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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家를 찾아서

동요 ‘우리나라 꽃’의 작곡가 함이영

어딘지 외롭도록 선해 보였던 무궁화 작곡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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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美 군정청의 《초등 노래책》에 ‘우리나라 꽃’ 실려
⊙ ‘우리나라 꽃’ 外 남은 작품은 부산여고 교가, 숙명여고 응원가, 가곡 ‘옛날’
⊙ 아내 최구자 사이에 1남 6녀… 딸 넷, 외손녀가 클래식 음악가로 성장
⊙ “‘우리나라 꽃’이 영원히 국민이 즐겨 부르는 동요로 남기를…”(아들 함승우)
동요 ‘우리나라 꽃’을 작곡한 함이영.
  부르면 저절로 외워지는 동요. 감동과 재미에다 리듬감까지 넘치는 동요는 나라 잃은 20세기 한국인에게 큰 선물이었다. 해방 직후 처음 나온 동요는 박태준 작곡, 윤석중 작사의 ‘새나라 어린이’(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였다. 또 ‘봉선화 동요회’의 안병원은 ‘우리의 소원’(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작곡했고, 권길상은 ‘과꽃’(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을 작곡했다.
 
  1946년 8월 미 군정청은 《초등 노래책》을 새로 엮었는데 최초의 국정 음악 교과서였다. 많은 음악가가 동요 작곡에 참여했는데 함이영의 ‘우리나라 꽃’, 김메리의 ‘학교 종’, 손대업의 ‘얼룩 송아지’ 등이 새 교과서에 실려 널리 불렸다. 그중 ‘우리나라 꽃’의 가사는 이렇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꽃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
 
  -함이영 작곡, 박종오 작사 ‘우리나라 꽃’

 
  한국 동요 역사에 함이영(咸二榮·1915~1957)이란 인물이 있다. 단순하지만 대한민국 국화(國花)를 상징하는 노래 중 이 곡만큼 강렬하고 명료한 노래가 또 있을까. 교과서에 실려 저학년 어린이들이 반드시 불러야만 했던 노래였다. 작곡 시점이 해방 직후였음을 떠올리면 더 간절하게 와닿는다.
 
  함이영은 많은 곡을 만들었지만 ‘우리나라 꽃’을 제외하고는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히 동심을 노래하거나 그리움, 이별을 주제로 한 가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흔적이 지워졌다. 동시대를 살았던 작곡가들이 모두 사망해 흔적을 찾기 어렵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충남 천안 공원묘지에 있는 함이영·최구자 묘를 자녀들이 찾았다. 왼쪽부터 첫째 함천혜, 여섯째 함복순, 일곱째 함승우, 셋째 함영혜, 넷째 함혜경씨다.
  함이영은 부산 출신이다. 후손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선친이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고학했다. 작곡가 홍난파(洪蘭坡·1898~1941)가 다녔던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와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함이영은 해방 전에는 공립학교인 원산사범의, 해방 후에는 창덕여고의 음악교사로 재직했다. 6·25를 겪고서는 피란지 부산에서 부산여고 교사로 재직했다. 환도 후에는 사립인 숙명여고에 재직했다.
 
  부산여고 재직 시 교가를, 숙명여고 재직 시 응원가를 작곡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다른 흔적은 시인 김구용(金丘庸·1922~2001) 선생이 쓴 수필 〈돈가스와 가을과 바이올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구용은 6·25전쟁의 상처와 암담한 현실을 불교적 세계관에 근거해 시로 쓴 시인이다.
 
 
  김구용이 쓴 수필 속 ‘외롭도록 선한 얼굴’
 
  함이영이 사망한 1957년 무렵, 김구용은 서울 숙명여고 강사로 출강하며 음악교사 함이영을 알게 되었다. 수필 전문을 인용한다.
 
  〈…방학도 끝났으나 나는 시간 강사였으므로 아직 S여고에 나가지 않았던 만큼 어느 날 오후 다방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 신문에서 나는 S여고 이름으로 검은 선 내에 들어 있는 함이영 선생의 부고를 보았다.
 
  어느 분일까? S여고에 나간 지 불과 몇 개월 안 되지만 그뿐만 아니라 항상 모든 일에 등한한 내 자신에 대하여 어떤 반성 같은 것을 느끼었다. 나로서는 필시 알 만한 분일 텐데 세상을 떠나신 분의 성명을 보고도 모르니 자못 죄송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늦게야 S여고에 근무하는 시인 K씨가 다방에 나왔기에 “돌아가셨다는 함 선생님이 누구시지요?” 하고 물었다. “그 작곡하시는 음악선생님을 모르십니까?” 이 대답은 나에게 있어 너무나 의외였다. 이리하여 바로 방학 전의 지난 일이 일시에 회상되었다.
 
  내가 지난봄 S여고에 나가게 된 지 얼마 후 그분이 작곡가란 것을 들어 알았고, 쉽사리 친해졌던 만큼 새삼스레 성명을 묻기도 실례일 것 같아 그 후 그냥 ‘선생님’으로 부르며 지내왔던 것이다. 그날 나는 내 수업시간을 마치자 직원실에서 쉬고 있었다.
 
  저편에서 함 선생은 조그만 외국제 약병을 앞에 놓고 영어과 선생님이 새겨주는 주의서(注意書)를 신중히 듣고 있었다. 어딘지 외롭도록 선해 보이고 살집도 좋으신 분이 무슨 약을 잡수시나 하고 나는 가볍게 생각하였다. 그 후 어느 날 나는 나가서 점심식사를 하러 현관으로 갔더니 함 선생이 신을 신는 중이었다.
 
  “점심 잡수러 가십니까?”
 
  “네.”
 
  함 선생은 “싸고 맛있고 많이 주는 음식점을 소개해드릴 테니 같이 갑시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이 말에 구미를 느꼈으나 현금을 넉넉히 갖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내일 가겠다”고 대답하였다. 함 선생은 “그런 걱정 말라”며 나를 데리고 중앙청이 바라보이는 큰길을 횡단하여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과연 2백 환짜리 돈가스가 번화가의 3백50환짜리 못지않게 훌륭하였다. 그것은 내게 있어 콜럼버스의 미주 대륙 발견과 비길 만한 일이었다. 그날 함 선생은 식사를 하며 “김 선생의 시는 딱딱해서 작곡하기 어렵겠더군요, 적당한 것 있거든 한번 보여주십시오.”
 
  “부끄럽습니다. 생각뿐이지 어디 시가 되어줍니까.”
 
  하고 송구스러이 대답하였다. 그 이튿날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 음식점에 가서 함 선생께 점심 대접을 하고 같이 다방에 들리었다.
 
  “건강해 뵈시는데 언젠가 가지고 계시던 약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혈압이 높습니다. 그래 술도 끊고 홍차를 마신답니다.”
 
  함 선생은 이렇게 대답하며
 
  “김 선생도 결혼하셔야지요.”
 
  하며 도리어 나를 걱정해주었다.
 
  이제 생각하니 그것이 함 선생과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 방학 동안 산속에 가서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 나는 장차 일주일에 몇 번씩 함 선생과 그 음식점에서 식사할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한 달 만에 만나게 되니 이번은 내가 점심 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 만나기도 전에 함 선생의 부고를 신문에서 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S여고에 나간 어느 날 나는 세상을 떠난 함 선생을 생각하며 점심시간에 시인 K씨와 함께 그 음식점으로 갔다. 우리는 그 맛나고 많고 값싼 2백 환짜리 돈가스를 먹으며 고인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함 선생의 장례에 갔었다는 K씨가 나에게 이런 이야길 들려주었다.
 
  “함 선생은 딸 여섯에 아들이 하납니다. 부인의 말씀에 의하면 그날 이발하고 피아노 배우러 온 학생을 지도까지 하였는데 갑자기 혈압 관계로 세상을 떠나셨다더군요. 큰딸이 지금 우리 학교에 다니는데 우등생입니다. 영결식 때 그 딸이 떠나는 아버지의 관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습니다.”
 
  음식점에서 나오니 하늘은 더욱 높고 푸르렀다. 북악(北岳)이 새삼 가까워 보이었다.
 
  “가을이구나. 추석도 몇 날 안 남았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난한 이 나라에서 예술을 하다가 일생을 마친 작곡가 함이영 선생을 생각하였다.
 
  ‘좀 더 세월이 흐른 후 언제고 조용히 함 선생의 딸에게 간청하여 그 아버지가 남기신 곡을 바이올린으로 들어보기로 하자. 아니 먼먼 훗날 즉 함 선생의 딸이 울지 않고 바이올린으로 아버지의 곡을 연주할 수 있을 만큼 행복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좋을 것이다.’ 하고 다시 생각하였다.…〉
 
  이 수필 속에서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함이영은 술 때문인지 혈압 쪽에 문제가 생겨 당시 술을 끊고 ‘외국 약’을 먹고 있었다.
 
  슬하에 7남매를 두었다. 딸 6, 아들 1이며 아들이 막내다. 우등생인 맏딸은 아버지가 재직하던 학교(숙명여중고)를 다녔고, 아버지 영결식 때 관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 사실이다.
 
  기자는 망우역사문화공원 조성 자문위원인 정종배씨를 통해 함이영이 한때 망우리에 묻혔고, 이장은 했지만 묘비는 여전히 망우리에 있음을 확인했다. 정종배씨는 함이영의 맏딸 천혜씨의 연락처와 함이영의 묘비 사진을 기자에게 전해주었다.
 
 
  “잃어진 그 옛날이 하도 그리워서…”(가곡 ‘옛날’)
 
함이영의 맏딸 천혜씨. 그는 38년간 KBS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다.
  김구용은 함이영의 인상을 ‘외롭도록 선해 보이고 살집도 좋으신 분’으로 묘사했는데, 기자와 만난 천혜(咸千惠·75)씨는 선해 보였지만 살집은 전혀 없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지난 5월 30일 서울 남산에서 만났다.
 
  함천혜씨는 서울대 음대를 나와 KBS 오케스트라에서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다 2004년 정년 퇴임했다. 1966년부터 시작해 38년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음악가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천혜씨는 처음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했지만, 실타래처럼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만, 선친의 유품이 거의 없다고 했다. 함이영이 쓴 악보도, 그가 즐겨 치던 피아노도 사라졌다고 한다. 함이영이 얼마나 동시와 동요를 사랑했는지 증언 외에 달리 확인할 길이 없었다. 세월의 무게에 휩쓸려버리고 만 것이다. 천혜씨의 말이다.
 
  “숙명여중 2학년 때인 1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쇼크가 너무 커 우울한 사춘기를 보내야 했어요. 아버지는 맏딸인 저를 유난히 예뻐하셨고 어디든 데리고 다니셨죠. 당신이 별안간 돌아가시자 더는 떠올리기 싫었고 잊어버리고 싶었어요.
 
  돌아가신 그날은 일요일이었어요. 아침에 아이들을 데리고 산보를 갔다가 돌아오니 숙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오셨는데 점심을 드시고 한참 대화를 나누시다 돌아가셨어요.”
 
생전 아버지 함이영의 손을 잡고 있는 어린시절 천혜(오른쪽)와 순혜.
  ― 그때 부모님 연세가 어떻게 되었나요.
 
  “아버지가 마흔셋, 어머니가 서른아홉이셨어요.
 
  ‘아야’ 하는 한마디를 남기고 혼절하셨는데 제가 놀라 동생이랑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의사 선생님이 왕진을 왔지만 이미 정신을 못 차리셨으니까…. 뇌일혈이 그렇게 무섭더라고요. 제가 아버지 머리를 계속 안고 있었어요.
 
  이후로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어요. 세월이 흘러 이제야 이야기할 수 있네요.”
 
  사진 몇 장이 고작인 아버지 흔적에 대해 그녀도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어머니가 계실 때만 해도 피아노 방에 (아버지의) 악보 뭉치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1993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함께 태워버리고 말았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늦게까지 작곡하시던 모습이 생각나거든요. 동생들이 떠드니까 ‘작곡 중이니 조용히 하라’는 말씀도 하셨으니 다른 작품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흔적이 없어요.”
 
  ― 동요 ‘우리나라 꽃’과 부산여고 교가, 숙명여고 응원가 외에 어떤 곡이 남아 있나요.
 
  “학창시절, 국민음악연구회에서 만든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옛날’이란 가곡이 있는데, 아버지 작품이었어요. 일반적으로 많이 불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멜로디는 기억에 남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어요.”
 
  첫 소절이 궁금하다고 하자, “잃어진 그 옛날이 하도 그리워서…”라고 부르더니 “더는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천혜씨는 이런 말도 했다.
 
  “옛 KBS방송국이 있던 남산 자락의 적산가옥이 우리 집이었어요. 6·25가 터지고 인민군이 찾아와서 집에 있던 악기들을 가져갔죠.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는데 빼앗겼어요. 십대로 보이는 조그만 애 녀석이 구둣발로 들어와 집 안 곳곳에 빨간딱지를 붙였어요. 당시 숭의여전 자리에 인민군 군악대가 자리했는데 그곳으로 옮겨졌죠. 집에 있던 첼로도 그날 이후로 볼 수 없었어요.
 
  반동분자로 인민군에게 추궁당하지 않으려고 아버지는 당신이 작곡한 악보들을 불살라야 했는데 아마도 ‘우리나라 꽃’과 같은 작품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아버지도 의용군에 차출되어 남산초등학교로 끌려가셨는데 밤에 담을 넘어 도망쳐서 집 지하실에 숨어계셨어요. 피란은 1·4후퇴 때 부산으로 갔었죠.”
 
 
  홀로 남은 아내 최구자 이야기
 
함이영의 아내 최구자.
  함이영의 아내 최구자(崔久子· 1918~1993)씨는 경기여고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고 한다. 미동초등, 봉래초등 교사를 하다 스물여섯 살 때 함이영을 만나 결혼하면서 교사직을 그만뒀다. 당시로선 늦은 결혼이었다고 한다. 천혜씨의 말이다.
 
  “당시 한국 남자들은 축첩을 하거나 가부장적이어서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을 생각이셨지만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게 됐다고 해요. 늘 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하고 자녀들에게 자상하셨죠. 아내를 사랑하셨어요.
 
  피란시절, 휴일이면 아이들을 다 데리고 어딘가로 놀러가셨는데 올망졸망한 딸 여섯을 부끄럽지도 않은지 손을 잡고서 부산 일대를 돌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토요일엔 엄마랑 두 분이서 데이트를 하셨어요. 할 수 없이 여섯 동생을 제가 책임져야 했어요. 동생 중 하나가 울면 나머지 동생들이 따라 울어 쩔쩔맸던 기억이 납니다.”
 
  이 말을 할 때 천혜씨의 얼굴이 무척 밝아졌다.
 
  함이영 사후에 아내 최구자는 서울 서촌(西村)인 누하동, 누상동, 효자동 일대에서 피아노 레슨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았으나 초등교사 출신인데다 남편의 어깨너머로 피아노를 배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맏딸 천혜씨의 말이다.
 
  “종로구 서촌 일대에서 ‘꼬마’들을 가르치는 피아노 선생으로 유명하셨어요. 집에 가면 늘 아이들이 바글바글해서 마치 유치원 같았죠. 사춘기 때는 그런 집에 들어가기 싫었어요. 엄마는 애들을 좋아하셨고, 잘 다루어서 동네에 입소문이 났었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혼자 자식 일곱을 모두 대학 보내고 결혼을 시켰으니까요. 열심히 사셨지만 요만큼도 힘든 티를 안 내셨죠. 아이들이 우울해할까 늘 웃으셨어요. 누하동에 살 때 광화문이 지척이었지만 광화문 나들이 한번 못 갈 정도로 삶에, 일에 매달리셨죠. 저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렙타 과부’가 생각납니다.”
 
  구약 열왕기 상권 17장에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가 나온다. 예언자 엘리야가 과부에게 물과 빵 한 조각을 청하자 과부는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다.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과부는 마지막 끼니를 엘리야를 위해 기꺼이 내어놓는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그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성경은 전한다.
 
  천혜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엄마도 사렙타 마을의 과부처럼 돈이 없으면 어느 날 갑자기 누가 레슨비를 가져와서 살고… 그러셨대요.”
 
 
  1남 6녀 자녀들은 저마다 음악가로 성장
 
자녀들을 클래식 음악인으로 키운 함이영의 아내 최구자(가운데). 딸, 아들, 사위,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함이영·최구자는 슬하에 1남 6녀의 자녀를 두었다. 훗날 딸 여섯 중 넷이 음대에 진학했을 정도로 예술가 가정을 이뤘다.
 
  첫째 천혜씨는 서울대 음대를 나와 38년간 KBS 교향악단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다. “다시 태어나도 오케스트라 플레이어가 되고 싶다”고 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뒀는데 예술 분야가 아닌 마케팅과 경영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글로벌 식품회사의 한국 대표와 국내 중견기업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음악에 소질이 있었지만 “엄마가 너무 바빠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둘째 순혜(咸順惠·73)씨는 홍익대 미대를 나와 옛 동양방송(TBC) 미술부에서 일하다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슬하에 1남 1녀를 뒀는데 예술 전공자는 아니라고 한다.
 
  셋째 영혜(咸英惠·72)씨는 한양대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어머니가 그랬듯 어린이를 위한 바이올린 교육에 헌신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딸은 한양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딸의 남편은 국민대 음대 이승묵 교수. 이 교수는 2002년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와 베르디 레퀴엠으로 유럽무대에 데뷔하였고, 스위스 제네바 등지에서 ‘베르디 레퀴엠 스페셜리스트’로 활약하다 귀국했다.
 
1985년 서울 정릉으로 나들이를 간 모습. 왼쪽부터 함복순, 함순자, 함천혜, 어머니 최구자, 함영혜씨.
  넷째 혜경(咸惠卿·70)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학창시절 동아콩쿠르에서 입상했고 명동성당 오르간 주자로 활동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캐나다에 정착, 몬트리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뱅쌍트 음악원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뒀는데 딸은 피아노를 전공하다 방향을 선회해 ‘911 긴급구조’ 상담사가 되었고 아들 역시 몬트리올에서 심리상담가로 활동 중이다.
 
  다섯째 순자(咸洵子·68)씨는 성신여대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했고 홀트아동복지회에서 근무하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슬하에 아들 둘을 뒀는데 첫째는 미술, 둘째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여섯째 복순(咸福順·66)씨는 서울대 음대와 동 대학원을 나왔다. 피아노 전공. 총신대 강사와 덕원예고, 선화예고 교사로 재직했다. 그의 딸이 바이올리니스트 최유진이다. 최유진은 서울예고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에서 석사를, 보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일보》 콩쿠르 1위, 서울 청소년 실내악 콩쿠르 1위, 서울대 음악 콩쿠르 현악 부문 입상 등 각종 경연에서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2010년 음악저널 ‘올해의 신인상’ 및 ‘강혜선 음악상’(현대음악 해석상)을 수상했으며 활발하게 연주 활동 중이다.
 
  일곱째 승우(咸昇佑· 64)씨는 홍익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이민을 떠나 캐나다에서 15년간 사업을 하다가 귀국했다. 지금은 교회 관련 예술도서를 출간하고 있고 원곡문화재단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슬하에 1남 1녀를 뒀는데 예술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한다.
 
 
  함이영의 아버지가 원산에서 바이올린 독주회
 
함이영의 아들 승우씨.
  아들 승우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아버지가 작곡한 ‘우리나라 꽃’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되었지만 아버지 기억은 머릿속에 전혀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두 돌도 되기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동요 중에 즐겨 부르던 노래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꽃’을 대부분의 국민이 알고 있어요. 유년시절, 무궁화꽃이 우리나라 국화여서인지 무궁화가 곳곳에 흔히 보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어릴 적 무궁화꽃을 보면서 이 노래를 흥얼댔지만 작곡자가 다름 아닌 아버지라는 생각이 새삼 들기 시작한 것은 제가 다 커서입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가끔 들려주셨던 아버지의 얘기가 저에게는 아버지 존재의 전부예요. 어머니 얘기로는 제 조부가 함경도 원산에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여셨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버지 역시 그 영향으로 음악을 전공하셨고 작곡가가 되신 것 같아요.”
 
  승우씨는 “마흔셋 나이에 아내와 자식 일곱을 두고 세상을 뜨실 때 어머니의 상심이 얼마나 크셨을까”라고 반문하며 “서른아홉에 홀로 되신 어머니는 7남매를 혼자 키우시기 위해 평생을 피아노 교습으로 생계를 꾸리시며 어렵게 우리를 키우셨다”고 했다.
 
  ― 집안에 음악 소리가 끊이질 않았겠어요.
 
  “온종일 음악소리와 함께였어요. 새벽 4시부터 피아노 전공하는 누나들 피아노 소리와 바이올린 소리를 들어야 했죠. 누나들이 학교에 가면 어머니의 피아노 레슨 소리가 늦은 밤까지 이어졌어요.
 
  초등학교 때까지 저도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어요. 종일 들어야 했던 피아노, 바이올린 소리에 저절로 음감이 생겨 한번 곡을 들으면 악보를 안 보고 피아노를 치곤 했죠. 그러다 어머니한테 혼이 나곤 했어요.”
 
마흔셋에 요절한 작곡가 함이영은 서울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음악인 함이영지묘’라고 적혀 있다. 훗날 천안 공원묘지로 이장했으나 묘비는 아직 망우리에 있다.
  승우씨는 그러나 음악을 전공하진 않았다.
 
  “어머니는 생전 아버지가 곡을 쓰느라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담배를 많이 피우던 기억을 떠올리시며 ‘아버지가 많이 힘들어 보이셨다’고 하셨어요. 제가 음악을 평생 업으로 삼는 게 좋을지 고민하시다 피아노를 그만두게 하셨죠.”
 
  ― 아버지의 작품이 많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생전 여러 곡을 작곡하셨지만 원산에서 부산, 서울로 옮겨다니시며 분실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홀로 고생하시며 일곱 자식을 키우시느라 아버지 유품이나 유작 거둘 생각을 할 겨를이 있으셨을까 생각하면 자식으로 천만 번 이해를 합니다.”
 
  승우씨는 결혼해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살다가 돌아왔다. “늘 어머니의 고생이 마음에 쓰였고 살기 바빠 효도를 못한 것도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최근 누님들과 천안공원묘지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크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희망이 있다면 아버지의 알려진 유일한 작품인 ‘우리나라 꽃’이 영원히 국민이 사랑하고 즐겨 부르는 동요로 남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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