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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이슈 점검

종일품 내관(내시)이 조성한 것으로 드러난 ‘城樂園’

이조판서 심상응 조성은 사실과 달라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johh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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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락원 조성 내관의 책, 이토 히로부미 하사품
⊙ 명성황후, 一片丹忠 글씨 황윤명에게 하사
⊙ ‘성락원’ 명칭은 역사적 근거 없어 변경 필요
  최근 문화계 핫이슈로 ‘성락원(城樂園) 명승지’ 논란이 있다.
 
  명승 제35호 성락원(서울 성북구 성북동 2-22번지 등 18필지)은 1992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재분류됐다. 명승으로 분류된 이유는 이렇다.
 
  〈조선 철종(재위 1849~1861)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던 것을 의친왕 이강이 별궁으로 사용하였던 곳으로 별서(別墅)정원 중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 민가정원으로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임.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하여 조성된 별서정원으로 정자, 연못, 계류, 석정, 석상, 괴석 등 다양한 전통양식의 정원 요소들이 주변 자연숲과 잘 조화되어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임.〉
 
  성락원이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지난 6월 시민 개방을 결정하고 나서다. “한국 전통정원 ‘성락원’ 200년 만에 문 열렸다”며 많은 언론이 이 사실을 보도했다.
 
  바로 이즈음부터 문화재 관계자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문제 제기가 시작됐다.
 
  ▲성락원은 조선 순조 때 황지사의 별장으로 조성되었으며,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으로 알려져 왔으나 황지사, 심상응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없다.
 
  ▲성락원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문헌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1961년 현대식 종합공원 시범 관광지역 조성 추진 과정에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성락원은 1921년 조선총독부 발행 1/10,000 지형도에 ‘의친왕 이강공(公) 별저’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친왕 별저로 쓰인 것은 맞으나 1927년 화재로 ‘이강공 별저’ 상당 부분이 전소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건물과 연관이 없다.
 
  이런 사실을 문화재청 등 관계 기관이 인정하면서, 논쟁은 더욱 뜨거워졌다. 이를 근거로 성락원 명승지 지정을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 일부 문화재 인사의 주장이다.
 
  우선 ‘성락원’이라는 명칭 자체가 역사성이 없다는 것은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1961년 6월 2일 《동아일보》는 성락원이 시작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성북동 산(山) 5번지 깊숙한 골짜구니, 의친왕 별장이었던 고옥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시범관광지역 건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3만 평의 산등성이에 ‘드라이브 코스’가 개미집처럼 닦여졌고 그 중심부에 550평의 연못과 70평의 수각정(지금의 송석정)이 이미 준공되어 마지막 단장을 하느라 분주하다. 개인 땅인 이 3만 평의 산등성이 밖에는 7만여 평의 존치보안림이 병풍처럼 둘려 있어 총 부지는 10만여 평 정도다. 이 안에 성락원이란 이름의 종합적인 관광시설을 갖춘 현대식 공원을 만든다는 것이다. 공사는 7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산마루턱을 잇는 도로를 닦는 데 시간이 걸렸다. 중심부에 연못을 파고 그 옆에 지은 수각정은 고목을 베지 않고 마루에서 지붕을 뚫은 채 그대로 세워둔 것이 특색이 되어 있다. (중략) 당국의 협조 없이 혼자 힘으로 이러한 계획을 짜고 공사를 진행시켜 왔다는 심상준씨는 외인관광객 특히 유엔군의 휴가 장병을 유치하자는 것이 이 관광지 건설의 큰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대단한’ 내시가 조성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성락원. 사진=뉴시스
  성락원이라는 이름이 개인의 관광 사업 용도로 작명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서, “성락원의 명승지 자격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드러나면서 반전이 시작됐다. 성락원을 조성한 사람이 고종의 내시(內侍)였다는 것이다.
 
  처음 ‘성락원은 내시가 조성했다’는 학술적 조사 결과가 나왔을 때, ‘내시가 지은 별장이 가치가 있느냐’는 비아냥이 거침없이 나왔다.
 
  지난 10월 9일 인사동 사무실에서 만난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일련의 논란을 통해 성락원의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오히려 입증됐다고 주장했다.
 
  ― 이조판서 별장이 아니라, 내관의 별장이라는데.
 
  “그냥 내시가 아니죠. ‘대단한 내시’가 조성한 별장입니다. 오히려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확인된 것이죠.”
 
  ‘대단한 내시’는 누구인가. 오히려 그 내시가 터를 잡아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역사적 문헌을 근거로 ‘대단한 내시’의 행적을 쫓았다.
 
  인터넷 ‘국립중앙도서관 국가자료종합목록(www.nl.go.kr)’에서, 한글로 ‘난운관법첩’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국가자료종합목록
  - 표제사항 : 난雲觀法帖
  - 발행사항 : [刊寫年未詳]
  - 형태사항 : 1冊(缺本) 29.0 × 21.0 cm
  - 분류기호 : 듀이십진분류법-〉 741.32
  - 주제명 : 중국
  - ISBN : N〉
 
  3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어찌된 이유인지 ‘斕雲觀法帖’이라고 제대로 적지 않고, ‘난雲觀法帖’으로 되어 있다. 간사년미상(刊寫年未詳)이라 하여,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주제명을 볼 때 ‘중국’ 책으로 분류되어 있다.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실소(失笑)를 금치 못하는 결과다”라고 이야기한다. “한국 책을 중국 책으로 분류해놓았다”는 것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가치 있는 글씨를 모은 《난운관법첩(斕雲觀法帖)》을 간행한 사람은 조선 고종 당시 내관(내시)인 황윤명(黃允明)이다.
 
  황윤명(1848~?)은 평해(平海) 출신으로 호는 춘파(春播), 해생(海生)이며, 초명(初名)은 황종우(黃鐘右)였으나 이후 윤명(允明), 수연(壽延)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이름을 하사한 사람은 고종이다. 그만큼 신임이 깊었다.
 
  20세에 내관이 되어, 30세에 종일품(從一品) 명례궁(明禮宮·덕수궁의 옛 이름) 대차지(大次知·재정책임자)를 역임했다.
 
 
  고종의 이토 히로부미 하사품
 
《난운관법첩》의 추사 글씨와 낙관. 사진=성락원 토론회 자료집
  황윤명이 어떤 인물인지 평가할 때, 《난운관법첩》의 가치를 빼놓을 수 없다. 황윤명은 일찍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적들을 모아 《난운관법첩》 3책을 목판으로 간행했다. 광무 2년(1898) 1월 29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알현할 때 호피, 은사초합, 단선, 세렴 등과 함께 하사한 물건 중의 하나가 《난운관법첩》이다. 왕실에서 외빈에게 하사하는 선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황윤명의 위상과 함께 이 책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여기에는 중국 명가들의 글씨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의 글씨도 여러 폭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책을 간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당대 유명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황윤명은 서예에서도 이름나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씨는 오세창이 엮은 서첩 《근묵(槿墨)》과 서화가 사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도 등장한다.
 
  1870년대 후반 강위(姜瑋)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문인(文人)들의 모임인 육교시사(六橋詩社)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문인으로서의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찍이 금강산을 여행한 후 《해악유기(海嶽遊記)》를 지었는데, 이는 1877년 간행되었고, 1909년에는 《와유금강(臥遊金剛)》이란 이름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그의 양자 안태영은 《춘파유고(春坡遺稿)》란 이름으로 1938년에 황윤명의 글을 정리했다.
 
 
  성락원을 조성했다는 증거들
 
영벽지 바위글씨 탁본. 《춘파유고》시문이 새겨 있다.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춘파유고》는 성락원을 황윤명이 조성했다는 결정적 증거를 담고 있다. 성락원에는 다음과 같은 바위글씨가 있다.
 
  〈영벽지(影碧池) 해생(海生). 온 시냇물 모아 흐리지 못하게 막고서/ 연못 만들어 푸른 난간 둘렀어라/ 나는 이 연못 생긴 후로/ 강호 유람 발길 뜸해졌네.(百泉會不流 爲沼碧闌頭 自吾得此水 少作江湖遊)〉
 
  해생은 평해 출신 황윤명의 호이다. 《춘파유고》에는 바위글씨와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해당 시가 황윤명이 아닌 다른 작가의 시문이라는 의문도 있었으나, 확인 결과 중국고사에도 등장하지 않는 황윤명의 창작 시로 결론이 났다.
 
  나아가 좀 더 직접적인 문헌 근거까지 있다.
 
  〈북쪽 시내로 방향을 돌려 시냇가로 난 오솔길을 따라 1리쯤 들어갔다. 길이 구불구불 돌고 아름다운 나무가 무더기로 빽빽하며 기이한 새와 꽃들이 세속 사람의 이목을 번쩍 뜨이고 기쁘게 하였다. (중략) 나는 듯한 정자가 걸음을 따라 모습을 드러내니 바로 황춘파(黃春坡, 황윤명)의 별서이다.〉(《총쇄록》)
 
  〈나는 혜화문에서 황춘파의 계정(溪亭)으로 들어갔다. 춘파는 몇 년간 병환으로 인해 조제를 불러다 머무르게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나를 보고는 몹시 기뻐했다. 안부를 묻는 동안 몇 시간이 지났기에 억지로 작별인사를 나누고 별장을 나섰다.(《총쇄록》)
 
 
  명성황후, 一片丹忠 글씨 하사
 
  20세에 내관이 되어, 30세에 종일품에 오른 비결은 무엇인가. 그 비결을 알게 되면, 성락원의 문화재적 가치가 더 분명해진다. 갑신정변(1884) 당시 명성황후가 피란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명성황후는 갑신정변 이후 3명에게 〈일편단충(一片丹忠)〉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중 한 명이 황윤명이다. 더불어 김규복, 김규석도 글을 받았다. 이 유묵은 총 5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폭에 한 자씩 대자로 ‘一片丹忠’을 적고 마지막 면에 여러 사연이 적힌 발문이 있다. 바로 이 발문에 명성황후가 성락원으로 피신했다는 근거가 기록돼 있다.
 
  〈다음 날 아침밥을 먹으니 포 소리가 하늘에서 일어나고 천지가 어둑어둑 막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중략) 어가를 호위해 혜화문으로 나가 성북동 황윤명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놀라움과 기쁨을 이기지 못해 종손 김응현 및 사인 권억과 함께 쌍류동으로 따라갔다. 태후, 왕비, 세자께서 벌써 도착해 계셨다.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일편단충〉 김규복 발문)
 
  황윤명에게 〈일편단충〉이 전달된 과정도 기록돼 있다.
 
  〈중전마마께서 친히 ‘일편단충’ 네 글자 3본을 써서 하사하시며 각 한 본씩 받고, 한 본은 황윤명에게 전해주라 그의 문병을 하고 오라 하셨다.〉(〈일편단충〉 김규복 발문)
 
  이러한 근거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부분에서 현재 논쟁이 있다.
 
  1887년 고종이 직접 기록한 ‘북묘비’ 때문이다. 북묘는 관우의 사당으로 1883년 종로구 명륜동에 지어졌다. 북묘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갑신년 겨울에 또 역란(갑신정변)이 일어나 나(고종)는 ‘전궁의 상하’와 함께 관왕의 사당(북묘)으로 피신했다.〉
 
  ‘전궁의 상하’를 근거로, 명성황후 역시 북묘로 피신했다는 주장이 있다. ‘전궁의 상하’에 명성황후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북묘비가 공식 기록이기에 〈일편단충 발문〉보다 공신력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나친 확대해석이고, 〈일편단충〉이 사실적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고, 명성황후가 자신의 친필 글씨를 황윤명에게 보낸 이유 등을 생각할 때 성락원으로 피신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성락원’은 기이한 작명
 
  여러 논쟁이 있지만, 원래 이곳의 이름이 성락원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황윤명의 글을 모아 놓은 《춘파유고》에는 쌍괴당, 쌍괴실, 쌍괴누옥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락원이라는 이름 자체가 역사성도 없으며, 놀이공원이라는 인상마저 든다. 지난 8월 성락원 토론회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장의 주장은 이렇다.
 
  〈성락원이란 명칭은 아무런 근거가 없고 기이한 작명이므로 수정되어야 한다. 조선시대 정원의 작명법과는 무관하고, 한국어도 아니고 한문도 아닌 이상한 말이다. 후대에 나온 이강공 별저 역시 마찬가지다. 대안으로 황윤명 문집에서 지칭한 쌍괴당, 쌍괴누옥, 쌍괴실, 삼가루를 비롯한 여러 가지 명칭이 있으므로 그중에서 선정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한다.〉
 
 
  내시가 조성해, 더 가보고 싶어져
 
  해당 유적은 황윤명에 의해 만들어져서, 그 이후 여러 변화 과정을 거친다.
 
  황윤명의 별서 경영 당시 조선시대에 조성된 정원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으나, 의친왕 소유 이후 건물의 형태가 변화하였다. 또 1954년 심상준씨의 성락원 소유 당시 수각정(송석정)을 조성하였다. 다만 지금의 건물이 의친왕이 기거했던 건물은 아니다. 화재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20일 오후 12시경 시외 숭인면 성북리 이강공 뎐하(전하) 별저에 불이 나서 오전 1시까지 안채가 전소하고 부속 건물 한 채가 반소하였는데 원인은 온돌불이 너무 지나친 것이라 하며 손해는 건물 이천원에 가구 백원 합이 이천백원이라더라.〉(《동아일보》 1927년 12월23일자)
 
  그렇다고 현재 남아 있는 성락원 건물은 역사성이 없나.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이러한 의문에 이렇게 반문한다.
 
  “지금 남아 있는 건축 문화재 가운데, 옛날 그대로인 것이 어디 있나요. 그 장소가 가지는 역사성이 중요한 것이죠.”
 
  요즈음은 역사가 가지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그곳을 찾아, 과거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중요하다. “대단한 고종의 내시가 조성한 곳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오히려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 모은다”는 반론이다. 그 자체로 문화재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여러 문헌이 이곳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기록하고 있다. 성북동 일원은 과거 북저동이라 불렸다.
 
  〈북저동은 혜화문 밖 북쪽에 있다. 골짜기 가운데 복숭아나무를 벌여 심었고 봄철에 복사꽃이 한창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나가 놀며 구경한다.〉(《동국여지비고》 북저동 기록)
 
  〈선잠단에서 백여보 정도 가자 마을 사람들이 냇물에 다리를 놓았는데 다리 아래로 여러 물들이 모여들어 물소리가 흉흉했다. 다리 남쪽에는 골짜기가 있어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복사꽃이 무더기로 비단장막을 이루고 양쪽 언덕이 붉게 물들어 마음으로 기이하다고 하였다.〉(《유북저동기》 북저동 기록)
 
  이렇듯 오래전부터 이곳의 자연적 가치를 인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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