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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책으로 세상 읽기

귀도 크놉의 《통일을 이룬 독일 총리들》

“독일연방공화국은 총리 福이 있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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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나워, 통일 요구 뒤로 미루고 親서방-자유민주주의 노선 확립
⊙ 에르하르트, 계획경제 대신 자유시장경제 바탕으로 ‘라인강의 기적’ 일궈
⊙ 게오르크, 기민당·사민당 大聯政 통해 정권 교체의 架橋 역할
⊙ 브란트, ‘동방정책’ 통해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노력
⊙ 슈미트, 사회민주주의자이면서도 중거리미사일 유럽 배치 등 추진한 결단의 정치인
⊙ 콜, 國父의 뜻을 이어 통일의 기회 움켜쥔 ‘아데나워의 손자’
  8명.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 건국 이래 2020년 현재까지 역대 총리 수이다. 같은 기간 영국 총리는 15명, 일본 총리는 30명, 이탈리아 총리는 29명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13명, 한국 대통령은 12명이었다. 영국과 일본, 특히 이탈리아는 총리 한 사람이 1~2년, 짧게는 수개월 만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지만, 독일은 한번 총리를 맡으면 최소한 3년은 재임했다. 참고로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년) 시절 총리는 모두 13명이었다. 건국 이후 독일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정국(政局)을 운영했는지를 알 수 있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귀도 크놉이 쓴 책 《통일을 이룬 독일 총리들(Kanzler: Die Mächtigen Der Republik)》(한울, 2000년, 안병억 옮김)은 초대(初代) 콘라트 아데나워(1876~1967년, 재임 1949~1963년)부터 제6대 헬무트 콜(1930~2017년, 재임 1982~1998년)까지 6명의 독일 총리를 다룬 책이다.
 
 
  ‘건국의 아버지’
  콘라트 아데나워
 
콘라트 아데나워. 사진=KAS-ACDP/Peter Bouserath
  ‘Der Alte’. 독일인들은 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이렇게 불렀다. ‘영감’ ‘노인장’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럴 만도 했다. 1949년 9월 총리에 당선됐을 때 그는 이미 73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도 이미 은퇴했어야 할 나이였다.
 
  총리 선출을 한 달쯤 앞두고 아데나워는 기독교민주당(CDU)과 기독교사회당(CSU·바이에른주의 보수정당으로 기독교민주당의 자매 정당) 중진정치인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 모았다. 참석자들은 의회평의회(제헌의회) 의장으로 새 공화국의 기본법(헌법) 제정을 이끈 아데나워의 업적을 칭송하면서 그에게 명예직인 대통령 출마를 권했다. 하지만 아데나워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총리입니다. 나는 73세지만 총리직을 맡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한마디 덧붙였다.
 
  “주치의 말로도 2년 정도는 일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이 말에 참석자들은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어차피 자신이 총리로 나서기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어렵다고 생각하던 기민당 중진들은 ‘한 2년 정도 아데나워에게 총리 자리를 맡겼다가 때가 되면 내가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아데나워가 총리가 되는 걸 찬성했다. 아무도 아데나워가 이후 14년간 총리직을 수행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원에서 아데나워는 불과 한 표 차이로 총리에 당선됐다. 누군가 그에게 ‘그때 누구에게 투표했느냐’고 물었을 때, 아데나워는 “당연히 나 자신에게 투표했다. 안 그러는 건 위선 아닌가?”라고 대꾸했다.
 
 
  이승만과 흡사
 
  이렇듯 아데나워는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 아데나워에게서 우리는 익숙한 한국사상(韓國史上)의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이승만(李承晩·1875~1965년, 재임 1948~1960년) 초대 대통령이다. 두 사람은 생몰(生沒)연대, 정치 이력, 집권 당시 나이, 집권 기간 등에서 거의 일치한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분단국가의 지도자로서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이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아데나워는 독일제국 말기던 1917년부터 쾰른 시장을 지내다가 1933년 히틀러 집권과 함께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히틀러 집권 기간 중 그는 게슈타포(비밀경찰)에게 수차 체포되기는 했지만, 적극적인 저항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미군정(美軍政)에 의해 다시 쾰른 시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뒤를 이어 쾰른 지역을 담당하게 된 영국군정 당국과 갈등을 빚다가 5개월 만에 다시 시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 대목은 이승만이 미군정 당시 최고 책임자인 존 하지 장군과 갈등을 빚었던 것을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는 거의 모든 독일 국민이 ‘재통일(再統一)’을 외치고 있을 때 냉전(冷戰)과 분단이 오래 갈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통일보다는 서독을 미국 중심의 서방 자유민주 진영과 결속시키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1945년 6월에 그는 영국과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는 라인강 연안 지역을 묶은 친(親)서방 라인 국가 건설을 모색했다. 이승만이 북한에 이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공산 정권이 들어섰다는 사실을 직시하고서 남한, 혹은 한 개 도(道)에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촉구했던 정읍 발언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1952년 3월 스탈린이 자유선거를 통한 독일의 재통일을 제안했지만, 아데나워는 그 제안을 서독을 미국 등 서방세계와 이간시키려는 술책으로 간주하고 단호히 거부했다. 아데나워는 자신의 친서방 외교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1951~1955년에는 아예 초대 외무부 장관을 겸임하기까지 했다. 이 점도 외교를 직접 관장했던 이승만과 유사하다.
 
 
  ‘나치 청산’을 둘러싼 고민
 
  이승만이 일제가 물러간 후 행정·경제 체제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좌익과의 투쟁,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신생 국가를 건설해야 했던 것처럼, 아데나워 역시 독일인들이 ‘영시(零時·Stunde Null)’라고 말하는 철저한 폐허 위에서 새로운 민주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국가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서 아데나워는 이를 위해 나치 독일의 관료나 군인들의 손도 빌려야 했다. 아데나워의 최측근으로 총리실장을 지낸 한스 글롭케, 난민부 장관 테어도어 오버렌더, 연방정보부장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 군사보좌관 한스 슈파이델 장군 등이 그들이었다. 독일 연방군을 창설할 당시 ‘나치 독일군 출신 고급 장교들도 새 연방군에서 일하게 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데나워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나토를 방문했을 때, 18세짜리 장군과 함께 사열을 할 수는 없지 않겠소?”
 

  먹고살기에 바빴던 1950년대의 독일인들은 아데나워의 이런 고충을 이해해주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대학을 다닌 그들의 자녀들은 ‘나치 청산’이 미비했다며 기성세대를 공격해댔다. 이 역시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못 했다는 시비에 시달리는 것과 흡사하다.
 
  다른 점도 있다. 반일(反日)민족주의를 거의 국시(國是)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이승만과는 달리 아데나워는 숙적 프랑스와의 화해를 지속적으로 추진했고, 이러한 노력은 1963년 ‘엘리제 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또 아데나워는 1955년 9월 소련을 방문해, 소련과의 국교(國交)를 정상화하면서 1만명의 나치 독일군 포로를 송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국군포로 송환을 포기한 이승만・역대 한국 정권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실험은 안 돼!’
 
  ‘영감’에게는 걱정이 많았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등 자기 아들뻘 되는 정치인을 보면서 아데나워는 영 성에 차지 않았다. 특히 그들이 미·소 양대 강국 사이에서 자신이 애써 구축해놓은 친서방 정책을 제대로 이행할지, 자기 이후에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보존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 때문에 고령(高齡)임에도 아데나워는 후계자 선정을 미루고 미적거렸다. 이승만이 조병옥(趙炳玉)은 이래서 안 되고, 장면(張勉)은 저래서 안 된다면서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한 것과 비슷하다.
 
  다행히 의원내각제라는 정치 구도 아래 기민당 내에는 인재가 많았다. 이들이 아데나워에게 은퇴를 강박했고, 총선이 가까워오자 아데나워도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아데나워는 이승만과는 달리 고향 땅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저자인 귀도 크놉은 아데나워의 정책에 대해 “외교정책에서는 현실주의였고, 국내정치에서는 ‘실험은 안 돼’였다”고 정리한다.
 
  독일연방공화국 탄생 40주년이자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해인 1989년 ‘누가 독일에서 가장 큰 업적을 이루어냈는가’를 묻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응답자의 33%가 아데나워라고 대답했다. 2위는 8%를 차지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비스마르크가 일구어낸 독일제국(제2제국)은 그가 실각(失脚)한 지 30년을 못 가서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데나워의 공화국은 그가 사망하고 반 세기가 넘었지만, 유럽의 중심국가로 우뚝 서 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아데나워의 뒤를 이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1897~1977년, 재임 1963~1966년)는 총리보다는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한 경제부 장관(재임 1949~1963년)으로 더 유명하다.
 
  경제학자던 에르하르트는 나치 시절 산업연구소라는 개인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1944년 〈전쟁 자금 조달과 채무의 정리〉라는 논문을 썼다.
 
  나치가 패망한 1945년 10월 에르하르트는 미 군정청에 의해 바이에른주 경제장관으로 기용됐다. 이후 그는 화폐·신용특별연구소장으로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 연합국들이 화폐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자문(諮問)에 응했다.
 
  당시 대세는 계획경제·통제경제였다.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은 물론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당조차 자유시장경제로는 사회정의 구현은 물론 당면한 물자부족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계획과 통제, 집산주의(集産主義)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바탕을 둔 자유시장경제가 새로운 나라의 경제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정부의 역할은 카르텔이나 독점(獨占)기업 등에 의해 시장경제 원리가 망가지지 않도록 규칙(질서)을 만들고, 그 규칙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보았다.
 
  1948년 6월 20일, 서방 점령 당국은 기존의 제국마르크(RM)를 10분의 1로 절하(切下)한 도이치마르크(DM)로 대체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 무렵 서방통합지대 행정평의회(사실상의 정부) 경제국장이던 에르하르트는 일체의 경제통제 조치와 가격통제 조치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서방 3개국 군정 당국과는 전혀 상의하지 않고서 취한 조치였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텅텅 비어 있던 가게의 진열장마다 갑자기 빵과 고기, 소시지, 각종 생필품이 가득하게 된 것이다. 가격통제 체제 아래 암시장(暗市場)에서 비싼 값에 물건을 거래하던 사람들이 제값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아래 물건들을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미 군정청장 루시어스 D. 클레이 장군이 노발대발하며 에르하르트를 호출했다. 클레이 장군은 “어떻게 연합국이 내린 지침을 변경할 수 있소?”라고 질책했다. 에르하르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저는 지침을 변경한 것이 아닙니다. 폐지한 것입니다.” 결국 자유시장경제 지지자였던 클레이 장군도 에르하르트의 조치를 너그러이 받아들였다.
 
  1954년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에 대해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인간의 창의성과 자유, 그리고 에너지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은 모든 독일 국민의 성실한 노력 덕분”이라고 술회했다.
 
 
  아데나워와의 갈등
 
  1949년 건국 후 에르하르트는 경제장관을 맡았다. ‘라인강의 기적’이 진행되는 동안 에르하르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기민당은 총선 때마다 에르하르트를 앞장세웠다. 에르하르트는 승리를 가져다주는 ‘선거의 기관차’였다. 아데나워가 엄부(嚴父) 같은 이미지였다면 둥그스름한 얼굴에 뚱뚱한 몸집을 지닌 에르하르트는 ‘자모(慈母)’ 같은 인상을 주었다. 독일인들은 에르하르트가 뻑뻑 피워대는 담배에서 공장의 굴뚝연기를, ‘뚱보’라고 불렸던 그의 외모에서 그가 이룩한 풍요로운 경제를 연상했다. 그는 1948년 이후 자기 돈으로 담배를 산 적이 없었다. 그의 지지자들이 전국에서 담배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에르하르트는 초대 대통령 테오도어 호이스, 총리 아데나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었다. ‘모두를 위한 번영’을 내건 에르하르트가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내지 못했다면, 걸음마 단계던 독일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공보처 장관 귄터 딜이 “아데나워가 정치의 틀을 주었고, 에르하르트가 내부 뼈대를 제공해주었다”고 말한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아데나워가 노쇠해지면서 에르하르트가 그의 후계자 감으로 꼽힌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아데나워는 그를 마뜩잖게 생각했다. 그는 드러내놓고 “에르하르트는 총리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떠들고 다녔다. 가장 큰 이유는 에르하르트가 ‘권력정치’에 어둡다는 점이었다.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 말고도 게르하르트 슈뢰더 외무장관,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 하원의장을 비롯해 몇 가지 카드를 만지작거렸지만, 기민당 당원이나 국민은 에르하르트를 원했다.
 
 
  ‘인품도 정치에 해로울 수 있다’
 
  1963년 10월 16일 에르하르트는 새로운 총리로 선출됐다. 하지만 아데나워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경제학자’이지 ‘정치인’은 못 된 에르하르트는 기민당을 장악하지 못했다. 고만고만한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에르하르트의 자리를 넘봤다. 정부 내에서는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더 중시하는 그룹과 갈등을 빚었다. 국민들은 눈부신 경제성장에 상응하는 더 많은 복지를 요구했지만, 에르하르트는 “국가는 하늘에서 풀을 뜯고 땅에서 우유를 짤 수 있는 그런 소가 아니다”라고 대꾸했다. 무엇보다도 1949년 이래 17년을 집권해온 기민당·기사당 정권에 대한 국민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당내(黨內)에서는 산적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민주당과 대연정(大聯政)을 구성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1966년 12월 기민당-사민당 연립정권이 들어서면서 에르하르트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에르하르트를 좋아한 언론인 요하네스 그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에르하르트 이후 우리는 정치가 인품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인품도 정치에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시대의 架橋’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사진=KAS-ACDP
  1966~1969년 기민당-사민당 대연정을 이끈 제3대 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1904~1988년, 재임 1966~1969년)는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독일인 사이에서도 아데나워와 빌리 브란트 사이에 묻혀 거의 기억되지 않고 있다. 굳이 기억하자면, 그는 1966년 11월 7일 기민당 전당대회장에서 여성 언론인 베아테 클라르스펠트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사실이 있다.
 
  키징거가 따귀를 맞은 것은 나치 이력 때문이었다. 그는 히틀러 집권 초기던 1933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에 가입했고, 1940년부터 외무부 라디오국에 들어가 부국장까지 올라갔다. 일종의 ‘생계형 나치’였던 그는 패전 후 18개월간 수감됐지만 결국 ‘단순가담자’로 분류되어 방면됐다.
 
  석방 후 키징거는 1948년 기민당에 입당해 연방 하원의원, 하원 중재위원장, 외무위원장, 바덴뷔르템베르크주(州) 총리 등을 역임했다.
 
 
  ‘걸어 다니는 중재위원회’
 
  키징거는 대인(對人)관계가 원만하고 관계자들 사이에서 타협을 잘 이끌어낸다고 해서 ‘걸어 다니는 중재위원회’로 불렸다. 그래서 서로 정책이 엇갈리는 독일의 양대 정당인 기민당·기사당과 사민당 연립정부의 총리로는 딱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가 총리가 될 때, 그의 나치 이력이 다시 문제가 됐다. 하지만 외무부 근무 시절 그가 반(反)나치 성향을 보였다는 동료의 증언을 담은 문건이 발견되면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코끼리들의 결혼식’이라고 불리는 기민·기사당-사민당 대연정이 수립된 것은 그만큼 당시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국이 갖고 있는 비상사태 권한을 독일 정부가 인수하기 위한 기본법 개정과 비상사태법 제정이 가장 큰 과제였다. 키징거는 정치적 입장이 정반대인 양대 정당, 저마다 대단한 개성을 가진 거물 정치인들로 구성된 연립정부를 이끌면서 이 숙제를 잘 해결했다.
 
  하지만 키징거는 ‘68사태’로 대변되는 시대정신의 변화에는 대응하지 못했다. 기성세대는 전후(戰後) 혹독한 폐허에서 미증유의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를 일궈냈지만, 젊은 세대는 그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당신은 나치 시절에 뭐 했느냐?”고 대드는 시절이 온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원하지 않았지만 불법을 자행한 국가에 휩쓸려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세대의 대표자’라고 생각했던 키징거는 이런 흐름을 읽지 못했다. 그가 젊은 여성에게 따귀를 맞는 봉변을 당한 것도 그래서였다.
 
  1969년 9월 28일 총선에서 키징거가 이끄는 기민당·기사당은 46.1%를,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은 42.7%를, 자유민주당은 5.8%를 득표했다. 키징거가 자민당과 손잡을지 망설이는 사이에 사민당이 먼저 자민당과의 연립정부 구성 방침을 밝히고서 자민당을 포섭했다. 결국 기민당·기사당은 건국 이래 20년 만에 정권을 잃고 말았다.
 
 
  ‘동방정책’을 실험한
  빌리 브란트
 
빌리 브란트.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이룩한 자유와 풍요를 바탕으로 시대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번듯한 민주공화국을 이룩한 윗세대의 희생에 감사하기보다는 히틀러 정권에 굴종하고, 그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을 성토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노인장’ 아데나워는 “실험은 안 된다”고 외쳤지만, 많은 국민은 ‘이제 실험을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민당·기사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은 그 실험을 위한 실험이었다. 1959년 ‘바트 고데스부르크 강령’ 이후 정강정책에서 계급주의적 요소들을 포기하고, 아데나워 정권의 외교·안보정책을 수용하면서 우(右)클릭을 계속해온 사민당은 대연정을 거치면서 자신들에게 국정운영 능력이 있음을 과시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젊고 잘생긴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인은 물론 독일인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1963년 6월 서(西)베를린을 방문한 케네디가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고 외칠 때, 그의 옆에는 케네디만큼이나 젊은 서베를린 시장이 서 있었다. 바로 빌리 브란트(1913~1992년, 재임 1968~1974년)였다.
 
 
  사생아에서 총리로
 
  빌리 브란트의 본명은 헤르베르트 프람이었다. 그는 아버지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생아(私生兒)다. 17세 때인 1930년 사민당에 입당한 그는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인 1933년 4월 어선을 타고 노르웨이로 탈출했다. 이때부터 그는 원래 이름을 버리고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근본 없는 사생아, 국민들이 나치 치하에서 고생할 때 망명해 한때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했었다는 사실은 후일 그가 정치인으로 대성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그의 발목을 잡았다.
 
  나치 패망 후 독일로 돌아온 빌리 브란트는 에른스트 로이터 서베를린 시장 밑에서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당초 브란트는 비교적 친미반공적(親美反共的) 입장을 견지하는 사민당 내 우파였다. 그는 당내 ‘꼴통좌파’들과는 구별되는 ‘젊은 피’였다.
 
  1961년 8월 베를린장벽이 만들어졌을 때 빌리 브란트는 서베를린 시장이었다. 브란트는 장벽이 서는 것을 막기 위해 아데나워 총리,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베를린장벽 구축에 분노하면서도, 그것을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분단구조를 추인(追認)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빌리 브란트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보기로 결심했다. 브란트의 측근 에곤 바르가 ‘접근을 통한 평화’라는 개념을 개발해냈고, 이것은 후일 동방정책으로 이어졌다.
 
  키징거와의 대연정 정부에서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 동방정책을 실험하기 시작한 빌리 브란트는 1969년 9월 총리가 된 후 이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잇달아 관계를 정상화했다. 1972년 12월 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 바르샤바 게토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그 절정이었다. 1972년 11월에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됐다.
 
 
  기욤 사건
 
  박수도 많았지만, 반발도 적지 않았다. 1972년 4월 기민당·기사당은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브란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不信任案)을 제출했다. 연립정권의 한 축인 자민당 의원들이 속속 탈당해, 기민당으로 넘어오는 상황이어서 승산이 있어 보였다. 이는 합헌적 정권교체 방법이었다.
 
  하지만 사민당 정권을 지지하는 좌파 매체와 지식인들은 기민당·기사당의 불신임안 제출이 마치 ‘쿠데타’라도 되는 양 비난해댔다. 노조는 불신임안 가결 시 총파업을 예고했다. 마치 2004년 노무현 탄핵 때 여당과 방송, 좌파 시민세력이 탄핵을 ‘의회 쿠데타’로 몰아간 것과 흡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통과가 확실시되던 불신임안은 불과 두 표 차이로 부결됐다. 국회의원에 대한 매수와 동독 첩보기관 슈타지의 공작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브란트는 1972년 11월 총선에서 45.9%를 득표, 재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1기 시절에 너무 에너지를 쏟아서였을까. 2기 정권에 들어서면서 브란트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당내 장악력도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건강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브란트 정권은 오래전부터 구상해오던 연금(年金)제도 확대 등 사회보장 관련 개혁법안들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닥쳤다. 경제성장이 무한정 계속되리라는 가정 아래 설계된 개혁법안들은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비틀거리기 시작한 브란트에게 1974년 4월, 치명적인 일격이 가해졌다. 브란트의 비서였던 귄터 기욤이 동독의 간첩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기욤이 일종의 채홍사(採紅使) 노릇을 했다는 자극적인 보도들이 나오자 브란트는 결국 그해 5월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위기의 바다를 헤쳐나간 선장’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슈미트.
  브란트가 실험을 하느라 어질러놓은 설거지는 헬무트 슈미트(1918~2015년, 재임 1974~1982년)의 몫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공군장교로 복무한 그는 종전(終戰) 후인 1946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1953년 처음으로 하원의원이 된 그는 사민당 의원으로서는 드물게 국방문제에 천착했다.
 
  1962년 슈미트가 함부르크 자치시(自治市) 내무장관으로 재직할 때 폭우가 내렸다. 그는 월권(越權) 시비를 감수해가면서 연방군과 국경경비대까지 재해 대책에 동원했다. 이후 그에게는 ‘해결사’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항구도시 함부르크 출신인 슈미트는 마도로스 모자를 즐겨 썼는데, 이는 그의 ‘해결사’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위기가 널려 있는 바다를 헤쳐나가는 ‘선장’이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총리로 있던 1977년 10월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독일의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한 후 구금 중이던 테러리스트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때도 슈미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GSG-9 특공대를 투입,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하고 승객들을 구출해냈다.
 
  1965년 다시 연방의회로 복귀한 그는 이후 사민당 원내대표를 맡아 대연정 시기에 연정 파트너인 기민당·기사당과의 관계를 잘 조율해 명성을 얻었다. 브란트 정권하에서는 국방장관, 재무장관, 경제장관 등을 역임했다.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그는 브란트 정권 말기부터 확실한 차기 총리 후보로 꼽혔고, 브란트가 사임하자 결국 총리 자리에 올랐다.
 
 
  G7의 창안자
 
  슈미트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충실하게 계승했지만 동독이나 소련에 대해서 할 말은 했다. 1975년 여름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때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 서기장과 만났을 때, 슈미트는 이렇게 말했다.
 
  “호네커 씨, 기욤 사건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일을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재임 중 슈미트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세 번이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슈미트는 “브레즈네프가 지미 카터보다 내 우려를 더 잘 이해한다”고 할 정도로 브레즈네프와 잘 지냈다. 그는 소련에서 천연가스를 들여오고, 파이프 라인용 강관(鋼管)을 수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슈미트가 소련에 대해 환상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나토 회의에서 SS-20에 대항하기 위한 중거리미사일 배치를 강력히 주장했고, 이는 퍼싱Ⅱ 및 크루즈 미사일 배치로 이어졌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 지역에서 좌파의 부추김을 받은 반핵평화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대화를 위해 안보를 외면하는 사이비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기민당 정치인”
 
  슈미트가 취임한 때에는 제1차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세계경제가 침체에 빠졌다.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는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6개 선진공업국의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그 첫 회담은 1975년 프랑스에서 열렸다. 이듬해부터는 여기에 캐나다가 추가됐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G7회담의 시작이었다.
 
  사민당 정치인이었지만, 슈미트는 석유파동 이후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긴축정책, 기업의 투자유인, 실업보험료 요율 인상 등 사회민주주의자답지 않은 정책을 폈다. 함부르크 내무장관 시절 그의 상사(上司)였던 페터 슐츠 전 함부르크 시장은 “헬무트 슈미트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는 유혹을 뿌리쳤다. 그는 오히려 그들에게 약속을 했으며 사실을 말해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혹자는 그를 두고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기민당 정치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닥치면서 경제는 더욱 나빠졌다. 1969년부터 계속돼온 사민당 정권에 대한 국민의 피로감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사민당 내에서는 좌우파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이 다시 말을 갈아탔다. 1982년 9월 기민당・기사당과 자민당은 슈미트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슈미트에게는 연방공화국 초대 총리 아데나워, 동방정책의 브란트, 통일 총리 콜 같은 ‘브랜드’가 없다. 그래서 페터 필립스 기자는 “곧 50주년이 되는 본 공화국을 회고해볼 때, 슈미트의 총리 재직 시절을 특징 지어 역사책의 표제로 들어갈 만한 뚜렷한 항목이 없다는 것이 그의 개인적인 비극”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슈미트 자신은 퇴임에 즈음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로이센의 한자동맹 도시 함부르크 출신이다. 나 자신이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니 만족하며, 다른 사람들이 의무를 다했다고 말해준다면 더 기쁘다.”
 
 
  ‘통일 총리’
  헬무트 콜
 
헬무트 콜.
  1982년 기민당의 헬무트 콜(1930~ 2017년, 재임 1982~1998년)이 헬무트 슈미트를 대신해 독일연방공화국의 제6대 총리가 됐을 때, 그가 독일의 통일을 이룩하고 이후 16년이나 그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193cm의 거구던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둔한 사람 같아 보였다. 그래서 재임 중에 그를 소재로 한 유머들이 나돌았고, 그걸 묶어서 《콜 총리의 웃음》이라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 콜 자신도 스스로를 우스갯거리로 삼기도 했는데, 자신의 몸무게는 국가기밀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콜에게는 번득이는 정치감각과 결단력, 보스 기질, 그리고 때로는 비열하고 잔인하다고 할 정도의 권력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젊어서부터 ‘정치 신동(神童)’ ‘아데나워의 손자’라고 불릴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39세 때 고향인 라인란트팔츠주 총리가 됐고, 1973년에는 기민당 총재가 됐다.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그는 집권 8년 차로 접어든 1989년 초까지만 해도 뚜렷한 업적을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1990년으로 예정된 총선에서 그의 전망은 어두워 보였다. 당내 일각에서는 그를 몰아내려는 움직임도 나오기 시작했다.
 
 
  통일의 기회를 움켜잡다
 
  콜과 기민당, 아니 독일과 세계의 운명을 바꾼 것은 1989년 여름부터 전개된 동구권의 격변이었다.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자, 휴가차 헝가리를 찾은 수천명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서독대사관으로 동독 탈출자들이 몰려들었다. 수만명의 동독 탈주가 계속되는 가운데 그해 11월에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역사를 흔드는 대사건들이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콜은 흔들리지 않았다. 초대 총리 아데나워는 1959년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소련은 독일의 분단과 이에 따른 유럽의 분단이 이득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언제 이 순간이 올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순간이 가까워지거나 다가온 것처럼 보이면 우리는 이 순간을 이용해야만 한다.”
 
  이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청년 당원 중에는 29세의 헬무트 콜도 있었다. ‘아데나워의 손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다가 통일의 기회가 오자 단호하게 그 기회를 움켜쥐었다. 당시 사민당은 통일의 기회를 움켜쥐기를 망설였고, 서독 내 일부 좌파 세력은 민주화된 사회주의 동독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것이 독일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역사의 격변기에 애국심, 확신, 결단력, 국제적 식견이 있는 헬무트 콜이 총리 자리에 있었던 것은 독일의 행운이었다.
 
  아쉽게도 1990년 10월 3일 통일의 대업(大業)을 이룬 후, 헬무트 콜은 범상한 총리로 전락했다. 이제 그는 ‘왜 통일 때 약속했던 번영이 속히 안 오느냐’며 달걀을 던지는 동독인, ‘세금 부담 없이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더니 통일세(연대세)가 웬 말이냐’고 따지는 서독인들 사이에서 절절매야 하는 처지가 됐다. 통일후유증으로 실업률이 크게 올라가고 경제상황이 악화됐다. 결국 헬무트 콜은 1998년 총선에서 패배해, 게르하르트 슈뢰더(앞에서 말한 기민당 정치인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동명이인)가 이끄는 사민당에 정권을 내주었다.
 
 
  자기 역할을 다한 역대 총리들
 
  이 책을 읽으면서 ‘전후 독일의 총리 가운데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단명(短命)하거나 저평가를 받는 총리도 있었지만, 그들도 모두 나름 자기 역할을 다했다. 1976년 독일 언론인 요하네스 그로스는 이렇게 예언했다.
 
  “아데나워가 독일연방공화국의 어버이였다면 에르하르트는 양육자였다. 브란트가 구세주가 되고자 했다면 슈미트는 보호자였다. 그런데 콜 총리와 함께 새로운 타입이 등장하는데 이는 독자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데나워로부터 시작되어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 이르는 전임자로부터 정책을 계승, 다시 아데나워로 돌아왔다.”
 
  책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1944~, 재임 1998~2004년)는 사민당 지지층의 이익에 반하는 하르츠 개혁을 밀어붙여 침몰해가던 독일 경제를 되살렸다.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 현 총리(1954~, 재임 2005~현재)는 글로벌 금융·재정위기를 겪으면서도 유럽연합(EU)의 중심 국가로 우뚝 선 독일의 총리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귀도 크놉은 이렇게 말한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총리 복(福)이 있었으며, 국민 모두도 나라 복이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총리와 나라를 가진 저자가 눈물 나게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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