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도발적 문제제기

麗末鮮初 중국과의 국경은 만주에 있었다

조선 말까지도 평안도에 랴오닝성 일부 포함

글 : 허우범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고려 영토는) 남쪽은 遼海로 막히고 서쪽으로 遼水에 이르며, 북쪽은 옛 거란 땅과 접하고 동쪽은 金나라와 맞닿았다”(《선화봉사고려도경》)
⊙ 고려 말 明과 분쟁 대상이었던 철령은 강원도가 아니라 선양 부근 펑지바오
⊙ 위화도는 압록강의 河中島가 아니라 랴오닝성 콴톈만족자치현 徐店子 지역
⊙ 明 말기 모문룡이 주둔했던 假道는 평북 철산군 앞바다가 아니라 랴오닝성
⊙ 淸 건륭제 때 만주 지역에 대한 封禁令 등으로 조선 국경 후퇴

許又範
1961년생.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융합고고학 박사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現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프랑스 당빌이 1737년에 그린 〈조선왕국전도〉(랴오닝성과 지린성 일부를 포함).
  우리는 그동안 우리 영토는 한반도 안에서 점차로 북진(北進)하여 조선 초기에는 오늘의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확장된 역사라고 알고 있다. 즉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평양 인근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고려 공민왕이 개혁정치와 반원(反元)정책을 추진하여 서쪽으로는 의주 압록강, 동쪽으로는 원산만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조선 세종이 4군(郡) 6진(鎭)을 개척하면서 현재의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국경선이 확장된 것이라고 배워왔다. 우리 역사는 고대(古代)부터 한반도 안에서 이뤄졌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 최대의 영토를 구축(構築)하였다는 것이 우리 역사에서 국경사의 전부다.
 
  하지만 이는 일제(日帝)가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날조하여 만든 ‘반도사관(半島史觀)’에 근거한 것이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곧바로 조선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요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으로 삼았다.
 
  조선의 국권(國權)을 강탈한 일제는 한반도를 발판으로 만주 경영을 위한 계획에 착수하고 만주와 조선을 하나의 역사로 묶는 만선사(滿鮮史)를 개창(開創)했다. 만선사는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에 의해 주창되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주된 연구대상은 한국의 고대사, 한국 식민지화와 대륙 진출을 위한 준비작업 및 이를 용이하게 추진하기 위한 역사지리 고증(考證)이었다.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일본과 조선은 한 조상이었으며 반도의 미성숙한 조선인들을 성숙하게 완성시켜 주기 위하여 조선을 보호해야만 한다는 지배논리를 폈다.
 

  일제는 이러한 식민사관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 하여금 《만주역사지리(滿洲歷史地理)》와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를 완성하도록 했다. 이 작업에 책임자로 참여한 시라토리는 책임자의 변(辯)에서 “국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우리도 적극적인 협조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두 책의 목적은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자연지리를 경계로 그 동쪽과 남쪽은 한국사, 서쪽은 중국사, 북쪽은 여진족 등의 역사 영역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두 책은 1913년에 완성된 이후 모든 조선 역사 연구에 필수도서로 활용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38년에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한 《조선사(朝鮮史)》의 국경을 확정 짓는 근간(根幹)이 되었다는 점이다.
 
 
  “南으로는 遼海, 西로는 遼水에 이르며”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표시된 우리의 영토사.
  송(宋)나라 때 관료인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간 후에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기록된 고려의 영토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으로 요수(遼水)에 이르며, 북쪽은 옛 거란 땅과 접하고 동쪽은 금(金)나라와 맞닿았다(高麗, 南隔遼海 西距遼水 北接契丹舊地 東距大金)”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고려 전기(前期)의 영토가 요동 지역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고려는 요(遼)・금・원(元)・명(明)의 네 시대에 걸쳐 국경을 맞대었다. 몽골의 침략을 맞아서는 일시 강화도로 천도(遷都)하기도 하고 부마국(駙馬國)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 역사에 있어서 원 간섭기는 고려 영토가 축소된 시기였다. 이는 고려 영토에 쌍성(雙城)총관부와 동녕부(東寧府)가 설치되어 원의 영토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에도 고려 영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한반도 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와 관련해 가장 첨예한 역사지리적 쟁점은 철령(鐵嶺)과 철령위(鐵嶺衛), 그리고 위화도(威化島)의 위치 문제이다.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은 반도사관의 틀에 입각하여 철령은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에 있고, 최초 철령위는 압록강의 강계(江界)에 설치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철령위는 수정을 거쳐 라오닝성(遼寧省) 번시(本溪)의 펑지바오(奉集堡)로 비정(比定)하였다. 이렇게 확정된 반도사관은 이후 아무런 검증작업 없이 고착화되어 현재에도 모든 역사 교과서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철령과 철령위 위치 문제의 핵심은 두 사안을 분리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는 철령과 철령위의 거리가 너무 멀어 행정적 처리나 군사적 행동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안을 별개로 분리할 경우에는 고려 우왕이 추진하고자 했던 요동 정벌에 대한 설명이 궁색해진다. 이에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철령은 강원도의 고개일 뿐, 우왕은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철령위를 공략하려고 압록강을 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계로 정한 강원도 철령과 이를 지키는 군사들의 주둔지인 철령위와는 거리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철령위의 군사들이 관리도 할 수 없을뿐더러 철령의 위치조차도 알기 어려울 것이다.
 
 
  ‘70참’은 남경~요양의 거리를 의미
 
  철령과 철령위의 위치를 비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명 태조(明 太祖)가 철령까지 70참(站)을 설치하겠다고 한 기록이다. 이에 대한 지금까지의 학계 의견은 요동에서 강원도 철령까지 70참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기 때문에 17참의 오류라는 것이었다. 이는 일제의 와다 하쿠시(和田淸)가 주장한 이래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명 태조가 말한 70참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지가 핵심인 것이다. 주원장은 남경(南京)에서 명나라를 건국하고 죽을 때까지 수도를 옮기지 않았다. 명 태조가 철령위 설치를 명하고 고려에 통보하게 한 것도 남경에서의 일이다. 즉 남경이 70참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명사(明史)》 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면 남경에서 요양(遼陽)까지의 전체 거리는 알 수 있지만 참 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70참이 남경에서 요동까지임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명) 사신이 말하기를, “(조선의) 후문(後門)에 가는 길은 옛날에 장 천사(張天使)가 해청(海靑)을 잡는 것 때문에 그 길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지도에 빠짐없이 기재하였는데, 어찌 감히 길이 멀다는 것을 핑계를 삼습니까? 요동(遼東)과 북경(北京)의 사이가 29참(站)이고 북경(北京)과 남경(南京)의 사이가 41참(站)이니 합계하면 70참(站)인데, 빨리 가면 7, 8일이면 능히 도착할 것입니다. 지금 후문 가는 길이 비록 멀다고 하더라도 왕복에 10여 일이면 여유가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전하(殿下)께 아뢰어 빨리 사람을 차견(差遣)하여 후문에 도착시켜 도망해 돌아온 인구가 있고 없음을 자세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문종실록》13, 문종 2년 4월 신미)
 
  이처럼 70참은 명나라 초기의 국도(國都)였던 남경에서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있는 요양까지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철령과 철령위는 처음부터 요동 지역에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우왕이 추진했던 요동 정벌도 쉽게 납득이 되는 것이다.
 
 
  철령은 강원도에 없었다
 
(위) 새롭게 비정한 철령과 철령위 위치.
(아래) 명 태조가 최초로 철령위를 설치한 펑지바오 터.
  그렇다면 이제껏 철령을 논의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인용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다음 기록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도사에서 지휘 2인을 파견하여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강계(江界)에 이르고는 장차 철령위를 세우고자 요동으로부터 철령에 이르기까지 70개의 참을 설치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고려사절요》33, 신우 4, 우왕 14년 3월)
 
  위 기록은 고려의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가 강계 부근까지 온 명나라 군사로부터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알려준 사항을 듣고 우왕에게 다시 보고하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들은 말을 전달하는 경우에는 착오가 발생할 수 있다. 즉 최원지가 요동도사의 지휘에게서 들은 말은, “장차 철령위를 세울 것인데 이를 위해 요동의 철령까지 모두 70개의 참을 설치할 것이다”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최원지가 이 말을 우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요동으로부터 철령까지 70참을 설치한다’고 했던 것이다. 70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장소를 잘못 듣고 보고한 것으로 봐야만 하는 것이다.
 
  이처럼 70참이 요동이라면 철령은 어디인가. 군사학적으로 볼 때, 국경을 이루는 경계와 국경을 지키는 군사들의 주둔지는 근방에 있어야 한다. 《명사》지리지에 현재의 선양(瀋陽) 남쪽 펑지바오에 철령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현재까지도 유적이 남아 있다.
 
  펑지바오는 산악지대와 평야지대가 구분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곳의 동북쪽 산악지대는 길림합달령과 천산산맥이 이어지는 지점으로 원나라 때부터 국경지대던 곳이다.
 
  따라서 철령은 이 산악지대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 위치는 최초의 철령위가 있었던 펑지바오에서 멀지 않은 번시(本溪)시 피엔링(偏嶺) 일대로 볼 수 있다. 고개(嶺)는 인마(人馬)가 다니는 길이기 때문에 대개 산줄기가 낮아지거나 끊어진 지역에 위치한다. 피엔링은 환런(桓仁)과 랴오양(遼陽), 푸순(撫順)과 선양(瀋陽) 및 봉황성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위화도는 압록강의 河中島가 아니다
 
실록을 참고하여 새롭게 밝힌 위화도의 위치.
  요동 정벌은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回軍)으로 실패하였다.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는 현재 신의주와 단둥(丹東)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 안의 하중도(河中島)로 알려져 있다. 위화도는 《조선왕조실록》에 400여 년 동안 160여 회에 걸쳐 거론된다. 위화도와 관련된 주된 내용은 농민들의 개간과 농경의 가능 여부였다.
 
  위화도의 형태와 위치 등을 살펴보면 위화도는 하중도가 아닌 강변에 있는 땅임을 알 수 있다. 태조봉(太祖峯)이라는 산봉우리도 있다. 실록에 기록된 위화도의 여러 지리적 위치를 검토한 결과 위화도는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콴톈만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의 서점자(徐店子) 지역에 있음을 알 수 있다(《월간조선》 2019년 11월호 ‘도발적 문제제기: 우리가 알고 있는 위화도는 가짜다’ 참조).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외이・조선국(外夷·朝鮮國)에는 26개의 산이 기록되었는데, 이 중에 18개는 평안도 지역에 있는 산이다. 18개 산이 모두 원나라 시대의 동녕부에 속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8개 산 중 첫 번째가 환도산(丸都山)이다. 환도산에 대한 설명을 보면, ‘한성(漢城)의 동북쪽에 있으며, 한(漢)나라 때 고구려의 왕 이이모(伊夷模)가 이곳에 도읍하였다. 진(晉)나라 때 이르러 모용황(慕容)이 이곳을 깨뜨렸다(在國城東北, 漢時高句麗王伊夷模都此. 至晉爲慕容所破)’고 하였다.
 
  환도산은 현재 학계에서도 압록강 위쪽 지안(集安)에 있는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처럼 환도산 하나만 보아도 고려의 국경은 압록강을 넘지 못하였다는 기존의 국경 연구는 모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는 물론 조선의 영토도 요동 지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앞서 살펴본 철령과 위화도는 이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실례(實例)이다.
 
 
  철령은 자비령 위쪽에 있었다
 
현재 학계가 비정한 서경, 철령, 자비령으로 본 반란군 공격로.
  우리는 고려가 원(元)과 경계를 이뤘던 자비령(慈悲嶺)은 황해도 수안(遂安) 지역에 있고 철령은 강원도에 있으며, 고려의 서경(西京)은 지금의 평양(平壤)임을 의심치 않는다.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을 지금까지도 철석(鐵石)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가 거론하지 않은 다음의 사료 기록을 살펴보면 어떻게 역사 왜곡을 자행(恣行)했는지를 알 수 있다.
 
  〈윤인첨이 절령역(嶺驛)에 이르렀는데 마침 큰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자 서경의 병사들이 눈보라를 무릅쓰고 철령을 따라 내려와 미처 생각지도 못하게 갑자기 공격하니 (관군이) 크게 패하였다.〉(《고려사절요》12, 명종광효대왕1, 명종 4년 10월)
 
  위 기록은 고려 명종 4년(1174) 9월에 서경유수 조위총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제거하려고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장악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10월에 중서시랑평장사 윤인첨에게 삼군(三軍)을 지휘하여 반란군을 제압하도록 하였으나 오히려 대패(大敗)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관군이 패한 곳이 바로 절령이다. 절령은 자비령을 말한다. 관군이 자비령에 도착했을 때 반란군은 철령을 따라 내려와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는 곧 철령이 자비령의 위쪽에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자비령과 철령, 서경의 위치가 현재와 같다면 사서의 기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즉 평양(서경)에 웅거하고 있던 반란군이 황해도 수안(자비령)에 있는 관군을 급습하기 위하여 평양에서 동쪽으로 첩첩한 산들을 지나 강원도(철령)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길을 되짚어 황해도 자비령으로 와서 관군을 급습하였다는 실로 터무니없는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일제의 반도사관은 우리의 역사지리를 한반도 안으로 욱여넣기에만 집착한 나머지 철령과 철령위, 위화도 등을 작위적(作爲的)으로 편집·해석하고 편의적으로 비정하는 왜곡과 날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말까지도 평안도에 랴오닝성 일부 포함
 
여말선초 서남쪽 경계(랴오둥반도 남부를 포함).
  위화도가 현재의 랴오닝성에 위치한다는 것은 의주도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여말선초의 평안도 지역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위화도와 의주가 현재의 압록강 위쪽에 위치한다는 것은 여말선초의 압록강 줄기가 현재와 같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는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1778) 지도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이로 볼 때 18세기까지도 압록강의 본류(本流)는 혼강(渾江)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대동지지(大東地志)》에 기록된 평안도 주요 행정 지역의 위도(緯度)와 경도(經度)의 위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동지지》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든 김정호가 작성하였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료에서 평안도 부분을 비교해보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지지》에 보이는 위도와 경도는 모두 북경(北京)을 기준으로 삼았다. 청(淸)은 서구 학자들을 초빙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는데, 당시 측량이 지금과 오차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이처럼 차이가 클 수는 없다. 《대동지지》의 서북계(西北界)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면 현재의 랴오닝성(遼寧省) 일부가 포함된다. 그렇다면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이 두 사료는 다시 세밀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에 개인이 조선 전도를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대동지지》에 기록된 조선 서북계의 위치가 역사적 사실에 좀 더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1737년 프랑스의 당빌이 그린 지도와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앞서 살펴본 철령과 철령위, 위화도의 위치가 현재의 라오닝성에 있었다는 여러 논거(論據)와도 논리적으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조선과 명나라는 고려 시대의 국경이던 철령보다 훨씬 아래쪽에 위치한 연산관(連山關)을 국경으로 삼았다. 하지만 우리 역사학계는 조선의 실질적인 국경선은 현재의 압록강으로 잡았다. 그리고 연산관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넓은 지역은 국경무인지대(國境無人地帶)로 설정하고 있다.
 
  영토는 한 치의 땅을 놓고도 다투는 게 상식이다. 아무리 명(明)이 상국(上國)이고 조선이 사대(事大)를 한다고 하더라도 한 국가만 일방적으로 그토록 넓은 지역을 무인지대로 설정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명나라 예겸(倪謙)이 사신으로 다녀간 후 작성한 《조선기사(朝鮮紀事)》(1450)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예겸이 조·명 국경선인 연산관을 나와 봉황성을 지났을 때 조선의 관료가 영접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조선과 명의 무인지대는 천산산맥의 산악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명 태조의 조선 영토에 대한 탐욕은 “만약 내가 그대들을 정벌한다면 되는 대로 가지는 않고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을 축조해가면서 천천히 쳐들어갈 것이다(《고려사》권136, 열전권제49, 우왕 13년 5월)”는 말에서 이미 유훈(遺訓)을 남겼다. 이후 그의 유훈대로 조선의 사신로(使臣路) 변경을 빌미로 국경무인지대였던 봉황성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조선은 평안도 백성들이 부역(賦役)과 조세가 가벼운 요동으로 월경(越境)하는 것을 막기 힘들었고, 사민정책(徙民政策)만을 계속할 수도 없었다. 결국 국경 부근의 영토를 비워놓는 것이 상책이었다. 명은 이러한 조선의 약점을 파고들어 탕참(湯站)과 관전보(寬奠堡) 등을 설치하며 조선의 영토를 강탈(强奪)한 것이다. 명의 뒤를 이은 청은 조선에 더욱 압박을 가하여 무인지대를 유조변장(柳條邊墻)에서 현재의 압록강까지 확장시켰다.
 
 
  모문룡이 주둔했던 가도는 어디인가?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요동반도를 장악하자 조선은 바닷길로 부경사신(赴京使臣)을 보내야만 했다. 바닷길의 출항지는 정묘호란(丁卯胡亂) 전후로 바뀌었지만 철산군의 가도(島)는 사행단이 필수적으로 거쳐 가는 곳이었다. 그 이유는 명나라 도독(都督)인 모문룡(毛文龍)이 후금에 대항하기 위하여 가도에 주둔하고 있었고, 조선은 모문룡을 통해 명과의 외교를 수월하게 진행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고 발굴 자료를 참고하면 모문룡이 주둔하였던 가도는 현재의 랴오닝성 동강(東港)시 다양허(大洋河) 앞바다에 있는 다루다오(大鹿島)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 자료와 관련 사료를 비교 검토해보면 여말선초 조선의 서남쪽 영토는 현재의 비류허(碧流河)에서 천산산맥 줄기를 따라 연산관(連山關)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모문룡은 명과 조선 사이에서 각각의 명분을 빌미로 많은 사욕(私慾)을 취하였다. 《모대장전(毛大將傳)》을 지어 허위로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고 공적비(功績碑)까지 세웠다. 중국에서 발간한 《중국문물지도집(中國文物地圖集)》 ‘요령분책하(遼寧分冊下)’에는 모문룡이 1628년에 세운 공적비가 다루다오에서 발견되었다고 나와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은 다루다오가 모문룡이 주둔하였던 조선 철산군의 가도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섬은 산둥반도와 조선을 남북으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모문룡은 이곳에 자신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동강진(東江鎭)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모문룡이 동강진을 설치한 곳은 현재의 다양허(大洋河)다. 동강(東江)이라고 부른 것은 명나라의 동쪽에 있는 강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중국 최대의 포털사이트인 바이두(百度)에서 다루다오의 연혁(沿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있다.
 
  〈다루다오는 특별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병가필쟁지지(兵家必爭之地)였다. 명 숭정(崇禎) 연간(1628~1644)에 요동총병 모문룡이 이 섬에 주둔하여 금군의 침략에 저항하며 장졸(將卒)들을 이끌었는데, “우리 모두 마음을 바쳐 금으로부터 요동을 회복하고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자”고 맹세했다. 섬 안에는 ‘모문룡비’라고 부르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처럼 중국에서도 고고학적 발굴 자료와 다루다오의 연혁으로 17세기 초, 조선 철산군의 가도가 현재의 다루다오였음을 설명하고 있는데도 우리 학계는 아직도 일제가 고착화시킨 평안북도 철산군의 가도가 맞다고 하고 있다.
 
  지명은 언제나 이동한다. 치열한 전쟁으로 영토를 뺏고 빼앗기는 국경지역은 더욱 그러하다. 현재에 같은 지명이 있다는 이유로 수백 년 전의 역사지리를 합리적인 검증 없이 비정하는 것은 일제가 반도사관을 구축한 바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征伐과 征討
 
여말선초의 서북국경선(랴오둥반도 남단 비루허에서 지린성 후이파허 유역).
  조선의 세종은 파저강(婆猪江)에 살고 있는 여진들이 변경을 괴롭히자 이들을 두 차례에 걸쳐 토벌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여진정벌’이라는 단어를 썼다. 조선 중기에 간행된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에는 여진을 5회, 대마도 왜인(倭人)을 2회 토벌한 기록이 담겨 있다. 이 책의 범례(凡例)에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정벌(征伐)’이라 하고, 참월(僭越)한 신하 등을 토벌하는 것은 ‘정토(征討)’라고 한다”고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조선의 강역은 여진의 거주 지역을 포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파저강을 기준으로 동쪽은 조선의 영토라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현재 세종이 여진을 정토한 파저강은 혼강에, 올라산성(兀喇山城)은 환런(桓仁)의 우누산성(五女山城)에 비정하였다.
 
  앞서 《동사강목》에서 설명했듯이 18세기까지도 혼강이 압록강의 중심 줄기였다. 세종의 토벌에 쫓겨난 건주여진은 현재의 쑤쯔허(蘇子河) 유역으로 옮겨가 살았다. 이때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북쪽에 파저강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후이파허(輝發河)다. 즉 후이파허가 파저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서북쪽 강역은 후이파허 지역까지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이는 또한 여말선초의 서북 국경지대도 이 지역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 여말선초의 주요 역사지리에 대하여 간단하게 논의(論意)한 것을 정리하면 당시 우리 영토는 서남쪽으로 현재의 랴오둥반도 남부에서 서북쪽으로 랴오닝성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고려 초기의 영토보다 훨씬 축소된 영토였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인 1800년 이후의 지도에 보이는 압록강 아래에 있는 평안도와 압록강 안에 여기저기 모두 다르게 그려진 위화도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위화도의 이동
 
  청의 건륭제는 1740년(건륭 5년) 만주 지역에 봉금령(封禁令)을 내리고 10년의 기한을 두고 이 지역을 비울 것을 명하였다. 1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못하자 다시 10년을 연장하였다. 청나라가 만주 지역을 자신들의 발상지라고 주장하며 봉금하였지만 사실은 이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특산물인 인삼(人蔘)・동주(東珠) 및 초피(貂皮) 등을 채굴하지 못하게 하여 경제적인 기반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의 서북계인 평안도의 행정구역도 이때 현재의 단둥시를 흐르는 압록강 아래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영토이지만 무인지대가 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지도는 이처럼 평안도의 행정구역이 압록강 아래로 철수한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위화도는 조선 건국의 시발점이다. 조선의 시발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조선의 정체성(正體性)을 잃어버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현실은 위화도를 옮겨올 수도 되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압록강 위쪽 평안도의 행정구역이 모두 아래로 이전했듯이 위화도 역시 이전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모든 지도에서 위화도의 위치가 각기 다르게 그려진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와 조선의 국경 인식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실학자들의 지리 인식은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에 의해 고착화되었다. 이들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활용하여 식민 지배에 필요한 ‘반도사관’으로 발전시켰다. 일제에 의해 구축된 우리의 역사지리는 과학적인 검증 과정 없이 100여 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계승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독도와 대마도
 
〈그림1〉초등학교 사회과부도에 그려진 당빌의 〈조선왕국전도〉.
  〈그림1〉은 초등학교 사회과부도의 첫 장에 있는 지도인데, 여러 나라에서 제작된 고지도(古地圖)를 통하여 ‘독도는 우리 땅’임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지도는 앞서 살펴본 프랑스 지리학자인 당빌이 그린 〈조선왕국전도〉다. 그런데 본래 지도에 있는 조선의 서남계 시작점인 요동반도 부분과 압록강 위쪽의 평안도・함경도 지역은 산맥을 굵게 표시하는 방법으로 알아볼 수 없게 왜곡하였다.(〈그림2〉 참조)
 
〈그림2〉 당빌이 그린 〈조선왕국전도〉의 평안도·함경도 부분과 경계.
  또한 이 지도에서 보듯이 오른쪽 하단에는 대마도가 표시되어 있다. 앞서 살펴본 《국조정토록》의 내용과 비교해볼 때에도 당빌의 지도는 조선의 영토를 자세하게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마도는 우리 영토사에서는 아예 논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오직 독도만 우리 영토임을 주장하고 있다. 18세기 초 조선의 영토가 어디였음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지도를 펼쳐놓고도 우리 스스로 서북 영토를 잘라버리고 동쪽의 대마도는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실정(實情)이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우리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도사관을 포함한 일제의 식민사관을 청산하고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正立)해야만 한다. 하지만 국치(國恥) 110년이 되는 2020년에도 우리의 국경인식은 변함없이 강고(强固)하다. 그리하여 일제가 만들어놓은 반도사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4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