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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안보 서평 공모전 수상작

“좌편향 교과서에서는 알 수 없던 사실에 눈떴다”

글 : 서은내  월간조선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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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注]
  ‘북한인권학생연대’와 청년지식인포럼 ‘Story K’가 지난 2011년 11월 ‘안보서평 공모전-한반도를 탐독하라’를 열었다. 2011년 4월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이번 행사에는 전국의 고등학생·대학생 지원자 300여 명이 참여했다. 학생들은 지정된 책 《지성과 반지성》, 《이승만과 그의 시대》, 《수용소의 노래》, 《잃어버린 딸들 오혜원 규원》, 《반대세의 비밀》을 읽고 응모했다. 심사에 참여한 최승노(崔勝老) 자유기업원 대외협력실장은 “책 내용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고, 나름의 생각을 심도 있게 풀어낸 학생들이 많았다”면서 “학생들이 북한 인권 문제의 심각성에 많이 동참하고 개선을 위해 생각을 모으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정 도서목록 중 하나였던 《지성과 반지성》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론이 분열된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소개했다. 《수용소의 노래》 서평으로 최우수상을 받은 강완섭(서강대 경제학과 2학년)씨는 “북한 수용소의 폐쇄성을 알게 돼 충격이 컸다”며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인데도 잘 몰랐던 북한의 실상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수상작 중 5편을 싣는다.
 


 대상
 
  한국 지식인에게 고함
 
  《잃어버린 딸들 오혜원 규원》 오길남 著, 세이지 刊
 
  최은지 (전남대 사학과 1년)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로버트 퍼시그의 말이다. 지독히도 종교화된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북한은 ‘국가’라기보다 한 무리의 ‘종교집단’으로 간주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북한의 카드섹션과 매스게임은 겉보기엔 정교하고 아름다우나 거기서 모종의 이질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개인은 배제된 전체적 움직임, 하나의 이념 아래 기계처럼 작용하는 모습에서 종교적 광신을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광신은 한 명의 활약으로 성립될 순 없다. 리처드 도킨슨의 책 제목처럼 신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을 만드는 자가 있어야 한다. 현 북한의 망상적 이데올로기를 발명해 낸 이들은 다수의 지식인이었다. 단순히 사회주의란 이념에 대한 순수성에서 혹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이익에 의해 추악한 범죄의 공모자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간극에서 이념에 대한 논의가 한창일 시절에 지식인들이 겪었던 몽매한 관념의 허상을 대변한다. 저자 오길남씨는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지식인이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반대했던 과거로 인해 남한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고 판단했고, 윤이상 등 북한 동조 세력과 접촉했다. 그는 북의 사상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보낸 사회주의 저서를 읽으며 북한이야말로 유토피아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월북을 감행한다. 아내 신숙자 여사는 마치 운명을 직감한 듯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망상에 가까운 이상 때문에 언젠가는 스스로를 파탄의 구렁텅이에 매몰시키고 말 거예요!”
 
  많은 지식인은 사회주의의 이념에 매료됐었다. 많은 청년이 사회주의의 이념 아래 월북을 감행했다. 어떤 이는 사회주의라는 이상을 실현해 보고자, 저 동토의 땅에서 꿈을 펼쳐보고자 월북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르크스 경제학을 현실에 도입시킬 꿈에 부풀었던 오길남 박사처럼. 하지만 실상은 어땠는가? 북한은 평등을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수령체제라는 망상의 결집물일 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글로만 사고하는 지식인들의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위대한 그리스의 문호 카잔차키스도 펜과 잉크를 통해서만 배우려는 지식인의 한계를 절감하고 행동하는 것과 자신의 두 눈으로 보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흥미롭게도 그 역시 파시즘의 거두인 무솔리니를 옹호했다가 나중에 철회한다. 이처럼 어떤 사실적인 근거 없이, 문자라는 것의 절대성을 지나치게 맹신한 나머지 몽매함에 빠져버리는 근현대 지식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구호물자가 북한 인민이 아닌, 김정일 정권의 체제 유지에 쓰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대북지원 중단에 대해 인도적 주장을 하는 예가 그것이다.
 
  요즘 나를 비롯한 대학생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도 많고 각종 연대를 만들어 현실적 참여도 많이 한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적 의견의 토대가 어떤 근본 위에 무장되어 있는가는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우리가 이해하는 ‘북한’의 이미지가 어디서 온 것인지 정치적, 사회적 세력의 이익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은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한다. 한반도의 비정상적인 체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기타 세력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든 자기기만적 의견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일 또한 북한 체제를 유지시키는 일임과 동시에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
 
  오길남 박사 역시 ‘북의 경제를 들여다보지 않고 관념의 유희만 일삼는’ 태도에 대해 절망을 통감한다. 우리 역시 블로그와 같이 출처가 분명치 않은 글에서 읽은 단편적 지식 및 김정일 정권의 존속이 자신의 정치적 이해득실과 함께하는 집단이 만들어낸 관념적 무기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휴전선 너머에서 어떤 비인간적 행위가 자행되고 있는지, 우리가 근대적 광기의 유산이라고만 생각하는 아우슈비츠가 어떤 방식으로 연장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북한을 탈출하고자 했던 탈북자들의 증언에 귀기울여야 하며,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염려하여 동포들의 고통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
 
  이 책은 아내와 딸을 죽음의 신에게 내몬 한 남자의 비망록이었다. 문장 구절마다 가장으로서 가장 못난 짓을 한 자신에 대한 질책과 자기혐오가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문장 하나를 쓸 때마다 채찍으로 자기의 몸뚱이를 내려치듯 갈기갈기 할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말 못난 아버지였지만 나는 차마 그를 질타할 수가 없다. 이미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형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형벌은 그의 아내와 두 딸이 해방되는 날까지, 아니 어쩌면 우리의 동포들이 김정일 정권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날까지 풀려날 수 없는 시시포스의 굴레일 것이다.
 
  핵을 보유하고 미국에 대항하는 북한을 보며 누군가는 주체적이며 민족적이라고 옹호하기도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근본 없는 신념과 사실을 반영하지 못한 관념적 허상이 이런 것이다. 세습왕조의 존속을 위해 인민을 부속품쯤으로 치부하는 김정일의 행보가 민족적이라는 말보다 자가당착적인 것이 있을까? 단순히 반미라는 명분에 의해 한반도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행위를 합리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등학교 때, 탈북자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우리는 단순한 궁금증 때문에 그 친구에게 나머지 친척들은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봤다. 그 탈북자 친구는 고개를 숙인 채 가로저으며 모르겠다고만 했다. 김정일의 사진을 걸레로 닦았다는 이유로, 김일성의 석고상을 깼다는 이유만으로 처참하게 처형당하는 사회에서 탈북이란 얼마나 큰 금기일 텐가. 그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잔인한 질문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애의 눈에서 깊은 어둠을 보았다. 압록강 너머 어둠의 장막으로 가려진 동토.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지옥 같은 추위보다 더 인내하기 힘든 인권유린의 땅. 얼마나 많은 신숙자씨와 혜원, 규원이 그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까. 북한에 사는 사람들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김정일 수령님을 옹호하는 기계도 아니고 남한과 미국을 까부셔야 한다는 호전적 사상으로 무장된 괴물도 아니다. 북의 우민화 정책에 의해 세뇌당하고 있을 뿐 우리와 똑같이 사상과 신체의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이다. 나는 그것을 탈북자 친구를 보며 절실히 느꼈다. 우리와 똑같이 성적에 고민이 많고 외모에 신경 쓰며 맛있는 저녁식사로 오늘의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우리는 사회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대학생이자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자유를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하며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 나는 그 의무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우리 민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각성하고, 북한 정권의 마수에서 동포들의 인권을 지켜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진정한 ‘행동하는 양심’이 아닐까? 피히테가 최악의 역사적 현실에서도 서슴지 않고 양심의 소리를 냈듯이 나도 대한민국 국민에게 고해본다. 불행한 상태에 익숙해져 있는 그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라고.
 


 최우수상
 
  북한주민의 안녕(安寧)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수용소의 노래》 강철환 著, 시대정신 刊
 
  강완섭 (서강대 경제학과 2년)
  안보서평공모전을 맞이해 도서관에서 관련도서를 한 번씩 훑어보던 중에 《수용소의 노래》가 유독 관심을 끌었다. 영어판 《평양의 어항》으로 《LA타임지》가 선정한 2002년 “올해의 책 베스트 100”에 선정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 사진과 요덕수용소 사진도 실려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후 눈을 떼지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 만에 다 읽어버렸다.
 
  그날부터 시작된 무겁고 슬픈 감정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사실 앞에 전율했다. 이렇게 고통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너무 무섭기도 하고 놀라워 얼른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보위원에 대한 증오심과 분노가 북한 체제에 대한 감정으로 들불처럼 옮아 붙었다. 최소한의 인권조차 없는 그곳에서 인간다움이 말살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깊은 슬픔을 느꼈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폭풍 속에서, 한편으로는 내가 그동안 북한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다는 것을 자각했고, 반성하게 되었다. 이제껏 북한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하나의 추상에 불과했었다. 수용소라는 끔찍한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이제야 처음 알게 되었다. 비로소 북한에 사는 인민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들이 생생하게 겪은 고통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강철환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난다. 가족은 모두 요덕수용소로 끌려가고 어머니와는 강제이별을 당한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그들은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수용소에서 보낸다. 수없이 많은 괴로운 나날을 어떻게 참고 견뎌냈을까. 너무나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학교에서 교원들은 학생들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욕설과 모욕을 밥 먹듯이 하고,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코피가 사방으로 튀고, 손바닥을 다 벗겨지게 하고 얼굴을 발로 차고 정말 증오심에 떨게 만든다. 그렇게 학대를 하고서도 모자라서 죽을 만큼 고된 노동을 시킨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하다. 몽둥이로 들들 볶아대어 결국 사고가 나 사람이 죽어도 끝내 부모에게는 보여주지도 않는다. 여기서는 육체와 정신적 고통을 넘어 인간 존재로서의 정신이 아예 말살돼 간다.
 
   수용소에서의 학창시절은 너무나 비참했다. 한없이 순수하고 따뜻한 시절이어야 할 소중한 어린 시절은 완전히 파괴됐다. 누가 무슨 권리로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할 수 있으며, 이 잃어버린 삶은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졸업식에서 나는 무자비하게 파괴된 삶을 새삼 느껴서 정말 마음이 아팠다. 나이 17세에 키는 150센티미터가 안되었고 몸무게도 40킬로그램 안팎이었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도록 처절하다. 옷이 없어서 모포조각으로라도 어떻게든 몸에 걸친다. 얼마나 옷이 없었으면 시체에 달려들어 옷을 서로 벗겨야 했는가. 여기서 죽으면 개만도 못한 죽음이기에 어떻게든 살아야만 했다. 고기는 꿈도 꿀 수 없으며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기 위해 쥐, 개구리며, 뱀까지 무엇이든 잡아먹었다고 한다.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걸어간 사람들이 그저 존경스럽기만 하다. 주인공 가족은 삶에 대한 의지와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모두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올 수 있었다.
 
  “민족 반역자 리춘원을 향하여 쏴!”라는 말과 함께 총성이 3번 울리고 보위원이 권총으로 생사여부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공포에 질려 말없이 걷는 모습에 그들 각자가 앞으로 얼마나 큰 슬픔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면 한 가닥 남아 있는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따뜻한 마음과 영혼마저도 철저하게 파괴된다. 교수형으로 죽은 사람에게 강제로 돌을 던지라고 하는 소장이나 살기 위해서 돌을 던져야 했던 사람들로부터 인간다움의 상실의 끝을 보았다.
 
  199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둘로 쪼개져 대치하고 있던 독일은 통일을 맞이하였고, 한때 공산국가의 맹주로서 세계역사를 주도했던 소련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철옹성 같던 독재자의 권력도 민주화의 혁명과 같은 불길 속에서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북한’은 다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차단돼 있는 국가이다. 이런 유례없는 3대세습의 왕조국가체제의 핵심은 세뇌교육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은 이미 우상화를 넘어 신격화가 됐다. 김일성이 태어난 4월 15일을 태양절이라고 정하고 신으로 모시게 만들어 놓았다. 자아비판과 호상비판을 하고 모든 활동이 김일성, 김정일의 위대한 업적에서 이루어진다고 교육받는다. 세뇌교육의 결과로 비판적 사고를 잃어버렸다. 이는 북한의 체제가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또한 반세기 동안 누적되어 온 남과 북의 가장 극심한 정신의 차이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 글은 단지 안타깝고 한없이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의 한 맺힌 죽음과 비참한 삶 속에서 진정성을 담은 울부짖음이다. 그곳의 충격적인 참상을 알게 된 것은 마음속의 거울을 깬 것과 같았다. 그럼으로써 내 태도도 변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저 지나쳤을 <김정일리아>라는 영화도 봤다. 책의 저자 강철환의 인터뷰도 봤고 그 외 다른 탈북자의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막상 탈북자들을 눈앞에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들의 말을 돌이켜보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용소에 갇혀 있는 수십만 명의 사람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나가야 할 20대와 자라나는 10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내가 서 있는 대한민국에 대해서, 그리고 북한의 현실에 대해서 진심으로 가슴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북한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의 힘으로 분명히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 변화는 반드시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나가야 한다. “한민족인 우리가 아니면 어느 누가 그들의 아픔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이것은 21세기의 현 시점을 살아가는 우리의 역사적 사명이다. 가깝지만 가장 먼 나라, 가볼 수 없는 곳. 같은 민족임에도 총을 겨누어야 했던, 이산가족이 되어 영영 살아생전 만날 수 없는 비극의 땅. 하지만 나에게는 희망이 있다. 언젠가는 이 비극을 청산하리라는 것을. 다시는 굶주림이나 학대 속에 죽는 사람이 없기를. 북한주민들의 안녕과 평안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최우수상
 
  이승만은 외롭다
 
  《이승만과 그의 시대》 이주영 著, 기파랑 刊
 
  김나영 (이화여대 경영학과 3년)
  바야흐로 스타일 정치의 시대다. 트위터를 통해 파격을 연출하는 정치인이 주목받는가 하면 비속어와 은어가 넘쳐나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광대’에 가까운 포지션을 가진 사람도 화제가 된다. 시민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지도자의 국정철학, 전문성과 같은 주제들이 아니라 ‘어떻게 내게 어필할 수 있느냐’다. 말 그대로 연예인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듯, 철학과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정치가를 선택하는 시대다. 그러나 매체를 통해 단발적으로 즐겁게 감상하면 그만인 연예인과 달리, 위정자는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이승만과 그의 시대》는 ‘스타일리시한 정치’와는 정반대인, 우직한 지도자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다룬다.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고, 자신의 지분보다는 민주공화정의 대의를 위해 일생을 바친 정치인의 삶을 써 내려간다. 다만 그가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는 혼란의 시대를 살았다는 점이다. 국민에게 공감을 구하고 감성적인 지지를 얻는 것보다, 국가의 정체를 안정시키는 것이 시급했던 시절이었다. 소통 코드를 만들고, 여러 일화를 창출하기도 전에 6·25가 벌어졌고, 관료들의 실정과 혼전 끝에 하야해야만 했다.
 
  그 탓일까, 우리의 기억 속에 이승만의 기록은 상실돼 있다. 미국의 링컨, 워싱턴 대통령은 기억하면서, 정작 우리나라 건국 대통령이 어떤 희생과 고난을 감수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이승만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국가의 기초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에 휩싸여 있다. 심지어는 ‘자유민주주의’가 과연 헌법 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단어인지에 대한 의문까지 일고 있다. 건국의 최대 공헌자가 수호하려 했던 가치는 잊히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혁신적인 리더’(Innovative Leader)로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단순히 정부를 재편했던 정치가 또는 전략적 외교의 한 축에 서 있던 전문가이기 전에, 혁신적 사상과 믿음을 가슴에 품었던 리더였다. 냉전체제로 돌입하기 직전의 1940년대를 살았던 이승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감각이었다. 집단사고(Groupthink)에 빠진 독일과 일본을 곧바로 대체할 것으로 보이는 차세대 강대국들의 첨예한 대립을 미리 내다본 안목인 셈이다. 약관의 나이에 양심적인 민주 공화정치의 실현을 외치며 강력한 행동으로 데뷔했던 ‘베테랑 정치가’가 주목한 것은, 노련한 대미 외교를 통한 실리 추구만이 아니었다. 당당한 독립 정체로서 연합군의 대열에 참가하여 장차 동북아의 새로운 판도를 짜는 데 기여하는, 혁신적인 접근법을 고민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의 전반생은 명분과 절대선에 집착하는 역사관(歷史觀)으로는 좀체 긍정적으로만 보기 어려운 면이 많다. 이론과 달리 필드의 전략은, 그럴듯한 철학이나 의도보다는 상황 기반적인 대응이 더 중요한 탓에 ‘실천’을 강조했다. 정치가와 선비의 개념을 동일시하는 전통적인 시각으로는 이승만의 삶을 해석하기에 무리가 따른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공존하는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그럴듯한 ‘비전’보다, 갓 태어난 대한민국의 생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그는, 직선적인 윤리학의 잣대로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외교무대와 경제 통상의 필드에서 견지하려 하는 ‘용’(用)의 가치, 실현 가능성과 구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승만은 지극히 현실에 충실한 혁신가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삼백(三白)산업을 진흥시켰던 경제 감각과, 일본 관료 경력을 가진 전문가들의 적절한 활용은, 획일적인 관점을 가졌던 독립운동가들과 차별화되는 행동이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이승만 정권의 가장 큰 공적이 ‘우수한 인적 자원을 남긴 것’이라고 얘기한다. 명분보다 실리에 무게를 둔 행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대목이다. 비록 일제시대에 입신(立身)의 초창기를 보냈다는 비판을 받지만, 신현확 전 총리나 김정열 전 총리와 같은 이들은 이승만에 의해 그 가능성을 주목받고, 국가발전에 공헌한 인재들이었다.
 
  물론 이승만 정부가 남겼던 과오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의 절대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많은 제도적 모순과 탈법이 미결 과제로 남았던 시대다. ‘약속’을 지키는 지도자가 되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개헌 시도와 공권력 개입의 전력은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건국·중흥 지도자들이 갖고 있었던 모순적 요소들에 비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비교적 성숙한 방식으로 정치 무대에서 물러났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워싱턴, 드골, 비스마르크와 같은 정치가들의 기록에서도 권력 연장의 욕구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는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불편한 진실’로 해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쩌면 이제 편히 쉬셔야 할 건국 대통령께서 아직도 논란의 소용돌이에서 나오지 못하고 계신 가장 큰 이유는, 후세가 그의 삶을 입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각에선 그의 인생을 ‘민주 공화주의자의 사명으로 가득 찬 삶’이라고 획일화했다. 다른 이들은 ‘친미주의자’ 또는 ‘조정의 명수’로 비판해 왔다. 그러나 제한적인 초기 대한민국의 사회적 조건과 혁신형 리더십의 관점에서 보면, 이승만은 많은 업적과 함께 한계 또한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리더였다. 지도자와 경영자가 ‘대리인’(Agent)이라는 지적도 있듯, 유한한 시기를 사는 이에게 너무 많은 성과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승만과 그의 시대》라는 저작이 너무나도 소중하지만, 아직까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던지는 메시지는 약하다고 느껴지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지도자의 삶을 평면적으로 기술하기보다는, 외롭고도 치열했던 혁신가의 전반생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역설(逆說)에 주목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건국 대통령의 공과 과를 ‘기록’으로 논증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존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고민할 때다. 설익은 담론이 정책으로 부풀어오르고, 국가의 향배를 결정짓는 이 시대에, 굳건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지도자상이 절실하다. 스스로를 향해 끊임없이 성찰과 번민을 반복했던 노 정치가의 경륜과 과정에도 고민이 필요하다. 이제껏 ‘이승만의 재조명’을 외치는 거대담론은 보았으되 ‘우남 리더십’이나 ‘우남 정치 경제학’과 같은 시대적 의미를 밝히는 노력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 또한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이성보다는 감성과 욕구에 충실한 이 시대에, 이승만 대통령은 아직껏 외로운 존재로 남아 있다. 지도자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비전 하나만으로 희생의 길을 걸어가기도 하고, 과감하게 후세에 그 업적을 이전하기도 한다.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비판과 해체의 과정을 거듭하기 전에, 전대(前代)의 유산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곱씹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 다시 혁신가 이승만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비전을 수립해야 할 때다.
 


 우수상
 
  희망버스와 나꼼수 열풍,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반대세의 비밀》 현대사상연구회 著, 인영사 刊
 
  김주현 (이화여대 중어중문과 4년)
  김진숙과 희망버스 시민들이 일궈낸 희망 -《경향신문》, 2011.11.11
 
  부산 시민단체 100여 명 상경 “곧 부산국제영화제인데… 희망버스 막아달라” -《조선일보》, 2011.10.01
 
  진보여, <나꼼수> 흥행에서 배워라 -오마이뉴스, 2011.09.03
 
  ‘나꼼수’ 열풍… 비결은 사실·허구 넘나드는 음모론 -《중앙일보》, 2011.11.14
 
  위 문구들은 2011년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희망버스’와 ‘나꼼수(나는 꼼수다)’에 대한 각 언론사의 관련기사 헤드라인이다. 각 언론사마다 같은 사건과 현상을 두고 보는 시각이 상이하다. 《경향신문》에서는 희망버스를 시민들이 일구어낸 희망으로 표현하여 시민사회에 끼치는 긍정적 영향에 대해 기술한 것과 달리 《조선일보》는 희망버스에 의해 부산시민이 입는 피해와 불편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자. 최근 표현의 자유와 진위여부를 두고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된 나꼼수의 성공요인과 나꼼수의 긍정적 측면이 부각된다. 반면 《중앙일보》는 나꼼수가 ‘~카더라’로 대표되는 억측과 허구로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다고 주장한다.
 
  언론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독자로서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단지 주류언론과 비주류언론, 진보 성향을 가진 신문사와 보수 성향을 가진 신문사의 입장 차이로 보아야 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대한민국에서 늘 있어 온 사상 논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2008년 촛불시위와 광우병 사태에 관해 정보를 얻고 가치 판단을 하는 것만큼이나 희망버스 사태와 나꼼수 열풍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사상 논쟁을 이해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다른 서구국가의 상황과는 달리 대한민국에는 ‘북한’이라는 특수한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발생하는 각종 정치·사회 문제들을 단순히 서구에서 구분하고 있는 우파와 좌파진영 간의 분쟁, 보수와 진보의 갈등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복잡한 사상적·이념적 틀을 무시한 처사다. 국민들은 각종 언론보도와 교과서 등을 통해 심심치 않게 사상용어를 들어왔음에도 그것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는 의무교육에 해당하는 초등교육, 중등교육의 단계에서부터 사상교육이 명확하게 이뤄지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다. 초·중·고등학교 교육에는 사상교육으로 따로 배정된 교과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은 부분적으로 사상과 관련된 용어 및 지식을 습득하는 데 그친다. 따라서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안적인 사상교육이 필요하다.
 
  현대사상연구회의 《반대세의 비밀, 그 일그러진 초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먼저,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 관련 용어와 개념, 대한민국에서 사상과 이념이 발전해 온 양상을 국민들에게 친숙한 예시를 이용해 설명함으로써 기본적 사상교육이 부재한 점을 보완해 준다. 예를 들어, 본 책에서는 2008년 촛불시위와 광우병 사태를 통해 대한민국에서 사상이 사회현상과 어떻게 관련돼 사용되며, 국민들의 알권리를 왜곡할 수 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두 번째로 국민들이 잘못 사용하고 있는 사상에 관한 개념과 관념을 명확히 한다. 한국 현실에 적합한 사상적 구분을 위해, 기존에 사용됐던 용어와 개념을 대체할 수 있는 ‘대세(대한민국세력)와 반대세(反 대한민국세력)’의 구도를 제안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하는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는지에 따라 나뉘는 대세와 반대세의 구분은 기존에 우리가 좌와 우로 구분하는 과정에서 오인할 수 있는 개념들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다. 《반대세의 비밀, 그 일그러진 초상》의 탐독은 청소년과 일반국민을 위해 대안적 사상교육으로 기능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희망버스와 나꼼수 열풍은 대한민국의 사상적 문제가 뒤섞이고 반대세 세력의 언어적 전략이 사용된 대표적 예시다. 먼저, ‘희망버스’란 용어 자체에서 언어적 전술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보수로 분류되는 주류 언론매체 기사에서조차 ‘희망버스’라는 긍정적 어휘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모순돼 보인다. 희망버스를 통해 권리나 이득을 쟁취하려는 측에서는 농성과정에서 시위대를 태운 버스가 희망의 상징으로서 ‘희망버스’로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연이은 농성으로 불편을 겪는 부산시민과 상인들에게는 ‘절망버스’로 불리는 것이 마땅함에도 언론매체에서는 버젓이 희망버스라는 긍정적이고 이미 가치판단이 들어간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희망이라는 밝은 색채가 덧씌워진 ‘희망버스’라는 용어가 이를 주장하는 좌파세력에서 사용되고 주장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가치중립적이어야 할 언론매체에서 좌파적 시각이 반영된 용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언어전술에 대한민국이 쉽게 노출돼 있으며 언어전술이 일상화돼 있음을 보여준다. 매체를 통한 전술도 있다. 희망버스 사태가 급격히 퍼진 양상은 SNS(Social Network Service)라는 대안매체에 의해 가능했다. 책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광우병 사태와 촛불시위 집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이라는 신매체를 통해서였다. 검열과 제한 없이 Fact와 허구가 뒤섞인 인터넷 공간은 반대세 세력의 영향을 받기가 훨씬 쉽다. 희망버스 연대에 참여한 세력이 모두 반대세 세력이라고 잘라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판 없이 SNS에 퍼지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최근 정치권에서조차 핫이슈로 떠오른 ‘나꼼수’ 역시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나꼼수는 팟캐스팅 방식을 통해 개인이 만든 파일을 RSS주소를 사용해 공개 및 배포하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통해 듣게 된다. 주류언론매체가 다루지 못하는 주제와 수위 높은 비판을 담은 콘텐츠 유포가 용이해졌다. 이를 통해 기존 언론의 한계를 보완해 주는 기능도 한다. 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억측과 개인 명예훼손, 나아가 정부정책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나꼼수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긍정성을 인정하는 것을 방해한다.
 
  사회 현안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사회현안의 배경을 이루는 그 이면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며, 그 이전에 대세와 반대세의 구분이 선행돼야 한다. 대세와 반대세 구도의 구분 없이 모호하고 혼동되는 이념에 의한 구분은 제대로 된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태양을 가리는 구름무리’로 작용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의무교육 과정에서의 자연스러운 사상교육이지만, 《반대세의 비밀, 그 일그러진 초상》의 탐독을 통한 대안적인 사상교육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으며, 국민의 사상과 이념 구분에 있어 순기능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장려상
 
  자기를 혁명하는 知性人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지성과 반지성》 류근일 著, 기파랑 刊
 
  김하연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4년)
  1. 정치적인 것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기
 
  나는 중국문화학과로, 경제학과 법학을 복수전공했다. 노자와 장자, 공자와 맹자, 지젝과 소쉬르, 라캉과 프로이트를, 프리드먼과 케인스, 맨큐와 크루그먼을 읽었다.
 
  그동안 정치학의 관점에서 쓰인 현실참여적인 글들은 단 한 편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정치적인 것에 무관심했다. 그간 배운 지식에 따르면, 세상은 내가 굳이 아등바등 끼어들지 않아도 어떻게든 돌아가게 돼 있었다. 내가 보기에 칼럼이나 사설, 그리고 각종 정치색을 지닌 글들은 그저 자기 이익이나 권력을 위해 다른 성향의 사람들을 매도하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참여할 만한 유인이 없었다.
 
  그러나 류근일과 홍진표의 대담을 통해 생각을 바꿨다. 이들은 내가 정치적인 것이라 생각해 왔던 비논리적인 상대방 깎아내리기, 사상적 기반이 부재된 권력다툼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내 편견을 바로잡아 줬기 때문이다.
 
  2. 正 : 정치적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지성과 반지성》은 색깔을 논하기 전 한국에서 좌파와 우파, 그리고 중도가 어떻게 발생했으며 광복, 6·25, 군사정권과 민주화를 거치면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알려준다. 결국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색’을 논의한다거나 다른 사상을 지닌 사람의 이념을 비방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어불성설인 셈이다. 나는 한국의 우파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알게 됐고, 이승만의 업적을 인정하는 데 있어 류근일과 홍진표 사이의 간극을 보면서 우파 내의 견해 차이를 접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누구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들이다.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이해하고 체득하기 위해선 다양한 견해를 접하는 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견해만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도그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류근일과 홍진표가 좌우 대립에 있어서 가장 경계했던 점이 이런 도그마였다.
 
  또한 이들을 통해 나는 정치적인 패러다임으로 친북 문제를 바라볼 수 있었다. 친북 성향을 갖는 것과 북한 인권을 옹호하는 것은 다른 문제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정치적인 친북과 북한 주민에 대한 지원이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해 왔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시절의 북한 정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공감해 왔다. 그러나 실은 전 정부가 북한, 그리고 김정일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정치적으로 친북정책을 펼쳤음을 알게 됐다.
 
  3. 反 : 다른 패러다임에 대한 불편함
 
  그렇다고 이들의 좌담을 마냥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우선 지나치게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현상을 논하고자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구조가 인간을 만들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좌, 우, 그리고 중도를 통해서만 사람들의 행동을 분류하려 했다. 심지어 이들은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견해를 북한 및 미국에 대한 태도에 준해 범주화하기까지 했다. 이들의 견해가 모두 그르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인문학도로서, 경제학도로서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해 왔던 내겐 이런 범주화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젊은 세대’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지 못했다. 촛불시위가 모든 정치 세력의 총집합이라는 견해나 정치적으로 무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북적 성향을 지녔다는 비판에는 다소 반발감이 들었다. 평소에는 정치에 무관심하다가 카니발적으로 집회에 끼어드는 젊은이들의 행동이 불안한 미래에의 불만을 표출한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았다. 보수든 진보든 젊은 세대의 관심과 지지를 사기 위해서는 이들 세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4. 合: 자기의 견해에 책임지기
 
  류근일과 홍진표는 좌파와 우파 자체보다는 이득을 취하기 위해 얄팍하게 구는 이들의 태도를 비판한다. 이들에 따르면 얍삽한 웰빙족 우파와 자기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좌파, 권력을 좇으며 부화뇌동하는 지식인들은 오히려 한국의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대담은 2005년에 이루어졌지만, 이들이 비판한 상황은 애석하게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의 FTA 문제만 해도 당파적 이익에 따라 노무현 정부 때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진보는 극단적으로 FTA를 반대하고, 무조건적으로 반대했던 보수는 FTA의 필요성을 열성적으로 주장한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8년간 징역을 산 류근일과 NL에서 전향한 홍진표는 과거의 잘못된 자기견해를 기꺼이 인정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들은 상황의 변화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견해와 자신들이 살아왔던 삶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개개의 사상과 견해에 담긴 진실성이야말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 중요한 것이란 걸 깨달았다. 예전엔 권력의 폭력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 두려운 시대였다면 오히려 지금은 행동 그 자체가 두려운 시대인지도 모른다. 숙고와 진실성이 결여된 반지성(反知性)적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정치에 대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5. 지성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성인으로서의 삶. 참 어려운 얘기다. 프리터나 88만원 세대를 운운하며 우리 세대 나름의 어려움을 토로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 세대와 다른 것은 훨씬 큰 불확실성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류근일, 홍진표 시대의 젊은이들이 권력의 억압에 분노를 느끼고 저항했다면, 우리 세대의 경우는 무한히 주어진 자유와 급변하는 상황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저항하는 상황이다. 세상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기 이전에 자기가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도 알기 어렵고, 자기견해를 내세우며 도그마에 빠지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사람이 좇는 걸 함께 좇는 게 덜 불안하다. 이런 상황에서 전 세대의 지성인들이 가졌던 ‘신념’과 ‘책임’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성인(知性人)으로서 살아갈 것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류근일이 제시한 자기수양에서 찾으려 한다. 그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과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게 동시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람들일수록 자기수양을 해야 한다고 했다. 영성혁명이야말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진정한 인간해방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혁명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아는 것이며, 그를 통해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지성인이란 자기를 혁명한 사람이다. 특정 정치견해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자기 생각을 확고히 하고, 이에 책임을 지는 진정한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 불확실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젊은 세대들의 자기혁명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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