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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구

근대 중국의 조선 정책과 역사적 기억

임오군란 후 조선을 省으로 병합하자는 주장 제기

글 : 김종학  국립외교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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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과 淸, 전통적 朝貢 질서와 근대 국제법 질서 사이에서 표류
⊙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 이때 속국의 의미는 朝貢 질서가 아니라, 19세기의 정치적·개념적 혼란 속에서 변질된 것
⊙ 고종, 朝美 수교 시 淸의 주장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확인하는 國書 보내
⊙ 중국, 《新淸史》 편찬하면서 조선을 〈屬國傳〉으로 분류한 《淸史稿》 답습

金鍾學
1977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외교학 석·박사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역임. 現 국립외교원 조교수 겸 외교사연구센터 책임교수 / 수상 제43회 월봉저작상 / 저서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흥선대원군 평전》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역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지만, 그 뒤에는 청국의 작업이 있었다.
  1882년 8월 1일(이하 일자는 양력), 청(淸) 조정에 주일(駐日)공사 여서창(黎庶昌)으로부터 조선 한성에서 심상치 않은 변란이 발생했음을 알리는 긴급한 전보가 도착했다. 급전(急電)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발발을 알리고 있었다.
 
  조선 정책의 사실상 책임자인 북양대신(北洋大臣) 겸 직예(直隸)총독 이홍장(李鴻章)은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합비(合肥)로 낙향해 있었으므로, 서리(署理)를 맡고 있던 장수성(張樹聲)은 조선의 공식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즉각 광서제(光緖帝)에게 파병(派兵)을 상주(上奏)해서 재가를 받았다. 파병을 결정하기까지 걸린 시일은 단 6일이었다. 이에 따라 8월 10일에 위원(威遠)·초용(超勇)·양위(揚威) 등 3척의 군함이 인천에 입항하고, 그 열흘 뒤엔 약 2만 명의 선발 부대가 경기도 남양부 마산포(馬山浦)에 상륙했다. 이례적일 정도로 신속한 청의 군사적 조처에 일본의 외무당국은 경악했다.
 
  이처럼 대규모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한 것은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약 250년 만의 초유의 일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에 청은 조선 원정을 앞둔 프랑스 및 미국 공사에게 “조선은 비록 중국에 조공(朝貢)을 바치지만 일체 국사(國事)를 자주적(自主的)으로 처리하므로 중국이 간여하지 않는다”라는 구실로 개입을 회피한 적도 있었다. 이 파병을 계기로 조선과 청의 관계는 본질적 변화를 맞이했다. 많은 연구자가 1882년을 근대 한중(韓中) 관계의 전환점으로 지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淸 제국의 와해
 
  당시 청 제국의 판도는 와해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주요 조공국 중 하나인 시암(타일랜드)은 1850년대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선 1860년대부터 프랑스 및 영국과 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강(新疆) 지역에선 이슬람 지도자 야쿱 벡(Yacub Beg)의 반란이 일어났다. 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1871년 이리(伊犁) 지방을 점령했다. 그 반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바디아 조약(Treaty of Livadia, 1879년)이 체결됐지만, 불리한 조건에 불만을 품은 청국이 조약 개정의 움직임을 보이자 레솝스키(Lesovskii) 제독이 이끄는 발틱 함대 23척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일본의 류큐(瑠球) 병합이었다. 류큐는 1402년에 명(明)의 책봉(冊封)을 받았으나, 1609년 사쓰마번(薩摩藩)의 침략을 받은 뒤로는 중국과 사쓰마번 양쪽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서양 열강은 이 같은 상황에 독립왕국으로 인정해서 미국(1854년), 프랑스(1855년), 네덜란드(1858년)가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일본은 1871년 류큐에 속한 미야코지마(宮古島)의 공납선(貢納船) 선원 54명이 원주민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빌미로 이듬해 류큐 국왕을 ‘류큐 번왕’에 책봉한 후, 1874년에 ‘일본령 류큐 주민의 학살’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출병을 단행했다. 그러고 마침내 1879년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沖縄県)을 설치한 것이다.
 
 
  淸, 조선에 開國 권유
 
북양대신 이홍장.
  이제 남은 것은 조선뿐이었다. 서울에서 베이징까지의 직선거리(944km)가 도쿄에서 나가사키에 이르는 거리(965km)보다 짧은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한반도는 베이징과 동삼성(東三省)을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왼팔[左臂]’ ‘울타리[屛蔽]’ ‘이를 덮는 입술[脣齒]’ 등의 관용어는 그 지정학적(地政學的) 가치를 잘 말해준다. 게다가 청국의 발상지인 만주와 연접해 있을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가장 모범적인 성리학(性理學) 국가로 꼽히는 조선의 자발적 복종은 이민족이 세운 청 제국의 위신을 지키는 데도 필수적이었다.
 
  문제는 조선을 타국(他國)의 침략으로부터 지킬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1839~1842년, 1856~1860년)과 태평천국의 난(1850~1864년) 등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며 청의 국력은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1861년부터 ‘자강(自强)’을 기치로 내세우며 이른바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추진했지만, 아직은 뚜렷한 성과가 보이질 않았다.
 
  이에 이홍장은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했다. 서구(西歐) 열강의 이해관계를 교착시키고 그 세력 간의 균형을 이루게 해서 러시아와 일본 등 위협적인 국가가 조선을 독점하는 사태를 막겠다는 판단이었다. 1879년 8월, 이홍장은 조선의 전(前)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은 말로 문호 개방을 권유했다.
 
  〈현재의 계책으로는 독(毒)으로 독을 공격하고 적(敵)으로 적을 제어하는 책략을 써서, 이번 기회에 서양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일본은 그 사기술과 힘만 믿고서 경탄(鯨呑)과 잠식을 도모합니다. 류큐를 폐멸한 한 가지 일이 그 실마리를 드러낸 것이니 귀국은 참으로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일본이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것은 서양입니다. 조선의 힘으로 일본을 제압하기엔 혹 부족할까 우려되지만, 유럽과의 통상을 열어 일본을 제압한다면 넉넉히 남을 것입니다.〉
 
  ‘독으로 독을 공격하고, 적으로 적을 제어하는 책략’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고지(故智)의 근대적 변용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물론 문호 개방만이 유일한 정책적 선택지는 아니었다.
 
 
  조선 병합론 대두
 
주일청국공사 하여장.
  예를 들어 1880년 초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은 조선에 사변(事變)이 생긴 틈을 타서 중국의 군현(郡縣)으로 삼아 그 정치를 개량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것을 상책(上策), 판사대신(辦事大臣)을 주재시켜서 중대한 내정(內政)과 외교를 주재(主宰)해서 외국이 넘보는 것을 예방하는 것을 중책(中策), 조선이 외국과 통상하는 것을 허락하되 조약문에 “대청국의 명을 받들어”라는 말을 성명(聲明)하게 함으로써 유사시 간여할 여지를 마련하는 것을 하책(下策)이라고 했다. 유사한 맥락에서 임오군란 직후 장건(張騫)과 장패륜(張佩綸) 같은 소장 관료들은 조선 국왕을 폐위하고 마치 한사군(漢四郡)처럼 한 성(省)으로 병합하거나, 감국(監國)을 파견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홍장이 보기에 이러한 방법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으로, 조선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일본 및 서양 열강의 항의와 간섭을 초래할 뿐 아니라 청에 적지 않은 부담을 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조선 문제로 인해 청이 의도치 않은 외교적, 군사적 분쟁에 휘말리는 사태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元)나라 때 여러 차례 감국(監國)을 파견했지만, 직권[事權]이 단일하지 않아서 혼란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만약 조선 국왕을 폐위하고 행성(行省)으로 삼는다면, 조처가 크게 기이하여 주목을 받을 것[奇堀]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각국이 이미 조선과 조약을 맺고 통상을 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일본이 옆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틈을 타서 소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開國의 가장 큰 원인은 재정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조선 측 대표 신헌.
  이윽고 1882년 5월 22일에 인천 제물포에서 신헌(申櫶)과 로버트 슈펠트(R.W.Shufeldt) 간에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이미 6년 전에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체결됐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마치 임진왜란 후 체결된 기유약조(己酉約條·1609년)처럼 옛 우호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어서 6월 6일과 30일에 제1차 조영수호통상조약, 제1차 조독수호통상조약이 각각 체결됐다.
 
  그런데 서양 국제법에 따르면, 오직 주권(主權)국가만이 다른 주권국가와 독자적으로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조약의 체결은 상대국을 주권국으로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조선의 수교는 청의 입지를 취약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그 대비책으로, 이홍장은 조미조약의 협상을 천진(天津)에서 진행하는 한편, 자신의 심복인 마건충(馬建忠)을 제물포에서의 조인식에 입회하게 했다. 특히 그는 조미조약 제1조에 “조선은 중국의 속국(屬國)이다”라는 내용을 명문화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체면을 심각하게 실추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슈펠트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霧散)되고, 일단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별도의 국서(國書)를 보내 이를 성명하기로 타협이 이뤄졌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1882년에 이뤄진 조선의 문호 개방에는 청의 정책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심지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결정적 원인은 극심한 재정난에 있었다. 19세기 이후 조선 정부의 재정난은 악화일로로 치달아서, 임오군란 직후에는 국고(國庫)가 1개월을 버틸 여력도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찍부터 새로운 재원으로 무역에서 얻는 관세(關稅) 수입에 주목했다. 청국에서도 양무운동의 주된 재원은 관세 수입에서 나왔으며, 심지어 1858년 이후 합법화된 아편 무역의 관세가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서라도 문호 개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임오군란
 
  하지만 그때까지 조선은 단 1척의 무역선도, 1명의 유학생도 해외에 보낸 적이 없는 폐쇄된 국가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鎖國) 정책이 유명하지만, 사실 쇄국은 건국 이래 기본적인 대외 정책이었다. 대원군은 무너진 국가 기강을 바로 세워 이를 철저하게 집행했을 따름이었다. 양반 위주의 강고한 신분질서와 체제교학(體制敎學)인 성리학을 수호하기 위해 수백 년간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외부 세계와의 교통은 물론 정보의 유입마저 철저히 통제해온 나라에서, 백성들의 심성에 적개심과 공포감만이 자리 잡은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금과 대두(大豆), 쌀 등이 일본으로 대량 반출되면서 한성의 곡가가 3배 이상 급등하는 등 민생(民生)이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결국 집권 세력에 의한 문호 개방 정책은 즉각적인 사회적 반동을 초래했다. 조미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두 달 뒤에 터진 임오군란이 그것이었다. 천진에 영선사로 와 있던 김윤식(金允植)은 군란의 발발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외교’에 반대하는 불령(不逞)한 무리의 소행일 것으로 단정했다. 실제로 임오군란은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됐지만, 사건이 전개되면서 점차 배외운동(排外運動)의 성격을 띠어 일본공사관과 일본인들이 습격당하고, 외교를 주도한 관료들의 집이 파괴됐다. 심지어 분노한 난군(亂軍)과 난민(亂民)은 이를 배후에서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민비(閔妃)를 잡기 위해 임금이 있는 창덕궁에까지 난입했다. 이는 임오군란의 본질이 김윤식의 추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조선의 생존을 위해 문호 개방은 필연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조선 사회는 그 충격을 감당할 만한 여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이홍장을 비롯해 서양국가와의 수교통상을 제안한 청국의 당국자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초래할 후폭풍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미 조선이 일본을 포함해 미국·영국·독일과 조약을 맺은 상황에서 배외운동을 방치하는 것은 이들 국가의 항의와 개입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청국이 황급히 군사적 개입을 단행한 데는 조선 문제로 인해 복잡한 외교적 분쟁에 휘말리는 사태를 예방하고, 또 기존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屬邦照會文
 
1888년 1월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봉정하는 조선 외교관들에 대해 보도한 당시 미국 신문.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는 자리에서 고종이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Chester A. Arthur)에게 보내는 국서가 교부됐다. 이홍장과 슈펠트의 합의에 따라 조선이 중국의 속방(屬邦)이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문서였다. 이 때문에 이를 ‘속방조회문(屬邦照會文)’이라고 부른다. 그에 대한 아서 대통령의 회신은 이듬해 5월 20일 초대(初代) 주조선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부임하면서 고종에게 봉정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작년에 조약을 맺을 때 귀 군주의 서한을 받았습니다. 이에 그 답서를 써서 푸트로 하여금 대신 바치게 합니다. 대체로 조선이 중국과 왕래하는 것은 우리나라 상민의 일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밖에는 대체로 간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 되는 문제도 묻지 않을 것입니다. 귀국의 내치와 외교의 모든 일은 귀 군주께서 자주(自主)로 주관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실로 깊이 흠모하는 바입니다. 통상(通商) 한 가지 일에서도 자주지국(自主之國)입니다.〉
 
 
  양절체제
 
‘양절체제’라는 말을 만들어낸 유길준.
  속방이란 무엇일까? 근대 이전 동아시아에서 속방(또는 속국)은 대체로 조공국을 의미했다. 한반도의 왕조는 4세기 중엽부터 중원의 왕조와 조공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공 관계의 구체적 양상과 정치적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다소 상이하지만, 그 본질은 조공·책봉과 같은 정치적 의례(political ceremony)를 매개로 조공국은 상국(上國)의 권위와 기존 지역질서에 순응하며, 상국은 조공국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자제하고 그 국가 자주권을 용인한다는 의지를 상호 확인하는 데 있었다. 즉 그것은 명분상으론 상국과 조공국 간의 위계(位階)가 존재하지만, 실제로 모든 국정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독특한 국제 관계를 뜻했다.
 
  그런데 서양의 역사나 국제법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서 대통령은 조선과 청국 간의 난해한 역사나 제도적 규범은 논외로 차치하고,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 관계는 오직 국제법과 조약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성명한 것이다. 일본(1876년)을 비롯해 영국(1882, 1883년), 독일(1882, 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등 전후로 조선과 조약을 맺은 다른 국가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조선은 전통적인 조공 관계(조선-청)와 근대 조약 체계(조선-서양·일본)가 중첩된 모순된 국제정치적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西遊見聞)》(1895년)에서 이를 ‘양절체제(兩截體制)’라는 말로 개념화했는데, 이는 마치 앞뒤가 잘린 형상과도 같다는 의미였다.
 
  물론 양절체제는 이홍장이 기대한 결과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조공 관계는 양국 사이에서만 유효한 특수한 체계로 상대화됐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과 서구열강 간의 조약 체결을 중재함으로써 그에 대한 전통적 권위와 기득 권리를 인정받겠다는 애초 의도에서 본다면 처참한 실패에 가까웠다. 훗날 청국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언론인인 양계초(梁啓超)가 《이홍장 평전》에서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원인(原因)을 분석하면서 “이는 모두 이홍장이 ‘종속국은 외교를 할 수 없다’라는 국제법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다. 잠시의 수고를 덜고자 큰 도리를 내세워 사람들을 기만한 것은 정말로 외교상의 큰 잘못이었다. 이후 세계 각국은 조선을 중국의 종속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신랄하게 비난한 것은 이 때문이다.
 
 
  속국=보호국 논리 등장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로 조선에 주재하던 시절의 청년 원세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청 내부에선 속방(또는 속국)의 의미를 근대 국제법적으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883년 5월, 내각학사(內閣學士) 주덕윤(周德潤)이 베트남 문제와 관련해서 올린 상소는 속국을 근대적 의미의 ‘피보호국(protected state)’으로 정의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이른바 ‘속국’은 바로 외국에서 말하는 ‘보호국’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이 베트남을 다투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속국’의 이름을 다투어야 하고, ‘속국’의 이름을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보호’의 실제를 남겨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근대적 조약의 형식을 통해 조선과 중국 간의 특수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1882년 10월 4일)·중강통상장정(中江通商章程, 1883년 9월 23일)·길림무역장정(吉林貿易章程, 1884년 6월 19일) 등을 의정(議定)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경우, 그 전문에서 “이번에 약정한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뜻으로, 각 여국(與國)이 일체로 균점하는 것과 같은 부류에 있지 않다”라고 명시했다. 이와 함께 1885년에는 조선의 외교 및 통상업무를 관장한다는 뜻의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札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함을 주어 원세개(袁世凱)를 파견했다.
 
 
  열강, 淸의 조선 외교 관리 용인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했다.
  그렇지만 청일전쟁 전까지 양절체제의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조약 체결로 이미 기정사실화(fait accompli)된 조선의 주권국 지위를 부정하기에는 청의 논리가 빈약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로 한반도에 대한 열강(列强)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른 결과였다. 마치 오늘날의 미중(美中) 전략 경쟁과 마찬가지로 19세기는 영국과 러시아 간의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은 지역 정세의 안정성을 위해 청이 일정한 수준에서 조선의 외교를 ‘관리’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경향은 1885년과 1886년 2차례에 걸쳐 조선 왕실이 독자적으로 러시아에 보호를 의뢰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더욱 강화됐다. 원세개가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대한 간섭을 자행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국제정치적 환경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전제로 했다. 즉 서구 열강은 조청 관계에 굳이 개입할 뜻은 없었지만, 청 또한 양절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을 병합하거나 총독을 파견해서 통치하는 등 그 국제적 지위를 일방적으로 변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세개가 최소 2차례 이상 고종의 폐위(廢位)를 건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홍장이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이 우리 대청(大淸)의 번속(藩屬)이 된 지 200여 년 동안에 해마다 조공을 행한 것은 중외(中外)가 모두 아는 바다.… 우리 조정은 번복(藩服)을 어루만져서, 그 국내 정사(政事)를 예부터 스스로 다스리게 했다.… 저 나라[일본]가 조약과 공법을 준수하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어서, 오로지 속임수만을 일삼아 흔단(釁端)이 저들에게서 열렸으니 공론이 명백하다. 이로써 특별히 천하에 포고해서 우리 조정에서 이 일을 처리한 방식이 실로 이미 인(仁)과 의(義)를 다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알리노라.〉
 
  청은 조선을 그 판도 내에 유지하기 위해 서양 열강과의 외교를 권유했지만, 오히려 이는 그 이탈을 촉진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러자 청은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기 위해 속방의 의미를 피보호국으로 재해석하면서, 실질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국제적인 책임을 지고자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청은 점점 더 조선 문제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반(半)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청은 끝내 양절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논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앞에서 인용한 광서제의 청일전쟁 선전(宣戰) 조칙(詔勅)에서 보듯이, 조선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청의 언어는 개전(開戰) 직전까지도 전통적 조공질서와 근대 국제법 체계 사이에서 부유(浮游)하고 있었다.
 
 
  《明史》에는 외국, 《淸史稿》에는 속국
 
  19세기 한중 관계의 역사는 그 속에서 만들어진 몇 가지 개념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역사 인식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 보인다. 앞에서 몇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속국이라는 말이 이에 해당한다. 흔히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지만, 이때 속국의 의미는 조공질서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정치적·개념적 혼란 속에서 변질된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수립된 북양정부는 ‘역대수사(易代修史)’의 전통에 따라 청조의 정사(正史)를 편수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 《청사고(淸史稿)》를 만들면서 조선과 관계된 사항을 〈속국전(屬國傳)〉으로 분류했다. 이는 조선을 〈외국전(外國傳)〉에 포함시킨 《명사(明史)》의 체제와도 다른 것으로, 속국을 근대적 의미의 피보호국으로 해석한 19세기적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 정부는 2003년부터 국가청사편찬공정(國家淸史編纂工程)이라는 이름으로 《신청사(新淸史)》를 편찬하고 있는데, 그 체제는 《청사고》를 답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宗主權
 
  또 다른 사례로 ‘종주국(宗主國)’과 ‘종주권(宗主權)’을 들 수 있다. 속국이 전(前)근대시기에 통용된 단어였던 것과 달리, 이 말들은 1904년경에 일본에서 ‘suzerainty’의 번역어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 관견(管見)에 따르면 아직 그 유래조차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본래 ‘종주(宗主)’란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일족의 적장자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종주국’과 ‘종주권’이라는 표현은 국제 관계를 가족 관계의 비유(analogy)로 파악한 것으로, 여기에는 마치 부형(父兄)이 자제(子弟)를 챙기듯이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지도하고, 책임지고, 때로는 따끔하게 훈육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유럽 외교사에서 ‘suzerainty’라는 개념이 처음 조약에 등장한 것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에 체결된 콘스탄티노플 조약(Treaty of Constantinople, 1800년)에서였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그 종교적·정신적 권위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종주권과는 달리 가족 관계의 함의는 포함돼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종주권이라는 말은 근대 동아시아의 고유한 역사적 산물에 가깝다. 이 개념에는 조공제도의 역사적 기억, 서양 국제법의 ‘suzerainty’, 그리고 가부장적(家父長的) 가족 윤리 등의 요소들이 함축돼 있다. 그리고 이는 작은 나라에 대한 큰 나라의 무제한적(無制限的)이고 초월적인 권위와 권력의 행사를 서술하고 정당화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세기 중국은 조선과의 관계를 국제법의 언어로 정의하는 데 끝내 실패했다.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종주권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전화(轉化)하여 동아시아의 역사적 기억을 왜곡하고 있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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