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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자료로 읽는 인물 근대사 〈3〉 이광수(李光洙)

적어도 1일 1회 이상 조선을 생각하자…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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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냐, 이제 두고 보아라! 내 피로 조선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다!’
⊙ 1919년 2월 8일 도쿄서 이광수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발표
⊙ 철저히 內鮮一體 관철해야 2등 국민의 차별 안 받을 것이라 생각해
춘원 이광수. 사진=태학사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 1950)는 한국이 낳은 문호(文豪)라는 칭호를 받는 인물이다. 한국 근현대사에 춘원을 제외하면 여백뿐이리라. 일제 강점기에 친일(親日)을 한 이유로 국민적 노여움을 샀지만, 한때 그는 누구보다 조선을, 조선 민족을 사랑한 인물이다.
 
  춘원이 남긴 수많은 일화 중 110년 전인 1910년 3월에 겪은 일들을 빼놓을 수 없다.
 
  그해 3월 24일 조부의 병환으로 급히 귀국한 춘원은 서울로 가기 위해 부산에서 경부선 기차를 타게 된다. 한일(韓日) 병탄이 되기 전이지만 그의 귀국을 맞이한 것은 무서운 일본 관헌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도쿄에서 발행한, 이른바 ‘등사판 잡지’가 도쿄 경시청에 압수돼 춘원은 일본 관헌의 요시찰 인물 명부에 오른 것이다. 심지어 그가 탄 경부선 기차에는 요금별로 칸이 나뉘어 있었고, 한국인 타는 칸과 일본인 타는 칸이 구별되어 있었다. 4년 전 춘원이 일본 갈 때만 해도 구별이 없었다.
 
  부산역 직원이 양복 입은 춘원에게 일본인 칸을 권하자 춘원은 “나도 조선인이오” 하고 조선인 칸에 탔다고 한다. 속으로 ‘피가 거꾸로 솟았다. 오냐, 이제 두고 보아라! 내 피로 조선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다!’라고 맹세했다.(류시현의 《동경삼재》 참조)
 
 
  한국 현대문학의 효시 《무정》
 
태학사에서 출간된 춘원 이광수 전집. 왼쪽부터 《무정》 《개척자》 《허생전》. 춘원 70주기를 맞아 전 30여 권으로 완간할 예정이다.
  수많은 공과(功過)를 떠나 춘원은 무엇보다 한국에 신문학(新文學)을 뿌리내린 최대의 소설가요 시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사상가, 역사가였다. 춘원이 친일로 돌아서기 전만 해도 그의 작품은 기독교적 경건함과 애국 계몽주의적인 경향이 짙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무정》(1917)이 그렇다.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5년 9월 와세다대 고등예과 문학과에 편입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미국으로 가는 길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다시 일본으로 가서 1917년 3월 와세다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앞서 1916년 12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와 미리 써둔 소설을 다듬어 서울로 보냈는데, 이것이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연재된 장편소설 《무정》이다. 그해 6월 14일까지 126회로 연재가 끝난 후 이듬해 7월 광익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무정》은 오늘날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이며 한국 현대문학의 효시로 꼽힌다. 20세기 전체를 통틀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은 책 중 하나가 《무정》일 것이다. 대부분 순우리말로 쓰고 그녀(she), 그(he)의 구별 없이 ‘그’라고 표현한 것도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한 세기 시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무정》의 이형식·박영채·김선형·신우선 같은 인물이야말로 20세기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이광수가 아내 허영숙(許英肅·1897~ 1975)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무정》이 인기리에 연재되고 덕분에 전국적 유명인사로 떠오른 1917년 3월이었다. 당시 허영숙은 도쿄여자의과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어느 날 이광수가 폐병으로 각혈하게 되는데 허영숙의 헌신적인 간호를 받고 위기를 넘기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1918년 10월 허영숙은 총독부가 주관한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춘원과 베이징으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다. 그 무렵, 제1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후 우드로 윌슨(미국 28대 대통령)의 민족자결 14개 원칙에 따라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춘원은 그해 12월 백관수·김도연·서춘·김철수 등 재일(在日) 유학생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 이듬해(1919년) 1월 31일 자신이 기초한 조선청년독립단 선언문을 본국에 전하게 한 뒤 자신이 영역(英譯)한 영문 선언문을 해외에 전파하기 위해 2월 5일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도쿄에서는 2월 8일 오후 2시 400여 명의 유학생이 도쿄 YMCA 건물에 모여 이광수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기대했던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독립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종결된 데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이 스스로 실력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김정형의 《20세기 이야기-1920년대》 참조)
 
 
  “내가 내 피를 흘려서 싸우마”
 
  31세 때인 1922년 춘원은 흥사단의 국내 지부 격인 수양동맹회를 결성하는데 1926년 1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단체는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 부르주아 민족운동을 지향했다.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동광》을 창간했고, 그해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1933년에는 《동아일보》를 사임하고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9), 《이순신》(1931), 《흙》(1933), 《유정》(1933), 《그 여자의 일생》(1934) 등의 소설을 발표했다.
 
  춘원은 1937년, 그러니까 46세 때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나 그해 12월 병보석이 되어 경성의전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적이 드러난다. 춘원은 1939년 북지황군위문(北支皇軍慰問)에 김동인, 박영희 등과 함께 협력했고, 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또 창씨 개명한 새 이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郎 )를 경성부 호적계에 신고(1940년 3월)했다. 얼마 후 조선문인협회 회원 37명과 묵동의 지원병 훈련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춘원은 조선의 독립을 단념하면서, 독립이 사실상 무망한 상태에서 독립을 외치는 것은 조선인을 차별 상태에 영원히 방치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철저히 일본의 신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관철해야만 2등 국민으로 차별받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황궁 요배, 일본 국가 제창, 황군 전몰장병을 위한 묵념에도 거리낌 없이 참가했다.
 
  그가 동포 학생들에게 학병을 권유하러 도쿄에 갔을 때 일이다. 하루는 밤늦게 대학생 셋이 그를 찾아왔다. 당시 춘원은 열이 나서 누워 있을 때였다. 그중 한 학생이 “우리가 나가 죽으면 분명히 우리 민족에게 이익이 되겠습니까?” 하고 입을 열었다.
 
  “그대가 안 나가려면 안 나갈 수가 있나?”
 
  춘원은 이렇게 되물었다.
 
  그들은 한숨을 짓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윽고 다른 한 사람이 “우리가 나가서 피를 흘리면 그대는 우리의 핏값을 받아주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것은 참으로 큰 물음이었다. 춘원은 이렇게 답했다.
 
  “그대들이 피를 흘린 뒤에도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것을 아니 주거든, 내가 내 피를 흘려서 싸우마.”
 
  그는 속으로 이 젊은이들의 핏값을 받으려고 피를 흘리는 자신을 상상했다고 한다.
 
  청년들은 “우리가 피를 흘려서 우리 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조금도 한(恨)이 없겠다”고 말하며 떠났다.
 
  춘원의 친일은 그가 남긴 글에서 구체적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순사보다는 조선인 순사가 좀 낫지 아니하였던가. “그놈 왜놈보다 더하다”는 악평을 듣던 형사도 일본인보다는 낫지 아니하였던가.
 
  조선인 군수이던 고을에 일본인 군수가 올 때에 백성들은 싫어하지 아니하였던가, 아동들도 조선인 훈도나 교장을 더 좋아하지 아니하였던가. 판검사도 조선인은 조선인에게 인정을 두었다는 것은, 사상사건을 조선인 판검사에게 아니 맡기는 것을 보아서 알 것이었다. 유치장이나 감옥의 간수도 조선인이 우리에게 사정(私情)을 보였다. 다만 그들은 일본인에게 의심받지 아니할 정도에서만 인정을 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불만이었던 것이다.
 
 
  춘원式 親日은…
 
이광수 가족 사진. 이광수와 부인 허영숙. 아들 봉근은 8세 때 사망했다. 사진=민음사
  조선인 학교비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하려고 애쓴 것은 조선인도 부회(府會)의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려나 나는 지난 40년간의 경험으로 보아서, 조선인 관공리(官公吏)가 일본인보다는 민족에 해를 끼쳤다고는 생각지 아니 한다. 그렇다 하면, 조선인 관공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일정(日政)하 우리 민족의 실제생활에 조금이라도 유리하지 아니하였던가.
 
  또 조선인 관공리 치고 ‘나는 조선 민족을 배반하여서까지라도 일본에 붙으리라’ 하고 관공리가 된 사람을 상상할 수가 있을까. 일본인에게 불신임받을 것이 두려워서 가장 충성을 보이고 조선인에게 냉혹한 모양을 보인 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였을까.…〉(이광수 저, 최종고 편 《나의 일생》, 481쪽 중에서)
 
  해방이 되자 춘원은 1949년 1월 12일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고 그의 원고와 서류 등은 모두 빼앗겼다. 그해 3월 고혈압 병보석으로 출감한 그에게 불기소 결정이 내려졌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납북되어 끌려갔다가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평양의 지사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본지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동광》에 실린 춘원과 관련한 몇 편의 글과 기사를 소개한다. 현대어 표기법에 맞게 단어를 일부 수정했다.
 

  서재인 방문기 (3) 春園 李光洙氏
  讀書보다 명상, 近日에는 겨우 《단종애사》의 집필
  婦人記者 崔義順
 
춘원 이광수. 춘원은 생활에서 좌우명을 “조선을 위하야 적어도 1일 1회 이상 생각하자”로 정했다.
  동소문 안 숭삼동의 이광수씨를 찾았습니다. 씨는 수년간을 신병으로 근일까지도 이곳저곳으로 전기 요양을 다녔고 집에는 얼마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한곳에 완성된 서재에서 사색생활을 못하였으리라는 예상을 가지고 씨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늑한 유리창으로 앞을 막은 꽤 넓은 마루 위에 일면으로 따뜻한 보료를 깐 것이든지 상상했던 것보다는 그리 많지 않은 책 탁자 옆에 포근포근한 방석으로 에워싼 등침상이 놓인 것이라든지 그리고 침방 안에 책상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들만 보아도 씨의 몸 두던 곳이면 다 서재라고 볼 수 있는 듯한 느낌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렇게 항상 서재에 갇혀 삽니다. 지난달에는 이종우씨 개인 전람회 시 날과 또 다른 날에 큰 거리에 나가 보았습니다마는 한 달에 두 번씩이나 바깥 구경을 해본 것은 아마 근년에는 드문 일이겠습니다. 참 오랫동안 착실한 서재생활을 했다고 할런지요. 그러나 ‘독서’라는 것 하고는 전연 인연을 끊었습니다. 주야 책 쌓인 옆에 누워서 눈감고 궁리하기에 골몰하거나 혹은 먼 산을 바라보지 않으면 높은 하늘을 쳐다보며 흩어지는 나의 구상의 실마리를 거두어보는 공부도 했습니다. 병세가 전혀 물러갔다는 요사이도 여전히 읽는다는 것보다는 쓰는 것을 숭상하는 편이겠지요. 요사이 집필 중에 있는 것은 《단종애사》뿐입니다. 이것도 대개 새벽에 눈이 뜨이면 곧 시작해서 두 시간쯤 계속할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씨의 표정은 극히 눈물겹게 나타났습니다. 온 활력과 가득한 재질을 기침 없이 번뜩이던 씨의 먼 과거가 몹시 그리우신 듯도 하며 일변으로 읽고 생각하며, 생각하고 써보고하는 문학자의 생활과 멀리 떠나 지내던 가까운 과거를 애석해하는 듯한 기색도 환연하였습니다. “미깡(귤-편집자)이나 좀 잡수어보십시오”하며 기자의 앞에 과일쟁반을 갖다놓는 씨의 부인 허영숙씨의 “참말이지 다시 살아나신 셈이지요. 그러나 아직까지도 하루 24시간 동안에 일광욕하는 시간과 세 때 식사하는 시간 모두 합해서 4시간쯤이나 일어나 계신지요. 거진 20시간은 꼭 누워 있습니다” 하는 시름없이 솟아나오는 그 말마디에는 형용키 어려울 만한 심각한 맛이 떠돌았습니다. “과연 부인의 놀라운 공력으로 이와 같이 다시 선생을 서재에 뫼시게 되었습니다” 하고 기자가 입을 열게 되자 부인은 대단한 감격한 어조로 다시 “술 담배 그 외 모든 자극물이란 것은 일절 금하고 살로 갈 슴슴 달콤한 음식만을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아마 미구에는 정신과 육체가 아울러 건전해질 것이며 따라서 옛 때보다 더 서재생활다운 것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할 때에 곧 뒤를 이어 풀려나오는 씨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참 그렇게 될 줄 나는 믿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남자가 세상에 나서 사랑의 아내를 못 맞이하는 자처럼 불쌍한 사람은 다시 없겠다고 단언하고 싶은 동시에 남의 진실한 아내 된 자처럼 행복을 느낄 자는 다시 없을 듯이 생각합니다.”
 
  이 말이 과연 안온한 서재생활을 붙잡고 있는 근일의 씨의 절실한 느낌이라고 해도 큰 막말은 아니 될 듯합니다. (사진은 집필 중의 이광수씨)
 
  ▲출처=1928년 12월15일자 《동아일보》 4면
 

  지도자론
 
1928년 12월15일자 《동아일보》 4면에 이광수의 서재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1. 지도자와 단체
 
  이광수
 
  대소를 막론하고 단체생활에는 반드시 지도자가 필요하다. 평등된 개인이 공통한 이해(利害)나 주의를 결뉴로 모인 단체일수록 전 단체를 대표하고 지휘할 만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상식이다. 단원 없는 단체를 상상할 수 없다고 하면 지도자 없는 단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지도자를 택할 줄 알고 복종할 줄 알고 보조할 줄 알고 애경할 줄 아는 것은 공민(公民)의 지도자에 대한 사대덕(四大德)이요, 동시에 사대자격(四大資格)이다.
 
  미국인은 평등주의로 유명하지마는 그들이 단민적 지도자인 대통령 이하로, 일(一)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 회의 지도자인 회장 등등을 애경하고 복종하는 것은 동양인이 볼 때에 그 의외임에 일람(一覽)한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지도자를 경시하야 애경과 보조와 복종과 존중함이 부족하기는 아마 조선민족이 거기수(居其首)하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민족이 가진 병통 중의 가장 병통의 하나다.
 
 
  2. 지도자의 합리성
 
  지도자가 진정한 지도자가 되에는(되기에는-편집자) 그가 속한 단체의 종류 여하를 따라서 여러가지 법적 절차‐예(例)하면 입후보, 선거, 선서식 등‐가 있겠지마는 이것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니 이러한 형식적 제 절차는 그 정신적 조건을 구비함으로만 합리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 정신적 조건이란 무엇인고? 같은 지도이론의 통효(通曉·환하게 깨달아서 앎-편집자)와 불변성을 가진 의지력이다.
 
  어느 단체는 반드시 일종의 기초적 이론 위에 서는 법이다. 예를 들면 러시아의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이즘 위에 섰고 인도의 국민회는 간디의 샤타그라하(진리 把持), 무저항이라는 기초이론 위에 섰고, 중국의 국민은 손문의 삼민주의 위에 섰다. 이러한 기초이론이 없이는 단결의 존재는 무의미하고 또 처음에는 어떠한 기초이론이 있어서 단결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 이론이 무슨 원인으로 소멸된다 하면 그 단결도 소멸될 것이다. 금일에 떠드는바 해소론이란 이러한 이론에서 온 것이다.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동광》 1931년 7월호에 실린 이광수의 〈지도자론〉. 춘원은 “지도자에게 복종할 줄 알고 애경할 줄 아는 것은 公民의 지도자에 대한 四大德”이라고 강조했다.
  그럼으로 어떤 단체의 지도자는 그 단체가 의존하는 기초이론에 통효하야 다만 학자적으로 통효할뿐더러 전연 그 이론의 권화(權化)가 되어서 그의 공과 사의 사언행(思言行)이 전혀 그 이론의 연역(일반적인 명제나 진리를 전제로 하여 좀 더 특수하고 개별적인 명제나 진리를 이끌어내는 추리-편집자)이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의 지도자적 효과는 믿을 수 없다. 왜 그런고 하면 어떤 단체의 수많은 단원이 전부 그 단체의 지도정신의 권화가 되기는 심히 어려운 까닭에 그들은 이 정신의 권화인 지도자의 지도에 신뢰하고 복종하여 갈 필요가 있는 때문이다. 만일 그 단체의 기초이론이 사라지고 모형인 지도자가 있다고 하면 그 단원은 얼마나 유쾌하고 또 편이(便易)할 것인가.
 
  그러나 단체의 이론에만 통효하는 것으로 지도자의 자격이 다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람은 비교적 용이하게 구득(求得)할는지 모른다. 왜 그런고 하면 상당한 재간(才幹)이 있는 사람이면 능히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자 되기에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그의 불변성을 가진 의지력이다. 한문식 숙어로 환언하면 덕(德)이요 절조(節操)다. 한번 어떤 주의를 선언한 후 한번 공중(公衆)에게 대하야 어떤 약속을 맺은 후에는 이(利), 해(害), 고(苦), 락(樂), 사(死), 생(生), 성패, 이둔(利鈍·날카로움과 무딤-편집자)을 도무지 돌아보지 아니하고 선언한 주의(즉 이론)와 약속한 의무를 위하여 용왕(勇往), 매진(邁進), 분투, 육력(戮力·서로 힘을 모으는 것-편집자)하야 사이후이(死而後已·죽을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함을 이르는 말-편집자)하는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은 누구나 가져서 불가할 것이 아니지마는 일반민중이 다 가지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다. 오직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 큰 자에 이르러서는 백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 이러한 사람이 나서 낙망하려 하고 변심하려 하고 타협하려 하고 권태하려 하는 대중에게 용기와 낙망과 절개와 의연한 주장과 격려를 주는 것이다. 이 사람은 변치 아니하기 때문에 대중이 믿고 자기의 이해고락을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직 단체와 대중을 호(互)하야 자기를 희생하기 때문에 대중이 감사로써 열복(悅服·기쁜 마음으로 순종함-편집자)하고 어떠한 역경에서도 실망낙심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대중이 의지하고 최후에 그의 일려일정(一勵一靜)은 모든 개인적인 것, 이기적인 것, 사정적(私情的)인 것 절대로 제거하고 오직 단체의 기초이론에 철두철미하기 때문에 대중이 의심 없이 맘을 주고 신뢰하는 것이다.
 
  이상에 말한 양대 속성‐이론과 의지를 가진 자라야 비로소 정신적으로 지도적 조건을 구비하였다 할 것이다. (중략)
 
 
  4. 조선과 지도자
 
  조선에는 아직 지도단체가 없다. 신간회가 그것으로 자임하였으나 해소(解消)라는 것으로 무위 중에 자진해 버렸고 그 밖에 아직 유력하게 지도단체라고 자타가 인정할 만한 자가 없다.
 
  원래 신간회는 지도단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었다. 첫째는 그는 민족이 따를 만한 이론을 가지지 못하였고, 둘째로 신간회에는 중심될 만한 지도자가 없었고, 셋째로 신간회의 주의, 정신을 생명으로 하는(주의, 정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말았거니와) 단원이 희소하였다. 신간회는 지도단체의 3요소를 구결(具缺)한 산민(散民)이다. 지도단체가 되려는 원망(願望)을 가진 단체는 있을는지 모르거니와 진실로 그 실력을 가진 자가 누구며, 지도자가 될 후보자는 있을는지 모르거니와 아직도 강력한 지도단체가 없는 곳에 강력한 지도자가 있을 수가 있는가.
 
  이렇게 지도단체와 지도자를 가지지 못한 금일의 조선민족은 민족운동을 가지지 못한 민족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강력한 민족의 중심이 없기 때문에 이매망량배(魑魅魍魎輩·온갖 잡귀신, 온갖 나쁜 짓을 하는 놈들-편집자)가 백만 뭉쳐도 민족이오, 십만 모여도 조선이라 하야 조선민족의 명(名)을 모칭(冒稱)하게 된다. 조선민족이 합리적이요 강력적인 중심 지도단체가 생기는 날이 진실로 조선민족이 민족적 신운동, 신생활의 신기원을 여는 날이다.
 
  ▲출처=《동광》 1931년 7월호, 8~9쪽
 

  묵상록(默想錄)
  조선인으로의 내 인생관
 
《동광》 1932년 4월호에 실린 이광수의 〈조선인으로의 내 인생관〉. 춘원은 “조선을 위하야 사람을 만나는 대로 다만 한마디라도 조선에 관한 말을 하자”고 했다.
  1
  나는 근일에 미지의 형제로부터 1. 조선인은 어떠한 인생관을 가질 것이냐 2. 조선청년으로서 조선을 위하야 할 일이 무엇이냐, 하는 종류의 편지를 수십 장이나 받았다. 나는 이러한 편지를 받을 때마다 깊은 감동과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곧 답장을 못한 것은 직업의 분주에도 의한 것이지마는 도저히 간단한 편지로 대답할 수 없음을 깨달았음이다. 나는 먼저 이들 미지의 형제에 대하야 양해를 구하지 아니할 수 없다.
 
  2
  이 문제는 과연 중대한 문제요 또 긴급한 문제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하야 대답할 자격이 없음을 슬퍼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미지의 형제들의 정성스러운 질문에 대하야 침묵을 지킬 수는 없다.
 
  이에 나는 내가 조선인으로 가지고 있는 인생관을 파악하야 이 귀중한 질문에 대한 답장을 삼을 수밖에 없다.
 
  3
  첫째로 나는 사회현상을 설명함에 대하여서는 물심이원론자(物心二元論者)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으로 본체물(本體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상식적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나 자신의 원리다. 인류의 문화적 행동뿐 아니라 경제적 행동까지도 결코 기후, 풍토 등 지리적 조건, 기아, 성욕 등 생리적 조건, 제도와 같은 사회적 조건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요, 또한 개인의 의욕‐본능적 충동 이상의 도덕적 의욕에 의하야 규정됨을 나는 믿는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 것은 결코 마르크스 자신의 기아나 성욕에서 나온 것이 아님은 물론이어니와 반드시 당시 독일의 사회 환경의 시킨 바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자본론을 쓰게 한 것 중의 중요한 요인이 그의 독특한 정의감, 진리감 및 근면과 천재라고 아니할 수 없다고 믿는다.
 
  석가도 그러하고 예수도 그러하다. 손문, 간디, 무솔리니도 다 그러하다고 믿는다. 즉 객관적 조건, 즉 물적 조건과 주관적 조건, 즉 심리조건과 합치하야 사회현상(물리현상은 말고)이 발생하는 것이요, 특히 본능적이요 초보적인 것 말고 문화적인 것, 고급적인 현상일수록 심리조건의 임무가 많다고 믿는다.
 
  다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구극(究極)의 본체가 무엇이냐, 물(物)이냐 심(心)이냐 하는 문제에 들어가서는 탈레스 이래로 철학자들이 문제 삼는 바어니와 그것은 결국 철학자들의 한화제(閑話題)다. 닭이 먼저냐 닭알이 먼저냐 하는 것과 거의 같은 논쟁이다. 나와 같은 저급한 상식인으로는 기급(企及)할 바가 아닐뿐더러 실제운동에 있어서 그리 필요한 제목도 아니라고 믿는다.
 
  4
  전항에 말한 한(限)에서 나는 물심이원론자이기 때문에 조선문제를 생각할 때에도 이 원리에서 한다. 구태여 밀, 제임스 등의 프래그머티즘(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에서 유행한 실용주의 사조.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성을 부정하고 다원주의를 주창한다-편집자)을 빌려서 내 태도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이하 71행 생략)
 
  * * *
 
  조선민족의 표어
 
  △이광수 선생님.
 
  이때인 만침 표어를 부치고 ××하여야 되겠으니 조선민족의 표어는 무엇일까요? -宣川水波
 
  △宣川 水波生께
 
  감히 민족의 표어를 말씀할 수는 없습니다만 나 자신의 생활의 좌우명은 이러합니다.
 
  1. 조선을 위하야 적어도 1일 1회 이상 생각하자.
  2. 조선을 위하야 사람을 만나는 대로 다만 한마디라도 조선에 관한 말을 하자.
  3.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하야 시간과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바칠 정신이 있는 이를 찾아 사귀자.
  4. 내 말이나 글이나 행동이 반드시 조선을 제목으로 하자.
  5. 동포 간에서는 무저항하자.(개인 공격, 파쟁 등에서)
 
  이상 5개조는 평소에 내가 실행하는 바입니다마는 전 조선적으로 만일 표어를 내어 세운다면
 
  ‘제 일은 제가 해라’ ‘우리의 인식의 대상은 조선민족이다’ 하는 두 가지가 될까 합니다. 환언하면 남에게 의뢰하는 맘, 애걸하는 맘, 구청(求請)하는 맘(개인으로나 민족으로나)을 살부지수(殺父之讐·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편집자)로 알고, 배외사상(拜外思想), 섣부른 세계주의 등을 버리고 민족집단이라는 현실에 입각해서 자력으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라는 것일까 합니다. -이광수
 
 
  조선민족이 가질 인생관
 
  △이광수 선생님
 
  선생님 평안하시옵니까.
 
  앞으로는 현하(現下) 조선민족이 가질 인생관이 무엇인지 개괄적으로라도 《동광》에 실어 주시오면 고맙겠습니다. -咸成宅
 
  △함성택씨께
 
  조선민족이 가질 인생관이라고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개인으로도 저마다 개인의 인생관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조선민족으로서의 인생관’이라 하면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조선민족으로서의 인생관은 ‘인생의 정도는 후손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야 자립자활의 정신으로 자신의 이해고락을 희생하는 것이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광수
 
  ▲출처=《동광》 1932년 4월호, 72~73쪽
 

 
[편집자 주]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헌법 제101조에 의해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그해 9월 22일 법률 제3호로서 제정되었다. 반민특위가 구성된 1948년 10월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예비 조사를 시작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벌였으나 이승만 정부의 미온적 태도, 특위위원 암살 음모, 특경대 습격사건, 김구 암살, 그리고 반민특위법의 개정으로 1948년 10월에 해체되었다.
  친일문필 巨頭
  최남선·이광수를 체포
 
1949년 2월9일자 《조선일보》 2면에 실린 ‘최남선·이광수 체포’ 기사.
  반민특위에서는 물샐 틈 없는 특위특경대의 활동으로 연일 계속하여 반민자를 민족의 원한도 가벼웁게 속속 체포하고 있거니와 드디어 지난 7일 오후 3시경에는 특위의 이제까지의 검거방침을 바꾸어 친일문화인의 거두 육당 최남선(崔南善)과 문필로 강연으로 황민화 운동의 선구자로 우리나라 젊은 학도들을 갖은 찬사로서 왜적 일황을 위하여 싸움터로 몰아넣던 춘원 이광수(李光洙)를 각각 자택에서 체포하였다.
 
  동일 오후 3시경 특위특경대는 비밀리에 시외 우이동(牛耳洞) 육당 최남선의 자택으로 달려갔었다. 특경대원이 “출판소에서 최 선생을 만나려 왔습니다” 하고 자택의 문을 두드리자 때마침 나온 아들이 의심을 품은 얼굴로 육당 최남선의 서재로 안내를 하자 이미 눈치를 챈 육당 최남선은 쓰고 있던 원고를 정리하며 “먼 데를 일부러 오셔서 죄송합니다” 하며 태연자약하게 차까지 내며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한 후에 옷을 갈아입고 특경대의 뒤를 따랐다 한다.
 
  일방 춘원 이광수는 동일 오후 3시반경 효자동(孝子洞) 허영숙(許英淑) 병원에서 체포하였는데 특경대가 전기 허영숙병원에 이광수를 찾아가자 때마침 이광수에게 ‘페니실링’ 주사를 놓고 있던 허영숙씨는 가지고 있던 주사기를 떨어뜨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주사를 놓는 중인데요” 하였다는데 춘원 이광수는 특경대의 “왜 이제까지 자수를 아니 하였느냐” 하는 질문에 “몸이 아파서 못 갔으며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한다. 그리고 동일 특위에서는 곧 이어서 서대문형무소에 전기 양인을 수감하였다.
 
  ▲출처=1949년 2월9일자 《조선일보》 2면
 

  허물어진 친일의 牙城
  민족정기는 날로 앙양 / 반민자에 ‘용수’ 帽 / 특위활동은 去益 활발화
 
1949년 2월 10일 《조선일보》 2면에 실린 ‘허물어진 친일의 아성’ 기사에 용수를 쓴 이광수 사진이 나온다.
  작(昨) 9일 특위 중앙사무국에서는 연일에 계속하여 오전 11시부터 정국은(鄭國殷) 조병상(曺秉相) 이성근(李聖根) 노덕술(盧德述) 최연(崔燕) 김연수(金연洙) 김태석(金泰錫) 이종형(李鍾형) 이광수(李光洙) 등을 서대문형무소에서 인치하여 취조를 거듭하고 있는데 특히 이날 주목을 끈 것은 이제까지 반민 혐의자들을 중앙사무국에 인치할 때에 그대로 수갑만 채웠던 것을 이날부터는 민족의 죄인으로 ‘용수’를 씌워서 데리고 왔었다. 남대문 중앙사무국 문전에 전기 반민자들이 ‘용수’를 쓰고 나타나자 지나가던 행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 잠경을 가지각색의 감개에 잠겨 쳐다들 보고 있었는데 하루하루 경과할수록 활발하여 가는 반민위원회의 활동은 마치 어둠에 잠기었던 이 나라 이 땅이 민족정기에 활짝 펴서 나는 감을 주게 하고 있다.(사진 上은 오늘부터 용수 쓴 반민 혐의자 이성근(前) 노덕술(後). 下는 취조받는 이광수)
 
 
  李光洙도 취조
 
  작 9일 반민특위에서 취조를 거듭하고 있는 반민 혐의자 중에는 국제신문 편집국장 정국은을 비롯하야 춘원 이광수도 끼여 있었으며 전기 양인은 문화인으로 제일 첫 번의 취조이니만큼 그의 진술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더욱이 춘원 이광수는 일제 때 젊은 학도들에 잊지 못할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니만치 그의 진술은 일반이 매우 주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1949년 2월10일자 《조선일보》 2면
 

  무서워 친일(親日)했소
  이광수 재차(再次)
  나의 고백서(告白書)

 
  지난 8일 자택에서 특위특경대에 체포된 춘원 이광수는 기보한 바와 같이 중앙사무국에서 서정욱 조사관 담당하에 취조를 받고 있거니와 이날 조사관의 “당신이 최근 나의 고백을 쓴 일이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자백서를 써보시오” 한데 대하여 소위 〈나의 고백 재판〉이라 할까, 친일의 변명을 하루 종일 썼었는데 그중 이광수가 대동아전쟁 발발 후에 자기 행동과 변명을 쓴 것이었다. 즉 “대동아전쟁이 발발되자 본인은 민족의 위기가 도래하였다는 느낌을 갖고 일부 인사라도 일제에 협의하는 태도를 보임이 오히려 민족의 목숨에 임박한 위기를 면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기왕 훼절(毁節)한 몸이니 이 경우에 나 자신을 희생시키겠다고 스스로 결심하야 일제에 협력하였소. 그리고 조선의 젊은 학도를 전장에 나가게 권유하러 지방으로 순방하며 강연한 것은 그 당시 대학 재학생들이 학병을 거절하면 노동 징용과 제적 퇴학 등 혹은 그 부모 형제들에게 화가 많았음으로 본인을 위하야 또는 민족을 위하야 나가라고 권유하였던 것이요”라고 말하며 결론으로는 “다만 민족 앞에 재판을 받을 뿐이요”라고 쓰며 붓을 놓았다 한다.
 
  ▲출처=1949년 2월11일자 《조선일보》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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