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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史의 결정적 순간

이영철 美 극동사령부 제2정보司 교동파견대 교육대장

90代 老兵, 6·25 유격戰史의 비밀을 증언하다!

글 :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eaglebsk@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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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LO 첩보요원으로 6·25 參戰… 황해도 지역 空中 낙하, 인민군·중공군 첩보 수집報告
⊙ 美 8軍에 무기지원 요청해 서해안 유격부대 창설에 결정적 기여
⊙ 美 극동사령부, 식별번호 ‘#469’ 이영철의 情報報告를 기밀문서로 기록
⊙ “NLL은 붉은 피로 지킨 생명선”
6ㆍ25 당시 KLO 첩보요원으로 참전한 이영철 선생.
  영화 〈국제시장〉을 계기로 국민들이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을 실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올해 91세인 노병(老兵) 이영철(李永徹) 선생의 6·25 참전(參戰) 이야기는 또 한편의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6·25전쟁 당시 개성에 살았던 26세 청년 이영철. 그해 10월 군번도 없이 미국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이하 KLO) 소속 선대(Sun-Net)에 입대해 1954년 부대가 해체될 때까지 강화도 인근 불음도(島)에서 근무했다.
 
  KLO는 1949년 6월 미(美) 극동군사령부가 설치한 첩보부대이다. KLO는 유격전과·첩보전과로 편성, 유격전·첩보전을 총괄했다. KLO 산하 첩보부대였던 위스키대, 선대, 코트대 등 3개 부대는 6·25전쟁 전에 창설돼 북한 지역을 무대로 활동했다.
 
  이후 1951년 7월, 미군은 극동군사령부 연락처(FEC/LD), 이른바 KLO 8240부대를 창설해 전쟁 직후 자생(自生)했던 여러 첩보부대를 산하 부대로 재편했다. 1951년 11월에는 미 극동군사령부 연합정찰사령부(제8242부대)를 설치해 KLO 8240부대를 관할했다. 미군 첩보부대, 유격대에서 활동했던 한국인 부대원들은 휴전 이듬해인 1954년 국군으로 편입됐다.
 
 
  손톱·발톱·머리카락 전우들끼리 나눠 가져
 
  1950년 10월 KLO 선대에 입대한 이영철은 서울과 평양에서 첩보요원 교육을 받았다.
 
  “전쟁 직전 고향에서 우익 성향인 혈투공작대에서 활동했지요. 전쟁 이후 나를 포함한 공작대원 11명이 KLO에 입대해 미군을 따라 평양으로 북진(北進)했습니다. 기왕 조국에 바친 몸, 통일될 때까지 싸우다 죽자고 동지들끼리 약속했습니다. ‘싸우다 죽는다면 살아남은 동지가 전우(戰友) 부모님께 갖다드리자’며 손톱, 발톱, 머리카락 등을 나눠 갖기도 했습니다. 물론 동료 대원 8명은 함경북도로 간 후 전사(戰死)했습니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우리 부대는 휴전선 이남으로 후퇴했습니다.”
 
  서울로 내려온 이영철은 1950년 12월 12일, 적지(敵地) 정보수집을 위해 황해도 황주에 침투했다. 적지 상공에서 낙하산으로 투입된 건 이날이 처음이다. 그는 적지에서 명령계통의 상관이었던 미 극동함대사령부 산하 제7함대 소속 클라크 대위와 직접 교신했다. 당시 클라크 대위는 한국 해군을 담당하면서 KLO 첩보부대에 관여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했던 그는 비밀통신, 첩보전문 장교였다고 한다.
 
  “여의도 비행장에서 칠성판을 타고 황주 상공에서 처음 낙하했습니다. 당시 KLO 대원들은 비행기를 칠성판이라 불렀지요. 같이 간 대원은 고향 후배 ‘이화중’이었어요. 우리 둘은 새벽 6시30분경에 황주 논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우리의 업무는 황주 지역의 인민군과 중공군의 활동상황, 보급로, 주둔지, 부대 이동상황을 파악해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적지에 떨어진 후 1시간쯤 지났을 무렵입니다. 총을 든 군인 두 명이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났어요. 제대로 활동도 못해 보고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론가 우리를 데려가는 도중에 문득 ‘KLO냐’고 묻는 겁니다. ‘당신들은 누구요’ 했더니 ‘우리도 KLO 대원이다’며 ‘상부로부터 6시경에 공작대원들이 출동하니 같이 행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이영철 선생에 따르면, 당시 황해도 황주에는 남으로 피란(避亂)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국군 낙오병과 인민군 낙오병이 뒤섞여 있었다고 한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적(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서로를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이영철 대원의 역사적 情報보고
 
  이영철은 1950년 12월 27일 황해도 평산으로 이동한 후 상부에 적지상황을 보고한다. 그런데 이날 무전기가 고장나면서 고립된다. 다행히 황해도 연백군 연안에서 자생 유격대이자 지역 치안대 역할을 하던 해병특공대원을 만났다.
 
  이때 이영철은 반공(反共)의용군인 해병특공대의 정보수집 능력과 대원들의 용맹성을 직접 목격하고, 이 부대가 무기(武器) 지원을 받으면 정식 유격부대로 충분히 전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이영철은 당시 해병특공대장을 맡고 있던 김병식에게 “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전했다.
 
  이영철은 1951년 1월 5일경 범선(帆船)을 타고 서해로 남하(南下), 대구에 있던 미 8군사령부에 도착해 클라크 대위 등 미군 정보장교를 만나 관련 상황을 보고했다.
 
  “1월 7일로 기억합니다. 몇몇 미군 정보장교와 클라크 대위는 나를 본 후 무척 놀라워했어요. 죽은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내게 ‘1개월간 휴가와 여윳돈을 줄 테니 부산에서 쉬다가 다시 오라’고 했어요. 물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상황이 아니었죠. 적지 사정을 보고하면서 ‘애국청년들이 적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고, 지방에는 향토 치안대가 있으니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면 유격부대로서 큰 전과를 올릴 것’이라고 얘기하고 무기 지원의 필요성을 자세히 전달했습니다. 클라크 대위를 비롯한 미군 장교들은 처음에는 나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놀라는 기색을 보이더니 한참 동안 말을 듣고 난 후 내게 ‘KLO 선대에 돌아가 대기하고 있어라’고 하더군요.”
 
  이영철 대원의 이날 정보보고는 미군으로 하여금 자생 유격대에 무기 등 전투물자를 제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1951년 1월 8일, 클라크 대위는 이영철 대원의 정보를 토대로 8군 사령관에게 무기 공급을 정식 요청한다.
 
  1956년 미 극동군사령부의 지원을 받은 미 존스홉킨스대학 작전연구실 연구팀이 작성한 〈한국전에서의 유엔군 유격전〉 보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유엔군의 북진(北進)과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 전까지 북한에서는 반공지하단체가 표면화되었으며, 이후 유엔군이 압록강 지역으로부터 계속 철수함에 따라 적의 보복 위험에 처하게 되어, 이들 중 많은 요원이 도주하거나 은거하고, 수천 명은 해안선까지 전투부대와 함께 철수해 우군 장악 도서지역으로 도피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비록 소규모이지만 조직적으로 편성되고 일부는 무장(武裝)도 하고 있었다. 1951년 1월 중순 미 제8군은 이들 요원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들을 조직, 지원하는 조치를 취했다.〉
 
  보고서에 적시(摘示)돼 있듯이 미 8군이 자생적 유격대에 관심을 갖고 물자를 지원한 시기(1951년 1월 중순)는 이영철 대원의 정보보고를 토대로 클라크 대위가 8군사령관에게 무기공급을 요청한 시점과 일치한다. 이 보고서 부록에 첨부된 〈유격전 연표〉에는 1951년 1월 8일 관련 정보를 입수했다고 못 박고 있다.
 
  〈1951. 1. 8. 미 제8군은 소규모로 편성된 유격집단(반공의용군)이 황해도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서해 도서로 철수하고 있다는 첩보를 한국 해군으로부터 입수.〉
 
  여기서 ‘한국 해군’이란 국군 해군이 아니라 미 극동함대사령부 산하 7함대사령부 소속 CTG 95.7(미 해군 95 기동부대 예하 전대·대원들은 주로 한국 해군이었음)을 뜻한다. 보고서에 ‘한국 해군’으로 표기된 것은 미 8군사령부에 정보보고를 한, CTG 95.7 소속 정보·통신 장교 클라크 대위가 한국 해군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클라크 대위가 한국 해군으로부터 관련 정보를 입수해 상부에 보고한 걸로 판단했던 것이다.
 
 
  美 정보·통신장교 클라크 대위의 武器지원 요청서
 
제2정보사령부(8103부대) 교동파견대 교육대장으로 근무할 당시의 이영철.
  2003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미군 당국이 유격대 활동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한국 해군이 서해안 도서에서 공산군에 대항하는 유격대 활동을 알리고, 탄약지원을 요청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51년 1월 8일 95.7 기동전대장은 해주와 사리원 등 황해도 서쪽으로 후퇴해 온 약 1만명의 의용군이 일제 99식과 38식 소총, 소련제 소총, 약간의 카빈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면서, 이들에게 일제와 소련제 무기의 탄약 보급이 가능한지를 미 제8군사령관에게 문의해 왔다. 이 무렵 미군은 동부지역에도 원산과 전선 사이에 소규모의 유격대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미군 기밀문서를 바탕으로 한 이 책도 ‘한국 해군’이 유격대 활동을 미군에 처음으로 알린 것처럼 기술(記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해군이 아니라 미 극동함대 소속 클라크 대위의 무기지원 요청서에 따른 것이었다.
 
  미 극동함대사령부 소속 정보·통신장교 클라크 대위의 보고서를 검토한 미 8군사령부는 무기를 전격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한국전쟁의 유격전사》를 다시 보자.
 
  〈미 제8군사령부는 일제 99식 소총의 탄약을 비롯해 소련제 소총과 기관단총의 탄약을 공급해 줄 수 있다고 회신하면서, 정보참모부에 의용군 지도자를 확인하여 그들의 능력이나 활용방안을 검토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미 극동군사령부는 제8군으로 하여금 반공유격대에 관심을 갖고 게릴라부대를 편성해 작전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반공의용군이 공산군과 싸울 의지가 강하였으므로 이들에게 충분한 보급품을 지급하고 잘 조직하여 적절히 운용한다면 공산군을 압박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다. 미 제8군 정보참모부는 황해도 지역의 의용군에 대한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를 실시했다.〉
 
  첩보대원 식별번호 ‘#469’를 부여받은 이영철은 대구 미 8군사령부에서 일주일간 머문 후 1951년 1월 13일 24시 무렵 적지(황해도 연백)로 다시 공중 투입됐다.
 
  “무전기 SCR300를 지급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이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통신하기로 약속한 날에 연백 인근 상공으로 미군 첩보 비행기가 날아와 교신을 했어요. 통신시간은 새벽 1~2시 사이였지요. 통신 암호는 GHQ(연합군 총사령부) #469였습니다.”
 
 
  강화도·교동도 완전 사수
 
미 극동사령부 산하 제2정보사령부에서 근무했던 8103 첩보요원들의 전우회 명부. 현재 이영철 선생은 전우회 고문으로 있다.
  이영철과 함께 출동한 대원은 통신 담당 현역 군인 황해룡 하사였다. 둘은 1951년 1월 14일 새벽 1시경 황해도 연백군 호동면 남당리 벌판에 떨어졌다. 황 하사는 불행하게도 그해 2월 적지에서 전사(戰死)한다.
 
  “나는 연백에 있던 해병특공대가 그곳을 사수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 공작과장 김상복 대위로부터 ‘연백은 인민군에게 점령당했으니 조심하라’는 무전을 받고 겁이 덜컹 났습니다. 그곳에 있던 동지들과 가족들이 무사할지 걱정도 됐고요. 연백군 상공에 도착할 무렵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신호가 울릴 때였습니다. 갑자기 죽음이 엄습해 왔어요. 수송기 문이 열리자 차가운 겨울 바람이 살갗을 째는 듯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늘에 뜬 달과 간간이 반짝이는 별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너무나 역설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나이 20대 중반이었지요. 낙하를 목전에 두고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눈이 와서인지 빛이 반사돼 땅이 백옥처럼 빛났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인민군에게 발각돼 땅을 밟기 전에 사살되기 십상이었습니다. 생사(生死)를 가늠할 수 없는 그런 지옥 같은 곳에 몸을 던졌습니다.”
 
  무사히 착지(着地)한 이영철은 저 멀리 떨어진 동료 대원과 합류, 마음을 가다듬은 후 작전에 들어갔다. 이영철 일행은 마을 주민을 포섭한 후 중공군과 인민군의 주둔지가 연백군 남산이라는 사실과 부대 규모를 상부에 보고했다. 그 다음 날 미군 전투기 4대가 투입돼 적을 괴멸시켰다. 이영철은 아군의 폭격으로 적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도 보고했다.
 
  그런 와중에 이영철은 자신들의 신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작전 지역을 변경하게 된다. 그 무렵 연백에 있던 KLO 동지들과 가족, 해병특공대가 인민군에 밀려 강화 교동도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는 곧바로 교동도로 건너갔다.
 
  이영철은 교동도에서 해병특공대장 김병식과 일행을 재회(再會)했다. 조만간 무기공급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도 전했다. 이영철은 1월 24일을 전후해 상부에 여러 차례 무전을 쳤다. 교동을 사수하려면 지금 즉시 무기공급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영철은 이 무렵 일부 해병특공대원이 교동도에 있는 주민들을 죽였다는 첩보도 입수했다.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강화도에 있는 수천 명의 인민군과 내통한 일부 주민을 없애지 않으면 특공대 전체가 몰살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영철은 1월 26일 강화도에 주둔한 인민군의 규모(2500여 명)와 동향을 보고했다. 1월 28일에는 강화도와 교동 사이에 있는 배를 파괴해야 인민군이 교동도로 넘어오지 못한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곧이어 미군의 폭격이 시작됐고, 3일 뒤 아군(我軍) 해군 302함이 강화도를 향해 함포사격을 시작했다. 302함으로부터 총알 등 전투무기를 인수받은 해병특공대는 강화도에 주둔한 인민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마침내 인민군이 강화도에서 후퇴, 아군은 강화도와 교동도를 완전 사수했다.
 
  “미군 비행기가 강화도를 폭격하고 302함이 함포사격을 한 다음 날, 302함에서 우리에게 ‘나룻배를 타고 전함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해병특공대장과 나 그리고 몇몇 대원이 302함으로 갔더니 함장이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함장은 우리에게 미 극동사령부가 전달하라는 봉투를 건넸습니다. 열어 보니 무기 인수증이었습니다. 참으로 반갑고 놀라운, 기적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클라크 대위에게 요청했던 무기공급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강화도와 교동도는 단 한 번도 적군에게 넘어간 적이 없는, 완전한 대한민국 땅이 되었습니다. 강화도와 교동을 지킴으로써 NLL이 강화도 북쪽으로 설정된 것입니다. NLL은 목숨을 담보로 국토를 지킨 생명선과 같습니다.”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 따르면, 미 제2군수사령부는 강화도·교동도에 있는 자생 유격대(반공의용군)에 소련제 소총 탄약 7만 발, 일제 99식 소총 2만 발, 일제 38식 소총 1만 발, 수류탄 3상자 등을 공급했다.
 
 
  美 극동사령부 제2정보사령부 교동파견대 교육대장으로 활동
 
  이영철은 해병특공대와 주민들이 먹을 음식도 부족하다는 내용을 미 8군에 전달, 식량까지 지원받게 했다. 그는 1951년 2월 대구에 있던 미 8군사령부로부터 ‘속히 대구로 오라’는 전갈을 받고 달려간다. 클라크 대위는 이영철에게 장거리 무전이 가능한 무전기를 지급하며 “통신병과 관련 물자 보급을 확대, 지원할 테니 열심히 활동해 달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교동도로 돌아온 이영철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을지2병단 창설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1951년 3월 경 미군의 지원으로 완전 무장한 해병특공대는 을지2병단 유격대로 재편됐다. 을지2병단은 미군의 지시를 받았다.
 
  이영철은 그 무렵 미 8군으로부터 교동도에 헬기장을 조속히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부대원들과 함께 헬기장을 건설했다. 얼마 후 미군 헬기를 타고 클라크 대위 일행이 현지에 도착한다. 이영철은 미군 장교들에게 대원 숙소 건설, 통신시설 보강을 요청했고 시간이 지나 미 8군으로부터 이동식 숙소와 발전기, 공작선 1척 등을 지원받았다.
 
  한편, 을지2병단에 이어 창설된 타이거여단은 1952년 초 백령도로 이전하면서 동키부대로 확대·재편된다. 교동도를 중심으로 한 유격대는 울팩부대로 확대됐다.
 
  1951년 중반 서해안 지역에 유격대가 증가하자 미군은 옹진반도 등산곶을 기점으로 2개의 사령부로 재편했다. 옹진반도 서부와 서북부 지역을 관장하는 레오파드기지사령부(산하에 백령도에 주둔한 동키부대를 둠), 옹진반도 동쪽과 남쪽으로 한강 어귀와 인천 앞바다를 관할하는 울팩기지사령부(교동도에 기지를 둔 울팩부대)로 나눈 것이다. 1952년 1월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KLO·8240부대)는 레오파드기지(백령도), 울팩기지(교동도), 베이커기지(부산), 커크랜드기지(동해안) 등 4곳의 유격대 기지를 뒀다. KLO 8240부대는 1953년 4월 제1유격연대(백령도), 제2유격연대(강화도), 제3유격연대(속초)로 확대된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 소속이었던 8240부대는 국군에 편입됐다.
 
  이영철 대원은 1951년 5월경 창설된 미 극동사령부 산하 제2정보사령부(제8103부대·강화도 인근 불음도 주둔) 소속 교동파견대(배저대·Badger Net)에 배속됐다. 그는 배저대 교육대장으로 활동하며 1954년 4월 제8103부대가 해체될 때까지 근무했다.
 
  《한국전쟁의 유격전사》는 “교동도 삼선리에 본부를 둔 교동파견대(배저대)는 대장 노재권, 교육대장 이영철, 공작과장 이강호, 별동대장 이광휘 등을 간부진으로 했다. 대원은 200여 명이었으며 여성대원 20여 명도 있었다. 대원들은 황해도 이북이나 연백 출신들로 현지 실정에 밝았다”고 적고 있다.
 
 
  미 극동사령부가 작성한 기밀문서
 
군번 없이 전쟁에 참여했지만 병역 미필자로 지목돼 결국 1977년 호주로 이민을 간 이영철 선생.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국가로부터 참전 유공자로 인정을 받는다.
  전쟁이 끝난 후 이영철은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다 1977년 호주로 이민을 간다. 그가 한국 땅을 떠난 데는 또 다른 아픔이 있다.
 
  “KLO 첩보대원들의 자부심은 창설 초기부터 대단했습니다.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미군 첩보부대원으로 활약한 것을 인정받아 휴전 후 미군부대에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군사정부가 들어선 후 병역(兵役) 미필자를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나까지 단속에 걸리게 된 겁니다. 군번(軍番)이 없으니 병역 미필자가 된 것이지요.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결국 해고됐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 나의 공적(功績)을 확인한 미군 장교의 도움으로 미 7사단에서 다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군번은 물론이고 6·25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서류로 남기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물론 허사였지요. 그래서 호주로 이민 가기로 마음을 먹었던 겁니다.”
 
  이후 이영철 선생은 한국에 올 때마다 자신의 6·25 참전 당시의 활동상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렸다. 공적은 차치하고 병역 미필자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호소했던 것이다.
 
  이영철 선생은 2007년 《월간조선》 사무실로 기자를 찾아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NLL 무력화 발언으로 논란이 됐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 대해서는 분개했다.
 
  “그야말로 긴 시간 동안 국방부나 관계기관을 찾아가 제8103부대(미 극동사령부 산하 제2정보사령부)의 존재를 알리고 나의 역할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 6·25 참전 사실은 인정했지만 서해안 지역에서 활동했던 유격대 창설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데 대해 ‘증거가 없다’며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을 무렵, 우연한 기회에 진실이 내게 찾아왔습니다.
 
  2013년 어느 날, 안면(顔面)이 있는 국방부 장교가 내게 “진실화해위원회가 작성한 자료를 찾아보면 선생님한테 아주 중요한 문서가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더군요. 그가 얘기하는 자료를 곧바로 찾아봤습니다. 강화도, 교동도의 양민학살 사건을 다룬 보고서였는데 정말 놀랍고도 소중한 자료를 봤습니다. 1951년 1월 내가 첩보요원으로 활동하면서 KLO 상부에 정보(情報)보고했던 사항을 토대로 미 극동사령부 통신대가 작성한 기밀문서가 첨부돼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문서에는 기밀 내용이 어느 부대까지 배포됐는지도 적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첩보요원으로 활동할 때 부여 받은 식별번호 ‘#469’가 기밀문서 오른쪽 상단에 선명하게 적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소중한 문서를 전쟁이 끝나고 60년이 지나서야 손에 쥐게 된 겁니다. 그동안 국군 유격대 창설에 큰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을 혼자만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왔는데 나이 90이 되어서야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밀문서를 보게 되다니,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허허.”
 
 
  이영철 대원을 증명하는 ‘KLO #469’
 
  미 극동사령부 통신대가 1951년 1월 30일 작성해 예하부대에 배포한 기밀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편의상 한글로 번역함).
 
  〈극동사령부 통신대
 
  KLO #469
 
  1951년 1월 30일
 
  제목: 적군 위치, 새로운 적군 병기
 
  소스: 무전/낙하산팀
 
  정보일자: 1951년 1월 23~29일
 
  평가: C-3
 
  1. 평산 온천에 100명의 중공군과 이 지역에서 북쪽으로 1마일 떨어진 곳에 북한군 1개 대대가 주둔. 중공군은 2개의 HYG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하나는 신형이고 구경이 커서 박태기(소리 나는 대로)라고 부른다. 덧붙여서 이들은 2개의 박격포를 보유하고 있으며 개별적으로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
 
  2. 아군(한국군과 우익)이 연안, 봉현, 백천, 평남리 점령
 
  3. 곡탄면에 위치한 안산(책임자 미상)에 주둔하였던 5000명의 북한군이 해주를 향해 이동
 
  4. 백촌에서 북동쪽으로 8km 떨어진 운공 광산에 무기와 탄약을 실은 26대의 황소 마차를 보유한 2000명의 북한군이 주둔
 
  5. 강화도 특히 하점면에 2500명의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이 섬의 모든 항구에서 작은 배들을 수리하고 있음
 
  6. 한국 해군이 교동도와 삼산도를 점령하였지만, 무기와 실탄이 부족하여 한국 해군 302호 함에 지원 요청. 교동도 1951년 1월 28일 밤에 아군 공군이 폭격〉

 
  진실화해위원회(노무현 정부 때 설립돼 2010년까지 한시적으로 활동했던 기관)가 이 문서를 양민학살 사건 보고서에 첨부한 것은 1950년 12월~1951년 1월 무렵 강화도, 교동도에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에서 강화특공대와 해병특공대가 미군과 한국군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만행(蠻行)을 저질렀다는 사실의 일부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기밀문서는 미군 소속 KLO 요원이 수집한 첩보사항과 무기지원 요청 사항, 아군 공군의 폭격 사실 등을 적시할 뿐 양민학살과는 관련이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문서는 90대 노병의 오랜 주장이 사실이라는 점을 새롭게 증명하고 있다.
 
미 극동사령부 통신대가 1951년 1월 30일 작성해 예하 부대에 배포한 기밀문서. 문건 오른쪽 상단에는 이영철 첩보요원이 부여 받은 식별번호 ‘#469’가 선명하게 적혀 있다.
 
  이영철 대원 첩보활동의 의미
 
  6·25 당시 이영철 대원의 첩보수집 및 정보활동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은, 작게는 당시 교동도에 있던 자생 유격대 ‘해병특공대’가 미군의 무기를 지원받아 을지2병단으로 확대·재편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그의 정보활동은, 미군 주력부대의 서쪽 측방을 보호할 목적으로 서해안 도서(島嶼)에서 활동하는 한국 자생 유격대를 적극 활용하도록 하는 새로운 전략을 미 극동사령부로 하여금 세우게 했고, 미군의 전폭적 지원으로 여러 유격대가 정식부대로 재편돼 서해안을 완벽하게 수호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으며, 결과적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NLL을 설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영철 선생은 “강화도, 교동, 백령도를 우리 유격대가 지켜냄으로써 지금과 같은 NLL이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쏟은 붉은 피로 NLL을 만든 생명선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국민이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노구(老軀)를 이끌고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활동을 증명하기 위해 뛰어다닌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역사에 남기려고요. 같이 참전했다 전사(戰死)한 동지를 이제 곧 저 세상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들을 대신해 역사적 사실을 후대(後代)에 알리고 싶어서죠. 《월간조선》이 나의 말과 관련 문서들을 기록으로 남겨 주니 지금 눈을 감아도 여한(餘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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