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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한민국 軍이 위태롭다

글 : 김희상  육군중장(예)·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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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熙相
⊙ 66세.
⊙ 육군사관학교 졸업.
⊙ 육군본부 제1군 부사령관, 국방大 총장, 대통령비서실 국방보좌관, 비상기획위원회 위원장,
    現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
지난 6월 25일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9주기 추모식.
  필자는 1995년 3월 《월간조선》에 군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신뢰, 사랑을 호소하는, ‘국군의 모태(母胎)는 국민-사랑만이 강군(强軍)을 만든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여러 곳에서 받은 격려의 편지도 뜻밖에 적지 않았었다. 이 글은 말하자면 그 후속편인 셈이다. 최근 우리 군에 이런저런 사건 사고들이 이어지면서 1995년에 이어 또다시 어느 외신에서 ‘정예 한국군이 흔들린다’고 화제로 삼았을 정도이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 오늘 우리 국군은 건강한가 ■
 
  지금이 어떤 때인가. 흔히 ‘앞으로 5~10년이 향후 100년 대한민국의 미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하는 그런 때다. 잘만 하면 자유 통일 번영의 새 시대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의 시대이지만, 그 기회를 잡아채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더할 수 없는 도전의 시대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국가안보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우리 국군이다. 한미동맹이 아무리 튼튼해도 우리 국군이 바로 서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일찍이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가 ‘물질력이 목제의 칼집이라면 정신력이 날카로운 칼날’이라고 했듯이 군 전투력의 핵심은 무기나 장비가 아니라 군인정신(軍人精神)에 있다.
 
  하기야 만에 하나 우리 군에 대한민국 군인으로서의 올바른 정신이 들어 있지 않다면 누구를 위한 군대인지도 모를 터인데 설사 아무리 수(數)가 많고 좋은 무기를 갖추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끊임없이 계속되는 사건 사고 속에서 우리 군의 군인정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60만 대군인데 크고 작은 사고들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과거에도 이런저런 아름답지 못한 사건 사고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 나타나고 있는 일들은 건강한 군대라면 근본적으로 있기 어려운, 너무 아프고 좋지 않은 사건들이다. 그것도 복합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당장 젊은 장병들이 걸핏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더니만, 마침내 생사를 같이하던 전우의 가슴을 조준 살해하는 참혹한 일까지 있었다. 전우애(戰友愛) 대신 이런 증오(憎惡)가 가득하다면 부대의 응집력(凝集力)은 진작 와해되고 없을 것이 아닌가.
 
  상하 간의 위계질서가 흔들리고 엄정한 군기(軍紀)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도 진작부터 높았다. 최근 전역한 어느 최고위 장성은 ‘그래서 군에 인기에 영합하는 변칙적 리더십이 만연(蔓延)해 있다’고 실토했다. 괜히 힘들여 군기를 바로 세우려다가 사고나 나서 말썽을 일으키기보다는 그렇게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인기도 얻고 신상에 이롭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
 
 
  비겁한 평화란 없다
 
지난 8월 1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집회가 열렸다.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비겁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어리석은 주장이 인터넷 가득 흘러 다니고 ‘전쟁이 나면 죽는다’는 비겁한 공포가 전선의 젊은 장병들을 휩쓸었다고 한다. 비겁한 평화? 그런 평화란 없다. 회피하고 도망하면 뒤따라와 뒷덜미를 물어뜯는 것이 전쟁이요, 전쟁을 각오하고라도 단호히 맞서야 지켜지는 것이 평화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의 이런 ‘어리석음’과 ‘공포’가 북한으로 하여금 함부로 도발하게 하고, 또 그런 턱없는 도발들을 성공시켜 온 셈이다.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 평화’를 찾는 어리석음도 문제지만, 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죽음의 공포에 떠는 병사라면 그 ‘전투의지(戰鬪意志)’인들 어떻게 강하겠는가.
 
  군에서 친북활동으로 적발되는 사건이 빈발(頻發)하고 있음은 경악(驚愕)할 일이다. 몇 년 전에는 입대 장병의 80%가 ‘주적(主敵)은 미국’이라고 알고 있고, 심지어 육군사관학교 신입생들도 북한(33%)이라고 하는 수보다도 더 많은 무려 34%가 “미국이 주적”이라고 대답해 충격을 주었었다. 그런데 정부가 바뀐 지금도 여전히 그에 못지않은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총련 대의원 출신의 모 사관학교 교관이 친북활동을 하다가 적발되었고, 어떤 여군 장교들은 좌익(左翼)시위에까지 참가하는가 하면 김정일을 추종하는 사이버 민족방위사령부에는 무려 70여명에 달하는 장병이 가입해 있었다 한다. 아예 ‘병사들을 의식화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입대한 골수 좌익운동권 출신의 육·해·공군 젊은 간부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도 있다.
 
  젊은 장병들이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좌파이념에 물들어 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도대체 이들이 어떻게 장교가 되고 특히 사관학교 교관으로 임용될 수 있었는지 그것이 더 큰 문제다. 북한 간접침략을 거르는 군(軍)의 정화(淨化)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래서야 ‘여수·순천 반란사건’까지 겪은 국민이 어떻게 군대만 믿고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가 하면 수시로 부정 비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전역한 군의 고위 간부들, 심지어 군의 최고 수뇌에 올랐던 사람들까지도 군사기밀을 팔아 치부를 했다고 하는 상상하기 어려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보도도 있었다. 무릇 적은 군대로 많은 군대를 이길 수는 있어도 부패한 군대로 건전한 군대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 전진(戰陣)의 철칙이요, 부패한 군대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정치적·사회적 불안정 요소가 되는 법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조직이 다 부패하더라도 군대 조직만은 부패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 말이다.
 
 
  ‘사고 예방’이 우선이어서는 군대가 아니다
 
  그뿐인가. 지금 ‘연합사 해체’ 문제와 ‘군 상부 지휘구조 개편’을 둔 논란으로 현역과 선배 예비역들 사이에, 그리고 육·해·공군 사이에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간극(間隙)이 만들어지고 우리 군이 너무 큰 상처를 입고 있다.
 
  우리 군의 군인적 신념과 의지·사명감·군인적 도덕성 등등 군인으로서의 마음가짐·군인정신이 흔들리고, 군 상하좌우(上下左右)의 기본적인 신뢰와 존중이 녹아내려 군에서는 절대로 없어서 안 되는, 군 특유의 전우애(戰友愛)와 응집력(凝集力)마저 붕괴되고 있는 모양새가 아닌가. 이래도 과연 유사시 우리 국군이 잘 싸우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서둘러 재정비하고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각 군에서도 나름으로는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병영 시설의 개선은 기본이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병영생활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개인발전의 기회를 만들어 준다든가, 한편으로는 초급간부들의 지휘역량을 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병사들이 군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등등의 아이디어들이 쏟아진다고 한다. 군의 대응이 소극적으로 보였는지 우리 사회도 이런저런 처방전을 휘둘러 대며 은근히 군을 다그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가만 보면 군이든 사회든 그 모두 ‘군 생활을 좀 여유롭게 만들어서 사고를 예방’하는 차원에 맴돌고 있는 듯해서 아쉽다. 군인정신과 시민정신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군의 근본적인 문제를 단순한 사고방지 차원에서 접근하고, 내무생활이나 없애려 들다가는 혹시 사고는 일시 좀 줄어들지 몰라도 그 대신 자칫 우리 군의 ‘군대다움’을 상실하게 하거나 전장(戰場)에서의 승리에 필수적인 군의 기본태세와 역량을 흔드는, 문자 그대로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 우선 ‘참된 군인’으로 스스로 다시 태어나야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출발점은 ‘진정한 군인, 참 군인으로서의 군인정신’을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참된 군인? 이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우리는 흔히 군복을 입고 무기를 보유한 사람을 군인이라고 부르지만 군복(軍服)이란 하나의 제복(uniform)에 불과하고, 또 오늘날에는 군대 외에도 수많은 무장단체, 심지어 전투를 대행해 주는 ‘상업적 회사’까지도 있으니 무기를 보유했다는 것만으로 ‘군인 됨’을 말할 수도 없는 때다.
 
  그것이 아니라 여기서의 ‘참군인’이란 ‘군인다운 마음가짐과 신념 그리고 이념, 즉 군인으로서의 영혼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사실 군이 군으로서의 영혼이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갖추었어도 무장폭력 집단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참군인으로서의 영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의식과 신념체계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국가의 정체성에 따라 다를 것이니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74년 육사생도들을 위해 <생동하는 군을 위하여>라는 소책자를 하나 만든 적이 있다. 출판 직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강조한 부분이 당시 ‘유신체제(維新體制)를 비판했다’는 오해로 생도들에게 나누어졌던 책자가 도로 회수되어 불태워지는 비운을 맞았었다.
 
  뜻밖에 분서지화(焚書之禍)를 당했던 셈인데, 당시 어느 1학년 생도가 감히 위험을 무릅쓰고 잘 간직해 주었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여기서 필자는 다음 네 가지 세부 요소를 제시했었다. 약관(弱冠) 초급 대위(大尉) 때의 글을 새삼 들먹이는 것이 몹시 쑥스러운 일이지만 잠시 요약하고 싶다.
 
 
  희생·봉사·자유민주주의 신념·창조적 합리주의
 
지난 7월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 참석자들이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과 관련해 묵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낙준 해병대 사령관, 김관진 국방부 장관, 김영후 병무청장.
  <첫째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다. 군인의 경우 그것은 자신이 군인의 길을 택한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부과한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군인이 국민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기본임무에 성실하려면 그 희생적 삶의 본질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현대에 자기 업무에 대한 책임과 의무, 나아가 희생과 봉사를 중시하지 않는 직업이 어디 있을까만, 군인의 제일의적(第一義的) 속성은 특히 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절대적인 자기헌신에 그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우리 전통 유학의 핵심사상인 인본주의(人本主義)에 대한 이해다. 우리의 인본주의는 서구 휴머니즘(humanism)과는 그 차원이 좀 다르다. 비록 유학(儒學)의 학문 체계를 활용하기는 했지만 여기에 종속된 것도 아니었다. 설명하려면 좀 길지만 한국적 인본주의의 정수(精髓)는 멀리 신라(新羅)의 화랑도(花郞道)에서부터 고려(高麗)의 상무정신(尙武精神)으로, 그리고 예컨대 ‘나라의 위난에는 목숨으로 구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의(義)로운 삶’이요 ‘의로운 삶을 가장 인간다운 삶’으로 인식하고 국가 유사시에는 다양한 의병(義兵) 활동으로 국난극복(國難克服)에 앞장선 근세의 선비사상으로 이어져 온 우리 민족 특유의 사고체계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니만큼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군인이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허용될 수 있는 ‘사상의 자유’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반역적(叛逆的) 사고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 것은, 그런 대의(大義) 못지않게 국가안보를 위해서도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소중하고 군 전력의 극대화를 위해서도 군 간부의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이 소망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군대라야 국민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하며, 합리적 이성과 인격에 의해 지휘되고, 법과 규율에 의해 통제되는 동시에 창의성과 적응력이 높은 유연한 군대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흔히 ‘군의 민주화’라고 하면 병사들이 자유나 증진하고, 처벌이나 관대히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민주주의를 일종의 자유방임이나 방종으로 착각한 것일 뿐인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요소는 창조적 합리주의의 사고방식이다. 무릇 군의 사명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있고 군의 존재가치 역시 승리에 있는데, 승리를 위한 최고의 효율성과 최선의 방책은 통상 합리적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그런데 합리성은 너무 그 자체에 충실하다 보면 오히려 합리적이 못되는 경우가 많다. 합리성이란 흔히 과거의 경험이나 현재의 진실에 근거하게 마련인데, 지나치게 과거와 현재에 종속되다 보면 자칫 급속히 변해 가는 미래상황에의 예측이 봉쇄당하거나 풍부한 상상력에 의한 생동(生動)하는 대응력을 상실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적’이라는 접두어(接頭語)가 붙여진 것이다. 창조적 합리성이란 과거를 되살리되 종속되지 아니하고, 현재의 진실에 기반(基盤)하되 정체되지 아니하며 미래의 발전적 상황에 창조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지난 3월 천안함폭침 1주기를 맞아 안보교육을 나온 군인들이 전쟁기념관에 마련된 북한의 폭침 어뢰 추진체 모형을 보고 있다.
 
  군인적 도덕성 회복도 필수
 
  그와 함께 군인적 도덕성도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래 ‘청렴결백(淸廉潔白)하고 솔직담백(率直淡白)함을 중심으로 하는 군인적 도덕성’에는 어떠한 형태, 어떤 규모이건 간에 부조리나 비리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장수(將帥)는 군문(軍門)에 들어서면서 가족을 잊어버리고 북소리가 둥둥 울리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는 것인데 군인이 물욕(物慾)에 눈을 뜬다는 것은 ‘삶’, 그것도 여유로운 삶에 집착한다는 뜻이니 위국헌신의 본분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군의 부패는 좁게는 군내(軍內) 상호불신을 조장하고 군의 응집력을 와해시켜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넓게는 민군 간의 불신을 야기하여 총화안보(總和安保)의 기틀을 교란하는 요인이 된다. 뿐만 아니라 부패한 군대는 참된 국가방위보다는 흔히 정치지향·권력지향적인 군대가 되기 쉬운 법이고, 그래서 부패는 군의 정치적 야심을 촉발시키고, 그럼으로써 국가의 정치적·사회적 안정에 대한 위협요소가 된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과거 어떤 나라 사관학교에서는 돈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조차 부끄럽다 하여 돈을 셀 때도 ‘몇m 몇cm’ 식으로 불렀다 한다. 대신 정부는 후한 보수와 특별한 사회적 대우로 그러한 자세를 보호해 주었고 그 군대는 어쨌든 강군(强軍)의 이미지를 남겼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군인정신은 오히려 선비정신과도 통한다.>
 
  세월이 좀 흘렀지만 바로 지금 우리 군에도 이런 마음가짐을 되살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오늘 우리 군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우리 군에 이런 참된 군인의 영혼을 심어 주고, 그런 참된 군인을 길러 내는 데 소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싶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올바른 군인정신을 가진 참된 군인’을 길러 내는 데 온 군이 전력(全力)을 다해야 할 것이다.
 
 
  ■ 국민도 국가도 함께 노력해야 ■
 
  군의 이런 노력이 성공하려면 국민과 국가, 그리고 사회도 다 함께 노력해야 한다. 모름지기 전제군주 시대 왕의 용병이나 사병(私兵), 당(黨)의 군대인 공산주의 군대와는 달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군대는 그 나라 국민으로 이루어진 국민의 군대이다. 국민을 위해 국민에 의해 구성된 국민의 군대인 것이다.
 
  군인정신도 결국은 국민일반의 시민정신(市民精神)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올바른 ‘군인정신’은 ‘시민정신’의 기저(基底)이자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원래 군에 있어서의 국민은 대지(大地)와 같고 모태(母胎)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군인들은 흔히 모체(母體)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향심(向心) 속에서 살고 그 사랑과 신뢰에 용기와 사명감을 얻는다.
 
  그런데 원인이 어디에 있든, 지난 시기 우리 사회는 군을 너무 흔들어 왔다. 과거 우리 군이 갑자기 이른바 군사통치(軍事統治)의 원죄(原罪)를 뒤집어쓴 이후, 국민에게 있어서의 군은 목숨으로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주는 고마운 대상이기보다는 권위주의 정권의 권력기반이자 압제의 도구 정도로 백안시(白眼視)되고 국민의 불신과 경계, 심지어 때로는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닌가 싶은 때가 있었다.
 
  군이 걸핏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가운데, 특히 군사문화(軍事文化)는 만악(萬惡)의 근원인 것처럼 매도되기도 했다. 원래 군인들로서는 야전(野戰)의 바쁜 일상 속에서 무슨 문화(?)까지 느끼고 따질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 군 나름으로는 제법 소중한 긍지를 갖고 있었다.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정연한 질서였고, 경직된 고루함이 아니라 건전한 창조성이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특히 국가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과 공공을 위한 헌신(獻身), 공동운명체로서의 생명을 같이하는 뜨거운 전우애, 군대 특유의 예절, 그리고 청렴결백하고 솔직담백함을 근본으로 하는 군인적 도덕성 등 군인적 가치관과 같은 것, 또 씩씩하고 강건한 육체와 건전한 생활 기풍(氣風), 평시 업무 수행상의 고도의 생산성과 효율성, 주어진 임무는 반드시 완수하는 극도의 책임성 등 군대사회의 독특한 행동양식 같은 것 …. 좀 막연하지만,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군사문화에 대한 군인의 일반 인식이었다.
 
 
  햇볕정책 10년 동안 군의 경계의식 해체
 
13년 만에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훈련병 가족면회가 재개됐다. 지난 5월 4일 면회 온 가족들이 아들을 만나며 즐거워하고 있다. 육군은 지난 1998년부터 ‘군인다운 신병 만들기’의 일환으로 중단해 온 훈련병 가족면회를 5월부터 재개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군사문화는 이런 것이다’ 하고 새로운 개념이 들씌워지면서 군사문화는 온갖 부조리의 대명사요, 반드시 없애야 할 모든 사회악(社會惡)의 근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심지어 흉악한 지존파 사건까지도 군사문화의 결과라고 말하는, 이른바 ‘저명인사’도 있었다. 물론 타당한 비판도 있었지만 군인의 입장에서는 아쉽고 섭섭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군대도 더욱 크게 동요하면서 과거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엉뚱한 사고들이 빈발해서 또다시 국민의 불안을 확산시키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햇볕정책 10년 동안에는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인 타격을 받았다. 오늘까지도 우리 사회가 사실상 북한 간접침략의 합법적인 놀이터가 되고 남남갈등과 엄청난 이념적 혼란에 휩싸이게 만들어 놓은 10년 세월이었으니 군대인들 오죽했겠는가. 더욱이 군대는 원래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작용하는 조직이다. 햇볕 10년 동안 ‘주적(主敵) 북한’에 대한 군의 경계의식은 자연스럽게 점차 해체되어 갔다. 더욱이 국토방위를 위해 북한의 침략에 적극 대처하면 훈장이 아니라 사실상 불이익을 받는 어이없는 일이 이어지고, 서해에서는 북한과의 해전(海戰)으로 우리 장병이 피를 흘리고 죽어 가는데도 동해에서는 금강산 관광이 이어지고, 군의 통수권자는 축제에 참석한다고 우리 전사자(戰死者)를 외면하고 외국으로 나가 버리는 일도 있었다.
 
  국가 지도자까지 나서서 ‘군복무는 썩는 시간’이요, 국토 사수(死守)는 ‘땅따먹기 놀이’라며 군인의 삶과 국토방위의 사명을 비웃었다. 또 필부필부를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에 묶어 세우는 것은 엄정한 군기(軍紀)이고, 전투 시에 그들을 잘 싸우고 살아남게 하는 것은 강한 훈련인데, 인권과 안전을 내세워 군기를 허물고 훈련을 위축시켰다. 이처럼 군의 존재이유가 부정되고 국가를 위한 헌신이 모욕되었으며 심지어 직접 군기(軍紀)를 흔들고 훈련을 막아섰으니 우리 군이 어떻게 정상적일 수 있었겠는가.
 
  우리 사회도 그랬다. 특히 우리 인터넷과 방송, 영화와 연극 같은 데서는 역사적 진실을 왜곡해 가며 국군의 명예를 짓밟고 그들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충성을 조롱하고 폄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그런 반군적(反軍的) 영화마다 관객이 넘쳐났다. 군에서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웃어넘기려 노력하곤 했지만, ‘국군의 입장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군비 없는 외교는 악기 없는 음악과 같다
 
  지금이라고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 군함이 폭침(爆沈)되고 46명의 전우(戰友)가 희생되었는데도 ‘비겁한 평화’나 찾고 도발에 대한 분노 대신 슬픔과 공포가 더 컸다는 뜻이니 본질적인 변함은 거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해군기지 건설공사가 이른바 시민단체들의 반대로 몇 개월씩 표류했던 제주 강정마을 사태는 더더욱 기가 막힐 이야기다. 도대체 잠재적 적국일 수도 있는 타국의 오해가 두렵다는 핑계도 어이가 없고 우리 군사시설을 만든다는 데 ‘평화’라는 이름으로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안보의식도 문제지만, 이런 합법적 사업을 서두르지 못하는 정부는 무엇을 위한 정부이며, 그렇게까지 무기력한 정부라면 국체인들 수호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있다. 당장 북한의 위협에 대처해야 하는 인천해역방어사령부의 이전 문제는 강정마을과는 차원이 다른 급박한 현안 과제인데도 비슷한 상황에 몰려가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들인 것이다. 과거 구소련의 SS-20에 대응한 미국 퍼싱 미사일 배치를 가로막고 나서는 자들에 대해 당시 마거릿 대처 수상은 다음과 같이 일갈(一喝), 물리쳤다고 한다. ‘군비 없는 외교는 악기 없는 음악 연주와 같다(Diplomacy without arms is like music without instruments).’
 
  국방부의 어느 고위 관계자는 오늘날 병사들도 문제지만 부모들은 더 큰 문제라고 한다. 심지어 면회를 온 엄마가 병사를 데리고 탈영을 한 일도 있고, 전선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처벌하거나 하면 다음날 부모들이 깃발을 들고 찾아와 시위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하니 말이다. 사회가 이러면 군대만 독야청청(獨也靑靑) 확고한 정신무장이 되어 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최근 국방부에서 교육부에 교과 내용을 바로잡아 달라는 공문을 보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아무리 군대라도 12년 이상 왜곡된 교육을 받아 온 젊은이들을 불과 2년여 만에 바로 깨우쳐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래서는 우리 군에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들이 있어도 당연히 강군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원래 강군이 되려면 장병의 ‘군인적 사명감과 긍지’,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강인한 ‘전투의지’가 있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최대한의 보상체계 만들어야
 
  최근 우리 언론에서 ‘미국과 이스라엘군은 내무생활은 하지 않아도 훈련은 강하다’면서 이들을 본받으라는 식의 주장이 적지 않았는데 이스라엘군이나 미국군이 강한 것이 훈련 때문만은 아니다. 1993년 골란(Golan)고원에서 확인한 바로는 그들의 내무생활이 지나치게 자유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우리 군의 훈련 수준이 이스라엘군에 크게 뒤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스라엘군을 강군으로 만든 것은 ‘군 복무를 의무라기보다는 자랑스러운 권리’로 아는 사회의 전통과 분위기가 이스라엘군 특유의 높은 사명감과 강한 전투의지를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당시 필자의 결론이었다. 이스라엘 군인들로 하여금 ‘국가를 신뢰하고 충성하게 만드는’ 국가 시스템도 중요해 보였다. 전상(戰傷)으로 실명(失明)의 위기에 빠진 어느 병사에 대해 ‘국가에서 영국과 미국 등의 전문병원을 순방하며 치료하고 있고 끝내 치료가 안 되면 삶을 마감할 때까지 휠체어와 간병인 등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국가에서 책임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우리 병사들은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자신만만해하는 이스라엘 지휘관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미국군에 대해서도 꼭 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2001년 9·11 후 ‘골드만 삭스’의 부사장이던 맨시오(Kevin Mincio)가 병사로 자원입대해서 무려 8년을 복무했고, NFL(미 풋볼 리그)의 영웅 팻 틸먼(Pat Tillman)이 360만 달러의 연봉을 내던지고 나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했으며, 백악관 NSC(국가안보회의) 비서실장으로 있던 마크 리퍼트(Mark W. Lippert)도 해군 특수전 부대원으로 이라크로 달려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모두 미국인들 특유의 강한 애국심과 책임의식을 중심으로 한 시민정신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을 일들이다.
 
  국가도 그런 시민정신에 최선을 다해 보답을 한다. 지난 8월 11일 오바마 대통령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헬리콥터로 45분을 날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헬기가 피격되어 전사한 네이비실 등 30명의 미군 유해를 ‘눈물의 거수경례’로 맞이했다는 보도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2009년 10월에도 새벽 4시 이전의 이른 새벽에 나가 전사자들을 맞아 감동을 주었었다. 전사자에 대한 이런 예우는 미국의 보편화된 전통이다.
 
  이렇게 예우 받는 장병들이 어떻게 군의 사명을 외면할 것이며 이런 군대가 어떻게 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일단 군의 노력을 지켜보자 ■
 
  오늘 우리 현실은 이스라엘이나 미국의 경우와 많이 다르다. 군에 입대하는 우리 장병들이 모두 이스라엘이나 미국인들과 같은 군인적 기초소양을 갖추고 있다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장병에게 군인적 사명감이나 전투의지 같은 마음가짐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전장에서의 승리는 불가능할 것이니, 결국 우리는 군에서 그것을 심어 줄 수밖에 없다.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다. 평소 ‘명령-복종’ 관계를 중심으로 한 군 특유의 강한 기강(紀綱)을 강제하는 것도 그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말하자면 입대 장병들을 일반시민과는 다른 ‘군인’으로 재탄생하게 하는 과정인 셈이다. 그것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그래서 군에서는 사회와는 많이 다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사회적 시각에서 보면 군대란 본질적으로 불합리한 조직이다. 유사시 ‘너 나가 죽어라’ 하면 해야 하는 곳이 군대이기 때문이다. 이 본질적으로 불합리한 관계를 조금이라도 합리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군에는 일반사회와는 전혀 다른, 일견 불합리한 관행과 법규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같은 인간끼리 ‘너 나가 죽어라’ 한다는 것이 어떻게 합리적이겠는가. 그러나 상관의 그런 ‘명령’이라도 부하는 반드시 ‘복종’을 해야 하는 곳이 군대요, 이런 명령-복종 관계가 군이 군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기본 요건이다.
 
  명령이 효율적으로 이행되게 하려면 명령만으로는 미흡한 경우도 많다. 명령에 대한 부하의 공감과 지휘자에 대한 충성심이 있어야 하고, 부대에 부여된 임무를 잘 수행하려면 부대 구성원들의 강한 응집력도 중요하다. 지휘자의 합리적 판단력과 창조적 작전운용 능력, 그리고 부하의 충성심을 이끌어 내고 부대를 단결시키는 리더십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뛰어난 지휘자가 어디 그리 많겠는가. 그렇더라도 부대의 임무는 수행되어야 하고, 그러자면 부하는 어떤 지휘자의 어떤 명령에도 복종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에서는 아무리 합리적인 명령이라도 제대로 이행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군에서는 평소 다양한 방법으로 이 ‘명령-복종 관계’의 유지를 절대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되게 만든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훈련이다. 예컨대 군의 가장 기본적인 훈련이 제식(制式)훈련인데, 현대 전장(戰場)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이 훈련을 지금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두가 마음을 하나로 해서’ 복종해야 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내무생활도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우리 군에 있어서 내무생활이 담당하는 기능은 너무나 크고 다양하다. 훈련만으로 안되는 많은 것들을 내무생활이 담당한다. 이스라엘이나 미국 같이 사회적 동기부여의 기본 바탕이 없거나 약할 때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내무생활인 셈이다.
 
  그뿐인가. 전우애(戰友愛)도 그렇다. 무릇 전장이라는 곳은 서로가 돕고 서로를 위해 헌신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 평소부터 부유했건 가난했건 사회적 배경과 관계없이 모든 젊은이들이 똑같은 전우(戰友)로서 함께 훈련하고 함께 삶을 영위하며, 여울의 돌처럼 서로 부대끼면서도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협력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유사시 서로 목숨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전우애가 길러지고, 부대의 응집력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내무생활은 전투의 기본
 
2005년 6월 8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GP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 후 현대식으로 개조된 28사단 내무반.
  이렇게 중요한 ‘내무생활’을 없애야 할, 혹은 없어져도 좋은 것으로 배척하려 드는 것은 주로 ‘빈발하는 사고’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일상적 삶의 터전인 내무생활에서 ‘엄정한 군기’를 너무 중요시 하다 보면 군기확립이라는 명목하에 내무생활 속에서의 적지 않은 무리가 암암리에 관행적으로 허용되고, 때로는 그것이 여러 사고의 근원이 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주요 언론에서 우리 군의 병영생활 방식도 미국과 이스라엘군처럼 출퇴근 개념으로 바꾸어서 아예 내무생활을 없애자고 한 것일 게다.
 
  우리 군 일부에서도 슬그머니 여기에 끌려들어 가 그런 실험 아닌 실험을 하는 부대가 생기고, ‘실제로 출퇴근제를 해 보니 사고가 크게 줄었다’며 큰 아이디어나 되는 양 자랑스러워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내무생활을 없애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그 반면 우리 군에 있어서의 ‘내무생활의 기능’은 여전히 중요하지 않은가. 분위기와 국가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군의 병영생활만 사실상 없애 버린다고 해서 이스라엘이나 미국군과 같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도 과연 우리 군의 임무수행에는 문제가 없을 것인가. 오히려 위계질서와 명령-복종 체계가 흔들리고 자칫 위기 앞에 와해되는 오합지졸이 되지는 않을 것인가. 도대체 내무생활의 일상적 어려움도 인내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병사라면, 유사시 어떻게 만난(萬難)을 참고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사고도 물론 없어야 한다. 그러나 군은 원래 이런저런 사고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집단이다. 항상 총칼과 폭발물 같은 온갖 위험물자들 속에서 살아야 하고 훈련도 전투처럼 하라는 것인데 어떻게 사고가 없겠는가. 그래서 선진국 군사교범에는 아예 부대가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사고 발생은 정상적인 것으로 본다고 규정되어 있다. 어떤 사고든 정확히 지휘관의 잘못이 아니면 지휘관이 처벌받는 일도 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관에 대한 부하의 신뢰였다고 생각한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예컨대, 상벌(賞罰)만 공정하고 엄격히 해도 기강은 저절로 확립이 되고 지휘관에 대한 신뢰도 생기는 법이다. 필자의 경우, 병사들 스스로도 ‘아무리 지휘관이 약속은 했지만, 설마 이거야 어떻게 지키겠느냐’ 하고 있던 무리한 약속을 지켜 주고부터는 지휘관의 어떠한 말도 무겁게 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의도했든 안 했든 군에서 흔히 있는 이런저런 전술경연대회와 체육대회의 우승을 한 차례도 놓치지 않았고, 지휘관으로서 마음먹은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 없었다. 특히 그렇게 빈발하던 크고 작은 사고들이 단 한 건 발생 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1년여 후 다음 지휘관이 부임하고도 상당기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사회적 시각에서 군을 재단하려 해선 안 돼
 
  물론 나름으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예컨대, 학원강사 경험이 있는 유능한 일병들을 선생으로 삼고 고등학교 미만 학력의 고참 병사들이 학생이 되는 부대 내 야학(夜學)도 운영해 봤다. 고졸 검정고시 합격자가 몇 명 나오면서 제법 궤도에 오르기도 했다. 병사들로 하여금 미래의 꿈을 내다보면서 생활을 하게 하고, 하급자라도 야학에서는 선생님이기도 하니 고참병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하급자에 대한 가혹행위를 자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동시에 부대의 응집력을 한 단계 더 높이는 계기도 되었다고들 했다. 이런 식으로 삶의 형태에 조금 변화를 주기는 했지만 내무생활을 없애기는커녕 사실상 오히려 더욱 강화시킨 셈이었다. 그런데도 사고는 없어졌고 부대의 임무수행도 훨씬 더 활성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고를 막겠다고 내무생활까지 없앨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물론 내무생활의 합리화는 항상 필요할 것이다. 군 고급지휘관 시절 병사들이 비교적 쉽게 마음을 여는 군의관과 군종(軍宗) 간부들 덕분에 군심을 파악하고 안정시키며 결집시키는 데 큰 도움을 받았었는데, 변화하는 젊은이들의 의식구조를 살펴 그들이 어떻게 군 생활에 효율적이고 자연스럽게 적응하게 할 것인지, 심리상담, 의료, 정훈 등의 입체적 대책을 강구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출퇴근식 내무생활’도 한번 시험해 볼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사고를 줄여 줄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다만, 그렇게 하고도 우리 군에서 내무생활이 갖는 그 중요한 기능들을 보완할 방법이 있는지 잘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우리 군의 전투력을 희생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사고가 두렵더라도 함부로 내무생활을 없애기보다는 합리적인 내무생활이 가능하도록 개선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길일 것이다. 적어도 군의 일을 사회적 시각에서 보고 재단하려 하면 크든 작든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 국군 통수권자가 직접 나서야 할 때다 ■
 
  이렇게 우리 군이 최선을 다하면 그것만으로도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고 정도는 대부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군이 국군의 사명을 다해 주기를 기대한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가 없다. 대한민국의 참된 군인으로서의 영혼, 군인정신부터 되살려 내고, 모든 군인의 심장 한가운데 깊숙이 심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성공적으로 이루려면 이제는 국가 지도자가 직접 나서야 할 듯하다. 우리 사회가 ‘비겁한 평화’나 찾고 있다는 것은 우리 국민의 안보적 지혜가 그만큼 어둡거나 국민정신이 비겁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국가 지도자가 직접 국민의 안보의지를 튼튼히 하고 안보적 소양과 지혜를 제고하며, 나아가 올바른 시민정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안보’는 원래 위협이 직접 내 목덜미에 와 닿기 전까지는 그저 귀찮고 부담스러울 뿐인 존재다. 자연히 자칫 소홀하기 쉽지만 그 대신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경우가 많다. 그래서 흔히 정치적 리더십은 국민에 반보(半步) 앞서 나가면 된다고 하지만 안보적 리더십이 성공하려면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할 수 있는 국민적 공감과 용기를 이끌어 내야만 한다.
 
  그와 함께 군 복무에 대한 국민의 마음가짐도 바로잡아 주어야 하고, 국민이 군의 임무수행을 존중하게도 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국민이 너 나 할 것 없이 국방의 대임을 의무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권리의 하나로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또 뜨거운 애국심을 가진 유능한 젊은이들이 즐겁게 군인의 길에 나설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한다.
 
  그것도 서둘러야 한다. 지금도 서해엔 중국의 항공모함이 뜨고 북한은 연평도를 향해 계속 포를 쏘는데 우리 법정에서는 ‘김정일장군 만세’소리가 나는가 하면, 국가안보를 위해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데 군인과 경찰들을 폭력으로 막아서고 있는 때가 아닌가. 5~10년 내에 자유대한 100년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라는, 이 더할 수 없는 대 도전과 기회의 시대에 말이다.
 
  만에 하나 국민의 경계의 대상이 되는 군대가 있다면 그런 군대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며, 국방의 임무가 경멸되고 안보를 위한 노력이 불법적으로 짓밟히는 나라가 있다면 어떻게 튼튼한 국가안보를 기대할 수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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