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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예술가 6인의 추모글에서 나타난 安益泰의 愛國과 克日

“그는 음악으로 일본을 정복했고, 한국을 誇示했다”(작곡가 박태현)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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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채보한 우리 민요 100여 곡을 안익태에게 선사”(작곡가 김동진)
⊙ “日人 학생들을 압도하여 앞장설 수 있는 방법 불철주야 연구”(성악가 정훈모)
⊙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의 연주에 앞서 ‘애국가’를 우선 들려줘”(시인 박태진)
《음악생활》 1965년 12월 창간호에 실린 안익태 특집 기사.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1906~1965)의 친일 행적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들어 문화계 논란으로 점화되고 있다. 심지어 안익태의 애국가를 더는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안익태의 친(親)나치 행적을 추적한 책까지 나온 상태다.
 
  그러나 안익태 선생의 애국심과 극일적(克日的) 성품을 알 수 있는 연구와 증언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음악평론가 김승열씨는 안익태 선생 서거 직후 발행된 음악잡지 《음악생활》에 실린 6편의 특집 추모글을 발굴해 본지에 알려왔다.
 
  1965년 《음악생활》 창간호(12월호)에 실린 추모글에는 안익태 생전 개인적 교분을 나눈 예술가 6인의 증언이 담겨 있다. 작곡가 김동진(金東振·1913~2006)을 필두로 서울대 음대 교수를 지낸 소프라노 정훈모(鄭勳謨·1909~1978), 숙명여대 교수를 지낸 작곡가 박태현(朴泰鉉·1907~1993), 시인 겸 외교관이던 박태진(朴泰鎭·1921~2006), 서울대 음대 교수를 지낸 피아니스트 김원복(金元福·1908~2002), 음악평론가 이성삼(李成三·1914~1987) 등이다.
 
  음악평론가 김승열씨는 “6인 모두가 안익태의 생전 애국심과 일본을 이기려 했던 극일적 성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며 “저마다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크나큰 국가적 손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익태와 평소 잘 아는 사이던 6인의 증언은 기존에 소개되지 않은 내용으로서 안익태 연구에 새로운 사료(史料)가 될 것이다.
 
  안익태는 1965년 9월 1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사후(死後) 국내에 ‘고(故) 안익태 선생 추모회’(회장 이효상)가 결성되었고, 추모 열기도 뜨거웠다. 또 49일재를 맞아 그해 11월 4일 오후 7시 서울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추모회가 마련됐다.
 
  이날 추모회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안익태에게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를 통해 추서했고, 추모회 회장인 국회의장 이효상(李孝祥)의 식사(式辭), 정 총리의 추모사, 모윤숙(毛允淑) 시인의 추모시 낭송 순으로 진행됐다. 이효상 의장은 “고인의 음악적 공적과 애족애국 정신은 그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생활》에 따르면 식은 추모가(李興烈 作, 상명고·숭문고)의 은은한 합창과 헌화와 분향 순으로 진행됐으며, 고인의 기록영화 〈코리아 판타지아〉와 김만복(金萬福)의 지휘(서울시향)로 고인의 작품 ‘교향적 환상곡 한국’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교향적 환상곡 한국’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작곡되었고, 1938년 자신의 지휘로 더블린의 아일랜드국립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된 ‘한국환상곡(韓國幻想曲)’을 지칭한다.
 
  국민 가곡 ‘가고파’의 작곡가 김동진은 〈작곡가가 본 안익태씨〉 제하의 추모글에서 “안익태는 국악을 토대로 한 작곡 의욕도 강렬한 바 있었다”며 “자신이 직접 채보한 민요를 100여 곡이나 (안익태에게) 선사했고, 선생은 오페라 〈춘향전〉을 작곡하시기를 원했다”고 증언했다.
 
  일본 도쿄의 ‘구니타치 음악학교’(舊 도쿄 고등음악학원)를 안익태와 같이 다닌 정훈모는 〈성악가가 본 안익태씨〉 글에서 “일본 동경 구니타치 음악학교 시절, (안익태는) 애국애족의 조국애에 불타는 청년이었다. 어떻게 하면 일인 학생들을 앞설 수 있을 것인가를 불철주야 연구하고, 노력하는 참다운 음악도”라고 회고했다.
 
  작곡가 박태현은 〈내가 아는 안익태 형〉에서 “(안익태가) 1960년 일본에서 특별 연주회를 가졌을 때 ‘교향적 환상곡 한국’을 레퍼토리로 택했다. 이 곡에 들어 있는 애국가를 일본 사람들이 무척 싫어했지만 아니 부를 수 없었다. 안익태는 음악으로 일본을 정복했고, 한국을 과시(誇示)했다”고 극일 정신을 이야기했다.
 
  시인 박태진은 영국 런던주재원으로 근무할 때인 1959년 7월 6일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있은 콘서트를 회고하며 “연주에 앞서 (안익태가) 애국가를 우선 들려주었다. 나의 마음은 한량없이 흡족했었다”고 쓴 뒤 “안 선생은 국록(國祿)을 먹지 않고도 국록을 먹는 대사(大使) 몇 명에 필적하고 남음이 있다”고 강조했다.
 
  《월간조선》은 예술가 6인의 추모글을 소개한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은 현대어 표기에 맞게 고쳤음을 밝혀둔다. 지면 관계로 일부 글은 생략했다.
 
 
작곡가가 본 안익태씨
 
  김동진(金東振)
 
국민 가곡 ‘가고파’ 작곡가 김동진.
  나는 그를 선배로서 대했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어려운 생각이 앞서서 더 깊게 인생을 파고들지 못했나 보다. 내가 평양 숭실중학을 다닐 때부터 이분을 흠모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이분의 첼로 독주회를 즐겨 듣던 일이다. 당시에도 이분의 첼로 독주회는 그 인기가 평양에서 대단했으며 또 나의 선생님 Mals Bary 씨가 반주를 했기 때문에 더욱 내 마음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좀 어색하지만 안 선생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것은 내가 평양에서 학교를 다닐 때 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이 있었다. 7일장이라 손님들로 붐비는 판이었는데 장례식날이 바로 안익태 선생의 첼로 독주회 날이었다. 나는 물론 할아버지 장례식을 뒤로 미루고 안 선생의 첼로 독주회를 들으러 갔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나는 숙부님한테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호되게 맞은 일까지 있었다.
 
  이분의 성격은 예술가다운 기질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솔직하게 마음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털어놓는 분이었다. 항간에는 이분을 몹시 혹평하는 분이 많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성격상의 차이와 이분에 대한 질투 때문에 생기는 소이라고 생각한다.
 
  예술 면에서 볼 때 이분은 너무나 정열적이었으며, 타인으로 하여금 도취할 정도로 격렬한 설득력을 지니었고, 청중을 도취시키는 지휘로 성공을 거둔 분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코리아 판타지아’에서 관현악법이란 국내 작곡가들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좋았고, 국악을 토대로 한 작곡 의욕도 강렬했다. 그래서 필자가 직접 채보한 민요를 100여 곡이나 선사했으며, 또 오페라 〈춘향전〉을 작곡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필자가 채보한 《춘향전》 고전을 선사한 일이 있다. 그분을 좀 더 도와드리지 못한 것을 한으로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분은 사교성이 능란하며 정치성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세계 순회 연주공연을 하면서도 한국의 얼을 그들에게 좀 더 뚜렷하게 심어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개성이 뚜렷한 분이고 책임감 또한 강한 분이었다.
 
  어느 해인가 기억에 없지만 육·해·공군 합동 연주회 때 육군 군악대원 하나가 클라리넷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는데, 이 사실을 저녁 식사 시간에 객담에서 군악대장에게 듣고 “거 내가 어떻게 구해 주지” 하고 농조로 약속한 일이 있었다.
 
  그 후 몇 날이 지나 과연 안 선생이 미 8군에서 클라리넷을 좋은 것으로 얻었다고 해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은 사실이 있었다. 이와 같이 선생은 자기가 한 말 한마디에도 책임을 지는 분이었다. 이러한 책임 있고 조국 얼을 지닌 음악가를 잃어버린 이제 그분에 대한 아쉬움이 커질 뿐이다. 〈작곡가, 서라벌예술대 교수〉
 
  (편집자 註: 작곡가 김동진 선생은 안익태의 6년 후배다. 1913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한 그는 평양 숭실중에 다닐 무렵 피아노와 클라리넷을 공부하면서 가곡 ‘봄이 오면’을 작곡했고, 숭실전문학교 재학 시절인 20세 때 ‘가고파’를 작곡했다.
  서라벌예술대 교수와 경희대 음대 학장을 지낸 고인은 ‘수선화’ ‘내 마음’ ‘못잊어’ ‘목련화’ 등 가곡 외에 〈춘향전〉 〈심청전〉 등 판소리를 오페라와 접목시킨 ‘신창악(新唱樂)’에 애정을 쏟았다. 특히 창작 오페라 〈춘향전〉은 1930년대 평양에서 남도 판소리를 처음 들은 뒤 작품 구상을 시작해 50여 년간 퇴고를 거쳐 84세 때 완성했다. 안익태의 꿈을 대신 이룬 것이다.)

 
 
성악가가 본 안익태씨
 
  정훈모(鄭勳謨)
  안익태씨는 나와 동향인이며 가정적으로도 친분이 있는 처지였으나, 내가 처음 만나서 알게 된 것은 일본 도쿄 구니타치 음악학교(편집자 註: 1926년 도쿄 고등음악학원으로 개교해 1947년 구니타치 음악학교로 개칭했다)에 입학한 때였다. 무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뚜렷한 기할 만한 일이 별로 없으나, 그때 처음 만나서 내가 보고 느낀 안익태씨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말하여 깡마르고 작은 키에 일견해서 야무지고 깔끔하고 냉철한 인간이라고 느꼈다. 그는 자기가 전공하는 음악 공부를 위해서 마음과 몸과 정열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치 분투 노력했음을 말할 수 있겠다.
 
  아주 추운 겨울에도 웃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오직 연습에만 몰두하여, 연습이 끝나면 온몸이 땀에 젖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평양 시내에 조그마한 여관을 차려 그날그날을 이어가는 가난한 형편이어서, 그는 스스로 모든 생활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정교사가 아니면, 아르바이트 장소에 나가 얼마 되지 않는 보수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했다. 학교 시절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에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있었는데, 어느 날 교내 연주회가 시작될 무렵 그는 첼로를 들고 스스로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되어 열심히 연주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지휘자 고노에 히데마루라는 일본인 교수가 낯선 안익태씨를 보고 “누구냐”고 힐난하면서 물러갈 것을 요구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나도 첼로를 하는 안익태인데 입단시켜 달라”고 하였다. 지휘자는 그의 당돌하고 대담한 태도에 오히려 탄하여 즉석에서 오케스트라에 입단을 허락한 일도 있었다. 그는 자기의 목적과 희망을 달성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난관을 타파하고 헤어나갈 수 있는 굳은 투지력과 자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애국·애족의 조국애에 불타는 청년이었다. 어떻게 하면 일인 학생들에게 뒤지지 않고, 그들을 압도하여 앞장설 수 있을지 불철주야 연구하고 노력하는 참다운 음악도였다고 나는 꼭 말하고 싶다.
 
  그 학교 웨르코 마이스텔 교수에게 첼로를 사사한 그가 모든 학생들을 물리치고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도 그가 지닌 투지력과 꾸준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도쿄에서 유학을 마치고, 단신 미국으로 건너간 후로는 오랜 세월을 조국의 하늘을 그리며 오직 음악인이 되어 보겠다는 염원하에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끝내는 훌륭한 음악인으로 성공을 거두고 돌아온 것이다.
 
  이제 그는 가고 더구나 이역만리 남의 땅에서 영원히 잠들고 말았지만, 그가 이 나라와 민족에 끼친 공헌을 여기서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라 믿는다.
 
  그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미국 있을 때 ‘가톨릭 의학대학’의 교가를 작곡하여 보낸 일이 있는데, 그때 이러한 내용의 서한을 보내온 것을 잊을 수 없다.
 
  ‘처음 노래 부를 때는 꼭 정훈모에게 그 지휘를 맡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처럼 그는 고향인을 못 잊어 하고, 동창을 못 잊어 하고, 민족을 못 잊어 하고, 조국을 못 잊어 한 것이다.
 
  안익태씨의 도쿄 ‘구니타치 음악학교’ 동창으로는 한국 사람이 몇 명밖에 안 되었지만, 그나마도 지금은 거의 저 세상 사람이 아니면 남의 나라에 한 명이 있고, 그리고 국내에는 두어 분 있을 뿐이다.
 
  그가 지난 5월 국제음악제 개최를 겸한 경주 일대를 답사할 목적으로 왔을 때 국내 사정도 사정이려니와 국제음악제 개최에 관한 시끄러운 말썽과 추문만을 남긴 채 쓸쓸하고 외로운 출국을 해야만 했던 일을 생각할 제,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지난 5월에 있다 간 그가 다시 조국을 영영 등지고 말 줄이야 그 누구도 미처 몰랐을 일이다. 그는 한국을 마지막 떠나 도쿄에 머무르는 동안, 그가 작곡하고 손수 지휘하여 이토오 게이코(伊藤京子)와 Catholic Caridas Chorus가 취입한 ‘흰백합화’와 딴 사람의 작품
 
  ① Mader Dolcissiona (unknown)
  ② Regina Caeli Ch. Vernioltti
  ③ Tota Pulchra-(G. Vincentio)
  ④ O. mader (in Korean) (unknown)
  을 수록한 레코드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우리 민요 ‘아리랑’을 주로 하여 작곡한 것으로,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외국인까지 쉽게 즐기고 익힐 수 있게 작곡되어 있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의 가슴에 자리 잡고 있던 한국의 얼과 그의 우정, 또한 그가 지닌 음악성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성악가, 서울대 음대 교수〉
 
  (편집자 註: 정훈모는 안익태와 동향인 평양 출신으로 1931년 도쿄 고등음악학원을 졸업, 모교에서 강사로 단상에 오른 것이 교직의 첫 출발이었다. 이화여전 교수를 거쳐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서울대 음대에서 줄곧 성악가를 키웠다. 예술원 공로상, 국민훈장 동백장, 장한어머니상 등을 받았다.)
 
 
내가 아는 안익태 형
 
  박태현(朴泰鉉)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안익태씨의 이름 석 자는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 언젠가 나는 안익태씨와 같이 택시를 탄 일이 있다. 열심히 운전하던 운전사가 나에게 귓속말로 저분이 누구냐고 묻기에 안익태씨라고 대답했더니 어리둥절한 눈으로 안익태씨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마침내 목적지까지 가서 많지 않은 택시 요금을 지불하려고 했더니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는다. 아무리 받으라고 권했으나 그냥 고집하므로 하는 수 없이 우리 둘은 ‘고맙소’라는 인사를 하고 헤어진 일이 있다. 이것이 무엇일까? 글로만 보던 안익태씨를 대면하는 감개무량함, 그리고 존경의 표현이 아닐까!
 
  안익태씨는 이만큼 우리에게서 존경을 받는 존재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안익태씨가 이러한 높임과 존경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애국가를 작곡했다는 데서만은 아닐 것이다.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은 유독 안익태씨만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알기는 인간 안익태씨가 존경받는 까닭은 애국가의 작곡자로서만이 아니라, 지휘자로서의 음악 활동이 그 누구보다도 한국을 빛나게 했다는 데서일 것이다.
 
  안익태씨라는 일개 코리아의 젊은 지휘자가 세계의 모든 교향악단을 지휘했다는 이 사실은 그냥 간단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는 일인 것이다. 그는 초기에 유명한 Rias Symphonie Orchester(베를린), Berlin Philharmonische Orchester(베를린), Sociètè des Concerts du Conservatoier(파리), Wiener Symphonie-Orchestre(빈), Barcelona Symphony Orchestra 등을 지휘했고, 1960년을 전후해서는 마요르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있으면서 런던, 터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일본, 자유중국 등 여러 나라의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안익태의 이름을, 아니 한국의 이름을 세계에 떨친 것이다.
 
  또한 안익태씨는 작곡가로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있다. 그의 스승이며 은인인 Richard Strauss는 제자인 안익태씨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주었다.
 
  ‘친애하는 벗 안에게!
  당신이 위대한 재능과 경험을 가진 지휘자라는 것을 증언하는 데 있어서 나는 큰 즐거움을 가지는 바입니다.
  나는 많은 기회에 확신했습니다. 당신의 귀중한 작곡이 허식 없는 연주회의 흥(興)을 돋울 것을!
  예술가로서의 당신의 장래를 진심으로 축복하면서
  -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1960년 일본에서 특별 연주회 가졌을 때의 일이다. 당일 프로그램에 ‘코스모폴리탄 안익태씨’라는 제목하에 ‘오까노’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안익태씨는 신사다. 오랫동안 구미(歐美)에서 생활해온 국제인으로서의 풍격(風格)을 갖춘 사람이다.’
 
  또 어떤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안익태씨는 인종적 편견(偏見)을 무시한 신념의 사람으로 그 인기(人氣)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 증거로는 스페인의 노블 패밀리 귀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연주회에서 안익태는 자작의 ‘교향적 환상곡 한국’을 레퍼토리로 했는데, 이 곡에 들어 있는 애국가를 일본 사람들은 한때(제2차 세계대전 후) 무척 싫어했다. 그러나 ‘교향적 환상곡 한국’을 연주하는 일본 사람들은 이 노래를 아니 부를 수 없었다. 이렇듯 안익태씨는 음악으로 일본을 정복했고, 한국을 과시했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음악제’를 창안(創案)한 사람도 안익태씨이다. 1962년 11월 나에게 보내온 편지에서 내년 1963년 5월 서울에서 제1회 ‘국제음악제’를 개최할 것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준비를 부탁해왔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안익태씨의 창안인 동시에 실천의 첫 단계였다.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예정한 대로 다음 해 5월에 제1회 서울 국제음악제를 성대하게 끝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안익태씨의 불가능이 없다는 신념(信念)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음악의 화신(化身) 안익태씨에게는 음악이 있을 뿐이요, 모든 시간은 음악을 하기 위해 사용했고, 먹고 자는 것도 오직 음악을 위해서만 필요로 했다. 그러기에 안익태씨에게서 음악을 빼면 영(零)이라는 공식이 그에게 붙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높이는 인간 안익태, 아니 음악가로서의 안익태씨인 것이다. 〈필자, 작곡가, 숙명여대 음대 교수〉
 
  (편집자 註: 동요작가 박태현은 평양 숭실전문대 음악과 출신이다. 동요 ‘누가누가 잠자나’ ‘산바람 강바람’ 등 동요 100여 곡을 작곡했다. 1946년 결성된 전국취주악연맹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브라스밴드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런던에서 만난 안익태 선생
 
  박태진(朴泰鎭)
 
《음악생활》 1965년 12월호에 실린 박태진의 글. 영국 런던주재원으로 근무할 때인 1959년 7월 6일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있은 안익태의 공연을 회고했다.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고 안익태씨를 처음 만나기는 1958년 초겨울의 런던에서였다. 예술가가 가장 많이 사는 킹스로드(뉴욕 그리니치村에 해당한다)의 끝에 새로 열린 중국요리점에서였다고 기억한다. 나는 그가 오랜 서구 생활에도 불구하고, 무척 소탈한 것이 반가웠다. 그리고 진지하고 한편 소박한 것이 매우 예술가다워 나는 초대면부터 그를 좋아하였다.
 
  그는 방금 빌프리이트 반 위크(음악연주 프로모터)와 이야기가 잘 되어 다음 해에 로열 페스티벌 홀(Royal Festival Hall·런던 사우스뱅크 센터에 있는 연주회장)에서 지휘할 것이라고 매우 흡족해했다. 로열 페스티벌 홀은 로열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1871년 런던에서 개관한 연주회장)과 아울러 음악당으로서 영국의 쌍벽(雙璧)이 된다. 그의 꿈이 한층 부풀었던 것을 나는 잘 알 수 있었다.
 
  내가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동양인이 유럽에 와서 예술가로서 이름을 알린다는 것이 지극히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그 고난의 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가라는 자부심과 무한한 노력 외에는 그에게는 가난과 주림이 있을 뿐이다. 나는 유럽 생활을 하는 동안 젊은 예술가에게서 이것을 목격하고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안 선생과의 초대면에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감개무량하였다. 그가 한인(韓人)이니만큼 나의 감개는 한층 더 하였다.
 
  1959년 7월 6일 예정대로 선생의 콘서트가 있었는데, 프로그램을 보면 본인의 작곡인 ‘심포닉 판타지 코리아’, 베토벤의 ‘피아노 콘체르토 1번’, 그리고 드보르자크의 ‘신세계에서’였다. 연주에 앞서 나는 그를 사우스켄싱턴에 있는 퀸즈베리 코트 호텔을 찾아갔는데, 그는 약간 초조해 보였다. 허기야 런던에서 처음 지휘하는 것이기도 하려니와, 영국의 음악평론가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니 불안한 낯을 감출 수 없었는지 모른다. 또한 런던의 플레이어(樂士)는 노련하기 때문에 그들을 확실히 손아귀에 넣을 만큼 리허설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고 그는 나에게 고백하였다. 한편 그만큼 노련한 플레이어니만큼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고 하였다.
 
  템스 강가에 자리잡은 로열 페스티벌 홀의 지휘대에 올라선 선생을 신통스럽게 바라보며, 나는 어떻게 보면 한인(韓人·선생은 늘 이렇게 불렀다)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연주에 앞서 ‘애국가’를 우선 들려주었다. 나의 마음은 한량없이 흡족했다. 아내는 옆에서 저대로 감격하여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나는 이때 안 선생을 국록(國祿)을 먹지 않고도 국록을 먹는 대사(大使) 몇 명에 필적하고 남음이 있다고 절실히 느꼈다. 나는 음악에 문외한(門外漢)이기도 하지만, 기실 그날 밤 콘서트에서의 그의 지휘 성과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로서는 그의 작곡가로서 지휘자로서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그 지휘대에 선 것으로 충분히 그 퀄리티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뒤에도 해마다 런던에 와서 지휘를 했다. 내가 몇 해를 런던에서 본 바로는 선생은 그 런던의 유명한 관현악단들을 지휘한 유일한 동양 사람이었다.
 
  그는 그토록 고국을 사랑하였고, 또한 매우 정열적이었다. 한국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그저 그리움에 찼던 그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한번은 부인을 모시고 왔는데, 우리 대사댁에서 음식을 차렸다. 내 자리가 안 선생 내외 가운데 끼게 되었는데, 안 선생은 곁도 볼 새 없이 음식만 들었다. 두 분의 회화는 영어였지만, 안 선생보다 부인의 어학(語學)이 훨씬 나았다. 부인이 “비로소 한국 음식을 감상한다”고 하며, “‘익태’가 잠꼬대처럼 외우던 맛을 비로소 알겠노라”며 입맛을 다셨다. 안 선생은 부인에게 많이 들라고 다정하게 권했다.
 
  부인은 조용하고 다정해 보였다. 또한 이해심이 깊어 보였다. 그 무렵 선생은 각국에 연주여행이 잦아 반 년에 한 번 정도 가족을 보는 듯했다. 내가 가족의 경우를 동정하였더니 안 선생도 퍽 측은해하며,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해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가족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고, 또한 딸들을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술이 있었다. 한인으로서 서구 세계에서 기반을 닦은 예술가의 생애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유달리 고되던 그것을 초월하고 있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는 한층 더 정열을 기울여야 했다. 왜냐하면 서구 세계에서는 예술가는 매명(賣名)으로는 통용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성 여하로 비로소 이름 석 자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무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필자, 시인〉
 
  (편집자 註: 시인 박태진은 1948년 등단 이후 김수영·박인환·김경린 시인 등과 함께 ‘새로운 시대와 도시들의 합창’ 동인으로 활동하며 모더니즘 시인으로 꼽혔다. 시집 《현대의 온도》와 시론집 《현대시와 그 주변》 등을 펴냈다. 한국문학평론가상 등을 받았다.)
 
 
학창 시절의 안익태
 
  김원복(金元福)
 
피아니스트 김원복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가운데), 피아니스트 백혜선(왼쪽), 변화경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30년, 필자가 도쿄 구니타치 음악학교를 졸업할 때 한국인 졸업생은 안익태, 박계성(朴啓成), 홍성유(편집자 註: 洪盛裕·김원복의 남편이자 홍난파 선생의 조카. 한자 이름이 洪性裕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필자를 합쳐 모두 네 사람이었다. 그중에서 박계성씨는 일본에 귀화하여 속계성(屬啓成)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음악계에서 활약하는 분이고, 바이올린을 전공하던 홍성유씨는 오래전에 작고하였다. 그리고 이제 안익태씨마저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이 땅에 남아 있는 동창생이 나 혼자라는 사실에 외로움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학창 시절의 안익태씨를 말하기에는 너무 먼 옛이야기이고, 또한 그 당시에는 남녀가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교제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분과는 다만 같은 민족과 동기 동창생으로밖에는 더 깊이 그 인간성이나 사람됨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기억으로 안익태씨는 명석한 두뇌 굳은 의지의 소유자로서 매사에 적극적이고 정열적이었다는 것만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안익태씨는 웨르코 마이스텔이라는 첼로 교수에게 사사하였는데, 일본 학생들이 교수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고분고분 따랐으나, 안익태 선생은 고집이 있어서 덮어놓고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자기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렇지만 결코 레슨 시간을 빼먹거나 하는 짓은 않았다. 그리고 지도 교수가 틀린 곳을 지적하면 그 자리에서 그것을 고쳐서 교수의 좋다는 말이 떨어질 때까지 수십 번을 고치고, 다시 고치는 성의와 열의를 가졌다.
 
  이러한 열의와 노력이 그를 음악인으로 성공하게 하였고, 또 국제적 음악가로 만들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그의 열의는 서울 국제음악제라는 큰 일을 주재한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관직 없는 대사로서 세계 각국을 순방하여 그가 지닌 기량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국위를 선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였다. 일생을 마칠 때까지 주로 해외에서 나그네 신세를 면치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동창으로서 찌릿한 감정은 말로 이루다 형언할 수가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필자 눈에는 유난히 깡마르고 정열적이던 안익태씨의 인상이 눈에 선하며, 어쩐지 그의 죽음이 사실처럼 믿어지지를 않는다. 〈필자, 서울대 음대 교수〉
 
  (편집자 註: 피아니스트 김원복은 ‘한국 피아노계의 대모(代母)’로 통했다.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전업(專業) 피아니스트가 생경하던 시절, 국내외 무대를 누빈 ‘1세대 연주자’였으며, 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아 한국 음악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작곡가·지휘자로서의 안익태
 
  이성삼(李成三)
  지휘자로서 또는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친 안 선생이 지난 9월 19일에 작고하였다는 외신 보도를 접했을 때 처음에는 그 비보(悲報)를 믿지 못할 정도로 뜻밖의 일이었다. 사람이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조만간(早晩間)의 차(差)는 있을지언정 죽음을 모면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이 비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인생의 무상(無常)과 애도(哀悼)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향년(享年) 60세라면 한창 살아서 활동할 나이요 앞으로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거늘, 이리도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이야 꿈에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다. 반면에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이지만 그를 살려내지 못함을 볼 때 죽음이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낄 따름이다.
 
  더구나 안 선생의 타고난 음악적 천품(天稟)은 여러 나라의 국민들에게 그의 역량을 좀 더 발휘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영영 가고야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음악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국위(國威)를 널리 선양(宣揚)하고, 평화의 사절로서 좀 더 업적을 남길 수 있었으리라 믿기 때문에 더욱 애석한 일이다. 고국을 떠난 지 36년간 그의 생애의 태반은 해외에서 음악 활동으로 시작하여 음악으로서 일생을 끝마쳤던 것이다.
 
  나와 선생과는 오랜 우정도 별반 없었으나 선생이 외지(外地)에서 뿌려놓은 음악 업적은 금후는 몰라도 아직까지는 선생을 추종할 만한 이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의 발자취는 유형무형(有形無形)의 ‘코리아’라는 얼을 세계에 남겼음을 알 수가 있다. 선생은 비록 수척한 체구였지만 강한 의지와 백절 불굴의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작곡가로서 그는 미국에 있을 때 미국에서 처음으로 우리의 애국가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전 국민의 정신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유일한 무기로 길이 남을 것이며, 선생은 우리들에게 애국정신을 북돋워 주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애국가를 주제로 작곡한 ‘코리아 판타지’를 여러 나라에서 지휘 발표할 때마다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1962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제1회 국제음악제를 개최하기 위하여 서울에 왔을 때 그를 환영하는 모임의 자리에서 한 말 가운데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연주회를 가질 때마다 나의 작품을 반드시 연주하였는데, 만약 우리나라의 정서를 담은 작품이 없었던들 나는 유명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이 지금도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 말은 더구나 우리나라 작곡가들에게 남긴 하나의 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현대적인 감각에 의해 세계적인 것으로 내놓지 못하는 한 국제 무대에서 외국인들과 도저히 맞설 수 없다는 것이다.
 
  선생이 그의 스승인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밑에서 받은 2년간의 작곡 수업은 작곡가로서의 일가를 이루게 하였고, 상기한 환상곡 ‘코리아 판타지’를 비롯하여 ‘의기논개(義妓論介)’와 우리나라의 풍습을 담은 가곡 ‘강천성곡(降天聲曲)’ ‘월천악(越天樂)’ 그리고 민요 ‘아리랑’을 바탕으로 한 가곡 ‘흰백합화’ 등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번 귀국하여 경주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와 다음에 쓸 작품을 스케치했다고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되고 말았으니 우리 음악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이 지휘자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그가 26세의 약관으로 부다페스트 필하모니를 지휘한 후부터였다. 그 후 스페인의 세 심포니, 마요르카의 상임 지휘자로 20여 년간 있으면서 세계 각국의 심포니를 객원 지휘하였다.
 
  런던 로열 필하모니, 런던 심포니, 베를린 필하모니, 로마 심포니 오케스트라, 취리히 오케스트라, 부에노스아이레스 필하모니, 일본 NHK 교향악단 등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곳의 교향악단을 200여 회나 지휘한 기록을 남겼다.
 
  얼마 전에 로마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차 여행하던 국내 인사가 영국 런던에 들렀을 때 안 선생이 지휘하는 음악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한다. 그때 청중의 한 사람으로 멀리 이역의 땅에서 애국가 연주를 들은 감명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다고 한다.
 
  레퍼토리로는 차이콥스키의 작품과 안익태씨 자작의 교향시 ‘강상(江上)의 논개(論介)’가 연주되었는데, 절찬을 받자 코리아 사람임을 자랑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예술 사절로서 비중이 자못 컸으며, 몇 사람의 외교관으로서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알았다. 그날 연주회가 끝난 후 대사관 주최로 파티가 있었는데, 그때 그의 귀여운 딸 셋이 나란히 나타나서 청중 앞에 더욱 이채를 띠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벌써 그는 많이 수척해졌고, 피로해 보였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의 지난 7월 런던에서 가진 연주회가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그 뒤 모든 계약을 취소하고 제2의 고향인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항상 염원으로 생각하는 것의 하나가 고국에 돌아가서 음악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후배를 양성하는 일과, 음악 사업의 일환으로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이 운동에 적극 봉사하고 싶다는 것을 피력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조국의 하늘도 아닌 저 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조용히 눕고 말았다.
 
  첼리스트로 출발하여 작곡가·지휘자로 많은 기량을 발휘하면서 다채롭고 험난한 일생을 마쳤으나, 그가 음악가로서 나라에 끼친 공적도 하나둘이 아닐 것이다. 〈음악평론가, 경희대 음대 교수〉⊙
 
안익태 친일 논란의 최초 발원지는?
 
  《친일인명사전》의 안익태 항목
 
  올해 연초부터 한국 최초의 코스모폴리탄 음악가 안익태(1906~1965)를 둘러싼 왜곡 보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 경우가 그의 ‘강천성악’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의 주요 선율이 일본의 고대 아악인 ‘에텐라쿠’의 선율을 차용했고, ‘에텐라쿠’의 실체가 일왕 찬양곡에다 천황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연주된 곡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아악회 홈페이지의 ‘에텐라쿠’ 항목을 살펴보니 이 같은 곡 해설은 사실무근이었다. ‘이 작품은 일본 아악 중 가장 잘 알려진 곡이고, 요즘에는 연주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악곡이지만, 헤이안 시대(794~1185) 무렵에는 연주 기회가 한정적이어서 불교행사에서 연주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고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일본 위키피디아 사전에도 ‘결혼식 때 자주 연주되는 곡’이라고 소개된 게 전부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에텐라쿠〉 음반 3종의 내지 해설서 어디에도 이 같은 곡 해설은 없다.
 
  그렇다면 이 같은 왜곡의 최초 발원지는 어디일까.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있던 고(故) 노동은(1946~2016) 교수가 쓴 《친일인명사전》(2009)의 ‘안익태’ 항목이다. 친일인명사전 안익태 편에서 노동은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원래 에텐라쿠는 일본 천황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연주된 것이다.’
 
  노동은은 이 같은 근거 없는 주장을 이후 자신의 저서 《한국근대음악사론》(2010)과 유저(遺著), 《친일음악론》(2017), 《인물로 본 한국근현대음악사》(2017)에서 반복하고 있다. 단순히 일본 고대아악 중 하나인 ‘에텐라쿠’가 일왕찬양곡 + 천황즉위식 축하작품으로 둔갑한 배경에는 노동은의 이 같은 왜곡 날조가 똬리 틀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안익태가 ‘강천성악’, 즉 ‘야상곡과 에텐라쿠’를 작곡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짐작하고 있다. 1930년대 유럽에서 가장 각광받던 두 명의 일본 작곡가를 능가하려는 의도였다는 게 그것이다.
 
  즉 고노에 히데마로(1898~1973)가 작곡한 ‘에텐라쿠’(1931)와 이부쿠베 아키라(1914~2006)가 작곡한 ‘야상곡과 축제’=‘일본광시곡’(1935)을 종합해서 능가하려는 목적으로 안익태는 ‘야상곡과 에텐라쿠’(1938)를 작곡했다고 본다. 1936년 6월 독일의 대작곡가 파울 힌데미트(1895~1963)와의 베를린 면담에서 안익태가 조선 아악을 주제로 작곡한 관현악곡 운운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구상은 최소한 19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부터 이미 안익태는 ‘에텐라쿠’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조선 아악의 변용이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 같은 의식을 토대로 안익태는 동시대 유럽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대표 작곡가 2인을 초극하려는 극일주의적 발로에서 ‘야상곡과 에텐라쿠’ = ‘강천성악’을 작곡했다고 본다.
 
  〈김승열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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