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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자료로 읽는 인물 근대사 〈5〉 조만식(曺晩植)

겸손하고 소탈했던 민족 지도자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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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운동자로서의 실천궁행이 ‘물산장려운동’
⊙ 새빨갛게 깎은 머리, 흰 털이 드문드문, 턱 아래 노랑 수염
⊙ 숭배하는 인물은 비스마르크, 이순신, 카를 마르크스, 괴테, 빅토르 위고, 찰리 채플린
고당 조만식 선생.
  조만식(曺晩植·1883~1950)은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엄친 창녕 조씨 경학(曺景學)과 자당 경주 김씨 경건(敬虔)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고당(古堂)이다.
 
  한학을 배우다 10대 후반에 포목상, 지물상을 했다. “이 무렵 술 잘 먹고 돈 잘 쓰는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1905년 기독교 입신은 인생행로에 전환점이 되었다. 대주가(大酒家)였던 조만식은 신앙생활 시작과 함께 술을 끊었다. 그해 22세의 만학도로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1913년 31세 무렵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당시 애국자와 독립운동가가 조국의 광복을 기약하며 중국과 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날 때 고당은 치욕의 땅이 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애국 항일운동은 교단에서 시작된다.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1907년 12월 24일 설립)에는 이 학교의 설립자인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1864~1930)이 있었다. 고당은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15년 교장이 되었다.
 
‘평양 조선물산장려회 선전표어’. 조만식은 1922년 오윤선(吳胤善) 장로와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1919년 조만식은 이승훈과의 묵약 아래 교장직을 사퇴하고 기미만세운동을 지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복역 후 1920년 1월 평양 형무소에서 2개월의 형 만기를 남겨두고 가석방을 받아 오산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 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기미만세사건 이후 대부분의 동지들은 일본 관헌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망명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장한 모험, 음산한 테러리즘, 화려한 정치적 제스처” 대신 동포애와 대동단결을 강조했다. 비폭력과 무저항의 저항운동으로 조국을 자주 독립의 길로 인도하려 했다. 마하트마 간디와 비교해 ‘한국의 간디’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이유다.
 
  1921년 조만식은 평양기독교청년회(YMCA)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山亭峴)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이듬해 평양의 지기이며 동지인 오윤선(吳胤善) 장로와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늘 무명옷과 삼베옷을 입었으며, 두루마기에는 옷고름 대신에 단추를 달았고 그 길이는 무릎을 덮지 않았다. 춘하추동 말총모자를 썼고, 편리화를 신었다. 편치 않았던 그의 옷차림은 오랫동안 한국인의 기억 속에 남았다.
 
  1923년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 등 여러 동지와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 이듬해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뒤에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이 되었다가 일제 압력으로 사직(1926년)했다.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1927년은 우리 민족운동사상 기억해둘 만한 해이다. 결과적으로 민주 진영은 공산주의자의 배신과 일제 탄압으로 쓰디쓴 고배를 마셨지만 일본 통치하에서 처음으로 각 파의 지도자가 대동단결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다.
 
 
  조만식과 《조선일보》
 
  조만식은 신간회 결성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일부 동지들은 통합운동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그를 보고 ‘기독교 사회주의자’라고 조소하고 오해도 하였다. 그는 어떤 ‘주의자’라고 규정짓기에는 너무나 폭이 넓고 생각이 깊은 인물이었다. 누가 뭐라 하든 민족의 대동단결과 공고한 통일전선의 결성만이 분산된 국내의 애국운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또 강력히 추진할 수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나 탄압과 와해공작으로 신간회는 결성한 지 5년도 못 되어 해산되고 말았다.
 
  조만식은 1932년 11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경영난을 겪으며 고리대금업자의 손으로 넘어갈지, 민족 진영의 신문으로 남을지의 갈림길에 있었다. 절체절명의 시기에 사장으로 추대된 조만식은 내분을 마무리하고 《조선일보》를 살려내는 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평북 정주의 ‘광산왕’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1890~?)에게 《조선일보》 인수를 권유한 것도 조만식이었다. 조만식은 1915년 오산학교 교장 시절부터 방응모를 잘 알고 있었다. 나이는 조만식이 일곱 살 위지만 서로 존대했다. 두 사람은 19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오산학교 부흥운동에 동참했다.
 
  조만식은 1933년 7월 19일 방응모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신문사 고문으로 물러날 때까지 약 8개월간 사장으로 재임했다. “무릎까지 올라간 ‘몽당치마 같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는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은 어린 (신문사) 급사마저도 탄복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사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고문과 취체역(이사)을 맡아 《조선일보》 폐간 때(1940년)까지 재직했다.
 
  주주총회가 있으면 경성에 올라와 충정로에 있는 방응모 집에 머물렀다. 방응모는 중학생이던 장손 방일영(方一榮·1923~2003)에게 조만식의 잠자리를 돌보게 하고 함께 모시고 자도록 했다. 장손이 손님을 모시는 것은 귀빈을 대우하는 최대의 예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와 軟禁
 
1945년 8월 평양에서 있은 일본군 항복식에 참석한 고당 조만식(왼쪽). 가운데가 일본군 사령관 쇼지 후루카와 중장, 오른쪽은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옥고를 치른 조만식은 이후 고향에서 은거의 삶을 살았다. 1945년 농사꾼으로 세월을 보내다 광복을 맞았으며, 해방 정국에서는 어느 한 정파의 지도자가 아니라 38선 이북 지역을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로 추앙받았다. 미국을 배경으로 활동한 이승만(李承晩·1875~1965), 중국을 무대로 활동한 김구(金九·1876~1949) 등과 비교하면 철저히 국내 민중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토종 민족 지도자였다.
 
  광복 후 조만식은 그해 11월 3일 민주 계열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평양에서 창당해 당수가 되었다. “조선민주당은 소련의 기획과 협조하에 공산당의 우당으로 창당되었다”고 한다. 조선민주당은 단기간에 당세(黨勢)가 커져 창당 1개월도 안 되어 공산당보다 더 많은 당원을 확보했다. 그러던 중 1945년 12월 말에 발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는 조만식의 정치적 운명을 바꿔놓았다.
 
  소련군과 김일성은 조만식에게 인민정치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를 수용하는 안건을 회의에 부칠 것을 종용했으나 조만식은 이를 거부했다. 조만식은 연금(평양 고려호텔)되었고 이후 공식 석상에서 그의 얼굴을 더는 볼 수 없었다.
 
1945년 9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조만식.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이 사진이 조만식의 최후의 사진이다. 사진=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제공
  사인을 두고 여러 설이 있으나 1950년 10월 18일 퇴각 중이던 북한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대동강변 내무성 정보처에서 사살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두발만 안장된 조만식의 묘가 마련되어 있다. 북한에서 연금될 당시 최후를 예감하고 부인에게 건네준 두발이 45년 만인 1991년 국립묘지에 묻힌 것이다.
 
  조만식은 부인과 사별한 후 1937년 이화여전 출신의 전선애(田善愛)와 재혼했다. 아들 조연흥(曺然興)은 1967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사회부장, 제작국장,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월간조선》은 조만식의 삶과 행적을 이해할 만한 글 몇 편과 신문기사를 소개한다. 일부 문장은 문장의 맛을 살리기 위해 당시 문법 체계를 따랐고 일부는 현대어 표기로 고쳤음을 밝혀둔다.(참고 문헌: 김정형의 《20세기 이야기-1920년대》 《조선일보 사람들》, 오영진의 ‘한국의 간디 조만식’)
 
 
  사람/조만식씨의 이꼴저꼴
  평양 오기영(吳基永)
 
《동광》 1931년 1월호에 실린 ‘조만식씨의 이꼴저꼴’.
  사람… 사람만치 우리의 흥미를 끄는 제목이 없다. 내외 고금의 인격자 인물을 납치하야 해부하고 비판하고 그들로 하야금 우리의 전철이 되고 지도가 되게 하라.
 
  조만식- 그의 이름을 누가 모르랴! 민족운동자로서의 일관한 30여 년의 고행. 그의 실천궁행은 이제 와서 엄연히 서도민중의 주석(柱石)을 이뤘다. 연전 경성 모 잡지가 선생을 팔방미인이라 평하고 전 평양, 연(延)하야는 서북 일대의 분노를 산 것은 그에게 민중의 신망과 존앙이 어떻게 높음을 말하는 것이다. 필자는 결코 선생을 평하려는 자가 아니다. 민중과 더불어 같이 괴롭고 같이 아파하는 목자로서의 한 사람인 선생의 과거와 현재의 종종상(種種相)을 써보려 함이다.
 
  실없는 수작이 나오든지 싱거운 대목이 있어도 호의와 익살로 알아주면 그뿐이다.
 
  ◇
 
  장손이란 아이는 쌈꾼으로 유명하였다. 이 싸움 잘하는 총각의 머리는 길지 못하야 모지랑(모지랑비·끝이 다 닳아서 무디어진 비-편집자) 머리에 댕기를 달고 다녔다. 싸움을 하면 머리를 푹 숙이고 상대의 가슴을 향하야 달려들기 때문에 상대는 항상 그의 머리꽁댕이(머리꼬리-편집자)를 붙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머리가 많이 빠지는 탓이었단다. 그러나 싸움에는 항상 상대를 혼내주고야 말았다. 그만큼 이 총각은 심술궂었다. 그가 오늘 민중의 선구(先驅) 조 선생의 소년시대라면 거짓말인 듯하다.
 
 
  청년 시에서 남은 장기
 
  아마 한 30년은 지난 일일 듯, 평양 난봉꾼에는 곱살스럽고(선생의 늙은 얼굴의 윤곽만 보고 짐작해도)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모양 잘 내고 다니는 젊은이, 그는 술이 과하야 이따금 길 위에서 하늘을 이불 삼아 안면(安眠)이 일쑤였다. 지금처럼 길이 좋지 못한 그때 비나 오면 정강이까지 빠지는 진탕에서 한잠 자고 나면 전신은 흙투성이가 되었을 게다. 그래도 그는 늘 깨끗한 옷과 정한 갖신(가죽신-편집자)을 신고 다녔다. 지금 물산장려를 하느라고 무명옷에 이따금 깜장버선을 곧잘 신는 선생의 부인은 젊어서 이 난봉꾼의 의복을 당해내기에 아마 허리가 아팠을 듯하다. 조 선생이 지금도 수심가 한마디를 썩 잘한다는 것은 이 청년시대에 남은 것이다. 술 잘 먹고 기생들의 귀염 받고 또 놀음 잘하는 이 젊은 난봉꾼은 그대로 진흙에서 묻힐 사람이 아니었다. 한번 깨달으매 다시 주저가 없이 그는 숭실학교 무등(戊等)반에 입학하였다. 무등반은 지금으로 말하면 보통학교 5~6학년 정도다.
 
 
  물산장려의 실천궁행
 
  선생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온 때부터 오늘날까지 그의 민족운동자로서의 실천궁행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정주 오산학교장 당시 학생들과 더불어 친히 괭이를 잡고 운동장을 수축(修築)하였다는 것은 그의 실천궁행을 잘 말하는 활(活)사실이다. 오늘날 그는 물산장려운동의 유일한 실행자다. 평양에서는 선생과 오윤선(吳胤善)씨 두 분밖에는 물산장려의 실행자가 없다. 선생의 물산장려는 의복에서부터 모든 일용품에까지 좌우간 명함을 조선 백지로 찍어 쓰고 모자는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면서도 7, 8원짜리 옳지 못한 말총 모자를 해 쓴다. 신은 편리화가 아니면 고무신. 이따금 비 오는 때 구두에 덧신을 씌어 신은 것을 본 어떤 분의 말. 그것은 일본 유학 당시에 사서 신던 것이라고! 겨울에는 깜장 버선을 꼭 신는다. 두루마기도 멋 부리는 여학생의 치마보다 짧다. 두루마기가 짧아지는 데는 그 부인의 반대로 수 3차의 내외싸움이 있은 끝에 겨우 선생이 이겼다고. 글쎄 금년 따라 여름철에 깡뚱한 베 두루마기를 해 입으시더니 부친상을 당해서 베 두루마기가 정식이 되었다. 선생의 집에는 방이 두 갠데 값 눅은(값이 싸다-편집자) 평양전등도 이 댁에는 한 개밖에 더 들어가지 못하였다. 선생이 기거하는 방에는 아직 남포를 쓰고 자리는 굵은 풍석지적을 깔아서 벽촌 농가의 집과 같다. 벽에 걸린 20년 전에나 유행하던 헝겊 가방은 지금도 선생의 애용물이다.
 
 
  모지랑비 같은 노랑 수염
 
  하기는 50 고개를 넘으려는 선생이 아직 살림살이의 경험이 없으시다. 50을 바라다보도록 선생은 노부(老父)에게 용돈을 타서 썼다. 이것은 선생이 개인의 사생활에 조금도 돌봄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지랑 답사리 빗자루 같은 노랑 수염을 턱 아래 달고 무명옷 속에 쌓여 있는 이에게는 남이 따르지 못할 온정과 겸손이 있다. 연전(年前)에 일본 모 대학 법과에 다닌다는 어떤 얼치기 학생이 선생을 찾아와서 법률 강의를 장시간 할 때 일찍이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한 선생은 그저 “예예, 아하 그래요?”- 법률에는 문외한인 듯한 선생의 겸손은 그 학생으로 하야금 선생이 법과 출신인 줄을 알고 부끄럼을 당(當)치 않게 하였다. 그의 온정은 오산고보와 평양 숭인(崇仁) 교장 시대에 더욱 더 발휘되었다. 학생들은 그의 말씀을 거역하는 이상의 큰 죄가 없는 줄 알았다. 선생은 항상 학생을 울기까지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온정뿐 아니라 그의 전 인격은 선생을 아는 지 불과 3년에 지니지 못하는 필자보다는 선생과 함께 기미년에 투옥되었던 이들이 더욱 더 실위(實威)를 가졌다고 한다. 불행이 내가 여기 쓸 만한 선생의 옥중 생활을 알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눈물 섞인 유머
 
  선생에게는 독특한 유머가 있다. 어떤 회석(會席)에서나 특히 결혼 식장에서 신랑신부를 웃기지 않은 때가 없다. 필자,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나의 결혼 당일 선생의 축사에 대실패를 하였다. 신랑인 나는 그만두고 그야말로 첫날 색시라는 내 아내가 주례자의 앞에서 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화가 많다. 이것을 여기 쓸 수 없는 것은 공연히 길게 써서 편집자의 머리를 아프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회 있으면 조만식 일화집을 한 개 만들 필요쯤은 단단히 있다. 울울한 우리 생활에 확실히 청량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선생은 실없는 사람이 아니다. 경우 없이 사람을 웃기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채플린’의 희극 속에서 눈물 나는 장면을 늘 보는 바이어니와 선생의 웃는 소리와 기다(幾多·얼마쯤 되는 그 수량-편집자)의 일화가 결코 한번 웃고 그칠 일이 아니다. 거듭 음미할 때 거기는 우리들의 울울한 현실을 다시 한 번 통위(痛威)할 때가 많다.
 
 
  訃告 폐지, 허식 개혁
 
1995년 10월 18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고당 조만식 선생 순국 45주기 추모회 및 고당 회상록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왼쪽부터)노신영 전 국무총리, 강영훈 전 국무총리, 안병욱 전 숭실대 교수, 홍성철 전 통일원장관, 방우영 고당기념사업회 이사장.
  지난여름 선생의 엄친상을 당했을 때다. 그 부음을 평양 성안에 사람으로서도 알지 못한 이가 많다. 알았다면 그는 선생과 가까이 지냈거나 혹은 신직(新職)의 인사소식을 본 사람뿐 그는 일절로 부고를 폐지하였다. 화환과 만장의 사절은 물론 친지의 장지 동행까지도 일절 사절하야 평양의 아니 조선의 신기록을 지었다. 그가 허례폐지를 주장함이 그 자신에게부터 실행됨을 알게 하는 바이어니와 선생이 따님을 시집보낼 때에도 ‘모닝’을 세(貰)내 오지 않고 조선예복으로써 식을 마쳤다. 이것을 고식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철부지가 아니면 미련한 인간일 것이다. 평양에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통 몰아서 하나도 쓸 놈이 없다고 욕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에게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이다. 그의 앞에는 모두 다 사람처럼 뵈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조 선생님은 그렇지 않거니- 이것이 그의 말이다. 평양사람을 다 욕을 하여도 조 선생만의 인격은 그의 핏속에도 흐르는 모양이다. 선생이 매일 같이 기독청년회관에 나와 낮았으면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정말 각 방면 인물이다. 억울한 호소, 딱한 의논, 입학시험에 낙제된 학생의 부형, 낙제의 염려 있는 학생의 부형, 지방에서 처음으로 평양 오는 사람의 방문, 심지어는 연전에는 출분(出奔·도망친-편집자)한 계집 때문에 선생을 찾아온 노동자도 있었다. 선생은 반듯이 이들에게 손을 주어 악수하고 친절로써 그의 온화한 성품을 발휘한다. 선생은 장로교의 장로시다. 일찍이 장로로 추천되어 그 문답을 받을 때 요리(要理)문답에 낙제되어 다음 번에야 장로가 되었다. 다음 번에도 대답이 장로답지 못한 것을 말하자면 특등취급으로 준(準)무시험 장로쯤 되었다. 물론 선생의 신앙이 부족한 까닭은 결코 아니다. 장로문답에 낙제라는 것도 선생이 아니면 없을 일이다. 그는 구태여 장로를 원하지 않았던 듯싶다. 그에게는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다. 이제는 없어졌지만 연전 경성 모 신문사에서 선생을 모셔다가 사장을 삼으려 할 때 끝내 거절한 것이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선생에게는 없는 것이 많다. 재욕, 명예욕, 야심, 교만- 이것은 다 선생이 갖지 못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에게 가난이 따르고 고생이 따른다. 그러나 야심과 교만이 없다고 명예욕이 없다고 그는 결코 이 세상에 낮은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 없는 것이 많은 대신 그에게 크고 귀한 것이 많다.- 지조, 지조는 그의 생명보다 귀하고 큰 것이다. 그의 비타협과 극도의 절제생활, 조선사람의 좋은 부분만 추려 모으면 어떨까 하는 의문은 선생을 표본 삼음으로써 풀어질 것이다. 선생의 나이 벌써 50 고개를 넘으려 한다. 새빨갛게 깎은 머리에 흰 털이 드문드문 박히고 턱 아래 노랑 수염도 결코 젊은 상징은 못 된다. 아마 선생으로서도 이따금 늙는 비애를 느끼시는 모양이다. 나보다 늙은 일꾼을 생각하면 여전히 용기백배라는 말씀이 그 뜻이다. 선생의 마음은 아직 새파란 젊을 것에 틀림없다. 그래도 늙은 거야 어쩌나. 늙은이 행세도 할 것은 해야 될 모양이다. 이 즈음 선생이 생각하야 늙어가면서 실행할 좌우명(?)을 써보자.
 
  1. 세수 자주 할 것 2. 이(齒)를 자주 닦을 것 3. 수염을 자주 깎을 것 4. 청년들 모인 곳에 오래 앉아 말참례하지 말 것 5. ?(끝)
 
  -선생은 필자의 실없는 수작에 너그러운 용서를 내릴 줄 굳게 믿는다.
 
  ▲출처=《동광》 1931년 1월호, p.42~45
 
 
  세계 10대 인물 공천
 
《동광》 1932년 1월호 ‘가장 숭배하는 인물’을 묻는 앙케트에 대한 조만식의 답변.
  시인, 사상가를 막론하고 세계적 위인들은 우리에게 많은 의의를 주는 것이다. 과연 조선에서 기자와 문사, 저작자, 변호사 등 각계인사들은 어떠한 인물을 좋아하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흥미와 유익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야 좌기(左記)와 설문을 내서 얻은 회답이 이것이다.
 
  동서와 고금을 통틀어서 선생이 가장 숭배하거나 혹은 가장 좋아하는 인물들은 누구입니까.
 
  1. 정치가 2. 군인 3. 사상가 4. 시인 5. 소설가 6. 음악가 7. 배우 8. 화가 9. 과학자
 
  평양 조만식
 
  1. 비스마르크 2. 이순신 3. 카를 마르크스 4. 괴테 5. 빅토르 위고 7. 찰리 채플린 9. 다윈.
 
  ▲출처=《동광》 1932년 1월호, p.58
 
 
  기독교인의 생활
 
《청년》 1935년 9월호에 실린 조만식의 ‘기독교인의 생활’ 첫 장 모습.
  조만식
 
  기독교인의 생활을 대개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대신적(對神的) 생활, 이것은 곧 신앙생활이다. 인간은 시대의 환경을 많이 받는다. 조선 기독교인의 과거 신앙생활에 대하야 30년 전 나의 경험한 바로 본다면 태서(泰西·‘서양’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편집자) 문명을 받을 때에 수 교회를 통하여 학교라든지 의료기관이라든지 이풍역속(移風易俗·풍속을 개량함-편집자)하는 것이 들어오게 되었음으로 유의지사(有意之士)들이 교회로 집중됨을 보았다. 이는 교회가 곧 사회를 변혁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또 20년 전과 비하야 본다면 정치적으로 변화가 생기고 과학적이나 경제적으로 변천이 많아졌다. 그러므로 20년 전 그것으로는 도저히 전도할 수 없다. 본래 신앙생활을 하는 자도 점점 동요되어 간다. 금일 청년들의 신앙은 대개 인습적이 아니면 추종적이라 할 것이다. 이에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을 해부해 본다면
 
  1. 단일 신앙, 이것은 단순하고 무조건으로 기뻐하고 늘 좋은 감상을 가진다. 곧 노파(老婆·할머니-편집자)들이나 아동에게서 보는 것이다.
 
  2. 이지적 신앙, 이것은 청년들의 신앙태도이니 성경 그대로 믿어지지 않는다. 자연을 대하거나 화일타 석일개(花一朶 石一介·꽃 한 송이, 돌멩이 하나-편집자)도 창조의 법칙을 말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도 신의 자(子)로 믿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人)으로는 완전한 인격이라는 인식을 갖는다. 이야말로 감지우감(減之又減·덜어낸 데에서 또 덞-편집자)해서 보통으로 갖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갖는 이는 마음이 늘- 불안하다.
 
  3. 영감적 신앙, 이것은 신의 감동을 받았거나 특히 마음에 어떤 자극을 받은 신앙이니 예(例)하면 저 바울(바오로) 선생 같은 이가 그러하다. 우리 마음에 참됨과 열성을 가져 신의 참됨과 합치될 때 바야흐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아희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픈 소리를 하여도 울지 아니하였다”는 비유와 같이 아무 감응이 없는 생활은 영감을 얻을 수 없다. 솔직하고 순결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이상에 말한 세 가지 신앙, 즉 무조건 신앙, 이지적 신앙, 영감적 신앙을 종합하여야 비로소 원만하고 완전한 신앙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둘째, 대기적(對己的) 생활, 현대 조선청년은 환경의 지배를 받아 허영적, 인순고식(因循姑息·머뭇거리며 임시 방편적인-편집자)적인 생활을 한다. 진취분투하려는 생각은 없고 사치생활, 향락생활로 흐르고 만다. 이 반면에 반발적으로 감분적(感憤的) 생활을 하려는 자가 있으니 이는 영웅이오, 인걸이라 할 것이다. 금일 도시로 농촌으로 건설개혁할 일이 많은 이때 퇴영적·향락적으로 퇴락한 생활을 한다거나 이목(耳目)의 소호(所好)와 심(心)의 소락(所樂)을 따라 안일하고 에로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오늘날 청년들을 유혹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가정에서 쓰는 레코드만 하더라도 음악, 이야기 같은 것이 모두가 에로틱한 것이다. 일반은 이런 것을 좋아한다. YMCA가 좀 가치 있는 공헌을 하려 한다면 가정 사회를 통하야 유익한 일을 힘써야 하겠다. 일반 청년 남녀를 볼 때 그 머리에 참된 것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부허(浮虛)하고 향락적이며 정욕에 유혹하야 에로틱한 것뿐이라면 이 얼마나 가련한 일이냐. 우리 기독청년의 운동은 극기하여 나를 희생하는 생활을 하야 사회의 좋지 못한 것을 개정하며 의미 있는 일을 하여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처럼 가죽 옷과 메뚜기를 먹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갱생 도중에 있는 독일 청년과 같이 근검 질소(質素·꾸밈이 없고 수수하다-편집자)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듣건대 미국에서는 비율빈(필리핀-편집자) 학생이, 동경(도쿄-편집자)에서는 조선 학생들이 제일 사치하다 하니 이 웬 모순인가. 이목의 소호와 심의 소락을 버리고 귀를 기우려 대중이 “조선기독청년들이 우리를 돕고 붙들어다오” 하는 말을 듣고 모든 유혹을 멀리하고 대원(大願)을 품어 실행 있는 생활을 하여야 하겠다. 세상 청년들은 세상에 흘러가더라도 기독청년은 극기와 희생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원을 가진다면 사불범정(邪不犯正·바르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것이 바른 것을 건드리지 못함. 곧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뜻-편집자)이요, 해보겠다는 것은 반듯이 성공을 얻을 것이다. 구약 역사에 모세를 보더라도 대원이 생김에 부귀영화를 폐리(廢履·버리고 밟고-편집자)와 같이 버리고 나갔다. 예수께서도 큰 원(願)이 있으매 시험을 이기셨다. 우리도 대원을 품으면 모든 것을 이기리라고 믿는다.
 
  셋째, 대인적(對人的) 생활, 이것은 봉사적 생활이다. 오늘 청년들은 할 일이 없어서 방황한다. 나는 생각하기를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으면서 저의 욕망을 먼저 채우려는 것이라고 본다. 예수께서 “너희는 소금이오, 빛”이라 하셨다. 우리는 남에게 빛이 되어야 하겠다. 대체로 보면 도시의 봉급생활을 욕망하고 근본적이며 사업적인 농촌생활을 싫어한다. 지금 농촌에는 지도자가 없어 부르짖는 이때 근본적 사업은 농촌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내 몸과 재산과 재능과 지식을 하나님께 받치고 대중에게 유익을 주겠다는 결심이 없으면 안 될 것이다.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재는 안쓰럽지만은 근본사업은 농촌사업에 있다. 도시에서 궁박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농촌에서 위인(偉人)이 되는 것이 낫지 않는가. 우리 Y.M.C.A에서 어서 속히 이렇다 할 사업을 만들어야 하겠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영감적이며 열정적인 동시에 극기와 봉사의 생활을 하여야 하겠다. 천당도 가야 하겠지만은 이 세상에서 먼저 구원(救援)을 얻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기독주의의 생활로만 살아나가기를 바란다.
 
  ▲출처=《청년》 1935년 9월호, p.11~12
 
 
  조만식씨는 어디로?
 
《조선일보》 1946년 9월 7일 2면에 실린 ‘조만식씨는 어디로?’ 기사.
  과연 시베리아로 납거(拉去)됐을까, 소련이 억하심으로, 더구나 구차히 탈출할 분도 아니다
 
  -조선민주당 김병연(金炳淵)씨 담(談)
 
  평양의 조만식씨를 소련 당국에서 ‘서백리아’(이하 시베리아-편집자)로 데려가지 않았는가 하는 경성 주재 미국 통신사 ‘U·P’ 기자의 기사로 항간에는 억측이 구구한데 이에 대하여 조만식씨와 가장 친분이 두텁고 해방 직후에도 조만식씨 위원장 밑에서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재정부장을 지내다가 금년 초에 소련 당국으로부터 신탁통치 지지결의를 해달라는 요구에 옹할 수 없다고 조만식씨와 같이 사면하고 방금 경성에 와 있는 조선민주당 김병연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만식 선생을 소련 측에서 시베리아로 데려가지 않았는가 하는 미국 통신사 기자의 기사가 보도되었으나 우리는 아직 이러한 정보를 못 받았다. 그 기사 자체가 또 대단히 애매하다. 그 기사에 의하면 조 선생이 평양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소련 당국에게 보호 중에 있든 사정으로 보아서 러시아로 데려가지 않았는가, 또 탈출하지나 않았는가 하는 억측으로 된 기사이다. 우리가 평양에서 지내온 경과와 그 후의 정세로 판단하여 소련 측에서
 
  (조)(선)(생)(을)
 
  시베리아로 데려간다든가 하는 불법 부도덕한 조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조선의 최고지도자의 한 분으로 남북의 3000만이 그 고결한 인격과 덕망에 절대한 존경의 염을 가지고 있는 분임을 소련 점령군 당국자들은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간 경과로 보면 해방 직후 소련군이 진주한 후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또 조선민주당 당수로 소련 당국과 긴밀한 연락 가운데 우리
 
  (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가 작년 연말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면서 소련점령군 당국으로부터 조선민주당으로서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를 표명하여 달라 부탁이 있었을 때 연합국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원조해주겠다 함은 감사하나 신탁통치만은 찬성할 수 없다고 하여 인민위원회 석상에서도 소련 장교 ‘로마넝크’ 소장, ‘네베즙’ 소장 외 4명의 임석 아래 삼상회의 결정 지지를 요청하였을 때 조 선생으로서는
 
  (신)(탁)(통)(치)
 
  를 찬성한다고 우리가 자진하여 결의하는 형식을 취할 수 없다. 신탁통치가 결코 우리의 완전 독립을 원조하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이 아닐 것을 굳게 믿는 나로서는 의장으로서 위원회에 이 문제의 가부를 못는다는(못 정한다는?-편집자) 것은 정치적
 
  (양)(심)(으)(로)
 
  모처허(모른 척?-편집)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소련 장교와 큰 논쟁을 하고 급기야 소련 당국은 그 즉석에서 조 선생의 위원장 사임을 수리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조 선생은 그 자리에서 퇴장하여 그 길로 고려 ‘호텔’에 묵은 이래 월여 전까지 그대로 그 ‘호텔’에 유숙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 선생은 고려 ‘호텔’에서 한걸음도 외출은 하실 뜻도 없으신 것을 알 수 있고 또 외출을
 
  (자)(유)(로)(할)
 
  형편이 아닌 것도 잘 짐작한다. 소련 당국은 다른 곳보다도 그 ‘호텔’에 유숙케 하는 것이 선생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되리라는 견해인 것으로 믿는다. 물론 보호만이 아닐 것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조 선생에 관하는 한 이상과 같은 경과뿐이므로 소련이 무엇 때문에 선생에게 형벌을 주는 것 같은 조처로서 시베리아로 데려 간다고 하는 일을 하여야 할
 
  (하)(등)(근)(거)
 
  도 없거니와 우리의 민족적 신망이 비상히 높은 분인 것을 잘 아는 소련으로서 조선의 민족적 반감을 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고 탈출하지 않았겠느냐, 탈출한다는 등의 꾸찬스러운(귀찮스러운?-편집자) 행동을 할 조 선생이 아니다. 다시 정보를 수집해 보고자 하지만 소련군 당국으로서는 조 선생의 신변에 대해서는 오히려 세심한 주의를 하고 있으리라고 보고 싶다.
 
  ▲출처=《조선일보》 1946년 9월 7일 2면
 
 
  古堂 조만식 선생 가족돕기운동
 
《조선일보》 1970년 3월 26일 7면에 실린 ‘조만식 선생 가족돕기운동’ 기사. 이 기사를 읽은 박정희 대통령이 고당의 아내 전선애 여사에게 금일봉을 보내왔다.
  3월 초에 김성곤(金成坤)씨 등 발의, 박 대통령도 금일봉(金一封) 보내와, 전여사(田女史)는 “그분 뜻 생각해 사양(辞讓)”
 
  조용한 애국지사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가족돕기운동이 최근 정계·종교계 일부 인사들에 의해 남모르게 추진되고 있음이 25일 밝혀졌다.
 
  해방 직후 북한 공산당에 의해 고려(高麗) 호텔에 연금된 이래 아직 정확한 거처는 물론 생사조차 모르는 고당 선생의 부인 전선애(田善愛·65) 여사가 서울의 한구석 셋집에서 넉넉지 못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는 최근의 일이다.
 
  지난 삼일절 51주년 기념식을 전후해서 백낙준(白樂濬) 박사, 한경직(韓景職) 목사, 김성곤(金成坤) 의원, 박재창(朴在昌) 평남지사 등이 어쩌다 자리를 같이 해 얘기가 나온 것이 고당 선생의 부인 전 여사가 마포구 합정동 411번지에 셋방을 얻어 세상을 숨어 살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다 함께 “우리가 이대로야 있을 수 없지 않느냐”면서 우선 아담한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해드리자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막상 전 여사는 이웃은 물론 집주인에게까지 자기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또 이런 소문이 나자 “나는 남부럽지 않게 또 남편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면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허구 많은데 내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사회에나 남편에게 부끄럽다”고 굳이 사양하고 있다.
 
  이런 소문은 즉각 청와대에 보고됐다. 김상복(金相福) 정무수석비서관은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나도 적극 협조하겠다. 이 일이 훌륭히 끝날 때까지 뜻있는 사람은 꾸준히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25일엔 김 비서관을 시켜 전 여사에게 “어려운 살림에 보태 달라”고 금일봉을 전했다.
 
  각계 지도급 인사들에 의해 조용히 추진되던 고당 선생 가족돕기운동은 이를 계기로 어느 정도 표면화해 박기석(朴基錫) 원호처장도 뛰어들어 “그 일은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한다”고 발 벗고 나섰다.
 
  25일 오후 전 여사는 집을 비우고 없었으며 측근에선 전 여사의 고집이 하도 세서 우선 그의 설득부터가 어려울 것 같다고 근심을 하고 있었다.
 
  ▲출처=《조선일보》 1970년 3월 26일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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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연식    (2020-08-13) 찬성 : 1   반대 : 0
저의 심일섭 숙부님게서도 민족지도자로서 존경과 흠모 하셧던 조만식 선생님의 뒤를 따라 조선일보 순창지국장을 하시다가 다시 평양으로 올라가시여 해방직후 저산 평양잉크 공장 사장을 하신 것으로 기억되며 저의 조카들이 현재 평양에서 살고 있고 누나도 한분게신 것으로 부모님게 들어 잘알고 있습니다.저역시 민족지도자 모시고 함게 독립운동 하신 숙부님에게 항상 기억하고 그분의 생사를 얼마동안 모르고 지내시다가 조부모님은 큰 아들을 상면하지 못하고 하늘 나라로 가시 였고 나역시 조부모님 부모님의 큰 아버님에 데한 미련을 벌리지 못하고 평양의 조카.누나들을 죽기 전에 만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저는 또한 한민족의 지도자이신 조만식 선생님을 평생동안 함게 하신 숙부님게 감사하고 고맙다는 생각하면서 우리집안의 가통으로 항상 나라와 민족의 통일된 세상을 마련하기 위하여 함게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20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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