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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天安艦 사태 1년 후

“한쪽은 무관심하고 한쪽은 거짓말을 하라고 한다”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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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함 생존장병 58명 중 9명, 사회로 나와
⊙ 생존장병 중 다수가 지금도 악몽에 시달려
2010년 3월 23일 천안함이 출동기간 중에 소모된 기름을 보충하기 위해 군수지원함으로 접근하고 있는 모습. 이 사진이 서해를 수호하던 당당한 천안함의 마지막 모습이다.
  20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 되는 날로 방방곡곡에서 추모식이 거행됐다. 정치권에서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뇌물 5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前) 총리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한명숙 감싸기’에 나선 날이다. 이날 밤에 예정된 김연아 선수의 세계피겨선수권대회(이탈리아 토리노) 쇼트프로그램도 화제였다. 대한민국은 참 많은 화제와 사건이 뒤따르는 나라다.
 
  같은 날 오후 9시15분쯤, 백령도 서남방 2.5km 지점은 어둠만이 있었다. KNTDS(한국해군전술자료처리체계)에 따르면, 이 지점에서 반경 5.5마일 이내에서 항해 중인 배는 시속 12.5km로 움직이던 대한민국 해군 평택 2함대 소속 초계함인 천안함뿐이었다. 이 해역(海域·수심 46m)은 NLL(북방한계선)에 인접해 있는 작전지역이었지만 이상징후는 없었다. 그동안 천안함이 15번이나 기동했던 곳으로 암초도 없어 큰 무리 없이 정상항로를 유지하며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모두 29명이 당직근무 중
 
  1999년 1차 연평해전에 참전했던 천안함은 1988년 해군에서 인수해 22년(내구연한 25년)간 운용한 함정이다. 최근 5년간 69주에 걸쳐 총 14회 정비를 시행해 평균 선체부식률은 3.22%였다. 즉 함정의 상태는 ‘피로파괴’가 발생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양호했다. 함장을 비롯한 승조원 104명도 해군 매뉴얼에 따라 정상 근무를 유지하고 있었다.
 
  함교에 당직사관을 포함한 7명, 전투상황실 7명, 통신실 2명, 함수포 상비탄약고 3명, 기관조종실 7명, 유도조종실 1명, 디젤기관실 2명 등 총 29명이 당직근무를 서고 있었다. 같은 시각, 최원일 함장(중령)은 순찰을 돌다 함장실에서 ‘KNTDS’를 보고 있었고, 근무가 아닌 승조원은 각자 세면, 취침, 독서 등 개인정비를 했다.
 
  안재근(당시 22세·포술부 상병)씨는 1층 상비탄약고에서 근무 중이었다. 안씨의 할아버지도 6·25 참전용사였다. 해군 상사로 제대한 그의 조부는 손자를 어릴 적부터 무릎에 앉혀놓고 자신의 군 생활에 대해 얘기해 주곤 했다. 안씨는 대학 2학년을 마친 2009년 2월 9일에 ‘바다사나이’가 되기 위해 훈련소에 들어갔다. 어느덧 안씨의 ‘수병(水兵)’ 생활은 1년을 넘겨, 이때는 ‘천안함’에 익숙해졌다.
 
  오후 9시쯤, 전번(前番) 근무자 고(故) 이상민 병장(추서 계급 하사)이 안씨를 보러 탄약고를 찾았다. 제대를 한 달 앞둔 그는 후임 안씨에게 전역 후 계획을 화제로 말을 걸었다. 안씨는 동갑이라 친구처럼 느끼던 ‘말년병장’ 선임의 제대가 부러웠고, 한편으로는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실에 섭섭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이를 눈치챈 이 병장은 “TV를 보러 간다”면서 함미쪽으로 향했다. 그게 안씨가 본 이상민 병장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고 직전 모든 것은 정상상태
 
2010년 4월 7일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진행된 천안함 생존장병 기자회견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 울먹이는 전준영(24)씨. 전씨는 천안함 격침으로 입대동기 4명을 잃었다.
  전준영(당시 23세·항해부 병장)씨는 저녁을 먹고서 속옷차림으로 자다가 일렁이는 파도에 침대가 흔들려서 깼다. 손목시계를 보니 시각은 ‘오후 9시15분’이었다. 제대를 두 달 앞둔 그는 침대에 누워 지나간 군 생활을 떠올렸다. 항해 도중 물개·돌고래와의 조우(遭遇), 함상(艦上)에서 맞이한 새해 일출 등이 교차했다.
 
  전씨는 2008년 4월 14일 해군에 입대했다. 처음에는 해군 교육기관에서 ‘축구조교’를 할 생각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축구’로 대학에 들어간 그였다. 하지만 희망 병과에 결원이 없었다. 전씨는 평택 2함대를 지원해 7월에 천안함에 승선했다. 전씨는 처음 천안함과 마주한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 배를 탔을 때 기름냄새가 진동해 해상근무가 시작됐음을 실감했습니다. 해군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학창시절 동안 ‘단체’ 생활을 계속해서 군(軍)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앞으로 생활할 천안함이 크고 멋있어서 뿌듯했고,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움이 훨씬 컸습니다.”
 
  전씨의 입대 동기는 8명이었다. 해군은 6개월이 지나면 전출을 신청할 수 있는데, 이때 동기(同期) 4명이 육상근무를 신청해 천안함을 떠났다. ‘말년’까지 함께한 동기는 고(故) 이용상, 이재민, 이상민, 이상희 병장(추서 계급 하사)이다. 이들은 오후 9시20분쯤 함미(艦尾)에 있었다. 승조원식당에서 영화상 시상식을 보거나 운동을 하고 있었다. 전씨는 이날 이후 동기들을 영정(影幀)으로 만나야 했다.
 
신은총(25)씨는 국가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을 요구했다.
  한편 상황실에는 신은총(당시 24세·전자전 하사)씨가 있었다. 신씨는 2005년 전자공고 정보전자과를 졸업하고, 1년6개월 동안 자동차정비와 음료납품 등을 했다. 군대에 갈 시기가 닥치자 창업자금을 모을 요량으로 해군부사관에 지원해 2006년 7월 3일에 입대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전자전’으로 아군의 레이더에 나타나는 선박과 비행기의 종류를 판단하고 분석하는 일이었다.
 
  당직 근무 중인 신씨에게 정범구(추서 계급 병장) 상병이 “근무표가 잘못됐으니 수정해야 한다”면서 올라왔다. 신씨는 “지금은 근무 중이라 얘기하기 어렵다”면서 “내가 알아서 마무리할 테니 얼른 내려가서 쉬라”고 말했다. 이에 정 상병은 급히 뛰어내려 갔다. 생존 승조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 상병은 세면실로 가 5분 만에 샤워를 마친 뒤, 영화상 시상식을 보러 식당으로 바삐 뛰어갔다. 그 뒤로 신씨는 ‘동생’처럼 아끼던 정범구 상병을 볼 수 없었다.
 
 
  쾅 하는 순간, 전쟁 났다 생각
 
  모든 것이 일상 그대로였다. 천안함은 평안했다. 정적(靜寂)이 깨지고 함내가 소란스러워진 시각은 ‘오후 9시22분’이었다. ‘쾅~콰아앙’ 하는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충격이 천안함을 덮쳤다. 배는 우현(右舷)으로 90˚ 뒤집혀 출입문이 머리 위로 가 천장이 됐다. 전력공급선이 완전히 끊겨 비상발전 시설도 가동되지 않았다. 모든 전기장치는 무용지물이 됐고, 천안함은 암흑천지로 변했다. 교신장치도 망가졌다. 화재는 없었기 때문에 내부폭발은 아니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서 평균 수온 5℃의 차가운 해수(海水)가 함내를 뒤덮었다. 두 달 뒤, 천안함 사고 민군합동조사단은 천안함 침몰원인을 ‘북한제 250㎏ 중어뢰(CHT-02D)에 의한 공격’으로 결론 내렸다.
 
  함장실에 있던 최원일 함장은 폭발음과 동시에 몸이 30~ 40cm쯤 떴다가 우현으로 떨어졌다. 곧이어 쓸려 내려온 책상 밑에 깔려 움직일 수 없게 돼 약 5분 동안 함장실에 갇혔다. 통신실에서 당직근무 중이던 허순행 상사가 망치와 소화기를 이용해 문을 부수고 소화호스를 내려줬다. 최 함장은 호스를 허리에 묶고, 외부 좌현 갑판으로 탈출했다. 상황을 파악한 최 함장은 “모두 침착하고, 내 지시를 따르면 전원 구조될 수 있다”면서 “적의 도발이 있을 수 있으니 몸을 숙이고 조용히 주변을 살필 것”을 지시했다. 이어서 최 함장은 포술장 김광보 중위의 휴대전화로 상부에 보고하고, 자신의 CO₂구명재킷(줄을 당기면 CO₂가 차면서 부력이 생기는 조끼)은 부상당한 오성탁 상사에게 입히고서, 구조 및 이함(移艦)절차를 지휘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전준영씨도 배가 뒤집히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물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전씨는 ‘전쟁이 났다’고 생각하며 ‘북한’을 떠올렸다. 그는 과거 훈련 도중 북한 함정이 NLL에 다가오면 실전준비 태세를 갖추고 출동했던 적이 많았다. ‘언젠가 전쟁이 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일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추위와 2차 공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이 떨렸다. 전씨는 ‘일단 위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비상등을 따라 이동했다. 좌현 측에 가보니 대피한 인원은 4명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모두 죽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조금 뒤에 부상당한 동료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전씨는 그들을 부축하며 안전한 곳에 자리 잡게 하고, 구조활동을 도왔다.
 
 
  컴퓨터 모니터가 굴러 떨어진 것은 처음 있는 충격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4월 19일 ‘천안함 희생장병 추모 라디오ㆍ인터넷 연설’에서 희생된 장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다 눈물을 흘렸다.
  같은 시각, 탄약고의 안재근씨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붕 떠서 우현으로 날아갔다. 안씨는 “함정에 이런 충격을 줄 수 있는 건 어뢰”라면서 “적이 공격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눈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물이 들어오는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다. 안씨는 탄약고를 벗어나려다 발을 헛디뎌 다시 떨어졌다. 오른쪽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고 양 손목 관절을 다쳤다. 어느새 물은 차올라 발목을 덮고 있었다. 그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掩襲)했지만, 더 큰 걱정은 동료들이었다.
 
  안씨는 자신의 몸이 비교적 온전하고 랜턴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구조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탄약고를 나온 안씨가 컴컴한 복도를 지날 때 여기저기서 동료들의 신음이 들렸다. 랜턴을 입에 물고 포술부와 항해부 침실을 뒤져 CO₂구명재킷 5개, 신발 12켤레, 각종 옷가지를 챙겼다. 어뢰에 피격된 그 시각엔 속옷차림으로 자거나, 씻는 사람이 많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면실에 갔을 때, 샤워 도중 사고를 당한 이은수 이병이 두려움과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안씨는 이 이병에게 옷을 입히고 담요를 덮어 줬다. 이어서 옆에서 빨래하다 얼굴과 손가락을 다친 전환수 이병을 간부에게 인계하고 다시 작전부 침실로 향했다. 그는 잔류 인원이 없음을 확인하고 간부에게 보고하고 중앙통로를 통해 함수 쪽으로 나갔다.
 
  처참한 함내 상황과 달리 달빛은 눈이 부셨다. 76㎜ 주포 근처에는 약 12명이 모여 있었다. 승조원들은 “○○○ 있나?”라며 서로를 확인했다. 갑판에서는 장교와 선임부사관들이 “배 중에서 부력(浮力)이 제일 큰 게 군함”이라면서 “4시간은 떠 있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사병들을 안심시켰다. 이어서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 있으니 절대 입수하지 마라”고 지시했다.
 
  상황실의 신은총씨는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책상에 무릎을 찧었고, 줄이 풀려 떨어진 모니터 모서리에 정수리 부위를 찍혔다. 이제껏 모니터가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천안함이 받은 충격이 컸다는 얘기다. 신씨는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안경은 어디론가 사라져, 눈이 나쁜 그는 어둠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의 운명도 바로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노력했지만, 허리와 다리에 통증이 밀려왔다. 흉추 12번, 요추 1·2번이 부러지고 쓸개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우측 무릎의 후방십자인대가 끊어지고, 전방십자인대는 늘어났다. 생존자 중 부상 정도가 가장 심했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덮쳤다. 점차 의식을 잃어 가던 신씨는 부모님과 누나 부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지막’을 준비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신 하사는 “하나님, 제가 이제 죽는 겁니까”라면서 “가족들을 보살펴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끝으로 자신처럼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최원일 함장, 移艦 확인 뒤 마지막으로 501함에 승선
 
‘천안함 46용사 합동 영결식’이 2010년 4월 29일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 안보공원에서 거행됐다.
  잠시 후,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거센 파도에 함수가 요동치면서 벽에 계속 머리를 부딪친 뒤였다. 신씨는 “1분이 1시간같이 느껴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흐린 시야에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어서 깊은 절망에 빠졌다. 신씨는 차가운 바닷물이 얼굴에 튈 때마다, 상황실을 벗어나려 뒤척일 때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추위와 고통, 공포가 삶에 대한 의지를 북돋웠다. 그는 구조요청을 위해 힘껏 소리질렀지만, 희미한 소리가 자신의 귓전을 때릴 뿐이었다. 나오지 않는 소리를 억지로 짜내 목은 점점 쉬어 갔고, 신씨는 재차 자신을 체념하고 있었다. 이때 상황실에서 근무하던 김현용 중사가 버둥거리는 신씨를 발견하고 자신의 안경을 씌웠다. 시야가 트이자, 희망도 보였다. 잠시 후 김정운 상사가 신씨를 발견하고 소화호스로 전신을 묶고서, 주변에 있던 4~5명을 불러 모아 좌현 측으로 끌어올렸다.
 
  다른 승조원은 보고를 받고 출동한 해경 경비함과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됐다. 해군이 보낸 고속정 3척은 오후 9시56분에, 곧이어 10시10분에 2척이 더 왔다. 이를 보고 있던 생존자들은 ‘북한 고속정’인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해군 ‘참수리’호인 것을 알고 안심했다. 고속정 편대는 천안함을 홋줄로 결속했지만, 고속정으로 건너뛸 때 실족(失足) 위험이 컸다. 10분 뒤에 해경 501함(500t)이 도착하고 나서 본격적인 구조작업에 들어갔다. 어업지도선 인천 227호가 바다에 빠진 2명을 구조해 백령도로 후송했고, 501함에는 56명이 탑승했다. 특히 최원일 함장은 이함 사항을 최종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501함에 갔고, 부장 김덕원 소령은 부하들이 물속에서 탈출할 수도 있다고 여겨 구명정과 구명볼을 현장에 남겼다. 신은총씨와 정종욱 상사는 27일 오전 1시50분쯤 헬기로 성남 국군수도병원에 후송됐다. 이후 고(故) 한주호 준위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구조작업에 참여했다. 아쉽게도 이날 구조하지 못한 실종자 46명은 사망했다.
 
 
  전준영, 제대후 현충원에 가 사망한 동기들에게 전역신고
 
침몰한 천안함 실종자 구조활동을 위해 수중작업 도중 실신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해군특수전(UDT) 요원 故 한주호 준위.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지금, 생존장병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난해 10월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최원일 중령은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 한 번 바다로 나가 잔악무도한 적을 박살 낼 수 있도록 하겠다”며 전투의지를 다졌지만, 현재 그는 해군역사기록단에서 ‘해군전투사’를 집필 중이다.
 
  최 중령을 제외한 생존장병 57명 중 전역자는 3월 8일 현재 9명이다. 그중 6명은 인터뷰를 꺼렸다. 생존장병 김모씨는 “그동안 인터뷰 요청이 끊임없이 왔다”면서도 “천안함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입장을 밝혔다. 《월간조선》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총 3명이다.
 
  전준영씨는 생존장병 중 첫 번째 전역자다. 그래서 언론의 관심이 그에게 쏟아졌다. 전씨는 ‘천안함희생장병영결식(이하 영결식)’을 치르고 이틀 뒤인 5월 1일에 제대했다. 이날 오전 평택 2함대 사령부를 나선 그는 곧장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향했다. 세상을 먼저 떠난 동기들에게 전역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전씨는 동기 고(故) 이용상, 이재민, 이상민, 이상희 하사의 묘역에서 ‘너희 몫까지 열심히 살고, 아들 노릇도 대신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야당 및 좌파 단체들은 “천안함 사태는 北風”이라면서 정부의 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진은 한 좌파단체가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미국의 천안함 침몰사건 관련 자료 공개를 촉구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다짐처럼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 남았다는 죄책감이 전씨를 짓눌렀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고, 동료들이 나타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신경은 쇠약해졌고, 우울증 증세도 보였다. 주위 사람들은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천안함의 진실’에 대해 물었다. “MB 정부가 입막음을 시켰느냐” “진짜 어뢰가 맞느냐”는 등의 질문이었다. 전씨의 말이다.
 
  “이미 우리가 보고 들은 걸 말했고, 과학적으로 다 밝혀진 사실을 왜 받아들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분단체제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천안함 침몰원인은 ‘상식’인데 왜 자꾸 다른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씨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심리치료도 받으며 사회에 복귀하려 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 말에 지금의 부인인, 여자친구와 결혼하면서 ‘마음의 안식처’를 찾았다. 전씨에 따르면 아이가 부인의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한다. 전씨는 “조금 있으면 자식이 생기는 만큼 어깨가 무겁다”면서 “더 열심히, 의미 있는 삶을 살겠다”고 말했다.
 
  천안함 생존장병 중 가장 크게 다쳤던 신은총씨는 인천의 자택에서 통원치료를 하며 계속 요양 중이다. 교회도 매일 가고 있다. 다행히 휠체어를 타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천천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다. 하지만 신씨에 따르면 날이 추울 때는 노인처럼 뼈가 시리고, 두들겨 맞는 듯한 통증이 지속적으로 몰려온다고 한다. 골반이 틀어져 걸음걸이도 불편하다. 그가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고(高)강도 진통제뿐이다.
 
 
  신은총, 추운 날이면 뼈가 시려
 
  사고 후 신씨는 국군수도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병원 관계자는 “3주만 지나면 걷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차도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대를 다친 오른쪽 무릎은 부어 오르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됐다. 신씨는 “매우 아프다”고 의료진에게 말했지만, “놔두면 괜찮아진다”는 답만 돌아왔다. 후일 민간병원에 CT 분석을 의뢰했더니 담당의사는 신씨의 어머니에게 “왜 수술을 빨리 받지 않았느냐”고 책망했다고 한다.
 
  신씨는 지난해 9월 국군수도병원에 의병전역을 신청했다. 휴가를 받아 하루라도 빨리 무릎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부상당한 지 5개월이 지나서야 인천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신씨에 따르면 국군수도병원은 5분 이상 앉지도 못하는 그에게 “전역증은 꼭 본인이 받으러 올 것”을 요구했다. 마지못해 신씨는 구급차를 타고 인천에서 성남의 국군수도병원까지 다녀왔다. 신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오가는 2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 지옥에 간 느낌이었다”고 되뇌었다. 신씨는 한참 후 진정된 목소리로 “정부와 국민에게 한마디만 하고 싶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고, 명령에 따라 그곳에 있었습니다. 불시에 적의 공격을 받았고, 배는 침몰했습니다. 저도 부상당한 걸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은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를 비롯한 많은 천안함 장병이 심신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가 뭘 숨기겠습니까. 있는 그대로를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희망은 자라고 있었다. 신씨는 미래 희망에 대해 “양식(洋食)요리사가 되고 싶다”면서 “뉴질랜드 호텔에서 조리장으로 일하는 자형(姉兄)이 도와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관건은 ‘그의 몸이 얼마나 빨리 회복되느냐’이다. 신씨는 “굶주리고 배고픈 사람에게 요리로 ‘희망’을 건네고 싶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안함 사고 이후부터의 제 삶은 ‘덤’입니다. 그만큼 값지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앞’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옆’을 더 신경 쓰면서 살겠습니다. 비록 제 꿈을 이루는 시기가 점점 멀어진다고 해도, 우직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요리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안재근, 동료들이 나타나는 꿈 자주 꿔
 
대한민국 해군을 공격해 46명을 수장시킨 북한은 최근까지도 “천안함 사건은 남측의 특대형 모략극”이라면서 발뺌하고 있다.
  구조활동을 열심히 했던 안재근씨는 현재 대구에 있는 한 대학 화학시스템공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는 “사고 후 1년이 된 지금도 당시 상황이 너무 생생하다”면서 “비명(非命)에 떠난 선·후임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말했다. 안씨에 따르면 천안함 생존장병들은 백령도 해역에서 구조돼 해군 초계함 성남함을 타고 3월 27일 오후 2시쯤에 평택항에 닿았다. 도착 즉시 부상 정도가 심한 장병은 의무대에서 치료받고, 그 외는 고속정생활반에 7일 동안 머물렀다. 이후 전원이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 치료와 조사를 동시에 받았다.
 
  안씨의 병실은 장성들만 쓴다는 VIP 병동에 있었다. 유지욱 하사, 최광수 병장, 이은수 이병 등과 같은 방을 썼다. 병원 생활은 3주 정도 이어졌다. 안씨에 따르면 이 기간에 생존장병들이 겪은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안씨의 말이다.
 
  “국방부 조사관은 육군과 공군이었습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해군을 배제한 의도는 이해합니다. 매우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꼼꼼하게 하려는 것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용어와 기본적인 상황설명을 하는 데 1~2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리고 또 조사가 이어졌습니다. 몸과 마음이 정상이 아닌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안씨에 따르면 생존장병들은 영결식이 끝나고, 경남 진해에 있는 충무공리더십센터로 숙소를 옮겼다. 이들은 이곳에서 안정을 취하면서 전적지 답사를 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안씨는 6월 7일쯤에 해군작전사령부 본부대대로 발령났다. 하지만 안씨는 제대할 때까지 근무지를 두 차례 더 옮긴다. 이때를 떠올리며 안씨는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큰 사고를 겪은 데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곳이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선임들은 힘들어하는 저를 보면서 ‘네가 원해서 왔는데 뭐가 그리 힘드냐’는 눈치를 줬습니다. 후임들은 제가 중간에 자기들 윗기수로 왔다고 싫어했습니다. 내무생활 때문에 제대할 때까지 근무지를 두 번 더 옮겼습니다.”
 
  안재근씨는 지난해 10월 말에 소속 지휘관에게 건의해 안보견학 명목으로 평택 2함대사령부에 전시된 천안함을 보러 갔다. 안씨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괜찮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이 1년 동안 근무했던 함정의 처참한 몰골을 보자, 그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뇌리(腦裏)에 동료들의 모습이 스쳐 가자, 주저앉아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안씨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면서 “얼마 전까지 불면증에 시달려 항상 수면제를 먹었다”고 밝혔다.
 
  “사고 이후 침몰 당시로 돌아가는 악몽을 자주 꿉니다. 배가 가라앉는데, 죽은 동료들이 나타났다가 하나둘씩 자리에 눕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면서 ‘내가 여기서 이 자세로 죽었다’고 말하는데 무섭고, 한편으로 슬펐습니다. 그렇게 잠이 깨 버리면 수면제를 먹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다수 동료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며, ‘배를 못 타겠다’ ‘물이 무섭다’는 등의 심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2010년 12월 24일 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특별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생존자 58명 중 함장 최원일 중령을 포함한 현역장병 51명과 전역장병 4명 등 총 55명이 참석했다.
 
  “살아 돌아온 게 죕니까!”
 
  안씨에 따르면 최성진(사고 당시 병장)씨는 전역 후 이른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심해 거식증까지 왔다. 안씨는 “식욕이 왕성했던 최씨가 체중이 7kg나 빠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면서도 “최근에는 점차 회복되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안씨는 “전환수 상병이 오른손 검지를 다쳐 수술했지만, 아직 낫지 않아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전했다.
 
  안씨는 “이미 진실은 밝혀졌는데, 그걸 믿지 못하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울컥한다”면서 “또 다른 ‘진실’을 요구하는 것은 고통받는 생존장병들을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안씨는 “북한이 도발한 것을 알고도 헛소리를 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이적(利敵)행위”라며 “그들에게 욕이라도 해 주고 싶다”고 분노를 표했다. 안씨는 “내가 현장에 있어 제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서 “숨기는 거 없으니 믿어 달라”고 정부 발표를 믿지 않는 ‘국민 10명 중 7명’에게 호소했다.
 
  “지금 한쪽에서는 우리를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다른 쪽에서는 우리가 거짓을 말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실종자 46명이 발생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돌아오기만 하라’ ‘69시간 내에 구조하면 희망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분들이 생환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씁쓸합니다. 지금 저희와 똑같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살아 돌아온 게 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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