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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수묵화가 김호석

작품 위해서라면 지극한 고흐의 고통마저도…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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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미술대전에서 〈아파트〉로 장려상 받은(1979) 이래 인물화, 역사화, 가족화 그려
⊙ 학창시절, 달동네 연탄과 쌀 배달, 이장 무덤의 해골을 파내며 세상을 배워
⊙ “大同 세상을 꿈꾸는 게 선비의 길. 그 同樂의 세계가 바로 그림”
⊙ “어디 한두 번 실패한 것도 아닌데 또 그려? 끝까지 하기로 했으면 바닥을 봐야지…”

김호석
1957년생, 홍익대 동양화과·同 대학원 졸업. 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 / 중앙미술대전 장려상과 특선, 한국미술대상전 장려상, 제3회 광주비엔날레 한국대표작가로 선정(미술기자상 수상) / 뉴욕 퀸즈 미술관, 아시아 소사이어티, 인도 역사박물관 등에서 개최한 300여 차례의 단체전 및 기획 초대전에 참가
  《수녀님, 서툰 그림 읽기》를 읽게 되었다. 봉쇄수도원에 사는 원장수녀(장 요세파)가 쓴 그림 감상문이었다. 글솜씨에 고개가 숙어졌다. 그런데 세상 밖 수도자를 세상 안으로 끌어낸 김호석(金鎬·62) 화백이 궁금했다.
 
  그가 누군지 배경취재를 하니 상상 이상으로 아주 유명한 화가였다.
 
  김 화백 그림에 반했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어떤 작가는 “작품을 완상하고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을 직접 만나 초상화를 그렸고, 인도 모디 총리가 그의 그림에 반해 초상화를 의뢰했을 정도였다. 이쯤 되면 굳이 ‘잘난’ 그를 만나 낙수(落穗) 같은 인터뷰를 해서 뭣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꾸 그림이 말을 걸어왔다. 자력(磁力)처럼 눈이 그림을 쫓았다. 수묵의 붓끝을, 여백을, 세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을 쫓았다.
 
  제기랄! 할 수 없이 《수녀님, 서툰 그림 읽기》를 펴낸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도서출판 선’의 김윤태 사장이 말하길 “김 화백은 내 친구”라고 했다. 그러더니 “좀 별난 친구”라고 했다. 어떻게 별난지 궁금했다.
 
인도 모디 총리의 초상화. 126X105cm, 수묵화.
  우리는 6월 5일 서울 인사동 김 사장의 개인 오피스텔에서 만났다.
 
  오늘날 지상의 모든 예술에서 드러나는 심각한 현상 중 하나는 인간이, 자연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과 사람 대신 도시와 문명이 자리를 대신했다. 춥고 배고프고 무섭고 전율하는 욕구들만 쥐어짜듯 세상을 위협할 뿐이다. 반면 김호석의 그림은 초저녁 노을 같다. 시골 꼬부랑 할머니나 모락모락 떡시루처럼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시위 군중을 그린 〈민중운동사 4·19〉(1992), 〈고부에서 서울까지〉(1994) 같은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그는 운동권 화가, 참여예술가도 아니다.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와 상관없이 현실을 응시하는 사실주의 화가다. 자기 시대의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 시대정신을 가진 작가다.
 
  김 화백에게 명함을 건네자 그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명함이 없어 못 드립니다. 한 번도 명함을 가진 적이 없어서….”
 
  ― 그렇습니까….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을 하려다가 이내 방향을 틀어서 “외국에 갈 때는 한지를 잘라 직접 (이름을) 써 준 경우는 있다”고 했다.
 
  “(웃으며) 배짱 편하게 살아요. 남 의식 안 하고 내가 옳다고 느끼는 것에 꿋꿋이 갑니다. 가다 보면 억지인 것도 같아. 그래도 끝까지 가보자… 이런 생각도 해요.
 
  특히 그림에서 그래요. 어디 한두 번 실패한 것도 아닌데 또 그려? 에이그… 끝까지 하기로 했으면 바닥을 봐야지… 하는 이런 경우도 있어요.”
 
 
  “그게 너 한계”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박
 
엄마에게 안긴 아기가 김호석이다. 아버지 김화기는 공무원이었다.
  ― 실패한 그림도 더러 있습니까.
 
  “많이 있어요.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다고 할까요?
 
  내 그림이 절박하고 절실한 만큼 남에게도 이 그림이 절박하고 절실하게 다가올까, 나에게 느꼈던 사적인 감정을 공공성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 부분이 답이 없으면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려도 실패라 여깁니다. 그럼, 그 그림을 그냥 묵혀놔요. 5년이나 10년이 지난 후에 다시 꺼내 봐요. 당시 실패라고 느꼈는데 세월이 흘러 되살아난 그림이 있어요. 내가 부족해서 자신을 모르는 경우가 가끔 있다는 것을 보면 스스로 과신하거나 오만한 경우도 있겠구나 생각해요.”
 
  김 화백은 전북 정읍이 고향이다. 홍익대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한국 암각화의 도상과 조형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시절 중앙미술대전에서 〈아파트〉로 장려상을 받은(1979) 이래 역사화, 농촌풍경화, 인물화, 가족화, 군중화, 동물화 등의 작품을 그렸다.
 
1979년 홍익대 3학년 때 중앙미술대전에서 〈아파트〉로 장려상(2등상)을 수상하며 화단에 데뷔했다. 작품 〈아파트〉 앞에서 아버지, 셋째 동생과 함께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오늘의 작가-김호석전’, 고려대 박물관 김호석 초대전 ‘틈’을 비롯해 수십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 퀸즈 미술관, 아시아 소사이어티, 인도 역사박물관 등에서 개최한 초대전에 참여했다.
 
  “그림 그리는 목적은 지금보다 나은 사회, 지금보다 좀 더 껴안을 수 있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 그리고 가능하면 인간 본성이 긍정으로 갈 수 있는 게 무엇일까에 초점이 있어요.”
 
  그러더니 이내 자기 검열을 늘어놨다.
 
  “사람들은 ‘그게 너 한계’라고 말해요. 지독한 어려움과 극빈 체험도 없는 사람이 왜 없는 자를 위한 그림을 그리느냐는 겁니다. 극빈 체험이 있었다고 항변해도 ‘있는 자의 편에 선 극빈 체험일 뿐이지, 태생적 종자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 지나친 말이네요.
 
  “더 거북한 이야기도 들어요. ‘첫째, 너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다. 둘째, 너는 조선시대 이후 쭉 내려온 사대부 후손이다. 셋째, 너는 명문인 전주고, 홍익대 출신이다….’
 
  저를 모르고 하는 얘깁니다. 학벌, 집안, 태생… 이런 것을 바닥까지 다 내려놓았어요. 그것보다 현재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쓰임이냐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대학시절 실기작업 모습이다.
  ― 어떤 쓰임이 되고 싶나요.
 
  “뭐라도 얻어서 남에게 베풀고 싶고 사회에 필요하며, 함께하면 힘이 생기고 웃을 수 있는, 슬픔을 같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그림을 통해서 말이죠.
 
  때론 사회가 암울할 때 가장 암울한 이야기로 사회를 질타하고, 사회가 어두우면 더 밝은 그림을 그려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꾸며보고 싶어요.
 
  구제금융(IMF) 시절, ‘함께 가는 길’이란 제목으로 전시회를 연 적이 있어요. 그림이 한 점도 안 팔려도 되니 내일이 있고 가정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보자는 심정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그 전시회 때 그림이 가장 많이 팔렸어요. 화랑 이야기가 관람객이 너무 많아 전시장 바닥이 금이 갈 정도였다는 거예요.”
 
  김 화백은 당시 가족화를 많이 그렸다. 표정과 손동작, 얼굴 주름, 눈동자 등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작품이지만 얼핏 보면 그 계산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런 가족생활의 한 장면이었다. 〈느낌〉(1997), 〈수박씨를 뱉고 싶은 날〉(1997), 〈밑둥 잘린 삶〉(1999) 등을 그렸다.
 
  ― 귀지 파는 연작(連作)이 생각나요.
 
  “맞아요. 그 무렵 그런 그림을 많이 그렸고, 그 그림들이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렸어요.”
 
 
  풀빵과 비니루
 
수묵화 〈쥐꼬리〉(오른쪽)와 〈서(鼠)1〉.
  ― 일상의 사소함에 주목한 그림이 많아요.
 
  “평론가들이 그 점은 안 쓰던데 의미가 없는 것은 존재가치가 없나요?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이 필요 없나요? 아니에요. 소중해요.
 
  집 앞에서 풀빵을 사서 검은 비니루(비닐)에 담아 집에 갔더니 풀빵이 식어버렸어요. 그런데 비니루에 공기를 빵빵하게 집어넣고 그 안에 풀빵을 넣어 가면 먹기 좋게 온기를 유지합니다.”
 
  ― 그런가요.
 
  “비니루는 아무렇게 버려져 한낱 쓰레기일 수 있지만 사람 때가 묻은, 온기 묻은 쓰레기야말로 인간적 체취가 묻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사소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 사소한 일상을 포착한 그림에 관객이 더 감동하는 게 아닌가요.
 
  “그럴 수 있습니다. 저더러 ‘그림이 안 된다는 걸 그렸다’는데 그림이 안 되는 게 어딨겠어요.”
 
  ― 인위적으로 아름답게 포장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거의 없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이런 것은 있죠. ‘만약 내가 송이버섯 벌레라면 화가는 나를 어떻게 그려주기 원할까’ 하고 송이버섯 벌레에게 물어보는 자문자답(自問自答)의 과정은 있어요.”
 
  ― 자문자답의 과정이 긴가요.
 
  “길죠. 어떨 때는 그림은 하나도 안 그리고 자문자답만 할 때가 있어요. 자신을 객관화시키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없어요. 판단을 그르치면 상대를 설득할 수 없거든요.”
 
  ― 독자나 관객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려 노력하는군요.
 
  “주관을 내세우지만 어느 순간 주관이 없는 상태를 추구합니다. 말장난 같지만… 칼날같이 이리 넘어가고 저리 넘기는….”
 
  ― 주객이 동전의 양면 같은….
 
  “네, 그런….”
 
  인물화 그릴 때 김 화백은 인물 외형뿐 아니라 성정(性情)과 정신세계, 그리고 학문적 인품까지 그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얼굴에 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일까. 그는 “사람을 그린다는 것, 그것도 일가를 이룬 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보람이었고, 늘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다”고 말한다.
 
  ―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림을 그리며 작가 노트를 일상적으로 씁니다. 최소한의 과정에 대한 정당성, 과정에 대한 엄밀함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결과에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어떤 대상을 육박해 들어가는 데 과정의 정당성, 과정의 엄밀함, 그리고 진실성에 대해 자신이 없으면 그림을 뒤집어 엎어버립니다.
 
  작가로서 김호석을 바라볼 때, ‘김호석에게는 약간의 신비스러움도 없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분명히 말하고, 정확하게 자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부족함을 부족하다고 말하는 작가입니다. ‘이놈은 화가가 아니라 마치 글 쓰는 사람처럼, 마치 논리를 전개하는 미학자처럼 말한다’는 오해를 사요.
 
  그럼에도 스스로를 성찰의 계기로 삼고 명상하고 독서하는 이유는 많이 부족하고 계속 몸을 갈고 닦아도 갈수록 모자란다고 느끼기 때문에 일기 쓰고, 작업 노트 쓰고, 아직도 멀었구나….”
 
  혼잣말을 하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머리가 나쁘니까. 계속 책을 읽으면서 책 저자와 동일시하는 느낌이 안 들면 제가 견디지 못하는… 지적 호기심이 있어요.”
 
  ― 작가(작업) 노트는 모든 작가에게 다 있습니까.
 
  “모릅니다. 다른 작가들을 동일시하여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그냥 옳다고 생각하면 합니다.”
 
  ― 선생님의 모든 그림에 작가 노트가 있습니까.
 
  “거의 다 있습니다. 그림의 사유들…, 사유가 깊지 못하면 그림을 평면으로 압착해서 드러내기 어렵거든요. 꼬리에 꼬리를 물어야 해요.
 
  제가 ‘쥐꼬리’를 크게 그린 적이 있어요. 전시장에서 ‘쥐꼬리’를 주제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 사람이 사회를 바꿨어?’ 하고 느끼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쥐꼬리만큼 작은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인데, 그런 쓸모없는 사람들이 바꾸려고 노력하면 세상도 달라지는구나’ 하고 민주화 과정에서 느낀 사람이 많아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작가 노트에 다 담아요. 개인적으로 쥐꼬리 하면 떠오르는 영상이 있어요.”
 
 
  바늘 자리를 없앨 정도의 완벽성
 
1991년 가나화랑에서 초대전을 가졌을 때 김식(왼쪽), 김성호(가운데) 화가가 김호석을 찾아왔다.
  ― 어떤 영상인가요.
 
  “‘난초를 쥐꼬리처럼 쳐라’는 이야기를 아마 만 네 살 때 들었을 겁니다. 대학 가서는 난초 끝을 그릴 때 ‘쥐꼬리처럼 그려라’라고 배웠어요.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힘이 빠져 있는 듯한 느낌으로 그리라는 뜻이죠.
 
  처음 그림 그렸을 때의 초심을 잃고 있는지, 혹시라도 돈을 생각하며 그리는 것은 아닌지, 명성과 명예를 탐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려 자문자답하죠. ‘쥐꼬리 똑바로 그렸나? 난초가 제대로 됐어? 난초가 아니라 진짜 쥐꼬리를 그린 것 아니야?’ 이런 물음들이 제 작가 노트입니다.”
 
  ― 성격이 완벽하달까… 실제 그런가요.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바늘을 찌를 때, 바늘 자리를 없앨 정도의 완벽성이 작품에 묻어 있지 않으면, 비어 있는 것(여백)을 니(너) 작품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 할아버지가 혹독하게 가르쳤나 봐요. 조부께서 전문 화가셨나요.
 
  “아뇨, 학자셨어요. 깨어 있는 지식인이셨죠. 엄격하게 사시다가 당신이 쓸모없다고 느끼셨을 때 스스로 곡기(穀氣)를 끊고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실 무렵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눈빛에 힘이 없어지고 사람을 피하게 되더라. 이제 갈 때가 되었구나’ 하시더니 ‘14일 후에 죽을 테니 내 주변에 못다 한 이야기가 있거든 이제는 웃음으로 대화하자’ 하셨죠. 뜨거운 물만 끓여 드시면 배고픈 줄 모른다 하셨어요. 속을 깨끗이 비우시고…. 큰아버지, 셋째 중부(仲父·아버지의 셋째 형)님도 그 전통을 받아서인지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전라북도 정읍의 유서 깊은 한학자 집안 출신인 김 화백은 서당 훈장이던 조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붓, 먹, 종이 등을 가까이하며 자랐다. 매일 아침 조부와 함께 사당에 모신 고조부의 진영(眞影)에 인사를 올렸다. 그 진영을 바라보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그의 조부는 《대동천자문》(1948)을 지은 한학자 염재(念齋) 김환각(金煥珏·1888~1978), 고조부는 항일지사 춘우정(春雨亭) 김영상(金永相·1836~1910)이다.
 
  ― 생사를 본인이 결정했다? 가능한 일일까요.
 
  “가능합니다. 당시 조부께선 아흔둘이었으니 많이 사셨죠. 고조부도 일제와 맞서 싸우다가 감옥에서 곡기를 끊고 돌아가셨어요. 그런 전통이 내력인가 봅니다.”
 
  ― 완벽한 정신의 승리를 드러내는 집안입니다. 놀라워요.
 
  “당신들은 스스로에게 혹독하셨으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땐 마치 나비 같았죠. 집안 머슴이나 산지기, 논지기 같은 아랫사람을 하대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어요. 늘 존중하셨어요. 필요하면 논도 떼어 주시고….”
 
 
  그림과 선비정신
 
김호석이 그린 〈선비정신1〉(44x66.5cm, 수묵 채색, 2002년작).
  그러더니 이런 기억을 들려주었다.
 
  “어릴 때 할아버지께 여쭈었어요. ‘나무에도 목뼈가 있다면서요? 풀에도 초개가 있다면서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마소(馬牛) 고기를 안 드신다고 하셨잖아요. 물고기도 생명을 다해야 한다며 잡으면 안 된다셨잖아요. 그러면 배추는 씨가 클 때까지 놔둬야 하는데, 뿌리를 잘라 섭취하면 성장하지 못한 어린것을 할아버지 혀끝의 감미로움을 위해 희생시켜도 좋습니까?’ 하고 말이죠. 저는 너무 어려 기억은 못 하지만….
 
  할아버지가 희한하게 생각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대요. ‘종자를 남기는 것은 키우지만, 종자가 없는 것은 먹음으로써 다시 베풀어주는 것이니, 최소한의 필요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것은 서로가 공존하는 길’이라고.
 
  저는 할아버지와 토론을 자주 했는데, 예의만 갖추면 얼마든지 물어뜯을 수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나이가 열 살이라도 인격이 열 살은 아니다’고 말씀하셨어요.
 
  할아버지는 손자가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자 독선생으로 문인 화가를 부르셨는데, 그림 그리는 방법보다 자연을 보는, 사람을 보는 관점부터 공부시켰습니다. 제가 부엉이 소리를 듣고 부엉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면 할아버지는 직접 부엉이를 잡아다가 가까이서 관찰하도록 하셨죠.
 
  손자가 원하면 무엇이든 하셨어요. 그러면서 공부의 이유가 인륜(人倫)이고 현실적인 것인데, 사람 도리를 배우기 위해 어떤 일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셨어요.”
 
  ― 할아버지는 집안 여자들에게도 인자하셨나요.
 
  “할머니에게 한 번도 ‘왜 그랬어?’ ‘어떻게 했어?’라고 추궁하듯 말한 적이 없으셔요. 사실, 할머니는 《주역》을 암송한 분입니다.
 
  제 아버지도 어머니에게 ‘당신을 만난 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며 새해 첫날 한복을 입고 맞절을 하신 분입니다. 순수 선친께서 떡국을 끓이셨죠.
 
  저는 식혜, 떡, 김장김치를 직접 합니다. 겨울마다 김장 200포기를 담가요. 아내가 ‘시집와서 김치 담그는 법을 남편에게 배웠다’고 하지요. 저는 할아버지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웠거든요.”
 
  ― 할아버지는 제사를 안 없앴나요.
 
  김 화백에게 억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조상을 받드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조상이 있어 내가 있으니…. 대신 간소하게 합니다. 조율시이(棗栗梨) 같은 것을 지키기보다 평소 조상이 좋아하시던 음식을 올려요. 고춧가루 없는 무염 채식…. 고기는, 생명 있는 음식은 거의 먹지 않아요. 또 제사 일주일 전에는 밖에 돌아다니지 않고, 험한 것을 안 보려 합니다.
 
  제사를 준비하는 아내에게 말해요. ‘마음이 안 내키면 찬물만 놓고 하세요. 시장 가서 절대 가격 깎지 말고, 가장 반듯하고 선한 눈빛을 한 사람이 파는 음식을 사다 상차림에 쓰세요’라고요.”
 
  김 화백은 ‘선비정신으로 우리 시대 현실을 조명하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 21세기에 선비정신이라니….
 
  ― 이 시대에 선비정신이 꼭 필요합니까.
 
  도발적인 질문에도 거침이 없다.
 
  “선비는 정치에 참여하거나 행정 업무를 맡지 않고 평생 공부에 열중하는 사람이다. 이 공부에는 끊임없는 자기도야, 인격연마가 반드시 포함된다. 단순히 이론에 그치는 공부는 선비의 공부가 아니다”라고 했다.
 
 
  선비는 평화를 추구한 사람
 
김호석의 가족. 아내 김아영, 딸 하운, 아들 가운. 김 화백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모델이다. 아이들이 훌쩍 자라 딸은 서울대 대학원에서 미술을 배우고 있고 아들은 해외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했다.
  “정신의 문제가 제일 중요합니다. 선비는 평화를 추구한 사람이었어요. 나를 소진시켜 남을 살리는 정신이 없다면 선비가 아닙니다. 평화가 깨졌을 때는 왜 깨졌는지에 대한 뿌리를 잡아서…, 만일 왜군이 침략해 평화가 깨졌다면 왜군을 토벌해야 하고, 정치가 혼란스러우면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사발통문을 돌리거나 ‘도끼 상소’를 올려야 합니다.
 
  물론 선비정신이라고 하면 대의정신과 의를 위해 뻣뻣하게 살다가 죽어버린다는 식의 형식화된 면이 사실은 있어요.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앎을 실천하지 않는 선비는 껍데기입니다. 선비는 판단력을 기르기 위해 끊임없이 인격도야를 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조금 버르장머리 없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성인의 경지입니다.
 
  평소 지나치지 아니하고, ‘칭물평시’(稱物平施·물건을 저울질하여 고르게 펼친다)의 마음으로, 남으면 덜어주고 모자라면 빌려 쓰는… 자연의 근본적 이치를 스스로 지니고 사는 경지를 성인의 경지라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적당히 공부했다고 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주유(周遊)해서 확인하고 실천을 통해 현실성 있게 점검해야 합니다. 성인이 되어 저잣거리에 나가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대동(大同) 세상을 꿈꾸는 게 선비라 배웠고, 선비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 동락(同樂)의 세계가 바로 그림입니다.”
 
  ― 선생님은 그림을 그린 세월만큼이나 인격적으로 숙성됨을 느끼십니까.
 
  이 질문도 억지 질문이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하하하, 그래야 하는데 화가 나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수양이 덜 돼 세상이 오물투성이라는 걸 느끼면서도 껍데기만 선비네 하고 살아온 것 같고….”
 
  ― 선생님에게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세상에 대한 시각을 거두지 않는 일이란 생각이 드네요.
 
  “현실이 교과서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 현 상황에 그림의 뿌리가 있다고 여겨요. 공리공론이나 엉뚱한 이상론을 추구하거나 예술이 마치 아무 고민 없는…, 그냥 몽롱한 정신으로 점 하나를 찍었는데 엄청난 천리(天理)나 철학이 있는 것처럼 강요하거나 보이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견디지 못합니다. 그건 사기라고 생각해요.”
 
  화가의 길을 공부의 길, 인격도야의 길로 여기는 김 화백의 생각이 놀랍게 느껴져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다변가처럼 말을 쏟아냈다.(‘김호석에게 신비주의가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인간사회에서 내가 ‘봄’이 되지 않으면 세상이 ‘봄’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나 스스로 ‘봄’이 돼야 해요.”
 
 
  고생 이야기, 비참미
 
김호석 화백은 만주 너머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러시아 알타이산맥에서 고비 알타이와 사막지대를 거쳐 티베트까지 오랫동안 여행을 하며 고대 암각화를 연구했다. 사진(위쪽)은 암각화의 탁본을 뜨는 장면이다.
  어린 시절, 김호석은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여유 가득한 유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반면 중학교 시절부터는 갑자기 기운 가세로 가족은 흩어지고 가난의 바닥을 체험했다. 또 “그림 대신 공무원 시험을 쳐서 동생 뒷바라지를 하라”는 아버지의 명령 아닌 명령에 맞서야 했다.
 
  “희생하는 것은 조금도 아깝지 않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고 반박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타협이 없다고 선언하고 무일푼으로 상경해 기꺼이 고학을 감수했다.
 
  달동네 연탄 배달, 막걸리 배달, 이장 무덤의 해골 파내기, 구두닦이, 아이스케키(아이스케이크)를 팔았다. 한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견뎠고, 라면 한 개로 2~3일을 견뎠다. 그는 “손가락이 굵어 결혼반지를 낄 수 없다. 어릴 때 하도 꼬깽이질(괭이질)을 많이 해서…”라고 말했다.
 
  “공동묘지의 무연고 묘를 파내어 뼈를 추려 새끼줄에 기름을 뿌려 태우면 한 기에 3000원을 받았습니다. 극빈 체험의 지난한 세월이 없었다면, 어쩌면 세상을 따뜻하게 보는 시각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배울 수도 없었을 겁니다. 훗날 그림을 그리는 데 엄청난 자양분이 된 것은 물론입니다.”
 
  그는 “성경 ‘로마서’에서도 환난은 소망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표현돼 있다. 화가도 마찬가지다. 당시엔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 고통이 예술적 자양분으로 되돌아가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고 말했다.
 
  “제 얼굴을 보면 순진하게 자란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상처가, 깡치가 많아요. 그런 과정을 겪으며 어떤 사람도 인격적으로 존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느꼈어요.
 
  저는 집에 누가 찾아오면 그냥 돌려보내지 않아요. 먹다 남은 밥이라도 주고, 새 밥을 짓습니다. 쌀이 없으면 보리밥이라도 지어 먹입니다.”
 
김호석 화백은 전국을 돌며 토종 닥나무를 찾아내 묘목을 길러내고 있다. 그는 사라진 종이 한지를 재현해 한지 특허권을 갖고 있다. 화실 한구석에 닥종이를 만드는 기계를 설치해 직접 한지를 만든다.
  ― 보통 사람은 집에 밥이 없으면 돌려보내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찾아온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면 안 됩니다.
 
  제가 몽골 여행을 자주 다녔어요. 태고적 정서가 숨 쉬고 있고 삶을 최초로 영위할 때 예술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확인하려 만주 너머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다시 러시아 알타이산맥에서 고비 알타이와 사막지대를 거쳐 티베트까지 꽤 오랜 시간을 여행했어요.
 
  한번은 고비사막을 건너는 할머니 한 분을 태워준 적이 있어요. 일행이 반대했지만, 딸 출산을 돕기 위해 도보로 걷는 할머니를 외면할 수 없었죠. 일주일 이상을 걸어갈 생각이었다고 하더군요. 우리 일정이 하루 정도 지체됐지만 데려다주었어요.
 
  그 일이 있고 3년이 지난 어느 날, 몽골의 남쪽 자연보호구역에 있는 암각화를 보기 위해 다시 고비사막을 찾았어요. 길을 헤매는 바람에 차량에 기름이 떨어지고 말았어요. 걸어서 사흘을 가야 작은 도시에서 기름을 구할 수 있었어요. 낙담했죠.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그때 게르(ger·천막집)가 보였어요. 노부부가 사는데 흑인처럼 얼굴이 까맸어요.
 
  주변에 헬리콥터 착륙장과 경비행기 활주로가 있었고, 유네스코에서 가끔 시찰을 온다고 하더군요. 할머니가 저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달려와 안기는 거예요. 놀랍게도 3년 전 만난 그 할머니였죠. 놀랍게도 노부부는 경비행장 비축유를 관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라의 것이어서 민간인이 쓸 수는 없지만, 사정이 그러니 지금 쓰고 언제까지 기름을 보내라’고 하더군요. 먼저 기름값을 주었고, 나중에 쓴 만큼의 기름을 다시 보내주었어요. 이 경험이 우연히 나왔다고 생각지 않아요.”
 
  ― 정말이지 공짜가 없네요.
 
  “누가 배고프다고 하면 있는 대로 챙겨주는 것이 최상이라 생각해요.”
 
  ― 고흐의 위대한 작품은 어찌 보면 고통에서 나왔는데, 좋은 작품을 위해 기꺼이 고흐의 고통을 감수하시겠습니까.
 
  “그 고통뿐만 아니라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통을 이겨내서 후세에 작품을 남길 수 있다면 죽음도 택하고 싶습니다. 고흐의 고통…, 고통을 이겨낸 힘, 고통의 힘 같은 것을 그렸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고통의 희열을 느끼게 했지 않았을까요? 비참미라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잖아요. 비극도 아름답지 않겠어요?”
 
  기자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오래 여운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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