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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같이 살기로 작심한 유럽 종횡무진 45일간 여행기!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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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데믹으로 우울 증세라고요? 의사가 처방한 약은 이탈리아랍니다”
⊙ 한국, 네덜란드가 입국 제한하지 않는 33개국에 포함
⊙ “지하철역·거리 이름만 알아도 프랑스 역사 이해… 이 나라 사람들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도 예술적”(파리에서 만난 한국인 우버 운전사)
⊙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통치했던 카를 5세의 숨결
⊙ 장대하고 화려한 브뤼셀, 질박하고 실용적인 암스테르담
⊙ 네덜란드 해양박물관에서 李承晩을 생각하다
암스테르담의 왕궁 앞 광장.
  나는 지난 7월 18일 출국해,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작은딸 집을 캠프로 삼아 유럽 여기저기를 45일간 돌아다니다가 9월 2일 핀에어 A350-900을 타고 오전 7시30분 인천공항에 내렸다. 출발 48시간 전 브뤼셀 병원에서 받은 코로나19 검사 음성확인서(PCR)를 쥐었고, 벨기에로 출국하기 전에 화이자 2차 접종을 끝낸 뒤 동사무소에서 발급받은 영문 예방접종증명서(Certificate of Immunization, 질병관리청장 발행)를 갖고 있어 무사 통과될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공항에서 입국 심사 전에 ‘국내예방접종완료자 대상 수동감시’ 통보를 받았다. 공항직원이 휴대전화에 수동감시 앱을 깔아주곤 오늘 중으로 구청 보건소에 가서 PCR 검사를 받고 집에서 격리상태로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음성판정이 나면 그때 앱을 삭제하고 자율적으로 활동하다가 입국일로부터 6~7일 차에 한 번 더 검사받아야 하고(안 받으면 자가격리로 전환), 입국일로부터 14일이 지나야 수동감시 해제를 한다는 지침을 받았다.
 
  나는 바로 보건소에 가서 검사했고, 그다음 날 오전 음성판정을 통보받았다. 벨기에에서 유럽연합(EU) 소속인 네덜란드·프랑스·독일·룩셈부르크·스위스로 여행을 다녔지만 입국 검문을 받은 적이 없던 게 습관이 되어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코로나19가 휩쓸고 있는 유럽 나라들을 여행했다고 친구들은 나를 무슨 대항해 시절의 모험가처럼 부러워하기도 한다. 8개월 전에 떠난 외손자와 외손녀에 이끌려 모험적 여행을 한 셈인데, ‘희귀체험’이 되었으므로 여행기 겸 안내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접종증명서·음성증명서 여권에 넣고 다녀야
 
  한국에서 브뤼셀로 가는 직항로는 없다. 나는 헬싱키를 경유하는 핀에어(Finnair)를 예약했다. 인천에서 헬싱키까지 비행시간이 8시간30분, 여기서 약 2시간 쉰 다음 브뤼셀로 비행하는 데 2시간30분이 걸린다. 총 비행시간은 파리나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것과 비슷하지만 잘라서 가면 경유지 구경도 하고 덜 지루하다.
 

  출국 며칠 전, 항공사에서 휴대전화로 벨기에 연방정부에 제출하는 입국서류 양식(Public Health Passenger Locator Form)을 보내주었다. 인터넷으로 작성해서 송신하면 되는데 백신접종증명서(Vaccination certificate)와 음성증명서(Negative test certificate)를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주어야 한다.
 
  나는 출국 12일 전 동사무소에 가서 질병관리청장 명의의 영문 예방접종증명서를 석 장 발급받았다(유럽에 가서 다른 나라 여행할 경우를 대비해). 출국 3일 전에는 강북삼성병원에서 검사하고, 다음 날 영문 음성확인서를 발급받았다. 이 두 장의 서류는 여권에 늘 끼워넣고 다녀야 한다. 7월 18일 한산한 인천공항에서 있은 출국심사는 45일 뒤의 입국심사에 비교하면 간단했다.
 
 
  한 번도 ‘시트 벨트를 매라’는 표시가 나오지 않았다
 
  오전 10시20분에 이륙한 핀에어 A350-900은 어림짐작으로 60% 정도의 좌석 점유율을 보였다(귀국 편은 20% 정도). 비행기는 중국-몽골-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 북쪽을 지나 헬싱키까지 날아갔다. 비행시간 동안 ‘좌석벨트를 매라’는 표시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귀국 편도 그랬다). 더 놀라운 사실은 비행고도가 점점 상승하더니 4만 피트를 넘긴 점이었다. 보통 여객기의 순항고도가 3만 피트 정도인데…. 승무원에게 물었더니 기장이 난기류를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면서 비행기 동체가 탄소섬유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에어버스가 주력 기종으로 2013년부터 팔고 있는 A350-900은 대당 가격이 3억1120만 달러다. 약 3500억원, 큰 공장 값이다. 취항한 세계 여객기 중 항속거리(최장 1만8000km), 체공시간(최장 20시간)이 가장 길다. 길이 67m, 날개폭 65m에 최대이륙무게가 280t이고 325명까지 태운다. 비행기는 뜰 때 가장 무겁다. 이륙 직후 사고가 생겨 다시 착륙하려면 기름을 버려 착륙가능무게(A350의 경우 207t)까지 줄여야 한다.
 
  에어버스는 A350을 915대 주문받아 438대를 인도했다. 판매가격 누계가 1200억 달러를 넘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비행기의 장점은 고도를 4만3100피트까지 올릴 수 있어 난기류를 피한다는 점이다. 구름은 3만6000피트 이상에선 형성되지 않아 비행기가 흔들릴 가능성이 줄어든다. 4만 피트 이상까지 올라가도 기체 내의 기압은 5000~6000피트의 상태로 쾌적하게 유지할 수 있다. 핀에어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오래된 항공사 중 하나이다.
 
  전투기는 보통 5만 피트까지 올라간다. 지금은 퇴역한 콩코드는 순항고도 6만 피트에서 음속의 두 배로 비행했었다. ‘검은 새’로 불렸던 스파이 비행기 SR71은 9만 피트에서 음속 세 배로 날았다. 북한 지역 상공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기도 했다. 고도를 높이면 대체로 기름도 적게 든다.
 
 
  입국심사 시 체온 측정 없어
 
브뤼셀에 있는 EU 집행부 건물.
  헬싱키 공항은 유럽의 대표적인 허브공항 중 하나인데 7월 18일은 떠나온 인천공항처럼 한산했다. 문을 닫은 상점이 많았다. EU로 들어가는 첫 공항이므로 여기서 입국심사를 받았다. 체온 측정도 없이 음성확인서, 접종증명서, 여권을 확인하고 입국 허가를 해주었다. 두 시간 반을 더 날아 브뤼셀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입국심사할 필요가 없어 바로 짐을 찾아 나왔다. 브뤼셀 공항은 인천, 헬싱키와는 딴판으로 북적댔다. 이 공항은 짐을 찾는 곳이 별도 건물에 있어 많이 걸어야 한다.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를 베네룩스라고 약칭(略稱)하는데, 영어권에선 ‘저지대 국가(Low countries)’라고 불렀다. 이 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은 벨기에 남쪽 아르덴 지방에 있는데 해발 694m이다. 산 같은 산은 없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인지 세 나라 출신 유명 등반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브뤼셀엔 EU 집행부와 나토(NATO) 사령부가 있어 EU의 사실상 수도 역할을 한다. 16세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다스렸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 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가 브뤼셀에 왕궁을 정하고 사실상 수도로 삼은 적이 있다. 브뤼셀은 숲의 도시이다. 울창한 숲길과 공원이 도심 이곳저곳에 있다. 벨기에 북부는 플랑드르 지역으로 네덜란드어권, 남부는 프랑스어권인데 여기에 유명한 아르덴 숲 지대가 펼쳐져 있다.
 
  1940년 프랑스군은 이곳이 유럽에서 가장 좋은 탱크 방어선이라고 오판해 약한 군대를 배치했다. 나치 독일군은 1800대에 이르는 전차군단으로 아르덴 숲 지대를 50여 시간 만에 돌파해서 프랑스의 스당을 기습, 뫼즈강을 건너 영불(英佛)연합군의 배후를 차단·포위·섬멸해 6주 만에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 독일군 장병은 필로폰을 먹고 흥분상태에서 잠도 안 자고 야수처럼 싸웠다.
 
 
  벨기에, 신규 확진자 수 매일 발표 안 해
 
  벨기에는 인구(약 1100만명)의 약 10%가 코로나19 확진자이고 2만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인구비율로는 한국 사망률의 50배이다. 백신접종 완료율은 한국의 세 배가 넘는 71%. 이걸 믿고 코로나19와 같이 살아가기로 결심한 나라이다. 상점과 음식점의 영업은 인원제한 없이 자유롭다. 실외에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다. 우버 택시를 탔다 마스크를 벗어도 좋다고 과잉 친절을 베푸는 운전사도 만났다. 학교, 버스 정류장, 기차역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한다. 미술관, 왕궁, 성당 등도 열려 관람객을 받는다. 정부는 신규 확진자 수(하루 수만명을 기록하기도)를 매일 발표하지 않는 것 같았으며, 국민의 관심도 별로였다.
 
  나는 브뤼셀을 근거지로 삼아 벨기에의 겐트·앤트워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프랑스의 파리·스당·샤를빌-메지에르·스트라스부르, 룩셈부르크, 스위스의 루체른·융프라우 지역을 여행했다. 보통 때 같으면 여행객으로 붐빌 터인데 한산했다. 특히 파리가 그랬다. 번화가의 상점이 문을 닫고 콩코드 광장과 앵발리드 앞 정원이 텅 비어 있는 장면은 초현실적이기도 했다. 편하게 다닐 수 있어 좋기는 했다.
 
  브뤼셀 공항의 전광판 광고엔 이런 문장이 있었다.
 
  “팬데믹으로 우울증세라고요? 의사가 처방한 약은 이탈리아랍니다.”
 
  그래도 스위스가 마스크 착용률이 가장 높았고 네덜란드가 가장 낮았다(거의 全無).
 
 
  국민의 10%가 확진자인 네덜란드의 여유
 
암스테르담의 왕궁 앞 광장에서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는 시위대도 코로나19 방제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네덜란드 정부의 입국 안내 홈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코로나19 전염 상태가 네덜란드와 비슷하거나 낮은 나라 사람들은 음성확인서와 백신접종증명서가 있으면 입국할 수 있습니다. 상점, 식당, 위락시설, 문화시설 등 거의 모든 장소는 개방되어 있습니다. 공공교통 수단, 기차역, 버스 정류장, 공항, 비행기 안에선 마스크를 써야 합니다. 네덜란드로 오세요. 평화롭게 휴식하고 아름다운 해변과 자연 속에서 여름 햇살을 즐기고, 도시에선 역동적 예술과 문화의 영감을 맛보세요.〉
 
  홈페이지엔 EU 및 솅겐조약 국가가 아니지만 아래 33개국은 코로나19 대응을 잘하므로 입국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 일본, 우크라이나, 싱가포르, 뉴질랜드, 호주, 이스라엘, 대만, 홍콩, 마카오, 세르비아, 레바논,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캐나다 등이다.
 
  인구 약 1800만명인 네덜란드는 국민의 약 10%가 확진자였고, 사망자는 약 1만8000명으로 인구 대비 한국의 스무 배가 넘는데도 그렇게 여유로웠다.
 
  네덜란드에선 마스크 쓴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호텔과 식당의 종업원 정도였다. 저녁에 들른 음식점은 손님으로 바글바글했는데 한 식탁에선 10여명이 마스크 없이 붙어 앉아 떠들어댔다. 해양박물관, 고흐미술관도 붐볐지만 마스크 착용 여부나 발열 검사를 하지 않았다. 안락사, 매춘, 마리화나까지 합법화하는 등 개인의 자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나라다웠다. 코로나19도 건강 문제이므로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율과 책임하에 행동해야 한다는 자세로 느껴졌다. 마스크를 쓰면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워털루와 아르덴
 
  나는 고속열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로 가서 신용석(愼鏞碩) 《조선일보》 전 주불(駐佛)특파원과 만나 3일간 돌아다녔다. 브뤼셀~파리(北驛)는 1시간20분 정도 걸린다. 서울~대전 거리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전원(田園), 목장, 들판이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격전장들을 지나갔다. 브뤼셀에서 파리 방향의 이 평지는 두 차례 독일군의 프랑스군을 치기 위한 진격통로로 이용되었다. 공격군을 막을 큰 강도 산도 없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참호를 파서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 기관총, 대포, 독가스, 나중엔 탱크로 서로를 도륙했다.
 
  벨기에는 세계사적인 격전장(激戰場)으로 유명하다. 1815년 6월, 나폴레옹의 종말을 가져온 워털루 전투의 그 워털루도 브뤼셀 근교에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의 이에페르(Ypres)를 둘러싼 공방전이 세 차례 있었다. 두 번째인 1915년 4월 독일군은 처음으로 독가스를 사용했다. 세 번째 전투는 1917년 6월부터 11월까지였다. 연합군과 독일군 쌍방이 약 50만명의 전사상자(戰死傷者)를 냈다. 그 대가로 연합군이 얻은 땅은 불과 수km였다.
 
  독일 기갑군단이 아르덴 숲을 지나 프랑스군을 기습한 전투는 세계전사상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우회(迂廻) 전술로 꼽힌다. 그 4년 뒤 히틀러는 같은 장소에서 또 도박을 한다. 1944년 12월, 히틀러는 40만 병력으로 아르덴에서 연합군을 기습했으나 실패해, 그로부터 5개월 뒤 자살한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나오는 바스토뉴 전투가 이때인데, 전쟁기념관이 근사하다. 당시 포위된 제101 공수사단장(대리) 앤서니 맥컬리프 장군은 항복을 권하는 독일군 사령관에게 ‘Nuts(엿먹어라)’라고 답신해, 전설이 되었다.
 
 
  히틀러가 나폴레옹을 내려다본 곳에서
 
  파리는 다 좋은데 소매치기가 많고 택시가 문제다. 파리 북역에 내릴 때부터 긴장 상태로 들어간다. 승객들의 앞을 경찰이 막고 예방접종증명서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발급한 증명서엔 바코드가 없어 서류의 영문(英文)을 보여주면서 설명하니 통과시켜주었다. 네덜란드와 달리 프랑스에선 앵발리드(군사박물관), 팡테옹 등에 들어갈 때 접종증명서를 보여야 했다. 15일 뒤 스당에 갔을 때는 식당에서도 검사를 했다.
 
  올해는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죽은 지 200주년이 되는데, 나는 브뤼셀 근교의 워털루를 다녀온 연장선상에서 그의 유해가 안치된 앵발리드를 찾았다. 200주년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죽은 지 19년이 지난 1840년 파리로 돌아왔고, 그 21년 뒤 앵발리드의 돔 교회에 안치되었다. 인물의 크기에 맞는 장엄한 석관과 회랑을 돌면서 히틀러를 생각했다.
 

  미술가를 꿈꾸던 그는 빈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면서 미술대학에 두 번 입학시험을 쳤으나 낙방한다. 그때 합격시켜주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나 유대인 학살은 필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히틀러의 개인적 야망과 편견에서 비롯된 면이 훨씬 크다. 아르덴 돌파전으로 세계 최강으로 평가받던 프랑스군의 항복을 6주 만에 받아낸 직후, 1940년 6월 28일 새벽에 그는 알베르트 슈페르(건축가, 뒤에 군수장관) 등 건축 전문가들을 데리고 비행기로 파리 근교에 도착해서 3시간 파리 관광을 하고 돌아갔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 내부를 구경하면서 히틀러는 늙은 안내인에게 “여기 있던 살롱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놀란 안내인은 “몇 년 전 개조를 하면서 없앴다”고 했다. 떠날 때 히틀러는 부하를 시켜 50마르크를 팁으로 주려고 했는데 안내인은 두 차례 거절했다. 만약 이때 이 돈을 받았더라면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히틀러는 앵발리드에 와서는 나폴레옹의 석관을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히틀러가 존경한 세 사람
 
파리 팡테옹.
  히틀러가 존경한 인물이 셋이라고 한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2세),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무찌른 직후인 1806년 10월 26일 포츠담의 프리드리히 대왕 무덤을 참배하는데, 관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히틀러는 나폴레옹 석관을 바라보더니 “아들 무덤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아 루이즈와 재혼해 태어난 아기는 나폴레옹에 의해 아기 때 로마왕으로 임명되었다.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진 나폴레옹은 퇴위하면서 아들을 나폴레옹 2세로 임명했으나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 이를 무효화해버렸다. 오스트리아 궁전으로 돌아간 아들은 장교가 되었지만 20대에 요절, 빈에 묻혔다. 히틀러는 그의 유해를 앵발리드로 옮겨 아버지 곁에 묻어주라고 명령했다.
 
  히틀러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잘하는 식으로 에펠탑, 팡테옹, 개선문, 몽마르트르 언덕을 번개처럼 구경하고는 돌아갔다. 슈페르는 히틀러가 팡테옹의 장엄함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자신의 회고록 《제3제국의 내막》에 썼다. 난생처음의 파리 구경에 히틀러는 감격해,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다”고 털어놓더라고 했다. 독재자의 의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슈페르는 연민의 정을 느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한때 파리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베를린을 근사하게 지을 구상을 한 적도 있다는데 그다음 날 슈페르를 불러 “베를린에 대건축물을 지어 파리를 베를린의 그림자로 만들어버리자”고 했다.
 
  파리를 관광할 때가 히틀러 절정의 순간들이었다. 숙적 프랑스는 무너지고, 영국만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영국이 휴전 제의를 하지 않자 괴링의 공군 공습으로 굴복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히틀러는 영국이 휴전을 제의하지 않는 것은 미국과 러시아에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소련 침공 작전(바바로사)을 준비한다. 히틀러는 인생 최고의 순간, 그 앵발리드에서 자신도 나폴레옹처럼 결국은 영국·러시아 때문에 망할 줄 몰랐을 것이다.
 
 
  한국전 참전 기념비 참배
 
프랑스군 대대 한국전 참전 기념비.
  파리 북역에서 내렸을 때 역전의 택시를 타려고 했더니 인상이 좋지 않은 운전사가 40유로를 불렀다. 거절한 나는 우버 앱을 켰다. 루브르 박물관 근처의 예약된 호텔을 눌렀더니 요금은 8유로, 5분 만에 도착하며, 차량은 아우디라는 표시가 나왔다. 파리 지하철이 편리하지만 시간을 아끼려고 거의 우버를 이용했다. 브뤼셀보다 요금이 쌌다. 우버 요금은 시간, 장소, 수요 공급에 맞춰 유동적으로 정해진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중도시를 빼고는 모두 우버 이용이 가능했다. 부른 차량의 이동상황이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요금은 자동으로 결제되니 마음이 편했다.
 
  계획한 것은 아닌데, 나는 2박3일간 히틀러가 다닌 코스를 가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에 본 팡테옹은 장대했다. 명사들의 공동묘지처럼 운영되는데 볼테르, 루소, 에밀 졸라와 빅토르 유고의 무덤은 같은 방에 있고, 장 조레스와 앙드레 말로, 퀴리 부부 등 친숙한 이름들이 카타콤처럼 지하를 채우고 있었다. 팡테옹에서는 지구 자전(自轉)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중앙 돔에서 늘어뜨려진 67m 줄에 달린 28kg의 쇠공 ‘푸코의 진자(振子)’가 지구의 자전 반대 방향으로 흔들리면서 돈다.
 
  파리의 센강 변 한국전 참전 프랑스 대대 기념비도 참배했다. 290여명의 전사자 이름(배속되어 전사한 한국군 병사 이름 포함)이 새겨 있는데 프랑스군 전사상률은 약 30%나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자, 공수부대, 외인부대 출신 등 베테랑이 많이 참전했고, 지평리 전투 등 중공군의 대공세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 프랑스는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월남에서 호찌민 군대와 싸울 때인데 정예부대를 파병까지 해주었다니! 파리의 지하철역과 거리 이름엔 레지스탕스 희생자들을 포함, 애국자들과 프랑스를 도운 프랭클린 루스벨트 등 외국인 이름이 많이 붙어 있다.
 
  기차역으로 가는 우버 택시를 불렀더니 한국인 기사였다. 여행가이드를 하다가 할 일이 없어 우버를 몰게 되었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파리의 지하철역 이름과 거리 이름만 알아도 프랑스 역사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도 예술적이에요.”
 
 
  인물을 소중히 여기는 나라
 
한산한 앵발리드 앞.
  뉴욕을 빛내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철골은 에펠이 만들었다)은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아 선물로 보낸 것이다. 팡테옹, 앵발리드 등 많은 건축물이 천재와 영웅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좌우로 갈라져 살벌하게 싸우고, 1871년엔 그 화려한 파리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여 3만명이 죽은(파리 코뮌 사건), 좌우 이념갈등의 정치를 이어가는 나라지만 인물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의 표시를 멋있게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한 업적으로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에 드골 전용실 만든 것을 꼽기도 한다. 드골이 살았을 때는 그렇게도 못살게 굴던 프랑스인들이다. 오죽하면 프랑스를 두 번 구한 드골도 “치즈 종류가 200개가 넘는 나라를 다스리는 건 정말 어렵다”고 말했겠는가?
 
  프랑스의 드골과 서독의 아데나워가 주도한 두 원수 나라의 화해는 오늘날 EU의 기초가 되었다. 샤를마뉴, 카를 5세, 나폴레옹, 히틀러가 무력으로 이루려고 했지만 실패한 유럽통일은 두 노(老)정치인의 위대한 지도력에 힘입어 EU로 성사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한국보다도 더 마음 편하게 확진자가 국민의 10%나 되는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 등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통치자 카를 5세
 
브뤼셀의 그랑플라스 광장.
  16세기 브뤼셀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카를 5세는 나라마다 호칭이 다르다. 독일에서는 카를(Karl) 5세, 네덜란드에서는 카렐(Karel) 5세,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 5세,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 영어권에선 찰스(Charles) 대제(大帝)로 표기된다.
 
  그는 아라곤 왕국(바르셀로나 주변)과 카스티야 왕국(마드리드 주변)의 트라스타마라 왕가, 부르고뉴 공국의 발루아-부르고뉴 공가(公家),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자로서 중유럽과 서유럽 그리고 남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과 필리핀 등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재위 기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그의 후계자 앙리 2세를 상대로 이탈리아 전쟁에 집중해 많은 전비(戰費)를 소모했다.
 
  카를 5세에게 밀라노와 프랑슈콩테를 빼앗긴 프랑수아 1세는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 오스만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술레이만 대제는 1526년에 헝가리 왕국을 정복하고, 1529년에 빈을 포위하였으나 점령에 실패했다.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1555년부터)을 다 물려받아 다스린 그는 최초의 스페인 국왕으로 여겨진다. 1556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는 스페인 왕국을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1618~1648년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신구교 대결의 30년전쟁 때도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신교도 편에 서서 구교도 편인 합스부르크 세력과 싸웠다. 종교보다는 국익(國益)을 앞세운 점에서 근대적이라고 할 만하다.
 
  플랑드르 지방의 중심 도시 겐트에서 태어난 카를 5세는 1515년 브뤼셀의 쿠덴베르크 궁의 접견실에서 섭정으로부터 부르고뉴공(公)의 직위를 인수, 저지대(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 일대)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40년 뒤인 1555년 같은 방에서 스페인 왕위를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겨주고 은퇴한다. 이때 남긴 퇴위사(退位辭)는 문무왕의 유언을 연상시킬 정도로 담백하고 겸손하다.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거의 전역과 아메리카 식민지를 거느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란 찬사를 받은, 역대 최강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그의 숨결은 18세기에 불탄 이 궁전의 지하시설(박물관)에서 느낄 수 있었다.
 
  불탄 궁전 터에 재건한 궁전은 1830년에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벨기에 왕국의 궁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걸어 한 30분 거리에 아담한(유럽의 대성당 기준으로) 성 미카엘-구둘라(聖女) 성당이 있다.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1519년 준공되었다.
 
  성당 안에는 카를 5세 부부를 그린 약 500년 전 스테인드글라스가 남아 있다. 1537년 올리(Bernard Van Orley)의 그림을 앤트워프의 유리공예가 얀 핵(Jan Haeck)이 작업한 것이다. 황제와 황비가 성물(聖物)을 찬양하는데, 두 사람의 수호성인인 샤를마뉴와 헝가리의 성녀 엘리자베스가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다.
 
 
  “나의 생애는 긴 여행이었다”
 
  1555년 10월 25일 카를 5세의 퇴위식은 ‘브뤼셀의 퇴위’로도 불리는데, 기록이 정확하다. 그는 자신의 고문 어깨에 기대어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했다(요지).
 
  “내가 황제가 된 것은, 오로지 오스만튀르크로부터 가톨릭 세계를 수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 목적을 거의 달성하였을 때 프랑스 왕과 독일의 몇 사람이 나를 공격하기에 할 수 없이 무기를 들어야 했다. 고백하건대 내가 알고도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한 적은 없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고의로 한 것이 아님을 알아주기 바라며 그런 일을 당한 이들이 여기 있다면 용서를 구한다.”
 
  그는 퇴위사에서 변혁의 시기에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지 설명했다. 네덜란드에 열 번, 이탈리아에 일곱 번, 프랑스에 네 번, 잉글랜드에 두 번, 북아프리카에 두 번. 그는 “나의 생애는 긴 여행이었다”고 술회한다. 이 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남긴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라는 명언과 통한다.
 
  다음 해 그는 스페인과 그 관할지(시칠리아,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국, 네덜란드 등) 및 식민지(남아메리카, 필리핀 등)를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기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인계한 뒤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가서 수도원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티치아노의 그림에 둘러싸여 통풍을 앓으면서 말년을 보내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1518년 9월 21일 58세에 죽었다. 아내 이사벨라가 죽을 때 쥐고 있던 십자가를 쥔 채였다. 자신과 아내가 묻힐 수도원 창설을 유언으로 부탁했다.
 
  펠리페 2세는 마드리드 근교에 엘 에스코리알이라 불리는 장대한 수도원을 짓고 예배당 지하에 가족묘당을 만들고 부모의 유해를 모셨다. 무거운 느낌의 이 석조 건물은 스페인의 다른 화려한 궁전이나 성당과는 건축양식이 다르다.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한 근엄한 펠리페 2세가 이 수도원을 궁전으로도 사용해서 그런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뿌리인 독일 분위기다.
 
 
  알찬 도시 겐트
 
카를 5세가 태어난 벨기에 겐트의 성.
  카를 5세가 태어난 겐트는 브뤼셀에서 자동차로 북쪽으로 달려 한 시간 만에 도착했다. 벨기에 북쪽은 플랑드르 지방인데 상공업과 국제무역의 발달로 중세 때부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였다. 브뤼헤, 겐트, 앤트워프가 플랑드르의 중심 도시로서 지금도 충실하고 성숙한 느낌을 준다. 카를 5세의 그림자가 아직도 짙게 드리워져 있는데 좋은 모습으로서이다.
 
  흥미로운 점은 샤를마뉴, 카를 5세, 나폴레옹, 히틀러가 유럽 정복의 야망을 펼치기 위해 벨기에 및 그 인근 지역을 중심에 두거나 결전장(워털루, 아르덴 등)으로 삼았다는 점이다(샤를마뉴의 프랑크 왕국 수도는 브뤼셀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인 독일의 아헨, 그곳 9세기 성당에 무덤이 있다). 그런 브뤼셀에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연합체 EU와 이를 무력(武力)으로 보호하는 세계 최대의 군사동맹체 NATO 본부가 있다는 것이 우연일 수 없다.
 
  겐트는 13~16세기엔 인구 약 6만명으로 앤트워프와 함께 알프스 북쪽 유럽에서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겐트 중심지에 있는 생바보(Bavo) 성당과 종탑, 성 등의 규모는 큰 나라 수도에나 있을 법한 정도다. 운하 크루즈를 타 보면 베니스보다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다. 중세의 공장·창고·거래소·은행 건물들이 즐비한데(유네스코 문화유산) 지금도 ‘부티’가 난다. 지난 7월 말엔 코로나19를 비웃듯이 관광객으로 붐볐다. 겐트대학은 세계 100대 대학에 꼭 끼는 명문인데 인천 송도에 글로벌 캠퍼스를 열었다.
 
  이 도시엔 카를 5세의 동상이 많다. 그의 탄생지임을 주장하여 도시 정체성(正體性)의 일부로 삼으려 한다. 겐트의 상인들은 1539년 카를 5세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이듬해 스페인에서 프랑스를 거쳐 달려온 카를 5세 휘하 5000명 군대에 간단하게 진압되었다. 카를 5세는 주모자 수십명을 처형한 뒤 다른 수백명의 동조자에겐 좀 웃기는 벌을 주어 당시 수준으론 온건하게 처리하였다. 동조자들(주로 상공업자)이 내복 차림으로 목에 교수용(絞首用) 밧줄을 걸고 나와 목숨을 구걸하도록 한 것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는 카를 5세는 교양인이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느껴진다(물론 그가 지휘한 1527년 로마 약탈은 주로 독일 용병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 학살이었다). 1521년 3월 신성로마제국 의회를 직접 주재, 마르틴 루터를 불러 신문하고 풀어주는 장면은 그럴 수밖에 없는 정치역학과는 별도로 역사의 명장면이다. 스페인의 이슬람 시절 고도(古都) 코르도바에 가면 메조키트라 불리는 이슬람 대사원이 있다. 이곳을 수복한 기독교 세력은 이 희대의 건축물을 훼손, 한가운데 구멍을 내고 성당을 세웠다. 성당, 모스크, 시나고그가 공존하는 건물인데(그래서 더욱 빛난다), 스페인 왕이 된 다음 이곳을 둘러본 카를로스 1세(카를 5세)는 관리자를 불러 “당신들은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건물을 망쳐버렸군”이라고 개탄했다.
 
 
  앤트워프는 한때 세계 최대의 무역항
 
  제2차 세계대전 역사를 읽어보면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이 앤트워프 항구를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거는 장면이 나온다.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앤트워프의 부침(浮沈)에도 카를 5세가 있다. 16세기 전성기엔 런던을 능가하는 유럽 최대의 무역항이었다. 대항해 시대를 맞아 번영해, 알프스 북쪽에선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되었다. 그때 인구가 약 10만명. 세계 무역의 약 40%가 이곳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지금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이어 유럽 제2위의 물동량을 자랑한다. 프랑스에서 발원한 스켈트강이 이 도시를 거쳐 북해로 들어간다. 인구는 약 50만명으로 브뤼셀 다음이지만 네덜란드어권의 중심으로 권위가 있다. 앤트워프는 1894년 세계 박람회를, 1920년 하계올림픽을 주최했다. 상공업과 무역으로 중세 유럽에서 가장 잘살았던 플랑드르 지역의 중심이었다는 권위가 배어 있는 도시다. 광장엔 화려한 시청과 길드 하우스, 성당이 있고,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가공센터가 있다.
 
  이웃한 브뤼헤 항구가 토사로 막히는 바람에 그곳 상인과 상사(商社)들이 앤트워프로 옮긴 게 번영의 원인이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인도로 진출해 향료·은(銀)·원당(原糖)·원광(原鑛)을 수입해 앤트워프로 가져와서 상품으로 만들어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 팔기 시작하면서 발전했다. 앤트워프-브뤼헤-겐트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지방은 오랫동안 모직 섬유산업 등이 발달해, 식민지 개척에 따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제도와 인력을 갖추고 있었다. 은행과 상품거래소(세계 최초), 법치와 자유가 있었다. 영국과 베니스, 제노바가 투자했고, 16세기엔 개신교도와 유대인들이 많이 몰려와 상공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유럽 역사 메모
 
  유럽여행을 많이 하면서 생각해둔 관점을 정리해본다
 
  1. 5세기 서(西)로마 멸망 이후 유럽의 군사·정치적 주도권은 게르만족의 세상인 알프스 북쪽으로 옮겨 간다.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러시아 같은 나라들의 각축전이 펼쳐진다. 2021년 ‘US앤드월드리포트’ 연례 세계 최고 국가 종합랭킹 20대 국가 중 13개국은 게르만족이 압도적인 북유럽과 그 계통이다. 4개국은 동아시아의 유교한자문화권, 3개국은 라틴 계열이다. 13개국 중 12개국은 개신교가 주류다.
 
  2. 5세기 이후 유럽의 거의 모든 왕가(王家)는 게르만족 계통이다. 이는 유럽의 지배민족이 게르만족으로 교체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이 5세기 이후 지금까지 1500년간 세계사의 주역을 연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뛰어난 체력과 정신력, 무엇보다도 법치 정신이 요인이다.
 
  3. 30년 종교전쟁을 끝낸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이 오늘의 유럽 국경선을 거의 결정하기 전까지, 즉 근대 국민국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의 국가·공국·영지 등은 왕이나 귀족의 사유물이었다. 사고팔고 선물도 했다. 한국인들이 유럽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대목이다.
 
  4. 유럽에선 독자적 언어를 가진 나라들이 거의 예외 없이 국민국가를 만들었다. 언어가 동족(同族) 의식을 낳고 이것이 국가 건설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언어의 질과 양이 그 나라의 수준이 되기도 한다.
 
  5.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유럽이 세계사를 선도하게 된 이유로 6가지 요인을 꼽았다. 경쟁, 과학, 사유(私有)재산권, 의료, 소비자 사회, 근로윤리. 맨 앞에 나오는 경쟁은 전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은 국가, 공국, 백작령 등 정권의 수와 비례하는데 15세기엔 유럽에 산재한 여러 형태의 정권이 200개에 육박했다고 한다. 우랄산맥에서 피레네산맥까지는 평야이다. 전쟁을 막을 산과 사막, 큰 강이 없었다. 수많은 전쟁이 과학과 기술, 행정제도, 상공업 발전, 그리고 외교술과 국제법의 동인(動因)이 되기도 했다.
 
  6. 르네상스-종교개혁-산업혁명-해외 식민지 개척-민주화로 이어져온 유럽 역사의 흐름에서 도전자는 훈, 마자르, 몽골, 맘루크, 오스만튀르크 등 아시아의 유목기마민족과 이슬람 세력이었다. 1683년, 오스만튀르크의 빈 2차 포위를 마지막으로 이들의 공세는 꺾여버린다. 이는 말과 활을 주(主)무기로 한 기마군단 세력이 대포와 배를 앞세운 해양 세력에 굴복한 것을 의미한다.
 
  7. 지난 1500년간 유럽 통합의 꿈을 밀어붙였던 인물은 네명인데 실패했다. 서기 800년 전후의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 16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19세기 초 프랑스의 나폴레옹, 20세기의 히틀러. 히틀러와 나폴레옹은 영국과 러시아를 공격했다가 망한 점에서 같다. 다섯 번째 통합 시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와 서독의 화해를 기반으로 한 EU 설립으로 성공했다.
 
  앤트워프의 쇠락
 
  네덜란드는 16~17세기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 지배를 받다가 펠리페 2세가 신교도들을 탄압하자 봉기하여 80년전쟁으로 불리는 독립운동의 대격변으로 휩쓸린다. 1576년 스페인 군대가 앤트워프의 개신교 세력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7000명을 학살하고 800채의 집을 불태웠다. 1578년부터 7년간은 개신교도들이 이 도시를 장악해, 노트르담 대성당의 예배를 금지하고 예술품들을 약탈하기도 했다. 1585년 스페인 세력은 앤트워프를 탈환해 개신교도들을 추방했다.
 
  이들이 신생 네덜란드공화국으로 이주해 앤트워프는 쇠락하고 암스테르담이 세계 무역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나중에 프랑스의 개신교도인 위그노도 구교 세력의 탄압을 피하여 네덜란드로 피란, ‘더치 황금기’를 여는 데 기여한다. 개신교도와 유대인들은 상공업에 특출한 능력이 있어 이들이 많이 사는 나라와 도시는 발전하였다.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앤트워프는 세계 다이아몬드 가공 부문에서 단연 1등이다. 16세기 아프리카, 인도 등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이 가져온 원광을 가공해 비싸게 팔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수만명이 지금도 이 분야에 종사하고, 연간 거래액은 수백억 달러 규모에 달한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80년을 정리하는 1648년 뮌스터 조약으로 앤트워프는 북해로 난 스켈트강 사용이 금지되어 국제항구로선 쇠락한다. 지금 벨기에 지역은, 네덜란드 지역과 함께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하다 중도 퇴장, 끝까지 싸워 공화국으로 독립한 네덜란드와 달리 스페인과 타협해서 그 지배를 수용한 것이다. 그런 변절에 대한 보복을 받은 셈이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일란성 쌍둥이
 
  스페인에 이어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벨기에 지역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프랑스로 넘어간다. 1792년 프랑스 국민군이 쳐들어와 병합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앤트워프의 노트르담 성당에 있던 루벤스의 그림을 파리로 가져가는 한편, 앤트워프를 재건하여 런던과 대항하려고 도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마무리하지 못했다. 지금의 벨기에 지역은 1815년 이후 네덜란드에 병합되었다가 1830년의 혁명으로 분리·독립하여 벨기에 왕국이 되었다.
 
  이때 네덜란드가 진압군을 보내려 했으나 프랑스가 벨기에 독립을 지지해 좌절시켰다. 네덜란드는 독립선언 이후 다시 군대를 보냈으나 프랑스군이 막았다. 네덜란드는 앤트워프 요새에는 계속 군대를 배치해 도심을 감제(監制)하고 있었으나, 1832년 프랑스군은 이 요새를 포위해 항복을 받았다.
 
  벨기에는 독립 이후 중립을 선언했으나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점령하려는 독일군의 진격통로가 되어 공격과 지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립을 포기, NATO와 EU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두 기관의 본부가 브뤼셀에 들어서게 됐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일란성(一卵性) 쌍둥이 같은 나라다. 플랑드르 상공업 지대를 공유하였고, 부르고뉴 공국과 스페인의 지배를 같이 받았다. 16세기 개신교도들과 상공업자가 중심이 되어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벌인 점도 같다. 그러나 16세기 말 가톨릭 신도들이 많이 사는 벨기에 지역 사람들이 독립투쟁을 포기하고 스페인과 타협, 그 치하에 남기로 결정하여 운명이 달라진다. 네덜란드는 독립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여 네덜란드공화국을 세우고 17세기를 ‘네덜란드의 세기’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를 만든 네덜란드
 
브뤼셀의 아프리카 박물관.
  벨기에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브뤼셀에서 평야를 자동차로 달리면 2시간 만에 암스테르담이다. 브뤼셀의 화려하고 장대한 건축물과 암스테르담의 실용적이고 질박하고 절제된 건축물이 대조적이다.
 
  벨기에는 독립한 이후 국가 상징물을 크게 지었다. 언덕에 있어 브뤼셀의 스카이라인을 독차지하는 ‘정의의 궁전’은 법원종합청사인데, 건축 당시 세계 최대 사무용 건물이었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든 개선문, 지금은 아프리카 박물관으로 쓰이는 레오폴드 2세의 궁전 등은 이 나라가 독립한 뒤 네덜란드를 의식해 국력을 과시하려 했구나 하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느낀다.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의 80배나 되는 아프리카 콩고를 식민지(사실은 사유지)로 만들어 상아와 고무를 수탈하는 과정에서 수백만명의 토착민들을 학살했다.
 
  네덜란드는 17세기에 이미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다국적 기업인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아프리카·인도·인도네시아·대만·일본·북아메리카로 진출해 해양제국을 건설, 세 차례나 영국과 큰 해전을 치르면서 암스테르담을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키웠다. 종교의 자유를 쟁취한 이후엔 통상의 자유를 확보, 지구를 좁게 만든 해양문화권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런 분위기를 집약한 곳이 바닷가에 지은 해양박물관이다.
 
 
  해양국가의 본질을 파악한 이승만
 
암스테르담 해양박물관 17세기 지도책에 나오는 조선.
  17세기의 네덜란드를 지도한 장군·정치가들의 초상화는 박력이 넘친다. 갑옷을 입은 검은 복장의 인물들이 금방 화폭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 오직 바람과 지도에 의지해 바다로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전쟁의 나날을 보내던 시절의 패기, 바로 이 시대의 분위기를 〈야경(夜警)〉이란 집단 초상화에 담은 화가가 렘브란트였다.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누비게 만든 원동력은 무역에 의한 돈벌이였다. 이들은 위대한 장사꾼이었을 뿐 아니라 싸움꾼이었다. 베니스와 같은, 그러나 더 큰 상무(商武) 국가였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누비면서 수집한 것과 남긴 기록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많은 지도였다. 이 지도에 조선이 등장한다. 조선 지배층이 위선적(僞善的) 명분론으로 불러들인 전쟁(병자호란)의 후유증으로 허우적거리면서 200년간 자폐증(自閉症)으로 들어가려던 바로 그 시기에(조선이 해양 세력 앞에 노출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용맹한 네덜란드인들은 조선과 일본을 손바닥에 놓고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양박물관을 나와서 구글 검색을 하여 이승만(李承晩)이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논문으로 쓴 〈미국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uenced by the United States)〉을 원문으로 읽어보았다. 번역서로 읽어본 느낌과 많이 달랐다. 전쟁이 많은 유럽의 역사를 관통하는 원리를 포착하고, 특히 통상의 자유와 전시(戰時) 중립의 문제를 논문 주제로 삼은 것은 그가 해양문화의 본질에 접했다는 뜻이다. 격조 높고 유려한 영문은 유럽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한 자신감의 자연스러운 표현일 것이다.
 
 
  그로티우스와 이승만
 
  이 논문 서두에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 인물이자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휴고 그로티우스가 등장한다. 미래의 건국 대통령이, ‘전쟁과 평화의 법’을 써서 국가 간의 질서에도 인간 세계에 적용되는 것과 같은 자연법의 이상을 심으려 했던 그로티우스를 이해하였다는 것은, 네덜란드가 선도한 해양문화의 본질을 파악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진로를 서구 중심의 해양문화권에 묶어야 한다는 확신을 다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1952년 평화선을 선포할 때 이를 뒷받침한 해양법적 이론도 이때 싹이 텄을 것이다.
 
  17세기 조선은 난파한 동인도회사 선원 하멜 일행을 잡아놓고도 네덜란드에 대한 그 어떤 정보 수집에도 관심이 없었지만, 이들이 탈출해 도착한 일본 나가사키 막부 관리들은 상세한 신문 기록을 남겼다. 그 후 하멜은 귀국해 조선을 소개하는 표류기를 썼다.
 
  이승만은 그로티우스를 통해 네덜란드의 17세기가 인류사에 던진 화두(話頭)를 잡아채어 대한민국 발전 방향을 정립하는 데 이용했으리란 것이 나의 시각(視覺)이다. 그 중심 개념은 ‘자유’였을 것이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면 나라가 활기차게 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확신, 조국을 떠나면 조국이 제대로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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