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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한국에서 나온 세계 최초 AI 장편소설

“AI는 ‘소설 나와라 뚝딱!’ 해서 안 나와. 인간과 AI의 협업 결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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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0매 분량의 장편소설 출간… 중견 작가가 소설감독, AI가 집필
⊙ “감정 표현의 디테일이 살아 있고 지식을 끌어오는 재주는 인간 소설가 이상”(정해종)
⊙ “AI 관심 가진 독자에게 부교재라도 됐으면 하는 게 희망사항”(김태연)
⊙ AI 소설이 가짜? “모두를 속일 수 없고, 오래 속일 수도 없다”
⊙ 유쾌한 비속어, 감각적인 단문… 아기자기한 재미 없고, 불필요한 정보 나열
⊙ 汎用 AI 창작 알고리즘 이용하면 ‘소설-쓰기’의 방식→‘소설-연출’로 바뀔 것
김태연 작가가 8월 25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북카페에서 AI가 집필하고, 그가 감독한 장편소설 《지금부터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출판사 파람북 제공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서사(敍事)를 갖춘 인공지능(AI) 장편소설이 나왔다. 소설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부터의 세계》(파람북 刊). ‘지금부터의 세계’란 이전까지의 세계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닌 AI가 소설을, 그것도 장편소설을 썼다. 원고 분량이 200자 원고지 1800매에 달한다.
 
  지난 8월 포스텍 인공지능대학원 연구팀이 시(詩) 쓰는 AI를 개발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국어 시 10만5399행을 AI에게 읽게 한 뒤, 시가 문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시퀀스 투 시퀀스(Sequence to Sequence)’라는 문장 학습 모델을 적용하니 시가 나왔다고 한다.
 
  지난해 5월 일론 머스크 등이 투자한 ‘오픈 AI’가 개발한 말하고 글쓰는 AI인 ‘GPT-3’가 공개되어 충격을 주었다. 약 4990억 개 데이터를 학습한 GPT-3는 주어진 단어나 문장 뒤에 자연스럽게 배열될 단어를 예측하고 연결해 문장과 글을 완성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뒷이야기를 써주는 AI 소설도 등장했다. 하지만 장편까지는 엄두를 못 냈다. A4 용지 2~3장 분량의 소품이거나 연관성 없는 문장의 조합, 서사적 주관이라고는 없는 언어의 파편들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 묵직한 분량의 장편소설이 필력까지 갖춘 AI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게다가 미국도 유럽도 아닌 한국에서 GPT-3가 아닌 우리의 AI 기술로 나왔다.
 
 
  미래 소설가가 선택해야 할 두 갈래 길
 
장편소설 《지금부터의 세계》(파람북 刊). 본격 소설로는 최초의 AI 장편소설이다.
  기자는 출판사에서 증정한 소설 《지금부터의 세계》를 받아 읽어보았다. 책 뒤표지 날개 부분의 이 문장이 눈길을 끌었다.
 
  〈머지않아 소설가에게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질 것이다. AI의 등에 올라타 소설감독의 길을 갈 것인가. ‘신의 한 수’였던 이세돌의 78수와 같은 ‘인간의 언어’를 찾아 끊임없이 길을 떠날 것인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시와 소설을 AI에게 맡기고, 인간은 그저 AI를 감독한다?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까. 아직은 요원해 보이나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우선 ‘세계 최초의 본격 AI 소설’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지금부터의 세계》를 쓴 AI 소설가 이름은 ‘비람풍’이다. 한자 이름(毘嵐風)까지 있다. 문학사에 혁명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작명되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비람풍(AI)을 감독한 이른바 ‘소설감독’은 중견작가 김태연(金泰演·61)씨다. 소설은 김태연 감독이 만든 뼈대(구상)에 따라 비람풍이 집필을 담당했다.
 
  김태연 작가는 연세대 공대 출신으로 지금까지 장편소설 《폐쇄병동》 《그림 같은 시절》 《반인간》 《풍류왕 김가기》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 등을 펴냈다.
 
  소설감독이란 표현에 대해 김 작가는 “AI가 창작을 하는 게 아니어서 소설감독이라 했다. 흔히 하는 말로 바꾸면 비람풍이 차린 밥상에 수저만 얹었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감독했다는 것일까.
 
 
  말장난 같지만 감각적인 문장
 
  먼저 《지금부터의 세계》를 읽은 문학 담당 기자의 독후록을 전한다.
 
  551쪽의 장편을 과연 AI가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문장도 손색이 없었다. 비교적 단문인데다, 단문이니만큼 비문도 거의 없었다. 다만 장편인데 지나치게 에피소드 형식으로 문단을 나누어 눈에 거슬렸다. ‘단편의 연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유쾌한, 그러나 비속어(卑俗語) 같은 단어, 가벼운 대화체 말투도 나쁘지 않았다. ‘덕질’ ‘최애’ ‘존버’ ‘가즈아’ ‘혀 드리블’ ‘읽씹’처럼 기존 순(純)문학에서 찾기 어려운 단어들이 자주 나왔다. 여기다 ‘샤테크’(샤넬 제품과 같은 명품을 구매 후 되파는 식의 재테크), ‘레전드계의 끝판왕’ 같은 신조어들이 대화와 지문에 자주 등장했다. 말장난 같긴 했지만 감각적인 문장도 기대 이상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갓미지가 외모야 우월하지. 하지만 여성스러운 면에선 우리 금지가 웃질이다.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비유가 저렴한 것 같아 좀 그렇지만, 귀엽은(귀여운) 면만 따지면 이금지가 다이아라면 갓미지는 금이야, 금.〉(147쪽)
 
  〈별 볼 일 없는 도시, 별 볼 일 없는 사람보다는 별 보는 걸 더 좋아하는 소모임이 있었다. 리더가 이금지였다. 별일 없는 한 한 달에 한 번은 별 보기 좋은 곳으로 떠났다.〉(119쪽)

 
  위 문장 ‘갓미지’(이름 ‘이미지’에다 ‘갓’을 붙였다), ‘웃질’ ‘귀엽은’ 같은 단어에서 보듯 일반 대중에게 널리 통용되는, 그러나 정통 어법에서 벗어난 말들이 자주 등장했다.
 
  아래 문장에서는 ‘별’이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데 ‘태양·달·지구를 제외한 천체’라는 뜻의 ‘별(星)’ 외에도 ‘별로’의 준말인 ‘별’을 써서 글맛을 살렸다.
 
AI 소설이 처음은 아니다?
 
  2008년 러시아에서 AI 기반한 소설 나와
 
  AI 소설 《지금부터의 세계》를 펴낸 출판사 파람북의 정해종(丁海宗) 대표는 “이 소설이 첫 AI 소설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2008년 이미 러시아에서 AI에 기반한 단행본 소설 《True Love》가 나왔고, 2016년 일본에서 AI 소설(단편)이 문학상 예심을 통과해 난리가 난 적이 있다.
 
  《True Love》는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의 캐릭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를 조합한 소설로, 러시아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인기였다고 한다.
 
  2017년 중국에서도 AI가 쓴 시집이 출간되었으며, 2018년 미국에서도 AI 소설 《1 the Road》가 나왔다. 같은 해 한국의 KT에서 1억원 상금의 ‘AI 문학상’이 열려 엽편(일반적인 단편보다 짧은 분량의 소설)들이 서로 경쟁한 일도 있다.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장편소설이 없을 뿐이었다.
 
  정해종 대표의 말이다.
 
  “지난 시대 AI는 서사를 지지하는 능력이 현격히 떨어졌다. 표현과 내용 전개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포스트모던 실험소설 느낌은 줄 수 있었지만 의도한 실험적 느낌은 아니었다고 할까.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작가적 주관’이 없는 물건들이었다. 쉽게 말해 ‘진짜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살짝 무리가 있었다.
 
  본격 소설의 기준으로 보자면, 《지금부터의 세계》가 세계 최초의 본격 AI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소설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재 세계 AI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과 미국이다. 그런 나라에서도 못 한 걸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일 듯. 왜냐하면 남는 장사가 아니니까. 미국도 중국도 출판은 AI가 활동할 만한 매력적인 시장이 못 된다.
 
  비람풍은 오직 한국 소설에 특화된 AI다. 알파고가 바둑 특기생이었다면, 비람풍은 소설 특기생이다. 전 과목 장학생은 아니다. IT 기업이나 연구기관에서 자금·기술·열정을 투입하면 비람풍 같은 또 다른 AI 작가의 출현이 가능하다.”
 
  소설 속 등장하는 지명, 인명은 허구가 아니야
 
그래픽으로 본 AI가 소설을 쓰는 과정. 그래픽=조선DB
  기자의 눈길을 끈 문장은 제자 나우리가 유부남 이무기 교수에게 “공동 프로젝트로 머리를 맞대는 것 외에 신체 부분도 합체하는 게 어떠세요?”라고 유혹하는 장면이다. 육체적 욕망을 드러내는 배설의 순간인데 매우 지적(知的)으로 느껴졌다. 이런 문장을 AI가 썼다고 생각하니 놀라웠다.
 
  〈“경제공동체, 이상공동체에서 영혼공동체까지도 ‘가즈아’가 제 의사이걸랑요. 일체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교수님도 아무 계산을 안 했음 해요. 네에? 매스매티카에서 명령어 실행할 때 [Shift]+[Enter]키를 동시에 누르듯 우리도 이제부터는 매일 1+1 계산과 함께….”〉(69쪽)
 
  또 소설의 장르가 기본적으로 허구지만 소설 속 언급되는 지명이나 인명은 허구가 아니었다. 예컨대 225쪽의 신라호텔 ‘아리아께’, 웨스턴조선 ‘시스조’도 실제 존재하는 일식당이고 지금도 영업 중이다. 또 257쪽의 ‘청자 구룡형 삼족향로’나 ‘아미타삼존도’는 실제 삼성미술관 리움의 소장품이다.
 
  소설에 인용된 영국 앤드루 왕자,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중국인 왕전화(王振華) 등도 허구가 아니었다.
 
  〈노욕이 보통 아니었다. 손자가 다시 질척거리고 있다는 팩트를 확실히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께’에서 만난 것이다. 손자는 할아버지와 달리 웨스턴조선호텔의 ‘스시조’ 스시를 더 선호했다.〉(225쪽)
 
 
  언론 기사도 소설 소재로 나와
 
지난 2017년 3월 美 국립과학재단이 주최한 ‘과학 데이터 시각화 경진대회’에 출품된 〈인간 뇌의 초상화〉. 펜실베이니아대학 그레그 던 교수 등 신경과학자 2명이 그렸다.
  AI가 쓰는 언어의 바탕에는 언론 매체의 기사와 문장, 단어가 포함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54쪽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수백 년 묵은 분재가 ‘인간 뇌의 초상화 이미지’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이런 문장이 나왔다.
 
  〈펜실베이니아대 신경과학자 두 명이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50만 개의 뉴런(신경세포)을 그린 거였다. 똑같았다.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이 주최한 과학 데이터 시각 경진대회 ‘2017 더 비지스(the Vizzies)’에서 우승한 문제의 인간 뇌와 복사판이라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254쪽)
 
  실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았다. 2017년 4월8일자 《조선비즈》에 ‘하나하나의 손으로 그린… 50만 개의 작은 우주’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 부분 인용하면 이렇다.
 
  〈〈우리 뇌의 초상화〉. 화려한 색으로 물들인 사람 뇌의 단면은 사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신경과학자인 그레그 던(Dunn) 교수와 동료 2명이 의기투합해 만들어낸 작품이다. (중략) 이 그림은 지난달 말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이 주최한 과학 데이터 시각화 경진대회인 ‘2017 더 비지스(the Vizzies)’의 일러스트레이션 부문에서 우승했다.〉
 
  AI는 이 기사를 소설 속 문장으로 활용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소설의 전체 흐름과 상관없는 ‘불필요한 정보’ 나열이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러브 스토리 약하고 惡人 없어
 
지난해 5월 일론 머스크 등이 투자한 ‘오픈 AI’가 개발한 말하고 글쓰는 AI인 ‘GPT-3’가 공개되어 충격을 주었다.
  소설 《지금부터의 세계》에는 비극적인 인물, 사회가 요구하는 보편적 가치 질서에 맞서는 ‘문제적 개인’이 보이지 않는다. 등장인물인 이임박, 백지스님(소설에서 ‘짖중’ ‘김거시기’로 불리는)이 문제적 개인이라고 할 수는 있다. 매력적인 인물임이 틀림없으나 사회적이라기보다 폐쇄적 개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흐름의 두 축인 자매(姊妹) 이미지(의사)·이금지(천체물리학자)의 관계도 어정쩡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녀 간 러브신이 약하다는 점도 특징이라면 특징. 그래서 더욱 지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래도 건조하게 느껴진다. 기껏 사랑도 짝사랑(이금지-백지스님)이거나 불륜(이무기-나우리), 혹은 타인을 불행에 빠뜨리는 사랑(이미지-백지스님)이었다.
 
  또 소설에 악인이 없었다. 악인이 없다는 말은 인간 감정을 지배하는 문제적 개인이나, 개인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집단적 사고가 없다는 말과 같다. 어쩌면 AI가 선악 개념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보통의 소설가들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분류에 익숙하다. 어쨌든 《지금부터의 세계》는 선악 개념의 주관성과 가변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크게 6명이다. 자매인 이미지·이금지 이야기가 많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쓰다가 사라진 백지스님과 두 자매의 막내 삼촌인 이임박이 스토리 전체를 끌고 간다. 여기에 AI 전문가 이무기 교수와 나우리, 김 작가가 등장한다.
 
  소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다른 AI소설도 등장해 황금나무, 쑥쑥나무로 자라기를…”
 
인공지능 AI가 인간 소설가를 대신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인간이 AI가 집필한 글을 편집, 수정해 발표하는 시대가 열릴지 모른다.
  대학교수 이무기는 인공지능 기반 수학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데 사촌 동생 이임박이 거액을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33년째 누워만 있던 와상(臥床)환자 이임박은 “저것이다!”를 외친 뒤 간병인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교이자 의사인 이미지는 4대째 의사 집안의 딸이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정신과 교수다.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 내의 천문우주 분야 정부 출연 기관에 근무하는 동생 이금지는 과학고 선배인 백지스님을 찾아갔다가 첫눈에 반한다. 법명이 백지(白紙)인 그는 과학고 시절부터 별난 인간 목록 1호였다. 하버드대학 물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 논문을 쓰던 중 불가(佛家)에 귀의했다. 어느 날 이금지를 비롯해 과학고 후배들이 찾아가자 백지는 A4 용지 뭉치에서 한 장을 꺼내 흔들면서 “이것이 다야, 다!”라고 외친다.
 
  그 모습에 반해 이금지는 백지스님을 날마다 찾아가지만 ‘아이 콘택트’조차 할 수 없다.
 
  대학 내 스타트업 ‘나매쓰’ 부대표를 맡고 있는 이무기 교수는 크리에이터 러닝(창조학습)을 연구하고 있다. 이 회사의 오피스 와이프 역할을 제자 나우리가 맡고 있다. 두 사람은 내연 관계다.
 
  이무기는 AI가 인간처럼 창조적인 학습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꿈이다. 나우리는 학창 시절에 문학소녀였다. 필력이 없어서 작가의 길은 접었지만 AI를 접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자연어 처리를 파고들면서 AI로 소설 쓰기가 가능함을 확신했다.
 
  그렇게 해서 ‘접니다’가 탄생했다. ‘접니다’는 스타트업 나매쓰의 인공지능 기반 소설가의 이름이다. 이무기와 나우리는 AI에게 메이저 출판사 몇 군데에서 펴낸 세계문학전집 작품들과 문사철(文史哲) 관련 동서고금 고전을 학습시켰다.
 

  웹 문서를 스크래핑(데이터 중에서 필요한 데이터만 추출하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하거나 구글 학술검색까지 철저히 챙겼으며, 한국어 워드넷인 KWN(카이스트)과 KorLex(부산대) 등도 참고했다.
 
  그러나 인간 소설가는 변주를 잘하기에 표절 문제가 없지만, ‘접니다’는 아직 날것 그대로 이용하는 수준이라, 인간 소설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공대 출신 소설가 김 작가가 맡았다.
 
  한편 백지스님이 환속했다. 이금지가 이미지 언니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그만 언니와 눈이 맞은 것이다. 이와 함께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을 쉽게 다스리는 AI 의사, AI 의학자의 길을 걷기 위해 법복(法服)을 벗었다.
 
  그리고 나우리의 헌신과 이무기의 열정, 코로나19가 안겨준 격리의 시간이 더해지자 빙산의 일각이던 ‘접니다’의 거대한 몸집이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AI 소설의 탄생’을 기다리는 김태연 작가의 바람이 실려 있다.
 
  〈만난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다.
 
  이로써 지구촌 한쪽 구석에 AI 소설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접붙인 나무를…. 온전한 AI 소설나무도 뒤이어 나오기를 고대한다. 수종이 다른 AI 나무들도 많이 심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완전 다른 계산이 똑같은 답을 주는 사례가 수학세계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처럼 결이 다른 AI 소설들도 속속 등장하여 황금나무, 쑥쑥나무로 자라기를…. 그리하여 멋진 AI 소설숲이 조성되기를…. 거기서 만인이 문학적 힐링을 얻었으면 여한이 없겠다.〉(519쪽)

 
 
  소설감독 김태연이 AI 소설에 答하다
 
중견작가 김태연씨. 《지금부터의 세계》를 감독했다.
  기자는 AI 소설을 감독한 김태연씨를 만났다. 연세대에서 신소재공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4학년인 1987년 월간 《문학정신》으로 등단했다.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오랜 벗이다.
 
  “저의 역할요? ‘비람풍’이 차린 밥상에 수저만 얹었어요. 다시 말해 방점, 혹은 화룡점정의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림을 그릴 때 화가의 지시대로 조수가 다 그려도 화가가 서명을 해야 비로소 작품이 완성되는 이치처럼.
 
  《지금부터의 세계》를 완성하는 데 누가(인간과 AI 중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느냐는 두부모 자르듯 정확히 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구태여 근사치 답을 하라면 공동작업에 가까우니까 반반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습니다.”
 
  ― AI 문장이 인간과 다른, 독창적 문장이라고 볼 수 있나요.
 
  “현재로선, 적어도 《지금부터의 세계》 기준으로 보면 인간이 쓴 문장의 변주로 봐도 무방합니다. ‘소설감독’ 눈에 들 때까지 수정 작업을 반복했으니까요.”
 
  ― 앞으로 달라질까요.
 
  “물론입니다. AI에 학습시킨 정보, 파라미터(매개변수) 개수가 늘어나면 저작권 문제를 심각하게 재고해야 합니다. 세레브라스(세계 최대 AI 전용 칩 개발업체)가 벌써 120조 개 신경망 파라미터 세상을 열었거든요. 인간 뇌 속 100조 개의 시냅스(인간 두뇌에서 뉴런 간 정보전달 통로)보다 많으니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저도 상상이 안 됩니다.
 
  그 유명한 GPT- 3(초대규모 자연어 처리 인공지능 모델)가 1750억 개 파라미터 개수였으니까요. 결론을 말하자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우리나라 현행법상 인간에 한하여 지적 재산권을 보장하는데요, 분명 바뀔 것이라고 봅니다.”
 
 
  AI 소설 프로그램 실체 공개 못 해
 
  ― 이 장편소설을 쓴 AI 프로그램은 기존 GPT- 3 기술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머신러닝이 아니라 딥러닝(Deep Learning·스스로 학습하는 컴퓨터를 딥러닝이라 부른다. 딥러닝은 컴퓨터가 사람처럼 생각하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을 뜻한다)을 기반하고 있지요.
 
  “소설 속에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딥러닝 자체가 직접 프로그램을 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짜는 게 아니라는 것, 그게 진정한 혁명이라고 강조하고 있어요. 딥러닝=신경망이거든요.
 
  그러나 《지금부터의 세계》를 탄생시킨 AI 프로그램 실체를 아직 공개할 수는 없어요. 소설 속 ‘이무기 교수’도, 스타트업 ‘나매쓰’도 실존 인물이고 실제 벤처입니다.
 
  대외에 공표하지 않은 것은 ‘전략적 모호성’보다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보다 더 큰 것(?)을 준비하고 있어서 이 소설로 소비(?)되는 걸 원치 않아서….”
 
  책에는 AI 소설 스타트업 ‘다품다’, 자연어 처리(NLP) 스타트업 ‘나매쓰’와의 협력을 통해 장편소설을 낳았다고 쓰여 있다. 다품다가 소설에만 특화된 스타트업이라면, 나매쓰는 수학과 소설 이외 다른 분야에도 두루 적용이 가능한 이른바 ‘복합 AI’란다.
 
  “다품다가 개발한 벡터공간 모형(이질적 텍스트와 다양한 어휘를 가진 거대한 정보 데이터 베이스로부터 검색된 텍스트를 다루기 위해 개발된 모형)을 한 차원 더 진화시키기 위해 나매쓰와 협업하는 과정이 꽤 힘들었지요.
 
  머신러닝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최대 엔트로피 모델’을 개선시키는 작업 역시…. 좌우간 비람풍이 소설감독 지시만 따르는, 로봇 같은 AI 소설가가 아니라 제대로 된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던 여러 고비 중 하나였답니다.
 
  GPT- 3를 비롯한 대규모 언어처리 모델 모두 인간을 흉내 내는(가짜 뉴스, 딥페이크 등에 이용되는 게 그 예) 게 아니라 진짜로 사람 언어를 이해시키는 게 크나큰 숙제였거든요. 이러저러한 과정을 통해 핵심기술을 조금 확보했기에 《지금부터의 세계》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AI의 학습 메커니즘은…
 
  ― 두 스타트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협력했는지 쉽게 설명해주세요.
 
  “협업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싶지만, 대외적으로 숨겨야 하는 내용이 있어서 이 정도로…. 아시겠지만 AI 업계 생태계 철칙 중 하나가 비밀주의거든요. 이것이 안 지켜지면 몇 년 고생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됩니다.
 
  애플 같은 큰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업무를 친구나 심지어 배우자에게도 공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는 것으로 압니다.”
 
  ― 소설을 쓰기 위해 AI가 사전에 학습한 자료들은 어떤 것인가요.
 
  “단행본 기준으로 1000권쯤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 이외에도 네이버 등에 올라온 온갖 자료까지 다 합치면 솔직히 기계적으로 계량하기가 좀….
 
  그러나 AI가 너무 열심히 학습해서 ‘감독’ 재량으로 중간중간 통편집한 부분도 있어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서술하거나 맥락 없는 전개가 이뤄지는 등의 이유였어요. AI 소설가에 적용시킨 여러 학습이 아직은 완전체에 못 이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비람풍의 장점이 극대화된 경우도 있어요. ‘감독’이 미처 못 찾아낸 디테일한 자료까지 수색해서 활용하는 특기를 발휘했으니까요. ‘감독’으로 보람을 느낀, 감격했다는 사실을 부기합니다!”
 
  ― 소설 속 대화 중에 ‘이건 미?’ ‘넹’ 같은 인터넷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표현들을 가능하게 만든 AI의 학습 메커니즘이 궁금합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잡다한 자료를 학습시켰기 때문입니다. 10대와 20대가 많이 드나드는 사이트, 유튜브, 블로그 등을…. 그래도 일부 부적절하거나 어색한 표현은 출판사 관계자들과 상의 끝에 수정하기도 했어요. 사실 저도 어느덧 이제 60대에 접어들어 이 같은 표현이 아주 낯설거든요. 제가 작문하려고 해도 비람풍 능력에 비하면, 솔직히 말해 달린답니다.”
 
  《지금부터의 세계》를 읽다 보면 수학과 관련된 용어나, 현상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표현들이 자주 나온다. 그러고 보니 김태연 작가는 수학소설 《이것이다》 《이로써 영원히 계속되리》를 썼을 만큼 수학에 정통하다. 세계수학교육자대회(ICME- 12) 융합학문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일도 있다.
 
  소설에서 이런, 접근 수학적 상상력이라고 불러도 좋지만 상상력에 동원된 수학 이론들이 정교한 현실이론에 비유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다만 이런 시도가 낯설기도 하다. 너무 전문적이어서 독자가 소화하기 어렵다.
 
 
  AI가 왜 수학인지, 수학이 왜 AI인지
 
  다음은 소설 222쪽에 나오는 이무기의 수첩에 적힌 ‘수학 단상’이다. 일부만 인용하면 이렇다.
 
  〈내가 부분공간(subspace)이란 용어를 처음 접한 건 행렬과 행렬대수를 공부할 때였다. 나만의 완벽한 공간이란 추상적 공간에 막연히 빠져 있을 때 수학에서 그걸 발견해서 더 각별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더 빠져들었으리라. 행공간, 열공간, 영공간이란 이름의 세 부분공간, 차원과 관계된 부분공간, 벡터공간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간에 대책 없이 무한정 광적으로 빠져든 것은.
 
  그 과정에서 얻은 보너스 하나. 행렬의 대각화 문제, 상삼각행렬(upper triangular natrix)과 하삼각행렬의 모양, n차 정사각행렬, 9×9 행렬 등에서의 대각화 문제를 고민하면서 실로 많은 득템을 했다. 수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여기에도 숨어 있을 줄이야.〉

 
  그는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소설에서 다루는 모든 문학적 표현이 가능하며, 소설 자체를 생산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 이 소설이 갖는 소설 미학의 한계에 대해 한 말씀 해주세요. 독자가 이 소설을 택할 만한 매력이 얼마나 있을까요.
 
  “첫 시도라서, 첫 데뷔작은 대개 자기 경험을 못 벗어나듯, 《지금부터의 세계》 역시 그러한 관성을…. 소설 소재로 수학과 AI 이야기 그 자체를 한 것만으로도….
 
  그러나 수학적 사유 내지 수학적 상상력이 한국 소설뿐 아니라 세계 수학에서도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이 없기에 그 매력을 한번 제대로….
 
  물론 비람풍이 아니라 소설감독 역량 문제로 인해 여러 한계를 드러낸 듯하지만 그래도 믿는 게 하나 있습니다. AI가 왜 수학인지, 수학이 왜 AI인지를 강조하였다는 점이죠. 이 시대 대세가 AI이니만큼!
 
  AI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주교재는 아닐지라도 부교재는 됐으면 하는 게 소설감독의 희망사항입니다.”
 
 
  “1800매에 달하는 이 원고를 AI가 썼다니…”
 
《지금부터의 세계》를 펴낸 출판사 파람북 정해종 대표.
  기자는 장편 《지금부터의 세계》를 출간한 파람북 정해종 대표와 만났다.
 
  그는 AI 소설 원고를 처음 받고 “의심과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한다. “의심이 없으면 텍스트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고, 호기심이 없으면 텍스트가 제공하는 상상력 혹은 지적 여행에 동반할 수 없다. 소설 원고를 앞에 놓고 의심과 호기심이란 두 더듬이가 분주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800매에 달하는 이 원고를 AI가 썼다니…. 썼다기보다는 결과물을 내놓은 것이겠지만, 어쨌든 원고의 ‘양과 질’ 모두 믿기지 않았습니다. 양보다 놀라운 것은 ‘질’이었어요.
 
  일부 기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잠깐 고민해보았으나, AI 소설임을 고려해 대부분 그대로 노출하기로 했어요.”
 
  출판하기까지 편집에 두 달이 소요되었고, 원고량이 상당하다는 것 말고는 편집 과정에서 특별한 애로사항은 없었다고 한다.
 
  특히 “AI 소설가 비람풍의 문장이 뛰어났다. 감정 표현의 디테일이 살아 있고 지식을 끌어오는 재주는 인간 소설가가 따라가기 힘든 수준”이라고 정 대표는 판단했다. ‘이게 가능한 걸까’ 하는 의구심이 한 달 넘게 이어졌다.
 
  “이 원고가 AI의 결과물이 아니라면 이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했죠. 만약 이게 거짓이라면, 작가(소설감독)는 어쩌자고 자신의 인생이 걸린 ‘위험한 도박’을 기획했을까요? 도박은 어떤 구체적이고 실리적인 목적을 전제할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목적의 크기는 그 위험성의 크기에 비례하죠.”
 
  정 대표는 ‘AI와 관련해 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모두를 속일 수는 없다, 잠깐 속일 수는 있어도 오래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소설감독은 30년 넘게 소설가로 활동해온 중견작가다. 그는 이 바닥의 구조와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책을 쓰는 사람도 책을 만들어 파는 사람도 ‘돈’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한 방 크게 터뜨려 팔자를 고쳤다는 사람도 있지만, 출판은 터뜨린다고 터지지 않아요. 한 권의 책으로 팔자를 고쳤다면, 그건 그 사람 팔자가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지요.”
 
 
  AI 소설과 인간 소설의 차이는…
 
  정 대표는 소설 원고를 살펴보고 AI 소설의 기계적인 패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조어 과잉과 불필요한 정보 노출, 전문지식(별도의 감수가 요구될 정도의)의 활용 등이 인간 소설과 차이가 났다”고 했다.
 
  “소설에 쓰인 문장 중에 ‘뇌피셜이 난무하다’ ‘레전드계의 끝판왕’ ‘엄지척’ 같은 신조어들이 대화와 지문에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맥락에 무리가 없고 경쾌하게 읽히며, 작품 전반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합니다.
 
  그러나 등장인물 대부분이 이를 자연스럽게 (심지어 스님까지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아요. 작품에 현대성을 부여하기 위해 AI가 ‘일괄학습’한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죠. 캐릭터 설정에서 항목을 좀 더 세분화해서 주문했더라면 빈도는 줄고 캐릭터는 좀 더 선명해졌을 것입니다.”
 
  또 불필요한 정보를 노출하는 문장이 눈에 거슬렸다고 한다. 예컨대 대화 중에 “강남 래미안대치팰리스 33평형을 잡히면 상당액 대출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매매가가 30억원이나 하니까”라는 문장이 나온다.
 
  “아파트 명칭과 평수, 매매가를 직설적으로 밝히는 것은 일반적인 소설 문법과는 차이가 있어요. AI가 인터넷상의 부동산 정보와 제품 정보를 끌어온 사례로 보입니다.”
 
  ― 앞으로 또 다른 버전의 AI 소설이 등장하겠지요.
 
  “AI가 도깨비 방망이는 아닙니다. ‘소설 나와라 뚝딱!’ 한다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니죠. 그러나 ‘데이터와 규칙’만 있으면 어떤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데이터 양이 많을수록, 규칙이 정교할수록, 그리고 그것을 처리하는 AI의 성능이 우수할수록 결과물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이거 정말 실화임?’ 하고 물을 수밖에 없는 일들은 앞으로도 이어질 겁니다.”
 
  ― 이 소설의 수준에 대해 말한다면.
 
  “한마디로 놀라울 정도라고 봅니다. 주제, 문체, 구성 등 흠잡을 곳이 많지 않아요. 지적 정보를 다루는 측면에선 일반 작가가 따라잡기 힘든 수준이죠.”
 
  ― 앞으로 인간의 소설 쓰기는 어떻게 될까요.
 
  “제가 비평가나 인공지능 전문가가 아니라 단지 출판사 편집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이 소설은 인공지능을 창작의 도구로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 앞으로 작가의 역할에 일대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라는 데 의미가 있어요.
 
  소설감독이 주장하는 것처럼, 앞으로 취재하고 자료를 찾고 책상에 붙들려 소설을 완성해내는 과정에 혁신적인 변화가 올 것입니다. 범용 AI 창작 알고리즘을 이용하면 ‘소설-쓰기’의 방식이 ‘소설-연출’의 방식으로 전환해가지 않을까요?”
 
 
  소설가 이인화가 보는 《지금부터의 세계》
 
소설가 이인화 작가. 영화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저작도구인 ‘스토리헬퍼’를 개발해 화제를 모았다.
  기자는 소설가 이인화씨에게 《지금부터의 세계》를 읽은 느낌을 물어보았다. 밀리언셀러 작가인 그는 《영원한 제국》 《초원의 향기》 《인간의 길》 《시인의 별》 《지옥설계도》 등 다양한 장편소설을 썼고, 올해 초 SF 대체 역사물 《2061년》을 발표했다. 이화여대 교수 시절, 영화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저작 도구인 ‘스토리헬퍼’를 개발한 일도 있다. 스토리헬퍼는 ‘글쓰기 비서’처럼 다양한 사례를 보여주며 스토리를 추천하는 프로그램이다. 일종의 AI 프로그램이다.
 
  ― 인간과 AI 간 협업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인간과 AI의 협업은 우리 사회가 만나게 될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인간 노동 전반이 이러한 협업으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미 한국에서도 1200여 개 기업이 면접 업무의 상당 부분을 인공지능에 위임하는 ‘AI 역량 검사’를 시행하고 있어요.
 
  인공지능이 지원자의 기본적인 자기 소개를 듣고 성향과 적성을 파악한 뒤 소통 역량과 성과 역량을 측정하죠. 인간 인사 담당자는 그 과정을 감독하고 문제가 되는 경우를 검토하여 최종 결정을 할 뿐입니다.”
 
  이인화 작가는 “이를 ‘노동의 모듈화’라고 부를 수 있는데, 부품보다는 크고 제품보다는 작은, 여러 개 부품을 부위나 기능별로 묶은 집합체를 모듈(Module)이라 한다”고 했다. 컴퓨터 프로그램 하나가 제품이라면 프로그램의 각 파일이 모듈이다. 모듈은 부분을 이루는 객체지만 그 자체로 독립성을 잃지 않고 더 큰 객체에 조합된다.
 
  “AI 시대의 창작 노동자는 자신의 업무를 모듈별로 분할한 뒤 가장 반복적이고 정형적이며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모듈을 AI에게 맡깁니다. 인간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일하며 인공지능의 처리를 감독하죠.”
 
 
  AI 소설이 넘어야 할 소설미학
 
  ― AI가 소설을 쓰고 인간이 감독하는 소설 작법(作法)이 불가피하다는 얘기군요.
 
  “인공지능은 이미 ‘테일스핀’이라는 1970년대 프로그램부터 꾸준히 소설을 써오고 있었어요. 다만 재미와 감동이 없었을 뿐이죠. 기술적 한계도 보여왔어요. 최신 인공지능이라는 GPT-3조차 1500개 단어가 넘어가는 분량에 이르면 난조를 보이면서 논리가 파괴되었거든요. 그 파탄 부분을 인간이 보완해서 장편소설로 엮는 것 자체는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시점이 되었어요. 문제는 얼마나 좋은 작품을 썼느냐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 소설 《지금부터의 세계》를 읽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소설 스토리가 ‘사건과 사건’의 관계가 아닌 ‘관념과 관념’의 관계로 짜인 느낌을 받았어요. 사건을 묘사해도 ‘누구를 만났다’는 식으로, ‘누구에게 연정을 느꼈다’는 식으로 최소한으로 씁니다. 나머지를 관념으로 처리하니까 소설이 재미없어지죠.”
 
  ― 오밀조밀한 대화의 맛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읽는 재미가 없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쩌면 아직까지 읽을 수 없는 소설인지도 몰라요. 사실 AI가 쓴 대부분의 소설이 이렇습니다.
 
  물론 《지금…》이 상당히 세련된 AI 시제품인 것은 맞고, 만약 이 장편을 AI가 썼다면 GPT-3 수준보다 높다고 볼 수 있어요.”
 
  ― GPT-3보다 세련되다?
 
  “네, 지금까지 구현된 기술로는 GPT-3가 이렇게 길게 못 쓰거든요. 어쨌든 인간 소설감독의 조력을 받았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사실인데, 재미가 없고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것….
 
  사실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모호한 말인데, 제 소설도 가독성이 떨어지거든요. 가독성 문제는 인간과 AI의 협업으로도 아직 해답이 나오지 않았어요.”
 
  “독자들을 감동시킬 만한 ‘브레이크드루(breakthrough·돌파구)’가 없어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이 “SF소설의 대가인 그레그 이건(Greg Egan)의 《쿼런틴(Quarantine)》과 소설 얼개가 비슷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이 소설이 SF소설의 전형적인 상황설정과 등장인물,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는데, 이 수준만큼 AI가 따라왔다는 것이 놀라워요.
 
  다만, 작은 문제이긴 한데요, 소설과 독자가 아주 미세한 소통을 합니다. 이걸 마이크로인터랙션(microinter action·미세조정)이라 부르는데 그레그 이건의 소설은 굉장히 유머러스하거든요. 문장 속 단어 하나하나가 대개 사람을 굉장히 웃기고 별것 아닌 선택 같은데도 대개 웃게 만들거든요. 인공지능이 쓴 비슷한 이야기는 그런 미세조정이 없어요.”
 
 
  AI 소설의 미래
 
  ― 미세조정이 없다….
 
  “마이크로인터랙션은 원래 디자인 용어입니다. 독자(사용자)의 피드백을 예상하면서 아주 미세하게 뭔가의 디테일을 조정하는 식이죠. 마이크로인터랙션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스토리나 사건의 입체화가 빈약하다는 뜻과 같아요. 그 점에서 소설감독(김태연)의 고뇌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요.”
 
  ― AI 소설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당분간의 미래만 생각하면 AI 소설이 문학성도 대중성도 인간이 쓴 소설을 능가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딥러닝이 아닌 완전히 다른 알고리즘이 개발된다면 또 모르겠어요. 다만 소설이나 이야기 창작이 하나의 수단이 되는 영역에서는 비록 수준이 떨어지지만 양적으로는 많이 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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