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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39〉 에밀리 디킨슨의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자기 그릇만큼 담는 우리 사랑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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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긍정·타인긍정의 시, 정호승의 ‘산산조각’
⊙ 달동네 가난한 부부 이야기, 박라연의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고독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에밀리 디킨슨(강은교 옮김)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That Love is all there is
  Emily Dickinson
 
  That Love is all there is,
  Is all we know of Love;
  It is enough, the freight should be
  Proportioned to the groove.
 
 
시인 강은교가 국내 번역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가을에 읽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1830~86)의 시는 쓸쓸하다. 그녀만큼 치열하게 고독을 택한 시인이 없다고 할 정도다. 24세 무렵에는 가족들에게 “나에게 무슨 큰일이 생기지 않는 한 절대로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나마 밝은 시다. 그녀에게 사랑은 자신이 경험한 세상의 전부다. 그 세상은 자기 그릇만큼의 크기다. 시인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 그릇만으로 충분하다. 남의 그릇, 남의 사랑을 흉내 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그릇에 담긴 사랑에 만족할 뿐이다.
 
  다만 타인이 볼 때 디킨슨의 사랑은 부족한 사랑, 미약(微弱)한 사랑일지 모른다. 혹자는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를 일. 하지만 타인의 주장은 내 것이 아니다. 세상은 절대적 사고,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하지만 사랑은 흑백논리가 아니다. 완벽하지 않다고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할 순 없다. 사랑은 정답이 없으니까.
 
  에밀리 디킨슨의 또 다른 시 ‘널빤지에서 널빤지로’를 보자. 널빤지 위를 걷는 그녀의 걸음은 위태롭다. 머리맡에는 별이, 발 밑엔 바다가 있다. 자칫 천 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칠지 모른다. 디킨슨은 이렇게 읊조린다. ‘난 몰랐네 ‐ 다음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는지 ‐’라고. 스스로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번 내디딘 걸음을 중도에 멈출 수 없다. 가던 길을 되돌릴 수 없다.
 
  디킨슨의 국내 번역시집을 낸 강은교 시인에 따르면, 디킨슨은 기혼자인 목사와 불안한 사랑을 했다고 한다. 그 사랑은 결국 실패했고, 실연의 불꽃은 곧 시로 폭발되었다.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난 걸었네.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로 머리맡에는 별
  발 밑엔 바다가 있는 것같이.
 
  난 몰랐네 — 다음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는지 —
  어떤 이는 경험이라고 말하지만
  도무지 불안한 내 걸음걸이.
 
  -디킨슨의 시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전문

 
  미국 정신과 의사인 토머스 해리스(Thomas Harris)는 삶의 자세에 대한 인간 유형을 네 가지로 정의했다. 첫 번째 유형은 자기부정·타인긍정(I’m Not OK, You’re OK) 타입이다. 두 번째 유형은 자기부정·타인부정(I’m Not OK, You’re Not OK), 세 번째 유형은 자기긍정·타인부정(I’m OK, You’re Not OK), 네 번째 유형은 자기긍정·타인긍정(I’m OK, You’re OK)이다. 해리스는 네 번째 유형의 인간이 가장 유능하고 건강하게 인생을 살아간다고 분석했다. 에밀리 디킨슨은 어떤 유형일까.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형 사이가 아닐까.
 
 
  완벽한 긍정의 詩, 적자생존의 본능 詩
 

  네 번째 유형의 시인이 있다. 정호승 시인은 자기긍정·타인긍정의 시를 쓴다. 그의 대표작 ‘산산조각’만큼 건강한 시도 없다. 화자는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네팔의 룸비니를 다녀왔다.
 
  기념으로 부처상(흙으로 빚은)을 샀다. 그 귀한 부처상을 어느 날 떨어뜨리고 말았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아까운 마음에 서랍에서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접착제를 덕지덕지 바른 부처님이,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시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라고.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정호승의 시 ‘산산조각’ 전문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에밀리 디킨슨 박물관. 그녀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꾸몄다.
  김남권 시인의 신작 시집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에 실린 ‘늑대의 눈물’을 읽고 한동안 멍한 느낌을 받았다. 이 시는 사랑이라는 관계망 너머의 본능을 응시한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외통수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을 다루는 시다. 무척이나 감동을 준다.
 
  수컷 늑대가 죽자 암컷은 배 속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무리를 떠난다. 하루 100리가 넘는 숲을 가로질러 며칠 만에 1000km를 이동한다. 은신처에서 새끼를 낳자 스라소니가 찾아온다. 새끼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스라소니에게도 늑대처럼 다섯 마리의 새끼가 굶주리고 있다. 늑대와 스라소니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들 새끼들 역시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없다.
 
  김남권 시인은 ‘대통령의 서재’ 추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시문학》으로 등장해 시집과 동시집을 포함해 모두 9권이나 펴낼 정도로 시력이 활활 타는 시인이다.
 
  수컷 우두머리가 죽었다
  암 늑대는 다른 무리의 늑대를 피해 가능한 멀리 떠나야 한다
  하루 백 리가 넘는 숲을 가로질러
  오스트리아를 지나 몽블랑까지 며칠 만에 천 킬로를 이동했다
  큰수염수리가 따라오는 폭설 한가운데를
  죽을힘을 다해 뛰어온 암 늑대는
  따뜻한 은신처를 찾아 새끼를 낳았다
  스라소니 한 마리가 다가왔다
  그도 늑대처럼 다섯 마리의 새끼가
  작은 굴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을 포기하면 새끼들이 굶어야 한다
  어미는 새끼들이 아, 하고 입 벌린 채
  굶고 있을 때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알프스의 밤이 깊어 가고 늑대 새끼도 스라소니 새끼도
  어미의 귀가를 기다리며 속절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암 늑대는 공중 깊숙한 곳의 달을 쳐다보며
  숲의 정령을 포기한 채
  마른 울음을 울어야 한다
 
  -김남권의 시 ‘늑대의 눈물’ 전문

 
 
  평강공주의 사랑과 바람둥이의 작업 공식
 
시인 박라연의 첫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박라연의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는 가난한 신혼부부의 이야기다. 시적 배경인 ‘서울의 산 일번지’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판자촌이 산을 이루는 달동네가 틀림없다. 가진 재산이 없어도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는 마냥 행복하다. 밤이면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비에 젖어 울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박라연의 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전문

 
  훗날 ‘서울에 사는…’에 대해 박라연 시인은 결혼 후 10년이 지나서 스물일곱 살 신혼 때를 떠올리며 쓴 시라고 고백했다. 당시 시인은 쌀이랑 연탄만 안 떨어지면 족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서른 중반이 넘어 시에 눈을 떠서 ‘바보 온달’ 설화를 소재로 시를 쓸 무렵 서울 정릉에 사는 한 시인의 집을 찾아갔다. 그 집에서 느꼈던 따스한 영감으로 쓴 시가 ‘서울에…’였다.
 
왼쪽부터 정호승 시인의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김남권 시집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 박건삼 시집 《세 가지 그리운 풍경》.
  박건삼 시인의 시집 《세 가지 그리운 풍경》에 실린 ‘작업의 공식’은 바람둥이의 사랑 이야기다. 화자는 사랑하는 이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한 뼘 거리를 두되 바람이 잘 통하게끔 마음을 활짝 열어두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시인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3연이 압권이다. 날이 저물어 노을이 깔리면 굳이 내일 만나자는 말을 안 해도 눈빛으로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이는 굳이 말을 안 해도 이심전심이요, 염화미소, 염화시중이니까….
 
  사랑하면
  할수록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 것.
 
  청솔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한 뼘 거리를 두되
  마음은 활짝 열어두고
  가끔씩
  사랑한다는 말을 잊지 말 것.
 
  서녘에 해 지듯
  붉은 그리움을 남긴 채
  내일 만나자는 약속 없어도
  눈빛으로 알아차릴 것.
 
  -박건삼의 시 ‘작업의 공식’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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