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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사상 크로스 〈10〉

한비자와 마키아벨리 5

‘사람이 먼저다’라는 修辭에 속지 마라

글 : 임건순  동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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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의 필수적 요소는 국가의 폭력 독점… 國法에는 例外 없다
⊙ 마키아벨리가 말한 사자와 여우, 한비자의 法과 術은 서로 통해
⊙ 西歐 문명의 위대함은 인간의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직시한 점
⊙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는 유교적 이념주의·이상주의에 대한 해독제 될 수 있을 것

임건순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 저서 《한비자, 법과 정치의 필연성에 대해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등
체코 프라하성 입구의 석상. 백성을 곤봉으로 때리고 칼로 찌르는 모습을 통해 국가 권력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진=배진영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손자(손무·孫武)가 오(吳)나라 왕 합려 앞에 서서 면접을 볼 때의 일이다. 손자는 오자서의 천거로 유세(遊說)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합려가 병법(兵法)과 용병(用兵)에 대해 설명을 하는 손자의 말을 끊고 이렇게 물었다.
 
  “그대의 병서 열세 편은 이미 내가 다 읽어본 바요. 한번 내 앞에서 시험 삼아 보여줄 수 있겠소?”
 
  이에 손자는 “네, 가능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합려가 “궁녀들을 가지고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을 건넨다. 손자는 이에 호기롭게 답했다. “가(可)하다”고.
 
  손자는 궁녀 180명을 얻어 그녀들을 둘로 나눠 우군(右軍)과 좌군(左軍) 이렇게 부대 둘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왕이 총애하는 후궁 두 사람을 각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 후 간단한 군령(軍令)을 병사가 된 궁녀들에게 주지시킨 다음 훈련을 시작했다. 기초적인 제식훈련(制式訓練)을 시작했던 것이다. 훈련이 시작되어 명령이 하달되는데도 궁녀들은 훈련을 따르기는커녕 웃기만 했다. 손자가 하는 제식훈련을 장난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자 손자가 훈련을 멈추고 지휘관 역할을 맡은 후궁 둘을 앞으로 불렀다. 그런 후 분명히 이야기를 한다.
 
  “약속이 분명하지 않고 명령을 거듭함이 익숙하지 않은 것은 장군인 나의 책임이다.”
 
  그러면서 다시 세 번이나 설명을 거듭하면서 이해시켰다.
 
  그 후 다시 북을 치면서 “좌로 가” “우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궁녀들은 여전히 웃기만 하고 명에 따르지 않았다. 거듭 손자의 명령을 무시하자, 보다 못한 손자가 도끼를 꺼내 들고 말했다.
 
 
  후궁의 목을 자른 손자
 
손자.
  “약속이 분명하지 못하고 명령을 거듭함이 익숙하지 못한 것은 장수인 나의 죄지만, 이미 분명히 설명을 거듭했는데도 따르지 않는 것은 지휘관과 병사들의 죄다. 그러니 나는 지휘관에게 책임을 묻겠다.”
 
  그러면서 지휘관 역할을 맡은 후궁 둘을 죽이려 했다. 그때 보고만 있던 오나라 왕 합려가 크게 놀라서 만류했다. 하지만 손자는 합려의 말을 물리쳐버렸다.
 
  “신(臣)은 이미 명령을 받아 장수가 됐습니다. 장수가 전쟁터에 나가 있을 적에는 군주의 명령도 받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바로 후궁 둘의 목을 베어서 던져버렸다. 궁녀들은 잔뜩 겁에 질렸다. 손자는 오나라 왕이 그다음으로 총애하는 후궁 둘을 앞으로 불러내 양 부대의 지휘관으로 삼고 나서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이제 궁녀들은 군기(軍紀)가 바짝 든 병사들처럼 움직였다. 정확하고 절도 있게 모두 구령(口令)대로 실수 없이 따랐다. 그때 손자가 오나라 왕에게 말했다.
 
  “군대가 이미 정비되었으니 한번 살펴보십시오. 왕께서 쓰고 싶은 대로 부릴 수 있을 겁니다. 비록 물과 불에 뛰어들게 하더라도 시키는 대로 움직일 것입니다.”
 
  순식간에 총애하는 후궁 둘을 잃은 오나라 왕 합려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노여움이 섞인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됐소. 장군의 용병술은 이제 확인했으니 그만 숙소로 돌아가서 쉬시오. 과인은 내려가서 볼 생각이 없소이다.”
 
  이에 손자가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
 
  “왕께서는 말로만 저의 병법을 좋아하실 뿐이지 실제로는 이 손자의 병법을 써서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 봅니다.”
 
  그러자 오나라 왕이 크게 깨달아 손자를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손자는 왜 굳이 철없는 후궁의 목을 쳤을까? 실제 군사훈련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단순히 시범케이스로 분위기를 잡아 내 말을 듣게 하려고? 병가(兵家)의 일이란 엄혹한 명령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군주에게 보여주려고? 그런 것 같지만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일 같고, 상징적인 의미의 해석이 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國法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손자가 활약하던 시대는 춘추(春秋)시대 말, 서서히 전국(戰國)시대의 여명이 동터오던 시기였다. 많은 나라가 영토국가화(領土國家化)를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단순한 씨족공동체(氏族共同體)나 성읍(城邑)국가가 아니라 어엿한 나라 꼴을 갖춰가던 동양적 근대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가 15~18세기 유럽과 유사하다는 것은 앞서 숱하게 이야기한 바이다. 당시의 유럽처럼 총력적 경쟁을 벌이던 이 시기, 많은 나라가 나름 근대적 국가를 만들어가던 때다.
 
  그걸 생각하면 손자의 퍼포먼스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만하고 또 상당히 상징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국법(國法)에는 예외(例外)가 없다. 국법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근대의 필수적 요소는 국가의 폭력 독점이다. 독점된 폭력의 힘을 국가가 법으로 행할 때 그것에서 예외가 없고 그것이 정말 무서운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일은 영토국가화의 필수적 과정이다.
 
  손자의 행위는 단순히 유세 중에 벌어진 해프닝과 퍼포먼스가 아니라 남방의 원시(原始)국가던 오나라가 어엿한 국가의 꼴을 갖춰가는 시기에 있은 상징적인 사건이라 생각한다. 근대국가 만들기, 영토국가 형성기의 과정이 아니더라도 군대란 것이 본래 그런 것 같다. 군법은 지엄하고 냉혹해야 한다. 늘 그렇게 집행할 수 있어야 군대는 언제든 싸울 수 있는 조직이 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군주가 자신의 군대와 함께 있으면서 자신이 병사들을 통솔해야 하는 경우라면 잔인하다는 명성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전적으로 필요하다. 군대란 그런 명성 없이는 단결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뿐더러 어떠한 군사작전도 감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니발의 경탄할 만한 행동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포함된다. 즉 그는 수많은 종족 출신이 뒤섞인 군대를 이끌고 멀리 이역(異域) 땅에서 전투를 치렀지만 운명의 힘이 좋을 때든 나쁠 때든 자신의 군대 내에서든 아니면 자신의 군대와 군주 사이에서든 그 어떤 불화도 없었다. 이는 그의 비인간적인 잔인함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잔인함은 그가 가진 다른 무한한 비르투(Virtu)들과 함께 그의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을 항상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군주론》 17장)
 
  경우에 따라 잔혹함이 필요한 것은 군대만일까?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장(場)에서도 잔인함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분명히 폭력의 힘을 긍정했다. 그에게 폭력이 없는 정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법가(法家)와 마키아벨리 모두 정치에서 폭력을 강조한 건 사실이다.
 
 
  폭력의 경제학
 
鄭나라 재상 자산.
  한비자가 존경한 정치가가 있었다. 바로 정(鄭)나라의 재상 자산(子産)이다. 법가의 태두(泰斗)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후임자 유길(遊吉)이란 사람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자네가 반드시 정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때 반드시 엄한 자세로 사람을 대하라. 대저 불의 형체가 사납게 보이므로 사람이 적게 타죽고 물의 형체는 만만하게 보이므로 사람이 많이 빠져 죽는다. 자네가 만만하게 보여서 물에 빠져 죽게 하지 마라.”
 
  엄한 법, 엄격한 법치(法治)만이 답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래야 나라에 질서가 잡혀 결국 사람들이 다칠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원래 법가는 엄형주의(嚴刑主義)를 천명한다. 그런데 단순한 엄형주의가 아니다. 무거운 벌을 내려야 결과적으로 공동체에 엄격한 벌의 집행이 줄어들고 폭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진 엄형주의다. 폭력을 엄하게 쓰고 그것의 무서움을 모두가 알게 해야 역설적(逆說的)으로 폭력의 총량(總量)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사자와 여우의 맥락도 마찬가지다. 그는 통치의 효과를 위해서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교활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폭력은 정치에서 필수 불가결하다는 말이다. 그래야 안정과 질서가 오고 폭력의 총량이 줄어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치철학자 셸던 월린(Sheldon Wolin)은 이런 마키아벨리 이론의 핵심을 ‘폭력의 경제학’이라고 명명(命名)했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보다 그들 자신의 파벌적 이익에 골몰하는 사익(私益) 집단들이 있다. 그럼 군주는 반드시 폭력을 써서 파괴하고 제재해야 한다. 비인간적일지라도 잔혹성을 발휘해서 안정과 질서를 해하는 집단이기주의자들과 이기적(利己的) 소영주(小領主)들을 처리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폭력과 수탈로 인한 피해를 보통의 백성들이 더 크게 감수해야 한다. 저들이 제어가 안 되면 백성들은 저들의 직접적 폭력만이 아니라 외세의 침탈이라는 폭력에까지 시달려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군주는 잔혹할 때는 잔혹해야 한다. 작은 폭력들을 써서 큰 폭력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다면 악(惡)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권장되어야 하는 행위이다. 군주가 행해야 할 미덕(美德)이고 덕목(德目)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에게도 백성에게도 그것이 유익하기 때문이다. ‘폭력의 경제학’에 눈떠야 한다.
 
 
  형벌로써 형벌을 없앤다
 
  ‘폭력의 경제학’은 한비자도 얘기했지만, 같은 법가 사상가인 상앙(商鞅)이 더욱 강도 높게 역설한 바가 있다.
 
  “형벌을 시행함에 있어서 가벼운 죄를 중형(重刑)에 처하거나 무거운 죄에 가벼운 형벌을 내리기도 하는데,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을 무겁게 처벌하면 가벼운 죄를 짓는 자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며, 무거운 죄를 범하는 사람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니 이를 일러 형벌로써 형벌을 제거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게 형벌이 제거되면 나랏일은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중죄를 범한 자에게 가벼운 형을 내리면 형벌은 계속 사용되어야 하며 사건은 더욱 많아지게 될 것이니 이를 일러 형벌로써 형벌을 부르는 것이라 하며 그러한 나라는 틀림없이 약해지고 말 것이다.” (《상군서(商君書)》 근령편)
 
  상앙은 이형거형(以刑去刑)을 말했다. ‘형벌로써 형벌을 없앤다’는 뜻이다. 무거운 형벌, 즉 적절한 잔혹함은 외려 폭력을 제거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이형치형(以刑致刑)이란 것도 말했다. 형벌이 형벌을 부르는 현상이다. 어설프게 벌을 집행하고 잔혹할 때 잔혹하지 않아 죄짓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어 국가권력의 법 집행이 늘어나는 현상이다. 잔혹함을 보일 때 보이지 않아서 외려 잔혹함을 불러오는 것이다. 상앙은 이형치형에서 이형거형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폭력의 경제학’ 논리다.
 
  더 나아가 상앙은 이렇게 말했다. “형벌을 엄하게 하는 것은 군주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며, 형벌을 가볍게 하는 것은 군주가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상앙이 보기에 ‘폭력의 경제학’을 알아야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라 할 수 있다.
 
  법가와 마키아벨리 둘 다 폭력의 경제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똑같은데 그 뒤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비슷한 시각이 있다. 인간이란 존재를 비슷하게 보았기에 폭력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한 것이다.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좋다”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럽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며 위험은 감수하려 하지 않으면서 이익에는 밝다. 당신이 그들을 잘 대접해줄 동안만 그들은 당신 편일 뿐이다.” (《군주론》 17장)
 
  “인간이란 두려움을 갖게 하는 사람보다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을 해치는 일에 덜 주저한다. 사랑은 고맙게 여겨야 할 의무감을 매개로 유지되는데 인간이란 비열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에는 언제든지 그런 의무감을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무서움으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다. 설령 군주가 사랑을 획득하지는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미움은 피할 수 있도록 자신을 두려움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군주론》 17장)
 
  인간은 이기적이다. 물질적 이익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이 본성인데 그 본성은 잘 제어가 안 된다. 이익을 위한 욕망이 인간을 움직이고 그런 추동성(推動性)에 의해 활동한다. 그래서 배신을 잘하고 은혜를 모른다. 이중적이고 위선적(僞善的)일 수 있으며 자신에게 이득을 준 사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든 해칠 수도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그들에게 두려움을 줘야 한다. 어쩔 수가 없다. 공포와 두려움을 주지 않으면 통치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두려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으면 좋겠지만 애초에 양립이 어렵다”고 했다. “두려움과 사랑을 모두 받는 것은 공존(共存)하기 힘든 것인데, 그렇다면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좋다”고 했다.
 
  군주는 두려움을 줘야 한다. 인간 본성이 저러하기 때문이다. 한비자가 바라보는 인간의 본성은 어떠할까. 아주 비슷하다. 욕망을 따라간다. 이기적이다. 교화(敎化)로는 한계가 있다. 역시나 두려움이 답이다.
 
 
  이기적 인간
 
한비자.
  한비자가 말했다.
 
  “장어는 뱀을 닮았고 누에는 큰 벌레를 닮았다. 사람이 뱀을 보면 깜짝 놀라고 큰 벌레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렇지만 아낙네가 누에를 손으로 줍고 어부는 장어를 움켜쥔다. 이득이 있는 곳에서는 싫어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모두 맹분(孟賁)이나 전저(專諸)처럼 용감해진다.”
 
  이 말은 인간은 이익을 향해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이고 그게 인간 본성이라는 것인데, 《한비자》 ‘난이(難二)편’에 나오는 얘기다. 같은 책 ‘간겁시신(姦劫弑臣)편’에서는 “이익을 좋아하고 해(害)를 싫어함은 모든 사람의 성향”이라고 말했다. 대저 안전하고 유리한 쪽으로 나아가며 위험하고 손해 보는 쪽을 피하는 것이 사람의 실정이다. 이렇게 인간은 이익을 향해간다. 자기 이익의 원리에 의해 추동되는 이기적인 동물이다.
 
  “흉년이 든 이듬해 봄에는 나이 어린 동생에게도 밥을 먹이지 않으나 풍년이 든 해의 가을에는 먼 손까지 반드시 먹이는데 이는 골육을 멀리하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사랑함이 아니라 많고 적은 실익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비자》 오두(五蠹)편)
 
  이익에 민감하고 이기적이다 보니 상황에 따라 더욱 다르게 행동하고 반응을 하는데, 사실 한비자가 보기에 사람들의 성정(性情)은 고정된 게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익을 추구하고 이기적이기에 물질적 조건의 변화와 경제 사정에 의해 크게 변하고 왔다 갔다 하는데 문제는 지금의 경제적 상황이다.
 
  “옛날에는 남자가 농사짓지 않아도 초목의 열매와 먹거리가 넉넉하였고 여자가 베를 짜지 않아도 새나 짐승들의 가죽이 옷을 해 입기에 넉넉하였다. 힘들여 일하지 않아도 생활이 넉넉하며 사람 수가 적고 물자가 남아 민(民)이 다투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후한 상을 내리지 않고 중벌을 쓰지 않아도 민이 저절로 다스려졌다. 지금은 한 사람에게 다섯 자식이 있어도 많지 않은데 자식도 다섯 자식을 가져 조부(祖父)가 아직 죽지 않으면 스물다섯 명의 손주가 된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 수는 많아지고 재화는 적어지며 힘써 일하더라도 생활이 야박하므로 민이 다투게 되었다.” (《한비자》 오두편)
 
  한비자는 자신이 살던 당대의 상황을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적 모순으로 설명했다. 과거에 비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지만 생산력은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니 가뜩이나 이익에 민감한 인간은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 수에 비해 재화(財貨)는 적으니 쟁투(爭鬪)를 벌이기 쉽다. 그래서 교화로는 답이 될 수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인(仁)이니 의(義)니 하면서 통치에서 유가(儒家)처럼 교화를 앞세우자? 그것은 통치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혼란과 무질서를 부추기는 것이기에.
 
 
  사랑과 폭력
 
중세에는 공개처형을 통해 백성들에게 국가 권력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일이 많았다.
  “부모의 사랑도 자식 가르치기에는 부족하며, 반드시 관청의 엄한 형벌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백성은 본래 사랑에는 기어오르고 위압에는 복종하기 때문이다.” (《한비자》 오두편)
 
  ‘사랑으로는 안 된다’면서 폭력에 기초한 위엄과 위세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비자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아버지의 갑절이나 되지만 아버지의 영(令)이 자식에게 행해지는 것은 어머니의 열 배나 된다. 하지만 아버지도 관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관리가 민에 대해 애정은 없지만 명령이 민에게 행해지는 것은 아버지의 만 배나 된다.”
 
  인간이란 게 자애(慈愛)보다는 폭력의 힘에 순응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국가 폭력에 기반한 통제와 감시가 없으면 당장 혼란이 일어나고 무질서가 바로잡히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두려움을 줘야 한다. 잔혹할 때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역설적으로 소비되는 폭력의 총량이 절약된다. 요샛말로 하면 잔혹해야 통치의 가성비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현실주의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는 인간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인간을 보는 현실주의는 정치적 현실주의와 사실주의의 토대이자 기초이다. 그리고 정치적 현실주의는 그들 정치사상의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주의가 그들 정치사상의 본질이라고 한정하기에는 뭔가 심심하다. 정치에서 현실주의와 사실주의는 그들의 정치사상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으로서 정치, 사회과학으로서 정치학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으로서 정치, 정치학이라면 현실주의를 당연히 전제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의 정치 행위가 두 개의 상충되는 요소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우선 사회는 정치를 필요로 한다. 공공(公共)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공선(公共善)을 추구하고 공적(公的) 질서를 창출해내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모여 살면 어쩔 수 없이 정치는 있어야 한다. 피할 수가 없다. 정치를 통해서 해야 할 일들이 반드시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회가 아닌 개개의 인간 역시 정치가 필요하다. 권력욕(權力慾)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추구하고 싶다, 타자(他者)를 지배하고 싶다, 내 의사대로 타자를 움직이고 싶고 내 생각을 공동체에 관철하고 싶다’. 이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다. 정치는 수단으로서 성격만이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성격도 있다. 적지 않은 경우 후자(後者)에 방점(傍點)이 찍히기 마련이다. 정치란 집단적 결정과 공공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이자 수단이지만, 인간이 원하거나 쉽게 논하는 정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기 쉽다. 이는 목적으로서의 정치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정치에서 부패와 협잡, 폭력, 악, 비리…. 현실로서의 정치는 반드시 그런 것들이 창궐하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그러니 통치함에 있어서 군주는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폭력으로서 그런 어두움과 그림자를 제어해가고 관리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사자와 여우를, 한비자는 법(法)과 술(術)을 말한 것이다.
 
 
  사자와 여우, 法과 術
 
마키아벨리.
  “당신께서는 두 종류의 싸움, 즉 하나는 법을 통한 싸움과 다른 하나는 힘으로 하는 싸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 번째 방법은 인간에게 합당한 것이고 두 번째는 짐승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첫 번째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두 번째 방법에 의지하는 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모름지기 군주는 짐승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 두 가지 모두를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군주론》 18장)
 
  “군주는 짐승의 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여우와 사자를 선택적으로 따라야 한다. 사자는 함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어렵고 여우는 늑대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정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여우가 될 필요가 있고 늑대를 혼내주기 위해서는 사자가 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사자의 방법에만 의존하는 인간은 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군주론》 18장)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여우의 자세를 보면 한비자의 술(術)이라는 것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여우 같은 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하면서 군주라면 능숙한 기만자이자 위선자가 될 수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현명한 통치자가 되고 자신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했다. 한비자의 술은 무엇인가. 공개성·공포성(公布性)을 띠는 법과 달리 숨겨놓는 것이다. 은닉하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누구에게나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궁중사회라는 공간에서 신하들과 권력투쟁을 벌일 때에만 써먹어야 하는 어둠의 기술이자 테크닉이다. 한비자는 그 술이란 것으로 신하들을 제어하고 빈틈없이 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둠 속에서 신하들을 보는 CCTV라고나 할까. 단순히 폭력을 써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법과 술이라는 두 개의 권력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한비자는 말했다.
 
 
  도덕과 윤리
 
  마키아벨리도 사자와 여우를 말하면서 여우를 가지고 당부한 것들을 보면 한비자의 술과 정확히 대응함을 알 수 있다. 어쩔 수 없다. 교화가 아니라 힘과 잔혹함 때론 교활함이라는 다른 방식의 힘의 발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수에 비유하며 힘과 잔혹성을 말했다고 해서 그 둘을 비(非)도덕적·반(反)윤리적 인물과 사상가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들은 도덕과 윤리 그 자체를 부정한 바는 없다. 일상에서의 인간의 행위가 도덕과 윤리에 바탕을 둔 채 행해지는 것을 부정한 적도 없다. 다만 위정자에게 그리고 특수한 상황과 조건에서는 기존의 상식과 조건을 벗어나는 행동이 필요하고, 그런 행동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행해야 함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폭력은 어떤 대목적하에 종속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어디까지나 정치적 지위의 안정과 폭력의 절약, 국가의 생존과 백성의 보호라는 목적을 위해서 발휘하라고 했다. 그들이 폭력을 말했다고 해서 비도덕적·반도덕적 인물로 낙인찍거나 혹은 결과, 그것도 군주를 위한 사적(私的) 결과를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어떤 조건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지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修辭의 뿌리
 
  조선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다 보니 조선 잔재의 핵심인 유교(儒敎)라는 유령은 우리의 일상과 학문의 세계, 그리고 정치의 세계를 지배한다. 정치인을 정책과 제도로 평가하기보다는 이미지와 만들어진 인격으로 평가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의 공적(公的) 성취와 업적을 사적 인간성을 시비 삼아 폄하하거나 저평가하는 것도 그렇다.
 
  비현실적인 인본주의(人本主義), 특히 정치인의 득표와 선전을 위한 인본주의적 수사(修辭) 역시 유교에 근원을 둔 것이다. 정치에서 이념에 경도된 모습이나 지나치게 도덕에 바탕을 둔 이상주의들도 유교에서 자유롭지 않다.
 
  권위주의는 권위에 해롭고 민족주의는 민족에게 이롭지 않듯이, 인본주의가 인간에 이로운 거 같지는 않다. 한국식 인본주의는 유교, 특히 유교의 성선론(性善論)에서 기원했다.
 
  하지만 ‘사람이 먼저다’ ‘사람 사는 세상’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식의 인본주의 수사를 활용한 정치구호는 본질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잘살기 위해서는 어떤 물질적 토대와 경제적 여건이 만들어져야 하고, 사회적 약자(弱者)들이 겪는 어떤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수사를 애용하는 당사자들이 던지고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구체적 고민과 성실한 고민은 없다. 그저 감성에나 호소하는 기만적 수사일 뿐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개선하는 힘이 나올 수 있겠는가. 정치는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만들어가자는 것인데, 인본주의적 슬로건이 넘치는 곳에서 우리는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사실 알 수 없다. 하지만 인본주의적 아름다운 말이기에 반대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로운 정치가 단순한 인본주의, 인본주의적 수사에서 나올 수 있을까.
 
  현실의 인간을 보아야 한다. 그것도 인간의 본성, 인간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마주하고 홉스와 마키아벨리, 한비자처럼 아예 인간의 어두운 모습과 그림자를 제대로 직시한 채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정치가 인간을 위할 수 있지 않을까?
 
  서구(西歐) 문명의 위대함은 다른 것들도 있지만 우리보다 인간의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보았고 느꼈고 자신들 안에 내재(內在)된 악을 절절히 깨달았다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비롯해 그들 문명의 위대한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고, 진실로 인간을 위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성선설에 기반을 둔 아름다운 말들의 나열보다는 사실과 현실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있는 정치사상과 정치인이 필요하다.
 
 
  退行을 부르는 이념주의
 
  이념주의(理念主義)와 이상주의도 문제다. 현실주의와 사실주의 없는 한국 정치의 병든 모습, 특히 진보 쪽 정치의 병리 상태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그런 모습이 기승을 부릴 수 있는데 이념에 경도된 모습과 도덕에 바탕을 둔 이상주의는 비현실적이라 위험하다. 도그마와 교조주의(敎條主義)로 빠지기 쉽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단순히 교조주의로만 변하는 게 아니다. 급진주의로 쏠리기도 쉽다. 아이러니한 것인지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념주의와 이상주의는 급진주의적 모습을 보이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현실을 정체(停滯)시키는 데 큰 힘을 보탠다. 기득권 구조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게 하고 때로는 퇴행(退行)을 불러오기도 한다.
 
  정확히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단계적 해결책을 내놓거나 사안별 장단점을 사실 그대로 담담하고 차분하게 국민들에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깃발만 들고 구호와 명분(名分)만 소리 높여 주장한다고 해서 대체 결과적으로 무엇이 변하고 어떻게 약자들의 삶이 개선이 되겠는가?
 
  알고 보면 지독히 보수적이고 퇴행적인 정치를 낳는 게 현실주의와 거리가 먼 한국 정치에서 적지 않게 보아왔던 이상주의와 이념주의이다. 더 문제는 지나치게 도덕에 바탕을 둔 이상주의적 정치는 특히 민주주의와 헌법정신과 모순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워도 상대의 존재를 분명히 인정하고 이견(異見)을 좁혀가고 타협을 하려는 자세가 민주주의이고 헌법이 말하는 정치의 기본 정신이다.
 
  그런 자세가 경직된 도덕에 바탕을 둔 이상주의에서 나올 수 있을까. 외려 상대를 적폐(積弊)와 절대악(絶對惡)으로 규정하고 척결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이념주의와 이상주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그런 폐단이 생긴다.
 
  물론 정치는 이념이 있어야 한다. 특히 정당이라면 이념을 가져야 한다. 이념 없는 정당은 단순히 패거리와 파당(派黨)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상을 품어야 한다. 공동체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교조주의와 급진주의를 늘 경계해야 하고 이념과 이상을 가지면서도 사실을 스스로 직시하고 현실에 대한 타인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국제 정세를 늘 살피며 국내 정세에서는 현실의 다양한 갈등구조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자세도 가져야 한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 옳다.
 
 
  정치적 사실주의가 답이다
 
  그래서 한비자식, 마키아벨리식의 현실주의와 사실주의가 한국 정치의 현실에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는데, 우리 현실에 어떤 해독제(解毒藥)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상주의, 이념주의, 도덕주의, 정치의 본질을 흐리는 인본주의에 오염된 정치 현실에 약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의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자. 다원화된 사회적 갈등의 전선(戰線)을 제대로 보자. 밑바닥 사람들과 서민들 삶의 문제와 그 문제를 만드는 문제까지 살펴보자. 제발 무턱대고 누구 편인지 어느 진영(陣營)인지만 묻지 말자. 사회갈등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해버리고, 단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발본색원부터 말하고 처벌만능주의와 형사적 접근으로 시작해 법을 만들려 하지 말자. 이제는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정치문화의 바탕이 되어 우리의 정치 실력과 수준을 높여 저런 병리적(病理的) 현상을 줄여나가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가 옳다. 정치적 사실주의와 현실주의가 답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적지 않게 병을 억제하고 조금이나마 건강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괜찮은 치료제는 된다고 본다. 듣기에 아름답기만 한 인본주의적 수사에 혹하지 말자. 급진주의와 교조주의에 끌려가는 이상주의와 이념주의를 경계하자. 이것이 한비자와 마키아벨리가 오면 우리에게 해줄 조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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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진한    (2020-04-18) 찬성 : 1   반대 : 2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가 옳음.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최고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원)이 승계.한국의 Royal대는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성대 다음 국제관습법상 학벌이 높고 좋은 예우 Royal대학. http://blog.daum.net/macmaca/2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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