〈연평해전〉 영화는 자금 문제 때문에 제작 기간만 무려 7년이 걸렸다. 연평해전을 기억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영화 〈연평해전〉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배급도 쉽지 않았다. 배급사도 CJ E&M에서 뉴(NEW)로 바뀌었다. 뉴는 지난해 〈7번방의 선물〉 〈변호인〉 등을 연이어 성공시킨 국내 주요 영화투자배급사다.
 
  교수실 한쪽에는 포천에 거주하는 농부 김종호(54)씨가 보냈다는 묵직한 돼지저금통이 놓여 있었다. 함께 온 편지에는 ‘조그만 성의지만 영화 제작에 보태시고 개봉되면 우리 식구 모두 관람하겠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진실을 만들 것을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김 감독은 “2013년 6월 경 한창 영화제작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받은 저금통이라 아직도 차마 깨지 못하고 있다”면서 “영화 제작을 끝내고 가장 먼저 그분과 통화했고, 영화가 개봉되는 대로 돼지 한 마리를 보내 드릴 생각”이라고 했다.
 
  —〈연평해전〉은 사실상 국민이 함께 만든 영화로 볼 수 있겠습니다. 순제작비 60억원 중 25억원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약 2500명이 보탠 후원금이라고 하는데, 젊은이들의 뜨거운 반응을 예상하셨나요.
 
  “전혀. 오히려 젊은 세대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그룹이 대단히 두껍다는 것을 확인하고 놀랐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정치 이데올로기를 떠나 사회정의에 대해 관심이 많고, 특히 자기 주관이 뚜렷합니다. 이들의 불편부당(不偏不黨)함이 좌우의 균형을 갖춘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천안함〉은 〈연평해전〉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천안함〉은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해요. 좋은 다큐멘터리는 결론을 강요하지 않고 관객들의 판단에 맡겨야 합니다. 〈연평해전〉은 이데올로기나 정치를 떠나 우리의 현실을 NLL로 옮겨가 보려고 했던 겁니다.”
 
  김 감독은 “5만원 이상 도움을 준 분들의 이름을 새겨 넣어야 해서 엔딩크레딧(영화 끝부분의 제작 참여자 명단) 길이만 20분에 이를 것 같다”고 했다.
 
  지난 2월 13일 대전 복수초등학교에서는 조천형 중사의 딸 조시은 양의 졸업식이 열렸다고 한다. 이날 졸업식에는 참수리 357호 승조원 대표 이희완 소령을 비롯해 김학순 감독, 조천형 중사 역을 맡은 배우 김지훈씨도 참석했다.
 
  “전사자 유자녀는 시은이뿐이에요. 귀한 아이라서 행사 있을 때마다 늘 시은이 얘기가 나옵니다. 아빠가 안 계시지만 아주 잘 자랐어요. 시은이가 졸업생 최고상을 받는 것을 보고 참석자들 모두 크게 기뻐했습니다.”
 
  김 감독은 “시은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도 영화 끝에서 만날 수 있다”면서 “영화를 촬영하면서 영화 제작자들과 유가족들이 한가족이 됐다”고 했다.
 
 
  유가족들의 당부, “재미있게 만들어 달라”
 
2013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11주년 기념식이 열린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에서 故 윤영하 소령과 황도현 중사의 유가족들이 윤영하함을 둘러보고 있다.
  김 감독은 “매일 향불을 피워 놓고 연평해전 6용사의 희생과 상처, 유가족들의 아픔을 되새기며 영화 완성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면서 “어떻게 보면 〈연평해전〉 영화는 이분들과 함께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바다에서 치열한 전투신이 그토록 펼쳐졌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단 한 건의 안전사고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첫날 스태프에게 영화제작보다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습니다만, 그만큼 해상촬영과 항공촬영은 안전사고 리스크가 큽니다. 제작자들의 진심이 6용사에게 전달된 모양이에요. 흥행까지 6용사가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유가족들도 당부하는 건 딱 한 가지예요. 잘 만들어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왜 연평해전이 일어났고, 그 희생에 대해 국민이 느낄 수 있게 해 달라는 겁니다. 자식들이 죽어 슬픔으로 얼룩진 영화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재밌게’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결국, 아들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해서라고요.”
 
  김 감독은 “유가족들은 동의를 구하는 과정에서 연평해전을 알리고 아들들의 명예를 지킬 수 있다면 어떠한 픽션의 가미도 상관없다며 양해를 해 주셨다”고 했다.
 
  “실제로 한상국 중사는 생전에 손을 떨지 않았으나, 영화상에서는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틱 장애(tic disorder)가 있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한상국은 자신이 틱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조타키에 자신의 손을 묶어 버립니다. 죽는 순간까지 배와 함께하겠다는 심정으로…. 357호 정장 윤영하 대위와 358호를 실제 지휘한 남성 장교를 대신해 여군 최 대위(이청아 扮)로 바꿔 아련한 러브스토리를 추가했습니다. 둘 사이에는 키스신도 없고, 윤 대위 사진을 간직한 최 대위가 장례식장에서 애써 눈물을 참는 것으로 슬픔을 승화했습니다.”
 
  김 감독은 “2002년 당시 전사자에 대한 규정이 없어 6용사는 ‘공무중 사망’으로 분류돼 그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수령했다”면서 “문제를 인식한 정부는 2004년 전사자에 대한 규정을 추가했고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의 순국 장병들은 그 혜택을 받아 전사자 예우를 받았다”고 했다.
 
 
  대함경례의 메시지
 
2013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11주년 기념식이 열린 경기도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故 한상국 중사 부인인 김한나씨가 눈물을 닦고 있다. 김씨는 경기도 광주시 공무원으로 임용됐다.
  2012년 12월 11일 대선 직전 한상국 중사 부인 김한나씨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TV 찬조연설에서 “현대전은 강력한 무기로 선제공격을 당하면 치명적임에도 먼저 타격하지 말라는 국군 최고통수권자의 교전수칙 지침!”이라며 “그것이 참수리호 승조원들을 죽음에 몰아넣었고, 우리 해군이 보고한 의도적 도발이 아닌 가해자의 일방적인 통보인 우발적인 사고로 결론을 내버렸다”고 절규했다.
 
  “제 남편은 중사 진급 날인 7월 1일을 이틀을 남겨 놓고 분신과도 같은 참수리 357호와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됐습니다. 7월 1일, 제 남편은 실종된 상태에서 3일 만에 서둘러 해군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일반인의 조문은 허용하지 않았고, 대통령은커녕 국방장관조차 참석하지 않은 조촐한 영결식이었습니다.
 
  당시 묘지에는 ‘연평도 근해에서 사망’이란 비문이 새겨졌습니다. 전사가 아닌, 연평도 근해에서 사망이었습니다. 이것이 국토를 수호하다 산화한 용사에게 내려진 비문이었다니 기가 막힙니다. 참수리호와 함께 침몰한 제 남편은 실종자로 처리돼 이틀 남겨 두었던 진급이 취소되었습니다. 하지만 군과 정부는 수색 인력을 보강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악몽 같은 41일이 지나고 8월 9일 인양한 참수리호 조타실에서 제 남편이 발견되었습니다. 저희 남편은 허리에 관통상을 당하고도 방향타를 놓지 않은 자세였다고 합니다. 각 나라마다, 선진국일수록 무명용사의 묘지를 가장 좋은 곳에 안치합니다. 각국 원수들이 국빈 방문을 할 때 무명용사의 묘를 찾아가 헌화하고 참배합니다. 왕이나 대통령, 장군들의 묘지가 아니라 이름 없이 죽어 간 영웅들이 그 나라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국군 최고통수권자인 당시 대통령은 조국을 지키다 숭고하게 산화해 간 이들 영웅용사들에게 어떻게 대해 주었습니까? 연평해전은 조용히 잊어지기만을 바랐고, 유가족들에게는 침묵을 종용했습니다.”
 
천안함 피격사건 5주기를 앞두고 지난 3월 24일 태안 서방해역에서 유도탄고속함(PKG)인 한상국함 등 함정이 해상기동훈련을 하고 있다.
  김 감독은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숭고한 희생을 나라와 국민이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그들도 대한민국의 아들이고 월드컵을 응원했던 붉은악마들”이라고 했다. 그는 “태극기에 휩싸인 한상국 중사를 인양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해군의 전통에 따라 진해 기지의 해군 장병들이 정복을 입고 ‘대함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면서 “우리를 대신해 죽어 간 ‘영웅’들을 ‘우리’가 예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고 했다.
 
  “연평해전이라는 말을 꺼내면 정치논쟁으로 끌고 갑니다.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그리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는 것을 정치와 연관시키면 안 됩니다. 유가족들이 자체적으로 하는 행사를 찾아다니면서 저는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린 것 같습니다. 외국 같으면 영웅으로 추대 받아 주위의 존경 속에 자식을 추억해야 할 노부모들이 전사한 아들에 대해 설명하려면 애를 먹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평화로운 2002년 월드컵 때 그런 전쟁이 있었느냐고 사람들이 오히려 되묻기 때문이죠.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감독은 “우리나라에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젊은이들에 대한 영화가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애국적 영화가 많이 만들어집니다. 관객들은 그 영화를 보면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세계 최강국 미국인들은 성조기(星條旗)에 대해 남녀노소 구분 없이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최종 편집을 마치던 날, 스태프가 ‘감독님은 대한민국과 해군을 위해 할 일을 다 했다’고 하더군요. 그 의미를 영화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김학순 감독은 “6월 11일 〈연평해전〉이 개봉하는 시기에 〈쥬라기 공원〉 〈터미네이터〉 〈미션임파서블〉도 함께 개봉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 〈연평해전〉이 또 한 번의 해전(海戰)을 치를 전망”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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