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증언

美 CIA 요원 출신 마이클 리가 본 한국 現代史의 결정적 순간들

“‘황장엽 리스트’ 있다”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6·29 즈음 全斗煥 정부의 계엄령 선포 시도를 미국정부가 반대할 때 CIA의 역할은?
⊙ 김신조 사건 이전에도 朴正熙 대통령 암살하려는 무장간첩 사건 있었다
⊙ 金正日의 애완동물은 프랑스제 샴푸를 썼다
⊙ 美 국무부는 신상옥-최은희 부부 탈출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 장성택의 죽음 뒤에는 39호실 비자금 관련 마찰과 섣부른 경제개혁 시도가 있었다
⊙ 황장엽의 망명은 김경희-김용순의 불륜을 김일성에게 직보했기 때문?

마이클 리
⊙ 81세. 침례회신학교 졸업. 조지워싱턴대 졸업. 조지워싱턴대 정치학(북한학) 박사.
⊙ CIA 근무. 동아시아문제 수석연구원. 알래스카 실버 아카데미 주임교수.
⊙ 《구원에 대한 이해와 성서적 고찰》 《현대 미국회화영어》 《지혜로운 사람들》 등 저술.
  미(美) 중앙정보국(CIA) 요원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 마이클 리는 《月刊朝鮮》 9월호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턴 정부의 북한 핵 시설과 관련한 영변 폭격을 둘러싼 움직임, CIA에 대한 한국 정보기관의 대북(對北) 휴민트(인적 정보) 의존 정도, 황장엽 망명 사건, 북한의 윤정희-백건우 부부 납치 미수 사건, KAL 858기 폭파 사건, 신상옥-최은희 부부 탈출 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 사건들을 미국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 증언했다.
 
  이 인터뷰에서 기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와 87년 ‘6월 항쟁’ 당시 미국 정부는 사태의 전개를 어떻게 보고 있었고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 질문했지만 그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이 사건들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인터뷰가 나간 후인 9월 2일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다음 날인 3일 영국 런던으로 출발했다가 8일에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북한 전문가로서 그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데 그 프로그램 녹화를 위해서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돌아온 그 다음 날에는 연휴 기간 중에 1시간 분량으로 방송하는 TV조선 보도특집에 출연할 예정이라고 했다. 회고록 준비로 동분서주해 왔고 또 그것을 마무리하느라 바쁜 여든 살 넘은 노인에게는 벅찬 여정이었다.
 
  그런 상황에 있는 그였기에 가벼운 대화를 나누려고 했지만 그는 CIA 요원으로서 자신의 전공이나 다름없었던 북한의 대남(對南) 전략과 그 전략에 대응하는 남한 사회 일부의 안이한 태도 등을 열정적으로 분석하고 지적하며 비판했다. 그와 응대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다시 던져 보았다. 출발은 ‘황장엽 망명 사건’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황장엽을 자신이 미국 정부 파견단의 일원으로 조사했음을 밝혔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CIA가 황장엽의 망명 시도를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음도 밝혔다. 황장엽과 관련해 가장 논란이 일었던 것 중 하나가 북한과 연계를 가진 남한 측 인사들의 구체적 면면을 알 수 있는 ‘황장엽 리스트’의 존재 여부였다.
 
  마이클 리에게 “황장엽 선생을 만나서 조사를 할 때 ‘황장엽 리스트’와 관련해 당연히 질문을 했겠죠?”라고 물었다. 그는 “당연히 했다”고 말하면서 더 이상 언급을 피했다.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해서만 말해 달라고 하자, 그는 “구체적인 내용을 말할 수는 없는 입장이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이 말하는 그 황장엽 리스트는 존재한다”고 밝혔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에둘러 황장엽 망명 사건과 관련한 몇 번의 질문을 더 했지만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이야기는 돌고 돌아 우리는 그가 이번 회고록에서 타의에 의해 쓰지 못한 이야기들이 무엇이 있는지로 돌아갔다. 호헌에서 6·29로 이어진 1987년의 한국 상황과 관련한 내용도 그중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그는 CIA 요원으로서 한국에 파견 나와 있었다.
 
  이와 관련한 사항도 역시 그로부터 증언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시위대 속에도 섞여 있었다는 사실 등 개인적인 체험만을 이야기했다. 기자는 《月刊朝鮮》 2004년 9월호에 87년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민병돈(閔丙敦) 장군의 증언과 국군 기밀문서를 입수해 전두환 대통령이 6·29선언 전 계엄령을 준비했었지만 군부의 반대로 계엄령을 포기했었다는 사실을 보도한 적이 있다. 그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 군부의 계엄령 반대
 
  <1987년 노태우(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의 ‘6·29 민주화 선언’이 있기 10일 전인 6월 19일, 전국적인 규모로 번지던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계엄령 준비 명령이 군에 내려졌으나 군부(軍部) 반대로 무산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내용은 월간조선이 최근 입수한 <작전명령 제87-4호>(군사2급비밀) 제하의 비밀 문건과 당시 특전사령관이던 민병돈 장군의 증언에 의해 드러났다. 그동안 6월 19일 군에 내려진 명령은 위수령(衛戍令)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민병돈 장군은 월간조선 9월호와의 인터뷰에서 “1987년 6월 19일 주요 지휘관들에게 계엄령 준비 지시가 내려졌으나, 군이 강력하게 반대해 이를 취소시켰다”고 말했다.
 
  <작전명령 제87-4호> 비밀 문건에는 ‘11군단장을 부산·경남 지구, 9군단장을 충남북 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이라는 명령문이 있다.
 
  육군본부가 작성, 참모총장 명의로 주요 지휘관들에게 6월 19일 배포한 이 비밀 문건은 급하게 작성한 듯 내용을 첨가하거나, 별첨으로 작성한 전투편성표에 부대 배치도 변경 등을 수기(手記)로 작성하고 있다.
 
  <작전명령 제87-4호>는 날짜는 적시하지 않은 채 군의 임무를 ‘육군은 현 임무를 수행하면서 87년 6월 ○일 ○시 부로 소요진압 작전을 실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계엄령 준비명령이 1987년 6월 당시 전국적으로 번지던 대규모 시위 진압을 위해 내려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민병돈 장군은 “특전사·수방사 같은 주요 부대에 명령이 하달되었다”며 “그냥 군대가 움직인다면 유혈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민 장군은 “당시 보안사 처장인 장석규 준장과 손수태 대령 등 일단의 준장 및 영관 장교 등 비교적 소수의 장교들이 반대 건의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민 장군은 “군부의 계엄령 반대 건의를 당시 보안사령관인 고명승(高明昇) 장군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했다”고 말했다. 당시 소수 장교의 계엄령 반대 건의가 대통령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지휘통제력을 가진 특전사령관이 뒤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대통령도 잘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전명령 제87-4호>에 포함된 작전개념 항목에서는 ▲26사단, 3특전여단, 해병 2개 연대를 11군단에 배속 ▲9사단을 9군단에 배속 ▲7·11특전여단을 31사단에 배속 ▲706특공연대를 39사단에 배속 ▲20사단, 30사단, 1·5·9특전여단, 701·705·708특공연대를 수방사에 배속 등의 부대 이동을 지시하면서, ‘전·후방 경계부대는 '87.6.○. ○시 부로 진돗개 둘과 동일한 경계태세를 유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부산지역에서 운용될 예정이던 26사단, 대전 지역에서 운용될 예정이던 9사단 등 전방 부대의 이동 지시가 눈길을 끈다. 경계태세 ‘진돗개 둘’은 대(對)간첩 작전과 같은 수준의 경계 명령이다.>
 
 
  CIA 요원으로서 본 87년 한국 상황
 
1987년 6월 ‘호헌 철폐’를 외치는 국민들의 함성이 높았다. 전두환 정부는 계엄령 선포까지 고려했지만 군부와 미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당시 시위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명동으로 나온 시위학생과 근로자들이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87년 당시 주한(駐韓) 미국 대사를 지낸 제임스 릴리도 그의 회고록에서 미국이 전두환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를 반대했고 한국의 군부도 전 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를 좌절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밝힌 바 있다. 릴리 대사는 87년 6월 19일 오후 전 대통령을 만나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계엄령에 반대하는 친서를 전달했다고 한다. 다음은 릴리 전 대사의 회고록 중 관련 부분을 요약한 내용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90분 면담 내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최광수(崔侊洙) 외무장관과 통역 한 사람만이 배석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전에 만났을 때 활기에 넘쳤고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웃으며 대화를 독점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에는 깊은 고뇌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친서를 내주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친서를 읽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편지는 우정 어린 표현으로 쓰여 있었다. 편지 모두에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을 재(再)확인하고 동시에 한국 대통령의 평화적 정권교체 공약에 대한 격찬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나라의 계속된 정치발전을 위해 정치범을 석방하고, 권력을 남용한 정치탄압 관리를 처벌하며, 자유언론을 신장하라고 권했다. 그와 같은 조치들은 “당신이 정확하게 지적한 바 있는 구(舊)정치로부터 탈피하려는 당신의 의지를 전(全)세계에 알리는 극적인 신호가 될 것”이라고 레이건은 썼다.
 
  이어서 내가 나섰다. 계엄령 선포에 대한 미국의 입장에 대한 단호하고 분명한 언급으로 레이건 대통령의 우정 어린 친서 내용을 보충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그에게 각인시켰다.
 
  첫째로 내가 주한 미군도 대표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주한 미군사령관과 나는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건의한다”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말했다.
 
  대사관으로 돌아와서 청와대에 가서 내가 한 말을 다시 정리하고 면담에 대한 내 관찰을 덧붙여서 긴 전문(電文)을 미 국무부에 보냈다. 그날 오후 늦게 최광수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청와대에서 나와의 면담 후에 전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우리가 한 일에 만족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한국인들이 스스로, 특히 묘하게도 군(軍) 고위층이 전두환 대통령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는지 모른다. 그들은 6월 19일까지 긴장된 며칠 동안 전두환 대통령에게 진언을 넣어 주었다.>
 
 
  ‘한국민주화에 美정부 기여’
 
CIA가 마이클 리의 회고록을 검열한 후 출판 허락을 알려온 문서.
  마이클 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6·29선언 직전 전두환의 계엄령 선포를 일부 군부가 반대해 좌절시켰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계엄령 선포를 좌절시키는 데에는 미국 정부의 역할도 있었다는 게 전 주한 미 대사 제임스 릴리의 주장인데요. 그렇다면 한국 정부의 계엄령 선포 움직임을 CIA가 사전에 인지했다는 말인데 어떤 방법으로 알아냈습니까.
 
  그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한국 민주화에 미국 정부가 기여했다고 보면 됩니다.”
 
  —어떻게 알아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휴민트입니까, 도청입니까.
 
  “자세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당시 상황을 제가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만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그는 “이번 회고록에 그와 관련한 부분도 넣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계엄령을 막았다면 미국 정부가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좋은 일을 한 것인데 공개 못할 이유가 뭡니까.
 
  “거듭 말하지만 미국 정부가 한국 민주주의에 기여했다는 것만 당시 CIA 요원으로서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CIA 요원으로서 당시 한국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었습니까.
 
  “교과서적 답변을 하자면, 그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면 한국의 정치적 상황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상황도 상당히 악화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88올림픽 때는 미국 정부가 북한의 대남 테러 방지를 위해 비밀리에 한국에 대 테러 요원을 파견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대답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황장엽 선생의 망명을 사전에 인지했던 것처럼 2000년에 있었던 6·15 남북 정상회담도 미국이 사전에 인지한 것 아닙니까.
 
  “….”
 
  —5·18 광주 민주화운동 발생 요인과 관련해 사회 일반과 약간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마이클 리는 “내가 죽거나 미국 정부의 비밀 해제가 이루어지면 알게 될 일”이라며 더 이상의 ‘예민한 대화’는 피했다.
 
  그가 ‘예민한 대화’를 피하기는 했지만 CIA로부터 공개를 허락 받은 그의 회고록에는 비밀에 가까운 비화(秘話)들이 가득하다. 그의 회고록은 200자 원고지 1400여 장 분량이다. 황태성 사건, 윤정희-백건우 부부 납치 미수 사건, 실미도 사건 등 월간조선 9월호 인터뷰에서 언급한 부분은 가급적 내용의 중복을 피하면서 회고록의 일부를 소개한다.
 
 
마이클 리 회고록 발췌

  나는 일제(日帝) 강점기인 1933년 11월 10일에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비정리 봉황부락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순흥(順興) 안씨(安氏) 가문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경주(慶州) 이씨(李氏)로 아버지의 이름은 이종국 (李宗國)이다. 아버지는 목수였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1956년 2월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 제대한 후인 1958년 9월 미 528부대(훗날 502군사정보단)에 군무원으로 취직했다. 미국 정부가 주는 월급을 받게 된 것이다.
 
  502군사정보단은 A, B, C, 3개 중대로 편성되어 내가 속해 있던 A중대는 한미(韓美) 합동으로 북한 귀순병, 귀순민간인, 자수간첩, 체포간첩, 송환어부들을 상대로 심문 작업을 했다. B중대는 미군 단독으로 방첩 활동을, C중대는 미군 단독으로 대북공작 활동을 주 임무로 하고 있었다.
 
  나는 이 502군사정보단에서 15년8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약 450명을 상대로 단기간, 장기간 심문 작업을 했다. 그동안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가족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철두철미하게 보안을 유지해야 했다. 직업치고는 특수한 직업이었고 참으로 힘들었다. 보안 유지를 위해 외부와 접촉을 삼가고 대인관계를 조심해야 하는 고독한 생활을 했다. 또한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고도의 전문지식이 있어야 하고 피심문자를 다루기 위하여 인격적 자질과 예리한 심리학적 감각이 있어야 했다. 모든 심문조서는 3급 비밀 또는 2급 비밀로, 그리고 철저한 6하원칙을 지키면서 세련되고 깔끔한 영문으로 작성해야 했다.
 
  귀순병이나 귀순민간인, 자수간첩이나 체포간첩이 전방이나 후방에서 발생하면 무조건 48시간 이내에 502군사정보단 대방동 수용소에 도착해야 한다.
 
  그들이 도착하면 다음과 같은 절차로 처리된다. 1) 목욕과 건강진단 2) 소지품 점검 3) 수용소 의복과 세면도구 지급 4) 수용소 내에 특별히 마련된 한식 식당으로부터 식사 제공. 그리고 도착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심문 활동에 들어간다. 제일 먼저 작성하는 심문조서는 규칙적으로 <지득범위조서> 라고 하는 〈KBR〉 (Knowledgeability Brief Report)이다. 이 조서에 포함되는 내용은, 인적사항, 소지품목록, 귀순·침투경로, 귀순이유·공작임무, 구체적인 경력 그리고 심문관 평가다. 심문관 평가에는 피심문자의 지능수준, 지식수준, 협조도, 일관성과 진실성 여부, 긴급첩보 유무, 본인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향후 중점심문 방향과, 성격을 고려한 주의사항 등을 기록한다. 이 〈KBR〉 조서는 24시간 이내에 주한 미8군 G-2(정보국), 주한 미국대사관, 미국 CIA, DIA, FBI, NSA를 포함한 여러 정보기관에 보고된다. 한국 측 심문관들도 동일한 내용의 조서를 육군본부 G-2와 육군 정보사령부와 합동참모본부에 발송했다.
 
 
  朴正熙 대통령 암살 시도
 
  지금부터는 내가 502군사정보단 심문관으로서 담당했던 간첩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구체적인 사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남파 간첩들의 신분증과 관련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자 한다.
 
  소매치기를 하다가 붙잡힌 간첩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소매치기가 아니라 간첩이라고 했지만 경찰은 믿어 주질 않았다.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그를 내가 심문했다. 그의 구체적인 진술을 듣고 보니 남파 간첩이 맞았다. 나는 그를 502정보부대로 이송해 자세하게 심문했다. 당시 북한에는 남한 신분증 습득을 위한 소매치기 양성 부대가 따로 있었다. 남한에 와서 주민등록증 등 각종 신분증을 훔쳐 북으로 가져가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지금이야 위조기술에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북한이지만 그때는 신분증을 훔쳐 가기 위해서도 간첩을 보내는 일이 있던 시절이었다.
 
  내가 담당한 간첩 사건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 송추 무장공비 사건이다.
 
  1965년에 서울시경이 북한 간첩 한 사람을 체포했는데 이 사람이 전향하여 대북 역공작에 적극 협조했다. 그는 북한에 계속 암호통신을 보내며 남한에서 그가 성공적으로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고를 했고, 서울 북방 송추유원지 금수장 앞에서 1965년 7월 18일 북한이 파송하는 3인조 무장간첩들을 접선하도록 공작을 추진했다. 이때 서울시경의 대공요원들이 잠복해 있다가 저들을 덮쳤다. 그때 북한 간첩들이 저항하여 교전이 벌어졌고 서울시경 대공요원 두 사람이 전사했으며 3인조 간첩들 중에 한 사람이 생포되고 두 사람은 몸에 심한 총상을 입은 채로 도주하여 북한으로 돌아갔다.
 
  생포된 자는 조장인 대위 노성집이고 도주한 자들은 조원인 대위 이재영과 대위 우명훈이다. 이 두 사람은 북으로 돌아간 후에 병원 치료를 받고 소위 ‘공화국 전투영웅’ 칭호와 각각 육군 대좌와 상좌의 계급을 받았으며 그들이 2년 후에 평양시 근교 상원군 공포리에 ‘124군부대’를 창설했다. 생포된 노성집은 대방동 수용소에 후송되었고 내가 그를 3개월간 심문했다. 이 3인조 간첩들의 공작 임무는 서울 시내에 잠입하여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타고 가는 승용차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그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무장간첩들이 미군부대를 기습했던 고랑포 사건도 개인적으로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지금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할 수 없으나 그때가 1966년 늦가을이었다. 서부전선 미2사단 전방으로 침투한 후 체포된 간첩 한 사람을 내가 심문했는데 그가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무장간첩들의 미군부대 습격 사건
 
1965년 7월 18일 무장간첩과 형사들이 교전하여 형사들이 총 맞아 쓰러지고(X표) 간첩이 도망간 곳(점선). 송추에 침입했던 간첩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북한 인민군은 동부전선에 제1집단군을, 중부전선에 제5집단군을, 그리고 서부전선에 제2집단군을 배치하고 있었는데, 각 집단군 산하에는 총참모부 정찰국의 작전지시를 받는 도보정찰소(徒步偵察所)라고 하는 특공대가 있었다. 아군 전방에 은밀하게 침투해 정찰활동을 하거나 때로는 밤에 전방부대의 지휘관을 암살하고 목을 베어 가는 공작을 수시로 자행했다. 그해 10월 15일부터 20일간 이내에 그들이 집중적으로 동부전선 중부전선 서부전선 일대에서 남으로 침투하여 국군장병 총 23명을 살해하고 1명은 납치, 또 여러 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내가 심문한 간첩은 제2집단군 산하 도보정찰소에서 1개 소대 병력이 맹훈련 중인데 그들의 임무는 미2사단 전방에 침투하여 미군부대를 기습하고 병력을 사살한 후 퇴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1개월 이내에 작전을 개시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급히 그 내용을 긴급첩보 형식으로 작성해 보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1966년 11월 2일 새벽에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800m 떨어진 미2사단 소속 고랑포 부근의 부대가 저들의 기습을 받았다. 아침식사를 위해 줄지어 서 있던 미군 6명과 카투사 1명이 살해당하고 미군 1명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8군과 미2사단이 비상태세에 들어갔다. 내가 보고한 정보를 신속히 처리하고 경계태세를 철통같이 준비했더라면 그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휴전 이후 미군이 당한 가장 큰 사건이었다.
 
  그때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방한(訪韓) 후 떠나면서 비행기 안에서 이 보고를 받았다. 존슨 대통령은 유엔(UN)군 사령관이자 미8군 사령관인 찰스 본스틸 대장에게 사건의 책임을 엄격히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그 불똥이 나에게 떨어졌다. 미8군 G-2에서 502군사정보단을 검열하고 사전정보가 있었는지 여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내가 보고한 심문조서가 발견되었다. 분명히 사전정보가 있었는데 사건 발생 이전에 처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본스틸 대장이 노발대발하고 직접 진상을 밝히기 위하여 502군사정보단과 내가 속해 있는 A중대를 찾아왔다.
 
  맨 마지막에 내가 불려 들어갔다. 그때 부대 지휘관들이 벌벌 떨었고 나도 사성(四星)장군 앞에서 벌벌 떨었다. 그때 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가는 기억이 있었다. 나는 내가 작성한 심문조서의 원본을 찾아 달라고 했다. 장교 한 사람이 부대 편집과에 가서 그 원본을 찾아왔다. 그 원본을 받아 든 본스틸 대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거기 첫 페이지에 분명히 빨간 글씨로 ‘긴급처리 요망(Immediate Action Required)’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오히려 칭찬을 받았고 상부의 여러 사람이 징계처분을 받았다. 이때 이후로 새로운 긴급첩보 보고절차(Spot Report System)가 시작됐고 특별히 내가 새로운 입소자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하면 부대장과 편집과 직원들이 긴장했다.
 
 
  설득에 애를 먹었던 김신조의 自害 소동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청와대 습격사건의 생존자인 김신조씨. 마이클 리는 김씨를 설득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1·21사태로 생포된 김신조는 공비소탕 작전이 끝난 후에 대방동 수용소에 후송됐다. 나는 김신조를 그곳에서 4개월간 심문했다. 그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그대로 철두철미하게 남한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으며 매사에 반항적이었고 비협조적이었다. 그는 체포될 때 자폭에 실패한 것을 원망스럽게 생각했고 청와대 기습 작전에 실패한 것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에 대한 무한한 불충(不忠)으로 생각했다.
 
  그의 반항적인 태도 때문에 나는 그를 1주일 이상 정상적으로 심문할 수가 없었다. 우선 나는 그를 회유하고 설득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는 자결하겠다고 식사를 거부했고 수용소 감방 벽에 머리를 부딪뜨리고 손목의 혈관을 이빨로 물어뜯고 온갖 소동을 벌였다. 수용소 측에서는 그의 자해(自害)를 방지하기 위해 감방 바닥과 사면 벽을 모두 매트리스로 덮고 24시간 수갑을 채운 채로 특수 감시 장비를 통해 감시했다. 그가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반항할 체력이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침착하게 그에게 접근했다. “자네가 죽기는 왜 죽어” 하면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꼭 하나 남아 있다고 말하고, 그것은 “진실을 알아야 하고 또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이며 그 다음엔 죽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사람이 사내자식으로 태어나서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으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실인지 알기도 전에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비겁하고 무책임한 일”이라고 설득했다. 이 말에 수긍이 가는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문 채로 내 말을 계속 듣기만 했다.
 
 
  北으로 돌아간 생존자들
 
  김신조가 수그러진 후에 나는 그의 수갑을 풀게 하고 식당에 특식을 주문하여 먹게 한 뒤 본격적인 심문에 들어갔다.
 
  “김 군, 자네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도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 무엇이 바른 길인지 판단을 하자.”
 
  이때 김신조는 북에서 배우고 들은 이야기와 자기가 아는 진실이 무엇인지 나를 설득하려는 마음으로 대화에 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날이 가고 인간적인 냄새를 서로 맡으면서, 남북한의 건국 과정과 가짜 김일성의 정체와 자유세계의 실상을 이야기하고 들으면서 그는 서서히 새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약 3주 후부터는 수용소를 거쳐 간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사람의 하나가 되었고 가장 많은 분량의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고 심문 도중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그가 출소하면 꼭 교회에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한국 정부는 그가 전향하여 최대한으로 협조를 했고 역사의 산 증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1970년에 합법적인 남한 주민으로 정착하게 하였고 불행히도 북에 있는 그의 가족은 모두 처형되었다.
 
  김신조와 얽힌 아찔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김신조가 대방동 수용소에 도착한 1주일 후 미8군 G-2 오란도 준장과 나 그리고 보안사 서빙고분실 보안과장 이학봉 소령이 김신조를 앞세우고 헬리콥터를 이용해 전방으로 갔다. 124군부대의 31인조가 통과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조망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철 기둥 북쪽에서 공병가위로 수직 약 1m가량 자르고 통과한 후 다시 내려놓으면 철 기둥 남쪽 밖에서는 순찰대나 조사관들의 눈에 띄지 않게 돼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김신조로부터 침투 당시의 상황, 이동 과정과 아군 경비태세의 허점을 구체적으로 듣고 모든 것을 기록했다. 조사 후 우리 일행은 그 지점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미군 GP로 이동해 망원경으로 비무장지대 반대쪽 북한 초소의 동향을 감시했다. 그때 예기치 못한 참사가 발생했다. 우리가 헬리콥터로 그 초소를 떠난 약 10분 후 북한 초소에서 발사한 포탄이 우리가 방문했던 바로 그 초소로 날아왔던 것이다. 포탄이 폭발하면서 미군들이 폭사하고 부상을 입었다. 참으로 아찔한 사건이었다. 우리가 그곳에 10분만 더 머물렀더라면 우리도 그 참변을 당했을 것이다. 그때 동행했던 이학봉 소령은 훗날 1986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2차장을 지낸 후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에 김신조는 놀랍고도 새로운 사실을 증언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 작전에 실패한 31인의 공비들 중에 살아서 북으로 돌아간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2000년 9월 11일에 김정일의 특사로 서울을 방문한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김용순을 수행한 박재경 대장이었다는 것이다. 박재경은 그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이었으며 김정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했다. 그는 서울에 왔을 때 신라호텔에서 남측 인사들을 만나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하중에게 칠보산 송이버섯을 전달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청와대 기습 작전에 실패하고 북으로 도주할 때 노고산에서 추격하는 국군 수색대와 교전을 하고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을 사살한 장본인이다. 청와대 습격을 위해 내려왔던 그가 선물 꾸러미를 들고 청와대를 방문했다니, 이걸 놀라운 일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코미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실미도 사건 관련자 중 3~4명 생존설은 허구다
 
1971년 8월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특수부대원들이 부대를 탈출,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 시내로 들어오다 대방동에서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 서 있는 장면.
  영화 <실미도>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사건 자체가 상당한 드라마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로 인해 잘못 알려진 부분들도 많다. 실미도 부대원들은 3년4개월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31명 중 7명이 사망하는데 그 사망 원인을 분석하면, 1명은 훈련 중 익사, 2명은 탈영으로 즉결처분, 1명은 하극상으로 처형, 그리고 3명은 무의도 강간 사건으로 처형된 것으로 돼 있다. 훈련 중에는 전시 상황으로 인식하고 교육대장에게 생사여탈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나머지 24명은 지옥 생활을 계속하는데 그때의 극한 상황을 이제 와서 쉽게 판단하거나 평가하기 어렵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24명의 훈련 대원들이 반란을 결심하고 1971년 8월 23일 새벽 6시에 기간요원 12명을 사살한 후 실미도를 탈출했다. 교전 중에 기간요원 6명은 도피하다가 바다에서 익사했고 나머지 6명은 죽음을 면했다. 그때 사망한 기간요원들은 전사자로 취급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유족들에게는 적정한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실미도 내에서 교전 중에 훈련 대원 2명도 사살되었고, 잔여 22명은 그날 12시 20분경 송도 해안 독배부리에 상륙하고 33사단 102연대 6중대 관할지역을 통과한 후 시내버스 한 대를 탈취하여 이동하다가 버스 뒷바퀴에 펑크가 나서 오후 1시경 태화운수 소속 시외버스 5-1681호를 탈취해 갈아타고 서울을 향하여 돌진했다. 어떤 기록에는 상륙 직후 출동한 육군 병력과 교전하여 대원 4명이 또 사살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서는 그런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반란군 버스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저항이 있었고 민간인 13명, 경찰 2명, 군인 2명의 부상자와 민간인 6명과 경찰관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들이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15분경이었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3~4명의 생존자가 있었고 재판을 거쳐 1972년 3월 10일에 처형되었다고 하나 내가 유한양행 건물 앞에서 자폭한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니와 그때 생존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유일한 생존자 심문
 
  생존한 기간요원 6명은 전역할 때 철저한 보안교육을 받고 향후 30년간 실미도 사건에 대하여 함구할 것을 지시받았다고 한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대원들이 버스 안에서 <붉은 깃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제작진의 실수다.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저들이 출동한 군경과 대치하여 총격전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때 저들이 버스 안에서 자폭했을 때 주변에는 교통정리와 주민들과 행인들의 접근을 단속하는 경찰관 몇 명과 우연히 그곳에 나타난 소속 불상의 육군소령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경찰이나 군인들이 출동하여 저들을 저지한 사실이 없다. 군인들이 출동한 것은 저들이 자폭한 후 한참 후의 일이다.
 
  나는 사건 현장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병원으로 실려간 김종철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실미도 대원들이 타고 간 버스를 운전했고 당시 나이 29세였다. 내가 그 생존자와 대화를 나눈 유일한 조사관이었는데 이 사실은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대화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들은 북에서 내려온 특공대가 아니다. 우리들은 인천 실미도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대한민국 공군 특공대원들이다. 우리들은 북한에 침투하여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하여 김신조 특공대처럼 31인조로 구성되었고 인간이 상상할 수없는 지옥훈련을 3년4개월 동안 받았다. 우리들은 전국 각지에 있는 교도소에서 뽑혀 온 사형수 무기수들인데 어차피 세상에 다시 나가지 못하고 죽을 목숨인데 한번 기회를 주어 나라를 위한 귀한 임무를 맡고 성공하면 모든 과거의 허물을 씻고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평생 편히 살 수 있도록 연금을 준다고 정부가 약속하여서 우리들은 그 제안을 수용하고 충성 맹세를 한 다음 목숨을 걸고 훈련을 받아 왔는데, 언제 우리들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지 전혀 소식이 감감하고,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확인 된 바는 아니지만, 그 임무가 취소되었고 국가기밀 누설을 염려하여 우리들을 귀신도 모르게 처단해 버릴 것이란 말이 돌았고, 기간요원들에게 물어보아도 확고하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하기는커녕 묵묵부답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의혹은 점점 굳어져 갔다.
 
  훈련 초기에는 우리들을 아주 잘 먹이고 부식도 풍족하였는데 요즘에 와서는 기간요원들이 부식비를 다 떼어먹고 소같이 먹는 우리들은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기간요원들의 잔학 행위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차피 더러운 운명을 타고 나왔고 곧 죽어야 할 사형수들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랴, 서울로 가서 대통령을 만나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따져 보자, 그리고 죽자. 그래서 우리들은 오늘 새벽에 기간요원 12명을 사살하고 송도 해안에 상륙하여 인천으로 나와 시외버스를 납치하고 서울로 진입하는데 대방동에 올 때까지 저항이 몇 번 있었지만 우리는 계속 달렸고, 대방동 파출소 앞을 지날 때 잠복한 경찰들의 사격에 의하여 우리가 탄 버스의 우측 앞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하게 되었는데, 유한양행 건물 앞에서 가로수를 들이받고 버스가 멈췄다. 그때 우리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소지하고 있던 대전차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그 김종철씨도 나와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안 돼 사망했다. 실미도를 탈출한 훈련대원 가운데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CIA 생활
 
마이클 리가 CIA로부터 받은 기념 메달. CIA는 20년 이상 근속하고 은퇴한 직원들에게 기념메달을 주고 있다. 메달 상단에 CIA의 영문(英文) 풀네임(Central Intelligence Agency)이 선명하다. 뒷면에는 마이클 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는 1976년 6월부터 2000년 2월까지 23년8개월간 미국 CIA에 재직했다. 그때 어디서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비밀을 절대로 공개할 수 없다. 그 비밀은 내가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한다. 그러나 이미 공개된 사건이나 기밀제한에 속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 일부를 회고한다. 우선 2000년 2월 29일 내가 은퇴하던 날 조지 테닛 CIA 국장으로부터 받은 공적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미국 연방정부의 모든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귀하가 이 나라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수고한 공적을 인정하며 미국 정부의 높은 이상과 전통을 지키고 이제 명예롭게 은퇴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바이다.>
 
  나는 40년에 가까운 미국 연방정부 재직기간 동안 동서냉전 시대에 은밀히 지구를 누비고 다니면서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해치는 많은 역사적인 대형사건에 개입해 목숨을 걸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총 24개 국가에서 일하면서 보여준 능력과 열성으로 14개의 공적훈장과 수많은 표창장을 받았다.
 
  내가 장기간 해외근무를 하고 있을 때 상관들은 매년 근무평정서에서 나를 주재국 정부와의 연락 업무에서 주역을 맡았다고 했고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며 역사교범이라고 치하했다. 그리고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워싱턴 본부에 돌아가서 근무할 동안에는 국무성과 국방성, 그리고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연방수사국(FBI)과의 북한관계 대외 협력으로 우리 기관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 공을 세웠다.
 
 
  탈출 전 미국 거주 동창에게 전화를 건 신상옥
 
최은희-신상옥 부부.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탈출에는 원래 신상옥 감독의 고등학교 친구인 김인환씨가 개입돼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 국무부의 탈출 개입 반대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신 감독은 1985년 말경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출장 가서 부다페스트 호텔에 머물면서 따라온 북한의 경호감시원들의 눈을 피해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신 감독과는 함경북도 경성고보 동기동창인 김인환씨였다.
 
  “누구야?”
 
  —나 신상옥이야.
 
  “자네, 지금 거기가 어디야?”
 
  —나 지금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와서 호텔에 머물고 있는데 빨리 와서 나를 좀 만나 주게.
 
  친구 김인환은 그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득달같이 부다페스트에 날아가 신상옥을 은밀하게 만났다. 그때 신 감독은 친구에게 자기의 탈출 계획을 말하고, 김일성 부자가 잘 배려를 하고는 있지만 예술가의 양심과 지각으로는 그 숨 막히고 비위에 거슬리는 사회제도와 구조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겠으니 협조해 달라고 애원했다. 친구 김인환은 “어떻게 협조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다. 신 감독은 남한에는 북한의 간첩들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위험해서 갈 수가 없고 미국으로 가고 싶으니 미국 정부에 자기의 뜻을 전달하고 협조를 부탁할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김인환은, “그러면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나에게 연락해 주면 내가 자네의 뜻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오래전부터 신 감독과 최 여사는 일제 소니 휴대용 녹음기를 하나 구입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자주 만나는 자리에서 그것을 테이블 위에 버젓이 올려놓고 “위대한 수령님의 육성을 평생 간직해야 한다”면서 그들과의 대화를 계속 녹음했는데 신 감독의 속셈도 모르고 저들은 좋다고 낄낄대며 거리낌 없이 여러 가지 속에 있는 말도 하였는데 그중에는 우리가 참작해야 하는 중요한 정보도 들어 있고 김정일이 북한의 영화 발전을 위하여 신 감독 부부를 북으로 납치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자백의 내용도 포함돼 있다.
 
 
  탈출
 
  신 감독과 최 여사는 이 작업을 저들이 알게 모르게 진행하여 카세트 네 개 분량을 녹음해 두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이불 속에서 그가 믿을 만한, 전에 교도통신 빈 특파원으로 일했던 일본인 친구에게 일본어로 자기가 북한을 탈출할 계획을 하고 있는데 차후에 연락이 가면 빈에 나타나 협조해 달라는 부탁을 녹음하였다.
 
  그리고 1986년 정월에 그가 다시 부다페스트에 갔을 때 뉴저지에 있는 김인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김인환의 부인이 전화를 받으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녀는 “신 선생님! 그이가 지난 겨울에 간암으로 가셨어요”라고 했다. 신 감독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다시 침착을 되찾은 신 감독은 김인환의 부인에게 집에는 자신을 만나 줄 만한 다른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스무 살 먹은 대학생 딸 마리가 있다고 했다. 신 감독은 마리를 급히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했다.
 
  그 다음 날에 마리가 부다페스트에 날아갔다. 그때 마침 호텔 프런트에 일본인 청년이 일하고 있었는데 신 감독은 그를 통해 은밀한 장소에 가서 마리를 만나고 미국 정부에 보내는 편지와 녹음 카세트테이프 다섯 개를 주면서 미국에 돌아가면 즉시 국무부에 등기우편으로 발송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마리는 미국에 돌아간 후 어머니와 그 물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절절매다가 뒤늦게 1월 말경에 국무부로 발송했다.
 
  그 소포를 받은 국무부는 “They are South Koreans. Why should we worry about them? Let them go to South Korea. 그들은 남한 사람들이야. 왜 우리가 그들 문제로 신경을 써야 해? 남한으로 가라고 해” 하면서 신 감독 부부의 미국 망명 의사를 묵살해 버렸다.
 
  그러나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꿈은 현실로 나타났다. 1986년 3월 13일 오후 1시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여사가 미국대사관에 뛰어들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은 알려진 바와 같다. 그 과정에서 나와 CIA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더 이상 언급할 수 없다.
 
 
  김현희 사건이 조작일 수 없는 이유
 
김현희씨의 최근 모습. 마이클 리는 김현희씨가 조작된 인물이라는 일부 주장에 대해 “미국 정부도 각종 정보 채널을 통해 그녀가 조작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김현희의 KAL 858기 폭파 사건에 관한 안기부의 조사가 끝나고 이 사건의 내용이 보도되었을 때 북한은 악랄하게 남한의 조작이라고 우겼다. 국내 친북(親北) 세력도 이에 동조했고 심지어 일본의 교도통신을 포함한 해외 언론에서도 이 엄청난 사건의 진실성 여부를 놓고 약간의 의문을 제기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때 국제테러에 대해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또 방대한 자료와 수사 능력을 갖추고 있는 미국 정부가 개입했다. 나는 당시 한국에 나와 있었다.
 
  한국 정부의 승인과 협조를 받고 미국은 이 사건의 독자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수사 내용은 한국 정부가 발표한 내용이 100%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추가적으로 확고부동한 단서와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김현희가 안기부 조사관들에게 진술한 그 방대한 분량의 진술 내용과 미국 측에 진술한 내용에서 추호도 차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고 남한에서 조작한 인물이며 남한 정부가 훈련을 시켜서 본인이 북한 공작원인 것처럼 행동을 했다고 가정하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김현희는 지능지수가 높고 대단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지만 세상에 뛰어난 천재라 할지라도 진실이 아니면 허위는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심리학적으로 피의자는 수사관 앞에서 거짓말을 세 번 이상 사용할 수 없으며 3일 이상을 지탱하지 못한다. 그의 출생, 학교생활, 가족관계, 공작원 포섭과정, 공작교육을 받은 초대소 위치와 환경, 복잡하고 어려운 공작교육 내용, 심지어는 매일매일의 스케줄까지, 접촉한 인물들, 외국어학습, 공작 실무교육과 유럽 주요 도시와 마카오까지 여행하면서 실시한 해외실습, 중국실습, 중국 광저우 2차 파견 및 암호문해독 등은 전문지식과 실제 경험 없이는 다 기억할 수가 없는 일이다.
 
  1988년 2월 4일, 미국 국무부는 하원 외무위원회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위원장 스티브 솔라즈)가 주재한 KAL 858기 폭파 사건에 관한 청문회에서 미국 정부의 독자적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클레이턴 맥나마웨이 국무부테러담당 대사가 김현희 자백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미국의 독자적인 보강증거를 제시했는데 그 독자적인 보강증거의 내용은 이렇다.
 
  “고도로 훈련되고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미국 정부의 관리가 김현희를 직접 만나 조사를 했고 KAL 858기 폭파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계획과 지령에 의한 범행이며 김현희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임무를 수행한 북한 테러리스트인 것을 확인했다. 김승일과 김현희가 사용한 자살용 독약은 청산염으로 과거에도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했다. 그들이 소지한 위조 여권은 일본 정부가 북한 간첩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의 협조로 일본의 실재 인물들의 인적사항을 도용한 것이다.”
 
  미국의 조사관이 많은 북한 인물 사진을 제시하고 아는 사람을 지적하라고 했을 때 김현희는 그 많은 사진 중에서 두 사람을 골라 내어 한 사람은 김승일과 김현희가 공작 임무를 받고 평양을 떠날 때 김정일의 특별지령문을 읽어 주고 김정일 초상화 앞에서 충성의 맹세 의식을 집행한 간부이며 또 하나는 그가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 체류했을 때 그를 관리했던 북한 공작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이 사진의 얼굴들은 한국 정부도, 한국에서 김현희를 조사한 미국의 조사관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김현희의 이 인물들에 대한 증언에 대해 워싱턴에서는 정확한 정보라고 판정을 했다. 당시 한국은 공산주의 국가인 헝가리와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현지공관도 없었고 그와 같은 자료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김현희는 조사를 받을 때 북한 특유의 용어를 사용했고 ‘“했습니다” 또는 “아닙니다” 할 때 말끝을 빨리 끝내는 북한 억양을 시종일관해 사용했다. 그가 사용한 용어들은 남한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북한 특유의 사투리였다. 그래도 김현희를 한국 안기부가 조작하고 훈련한 인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황장엽 망명의 진짜 이유는?
 
1997년 2월 북한을 탈출한 황장엽씨가 그해 4월 20일 에어필리핀사 보잉737 특별기를 타고 서울로 향하고 있다. 황장엽씨의 망명 요인 중에는 김용순과 김경희의 불륜 사실을 김일성에게 직보했던 것도 작용했다고 마이클 리는 주장했다.
  나이 차는 있었지만 황장엽과 김용순은 북한 권부에서 일종의 라이벌이었다. 학자풍의 황장엽은 김용순을 버릇없고 건방진 사람으로 취급했고 김용순은 황장엽을 거만하고 융통성 없는 늙은이로 생각했다. 김용순은 체질적으로 바람기가 있었으며 숱한 염문을 퍼뜨린 사람이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은 오랫동안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이혼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김용순은 김경희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지냈으며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장엽은 김일성에게 고하여 김용순을 질책하고 근신하게 했다.
 
  이 사건이 황장엽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김용순과 김경희는 황장엽에게 애를 먹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워낙 깔끔하고 빈틈이 없는 황장엽에게는 걸고 넘어질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자 황장엽은 자기를 신임하던 김일성이 없는 북한은 공허했고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과 북한의 비참한 현실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외감을 느낀 황장엽은 주체사상 창달과 전파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노력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주체사상 강연회에 가서 심혈을 기울인 강연과 토론에서 많은 교수와 학자와 학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위대한 주체사상 학자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이 사실을 파악한 김용순은 김경희와 합세하여 김정일에게 황장엽을 거세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주체사상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제창한 철학이며 통치이론이지 어째서 황장엽의 학설이 될 수 있는가. 황장엽은 일개 학자로서 우리 아버지의 철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위대한 수령을 모독했으며 그분의 명예를 가로챈 반역자다”라고 하면서 황장엽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말을 들은 김정일이 그를 숙청하기 위해 더 결정적인 약점을 노리고 있을 때 황장엽은 위기감을 느껴 남한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1997년 2월 12일에 그 결심을 결행하였다. 나는 황장엽 망명 후 미국 정부 파견단의 일원으로 그를 만나 조사할 수 있었다.
 
 
  테러 수출국 북한
 
  나는 세계 3차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고 본다. 테러와의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북한을 상대하는 대북 정책도 테러와의 전쟁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
 
  최근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은 북한이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에 연결되는 헤즈볼라의 땅굴 건설을 지원하였다고 보고했다. 이 내용은 미국 정부도 재(再)확인한 사실이다. 북한의 지하 땅굴 건설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란으로부터 접수한 우라늄 농축 시설을 비롯한 핵개발 주요 지하 시설을 건설하는 데 그 기술을 사용했다. 영국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에게 각종 미사일과 통신장비를 제공했으며 300km 사거리 M600 시리즈 로켓과 107mm 다연장 로켓발사대와 122mm 로켓발사대가 그에 포함된다고 증언했다. 지난 2014년 5월에 미국의 중동문제 전문가인 브루스 벡톨 교수는 이슬람 테러조직 간부들과 특공대원들이 1980년대부터 북한에 들어가 특수훈련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다시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혹자는 김정일이 2006년 10월 9일에 1차 핵실험을 한 이후에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는 없을 것이라고 그 당시에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절대로 방심할 수 없었다. 미국은 2006년 10월 20일 오후 2시29분 “북한은 중국의 압력에 못 이겨 더 이상의 핵실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그 발표문의 영어 표현은 ‘may be’ 즉 ‘아마’가 들어가 있었다. 북한은 2009년 5월 25일에 또 2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2001년 9월 11일에 미국을 공격한 알 카에다 자살특공대의 대원들이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의 하나인 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 작전부에서 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난 수십 년간 이라크, 팔레스타인, 이란, 레바논, 시리아에서 들어오는 국제테러 특공대원들을 훈련시켜 왔다고 한다. 이들 외국인 특공대원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작전부는 평양 삼석구에 15개, 그리고 평안남도 강동군에 15개 비밀초대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특별히 주목해야 할 일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북한은 중남미 지역에, 특히 멕시코,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쿠바, 니카라과, 우루과이, 파나마, 엘살바도르 등지에 교관들을 파송하여 게릴라 훈련을 시켜 왔고 코스타리카의 인민전위당에는 재정지원도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미국의 접경지역 국가들에는 북한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북한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고 있는 수천 명의 국제테러 특공대원들이 잠복해 있다. 미국이 한때 멕시코와의 국경에 담을 쌓으려고 한 것도 단순히 불법 입국을 막으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는가
 
  1994년 7월 25일 평양에서 열기로 예정됐던 남북 정상회담을 김정일과 군부는 반대했다. 그들은 남북통일은 오로지 전쟁이나 혁명적 방법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해 김일성은 북한의 어려운 경제를 살리기 위해 남한과의 경제교류를 역점으로 하는 협상전략을 짜고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가 평소에 인민들에게 약속한 대로 1995년에는 최소한 통일의 기틀을 다지는 해로 정하고 서울을 답방하여 ‘남조선 인민들이 위대한 김일성 동지를 환영하는’ 환상 속에 젖어 있었으며, 자기의 협상전략을 아들 김정일과 군부에 설득하고 남한 대통령 김영삼(金泳三)과의 대담을 성공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향산(묘향산) 휴양소에서 당과 국가 주요 간부들과 여러 날 동안 밤낮으로 토의하다가 과로에 지쳐 1994년 7월 8일 목욕탕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평양에 즉시 연락하여 헬리콥터 두 대로 의료진이 출동했으나 그때 마침 바람이 세게 불고 기상이 험악하여 향산 도착이 상당히 지연되었고 김일성은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남한에서 일부 전문가들이 그 당시의 상황을 분석하여 부자(父子) 간에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합의가 없이 김일성이 일방적으로 강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들이 기술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전혀 근거가 없는 소리다. 그때 휴양소에 같이 있었던 후처 김성애와 빈에 있던 딸 김경진과의 국제전화를 모 기관에서 포착했다. 평양과 유럽 각지와의 국제전화는 평양과 모스코 간의 통신위성으로 중계가 되고 모스코로부터 다른 나라까지는 유선으로 중계가 된다. 통화 내용을 분석하면 위에서 언급한 사실 외에 다른 의혹을 제기할 아무 단서가 없다.
 
 
  김일성의 후회
 
1995년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백두산 정상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이라며 북한이 공개한 사진. 생전에 김일성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한 것을 후회했고 김정일은 김일성을 도청했다고 한다.
  1974년 2월 당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이 당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고 김일성의 후계자로 당의 공식 인정을 받은 후에도 그는 항상 불안했으며 자기 앞에 ‘넘어야 할 큰 산’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늘 경계하며 살았다.
 
  그중에 세습반대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 간 고급간부들은 1975년 9월 정치국 후보위원 유장식, 1977년 10월 부주석 김동규, 1982년 1월 국가보위부 부장 김병하와 부총리 김경연, 1986년 2월 부총리 홍성룡, 1988년 12월 내각총리 이근모 등이며 아버지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과 특별한 보호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협적인 존재는 제일 먼저 이복동생인 김평일이었으며 그 다음은 남일과 오진우 등이었다.
 
  김정일은 공식 후계자가 되고부터 ‘당 중앙’이란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노동당의 전권을 장악했고 김일성은 외국의 국가원수나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정도의 업무에만 표면에 나타났다.
 
  이때 이후로 호위사령부가 개편되고 제1총국은 김일성 담당 호위업무를, 제2총국은 김정일 담당 호위업무를 취급했는데, 제2총국 대원들은 복장 급식 등 모든 대우가 제1총국 대원들보다 월등하게 좋았으며 밖에 나가서 제1총국 대원들은 제2총국 대원들에게 얻어맞고 다녔다 한다. 그 후로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할 때까지 김일성의 집무실이나 사저를 전화 도청했고 김일성의 동정을 일일이 파악하고 간섭했으며 그 도가 지나쳐서 한때는 김일성이 아들에게 권력세습을 하게 된 것을 후회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김정일의 私생활
 
  김정일을 용납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방종과 초호화판 사생활이었다. 인민은 굶어 죽어도 그와 그 가족은 39호실 비자금에서 돈을 물 쓰듯 사용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생활용품은 거의 다 외제 수입품이며 심지어 그들의 애완동물까지도 프랑스 샴푸를 썼다.
 
  그들이 먹는 식품과 일용품은 동남아시아의 열대 과일을 위시해서 지중해 연안의 오렌지, 수단의 수박, 스칸디나비아의 바닷가재와 연어, 이란의 캐비어, 독일 맥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의 샴페인과 포도주, 스페인의 거위알, 덴마크의 돼지고기, 오스트리아와 독일 지역의 소시지와 치즈, 독일과 미국의 의약품, 일본의 도자기와 의류, 프랑스 향수와 샴푸, 일제 또는 미제 컴퓨터, 시세이도 화장품, 아랍 국가들에서 사 오는 안마기계, 남부 아프리카에서 밀수하는 코뿔소의 서각(정력제로 사용), 에티오피아의 고양이 사향 등등이 포함되며 세계에서 진귀하고 값비싼 물건들을 사들이는데 이런 물자를 ‘1호물자’라고 해서 다엑심, 아미산 상사, 2월 은빛달 상사 등 여러 개의 전담 상사들이 있고 일본, 중국, 로마, 부다페스트, 브라티슬라바, 파리, 코펜하겐, 베를린, 마카오 등지에는 상주하는 지사가 있었고 지금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을 총지휘하는 사람은 김정일 직속 서기실의 박용무였는데 그는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김정일을 위한 물자 조달에 신명을 다 바치고 있었다. ‘1호물자’는 주로 컨테이너로 항공수송 하는데 물자가 많을 때는 김정일의 전용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해외에 나가 있는 북한의 재외공관은 1호물자 수송에 최우선순위로 협조해야 하며 베이징에 있는 고려민항총국은 1호물자를 모두 받아서 평양까지 보내는 데 목숨을 걸었다.
 
  김정일과 그의 측근들은 주로 코펜하겐과 로마에서 포르노 잡지와 남녀 성생활 보조기구나 자위기구들을 대량으로 사 갔는데 이탈리아에서는 한때 이 문제를 신문에 보도해서 말썽이 된 일도 있었다. 김정일의 기쁨조 향연에 사용되는 술과 음식의 재료가 다 이 1호물자이며 기쁨조 향연에 초대되는 간부들은 10여 명 정도인데 거의 다 김정일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지만 김정일 밑에서 설설 기는 것을 김정일은 대단히 즐겼다. 그가 옷을 다 벗으라면 옷을 벗어야 하고 기쁨조 젊은 아가씨들과 짝을 지어 어느 밀실에 보내면 초대된 손님들은 그것을 또 즐겼으며 아가씨들은 잠자리에 응하는 사람도 있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어 우스운 일이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난잡한 생활 외에도 김정일은 영화배우나 예술단의 반반한 젊은 여성들과 밀애를 하며 후한 생활보조를 해 주고 그들의 최대 소원은 해외여행인데 가끔 김정일의 전용기가 해외 취항을 하게 될 때 신원을 모르는 젊은 여자들이 탑승하지만 당에서도 모르고 항공사 측에서도 모르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지시’라고만 하면 지정된 행선지까지 말없이 그들을 태워다 주었다. 그러나 반드시 국가안전보위부 직원이 에스코트했다.
 
 
  장성택의 꿈과 오판
 
양손을 포승줄에 묶인 장성택이 국가안전보위부원들에게 잡힌 채 법정에 서 있다. 마이클 리는 장성택이 비자금 문제와 섣부른 경제개혁 시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처형당한 장성택의 죽음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스위스 은행에 예치돼 있는 39호실 비자금은 스위스 베른에 있는 북한대사 이철(본명 이수용)이 1987년부터 2010년까지 장장 23년간 관리해 왔다. 2008년 7월에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이양을 서두르고 있을 때 이철이 2010년에 평양에 돌아와서 스위스 은행의 39호실 비자금을 후계자 김정은에게 인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분산된 비자금관리의 방만성을 수습하는 데 상당한 마찰이 일어난 것이다.
 
  전에 노동당 작전부를 지휘한 오극렬 계열에서는 회수가 되었지만 중앙당의 장성택 계열이 장악한 부분은 완전 회수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자금관리의 전문성뿐만 아니라 김경희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서운 김정일 시대는 가고 철없는 김정은 통치가 출범하면서 ‘돈 냄새’를 더 맡고 싶어 하는 군부와 노동당 일부에서 장성택의 영향력과 비자금관리의 기득권을 시기 질투하면서 칼을 갈고 있었다.
 
  2002년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8박9일간 18명의 북한 경제시찰단이 남한을 다녀갔다. 그때 시찰단에는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박남기가 단장이었고 개혁 성향의 장성택과 화학공업상 박봉주가 끼어 있었다. 남한의 놀라운 경제발전상을 목격한 그들은 개방경제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으나 살기 위하여 몸을 사리고 있다가 김정일 시대가 가고 나이 어린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하자 서서히 자기들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장성택이 순진하게 자기의 영향력만 믿고, 수령경제의 비중을 내각 중심의 민생경제로 이전할 것을 염두에 두고, 박봉주를 내각총리에 앉히면서 가시적으로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위 ‘연식(軟式)개혁’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성택은 결정적으로 한 가지를 오판하였다. 북한에서는 수령절대주의와 그를 옹위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한 어떠한 형태의 경제개혁도 불가능하며 경제개혁 그 자체가 체제에 대한 도전인 것을 계산하지 못하였다. 경제개혁은 필연적으로 39호실과 38호실의 비자금으로 조성되는 수령경제를 잠식하기 때문이다. 내각 중심의 경제활동과 외화벌이는 더 활발해지고 39호실과 38호실의 외화벌이는 축소되어야 한다. 장성택이 더 현명하였다면 경제개혁 이전에 체제의 목을 치는 칼을 먼저 뽑았어야 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4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