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1〉

당쟁의 뿌리가 된 南宋 주희와 진량의 論戰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주희는 도덕적, 진량은 功利的
⊙ 주희와 조선 성리학자들이 夏·殷·周 3代를 추앙하는 것은 현실의 王權을 부정하는 속셈 내포
⊙ “形而上 세계 속 理氣 관계는 形而下 정치 질서 속 군주-신하 관계로 置換돼”
⊙ 東人-南人은 王權 존중, 西人-老論-派는 王權 제약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주희
  [연재를 시작하며]
 
  문재인(文在寅) 정권은 말 그대로 본격 당쟁(黨爭)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국가의 본령을 망각한 특정 당파(黨派)의 집권은 곧 그 당파의 전권(全權) 장악을 의미한다. 국민통합과 반대 세력과의 대화는 실종됐다.
 
  전통사회는 왕권(王權) 사회이기 때문에 당쟁 자체가 금기시됐다. 하지만 그 틈을 비집고 나와 중국의 남송(南宋)이나 우리나라의 조선 중·후기 때 피 말리는 당쟁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나라와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당쟁의 주역들이 마치 당쟁을 조정하려 한 인물인 양 미화되고 특정 당파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대한민국 지식인 사회에 이식돼 온 국민에게 퍼지기까지 했다.
 
  조선 당쟁은 철저하게 주희(朱熹)라는 인물의 폐쇄적이고 반(反)왕권적인 이론이 수입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거기에는 민주적 요소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파당의 정치적 이익만이 존재할 뿐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니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니 예송(禮訟)논쟁이니 하는 것은 겉치레에 불과했다.
 
  이런 점을 분명히 하면서 조선을 분열시키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이상(理想)을 걷어차면서 탁상공론으로 정권 장악 놀음에만 몰두해온 조선 당쟁 300년을 추적하고자 한다.
 
  때로는 주희와 조선 선비들과의 연결고리에 집중할 것이고, 때로는 ‘조선의 주희’를 자처한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몇몇 인물의 사상 속으로 들어갈 것이며, 때로는 도대체 그들이 숭상했던 ‘주희의 사상 자체’가 어떤 것인지도 부분적으로나마 파고들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 당쟁 300년의 겉과 속, 뿌리와 줄기와 이파리를 샅샅이 파고들고자 한다.

 

  조선의 당쟁을 거시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실마리를 저 멀리 남송(南宋) 시대 두 유학자의 격렬한 논쟁에서 찾은 이유는 이 사건이야말로 조선의 300년 당쟁을 총체적으로 전망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남송 시대 두 번째 황제인 조신(趙昚·효종)의 통치 연간인 순희(淳熙) 8년(1181년)부터 12년까지 4년에 걸쳐 당시 52세던 주희(朱熹·1130~1200년)와 39세던 진량(陳亮·1143~1194년)이 유학의 도(道)를 둘러싸고 두 사람 모두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논전(論戰)을 벌였다. 사실 외형적으로만 보면 두 사람은 같은 유학자에다가 둘 다 금(金)나라에 맞서 화의(和議)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는 크게 대립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개인적인 친분도 깊은 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깊은 심연(深淵)의 양편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평소 진량은 성리학(性理學)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반대하며 실사실공(實事實功)을 강조했다. 그는 기존의 성리학자들에 대해 “도덕성명(道德性命)에 대해 공담이나 일삼으니 중풍으로 마비돼 고통과 가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대신 그는 유학을 원칙으로 삼되 세상을 위해 백성을 구제하는 실질적인 일을 추구했다. 이를 흔히 사공학(事功學)이라고도 하고, 공리(功利) 추구라고도 부른다.
 
  첫 번째 불꽃은 그간 중국 왕조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서 피어올랐다. 이미 주희뿐만 아니라 기존의 성리학자들은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는 오로지 천리(天理)로써 정치를 했고,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는 오로지 인욕(人欲)으로써 정치를 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도(道)라는 것도 주희 등에게는 바로 삼대의 도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나 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에 대해서는 이욕(利慾)에 입각한 공리(功利)나 추구한 잡패(雜覇)일 뿐 삼대의 왕들처럼 왕도(王道)를 행한 임금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이나 주희는 늘 “삼대의 도리는 주나라에서 끊어졌다”고 말했다. 이는 한나라·당나라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송나라조차도 임금다운 임금이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이것만으로도 극한의 왕권 비판 이론이었다.
 
 
  “공로가 이루어진 곳에 바로 德이 있다”
 
주희와 논전을 벌인 진량.
  진량은 이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도리는 춘추시대 이래 1500년 동안 끊어진 것이 아니라 한나라와 당나라에도 이어졌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것이 당 태종을 바라보는 입장이다. 당 태종 이세민이 이건성(李建成)과 이원길(李元吉)을 주살(誅殺)한 일은 “천하에 의롭지 않다는 명분을 범했지만” 도리어 자기에게 주어진 천명(天命)에 순응해 행동함으로써 위태롭고 어지러운 상황을 안정시켰으니 비도덕적인 수단으로 도덕적인 목적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이 점은 우리로서는 조선 역사에서 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을 끌어들여 검토해볼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진량의 인식은 매우 현대적이다. 진량과 비슷하게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당대의 진부량(陳傅良·1137~1203년)이라는 학자는 진량의 이 같은 관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공로가 이루어진 곳에 바로 다움[德]이 있으며 일이 이루어진 곳에 바로 이치[道]가 있다.”
 
  사공(事功)과 도덕(道德)은 별개로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또한 극히 현대적인 발상이다. 그러나 도덕주의자 주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대의 주장은 올바른 도리를 어겨서라도 현실의 폐단을 구제하려는 뜻이 너무 커서 올바른 도리를 지키려는 대비책이 없다. 뒤에 태어난 사람들이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이런 설(說)을 듣는다면 그 해로움은 장차 이루 다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도덕에 사공, 공리, 실용이 끼어드는 것은 한 치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일합(一合)을 겨룬 것으로 끝나는 듯했던 두 사람의 충돌은 순희 11년(1184년) 봄과 여름에 감옥에 갇히는 시련을 겪은 진량에게 6월에 주희가 두 통의 편지를 보내면서 다시 이어졌다. 여기에 문제의 구절이 포함돼 있었다.
 
  “바라건대 제 말을 생각해보시고 의리와 이익을 함께 시행하고[義利雙行] 왕도와 패도를 아울러 쓴다[王霸竝用]는 설을 물리치고, 분노를 억제하고 사욕을 막으며 선으로 옮겨가며 허물을 고치는[懲忿窒慾 遷善改過] 일에 종사하여서 순수하게 깨끗한 유학의 도리로 자기를 다스린다면 어찌 형벌을 받는 재앙만 면하겠습니까?”
 
 
  王權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장재
  주희의 이런 지적은 실은 그의 선배 성리학자 혹은 도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이다. 흔히 주희의 선배 도학자 혹은 이학자라고 하면 주돈이(周敦頤·1017~1073년), 장재(張載·1020~1077년), 정호(程顥·1032~1085년)와 정이천(程伊川·1033~1107년) 형제를 꼽는데, 그중에 흔히 장횡거(張橫渠)로도 불리는 장재의 말을 들어보자.
 
  “배우는 과정인데도 공로 세우기를 먼저 뜻으로 삼는다면 곧바로 배움에 해가 된다. 뜻에 필연적으로 천착이 있게 되어 뜻을 만들어서 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덕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는데도 먼저 공로 세우기를 일로 삼는 것은 목수를 대신해서 대패질을 하는 것이니 손이 상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주희는 선배 도학자들의 교조를 반복했던 것이다. 진량은 이 같은 지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利]이 인욕(人欲)은 아니며 백성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것[事功]이 패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리와 이익[義利]은 얼마든지 합치될 수 있으며 다움과 공로[德功] 또한 무조건 분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진량의 생각이었다. 이때 이익이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백성이나 나라의 이익이다. 주희는 이런 의미의 이익조차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의 이 같은 입장 차이가 당시의 남송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지에 대해 수징난(束景南) 교수는 《주자평전》(김태완 옮김 역사비평사)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진량이 한나라와 당나라도 삼대(三代)와 마찬가지로 천리(天理)와 인도(人道)가 통치한 세계였다고 선양한 것은 도리어 전체 봉건 제왕의 통치와 봉건제에 대한 최대의 찬미가 되었고 (주희를 포함하는) 세속유학자[世儒]에 견주어 더욱 멀리 나아가는 것이었다. 봉건사회를 미화하는 이런 논조에 따르면 필연코 당시 남송의 제왕 통치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으며 이는 남송의 현실 사회를 맹렬히 규탄하는 주희의 도학(道學)의 비판 정신과 서로 용납할 수 없었다.”
 
 
  황제권을 부인한 朱熹
 
  그래서 진량은 자연스레 왕권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지만 주희는 왕권을 극도로 부정적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주자학자들이 삼대(三代) 운운할 때 담긴 현실정치적 함의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점은 훗날 조선의 주자학자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기존의 조선 성리학에만 매몰될 경우 이처럼 숨어 있는 코드를 놓칠 수밖에 없다. 당쟁 발발 이후부터만 보자면 조선의 동인(東人)이나 남인(南人)은 대체로 진량과 비슷한 입장이었고, 서인 노론 벽파는 주희를 견결히 고수했다. 그 정점에 ‘조선의 주자’ 송시열이 있는 것이다.
 
  그해 9월 주희는 다시 진량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나라 고조의 경우 사사로운 의도의 정도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 태종 마음의 경우에는 나는 그의 한 생각조차 인욕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다만 인의(仁義)를 빌려서 사사로움을 행했지만… 1500년간 바로 이와 같이 가만히 있기만 했기 때문에 단지 새는 곳을 막고 해진 곳을 대충 얼기설기 기워가면서 시일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비록 소강(小康)이 없지는 않았으나 요순(堯舜)·삼왕(三王)·주공(周公)·공자가 전한 도(道)는 하루도 천지간에 시행된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춘추시대 이후 1500년 중국사, 특히 황제들에 의해 통치되어온 역사의 시간 전체에 대한 부정이자 황제권(皇帝權)에 대한 정면 비판이다. 당연히 주희가 살던 남송의 황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주희의 잣대는 오직 하나, 도덕(道德)이었고 그 도덕의 올바름 여부에 대한 판단의 권한은 임금이 아니라 도학자(道學者)인 자신에게 있었다. 굳이 긍정적으로 보자면 정치의 주체가 현실 속의 권력자인 임금이 아니라 도를 체현한 도학자에게 있다고 자부한 것이다. 이들이 도통(道統)을 강조한 의도 또한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런 도통 현창(顯彰)은 고스란히 조선에도 이어져 문묘(文廟) 종사를 둘러싼 정치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管仲을 어떻게 볼 것인가
 
齊나라의 명재상 관중.
  순희 12년 두 사람의 논쟁은 갈림길에 섰다. 진량은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비판하는 자들은 공씨의 문하에서는 오척동자라도 모두 오패(五霸)를 거론하기를 부끄러워하였다 하고 맹자는 패자가 힘으로 인을 가장했다고 힘써 논하였으나 부자(夫子·공자)는 이와 같은 일을 칭찬하면서 ‘누가 그의 어짊만 하겠는가[如其仁]’라고 하였습니다. 말의 맥락을 보면 결코 비판하는 자들의 말과 같지 않습니다.”
 
  이는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명재상(名宰相) 관중(管仲)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나오는 관중에 대한 공자의 평가를 직접 보아야 한다. 두 가지 사례가 연이어 실려 있다. 첫 번째 사례다. 먼저 제자 중에서 의리를 중하게 여기는 용자(勇者)인 자로(子路)가 물었다.
 
  “환공(桓公)이 공자 규(糾)를 죽이자 소홀(召忽)은 죽었고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관중은 어질지 못합니다[不仁].”
 
  공자가 말했다.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함에 있어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관중이 힘쓴 덕분이었으니 누가 그의 어짊만 하겠는가[如其仁]?”
 
  마침 자로의 말에 대해서는 주희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근거로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제(齊)나라 양공(襄公)이 도리를 잃자 포숙아(鮑叔牙)는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받들어 거(莒)나라로 망명하고 노(魯)나라 사람들이 공자 규를 제나라로 들여보내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마침내 소백이 들어가니 이가 환공이다. 환공이 노나라로 하여금 규를 죽이게 하고 그를 모시던 관중과 소홀을 보내줄 것을 청하자 소홀은 죽고 관중은 함거에 갇히기를 자청하였는데 포숙아가 환공에게 말하여 관중을 재상으로 삼게 하였다. 자로는 관중이 자기 군주를 잊고 원수를 섬겼으니 마음을 잔인하게 하고 천리(天理)를 해쳐 어짊이 될 수 없다고 의심한 것이다.”
 
 
  주희, 공자마저 부인
 
공자
  그러나 공자의 시야는 훨씬 넓다.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사례다. 아마도 같은 자리에서 있었던 대화로 보인다. 이번에는 제자 중에서 사리를 아는 지자(知者)인 자공(子貢)이 물었다.
 
  “(아무리 그렇게 말하셔도) 관중은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는데도 기꺼이 따라 죽지 못했고 또 환공을 돕기까지 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나(우리)는 머리를 헤쳐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필부들이 작은 신의[諒]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매 죽어서 시신이 도랑에 뒹굴어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이하겠는가?”
 
  자로나 자공을 공자는 아녀자의 어짊[婦仁], 필부의 용맹[匹夫之勇]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건 누가 보아도 진량이 공자의 노선에 충실하고 주희는 자로나 자공의 말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희는 진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관중의 공로는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관중의 공로와 같은 것은 (명재상인) 이윤(伊尹)이나 여상(呂尙・강태공) 이하 누가 미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마음은 바로 이욕(利欲)의 마음이고 행적은 바로 이욕의 행적입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공자)은 비록 그 공을 칭찬했지만 맹자와 동자(童子·동중서)는 모두 법도와 의리[法義]를 가지고 재단하면서 조금도 그를 구실로 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희가 공자를 따르지 않고 나아가 맹자와 동중서를 끌어들여 오히려 공자의 주장을 굽히고 꺾음을 보게 된다. 이런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종종 공자의 유학과 주희의 도학은 실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 주나라를 규합한 관중의 공로는 우리 역사에서 실은 박정희(朴正熙) 시대에 대한 평가 문제와 직결된다. 박정희의 공을 인정할 경우 공자의 입장에 근접하는 것이고 도덕을 잣대로 박정희 시대 자체를 부정할 경우 주희의 입장과 거의 같아진다는 말이다.
 
 
  “주희는 동기적, 진량은 결과적”
 
수징난 저장대 교수. 사진=저장대 홈페이지
  이제 수징난 교수의 말을 통해 두 사람의 논쟁을 정리해보자.
 
  “주희는 동기적이고 진량은 결과적이다. 주희는 도덕적이고 진량은 공리적이다. 주희는 안으로 덕을 지키려 하고 진량은 밖으로 공(功)을 추구한다. 주희는 사람을 도에 복종시키고 진량은 도를 사람에게 굴종시킨다. 주희는 이성적이고 진량은 감성적이다. 주희는 역사의 진화와 현존 사회에 대해 소극적·부정적이고 진량은 역사의 진화와 현존 사회에 대해 적극적·긍정적이다. 주희는 제왕에 대해 비판적이고 진량은 제왕을 찬양한다. 주희는 유가의 정심성의(正心誠意)의 측면을 윤리적으로 강화하고 진량은 유가의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측면을 공리적으로 발전시켰다.”
 
  “주희는 이성적이고 진량은 감성적이다”라는 구절만 제외한다면 대체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주희의 이성은 편벽돼 있고 진량의 이성은 전체를 조망한다”고 하는 것이 실상에 적합할 것이다. 한마디로 진량은 공자에 가깝고 주희는 공자와 멀다.
 
  주희의 사위이며 주희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저서를 모두 그에게 남겨 자신의 학문을 잇도록 한 황간(黃幹·1152~1221년)은 주희를 기념하며 쓴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는 하늘에서 기원하고 사람 마음에 갖춰지며 사물에서 드러나고 정책에 실린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밝혀서 실천하면 (도는) 그 사람에게 보존된다… 요순, 우탕(禹湯), 문무(文武), 주공이 태어나자 도가 처음으로 행해졌고 공자와 맹자가 태어나자 도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공자와 맹자의 도는 주렴계(주돈), 이정(二程·정호와 정이천), 장횡거(장재)가 계승했다. 주렴계, 이정, 장횡거의 도는 문공(文公), 주선생(주희)이 또다시 계승했다.”
 
 
  “주희보다는 진량 쪽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위잉스(余英時) 교수는 《주희의 역사세계》(이원석 옮김, 글항아리)에서 주희는 도통(道統)과 도학(道學)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사용했다고 말한다. 즉 상고(上古)시대부터 주공에 이르기까지 도리를 실제로 행한 사람들은 도통(道統)에 속하고, 공자와 맹자가 처음으로 밝힌 것은 도학(道學)이라는 것이다.
 
  위잉스 교수는 우리가 앞서 살폈던 주희와 진량의 논쟁에 대해 언급하며 도통의 문제를 언급한다.
 
  “순희 12년(1185년) 주희는 진량과 그 유명한 왕패(王霸) 논쟁을 일으킨다. 정호(程顥)는 이전에 ‘삼대의 통치는 이치[理]에 순응하는 것이었고 양한(兩漢·서한과 동한) 이하는 모두 천하를 잡으려는 것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구절은 송대 도학자들이 왕패를 구분하는 기본 근거가 되었다. 삼대가 왕(王·임금다운 임금)이 되었던 까닭은 도통과 치통(治統)이 합일했기 때문이고 한나라와 당나라가 패(覇·힘으로 된 임금)가 되는 까닭은 치통이 도통에서 분리되어 세(勢·권력)만 있고 이(理·도리)는 없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송 도학자들은 이 논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 ‘마침내 삼대는 오로지 천리(天理)로써 행했고 한과 당은 오로지 인욕으로써 행했다’고까지 말하게 됐다.
 
  진량은 그런 편협하고 과격한 논의를 혁파하기 위해 삼대와 한·당은 왕패로 분명하게 구분될 수 없고 기껏해야 삼대는 다 해낸 데 반해 한·당은 다 해내지 못한 것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진량의 기본적 문제의식은 종합하자면 이렇다. 곧 한 고조와 당 태종이 이미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면 그 가운데 어떻게 도(道)가 전혀 없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위잉스 교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현대인의 역사적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주희보다는 진량 쪽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앞서 밝힌 대로 필자 또한 마찬가지다.
 
 
  內聖外王
 
  사실 송나라 때 도학이 나오기 전까지 유학은 건전했기 때문에 도통 운운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 왜 도학자들은 도통에 집착했을까?
 
  그것은 번성하던 불교와 맞서야 했던 송나라 유학의 특수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원래 도통이란 선불교(禪佛敎)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략히 말하면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고 할 때 기존의 유학은 외왕(外王)에 집중했다. 물론 공자도 수기(修己)를 말하기는 했지만 불교, 그중에서도 선불교의 내면탐색과 비교할 때 유학의 내성(內聖)은 많이 빈약했다. 그러다 보니 유가의 경전 중에서 그나마 본성[性]을 간략하게 이야기한 《중용(中庸)》이 이학자 혹은 도학자들의 주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묘하게도 바로 이 《중용》을 중심으로 도통 혹은 도학의 계통 전승이 이어지게 됐다.
 
  원래 도통과 도학의 구분은 주희 이전에 정이천이 형 정호의 묘비명에서 처음 했던 말이다. 이는 고스란히 성리학자뿐만 아니라 주희, 그리고 조선의 주자학자들에게까지 하나의 강령처럼 된 글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공이 죽고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다. 맹자가 죽고 성인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았다.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100세대 동안 선한 통치가 없었다. 학문이 전해지지 않으니 1000여 년 동안 참된 유학자가 없었다. 선한 통치가 없었으나 사(士)들은 오히려 저 선한 치도(治道)를 밝힐 수 있었고, 여러 선인을 사모하며 후인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참된 유학자가 없으니 천하가 혼돈스러운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여 인욕이 들끓고 천리가 소멸되었다.”
 
 
  《중용》은 어찌하여 지었는가?
 
  일단 이런 인식을 받아들이면 도학자 취급을 받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잡스러운 유학자[俗儒]로 비판의 대상이 됐다. 도통은 곧 신앙의 교리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를 강령처럼 선언한 주희의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를 읽어보아야 한다.
 
  “《중용》은 어찌하여 지었는가? 자사(子思)가 도학이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해 지은 것이다. 이는 대개 상고시대에 빼어나고 신령스러운 자가 하늘의 뜻을 이어 표준을 세움[立極]에서부터 도통의 전승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경전에 나타난 것으로는 ‘진실로 그 적중함을 잡으라[允執厥中]’는 것은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전수해준 것이요,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리의 마음은 미미하니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해야 진실로 그 적중된 도리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것은 순임금이 우왕에게 전수해준 것이다.”
 
  이를 자사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중용》이고 이후 그 전통을 맹자가 이어받아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밝혔고 이후 도리가 버려졌다가 정이천 형제가 1000년 동안 전해지지 않았던 전통을 이어 노자(老子)와 불교를 배척하는 공로를 이뤘다는 것이 주희의 주장이다.
 
  조선 초에 정도전(鄭道傳·1342~ 1398년)이 엉성한 형태나마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주로 이런 분위기의 성리학이다. 《맹자(孟子)》를 존숭했던 그가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지어 불교를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도전의 경우 군신공치(君臣共治)를 내세워 재상 중심의 정치론으로 나아간 것은 성리학의 동치천하(同治天下)의 연장선에 있지만 맹목적인 성리학주의자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주자학자들이 신주 받들 듯이 했던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중시하지 않았고, 또 주자학의 핵심 사회정책이라 할 수 있는 사창제(社倉制)나 향약(鄕約)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조선이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세워졌다는 가설(假設)은 다소 허망한 주장임을 지적해둔다.
 
  다시 주희의 도통과 도학의 문제로 돌아가자. 그 개념에 대한 학술적 토론은 학계에 맡기고 우리는 그 현실정치적 함의를 알아보자. 위잉스 교수의 말이다.
 
  “주희는 한편으로 상고의 도통을 모범으로 삼아 후대의 ‘교만한 군주’를 구속하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자 이래 도학의 정신적 권위에 기대 사대부(士大夫)의 정치적 지위를 이끌어 올리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중용장구서》에서 도통과 도학을 구분한 주된 의도였다.”
 
  훗날 주희가 남송 효종을 알현할 때마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正心]과 뜻을 열렬하게 하는 것[誠意]을 반복해서 말했던 것은 도통과 도학을 실천하는 관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正心]이야말로 도학자라면 최우선 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이언적의 상소
 
  이 점을 파악하고서 조선 중종 때 홍문관 부제학 이언적(李彦迪·1491~ 1553년)이 올린 소(疏)를 읽어보면 조선 선비들이 얼마나 깊게 주자학에 물들어 있는지 알 수 있다. 흔히 일강십목(一綱十目)이라고 하는데, 일강이 바로 글의 주된 목적을 밝힌 부분이라 가장 중요하다.
 
  “대체로 전하께서 명철하신데도 오늘날의 근심이 있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성학(聖學)의 공효를 다하지 못한 것이 있고 중도의 극치를 다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학이 이미 고명하시니, 다시 더 학문에 뜻을 두실 것이 없습니다’라고 진언하는 자가 있습니다.
 
  아!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오직 경사(經史)를 섭렵하는 공부로 전하의 학문을 도울 뿐이고, 요·순과 삼왕(三王)의 도리는 전하께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의 거룩하고 밝은 임금들은, 도(道)가 맞지 않는 때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느 때고 배우지 않은 때가 없었고, 도가 없는 사물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 가지라도 배우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뛰어난 사대부가 임금을 가까이하여 강론하고 규계(規戒)할 수 있는 것은 경연(經筵)의 몇 시간뿐이고 그밖에는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진강(進講)하는 글도 이제(二帝)·삼왕(三王)이 주고받은 심법(心法)의 뜻과 공자·맹자·주자·정자(程子)가 성현의 가르침을 전한 강학(講學)의 요체가 아니니, 경연에서 얻는 성학은 아마도 날마다 고명한 데로 나아가기에는 넉넉하지 못할 듯합니다. 이때 이외에 대궐 안에 깊이 계시어 한가히 쉬실 때에는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이 오직 환관(宦官)·궁첩(宮妾)의 무리뿐입니다. 그러므로 군자와 함께하여 감화되는 도움은 없고 하루 힘쓰고 열흘 게을리하게 될 염려만 있으니, 이러한 때에 성학의 공부하시는 방도를 신들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깊고 넓은 궁중에서 마음이 사물을 대할 때에, 심성(心性)을 간직하여 기르고 살피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데가 있어서 큰 근본이 확고하게 서지 못하여 통달하는 도리를 행하는 데에 막히는 것이 많은 듯합니다. 이 때문에 궁금(宮禁)은 막아서 엄하게 할 수 없고, 기강(紀綱) 또한 어디에 힘입어 세울 수 없으므로, 인재를 가리는 것이 혹 혼잡하여지고, 삼가야 할 제사가 문란해지며, 백성의 고통을 돌보려 하여도 돌보아지지 않고, 교화를 밝히려 하여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형벌을 삼간다고는 하나 오히려 억울한 옥사(獄事)가 많고, 사치를 막는다고는 하나 폐습은 여전하며, 간언(諫言)을 받아들인다고는 하나 직언(直言)이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말단으로부터 근본을 찾고 흐름을 따라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앞날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것을 두려워하고 삼가서 마음을 돌려 바른길로 향하지 않으십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학이 지극하지 못함을 아셔서 더욱 정일(精一)한 공부를 하시고, 남을 책망하지 마시고 자신을 책망하시며, 밖에서 찾지 마시고 안에서 찾으시며, 늘 삼가고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속이지 마시고 혼자 있을 때를 삼가시는 실제를 일삼으소서.
 
  그렇게 하시면 모든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지러이 많은 온갖 사물을 응대하는 데 어디에나 성학의 공부를 쓸 곳이 아닌 데가 없어서, 중화의 지극한 공부를 저절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강(綱)이 이미 거행되면 그 목(目)은 절로 펴질 것이니 어찌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여워하여 근심할 재변이 있겠습니까마는, 신들이 그 아홉 목을 아뢰겠으니, 전하께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4색 당파의 왕권에 대한 태도
 
  실은 그 아홉 가지 구체적인 항목이라는 것도 대부분 이미 주희가 당시 황제에게 올렸던 항목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언적은 호를 주희의 호 회암(晦庵)에서 따와 회재(晦齋)라고 할 만큼 주희를 존숭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흔히 기(氣)보다는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主理) 성리학자로 분류되고 이황(李滉)에게 이어져 영남학파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불린다. 이때 이(理)와 기(氣)란 흔히 말하는 이상과 현실, 유심론(唯心論)과 유물론(唯物論)과는 거리가 멀며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이와 기로, 이는 사실상 임금을 나타내고 기는 신하를 나타낸다. 위잉스 교수도 이렇게 말한다.
 
  “형이상(形而上) 세계 속 이기(理氣) 관계는 형이하(形而下) 정치 질서 속 군주-신하 관계로 치환(置換)될 수 있다.”
 
  이(理)는 두루 통하고 기(氣)는 제약을 받는다는 뜻이다. 즉 성리학 내에 다시 임금을 좀 더 중시할 것이냐, 신하 중심으로 할 것이냐의 구분이라 할 수 있다. 동인(東人)-남인(南人)은 대체로 주리(主理)였고 서인(西人)-노론(老論)-벽파(辟派)는 주기(主氣)라 할 수 있다. 서인 내 소론(少論)은 다시 임금을 중시하는 주리로 전향한 경우라 하겠다.
 
  이언적은 그래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의 마음이며 신하의 도리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다고 보았다. 정심(正心)이자 곧 격군(格君), 즉 임금을 바로잡는 일[正君]을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 점에서는 분명 이언적은 주희의 충실한 숭배자라 할 것이다.
 
  여기서 당쟁 발발 이전의 인물인 이언적을 짚어본 이유는 이미 당쟁이 터지기 전에 이처럼 흔히 말하는 사림(士林), 정확하게는 주자학 추종자들 사이에도 내분(內分)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동인과 서인의 분열뿐만 아니라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고 다시 노론이 벽파와 시파로 갈리는 것은 무엇보다 현실정치적 이유, 즉 왕권의 존중 여부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연히 서인-노론-벽파 노선이 가장 극렬하게 왕권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가장 주희에 충실했던 행태였다고 할 것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3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