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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家를 찾아서

조선의 고갱이자 세잔, 이인성 화가

비극적 천재의 죽음과 추억, 그리고 大邱 미술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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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생 시절 미술(圖畫) 점수, 10점 만점… ‘세계아동작품전’에서 특선 받아
⊙ 鮮展 9회 연속(1929~1937년) 수상, 帝展 입선까지… 천부적 재능과 조형 감각 탁월
⊙ 1942년 아내 김옥순 사망 이후 上京… 서울 아현동 굴레방다리 인근에 살며 畫業 이어
⊙ “우리 곁의 천재를 죽인 것은 너와 나, 우리다”(김병종)… 1950년 서울 수복 직후 피살
경주 석굴암에서 찍은 젊은 날의 이인성.
  이인성(李仁星·1912~1950)은 한국 근대미술의 천재 화가로 꼽힌다. 당대 그는 조선(한국)의 고갱이요 세잔으로 불렸다. 혹자는 그를 두고 “1930년대 마라톤 선수 손기정이나 무용수 최승희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 연속 9회 수상(1929~1937년) 이후 불과 26세 나이로 ‘추천 작가’(당시 서양화는 이인성, 동양화는 김은호)에 올랐다. 당대 화가 누구도 기록하지 못한 전무후무한 예술 성취다. 그러나 광복 이후 화단(畫壇)에 그와 비슷한 연배의 이중섭(李仲燮·1916~1956), 박수근(朴壽根·1914~1965) 등이 부상할 때 이인성이란 이름은 높지 않았다.
 
  아마도 1950년 11월 4일, 어수선한 서울 수복 직후 비운의 총기 사고(사고가 아니라 살인이었다)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리라. 느닷없는 죽음에 조문객이 있을 리 만무했고, 홍제동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한동안 잊히다시피 하다 대구시에서 2000년 ‘이인성미술상’을 조례로 제정하며 빛을 보기 시작했다. 매년 11월 4일, 이인성 기일에 수상자를 발표한다.
 

  최근 제21회 수상자로 제주 출신의 서양화가 강요배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 무렵 대구 수성구 삼덕동에 위치한 대구미술관에서 이인성미술상 20주년 특별전 ‘그림, 그림자, 그리움’전과 제12회 수상자인 ‘이상국’전이 열렸다.
 
  어느덧 이인성미술상은 한국 미술계에서 권위 있는 상으로 거듭나고 있다.
 
  기자는 지난 9월 23일 이인성이 졸업한 대구 수창초등학교 앞에서 그의 아들 이채원(李彩園·70)씨를 만났다. 학교 정문 앞 건물 위층을 빌려 쓰고 있었다. 위로 올려다보니 이인성이 그린 〈빨간 옷을 입은 소녀〉를 복사한 그림이 유리창마다 걸려 있었다.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소녀는 뭐가 부끄러운지 시선을 아래로 깔고 새침한 표정이었다. 수창초등학교 학생들은 대구가 낳은 위대한 화가를 알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10점 만점에 10점… 눈길 가는 초등시절 圖畫 점수
 
화가 이인성의 아들 이채원씨.
  이채원씨는 이인성의 세 번째 아내 김창경(李昌京)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로 3명의 누나(이애향·승란·승금)가 있다.
 
  그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지만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뒤늦게 그림을 익혀 현재 계명대 대학원 회화과에 재학 중이다. 그간 홍익대 부설 평생교육원에서 그림을 배웠고, 학점은행제를 활용해 미술 관련 학점도 미리 땄다고 한다.
 
  그가 이인성의 수창공립보통학교 학적부를 기자에게 건넸다.
 
  당시 집 주소는 ‘대구부(大邱府) 북내정(北內町) 16’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대구 중구 북내동 16번지’.
 
  생년월일은 ‘대정(大正) 원년(元年) 8월 18일’. 양력으로 환원하면 ‘1912년 9월 28일’이다. 채원씨의 말이다.
 
  “자료들에서 많은 오류가 있어요. 아버지 생년월일이 8월 18일로 적혀 있는데 이 날짜는 음력입니다. 어머니가 결혼식 때 받은 사주단지에 아버지의 생년월일이 ‘임자년(壬子年) 기유월(己酉月) 정미일(丁未日) 생(生)’으로 적혀 있어요. 정미일이 바로 양력 9월 28일이죠.”
 
  이인성이 학교에 입학한 날은 ‘대정 11년 4월 1일’로 적혀 있다. 대정 11년은 1922년. 그러니까 만 10세 때 학교에 입학한 셈이다. 요즘으로 치면 좀 늦은 나이다.
 
이인성의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 시절 학적부.
  흥미롭게도 학적부에 적힌 ‘입학 전 경력’이 ‘서당(書堂)’이다. 아들 채원씨의 말이다.
 
  “요즘으로 치면 유치원에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서당에 다니며 먹물(을 찍어 붓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색을 입히는 방법을 배운 셈이죠. 어떻게 보면 이미 서당에서 양화를 습득하고 접목한 셈이지요. 요즘으로 치면 10대 때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아티스트가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인성은 수채화를 그릴 때 동양화 붓을 사용하곤 했는데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대상의 윤곽을 자신 있게, 그리고 빠르게 그렸다고 전한다. 아주 어린 시절에 붓을 잡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1~6학년 전체 성적을 보니 중상위권에 가까웠다. 그중 도화(圖畫), 즉 미술 성적은 2~6학년 동안 10점 만점에 10점이었다. 미술만큼은 또래 사이에서 최고인 셈이었다.
 
  6학년 때 키가 135.2cm, 체중은 32.5kg이다. 전체 신체발달지수가 ‘병(丙)’으로 기재돼 몸이 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요즘 학생과 비교하면 어떨까. 2019년 학생건강검사 표본통계에 따르면 초등 6학년 남학생의 평균 신장은 152.1cm, 여학생은 152.3cm다. 또 몸무게는 남학생 48.8kg, 여학생 46.1kg이다.)
 
  보호자 ‘이해원(李海元)’ 옆에 적힌 직업은 ‘주상(酒商)’이다. 요즘으로 치면 식당 혹은 술집. 그의 말이다.
 
  “1925년 그러니까 열네 살 때인 초등 3학년 시절에 담임인 이영희 선생에게 인정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또 선배인 서동진(徐東辰·1900~1970)을 만나 그림을 배운 것으로 알려지지만 그는 정치인이자 출판인에 가까운 인물로 ‘그림 스승’이라 단정 짓기에 조심스러운 점이 있어요.”
 
  이인성보다 열두 살이 많은 서동진은 1929년 제8회 조선미전에서 이인성과 나란히 입선되었다.
 
 
  부친에게 붙잡혀 모조리 분지르는 중에
 
  이인성은 1935년 《신동아》 1월호에 투고한 〈조선 화단의 X광선〉이란 글에서 유년을 회상했는데 미술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느낄 수 있다. 부분 인용하면 이렇다.
 
  〈… 어느 일요일 아무리 하여도 야외 사생 가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어서 뒷방에서 가만가만히 준비를 하여 뒷담을 뛰어넘어 산격동이라는 곳으로 가서 기쁜 마음으로 하루 종일 사생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부친께서는 벌써 아시고 기다리다가 그만 붙잡혀서 화상(畫相)이며 화필(畫筆)이며 모조리 분지르는 중에 그림 그린 것만 가지고 도망가고 말았다. 그 그림을 세계아동작품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받았으나 다만 나 혼자 기뻤다. 부모는 도리어 노(怒)하실 때 서러운 생각도 들었다. 조금도 낙망하지 않고 도리어 의지 굳게 노력하여서 조선미전에 〈음(陰)〉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당선 영(榮)을 받았다. 그 후부터는 호랑이 같은 아버지도 이해를 가지게 되어 따라서 나는 새로운 웃음과 의지를 가졌다.〉
 
  다음은 《조선일보》 1929년 8월29일자 5면에 실린 〈조선미술전람회 작품 입선발표〉 기사다. 그의 첫 조선미전 입선을 전하고 있다.
 
  〈… 조선총독부 주최 제8회 미술전람회는 오는 9월 1일부터 시내 왜성대(倭城臺) 총독부 구청사(舊廳舍)에서 개최하리라는데 출품점수와 감사(鑑査)한 칠과 입선(入選)된 작품점수와 씨명은 아래와 같다 하며 특선(特選) 작품은 13일에 발표하리라더라.
 
  ◇제2부(第二部) 서양화(西洋畵) 입선
  음(陰), 대구(大邱), 이인성(李仁星)…〉
 
  이듬해인 1930년 5월17일자 《조선일보》 4면에 〈조전(朝展) 입선 발표〉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도 두 번 ‘이인성’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조전’이란 제9회 조선미전을 말한다.
 
  〈… ◇제2부 서양화 입선
  겨울의 어떤 날, 대구, 이인성(李仁星)
 
  풍경(風景) 제일작(第一作), 대구, 이인성(李仁星)…〉
 

  이인성은 18세 때인 1929년 처음 조선미전에 참가하는데 집에서 가까운 미션스쿨인 대구 계성중학교 정문을 그린 〈음〉으로 입선한다. 이후 광복 직전인 1944년까지 연속 16차례 출품해 입선과 특선을 두루 받았다.
 
  연속 수상으로 치면 9회 연속(1929~1937년)이다. 1935년 제15회 조선미전에서는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당대 그를 아는 사람이나 ‘환쟁이’ 모임인 화단에서는 그의 천부적 재능과 조형적 감각에 일제히 찬사를 보냈다.
 
  이인성이 우리 근대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는 뭘까.
 
  수채화가로서 풍부하고 육감적인 색채감과 구성력을 꼽을 수 있다. 인상주의 화풍인 고갱의 영향으로 짐작되는 적토(赤土), 즉 ‘흙빛’은 이인성을 ‘향토성의 화신’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인물화에서 한국적인 표현을 정립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예컨대 그림 속 등장인물의 뭉툭한 코나 백의(白衣) 등이 그렇다.
 
  천부적 재능과 엄청난 노력으로 꿋꿋이 화업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 지인의 도움도 있었지만, 당시 한강 이남 최고의 물산지였던 대구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이채원씨는 “대구가 일제강점기 당시 식민지 조선의 미술 중심 수도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며 “이인성은 경성과 도쿄를 오가며 대구 미술을 세상에 알렸고, 경상도 방언과 함께 대구에 대한 자존심이 무척이나 컸다”고 했다.
 
 
  일본 帝展에 입선하다!
 
1931년 무렵 이인성은 대구 유지들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크레용 회사인 오오사마 상회에 들어갔다. 상회 측은 이인성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아틀리에를 빌려줬다고 한다.
  1931년 6월3일자 《조선일보》 4면에 이인성의 제10회 조선미전 특선작인 〈세모가경(歲暮街景)〉이 이례적으로 크게 실렸다.
 
  한 해가 기울어 가는 대구 중앙통(중심가 주변을 그렇게 불렀다)의 모습이 담겼는데, 그림 속 행인들은 한복을 입고 걸어간다. 뾰족하게 늘어선 전신주, 행인의 눈길을 끄는 플래카드가 인상적이다. 그림을 찬찬히 보면 세모의 을씨년스러움이 느껴진다고 할까.
 
  이인성의 계속된 수상에 대구 지역 유지들이 들끓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일본 유학을 알선하고 나선 것이다. 미술 선배이자 선생인 서동진과 시라가 주키치(白神壽吉·대구여고와 경북여고 교장 역임)의 도움으로 그해 가을 도쿄로 건너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
 
  주키치 교장의 후원으로 크레용 같은 미술 용구를 팔던 오오사마 상회에 입사해 낮에는 직원으로 일하고 밤에 붓을 잡았다. 도쿄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이인성은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의 야간부에 등록한다. 1932년,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다. 채원씨의 말이다.
 
  “오오사마 상회 사장이 마련해준 아틀리에에서 석고 데생을 연마하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어요. 그해 5월 제11회 조선미전에 〈카이유〉라는 작품이 특선으로 뽑혔고, 〈파란 지붕이 보이는 풍경〉 〈어느 날의 숲〉이 입선을 차지했죠. 〈카이유〉는 일본 궁내성 측에서 매입했다고 해요.”
 
  《조선일보》 1932년 5월29일자 2면에 그림 〈카이유〉가 크게 실렸다. 이후 이 그림의 행방이 묘연하다가 몇 해 전 발견돼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매입한 상태다.(‘카이유’는 카라꽃의 일본어 표기 ‘카이우’를 잘못 쓴 것인지 아니면 ‘쾌유’를 뜻하는 일본어 발음인지는 명확지 않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2년 10월25일자 5면에 제13회 제국미술전람회 입선작인 〈여름 어느 날〉과 이인성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 무렵 이인성은 처음으로 일본 최고의 미술대회인 제13회 제국미술전람회(이하 제전)에 도전한다. 놀랍게도 작품 〈여름 어느 날〉이 입선작에 올랐다. 그해 10월25일자 《동아일보》 5면에 그림과 함께 제전 수상 소감이 실려 있다.
 
  〈…금추(今秋) 제전(帝展)에 입선된/ 이인성군과 작품/ 동경에 고학하는 19세 소년/ 향토색을 내기에 힘쓸 터
 
[동경郵信] 일본 미술계의 등용문인 제전에 입선된 출품자 중에 대구 출생인 이인성이라는 19세의 소년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많은 취미를 가지고 늘 열심으로 공부하야 모든 바 작년 연말에 그림 공부를 뜻하고 동경에 고학의 길을 떠나와서 낮에는 동경지대 킹 상회 예술부에서 일을 보고 밤에 여가를 얻어 태평양화학교에서 공부하는 중에 있다. 이번에 입선된 그림은 수채화 〈여름의 어느 날〉이라는 것인데 지난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갔을 때 자기 모교의 교정를 배경으로 3주일 만에 완성한 것이라 한다.
 
  이군은 또 작년과 금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특선을 받은 일이 있다.
 
  이군을 만나 경하의 뜻을 표한즉, 군은 대단히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전에 입선된 것을 나는 아주 의외로 생각합니다. 금년 귀국하였을 때 우리의 흰옷을 주제로 무엇을 하나 그려보고자 하였으나 무리해 한 부형의 반대로 뜻을 채우지 못하고 실망 중에 화구를 메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심히 뜨거운 햇볕에 쪼여 초화조차 시들시들해지는 그중에 문득 한 느낌이 있어서 곧 제작에 착수하여 3주일 만에 완성한 것입니다.
 
  이 기회에 더욱 분발하야 향토를 위하야 일하고자 합니다.”
 
  (사진은 제전 입선 작품 〈여름의 어느 날〉과 작자 이인성군)…〉
 
 
  화려한 귀환과 아내의 죽음, 上京, 再婚
 
이인성 화백의 모습. 아래는 1931년 6월3일자 《조선일보》 4면에 실린 〈세모가경(歲暮街景)〉.
  이인성의 나이 스물넷. 일본으로 건너간 지 4년 만에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되어 대구로 돌아온 1935년은 기억해야 할 일이 많았다.
 
  제22회 일본수채화회전에서 〈아리랑 고개〉로 최고상인 일본 수채화협회상을 받았고, 제14회 조선미전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6월 7일 유학 시절부터 사귀었던 김옥순(金玉順·1916~1942)과 결혼했다. 장인이 운영하는 남산병원(대구시 남산정 333번지)에 화실을 열었고, 훗날 이를 ‘이인성 양화연구소’라고 불렀다.
 
  1935년 6월9일자 《조선일보》 4면에 〈청년화가 이인성군 혼례식〉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스물넷 청년 화가의 화촉 소식을 비중 있게 썼다.
 
  〈…동경(東京)에 가 있는 신진화가(新進畵家)로서 장래(將來)의 촉망(囑望)이 많은 이인성(李仁星)군은 금번(今番)에 제전(帝展) 출품의 작품(作品)을 제작(製作)하려고 귀향(歸鄕)하였다가 작칠일(昨七日)에 대구향리(大邱鄕里)에서 김옥순(金玉順)양과 화촉(華燭)의 전(典)을 이루었다고 한다.…〉
 
  여러 공모전에서 잇따라 수상하고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처가 도움으로 물질적인 풍요까지 얻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이듬해 1936년 5월 제15회 조선미전에서 〈초춘(初春)의 산곡〉이 총독부상을 받았고, 제17회 일본 제전에는 그 유명한 〈한정(閑庭)〉을 출품해 입선했다. 또 그해 6월 첫딸(이애향)이 태어났다.
 
  1937년 제16회 조선미전에 〈초상〉이 입선됐고, 38년에는 《동아일보》 주최로 서울에서 첫 개인전이 열렸다. 당시 수채화 20점과 유화 45점이 전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의 갈채를 누가 시샘하듯 이후 아들(이영미)이 늑막염으로 사망(1939년)하고, 아내 김옥순마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1942년). 이인성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신적 공황을 이겨내기 위해 1944년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여성과 재혼한 뒤 대구를 떠나 서울로 향한다. 나라를 되찾은 그해 둘째 딸(이승란)이 태어나지만 아내는 가출하고 만다.
 
  서른여섯이던 1947년 6월 21일, 배화여전을 나온 김창경(金昌京)과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얼마 후 셋째 딸(이승금)과 아들(이채원)이 태어났다. 당시 이인성은 이화여중등학교(현 이화여고)에 미술 교사로 부임했고, 이화여대에 출강했다.
 
  당시 서울 생활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1950년 《신경향》 2월호에 실린 수필 〈화방수필-흰 벽〉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 가끔 집안 식구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 때도 있으나 그런 소리에는 하등의 노심(怒心)도 없고 오로지 다행이라고 생각될 뿐이다. 나의 생명인 화실을 버리고 서울에 와서 ‘강짠지’와 ‘동태국’을 먹기 시작한 지 벌써 7년이란 세월이 어제같이 꿈으로 돌아가고 공간 있는 ‘흰 벽’을 보지 못하니 자연히 마음이 괴롭고 자유를 빼앗긴 자와 같다…〉
 
  그는 자신이 각별하게 여기는 〈한정〉 〈경주의 산곡에서〉 〈해당화〉 같은 작품을 그리던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대구에서 살 때는 넓은 화실에서 오직 그림만 그렸지만, 서울 생활은 달랐다. 당장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병행해야 했다. “가끔 화실에 걸린 그림을 전부 떼어내고 넓은 ‘흰 벽’을 수일 동안 바라보는 것이 낙이었다”고 한다.
 
 
  “고만 울어라. 아홉수 액땜을 했으니 백 살까지 잘 살끼라”
 
1931년 무렵의 이인성. 그해 대구 중심가의 우체국을 배경으로 그린 〈세모가경〉이 제10회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수상했다.
  이인성의 장남 채원씨는 “‘아버지’란 단어를 학창 시절 쓴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났으니까요. ‘존경’이란 단어도 제게 잊힌 단어입니다. 주변에 존경할 만한 분이 없어서일까요? ‘아버지’라는 말 대신 고유명사 ‘이인성’이 익숙한, 제게 너무나 간절한 분이지만 너무 먼 실체였으니까요.”
 
  그가 태어난 곳, 그러니까 당시 이인성의 집은 서울 북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인 한성고 바로 옆이었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흔적조차 알 수 없으나, 당시만 해도 아늑한 동네였다.
 
  굴레방다리는 마포나루 방향과 신촌 방향으로 가는 길에 바퀴살처럼 다리를 걸쳐놓았기 때문에 마을 이름으로 유래되었는데, 한자 이름은 ‘늑교’(勒橋)다.
 
  “집 앞이 학교 운동장이고 축대로 담장이 쌓여 고즈넉한 동네였어요. 우리 집 마당 한가운데는 큰 우물이 있었고 집 옆에 공터가 있었죠. 그곳에다 아버지는 작업실을 지을 계획이셨다고 합니다.”
 
  집 너머로 멀리 북악산 기슭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굴레방다리, 왼쪽으로 가면 한성고 운동장 축대가 있었다고 한다. 위치로 보면 이인성의 직장인 이화여고와 이화여대의 딱 중간지점이었다.
 
  “우리 집에서 조금만 가면 기차가 다니는 ‘굴레방다리’가 있어서 동네 형들과 철길에 못을 놓고 지남철 놀이를 했죠. 흔히 어른들이 장난치는 말로 ‘널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하잖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대부분 아이들이 울었는데 저 역시 그랬어요. 울먹이며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거짓으로 지어낸 말’이라 달래곤 하셨죠. 굴레방다리는 많은 이가 오가는 길목이었는데 아버지는 놓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이인성의 아들 채원. 아버지의 대작 〈한정〉 앞에 서 있다. 아래는 이채원이 그린 1950년대 서울 아현동 굴레방다리 주변 모습이다.
  채원씨는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그날 태어났다. 1950년 9월 15일생이다. 그날부터 서울 수복(9월 28일)까지 아비규환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매일 인민재판이 열렸고, 주요 인사들이 처형 혹은 퇴각하는 인민군들에 의해 납북되었다”고 한다.
 
  “저는… 이래 봬도 인민군 치하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수복되기 전이니 북조선 사람이죠. 하하하. 당시 어머니는 몸을 풀기 위해 서대문 안 친척댁에 잠시 머무셨고, 아버지는 아현동집 마루 밑에 지하 방공호를 파서 숨어 계셨다고 해요. 그 와중에도 우리 집에 아버지를 찾는 손님들이 찾아왔다고 해요.”
 
  귀한 아들이 태어나자 이인성은 방공호에서 나왔다. 아내의 산후조리 음식을 구하러 학부형과 지인들을 찾아가다 인민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어머니는 며칠이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폭격으로 사망했다며낙담하셨죠. 당시만 해도 B-29기가 저공 비행하며 인민군 퇴각로이던 굴레방다리 주변을 폭격했으니까요. 어머니는 자식들 앞에 내색은 안 하셨지만,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해요.
 
  그런데 일주일 후인 9월 22일 새벽, 대문을 두드리며 아버지가 찾아왔더랍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왔으니 모두 부둥켜안고 울었는데,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마, 됐다. 고만 울어라. 가막소 창문을 보니 쌕쌕이 비행기가 우리 집 위쪽으로 하도 폭격을 해대서 동네가 불바다가 되어 가만 있을 수 있어야지. 나도 북으로 잡혀갈 것 같아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마.
 
  대구 떠날 때 관상쟁이가 아홉수를 넘기면 백수(白壽)한다고 했잖아. 이렇게 아홉수 액땜을 했으니 난 백 살까지 살 끼라.’”
 
 
  천재의 허망한 죽음
 
이인성은 1947년 6월 21일 배화여전을 나온 김창경과 재혼했다.
  당시 아현동 굴레방다리는 인민군과 국군의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동 길목이었다고 한다. 인천에서 퇴각하던 인민군은 신촌을 거쳐 굴레방다리에 숨어 있다가 서대문을 거쳐 덕수궁, 미아리고개로 퇴각했다. 국군 역시 굴레방다리를 지나 광화문 중앙청에서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인성은 9월 27일 집 앞으로 국군이 지나가자 손수 태극기를 만들어 환영했다고 한다.
 
  “국군, 유엔군이 북진해간 그해 10월 말까지 아버지는 자신만의 화실을 지을 꿈에 부풀었다고 해요. 마당의 터를 고르기 시작했고, 폭격으로 망가진 집도 고치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아버지는 좌우익 싸움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예술세계에 빠질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해 11월 3일 저녁 8시쯤 이인성은 취중 시비가 붙어 경찰관이 쏜 총에 맞아 허망하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채원씨의 말이다.
 
  “전운이 감도는 저녁이라 등화관제로 통행이 어려울 때였어요. 하지만 대구 등지에서 아버지를 찾아온 지인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날도 수복의 기쁨 속에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사소한 시비로 총상을 입고 말았어요.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죠.”
 
  당시 이인성의 나이는 서른아홉이었다. 불혹(不惑)을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천재를 누가 시기한 것일까. 소설가 최인호는 《한국일보》 1974년 6월5일자 ‘젊은이 세계’라는 글에서 이인성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 그 사내는 비틀거리면서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돌연 거리를 차단하고 있던 치안대원이 지나가던 사내의 발걸음을 막아 세운다.
 
  사내는 놀란 듯 우뚝 선다.
 
  “누구냐.”
 
  “지나가던 취객이요.”
 
  “뭐라구. 지금이 무슨 시간인데 장난하려 들어. 누구야.”
 
  “취객이요. 술취한 취객이요.”
 
  사내는 껄껄 웃어 제낀다.
 
  “웃지 마라. 누구야.”
 
  “나 말이요.”
 
  손전지 불 밑에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생각보다는 곱게 생겼다. 악의 없는 참하게 생긴 얼굴이라는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 치안대원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정지. 정지. 누구야.”
 
  “나 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이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이요.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요.”
 
  “뭐라구.”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혹시 고위층의 인물인가 행여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준다.
 
  그러나 그 치안대원은 좀체로 치밀던 화가 풀리지 아니한다. 그래서 경비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어.”
 
  “알지.”
 
  앉아서 사무 근무를 하던 사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사내는 뛰쳐나간다. 그리하여 씩씩거리며 좀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이 취해 자리에 누워 있던 이인성은 옷도 채 입기 전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사내 입에서는 한마디의 욕설이 튀어나온다.
 
  “더러운 쌕끼.”
 
  가슴에 품었던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튀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적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
 
 
  이인성 죽음에 대한 또 다른 기록과 기억
 
  이채원씨는 기자에게 아버지의 친구인 서양화가 박영선(朴泳善·1910~1994)의 회고록을 보여주었다. 박영선은 예술원 회원이자 홍익대와 중앙대 미대 교수를 역임한 화가다.
 
  박영선은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이며 그의 그림 역시 날카롭고 생기가 있었다’며 친구 이인성을 회상했다. 또 ‘(이인성은) 성격이 너무나 괴팍했고 우월감이 심해 그것 때문에 결국 단명했다고 볼 수 있다’고 썼다. 다음은 박영선의 기록이다.
 
  〈… 어느 날 밤 통행금지가 넘어서 그는 술이 곤드레만드레 된 채 아현동 마루턱에 있는 경찰관 검문소를 지나게 되었다. 경찰이 누구냐고 하자, 그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 거지 같은 자식아! 나를 왜 몰라 봐!”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해방 전부터 선전에 출품해서 20살 때 특선을 하고 (중략) 나타내고 있었으나 혼란통에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순경이 그의 존재를 알 리 만무했다. (중략)
 
  모욕을 당한 순경이 그를 붙잡으려 하자 그는 순경을 번쩍 들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유유히 집에 돌아갔다. 그 순경은 곧 파출소로 달려가 카빈을 들고 나와 그의 집으로 뒤쫓아갔다.
 
  그때 그의 부인이 대문만 열어주지 않았어도 그의 생명은 지켰을지 모른다. 그러나 후처였던 그의 부인은 별다른 생각 없이 대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순경은 다짜고짜 집 안으로 들어가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대청으로 나오던 그에게 연거푸 총을 쏘았다. 그는 이렇게 비명횡사했다. …〉
 
  이채원씨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아버지는 일제 시절부터 경찰관을 자주 혼을 냈다고 합니다. 파출소를 지나다가 졸고 있는 일경(日警)을 보면 반드시 깨웠다고 해요. 한번은 오르막길을 가던 버스가 멈추자, 일경을 불러 ‘빨리 버스를 밀라’고 크게 호통을 쳤다고 해요. 호통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날 약주를 드시고 두 번이나 검문에 걸려 다퉜는데 ‘천하에 이인성을 몰라?’ 하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와 그 이야기하시는데, 그날따라 어머니는 느낌이 안 좋으셨대요. 아니나 다를까, 흥분한 경찰이 대문을 요란하게 발길질하고 소란을 피웠는데 어머니는 경찰을 물리치려고 나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도 소란스럽자 방에서 나와 (댓돌 위에서) 구두를 신는데 경찰관이 총을 쐈다고 합니다. 오발 사고가 아니었어요.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났고 컥컥컥… 하며, 숨도 안 넘어가는 것을 하루 동안 나뒀다가 삼촌들이 와서 시신을 치웠다고 합니다.”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이인성의 부인 김창경과 아들 이채원.
  ― 남겨진 어머니는 이후 어떻게 사셨습니까.
 
  “배화여전을 나오신 어머니(김창경, 1995년 작고)는 일제강점기 시절 근대교육을 받은 분이셨고, 일본서 유학한 아버지와 코드가 잘 맞았다고 해요. 창가(唱歌)도 바느질도 잘하셨는데, 신여성의 전형이라 할까요?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어머니가 직접 영어를 가르쳐주셨죠.”
 
  부인 김창경은 중소기업에 취직해 20년 이상 근속했다고 한다. 전화기가 귀한 시절, 아현동 집에는 회사에서 설치해준 백색전화도 있었고, 회사에서 보내준 승용차를 타고 출퇴근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늘 말씀을 아끼셨어요.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봐 입을 닫으셨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추모식이나 전시회에서 더욱 침묵하신, 내공이 강한 분이셨어요.”
 
  언젠가 화가 김병종은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우리 곁의 천재를 죽인 것은 너와 나 우리 모두다. 누구도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다. 총을 쏘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 허다한 우리 곁의 천재적 예술가를 멸시하고 죽음의 길로 내몰고 나서 추모비, 기념비 세운다 호들갑 떨지 마라.”
 
  이인성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놀랍게도 사후 50년이 흐른 뒤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 그림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
 
  20세기 대구는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미술 도시였다. 그 중심에 이인성이 있었다. 일찍부터 근대적 문물 세례를 받은 대구가 이병철의 삼성상회를 잉태한 곳임을 떠올린다면 대구 서양화가 일찍부터 만개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광주・목포가 전통미술 쪽에 비중이 높다면 대구는 확실히 유화 쪽에서 강세다. 특히 이인성류의 인상주의 화풍의 잔영은 아직도 대구 미술의 흐름 속에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전국 규모의 미술상인 ‘이인성미술상’이 벌써 21회 수상자를 배출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이미 대구와 이인성은 한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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