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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발굴

딸이 본 拉北 전 춘원 이광수의 마지막 나날들

“이제 내가 또 대한민국에 不忠한 일을 할 수 없소”

글 : 이정화  춘원문화교류센터 대표·美 채텀대학 생화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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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親日派 노릇 한 것 이외에는 별로 죄가 없다”며 자백서 작성 거부
⊙ 납북되던 7월 12일 자백서 강요받자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만년필, 연필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꺾어버리고 찢어버려
⊙ 춘원, 6·25 당일 39도의 열에 시달려… 피란 위해 걷기 연습했지만 정원 끝까지 두 번 왕복하면 숨이 차서 꼼짝 못 해
⊙ 이미 7월 16일 평양감옥 수감하고서도 9월 15일까지 가족들로부터 차입품 받는 속임수 써
⊙ 계광순·신동기 선생 등이 평양감옥에서 춘원 목격

[편집자 註]
이 글은 6·25 당시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1892~1950년) 선생이 납북(拉北)되기 전, 춘원을 지척에서 지켜본 딸 이정화 박사의 수기다. 이 수기는 국내에서 근간(近刊) 예정인 《잊혀진 전쟁: 1950~1953》(화산문화 펴냄)에 실린 8편의 수기 가운데 하나다. ‘팔순이 넘은 여덟 명의 재미 한국인의 회고록’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이 책에는 이정화 박사 외에도 최남선(崔南善) 선생의 손자 최학주 박사, 납북된 백관수(白寬洙) 전 《동아일보》 사장의 아들 백순 박사, 그리고 안홍균 박사, 최재원 박사, 김승곤 박사, 강창욱 박사, 고(故) 최연흥 전 서울시립대 교수 등의 6·25 수기가 실려 있다. 이 책은 원래 최연흥 전 교수가 2020년 편집한 《다섯 소년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해 영문판과 한국어판으로 발간을 추진해왔다. 최 전 교수가 지난 1월 타계한 후에는 고인의 지인(知人)인 송종환 전 주(駐)파키스탄대사(현 경남대 국제관계학과 석좌교수)가 중심이 되어 한국어판을 펴내게 되었다.
춘원 이광수
  1950년 6월 25일. 이날은 일요일이어서 우리는 학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아버지 약을 구하러 나가셨다. 박근영 검사 따님 지혜가 놀러 와서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치고 놀다가 저녁을 같이 먹고 내가 지혜를 바래다주려고 길에 나섰다. 지혜는 집이 신당동이고 나이가 나보다 어리다. 지혜 아버지는 6월 28일 아침에 공산당에게 잡혀가셨다. 길에 나서보니 웬일인지 길에 자동차가 안 다닌다.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청량리 쪽으로 질주한다. 무시무시해서 나는 지혜를 바래다주고 달음질을 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공산당이 쳐들어온다고 인심이 흉흉하다”고 하신다. 우리 집 라디오는 어제부터 고장이 나서 안 들리나 신문은 여전히 매일 나왔다. “공산당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오려고 하나 우리 국군이 넉넉히 막아낼 수 있으니 백성은 안심하라”고 하였다. 그 다음 날 신문에는 정부가 수원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충분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에 그만둔다는 것이다. 우리 집 라디오가 고장이 난 것이 우리에게는 한 가지 불행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밤 열이 39도였다. 우리 집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무슨 큰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아버지의 의견을 물으시는 것이다. 고열에 괴로워하시는 아버지에게 “세상이 야단이니 어떻게 해요? 공산당이 지금 대대적으로 쳐들어온다고 그러는데” 하니까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러기로 서울까지야 오겠소. 대한민국이 그렇게 약하기야 하겠소” 하신다.
 
  어머니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으신지 어머니가 가장 신뢰하시고 그분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는 백붕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고 어머니가 물어보시니까 역시 그분도 아버지 말씀과 같이, “설마 서울 장안에야 공산당이 들어오겠어요? 그저 가만히 계세요. 춘원 선생 병구완이나 잘 하시고” 이런 대답이었다. 아버님의 마지막 생신을 같이 축하해주신 그분도 7월 17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잡혀가셨다. 그날 밤 우리는 안심하고 잠을 잤다.
 
 
  開戰 다음 날 은행에 저금하러 간 어머니
 
춘원 이광수의 딸 이정화 박사. 사진=조선DB
  어머니는 아버지 방으로 왔다 갔다 하시고 늦도록 무엇을 하고 계셨다. 그 이튿날 6월 26일, 우리 삼 남매, 영근 오빠, 정난 언니와 나는 평상시와 같이 학교에 갔다. 그날은 오빠와 언니가 같이 다니는 서울대학교의 입학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렇게 경쟁률이 심한 서울대학교 문리과(文理科) 대학에 합격한 언니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학교 학생들이 수군수군하고 야단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서 25마일 떨어진 의정부까지 쳐들어왔다고 하는 것이다. 사태가 위험하다고 해서 이화여중 학생들은 정오가 지나 전부 집으로 돌아갔다. 몇 명의 상급반 학생들은 전선에 있는 한국군들을 방문, 격려하자고 자진해서 지원했다.
 
  집에 돌아오니 집에서는 그리 근심하는 빛이 보이지 아니한다. 어머니는 집에 있는 돈을 은행에 저금하러 가셨다 한다. 우리 집은 무슨 모순이었던가? 다른 사람들은 은행에 있는 돈을 찾아서 달아나는 판에 어머니는 집에 있는 돈을 저금하러 가셨다니 어리석다고나 할까 순진하다고 할까?
 
  나중에 알고 보니 기가 막혔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신문 보도는 국군의 전과(戰果)가 유리하다고 하였고 정부는 옮기지 아니하고 대한민국의 수도를 사수(死守)하겠다고 방송하였으니 이것을 안 믿고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정부의 속사정과 군의 동태를 알려주는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러한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정부와 한국군은 도망가고 일반 국민들이 남쪽으로 가기 위해 한강을 건너기 전에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우리 집에 오시는 분 가운데는 “그따위 소리 믿지 말고 어서 달아나요” 말해주는 이는 한 분도 없었다. 어머니가 은행에 갔다 오시더니 대단히 걱정하는 빛을 보인다. 은행에는 돈을 맡기러 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찾으러 오는 사람뿐이요, 여러 가족이 벌써 남쪽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저녁때 오빠가 돌아와서 서울의 동북쪽에 위치한 청량리에서 대포 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대학의 교수들도 어디로 도망갈 준비를 하더라고 한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허둥지둥하셨다. 아버지의 열은 조금 떨어졌지만 기침이 심해서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오빠, “이 집을 떠날 사람은 아버지”
 
  다음 날 27일 아침 어머니는 그 전 날 입금한 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갔다. 변동이 심한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두툼하면서 무거운 그 지폐 다발은 우리가 다음 3개월 동안 한 끼니도 놓치지 않고 지탱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머니는 정오 넘어 돌아와서 아이들은 남쪽으로 도주토록 결정했다. 그러나 오빠는 당장 떠날 것을 반대했다.
 
  오빠는 “이 집을 떠날 사람은 아버지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아버지를 두고 아이들만이 도망갈 수 있단 말인가? 이래서 우리는 다음 날로 출발을 연기했다. 박격포 소리가 멀리 계속 들렸지만 우리는 비교적 편안하게 잤다. 아버지의 열은 떨어지고 그의 기침 빈도도 가라앉아서 잘 주무셨다.
 
  28일 새벽 2시경 사이렌 소리에 깨어났다. 공습경고가 아니었다. 남쪽에서 간헐적으로 오는 사이렌 소리는 긴박하게 들렸다. 나는 잠에 빠진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저 사이렌 소리 들어봐요. 소름 돋는 소리야” 하고 말했다. 반쯤 잠에서 깬 어머니는 “걱정 마라, 그냥 자자. 우리의 수도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야” 하고 다시 잠에 떨어졌다.
 
  28일 아침 높은 소리의 기관총 소리가 박격포 소리와 함께 들렸다. 탱크가 굴러들어오는 소리가 침대 아래에서 진동하는 것 같았다. 서울 시민들은 북한 인민군들에게 붙들리게 된 것이었다. 도망가기에는 늦었다. 한강대교가 폭파되어 끊긴 것도 알았다.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탈출할 길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이렌 소리는 국군에게 한강 남쪽으로 후퇴하라는 마지막 경보였다.
 
 
  “설마 대한민국이 아주 망하기야 하겠느냐”
 
6·25 남침 사실을 보도한 1950년 6월26일자 《조선일보》. 사진=조선DB
  곧 북한 공산군이 효자동 길을 점령했다. 정부의 정책들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글을 계속 기고해온 아버지는 항상 공격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일제 치하에서 체포되었고 그 이후 일본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제 서방 민주주의 동조자라는 이유로 박해의 대상이 될 것이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자신의 원기가 회복하면 집을 떠나서 어딘가 숨을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허리 벨트 안에 6만원을 숨겼다. 아버지는 마당에서 걷는 연습을 하셨다. 아버지는 매번 정원의 끝까지 두 번 왔다 갔다 하시면 숨이 차서 꼼짝 못 하고 오랫동안 쉬었다. 아버지의 기침 빈도가 너무 잦아서 마루 밑이나 광 같은 데에 숨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집을 떠날 수 있다고 할 만큼 튼튼해졌다고 말할 때까지 여러 날 걷는 연습을 하였으나 곧 다시 편찮아졌다.
 
  공산주의를 반대하거나 미국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재판을 받고 기소되는 인민재판이 매일 서울 거리에서 진행되었다. 체포를 피하기 위하여 도망가려고 한 자는 현장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한편 북한 인민군들은 의용군(義勇軍)을 충원(充員)하기 시작했다. 말로는 자발적으로 지원했다고 하지만 젊은이들이 길에서 보이는 대로 징집이 되었다. 대학에서도 오빠를 나오라고 하고, 인민위원회에서도 오빠를 나오라 한다. 나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당장 끌려간다. 그래서 아버지보다 오빠가 더 급하게 되었다.
 
  오빠는 7월 3일 자그마한 자루 하나를 싸 들고 집을 떠나서 자하문 인근에 있는 숙모 댁 근처의 민가에서 떨어진 동굴에 숨기로 했다. 위급 시에는 동굴에 숨고 밤에는 근처의 숙모 댁에 있는 것으로 정했다.
 
  어머니는 우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목숨만 보전하여라. 며칠 안 갈 것이다. UN군이 들고 나섰으니 설마 대한민국이 아주 망하기야 하겠느냐. 목숨만 보전해라” 이러한 비통한 작별을 하였다.
 
  아버지도 다시 걸음 연습을 하시며 금명간 하루 이틀 내에 어디로 달아나자고 하셨다. 아버지는 마치 덫에 걸린 다람쥐 같았다. 그는 높은 벽을 오르거나 먼 데를 갈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혼자서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머니는 공산주의자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가능한 한 집에 머물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체포
 
  우리는 하늘에서 미군 비행기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소리를 내는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더 많은 폭탄이 쏟아져서 전투에서 이겨다오. 폭탄 투하로 민간 피해자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며칠만 기다리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일주일이 한 달로 늘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희망은 사라졌다. 아버지의 체포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7월 6일 우리 집은 공산당에게 차압을 당하였다. 아침 9시경 20여 명이 우르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계셨다. 그들은 빨간딱지를 각방의 문에 붙이면서 어머니, 언니와 나를 어느 한 방으로 몰아넣고 앉아 있으라고 했다. 문 뒤에 있는 우리의 옷과 책들이 거의 딱지가 붙어져서 압류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면서 우리 집 대문 앞에 공산당 보초를 세웠다. 보초의 허락 없이는 식료품 가게에 가는 것을 포함하여 외부로 나갈 수 없었다. 아무도 집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집 뒷문에는 빨간딱지가 붙고 우리 집 대문에는 ‘내무서가 압류한 재산’이라는 표시가 붙었다. 이제는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 이튿날 인민군과 인민위원회에서 나온 도합 열 명가량의 인원이 아버지를 잡으러 왔다. 그때 침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몸이 약해서 못 걸어가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가까운 파출소까지 가는 것이니 천천히 가자고 말했다.
 
  파출소에는 여러분이 잡혀 오셨다. 지서장, 재판소 판사와 그 밖에 몇 명이 잡혀 왔다. 아버지가 두 시간 이후 풀려 나올 때까지 어머니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은 걸어서 2마일 떨어진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숨이 차신 것 같았고 어머니는 괴로워하셨다. 아버지가 도망을 갈 만큼 건강하실까? 아버지가 사라지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자백서 써도, 안 써도 잡혀갈 것”
 
  아버지에 의하면 파출소에 붙잡아놓고 그들은 아버지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체포된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서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 잘못한 일에 대한 자백서를 써오라 하고, 그 자백서에 따라 다시 처분하겠다고 하면서 내보냈다고 한다.
 
  이때가 아버지가 달아날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건강 상태는 달아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는 한이 있어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바로 어디로든지 달아났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때 왜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왔을까? 일단 집에 돌아오면 보초가 있으니 달아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때 내가 분명히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그때를 천추(千秋)의 한(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의 결정을 따랐으므로 그때 어머니가 결심했다면 어디론가 도피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셔서 곧 누웠다. 그날도 그 이튿날도 자백서를 안 쓰셨다. 어머니가, “당신 어떻게 하려고, 총칼 앞에서 안 쓰시고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소” 하시니까 아버지는, “자백서를 써도 잡혀갈 것이요, 안 써도 잡혀갈 것이오. 당할 대로 다 당하겠소. 이제 내가 또 대한민국에 불충(不忠)한 일을 할 수 없소” 하고 엄숙하게 거절하셨다.
 
  무슨 이유인지 어느 날 아침 보초가 대문 앞에 서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시골 사람처럼 보이도록 무명 고의적삼을 입히고 고무신을 신겨서 달아나도록 준비를 했다. 그때 평복을 입은 함경도 사투리 쓰는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우리는 선생님을 모셔서 지도를 받으려고 합니다. 잠깐 같이 가십시다” 한다. 곧 뒤를 이어 인민군복을 입은 젊은 사람이 들어와서 북쪽 사투리로 “자백서 썼소?” 하고 묻는다. 아버지는, “나는 친일파(親日派) 노릇 한 것 이외에는 별로 죄가 없는 것 같아서 안 썼습니다” 하였다.
 
  젊은 사람이 천천히 “그러면 지금 써서 가지고 갑시다. 자백서를 써가지고 가는 것과 안 써가지고 가는 것과는 대우가 다릅니다. 우리가 현관에서 20분 동안 기다릴 터이니 쓰시오” 하고 종이 한 장을 놓고 현관으로 나가버린다.
 
 
  아버지의 마지막 미소
 
1929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의 이광수. 사진=조선DB
  어머니, 언니와 나는 놀라서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서 있었다. 어머니는 손과 몸을 떠셨다. 아버지는 책상 앞에 가만히 꿇어앉으셨다. 5분이 지나도 아버지는 쓰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만년필, 연필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꺾어버리고 찢어버렸다. 20분쯤 지나 그 인민군 장교는 다시 들어와서 아버지 앞에 놓인 종이와 내동댕이쳐진 만년필들을 보고는 “당신은 미국 비행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요. 어서 나와!” 하고 성을 내었다. 어머니가 덜덜 떠는 것을 보고는 “문화인이 비겁하게 떨기는 왜 떨어요?” 하고 조롱했다. 어머니는 땅에 무릎을 꿇고 그 인민군이 아버지를 데려가지 않도록 빌자 그는 “나에게 비는 것은 봉건주의 사회의 나쁜 버릇”이라고 일갈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봉건주의가 아니다. 그녀는 다만 남편을 걱정할 뿐”이라고 점잖게 말했다. 아버지는 잡혀가실 때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 이후에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은 불확실하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언니의 기억이 다르다. 언니는 아버지가 트럭에 실려 북한 인민군에 잡혀갈 때 나는 울기만 하고 길까지 배웅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잡혀간 날은 전쟁 발발 후 17일째가 되는 7월 12일이다. 아버지가 잡혀가신 후 우리 집에는 보초가 없어지고 의료 기구와 가구들을 실어 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때 순화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 환자들을 우리 병원에 입원시켰다. 우리 집에는 식구라야 단 셋이 남았다. 우리는 심부름하던 아이, 식모, 간호사들을 모두 자기 집으로 보냈다. 우리는 집에 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빠 일이 궁금하여 이 집을 떠날 수도 없었다.
 
  7월 말경이었다. 새벽에 다 죽게 된 오빠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오빠는 자하문 밖 어느 바위굴 속에 숨어 있었는데 먹을 것은 떨어지고 아무거나 주워 먹어서 배는 아프고 이러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왔노라고 한다. 여위고 파리하고 흉하고 비참한 몰골이었다.
 
  이때는 ‘의용군’을 마구 길에서 붙잡아 가는 판이라 젊은 사람은 길에 마음 놓고 나타나지 못하였다. 오빠는 우연히 아버지가 잡혀가신 소식을 들었다. 이제 우리는 오빠의 안전을 걱정해야 했다. 어머니는 그를 숨기고 치료를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오빠가 어느 순간에 체포되고 순화병원 환자들로부터 감염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어머니는 의원 복도 아래에 있는 지하실로 갔다. 좁은 창문이 있는 구석에 장작들과 구공탄들을 쌓아 오빠를 위한 비밀 방을 만들었다. 밖에서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바로 오빠는 여기에 숨었다. 날마다 주사를 놓고 영양분을 취하도록 하였더니 일주일 지나니까 오빠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제는 돈을 넉넉히 주어 가지고 달아나도록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지하실 위 복도가 사람 발자국 소리로 요란했다. 한 20명의 사복 한 젊은 내무서원들이 집 수색을 하기 위해 급습했다. 그중에는 멋모르고 날뛰는 의사 나부랭이도 있었다. 오빠는 민첩하게 지하의 숨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당장 우리에게 집을 비우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만일 지하실에 오빠만 감추어 놓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네. 나가겠습니다” 하였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룻밤만 더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조그마한 방 하나로 내몰고 그 방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나가라고 했다.
 
 
  지하실 창틀을 뜯어낸 어머니
 
춘원 이광수(오른쪽)와 부인 허영숙(가운데). 왼쪽의 아들 봉근은 8세 때 사망했다. 사진=조선DB
  우리는 빈 몸으로 그 작은 방으로 가서 벌벌 떨고 앉아 있었다. 집에서 쫓겨나는 것, 빈 몸뚱이 거지꼴이 되는 것, 이것들은 다 우리에게 걱정이 아니었다. 오직 지하실에 있는 오빠가 걱정이었다. 저들에게 발각되었다가는 당장에 잡혀갈 것이다. 그들은 좋은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들어갔다. 오빠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날은 저물어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들이 저녁을 먹으러 간다면서 두 사람을 남겨놓고 모두 나가버렸다. ‘옳지, 이때가 오빠를 구할 때’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남아 있는 두 사람이 하필이면 지하실로 들어가는 문 앞 마루에 앉아 있었으니 어떻게 오빠가 나올 것인가. 어머니는 무슨 궁리를 하였는지 “너희는 이 방에 가만히 있고 나오지 말아라. 내가 할 방법이 있다” 하셨다. 그러나 나는 궁금하여 가만가만히 어머니 뒤를 따라나섰다. 우리 집은 병원이라 다소 집이 커서 이리저리 움직여도 그 두 사람의 눈을 피할 수가 있었다.
 
  지하실에는 출입구 이외에 공기 통하는 창이 두어 군데 있었다. 그러나 그 크기가 다섯 치가량이나 될까, 도저히 사람의 머리가 드나들 수 없었다. 이 창은 뒤꼍으로 나 있어서 그 두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어머니는 재빠르게 가셔서 창틀을 뜯었다. 창틀이 모래흙에 파묻히고 비바람에 삭아서 뜯을 수 있었는지 모르나 그래도 어머니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죽고 사는 전쟁이었다. 적은 바로 저기 앉아 있다. 이것을 뜯다가 발각이 되면 우리가 죽고 마는 것이요, 요행히 성공하면 오빠와 우리가 살아나는 길이다.
 
  나는 그들이 이리로 올까 망을 보고 있었다. 오는 듯하면 변소에 갔다 오는 체하다가 또 창틀을 파냈다. 창틀을 파내고 어머니가 당신의 머리를 그 안으로 넣어보았더니 넉넉히 들락날락한다. 창틀 파내는 일에는 성공하였다. 창틀은 파내었으나 여기서 나와서 어디로 가나! 바로 곁에 한 길이나 되는 높은 담이 있고 그 담 너머는 바로 예전 반장 집이다. 그 댁은 공산당 세상이 되고서는 반장 자리에서 물러난 집인데 어머니와 친한 분이다.
 
  그 댁에는 반장 집 말고도 여러 가구가 살았다. 모두 하루하루를 노력하여 날품을 팔아 사시는 분들이다. 바로 그 담 밑에는 무연탄이 들어 있는 나무 궤짝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궤짝 두 개를 포개어 놓고 담 너머로 머리를 내밀어 “여보세요” 하고 불렀다. 그러고는 “지금 곧 우리 아들이 이 담을 넘어갈 터이니 받아서 숨겨달라”고 부탁하였다.
 
  “네, 그렇게 하겠으니 어서 넘겨 보내시오” 한다. 서로 정(情)이 통하는 우익 진영이다. 우리는 미국 비행기가 오지 않는 날이면 실망하고 낙심하는 대한민국 백성이다.
 
 
  오빠의 탈출
 
  다음에 남은 일은 오빠에게 이 구멍으로 지금 곧 나오라는 기별을 할 일이다. 지하실이 30간이나 되고 기역자로 구부러지고 물건이 이리저리 쌓여서 오빠가 숨어 있는 장작더미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어머니는 다시 복도 마루로 들어가서 오빠가 여기쯤 숨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마루에다 입을 대고 “영근아!” 하고 부르니까 바로 그 밑에 있어서 “네” 하는 대답이 곧 들렸다.
 
  “서쪽 창으로 나와서 반장 집으로 향한 담을 뛰어넘어라. 연락했다. 지금 곧 나와라. 지금 못 나오면 죽는다.”
 
  다시 “네”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와 나는 창문이 있는 곳으로 가서 오빠 머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초조하였는지, 5분가량 지났을까. 오빠 머리가 나왔다. 그런데 현관문 종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돌아온 것이다. 오빠에게 “어서, 어서” 하고 재촉하였다. 오빠가 담을 뛰어넘었다. 우리는 뒷간에 갔다 오는 체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 일을 하는 동안이 한 30분 걸렸다.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는 내일 일찍 이 집을 떠나면 그만이다’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어머니는 생각이 다르셨는지 자다 깨 보면 일어나 앉으셨거나 오빠가 넘어간 담을 멍하게 내다보고 계셨다.
 
  이날 따라 늦게 뜬 달이 휘황하게 밝았다. 붙잡혀가신 아버지의 생각을 할 겨를도 없고, 집 떠나는 슬픔도 없었다. 그날 밤 당장 오빠와 우리의 생명이 위태한 것이 무섭고 두렵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날 밤은 무사히 넘겼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우리는 어저께 쑤어놓았던 콩나물죽을 차가운 대로 먹고 집 떠날 준비를 하였다. 내가 그 사람들 앞으로 가서 지금 우리가 나가겠다고 하자 당장 갈아입을 옷 등을 넣을 한 개의 자루 지참을 허용하였다. 공산당원은 자루 속을 검사했다. 그는 불교 염주와 포켓 크기의 성경을 꺼냈다. 두 물건은 아버지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 그 검사관은 “이런 것들은 새 사회에 쓸모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 성경은 내 일생 동안 떼어놓은 적이 없고 아버지의 글씨가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나는 검사관에게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너희가 그동안 안락하게 잘 먹고 잘살았던 속죄(贖罪)를 하라고 하는 것’ 같은 당당함을 읽었다.
 
  우리는 자하문 밖 어머니 둘째 언니 댁으로 갔다. 어머니의 언니는 조카와 혼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 식구에게 작은 방을 내어준 언니에게 감사할 겨를도 없이 반장 댁에 두고 온 오빠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집에는 여러 가구가 살고 어린 아이가 십여 명이나 있으니 어느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와서 붙잡혀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오빠에게 갔다.
 
  어머니는 “영근아, 잡혀갈 것에 대비해라. 과거에 내가 너한테 섭섭하게 해준 일 있거든 용서해라” 그렇게 말씀하고 돈 5만원을 주며 우셨다. 오빠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 내가 왜 잡혀가요. 국군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잡혀갈 테니 염려 마세요.”
 
  반장 댁에 사는 10명이 넘는 아이들은 부지불식간에 오빠의 존재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위험해도 자하문 밖 어머니의 둘째 언니 댁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우선 길에서 젊은 남자가 보이기만 하면 잡아가는 판국이니 문 밖을 나서기도 어렵고, 둘째 어머니 언니 집의 사랑채에 세(貰) 들어 있는 사람이 공산당원이었다. 그들 부부의 여자는 여성동맹의 위원장이요, 남자는 빨치산 부대원으로 나갔던 공산당 간부였다. 우리 세 식구는 정히 갈 데가 없어서 그곳으로 갔지만 이 집도 여러 날 있을 곳은 못 되고 오빠가 숨을 곳은 더구나 아니었다.
 
 
  정신영 원장
 
  우리가 집에서 쫓겨난 것은 8월 5일이었다. 자하문 밖 어머니 언니 집에서 우리는 이틀 밤을 잤다. 어머니는 이 집에 세 들어 사는 공산당원이 우리를 ‘서방 동조자’로 의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절망적인 때 어머니는 인정 많은 사람을 발견했다.
 
  사흘째 되는 날 우리는 마포에서 조그만 산부인과 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어머니의 15년쯤 후배인 정신영(鄭信泳) 원장의 상신의원으로 갔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피란처를 제공했다. 상신의원 원장은 젊고 역동적인 분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 의원을 방문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눈에 덜 띄게 되었다.
 
  정신영 원장의 남편 조득준 선생님은 대한민국 우익 중에서도 우익이며 전 올림픽농구대회 챔피언이고 열정적 기독교인이다. 정 박사는 공산당 치하에서 겉으로는 공산당의 승리를 열망하는 것처럼 하면서 공산당원의 치료도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집 지하에는 4명의 우익 인사를 숨겨주고 있었고 우리 식구 셋과 오빠까지 숨겨주겠다고 하였다.
 
  원장님은 겉으로는 좌익처럼 행동하지만 우익으로서 포부가 크고 성격이 활달하시고 말하자면 여성 정치가 타입이었다. 오빠를 효자동에서 마포로 데려올 때에도 정 원장은 중국어로 ‘구호팀’이라고 쓴 붉은색의 ‘중국적십자’ 완장을 주어서 오빠는 그것을 팔에 두르고 대로를 걸어서 무사히 마포로 올 수 있었다.
 
  이때 우리로서는 정 원장이 구세주였다. 누가 이 어려운 판국에 반동으로 몰린 우리 식구를 받아줄 사람이 있겠는가. 형제들도 일가친척도 우리를 꺼려 하였다. 우리와 가까이하다가는 자기네도 위태한 까닭이었다.
 
  이 의원에 숨은 사람 가운데는 건축을 전공하는 분이 있어서 의원의 천정(천장) 안에다가 널빤지 쪽을 깔고 그곳에 사람이 올라가 잘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천정 한구석으로 동아줄을 매어 그것을 타고 사람이 올라갔다. 저녁을 먹고는 천정으로 올라가고 낮에는 내려와서 방공호(防空壕)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 집은 밖에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의원 진찰실을 통해야만 하고, 직접 안으로 들어오는 문은 항시 잠가놓았다. 진찰실에는 간호사와 심부름하는 원장 조카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가 영리해서 안팎의 연락을 잘 해 주었다. 낮에라도 이상한 사람이 번뜩 보이기만 하면 우리에게 곧 연락이 되었다.
 
 
  다가오는 위험
 
  평소에 원장 선생은 천연스럽게 병원으로 인민군이나 내무서원을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분의 용감함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원장은 젊고 인물이 잘나고 체격도 좋았다. 인민군 장교도 간혹 치료를 받으러 온다. 그러면 재빨리 연락원이 우리에게 와서 ‘쉬’ 하고 신호를 보내고 간다. 원장이 원체 사람이 잘나시고 인심이 좋고 활달하니까 내무서원에게도 호감을 샀다. 원장은 사람을 많이 숨겨놓았기 때문에 일부러 호감을 사려고 고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무서원도 가끔 와서 유행가를 부르고 한 시간씩 간호사와 놀다 가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내무서원이 진찰실에 와 있는 것을 모르고 어머니가 진찰실을 내다보다가 그 사람에게 들켰다.
 
  “저 사람은 누구요?” 하고 내무서원이 물었다. 그러자 원장은 아주 천연스럽게 “저 노인 말인가요? 공습을 받아 남편이 죽고 병신이 된 분이에요. 여보, 팔 아픈 것은 좀 어떠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내무서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9월 15일이 가까워서는 원장도 겁을 냈다. 아마 상신병원 원장의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이 생긴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 병원도 크게 수색을 당할 날이 머지않아 온다고 원장은 걱정을 하였다. 9월 10일쯤 되어서는 어머니는 아주 절망에 빠진 말을 하셨다.
 
  “영근아, 이제는 저 마포 강으로 가서 빠져 죽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심하게 집 수색을 하는데 우리라고 피할 길이 있겠냐. 이젠 먹을 것이 떨어져 살 수도 없다.” 오빠는 어머니의 말씀을 용기 있게 반박하였다. “연합군들은 9월 말까지 꼭 들어옵니다. 두고 보세요. 나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그때까지만 어떻게든지 견디어봅시다” 한다. 오빠의 계산으로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군사 준비를 다시 해가지고 상륙을 하려면 시간적으로 9월 하순까지 걸린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오빠의 말을 믿고 다시 용기를 내어 마지막으로 몸에 지녔던 금가락지를 팔아서 7만원을 마련했는데 이 돈이 떨어지기 전에 연합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때 7만원이면 죽을 쑤어 먹고 살더라도 우리 네 식구가 한 달을 지탱하기 어려운 돈이었다.
 
 
  평양감옥의 춘원
 
북한군 점령하 서울에서 벌어진 인민재판. 양복을 입은 이는 소설가 김기진으로 인민재판 후 죽도록 구타당한 후 버려졌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사진=조선DB
  9월 12일경 공산주의자 신문은 범죄인들의 재판이 개시된다는 보도를 했다. 판사와 검사들이 임명되었다. 죄수들의 가족은 옷을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상세를 물어보기 위해 형무소에 갔다.
 
  어머니와 나는 처음 마포형무소에 갔으나 그곳에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다음 서대문형무소에 갔다. 하루 지나니 그들은 아버지가 여기에 수감되어 있다고 하면서 차입물을 받겠다고 하였다. 집에 와서 “아직 그래도 사셨구나” 하며 모두 울었다.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한 9월 15일 우리는 아버지의 재킷과 담요와 비타민 한 병을 가지고 서대문 감옥으로 갔다. 젊고 친절하게 보이는 인민군 간수는 ‘이광수’ 하고 아버님의 이름을 부르더니 가져간 차입물 자루를 받아 갔다. 크게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최소한 아버지가 서대문 감옥에 계시고 어머니가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차입물을 수령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뒤에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속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7월 12일에 붙잡혀가셔서 7월 16일 벌써 평양감옥으로 데려갔다. 아버지의 지인인 계광순(桂珖淳) 선생이 7월 28일 평양감옥에 있을 때 아버지와 한 방에서 한 달 동안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다른 지인인 신동기 선생도 수갑을 차고 한 달 동안 아버지와 같은 감방에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기침이 매우 심해서 독감(獨監)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계광순 선생과 신동기 선생은 공산군이 북쪽으로 후퇴할 때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도주하여 살아오신 분들이다.
 
  계 선생과 신 선생은 그들이 잡혔을 때 건강하였다. 서울에 연합군이 들어온 것은 9월 27~28일이지만 그들이 평양에 진주한 것은 10월 24일이었다. 연합군이 북한에 진군할 즈음 후퇴하는 북한 인민군은 죄수들을 소규모 그룹으로 나누어 분산시켰다. 계광순 선생은 그 기회에 도망을 쳤다고 한다.
 
  계 선생은 아버지가 평양감옥에서 방은 달랐지만 밤늦게까지 조사를 받으러 다니시는 것을 보았으며 그 후 아버지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연합군이 전진하자 공산주의자들은 급하게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나 죄수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직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계광순 선생은 인민군이 지키는 민가에서 탈출할 것을 엿보고 있다가 지키는 사람이 잠깐 없는 틈을 타서 용케 도망을 해 나오신 것이다. 산으로 산으로 여러 날을 굶고 구사일생으로 연합군 진영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인천상륙
 
  건강하고 용감한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아버지같이 병약하고 용기 없는 분은 공산당이 끌고 다니는 대로 끌려다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비열하게도 차입물을 받는 속임수를 쓴 것이었다. 그때 서대문 감옥에 옷을 차입한 사람들은 수백명이었다. 공산주의 간수들은 이름이 같은 것으로 실수를 할 리가 없다. 나는 그때 차입신청서에 이렇게 썼다.
 
  〈이광수 59세 저술업
  본적 서대문 1가 9번지
  현주소 효자동 175번지
  차입인 이녀 이정화〉
 
  배경을 같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들은 끝판에 달아날 때 자기네들을 가장하기 위한 남한의 민간 옷을 마련하느라고 이런 행동을 하였는지 모른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싸우는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 되고 후퇴하게 될 때 이러한 일을 하였다.
 
  아버지 옷을 서대문 감옥에 차입한 것이 9월 15일이다. 차입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시간이 걸려 나는 저녁 7시에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오빠가 대단히 기뻐하는 얼굴로 저 소리 좀 들어보라는 것이다. 과연 이상한 소리가 인천 방면에서 들린다. 이 집 뒤꼍은 백 평가량 되는 높은 지대다. 그리고 사방이 둘러싸여 밖에는 잘 보이지도 않고 앞뒷집이 모두 우리와 통하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숨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나와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소리는 무척 형용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연속적으로 들려오는데 그것은 돌 깨뜨리는 소리와도 다르고 맷돌질하는 소리라고나 할까, 그런 소리가 연거푸 들린다. 오빠는 좋아서 껑충껑충 뛰면서 이것이 아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소리라고 한다.
 
  “그것 보세요. 내 말이 맞지 않아요. 이달 안으로 들어온다고 그랬지요” 하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바깥소문에 의하면 이미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인민군은 원거리 대포를 바로 우리 집 맞은편 마포형무소의 마당에다 걸어놓고 인천을 향하여 연속적으로 쏘아댄다. 밤새도록 쏘았다. 우리는 귀가 먹을 지경이요, 어지러워서 정신을 못 차렸다. 대포는 인천 쪽에서도 쏘았을 터인데 우리 동네는 무사하였다.
 
 
  서울수복
 
  9월 16일 낮쯤 해서 공산주의자들은 연합군이 인천으로 상륙하려는 것을 격퇴시켰다고 발표하였다. 우리는 정말인가 하고 가슴이 가라앉았다. 인민군은 사흘가량 대포를 쏘더니 물러나서 아현동 로터리에다 옮겨놓고 쏘아댔다. 옳지! 국군이 더 가까이 온 모양이었다. 그 후부터는 대포 탄환이 비 오듯이 쏟아져 왔다. 잠시도 쉬지 않고 ‘꽝’ 하면 ‘쒸’ 하고 불덩어리가 우리 동네를 지나서 서울 시내로 들어가 쿵 하고 맞으면서 불길이 일어났다. 무섭고 끔찍한 광경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요행하게도 그 대포알이 우리 동네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군과 연합군의 대포 쏘는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서 마포 강 바로 건너편에서 쏠 때에는 서울의 밤하늘은 온통 불을 켜놓은 것처럼 되고 귀가 따가웠다. 포탄의 파편이 우리 집 앞뒤로 떨어졌다.
 
  9월 24일 밤이다. 공산당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사람을 마구 총살하고, 총 없는 자는 나무때기에 쇠창살을 꽂아가지고 떼를 지어 다니며 양민을 함부로 찌르는 때였다. 마침 우리 집 건너편에서 불이 나서 그 불길은 거의 우리 집으로 옮아붙으려 하였다. 광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다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당은 이리떼처럼 날뛰지 않는가. 이 판에 이 집에 불이 붙어 숨은 사람이 나왔다가는 당장에 잡혀 죽을 것이다. 사내들도 이제는 할 수 없다 하고 땅바닥을 쳤다. 그러나 기적이다. 그 불길이 우리 집으로 건너오지 않고 꺼져버린 것이다. 얼마나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는가.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동원을 시켜서 가마니에다 흙을 집어넣어 길을 막아놓고는 시가전 준비를 하였다. 비행기는 연합군을 엄호하느라고 연달아 쉬지 않고 날아와서는 폭격을 하였다. 하늘에서 내리쏘는 기관포의 파편이 우리 집 마당에도 수북하게 떨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물에 물을 길러 나갔고 밥을 지어 먹고 살아야 했다.
 
  9월 27일 정오 때이다. 밖으로 망을 보러 나갔던 아이가 달음질쳐 들어오면서 미국 병정이 탱크를 타고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뛰어나갔다. 과연 미군들이 탱크를 몰고 수없이 들어왔다. 뒤이어 국군이 들어왔다. 어머니는 소리를 내어 우셨다. 우리의 입에서는 절로 만세 소리가 나왔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리하여 우리는 9·28을 맞은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당장에 걱정되는 것이 서대문 감옥에 계시리라고 믿고 있던 아버지의 안부였다. 우리는 그날 가보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서 못 가고, 그 이튿날 29일에도 못 가고, 30일 아침 일찍이 집을 나서 서대문 감옥으로 갔다. 서대문 감옥은 텅 비어 있었다. 근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9월 20일 전후하여 어디론지 모두 끌려갔다고 한다. 길가에는 인민군과 시민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고 사람들은 얼이 빠져 있었다.
 
  우리는 그 길로 효자동 집으로 향했다. 공산당원들이 우리 가족을 쫓아내었던 효자동 집에는 문이 다 잠겨 있었다. 앞문, 뒷문, 병원 현관문도 모두 닫혀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인민군이나 공산당원들이 아직도 우리 집을 차지하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도 나는 혹시 누가 숨어 있지나 않을까 하고 겁이 났는데, 오빠가 담을 훌쩍 넘어서 대문을 열었다. 우리 집을 점령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황급히 도망친 것 같았다. 마루 위 밥상에는 먹다 남은 반찬이 쉬어 있고 두 달 전 우리가 쓰던 밥통에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보리밥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들이 신고 있던 신발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산부인과 의원의 수술실, 진찰실, 입원실들은 텅 비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한 집으로 돌아왔지만 새로운 슬픔이 엄습해왔다. 아버지가 계시던 방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고, 어머니는 자신의 잘못으로 아버지가 잡혀가시게 된 것 같아서 형언할 수 없는 낙망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우리의 안전이 아버지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왜 그리도 서러워하셨을까? 7월에 잡혀가셨을 때 아버지는 얇은 적삼을 입고 계셨었다. 추운 겨울에 북으로 끌려간 아버지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서대문 감옥에 차입한 따뜻한 옷들이 아버지께 전달되었을까? 아마도 이런 생각들이 어머니를 괴롭혔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숨기는 데 실패했다. 어머니는 여생 동안 아버지를 보호하지 못한 실수로 울었다. 나는 나에게 아버지요, 스승이요, 신념이요, 희망이던 아버지를 이렇게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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