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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사상 크로스 〈13〉

한비자와 애덤 스미스 3

‘작지만 강한 정부’

글 : 임건순  동양철학자·《조선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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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군주는 聖君과 暴君이 아닌 중간 수준의 인물… 시스템이 중요
⊙ “군주가 재주로 법을 왜곡하기를 좋아하고, 법령을 수시로 바꾸고, 명령을 수시로 내리면 나라는 망한다”(한비자)
⊙ “국가를 다스림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처럼 해야 한다”(한비자)
⊙ “백성의 집에서 옳고 그름이 판단되는 나라는 천하에서 왕 노릇 하며, 군주에 의해 옳고 그름이 판단되는 나라는 약해지고 만다”(상앙)
⊙ 공정과 정의 강조하는 질서자유주의와 흡사

임건순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조선일보》 ‘밀레니얼 톡’ 칼럼니스트 / 저서 《한비자, 법과 정치의 필연성에 대해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등
많은 국민은 聖君이 등장해 내 삶을 돌봐주기를 원하는 것 같다. 사진은 2017년 6월 국가치매책임제 관련 간담회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사진=뉴시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은 중상주의(重商主義)에 대한 혹독한 비판 속에서 나온 책이다.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의 간섭, 대상인과 국가 권력 간의 어두운 유착(癒着)에 대해 계속 비판했다. 민간 경제영역은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니 함부로 개입하지 말라던 애덤 스미스, 그가 생각했던 국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국가는 오직 세 가지 의무에 유의해야 하는데, 이 세 가지 의무는 매우 중요하지만 명백히 보통의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파악할 수 있다. 세 가지 의무란 첫째는 사회를 다른 독립사회의 폭력과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의무, 둘째는 사회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의 불의(不義)와 억압으로부터 될 수 있는 한 보호하는 의무, 또는 엄정한 사법(司法)을 확립하는 의무, 셋째는 일정한 공공사업과 공공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의무다.〉 《국부론》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국가의 의무를 요약하자면 외부 침략세력으로부터의 방어다. 국내 치안 유지와 개인 재산 및 자유에 대한 침해의 배제, 공공사업의 추진이라고 한다. 이런 정도가 국가의 역할인데 《국부론》에서는 계속 국가의 개입주의적인 중상주의 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한다. 정부의 인위적(人爲的)인 시장 개입과 통제적인 정책에 대한 비판을 매섭게 가하고 정부 실패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한다. 그리고 자본 축적과 관련해 정부가 지나치게 비생산적이라는 지적을 한다. 국가는 해야 할 것만 제대로 하면 된다. 그리고 민간에 대한 개입은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애덤 스미스의 ‘작은 정부’론이다. 애덤 스미스의 작은 정부론은 자유주의 경제학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비자(韓非子)의 철학, 법가(法家)의 철학은 어떠할까? 국가에 대한 개입을 말할까, 아니면 최소 개입을 말할까? 큰 정부를 주장할까, 작은 정부를 주장할까.
 
  법가 하면 법과 법치이고 강력한 국가 권력의 힘이 연상되니 ‘큰 정부’론을 주장하고 국가의 최대 개입을 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반대로 작은 정부를 주장한다. 최소 개입을 말한다. 법가의 작은 정부론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그들의 성인관(聖人觀), 성인살해(聖人殺害)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聖人을 부정하다
 
  〈도대체 백일 동안 먹지 않고 좋은 쌀과 맛있는 고기를 기다린다면 굶은 자가 살지 못한다. 만약 요순(堯舜) 같은 현자(賢者)를 기다려서 지금 세상의 민(民)을 다스리려 한다면 이는 마치 좋은 쌀과 맛있는 고기를 기다리느라 굶주림을 구하는 설과 같다. 대저 “좋은 말과 단단한 수레라도 노예가 그것을 부리면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만 왕량이 그것을 부리면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고 하였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 월(越)나라 사람 중에 헤엄 잘 치는 자를 기다려서 중국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다면 월나라 사람이 헤엄을 잘 친다고 하더라도 물에 빠진 자를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당장 불이 났으면 근처에 있는 물 항아리 한 동이라도 더 담아 날라 소화(消火)하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먼 데 있는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의 물을 끌어올 생각을 하면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당장 굶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것이라도 먹여야 할 것이다. 한참 후에 있을 동네잔치 운운하지 말고.
 
  어지러운 세상에 성인군주(聖人君主)를 기다리는 것은 이와 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는 다 같이 성인군주를 많이도 들먹였다. 덕이 높은 지도자에게 정부를 맡기자고 했다. 특히 유가는 덕치(德治)를 말하면서 성인군주론을 역설했다.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도덕적이어야 하며, 지금의 군주가 성인이 아니라면 그 군주를 가르쳐 도덕성을 높이고자 했는데 한비자의 생각에 모두 안 될 말이다. 한비자 사상의 백미(白眉) 내지 빛나는 부분은 바로 성인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인을 부정했다. 성인이 등장하길 기대하지 말자고 했다.
 
  한비자가 생각하는 성인을 죽여야 하는 이유, 성인을 기다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세 가지 있다.
 
 
  통치자는 중간치 인물이 된다
 
  첫째, 임금의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때 성군의 자질이 보이더라도 인간의 건강과 수명에는 한계가 있다.
 
  〈순임금의 수명에는 끝이 있고, 세상의 허물은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물리치려니 그치는 것이 적을 수밖에 없다.〉 《한비자》 ‘난일(難一)’편
 
  사람의 총기와 덕성이 늘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성인군주 본인의 지력(智力)과 덕이 우수하다고 해도, 이것은 자식과 타인(他人)에게 대(代)물리고 전수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둘째, 대부분의 군주는 중질(中質) 정도의 인간이다. 성군이 등장할 확률은 희박하다. 폭군도 마찬가지다. 한비자의 생각에 폭군이든 성군이든 극히 드문 사례다.
 
  〈성군 요와 순이나 폭군 걸(桀)과 주(紂)는 천년에 한 번 나는 것이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뒤꿈치를 쫓아 잇달아 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끊임없이 중간치의 인물들이 된다.〉 《한비자》 ‘난세(難勢)’편
 
  그가 보기엔 대부분의 군주는 평균 정도 인간의 지력과 덕성(德性)을 가지고 있다. 한비자는 그것을 ‘중주(中主)’ ‘용주(庸主)’라는 말로 표현했다. 중간치의 임금, 범용(凡庸)한 군주라는 말이다. 현실적으로는 대부분 그런 군주가 다스린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장삼이사(張三李四)가 군주가 되더라도 나라가 휘청거리지 않도록 객관적인 법과 제도가 잘 닦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누가 회사의 장(長)이 되어도 안정적으로 관리가 되는 기업처럼. 중간치 인물이 임금이 되더라도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하려면 임금의 판단보다는 객관적인 법과 제도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 그래서 한비자는 무위(無爲)까지 주장했다.
 
 
  시스템이 중요하다
 
  〈평범한 임금에게 법술(法術)을 지키게 하고 서툰 목수에게 그림쇠와 자를 쓰게 하면, 만의 하나라도 실수가 없을 것이다.〉 《한비자》 ‘용인(用人)’편
 
  평범한 사람의 판단과 주관보다는 객관적 기준과 시스템이 중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법과 제도는 뛰어난 임금에게도 꼭 필요하고 뛰어난 임금의 주관보다도 우선해야 한다.
 
  〈뛰어난 목수는 눈짐작으로도 먹줄처럼 맞출 수 있지만, 반드시 먼저 그림쇠와 자를 법도로 삼으며, 빨리 해도 일을 제대로 하지만, 반드시 선왕(先王)의 법을 선례(先例)로 삼는다.〉 《한비자》 ‘유도(有度)’편
 
  세 번째, 임금의 판단 기준이 주관적·자의적(恣意的)이기 쉽다는 것이다. 임금도 사람이다. 성인도 역시 사람이다. 성인이라고 해서 판단이 주관적이고 자의적일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언제나 공평무사(公平無私)한 마음과 의지를 계속해서 가져갈 수 있을까?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은 알기 어려우니 기뻐하고 성내리라는 것을 알아맞히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므로 표지를 세워 눈으로 보게 하고, 북을 쳐 귀로 듣게 하며, 법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가르친다.〉 《한비자》 ‘용인’편
 
  임금도 마음과 감정이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그런데도 모든 일에서 임금에게 전적으로 판단을 맡긴다면, 한편으로 정부 정책의 투명성을 저해하고 신뢰성 역시 망칠 우려가 높다. 한비자는 그것이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임금은 무위해야 한다. 법과 제도 같은 객관적 기준에 정사(政事)를 맡기고 행정을 행해야 한다.
 
 
  法家의 無爲
 
  법가는 현자를 숭상하는 유가와 묵가의 태도를 못마땅해했다. 군주뿐만이 아니라 관료까지 포함해서 정부 능력에 대해 불신(不信)하는 모습이 많았다.
 
  〈신하는 몸을 해치며 나라를 이롭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한비자》 ‘식사(飾詐)’편
 
  〈대신들은 어리석고 더러운 사람들을 끼고, 위로는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수탈하며, 패거리를 만들어 서로 감싸고 입을 맞추어 임금을 현혹하고 법을 왜곡하여 선비와 백성을 어지럽히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영토를 깎이게 한다.〉 《한비자》 ‘고분(孤憤)’편
 
  한비자는 지난번에 주인-대리인 이야기에서 말한 것처럼, 또는 신하와 관료 계층의 능력과 도덕성을 불신하고 강하게 의심하였다. 사람은 임금과 신하 모두 믿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인치(人治)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법치이고 무위였는데 법가 사상가들은 무위를 말했다. 일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 하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하라는 것이다.
 
  ‘무위’라고 하면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떠오르겠지만, 사실 무위는 도가(道家)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다. 유가도 무위를 말했고 법가도 무위를 말했다. 제자백가 사상가 중에 묵가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쩌면 도가보다도 법가가 무위를 사랑한 게 아닌가 싶다.
 
  법가가 말하는 무위는 무엇일까? 법을 제정할 때와 통치를 할 때 자신의 사적(私的) 의사를 주입하지 않는 것이다. 법가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신도(愼到)는 ‘인순(因順)’이라는 것을 말했다. 인순이라는 것은 억지로 뭘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연, 자연의 이치와 외부 상황에 따르고 순응하고 거기에 몸을 맡긴다는 개념이다. 동물들이 자연에 순응하듯 인간도 법을 만들 때 철저히 외적(外的) 환경에 순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라의 법이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고, 민심에 부합되고 사람들의 정서에도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물을 다스리는 자는 물의 상황과 세력에 따라서 이를 인도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 이치는 구주(九州)와 사해(四海)를 불문하고 모두 같다. 물의 실제 상황에 따라서 치수(治水)를 해야 한다.〉 《신자》 ‘일문(逸文)’편
 
  〈천도(天道)는 순리를 따르면 커지고 인위적으로 바꾸면 작아진다. 순리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의 실정(實情)에 순응하는 것으로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위하지 않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순리를 바꾸어 사람들에게 나를 위하라고 하면 가히 취해 부릴 사람이 없게 된다.〉 《신자》 ‘인순’편
 
 
  군주 마음대로 법을 만들면 안 된다
 
  법은 내 마음대로 특히 군주의 자의적 의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외부적 조건, 시세, 사람들의 평균적인 경향과 성향, 이런 것에 인(因)하고 순(順)해야 한다. 그것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순이다. 법가의 무위는 그 인순을 핵심으로 한다.
 
  한비자도 역시 입법과 통치에서 객관성, 공평무사성을 담보하기 위해 무위를 강조했다. 신도가 말한 인순과 비슷한 맥락이다. 법을 만들 때도 군주의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통치할 때도 군주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객관세계, 인민의 실정, 외부적 환경을 고려해서 최대한 현실에서 타당성을 가질 수 있게 법을 만들어야 하고 통치할 때는 그 법만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임금의 사적 의지로 법을 함부로 만들거나 고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규구(規矩)를 버리고 아무렇게나 어림잡으면 해중(奚仲)도 수레바퀴 하나를 완성할 수 없다. 잣대 없이 길고 짧음을 가린다면 왕이(王爾)도 절반으로 자를 수 없다. 한편 보통 군주로 하여금 법술을 지키게 하고 서투른 공인(工人)으로 하여금 규구나 잣대를 들게 한다면 만에 하나도 실패가 없을 것이다.〉 《한비자》 ‘용인’편
 
  〈정해진 틀 밖으로 끌어내지 않고 틀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하지도 않는다. 또한 법 이상으로 엄하게 다루지 않고 법 이하로 가볍게 다루지도 않는다.〉 《한비자》 ‘대체(大體)’편
 
  무위를 말하면서 군주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계속 경고한 사람들이 법가이다. 그들의 텍스트를 읽다 보면 얼마나 왕권(王權)의 자의적 행사를 경계했는지 알 수 있다. ‘법가들이 전제군주의 탄생을 원했다’ ‘법가는 전제군주를 위한 이론적 시녀(侍女)’라는 그간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느낄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은 철저히 국정이 군주의 사의(私意)가 아니라 법과 공적(公的) 원리로 돌아가기 바랐다. 한비자의 무위 사상은 그가 쓴 《한비자》 ‘해로(解老)’ ‘유로(喩老)’ 편에 잘 드러나 있다.
 
 
  “법령 바꾸면 백성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지게 된다”
 
  통치 과정에서 무위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자의적 판단과 사적 감정이 자주 개입되면 어떻게 될까? 그럴 때 결과를 한비자는 ‘망징(亡徵)’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군주가 재주로 법을 왜곡하기를 좋아하고 사적인 일로 수시로 공사를 잡되게 하고, 법령을 수시로 바꾸고, 명령을 수시로 내리면 나라는 망한다.〉
 
  위정자(爲政者)의 재량권(裁量權)이 남발되면 나라는 망한다. 위정자의 사적 의지에 의해 법이 왜곡되고 그때그 때 위정자의 심기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면 백성들이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고 한다. 특히 상공인과 경제인들이 큰 고통을 겪는다. 경제인들은 국가의 법령과 제도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직결되는데 자주 바뀌고 어떻게 적용될지 계산이 안 서면 제대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 통치에서 무위를 지키지 않으면 경제력·생산력(生産力)에 큰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 사람이 한비자다. 한비자의 무위는 이렇듯 경제와 연관이 된다. 더 나아가 자유주의 경제학과 상통하는 바가 있는데, 한비자를 읽다 보면 정말 애덤 스미스, 밀턴 프리드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국가 간섭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검토했기 때문이다.
 
  〈법령을 바꾸면 백성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지게 된다. 백성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백성들의 일이 달라진다. 백성들의 일이 달라지면 그것을 변황(變荒)이라고 한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데 법을 수시로 바꾸면 백성들이 고생한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는 허정을 귀히 여기고 법 바꾸는 것을 신중히 한다. 그러므로 국가를 다스림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治大國者若烹小鮮).〉 《한비자》 ‘해로’편
 
 
  나라를 다스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한비자와 애덤 스미스는 모두 ‘작은 정부’를 주장했다.
  한비자의 무위는 사실상 ‘작은 정부’론이다. 이런 한비자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바로 ‘치대국자약팽소선(治大國者若烹小鮮)’이다. ‘나라를 다스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본래 노자가 국가를 다스리는 원칙으로 말한 것인데, 한비자가 자신의 사상세계에 편입시켰다. 노자는 자연을 말했다. 그 자체의 유기적인 질서로 돌아가고 절로 이루어지는 조화의 자연을 말하면서 통치는 마땅히 그러한 자연을 닮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그러한 노자의 무위통치 사상을 한비자가 자신의 사상체계에 편입시켰고, 경제를 위한 작은 정부론으로 만든 것이다.
 
  작은 생선을 구울 때 자주 뒤엎거나 젓가락질을 자주 하면 생선이 못 먹게 된다. 그러니 약한 불로 천천히 구우면서 젓가락질을 자제해야 한다. 통치도 마찬가지다. 특히 경제를 생각하면 쓸데없는 개입과 재량권의 행사, 조삼모사(朝三暮四)식의 행정은 자제해야 한다. 민(民)들의 영역과 경제 생태계는 그 자체의 질서가 있고 절로 조화를 찾아갈 수 있다. 마치 대자연과 생태계처럼…. 그런데 국가가 함부로 나서면 민의 세계는 죽고 만다.
 
  이렇게 한비자는 정부 실패를 지속적으로 경고했다. 그 점에서 애덤 스미스와 정확히 일치한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 통치는 집단행동에 속하는 영역이며, 이 집단행동 영역에서의 행정은 소박하고 이상적으로 운용되는 조직 행동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애덤 스미스는 정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나태, 태만, 낭비, 권력남용과 착취, 민간(독과점) 세력과의 결탁과 이권(利權) 챙기기의 속성이 역사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했다. 역사에서 검증되었듯이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정부가 나서고 개입하면 현실에서는 정부 실패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민간에게 맡겨라
 
상앙.
  애덤 스미스와 한비자는 둘 다 ‘작은정부주의자’이다. 또 다른 법가의 간판스타인 상앙(商鞅) 역시 작은 정부론을 역설한다. 민간이 알아서 하자는 것이고 민간영역에 판단을 맡기자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림에는 몇 가지 형태가 있다. 백성의 집에서 옳고 그름이 판단되는 나라는 천하에서 왕 노릇 하며, 관리에 의해 옳고 그름이 판단되는 나라는 강하게 되고, 군주에 의해 옳고 그름이 판단되는 나라는 약해지고 만다.〉 《상군서(商君書)》 ‘설민(說民)’편
 
  옳고 그른 판단은 임금이 하는 것이 아니다. 관리가 해주는 것 역시 아니다. 백성이 한다. 백성이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백성이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한다. 이것을 해도 될지 안 될지, 이 사업을 시작해도 될지 안 될지 일일이 국가의 판단을 물어야 하고 공무원들에게 허가를 맡는 것이 아니다. 민간의 일은 민간에서 민간인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천하에 왕 노릇 하는 나라는 형벌과 상을 민심에서 판단되도록 하며 기물과 용구에 대해서는 백성들의 집에서 판단되도록 한다. 정치가 명확하면 백성들의 판단이 군주와 같아지고 정치가 어두우면 군주와 백성의 의견이 달라진다. 의견이 같아지면 실행이 되고 의견이 다르면 저지되고 말 것이며 실행되면 다스려지지만 저지되면 혼란이 일어난다.〉 《상군서》 ‘설민’편
 
  모든 일에서 국가의 관리·감독이 필요해선 안 된다. 백성들이 자율적인 판단 주체가 되고 그들이 결정해야 한다. 어느 것을 팔지, 어떤 사업을 할지, 사업 자체를 할지 말지, 어떤 일을 벌일지 국가가 결정해야 하나? 특히 생산과 교환의 영역에 반드시 국가가 나서야 할까? 상앙의 생각에는 아니다. 민간에서 알아서 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가 왕 노릇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민간의 힘이 세져야 국가 역시 강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국가 간섭이 덜해야 밖으로 팽창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진다고 본 것이다. 민간에 자유를 주고 민간영역을 믿어야 외부로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제국과 같은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正義의 원칙에 입각한 자유
 
발터 오이켄.
  더 나아가 상앙은 《상군서》 ‘설민’편에서 이런 말도 했다.
 
  〈도가 있는 나라는 임금의 말을 듣지 않고 관리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有道之國 治不聽君民不從官).〉
 
  판단의 주체, 일하는 주체는 민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상앙도 작은정부주의자였고 민간주의자였다. 상앙과 한비자 모두 마찬가지다.
 
  그럼 작은정부주의자인 그들이 말하는 법과 법치는 무엇일까? 독일의 질서자유주의를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자유는 질서에서만 성립한다’는 질서자유주의를 생각하면 된다. 사실 애덤 스미스부터가 질서자유주의자이다. 그가 주장한 자유주의는 공정한 사회질서를 전제로 하는 자유주의다.
 
  한비자는 방종과 ‘한계 없는 자유’를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실 모든 자유주의는 공정한 질서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질서 없는 약육강식(弱肉强食) 상태에서는 자유란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질서자유주의자로는 독일의 경제학자 발터 오이켄이 유명하다. 오이켄만이 아니라 모든 자유주의는 질서자유주의다.
 
  애덤 스미스는 이신론자(理神論者)로서 신(神)의 섭리에 의한 자연조화설을 신봉했다. 그는 이에 근거하여 부당한 간섭과 규제의 철폐를 주장했다. 시장의 우위와 민간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정의(正義)의 원칙에 입각한 자유를 말했다. 모든 사람은 정의의 법을 위반하지 않아야 한다. 자유·평등·정의의 원칙에 따라 개인이 각자 방식대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스미스의 자유는 그렇게 질서에 입각한 자유주의다.
 
  법가 역시 마찬가지다. 스미스처럼 개인과 집단의 무분별한 탐욕과 횡포를 막는 강력한 사회적 장치가 있어야 하고, 그래서 강력한 법을 역설한 것이다. 법가의 법은 그들이 말하는 민간주의, 작은 정부와 부닥치지 않는다. 외려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他人)의 것을 빼앗고, 공정한 경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계약과 약속을 위반하는 일에만 국가가 나서야 한다. 이 경우 국가는 확실히 처리해야 한다. 그들의 법치는 국가가 여기저기 간섭하는 게 아니다. 국가의 간섭영역은 좁아야 한다. 하지만 국가가 관할하는 그 좁은 영역에서 국가가 할 일을 제대로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법가는 ‘작은정부주의자’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국가는 작아도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는, ‘작지만 강한 정부’다. 법치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인 한비자는 작지만 강한 정부를 지향한다.
 
 
  여전히 ‘어진 임금’을 기다리는 한국인들
 
  법가의 무위와 작은 정부를 생각하면서 한국 사회를 반추(反芻)해보면 두 가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이 버리지 못한 ‘어진 임금’에 대한 환상과 진정한 공공(公共)영역의 부재(不在)이다.
 
  법가는 성인군주 따위는 생각지도 말라고 했는데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어진 임금, 성군을 바라는 것 같다. 성군이 등장해서 모든 국민생활에 개입해 내 생활을 돌봐주길 원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 나라 국민들은 시민(市民)인지 백성(百姓)인지 의심스럽다. 한국인들은 언제쯤 백성의 때를 벗고 진정한 시민이 될 수 있을까? 국가는 국가고, 나는 나고, 선택도 책임도 내가 지는 시민, 그러면서 누가 권력을 잡든 건강한 긴장관계를 국가 권력과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진 시민 말이다.
 
  아직도 백성이란 의식이 강하니 임금을 원한다. 그러니 끝없이 정부와 국가 예산, 공공부문의 비중은 늘어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선한 군주, 어진 성군에 대한 환상과 박정희(朴正熙) 정권 때부터 계속돼온 관치(官治)경제의 전통…. 그걸 생각하면 한국에서 작고 효율적인 정부는 참 힘든 일 같다. 앞으로도 공공부문의 편중과 방만은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공공부문이 큰 나라지만 한국 사회에 과연 제대로 된 공공(public)영역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한국 사회를 보면 공공부문 비중은 높은 데 반해 과연 공공성(公共性)이 제대로 관철되고 공공영역이 명확히 존재해서 살아 있는 국가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정부 간섭과 개입이 많고 많은 사람에게 공공성을 강제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공공성이 증발되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교육과 의료에서 그런 면이 강하게 보인다.
 
 
  왜 모든 교사·의사에게 公共性 강요하나
 
  교육·의료계에서 업계 종사자 모두가 공공성의 담지자(擔持者)가 되어야 할까? 그렇게 강요해서 과연 업계 종사자와 국민이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일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사립대에 가는 많은 국가지원금을 폐지하고 그 돈을 국립대로 돌린다. 대신 사립대에 운영과 선발권에서 완전한 자유를 준다. 그리고 의료 수가(酬價) 자율화와 영리(營利) 병원을 허용한다. 공공병원과 보건소의 인프라를 확충한다.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공공성을 강제하지 않고 공공의 영역을 만들자는 것이다.
 
  모든 교육의 주체들에게 모든 의사와 병원들에 왜 공공성을 강제하는지 모르겠다. 관리·감독하는 교육부나 보건복지부와 공무원들이야 갑질할 권한이 유지되고 조직의 덩치와 예산이 늘어날 수 있기에 신이 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교육을 살리고 의료를 살리는 길인가? 똑똑하지만 가난한 학생에게 양질(良質)의 교육을 제공하게 하고, 빈민(貧民)에게 확실한 의료혜택을 보게 하는가? 외려 약자(弱者)와 서민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는가? 진정으로 국가가 챙겨야 할 사람을 돌보지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닐까?
 
  ‘작은 정부’와 ‘큰 정부’ 이야기가 나오면 늘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한국은 너무 지나치게 공공부문이 방만하다. 너무 큰 정부이다.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진정한 공공의 영역이 너무 협소하다. 국가의 힘이 약하다는 것이다.
 
  차라리 작은 정부를 내세우고 민간에게 이양할 것은 이양해야 우리가 확실한 공공의 영역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사립대에 가는 국가지원금을 국립대로 돌려 가난하지만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생계비까지 지원해주고 그들이 졸업 후 사립 명문대 나온 학생들과 선의(善意)의 경쟁을 벌일 수 있도록 성장시켜주는 것이 진짜 제대로 된 공공성의 관철이고 건강한 공공의 영역이 아닐까?
 
 
  크지만 허약한 ‘公共부문’
 
  법가와 자유주의 경제학의 작은 정부론을 떠올리면 방만한 정부의 우리 현실이 떠오른다. 정부는 크지만 실질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힘이 필요한 영역에서 얼마나 정부의 힘이 제대로 작용하는지 의아(疑訝)할 때가 많다. 이러한 큰 정부의 역설, 공공부문의 방만함 때문에 일어나는 공공성의 부재는 우리가 분명 고민해볼 주제다.
 
  애덤 스미스와 한비자가 한국 사회에 오면 무슨 말을 할까? 약하다고 말할 것 같다. 없다고 말할 것 같다. 공공부문이 방만하니 국가가 약하고 확실히 국가의 힘을 드러내야 하는 부분에서 국가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들의 ‘작은 정부’론 이야기를 보면서 한국 사회의 진정한 공공성과 공공의 영역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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