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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시각

북한의 核·미사일 능력과 지도자의 정보 실패

“우리는 北核 능력을 과소평가해 왔다” (前 국정원 北核 담당자 김정봉)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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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소형화 단계’라는 정부에 대한 金正奉 교수의 공개적 반론…, “소형화는 벌써 끝났고,
    우라늄 대량 생산 체제로 핵미사일 실전배치 상황. 보유 핵폭탄 40개 이상”
⊙ “국방부의 킬체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국민들을 안심시키려는 국방부의 선의의 거짓말’일 수 있다”
⊙ 북핵·미사일 능력에 대한 低평가는 북한식 自力更生의 집념과 저력을 輕視한 것
⊙ 정보 판단 실패로 안보붕괴 사태 부른 스탈린과 맥아더의 교훈: 지도자가 희망적 관측이나
    허영심에 빠져 敵의 의도를 과소평가하면 재앙을 부른다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KN-08. 한국은 그동안 북한의 미사일 능력을 과소평가해 왔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5월 9일, 북한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실험 뉴스를 전하면서 한국 국방 당국자들을 은근히 꼬집었다.
 
  〈성공적인 실험이 있었다는 소식은 한국의 국방 관리들을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공식적으로 기자들에게 북한이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해왔었다.〉
 
  북한 군사 전문가인 조셉 S. 버뮤데즈 주니어 씨는 〈북한의 잠수함 미사일 발사 능력 개발은 평양의 위협을 한국, 일본, 동아시아의 미군 기지로 확장할 것이고, 이 지역의 미사일 방어계획을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고 지적했다. 그는 〈잠수함 운반용 미사일은 탐지와 추적이 어렵고, 어디서도 공격할 수 있으며, 특히 한반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발사할 수 있다〉고 했다. 국제위기관리위원회 아시아 담당 부국장인 다니엘 핑크스톤 씨는 “만약 북한이 핵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을 배치한다면 막기가 힘들고 북(北)이 제2차 타격 능력(핵공격을 받고도 반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빅터 차, “韓美는 北 위협 과소평가 경향”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에서 한반도 담당이었던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지난 4월 말 CNN에 기고한 글에서 〈워싱턴과 서울은 본격적인 위기가 오기 전엔 북한의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했다. 예컨대 미국은 북한이 2012년 12월에 인공위성을 궤도로 쏴 올리기 전엔 북한의 미사일 능력을 평가절하하였다고 한다.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하기 전엔 아무도 실험을 예측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전문가들이 최근 북한이 우라늄 원자탄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었다고 보는 것과 관련, 빅터 차 교수는 〈이는 워싱턴이 북한의 핵 위협을 과소평가해 왔다는 증거이다〉고 했다. 빅터 차 교수는 북미방공사령부(NORAD) 사령관이 북한의 미사일 능력에 대하여 평가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북한이 핵폭탄을 소형화하여 미사일에 장착, 미국을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이동식 탄도미사일 능력의 향상으로 한반도에서 유지되는 억지력이 불안정해졌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보복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2012년 12월에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예고하고 있을 때 필자가 만난 국방부의 고위 간부는 북한이 실험에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런 가운데 국정원에서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 과정을 오래 추적하였던 인물이 공개적으로 “우리 정부는 그동안 북한의 핵전력을 과소평가해 왔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 논란에 불을 붙였다. 적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일은 다반사이고 어떻게 보면 정상이지만 핵무장하지 않은 나라에서 핵무장한 적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특이한 경우이다.
 
 
  스탈린의 誤判
 
1939년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 체결장에서 웃고 있는 스탈린(가운데). 스탈린은 이후 독일의 침략 야욕을 과소평가했다.
  지도자나 지도부가 적의 전쟁 의도를 잘못 판단하거나 능력을 과소평가하면 대재앙을 부른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기 전 스탈린은 세계에 퍼져 있는 소련 간첩망으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받고 있었다. 문제는 스탈린이 이 보고를 불신(不信)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러시아 침공은 일찍 시작해야 성공할 수 있다”면서 “올해는 너무 늦었고, 침공설은 공작이다”고 확신하였다. 1939년 8월 불구대천의 이념적 원수 사이이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그 직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영국을 정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전단(戰端)을 열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최고 지도자가 편견(偏見)을 가지면 부하들도 상관의 판단에 맞춰주려고 정보를 왜곡한다. 6월 16일, 즉 개전(開戰) 6일 전 영국에 있던 소련 정보요원은 포섭된 독일 공군 정보장교로부터 〈모든 준비가 끝났다. 언제든지 침공이 가능하다〉는 첩보를 입수, 본부에 보고하였다. 스탈린에 직보(直報)되었는데, 그는 보고서 옆에다가 이렇게 메모를 하여 부하에게 돌려주었다.
 
  〈이 독일 공군 간첩은 창녀 같은 어머니에게 돌려보내라. 이 자는 역(逆)정보를 주고 있다.〉
 
  도쿄에서 독일인 기자로 위장해 활동 중이던 소련 간첩 리처드 조르게, 소련과의 전쟁에 반대하던 소련 주재 독일 대사 슐렌버그, 처칠 영국 수상도 스탈린에게 독일의 침공이 임박하였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런 정보들을 모두 묵살해 버렸다.
 
 
  독일군이 쳐들어와도…
 
  독일은 러시아 침공 작전을 위하여 152개 사단, 전차 3350대, 대포 7200문, 전투기 2770기를 국경지대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에 관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자 스탈린도 의심을 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정보기관도 대규모 병력 집중은 숨길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역정보를 흘렸다. 히틀러의 병력 동원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스탈린에게 최후통첩을 하여 양보를 받아내기 위한 무력(武力) 과시라는 정보였다. 여기에 스탈린이 넘어갔다.
 
  6월 22일 세계전쟁 역사상 최대 규모의 침공 작전 ‘바바로사’가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별장에서 자고 있었다. 그는 주코프 장군에게 독일군의 침공에 대응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사무실로 출근하였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누군가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서 “히틀러도 이 사실을 모를 거야”라고 했다. 몰로토프에게 “독일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라”고 했다. 소련 측에 정보를 제공했던 슐렌버그 대사는 “독일의 선전포고를 전달하러 가겠다”고 했다. 소련군 수뇌부는 스탈린에게 무력 대응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 중이었다.
 
  스탈린이 상황을 제대로 인식했을 무렵, 독일군은 이미 소련군을 무너뜨리며 소련 영내로 깊숙이 진격하고 있었다.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결국 승리했지만, 그 대가로 2000만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됐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선제공격으로 이집트의 공군을 30분 만에 궤멸시킨 뒤 6일 만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무찔렀다.
 
  6일 전쟁에서도 정보 판단이 어긋날 뻔하였다. 이스라엘군의 정보부대인 아만(AMAN)은 이집트의 군사력이 이스라엘보다 훨씬 약하므로 전쟁을 시작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先入見)에 잡혀 있었다.
 
  5월 14일 이집트군 일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로 진출했을 때나 5월 16일 나세르가 유엔의 평화유지군에 대하여 이스라엘-이집트 국경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을 때도 아만은 침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무력시위라고 해석하였다. 5월 21일 이집트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다음날 아만은 정보 분석 회의에서 이집트의 아카바 만 봉쇄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였으나 그날 밤 나세르는 아카바 만을 봉쇄, 이스라엘 선박의 통항을 금지시켰다. 5월 23일 이스라엘 총참모본부 회의에서 아만 사령관 야리브 장군은 태도를 바꿨다.
 
  “이것은 통항(通航)의 자유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만있으면 아랍 국가들은 우리의 의지를 얕보고 생존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6월 2일 야리브 장군은 내각 회의에서 전쟁을 하면 이스라엘군이 이길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6월 4일 내각회의는 전쟁을 선택하였다. 이집트가 특공대를 요르단으로 이동시켰다는 보고가 에슈콜 수상을 주전론(主戰論)으로 몰았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이집트 공군의 대비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이집트 요격기들은 아침 5~7시 사이에 초계비행을 한 다음 기지로 돌아와 조종사들은 지상 요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간다. 전투기는 옥외(屋外)의 정비소로 옮겨진다. 이때가 되면 지대공(地對空)미사일 요원들도 야간 근무로 피로해 있다.’ 6월 4일, 이스라엘 공군 사령관 모티 호드 장군은 라빈 참모총장에게 보고하였다.
 
  〈아침 7~8시 사이 이집트 공군은 작동을 멈춘다. 7시45분이 공격 타이밍이다.〉
 
  다음날 이스라엘 공군은 7시45분에 이집트 공군기지를 공격, 419대의 전투기 중 304대를 지상에서 파괴하였다. 요르단 공군기 30대, 시리아 공군기 57대도 부쉈다. 6일 전쟁은 개전(開戰) 30분 만에 사실상 끝난 것이다.
 
 
  자만에 빠진 아만
 
1973년 10월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지휘하는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정보의 세계에선 성공이 실패의 어머니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스라엘 군사 정보 부대 아만은 6일 전쟁의 대승(大勝)으로 영웅이 되었다.
 
  아만은 편견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였다. 참패한 아랍 국가들이 앞으론 절대로 질 것이 뻔한 전면전(全面戰)을 하지 않을 것이란 독트린(교리)을 갖게 된 것이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군사 활동을 그런 관점에서 지켜보기 시작한 아만은 이스라엘군과 정치권까지 오염시켰다. 워낙 아만에 대한 평가가 높았고, ‘전쟁이 임박하였다’는 정보보다는 ‘전쟁은 없다’는 정보가 달콤한 법이다.
 
  1969년 11월 아만은 이집트가 예상보다 빨리 군사력을 재건(再建)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묵살하였다. 1970년 2월엔 더 충격적인 정보가 입수되었다. 소련이 이집트의 군사력 강화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또한 무겁게 다뤄지지 않았다.
 
  야리브 장군이 전역(轉役)한 뒤 아만의 후임 사령관은 엘리 제이라 소장이었다. 그는 1973년 5월, 이집트군이 수에즈 운하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등 수상한 동향을 보이자 〈이집트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판단을 했고, 정치권도 이를 존중하였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대응, 예비군을 소집하였지만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아만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고 예비군 소집은 과잉 대응이고 예산 낭비라는 비판을 받았다.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의 개전 하루 전날 미국 CIA도 닉슨 대통령에게 전쟁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를 했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전쟁 8일 전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복수를 다짐하였다.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것은 우리의 첫째가는 임무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희생을 아끼지 않겠다.”
 
  제이라 사령관은 사다트의 이 연설을 공갈 정도로 취급하였다. 1973년 10월에 들어서자 수에즈 전선의 이스라엘군으로부터 이집트군의 공격이 임박하였다는 첩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제이라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공격 징후 알고도…
 
  이스라엘의 국가 정보기관인 모사드는 달랐다. 모사드는 수상 직속 부서였다. 개전 이틀 전 모사드는 카이로에 있는 간첩으로부터 이집트군의 공격이 곧 시작된다는 믿을 만한 정보를 얻었다.
 
  모사드 책임자 자밀은 이 결정적 정보의 처리를 소홀히 하였다. 그는 아만의 제이라 사령관에겐 전화로 통지하고 골다 메이어 수상에겐 자신의 보좌관을 보내 설명하도록 했다. 보좌관은 전화로 수상 비서에게 이야기하였는데 이 비서조차도 담당자가 아니었다. 자밀은 자신의 지시가 이행되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출국하였다. 카이로 간첩을 외국으로 불러내 직접 물어보러 간 것이다.
 
  10월 6일 토요일에야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이집트의 공격이 이날 중에 시작될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공군기에 의한 선제(先制)공격 시간은 있었지만 그렇게 할 경우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규탄될 것이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메이어 수상과 다얀 국방장관은 예비군 동원령만 내리고 얻어맞는 쪽을 선택하였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을 받은 이스라엘은 역사상 처음으로 아랍 군대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한국처럼 종심(縱深)이 얕은 이스라엘은 기습을 허용하면 생존하기 어렵다. 다얀 장관은 한때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였다. 제리코 미사일과 팬텀 전폭기가 핵폭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 메이어 수상의 친구는 수상으로부터 “다얀이 항복 조건을 논의하자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런 상황에선 수상에게 자살용 독약이 필요하겠다고 판단, 의사에게 부탁하였다고 한다.
 
 
  맥아더, “중공군 개입은 없다”
 
1950년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과 만난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의 여세를 몰아 북진(北進)을 시작하자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수상은 중국 주재 인도대사를 통해서 워싱턴에 경고를 보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통보는 워싱턴에서 ‘가벼운 공갈’로 간주되었다. 한국군 3사단은 10월 1일 동부전선에서 38선을 돌파했다. 미군을 주력(主力)으로 하는 유엔군은 10월 9일 서부전선에서 38선을 넘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만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면서 “미8군은 크리스마스까지는 일본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웨이크 섬 회담 4일 후인 10월 19일 중국의 펑더화이(彭德懷)는 4개 보병군단과 3개 포병사단의 압록강 도하(渡河)를 명령했다. 약 30만명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 호언장담은 오판(誤判)이 되어버렸다. 중공군이 10월 말 한국군을 공격한 뒤에도 맥아더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은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의 병력을 실제의 약 10분의 1(3만명)로 축소, 워싱턴에 보고하였다.
 
  11월 24일 맥아더는 또다시 총공세를 명령한다. 이날 윌로비가 평가한 중공군의 규모는 최저 4만, 최고 7만1000명이었다. 실제로는 약 30만명의 중공군이 산속에서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는 그 함정 속으로 유엔군을 밀어 넣었다가 반격을 당하고 후퇴한다. 1·4후퇴, 흥남철수, 이산가족의 비극이 맥아더의 오판에서 비롯되었다.
 
 
  上官의 입맛에 맞게 정보 왜곡한 윌로비
 
  전사가(戰史家)들은 일본점령사령관으로 부임, 천황 위에 군림하면서 ‘미국의 시저’로 불리던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자만심이 너무 강해져 정확한 정보 판단을 하지 못하였다고 분석한다. 특히 맥아더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이 이런 맥아더의 충복이 되어 객관적 정보 분석 대신 상관이 바라는 방향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정보를 왜곡,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독일 출신인 윌로비 장군은 이견(異見)을 허용하지 않는 권위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한국에서 미국 CIA가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방해, 워싱턴에선 한국전과 관련, 윌로비-맥아더 라인의 정보 이외엔 다른 정보를 얻기가 힘들었다.
 
  맥아더는 이런 윌로비를 ‘나의 군 복무기간 50년 동안에 만난 최고의 정보장교’라고 추어주었다. 건전한 비판을 배제하는 이런 인간관계는 냉철한 정보 판단에 치명적이다. 윌로비는 10년간 맥아더의 정보참모로 근무하면서 맹종하는 습관을 익혔다. 감정적 기복이 심하여 냉철해야 할 정보장교로선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부하들이 자신의 판단과 다른 정보를 올리는 것을 싫어하였다.
 
  유엔군은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일단 후퇴한 한 달 뒤 다시 공세를 펴는데 이게 재앙을 불렀다. 윌로비가 양심이 있는 정보참모였다면 중공군의 규모를 맥아더에게 정확하게 보고, 무모한 공세를 막고, 평양~원산 선에서 방어선을 치도록 했어야 했다. 그는 맥아더가 약속한 크리스마스 공약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의 규모를 축소, 워싱턴에 보고하였다.
 
  윌로비의 책상 위엔 중공군의 만주 집결에 관한 현장 정보가 쌓이고 있었고, 30만명이 집결하였다는 점에는 그도 동의하였지만 개입 여부에 대한 판단을, 맥아더의 희망에 맞추어주는 방향으로 내려버린 것이다. 군사정보를 정치적으로 왜곡한 셈이다.
 
  수백만의 생명을 대가(代價)로 치른 스탈린, 이스라엘 정보기관, 맥아더의 오판은 적의 의도에 대한 지도자의 분석과 판단이 선입견이나 오만, 그리고 정치적 계산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정원 출신 전문가의 공개적 문제 제기
 
김정봉 교수.
  맥아더의 중공군 개입 여부에 대한 오판이 한국인의 운명을 바꾼 것보다 더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오판이 한국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전력(戰力)과 전략(戰略)에 대한 한국 정부의 오판 가능성이 그것이다.
 
  북한의 핵전력에 대하여 한국은 ‘핵폭탄 소형화가 진전되고 있다’는 수준의 판단을 하면서, 주한미군의 사드(THAAD·高고도 미사일 방어망) 배치에 대하여도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민방위 훈련을 할 때 핵공격에 대한 방어 훈련조차 하지 않는다.
 
  반면 미국에선 북미방공사령관이 공개적으로 북한의 핵 능력은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에 소형화된 핵폭탄을 장착, 실전배치한 수준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미 간엔 엄청난 인식의 격차가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 인식의 차이를 메우려는 노력, 즉 혼란에 빠진 국민들에게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김정봉(金正奉) 한중대 석좌교수는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에 관하여 가장 전문적 정보를 가진 이다. 그는 국정원에서 이 부문에 대한 정보 판단에 종사하였고,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의 NSC(국가안보회의) 정보실장, 그리고 국정원 계열 외곽 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현직을 빼고는 북한의 핵 및 미사일에 대하여 가장 권위 있는 정보와 경험을 가진 이라고 볼 수 있다.
 
  김 교수는 최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등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북한의 핵전력과 핵전략〉이란 논문을 발표, “한국은 그동안 북한의 핵 능력을 과소평가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북핵(北核) 능력 평가는 요사이 박근혜 정부와는 많이 다르고 미국의 평가에 근접한 것이다.
 
  그는 알려진 것보다 북한의 핵 및 미사일 능력이 종합적이고, 강력하며, 한국의 대응 능력은 취약하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北, 2020년까지 최대 220개 핵무기 보유 가능
 
  1. 북한은 6·25남침 전쟁 직후부터 핵무기 연구 개발에 착수, 소련에 기술자를 보냈다.
 
  2. 북한은 1970년의 노동당 5차 대회에서 핵무기 개발을 위한 정책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3. 북한은 1980년대 말에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90년대 초에 구(舊) 소련의 붕괴를 틈타 핵폭탄이나 플루토늄을 밀수하였으며 핵기폭장치 개발에 성공, 1990년대 초 이미 핵폭발장치(Nuclear device)를 완성하였다.
 
  4. 북한의 핵개발엔 구 소련 기술자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미사일 개발은 중국 기술자와 중국 정부가 도왔다. 미사일의 핵심인 관성항법장치를 중국 정부가 제공하였다.
 
  5. 1998년의 파키스탄 핵실험은 북한의 기폭장치 기술 지원으로 가능하였고, 북한을 위하여 플루토늄탄 실험을 대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6.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고강도 알루미늄을 밀수, 우라늄 농축 원심분리기를 자체 기술로 제작하고 있다.
 
  7.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시작한 것은 1996년부터로 추정된다. 우라늄 원폭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었다.
 
  8. 2006년 10월의 최초 실험 때부터 소형화를 위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 부분은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9.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우라늄 핵폭탄은 최소 32발에서 최다 80발이며, 2020년까지 북한이 보유할 수 있는 우라늄탄은 최소 84발에서 최다 210발에 이른다. 플루토늄탄 10발을 합하면 현재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폭탄은 최소 42발에서 최다 90발이며, 2020년까지 북한이 보유 가능한 핵탄두 수는 최소 94발에서 최다 220발에 이른다.
 
  그런데 북한이 5MWe 원자로를 계속 가동하고 있고, 100MWe 경수로도 가동이 임박해 있어, 플루토늄 원자탄의 숫자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북한이 1990년대 초 구 소련 붕괴 과정에서 밀반입한 완성된 핵탄두와 밀반입에 성공한 플루토늄으로 제작한 플루토늄탄의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칸 박사가 목격한 3발의 완성된 핵탄두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다.
 
  10. 국방부의 킬체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국민들을 안심시키려는 국방부의 선의의 거짓말’일 수 있다.
 
 
  킬체인의 한계
 
  북한의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 성공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북한의 미사일 능력과 그에 대한 대응체계에 대해 김정봉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북한의 노동미사일과 중거리 미사일인 무수단미사일, 그리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KN-8과 대포동 2호 등은 우리 안보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우리에게는 스커드미사일이 직접적 위협이 된다. 북한은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인 TEL을 100~200기 정도 운용하고 있다. 아무리 우리가 킬체인과 KAMD(한국형 미사일 방어망)를 완성한다 한들 북한이 이동식 발사대를 통해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모두 사전에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북한의 핵미사일이 포착되는 것은 발사 후 고도가 수 km 정도는 되어야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해 선제공격을 할 수도 없고, 사전(事前) 포착도 어려우니 킬체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국민들을 안심시키려는 국방부의 선의의 거짓말’일 수 있다.
 
  다만 킬체인이 완전히 무용지물은 아니다. 첫발을 쏜 이동식 발사대를 아군(我軍)의 탄도미사일, 크루즈미사일이나 공군의 공대공(空對地)미사일로 제거함으로써 추가 발사를 막는 데는 유용하다. 북한이 동일한 이동식 발사대에서 한 발을 쏜 후 다음 발을 쏘는 데는 30분에서 1시간이 걸리므로 우리 미사일로 파괴가 가능하다.
 
  다음은 KAMD이다. 우리 군이 보유하고 있는 PAC-Ⅱ로는 북한의 핵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내년까지 도입한다는 PAC-Ⅲ로도 종말단계에서 1~2초 정도 주어진 시간 내에 요격할 기회가 있다. 요격성공 확률이 그리 높지도 않다. 여기에 우리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존립을 맡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망)를 도입하려는 미국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THAAD는 주한미군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한미 양국은 THAAD 배치를 통해 다층방어망을 구축함으로써 생존확률을 높여야 한다.
 
  우리는 미국이 확장된 억지력과 THAAD 배치를 통해 한국을 방위하도록 함으로써 우리만의 KAMD를 완성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THAAD의 값이 싸다면 우리도 몇 개 포대를 사다가 배치하고, 동시에 우리 중거리 요격미사일과 장거리 요격미사일을 개발하여 KAMD도 완성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데 우리는 2조원이나 하는 THAAD 몇 개 포대를 한국에 배치할 돈이 없다. 그리고 1개 포대에 48발밖에 없기 때문에 북한 미사일을 첫발에 맞히면 좋지만 첫발에 못 맞히면 2~3발을 쏘아야 한다. 그러면 북한의 미사일 1000발을 상대하려면 THAAD 몇 개 포대가 있어야 하나? 따라서 우리가 THAAD를 구입하느라 돈을 쓰게 되면 재정적 여력이 없어 우리 자체의 요격미사일 개발은 사실상 물 건너간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북한의 핵미사일을 막아내고, 우리 힘으로 요격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린다’가 우리의 전략이 되어야 할 것이다.〉
 
 
  敵에 대한 과소평가는 용서받을 수 없다
 
  김 교수는 논문과 별도의 인터뷰에서 ‘외부에선, 2006년 첫 핵실험에서 북한이 1kt(TNT 1000t의 폭발력)의 폭발력을 보인 것을 두고 완벽한 폭발이 아니었다고 평가절하해 왔는데, 처음부터 소형화 실험을 한 것을 오해한 때문이다’는 의견을 보태었다.
 
  한편 이명박(李明博) 정부 시절 안보부서의 핵심에 있었던 두 전직 요인은 김 교수의 평가에 대하여 엇갈린 견해를 보였다. A씨는 “북한이 이미 핵 소형화에 성공, 미사일 실전배치를 마친 상태”라고 했다. B씨는 “한국과 미국에 자신 있는 정보가 없다”면서 “소형화의 진전 단계가 아닐까”라고 했다. 그는 “우라늄 농축 시설의 효율성, 즉 가동률이 중요한데, 이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라고 했다.
 
  미소 냉전 시절에 미국에선 ‘미사일 갭(Missile Gap)’이란 용어가 유행하였다. 미국이 핵미사일 분야에서 소련에 뒤지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은 1958년 재선 운동 기간에 ‘미사일 갭’이란 말을 처음 썼다. 그는 미국 공군이 제공한 과장된 자료에 근거하여 소련의 미사일 능력을 과대평가하였다. 냉전이 끝난 후 밝혀진 사실은 미국이 소련에 뒤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북한 핵에 대한 과소평가는 미사일 갭과는 다른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적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과 과소평가하는 것의 후유증은 다르다. 과대평가는 국민의 불안감 조성, 국방예산의 낭비 등의 부작용을 초래하지만 과소평가는 스탈린, 이스라엘 지도부(4차 중동전쟁 때), 맥아더처럼 국가적 재앙을 불러들인다. 적에 대한 과소평가는 용서받을 수 없다.
 
 
  北核 문제에 구경꾼 입장을 취한 대통령들
 
  북한의 핵 및 미사일에 대한 한국 정부 측의 과소평가는 역사가 오래다. 북핵 문제 해결을 한국 정부가 자신의 일이라고 판단, 책임을 지는 자세였다면 한가하게 과소평가를 하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영삼(金泳三) 정부 이후 한국의 지도부는 북한 핵은, 미국의 문제이고 미국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는 심리상태에서 사실상 구경꾼 입장을 선택하였다. 그러면서 한반도의 화해 협력 평화가 북핵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하다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다.
 
  1994년 여름 클린턴 행정부가 영변 핵시설 폭격을 검토하고 있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협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말리는 입장을 취하였으며 회고록에서 이를 업적처럼 선전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개발 중임을 알면서도 현대그룹을 앞세워 5억 달러의 금품을 제공하고 김정일과 회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7년 10월 3일 김정일-노무현 회담 때 배석한 6자 회담 대표 김계관은 한국 대통령 앞에서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우리가 핵계획, 핵물질, 핵시설 다 신고합니다. 그러나 핵물질 신고에서는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합니다. 왜? 미국하고 우리하고는 교전상황에 있기 때문에 적대상황에 있는 미국에다가 무기상황을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갔는가. 우리 안 한다.”
 
  6자 회담의 합의 내용을 부정하는 이 망언에 대한 노무현의 논평은 이러하였다.
 
  “수고하셨습니다. 현명하게 하셨고, 잘하셨고요. 뭐 미국이 이 회담 바라고 그러진 않을 것입니다. 나는 공개적으로 핵 문제는 6자 회담에서 서로 협력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그러니까 6자 회담 바깥에서 핵 문제가 풀릴 일은, 따로 다뤄질 일은 없습니다. 단지 남북 간에 비핵화 합의 원칙만 한 번 더 확인하고, 실질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은 6자 회담에서 같이 풀어나가자 이렇게 갈 거니까요.”
 
  이런 정부가 북한의 핵 능력에 관한 정보를 왜곡하지 않았다면 그건 기적일 것이다.
 
 
  계속되는 北核 경시 풍조
 
지난 5월 8일 북한은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실험에 성공했다.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하였지만 10년간 이어진 대북굴종 정책은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도 않았다. 재임 기간 두 차례 북한이 핵실험을 하였지만 노무현 정부의 한미연합사 해체 결정을 계승하였고 미사일 방어망 건설에 주력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의 안보 참모들 중엔 “우리는 북한 정권이 핵폭탄을 소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판단하였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런 인식이 대북정책에 반영된 흔적은 없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도 15년간 이어져 온 북한 핵 능력에 대한 과소평가 흐름을 되돌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미국 측이 과거와 달리 북한의 핵전력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한미 두 나라의 인식 차이가 커져 보이기 시작하였다. 전문가들 사이에 ‘북한의 핵개발’이란 용어 대신에 ‘북한의 핵미사일 실전배치’라는 말이 자주 쓰이게 되었다.
 
  정부의 친중반일(親中反日) 외교 노선은 북한의 핵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방증일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전배치 상황에서 한국 외교가 가장 주력해야 할 부분은 한미일(韓美日) 동맹의 강화에 의한 핵 억지력의 확보이다. 친중반일 외교는 한미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북한 정권의 한일 이간질에 이용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이 이 노선에 집착하는 것은 북한의 핵전력과 핵전략에 대한 무관심이나 과소평가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핵 문제 해결을 피해가는 ‘통일대박론’은 국민들에게 환상을 심어 북핵 해결을 위한 국가적 의지력을 모으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핵미사일 실전배치 상황을 직시한다면 미사일 방어망 건설, 미국의 핵미사일 탑재 잠수함 한국 해역(海域) 상시 배치, 미국의 핵우산 정책의 구체적 명문화, 핵 민방위 훈련, 핵 방어시설 건설 등 시급히 해야 할 일이 많다. 종군위안부 문제로 김정은보다 아베를 더 만나기 싫어한다는 것은, 대통령의 핵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북한의 핵 능력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취재해 온 지 근 20년, 이들의 예측과 실제 상황은 거의 어긋났다. 소위 한국의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수준을 평가하면서 몇 가지 잘못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 같다.
 
  먼저 북한의 경제력이 형편없으니 무기 개발 수준도 그럴 것이란 전제를 깔고 이야기한다. 북한이 무기 개발에 자원을 쏟아부었기에 경제력이 망가진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핵무기 개발이 엄청나게 어려운 기술인 것처럼 생각한다. 핵폭탄 개발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나 운용보다 훨씬 쉽다. 국가 단위의 조직이라면 제재를 받지 않을 경우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북제재에 대한 과신(過信)도 있다. 북한에 대한 항만 및 공항 봉쇄가 적용된 적이 없고 중국이 뒷문을 열어주므로 제재의 효과는 제한적이다. 이란처럼 봉쇄당한 적이 없다.
 
  북한의 무기가 조잡하다는 점을 들어 핵 능력도 평가절하한다. 무기의 조잡성은 오히려 북한식 자력갱생(自力更生)의 집념과 저력을 보여준다. 미국을 때리는 장거리 미사일이면 몰라도 한국 공격용 미사일은 조잡해도 날아가서 터진다.
 
  북한이 핵폭탄 제조에 집중한 지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00만 대군을 가진 광신적 이념무장 집단이 30년 동안 한 우물을 팠다는 점을 경시(輕視)하면 큰 코 다칠 때가 있다.
 
 
  朴 대통령의 선택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두 사안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첫째는 2017년 선거를 통하여 북한의 핵개발을 지원하였던 좌파 세력에 정권을 넘겨주느냐의 여부이고, 둘째는 북한의 핵미사일 실전배치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박근혜식 전략의 핵심은 ‘1보 후퇴 2보 전진’이다. 감성적 면을 중시하는데 자신이 연약하고 피해자이며 개혁적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동정심이 많은 한국인의 민심을 얻으려 한다.
 
  박 대통령은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선동된 여론에 영합하고, 국익(國益)에 배치되는 행동도 한다. 세종시 수정안 거부나 해경(海警) 해체 결정이 좋은 예이다. 그는 선거에 이겨 좌파 정권의 등장이나 좌파 강화를 막는 게 더 큰 국익이라고 판단할지 모른다.
 
  이런 박 대통령이 2016년과 2017년의 두 차례 선거에서 북의 핵미사일 실전배치 사태를 어떻게 다룰지 주목된다. 선거전략 차원에서 이용할 것인지,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룰 것인지.
 
  앞으로 2~3년 사이에 북한이 핵미사일 실전배치에 근거한 고차원의 대남(對南) 도발을 해올 때, 이 사태가 두 차례 선거와 맞물려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가? 한국이 갖지 못하고 북한이 가진 두 가지 전략적 무기인 핵미사일과 종북 세력이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
 
  두 차례 선거를 통하여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지원하였던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외환보유고 4조 달러의 중국과 핵무장한 북한노동당 정권 및 한국의 친중(親中)·친북(親北) 정권이 한편으로 정렬하게 된다. 정권을 넘긴 맨주먹의 보수세력과 반한적(反韓的) 일본과 멀리 있는 미국이 대륙 지향의 3각 연계 체제(계급투쟁론에 기반한 좌경사상을 공통분모로 한다)를 당할 수 있을까? 없다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좌파 핵심 세력은 북의 핵개발을 방조하여 왔고 한국의 핵미사일 방어망 건설도 반대하여 왔다. 이런 노선이 집권 후에도 계속될 경우 한국은 북한의 핵 위협에 노출되어 정치적으로 종속되고 군사적으로도 주도권을 놓치게 된다. 북한 정권의 노골적 협박이 한국의 정치와 언론, 그리고 사법(司法) 기능을 제약하게 될 것이다.
 
 
  지도자의 정보 실패
 
  이런 기로에 선 대한민국의 조종간을 쥔 박 대통령이 15년 이상 계속되는 북한 핵 과소평가 흐름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주목된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전배치 문제를 생각하면 다른 모든 사안은 사소하게 보인다. 우리의 생존의 본질에 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선거전략 차원에서 다루기엔 너무나 큰 주제가 장벽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스탈린과 맥아더의 정보 판단 실패가 주는 교훈은 지도자가 희망적 관측에 빠져 진실을 회피하려 할 때 재앙이 덮친다는 것이다. 절대무기인 핵과 관련된 정보를 잘못 다루면 토털 페일러(Total Failure), 즉 안붕(安崩)이 일어난다. 한국은 적이 핵무장하였는데도 핵폭탄 투하에 대비한 민방위 훈련을 하지 않는 (아마도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훈련상황입니다. 지금 서울 강남 상공에서 10킬로톤급 핵폭탄이 터졌습니다. 신속히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방송이 한 달에 한 번씩 나와야 국민들이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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