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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 문제제기

우리가 알고 있는 위화도는 가짜다!

글·사진 : 허우범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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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間島’에서 보듯 주변이 물길로 둘러 있는 육지도 ‘島’라고 해
⊙ 위화도는 강 한가운데 있는 섬이 아니라 압록강 支流 강변에 있는 땅… 태조봉 등 산봉우리도 있어
⊙ 압록강보다 훨씬 위쪽인 랴오닝성 콴뎬 徐店子 지역이 위화도
⊙ 淸나라의 封禁 조치 이후 위화도의 위치와 마을 이동… 日帝가 半島史觀 합리화하려 현재 위치로 왜곡

許又笵
1961년생.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現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해동전도》 ‘의주부’ 지도에 표시된 위화도. 조선 후기 위화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보여준다.
  14세기 후반 동북아시아는 격변의 시기였다.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됐다. 중원(中原)에서는 원(元)나라가 무너지고 명(明)나라가 수립됐다. 동북아시아에서 동시에 일어난 왕조 교체는 필연적으로 국제질서의 재편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고려 우왕(禑王) 14년에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해왔다. 원나라 시기의 철령 지역은 이제 자국(自國)의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고려는 역사적 정통성을 내세워 철령 이북의 영토는 고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철령위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은 외교적인 해결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고려의 정치세력은 명의 철령위 설치 문제를 놓고 최영(崔瑩) 중심의 강경파와 이성계(李成桂) 중심의 온건파로 나뉘었다. 결국 우왕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강경파의 주장이 관철되어 요동(遼東)정벌을 감행하게 됐다. 요동정벌군의 지휘는 서북방 지역을 잘 알고 있는 이성계와 조민수(曺敏修)가 맡았다.
 
  요동정벌은 장마철에 시작됐다. 압록강을 건넌 이성계는 홍수로 인해 진격이 어렵게 되자 위화도(威化島)에 진을 치고 군심(軍心)을 확인한다. 이어 요동정벌 사불가론(四不可論)을 천명하며 회군(回軍)을 감행,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고려 말 신・구 정치세력 간의 정쟁(政爭)은 이성계를 필두로 한 신진세력의 승리로 끝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로 이어지게 된다. 위화도는 이런 점에서 조선 건국의 발상지와 다름없는 땅이다.
 
 
  위화도는 압록강의 河中島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위화도 회군 노선. 위화도가 압록강의 하중도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위화도가 지금의 중국 단둥시(丹東市) 앞을 흐르는 압록강에 있는 하중도(河中島)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곳은 사서(史書)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하는 점이 없는 곳이다.
 
  사서에는 위화도에 관한 기록이 얼마나 있을까.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은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기본적인 사서다. 이런 사서에서 위화도를 검색하면 160여 건의 관련 기록이 나온다. 시기도 태조(太祖) 1년(1388년)부터 순조(純祖) 11년(1811년)까지 400년이 넘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위화도는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평평한 퇴적층(堆積層)으로 이뤄진 섬이다. 이 위화도가 수백 년간 사서에 언급된 까닭은 무엇인가. 위화도는 고려 말 이성계가 회군한 곳이라기보다는 백성과 군사들의 식량 마련을 위한 경작(耕作)과 둔전(屯田), 국경 지역에서 발생하는 월경(越境), 불법 경작하는 중국인의 추쇄(推刷) 등에 관한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되는 국경 지대의 옥토(沃土)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위화도에서 과연 이러한 일들이 가능할까. 대륙의 넓고 많은 땅 중에 하필이면 왕래도 불편한 하중도를 양국의 백성이 다투어 경작하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위화도를 배나 뗏목을 이용하지 않고 사람들이 ‘직접 걸어서 갈 수 있다’는 기록을 접하면 더욱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위화도라고 알고 있던 현재 압록강의 하중도는 위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성계가 요동으로 출병(出兵)하기에 앞서 위화도에 머무는 과정을 기록한 사서의 첫머리에서부터 나타난다.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진을 쳤다.(渡鴨綠江屯威化島)”
 
  현재의 위화도로 가는 것은 압록강을 ‘건넌(渡)’ 것이 아니고 ‘들어간(入)’ 것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한 전략의 하나가 ‘입도출륙(入島出陸)’이었다. 즉 공격해오면 섬으로 들어가고 물러가면 다시 육지로 나왔다. 그러므로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는 압록강을 건넌 군사들이 어느 일정한 지점까지 행군한 후에 머문 곳이어야 한다.
 
 
  검동도와 위화도
 
  그렇다면 위화도는 어디인가. 사서에 보이는 160여 회의 위화도 관련 기록에는 위화도의 위치는 물론 그 모습과 주변 지형을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살펴보면 위화도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완성된 조선 최대의 지리지다. 이 책의 ‘평안도 의주목’ 항목 중에서 검동도와 위화도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검동도(黔同島): 의주에서 서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15리다. 압록강이 여기에 이르러서 3갈래로 나뉘는데 이 섬이 두 섬 사이에 있으며, 삼씨량(三氏梁)이 있다. 모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 섬의 북쪽을 거치는데 ‘중국의’ 서울로 가는 사신이 입조(入朝)하는 길이기도 하다.
 
  •위화도(威化島): 검동도의 아래에 있는데 둘레가 40리이다. 두 섬 사이를 압록강의 지류(支流)가 가로막고 있는데 굴포(掘浦)라고 일컫고 주성(州城)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위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자. 검동도와 위화도, 이 두 섬 사이를 압록강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는 압록강의 본류(本流)가 아닌 지류다. 이 지류는 ‘굴포(掘浦)’라고 부른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은 지류가 아닌 본류다. 본류 안에 하중도가 있다고 해서 그곳을 흘러가는 강줄기를 지류라고 하지 않는다. 위화도는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다른 강줄기에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압록강을 말할 때에는 강의 본류만 거론하고 지류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화도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압록강의 지류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위화도는 섬(島)이다. 섬은 일반적으로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육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섬은 반드시 이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한자를 집대성한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섬(島)’에 대한 다른 의미를 알려준다.
 
 
  島의 또 다른 의미
 
명나라 喜宗 때 간행된 《주해도편》 중 ‘산동연해산사도’ 부분. 강물이 바닷가에 이르는 육지들 사이에 많은 島들이 표기되어 있다.
  〈《상서(尙書)》 우공편에 “도이족(島夷族)들은 풀로 만든 옷을 입었다(島夷卉服)”고 했다. 공안국전에서 도(島)에 대해 주를 달기를, “바닷가의 휘어지고 굽어진 만곡(彎曲)을 섬(島)이라고 한다”고 했다.〉
 
  즉 주변이 물길로 둘러 있는 육지도 섬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육지의 거대한 호수를 ‘바다(海)’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섬은 대부분 외부와 교통이 쉽지 않고, 방어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성을 축조할 때 해자(垓字)를 파는 이유도 인공적인 섬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섬은 고립된 곳이기도 하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 지역을 봉금(封禁)하고 이 지역을 ‘간도(間島)’라고 했다. 이는 조선과 청 사이에 고립된 곳이기 때문에 붙인 명칭이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볼 때 강줄기가 굽이도는 곡류하천(曲流河川)에서의 만곡(彎曲) 부분도 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하회마을처럼 강물이 휘돌아 나가는 지역도 섬인 것이다. 만곡 부분을 섬이라고 한 것은 다음 지도에서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 지도는 명나라 희종(喜宗) 때인 천계(天啓) 연간(1621~1627년)에 간행된 《주해도편(籌海圖編)》 중 ‘산동연해산사도(山東沿海山沙圖)’의 한 부분이다. 이 지도에서도 강물이 바닷가에 이르는 굽은 육지들 사이에 많은 섬(島)이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설문해자》와 《주해도편》의 지도를 통해서 우리는 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위화도는 강물이 굽이져 돌아가는 가장자리에 만들어진 충적토(沖積土)의 땅인 것이다.
 
 
  위화도는 강가의 땅
 
  《조선왕조실록》에는 위화도가 ‘강가에 있는 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비국 당상 정민시가 아뢰기를, “의주부(義州府)는 본디 사람은 많고 땅은 좁은데, 그중 위화도는 토지가 비옥한데도 오랫동안 버려져 왔습니다. 그리하여 그곳 백성들이 농사를 짓도록 허락해주기를 원하고 있으나, 의논하는 자가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성조(聖祖)께서 군대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또는 ‘연변(沿邊)의 땅이다’ 또는 ‘오래 버려진 땅이다’라고 합니다.”〉(《정조실록》 48권, 정조 22년 1월 15일 경진)
 
  위화도의 모습을 분명하게 ‘강가에 있는 땅(沿邊之地)’이라고 했다. 즉 위화도는 지금의 압록강 가운데 있는 하중도가 아닌 압록강 지류 강변에 길게 늘어서 있는 땅인 것이다.
 
  지금의 위화도가 결코 역사적 장소의 위화도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위화도는 넓은 땅이다. 최대 면적이 190만m2(60만 평)에 이른다. 이는 여의도 면적의 3분의 2 크기다. 이곳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연지형을 말할 때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태조봉(太祖峯)’이라는 산봉우리도 있고, ‘회군천(回軍川)’이라는 개천도 있다. 언덕과 길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성계가 회군할 때 진을 친 곳에는 기념비를 세웠고, ‘익원당(翊原堂)’이라는 건축물도 지었다.
 
  반면 현재 우리가 위화도라고 알고 있는 섬은 압록강 하류에 모래가 쌓여서 이뤄진 평평한 땅이다. 이곳에서는 사서에 기록된 위화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기념비와 건축물은 사라져버렸다고 할 수 있어도 강물이 불어날 때 피할 수 있는 언덕도 없다. 이런 곳에서 태조봉 같은 산봉우리를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이다.
 
  위화도는 강가의 땅이기에 건기(乾期)에는 건너갈 수 있었다. 강폭도 80보(步) 정도였다. 이로 보아 위화도는 큰 비에는 강물이 넘쳐나는 곳이지만, 반대로 가뭄 때에는 걸어서 건너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현재의 위화도는 압록강 하구에 있는데, 강폭도 넓지만 연중 강물이 풍부하여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서에 기록된 역사적 장소로서 위화도는 어디인가. 그 해답도 《조선왕조실록》에 오롯하게 설명되어 있다.
 
  〈송골산(松骨山) 동북쪽 모퉁이의 대창산(大昌山) 서동(西洞)이 의주(義州)의 위화도(威化島)와 금음동도(今音同島)의 두 섬과의 거리가 삼식(三息)여 남짓한 도정(途程)으로서 길이 평탄하니, 곧 요충(要衝)의 땅이다.〉(《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8월 13일 무신)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송골산으로 불렸던 오룡산. 동북쪽(왼쪽)은 낮은 산들이 이어진다.
  물줄기는 변하지만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송골산은 현재 ‘오룡산(五龍山)’이라고 부른다. 이 산은 단둥시에서 서북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있는 높이 700m의 산이다. 위화도는 이 산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 대창산에서 90리(1식=30리) 떨어진 지점에 있다. 90리는 약 50km 거리다.
 
  현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는 오룡산과의 거리를 아무리 멀리 잡아도 30km 이내다. 방향도 동북쪽이 아닌 동남쪽이다. 사서에 기록된 위화도와는 방향과 거리가 맞지 않는다. 위 기록은 역사적 장소인 위화도가 현재의 위화도보다 훨씬 위쪽의 강줄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 위화도가 있는 압록강 지류를 살펴봐야 한다. 이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자세하게 알려준다.
 
송골산 위치와 압록강 지류의 물줄기 흐름.
  〈평안도 압록강은 서쪽으로 흘러서 의주 활동(闊洞) 앞에 이르러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한 갈래는 바로 적강(狄江)으로 흐르고, 한 갈래는 의주성 밑을 끼고 서쪽으로 흐른다. 여기에 탄자도(灘子島)・어적도(於赤島)・위화도(威化島)・검동도(黔同島) 등 4섬이 두 갈래의 사이에 들어 있다.》(《연산군일기》 40권, 연산 7년 5월 6일 계축)
 
  압록강 물줄기가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한 줄기가 현재의 애하(愛河)인 적강(狄江)으로 들어간다. 두 갈래로 나뉘는 강줄기는 환런(桓仁)에서 흘러오는 혼강(渾江)이다. 이 강이 압록강으로 흘러가기 전에 한 줄기가 갈라져서 콴뎬(寬甸)으로 흘러간다.
 
 
  위화도는 현재의 ‘콴뎬만족자치현’ 내에 위치
 
새롭게 비정한 위화도는 중국 랴오닝성 콴뎬만족자치현 서점자 지역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위화도는 오룡산의 동북 모퉁이에 있는 대창산에서 동북쪽으로 90리 되는 지점과 혼강의 물줄기가 갈라져서 콴뎬으로 흐르는 그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위화도를 찾는 일만 남았다.
 
  〈압록강을 막 건너 만성(灣城)에 이르면 강줄기가 셋으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있는 한 섬의 이름이 위화도이다.〉(《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2월 17일 을유)
 
위화도 추정 지역과 강물의 흐름.
  이 기록은 위화도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즉 혼강에서 이어지는 물줄기가 세 갈래로 굽이도는 강가에 위화도가 있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현재의 압록강 위쪽인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콴뎬만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 서점자(徐店子)’ 지역이다. 이곳을 흐르는 강 이름은 포석하(蒲石河)다. 이곳이 역사적 장소인 위화도가 맞는지 재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파사부(婆娑府)를 설치한다고 하는데, 파사부는 의주 검동도와 가깝고 토지가 비옥하므로, 전일에는 주민(州民)들이 경작을 했으나 그 후 야인(野人)에게 약탈을 당하게 되므로 드디어 경작을 금지했던 곳이다.〉(《중종실록》 7권, 중종 3년 10월 17일 신사)
 
 
  使臣이 오가던 길
 
압록강 지류에서 본 서점자 지역 위화도 입구 모습. 필자가 가진 카메라로는 위화도의 넓은 모습을 담을 수 없었다.
  파사부는 원나라 초기에 설치됐다. 요(遼)에 이어 중원을 차지한 금(金)나라가 설치한 파속로(婆速路)를 고친 것이다. 원나라 시기 파사부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했고, 의주는 파사부에 예속된 여러 주(州)・진(鎭)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명나라가 되자 봉황성(鳳凰城) 변문(邊門)을 지나 조선의 영역에 탕참(湯站)을 설치하더니 이어 의주의 경계에까지 다가와서 파사부를 설치했다. 점차 조선의 경계를 잠식하여 들어온 것이다.
 
  명나라가 파사부를 설치한 곳은 현재의 콴뎬만족자치현이다. 성보 남문 터가 지금도 시내 중심가에 남아 있다. 또한 남문 터 뒤쪽 거리에는 동서로 길게 이어진 ‘파사부거리(婆裟府街)’가 있다. 이 거리는 공안국・박물관 등 주요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는 번화가다.
 
파사부와 검동도(A), 위화도(빨간색 부분)의 위치.
  검동도는 위화도 위쪽에 있는 섬이다. 콴뎬현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검동도 역시 위화도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다. 이곳은 “모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 섬의 북쪽을 거치는데 (중국의) 서울로 가는 사신이 입조(入朝)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검동도는 의주성과 중국을 잇는 국로(國路)였다. 이 길을 통해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을 배웅하고,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을 영접했다.
 
  그런데 이 장소에 지금도 ‘영빈령(迎賓嶺)’이라는 고개가 남아 있다. 영빈령이 있는 섬이 곧 검동도이고, 검동도와 포석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곳이 서점자 지역이다. 이를 통해서도 현재의 서점자 지역이 ‘위화도’임을 알 수 있다.
 
  하나 더 확인해보자. 송골산의 동북쪽 끝 대창산 동북쪽은 낮은 지형으로 길이 평탄하다고 했다. 이는 곧 송골산의 높은 산줄기가 대창산에서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 이 산의 동북쪽 방향 끄트머리에는 국도와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그런데 이곳에 국도와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톨게이트가 있다. 이 톨게이트를 기준으로 산세(山勢)는 극명하게 바뀐다. 기암괴석을 자랑하며 웅장하게 달려온 오룡산이 이곳에서 멈춰버린다. 반면에 나직나직한 구릉 같은 산들이 길게 펼쳐져 있다. 서점자 지역의 위화도는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5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지도상 위화도의 이동
 
《해동전도》 ‘평안도’ 지도에 표시된 위화도. 조선 후기 위화도에 대한 혼란스러운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위화도는 《조선왕조실록》에 400년간 기록됐다. 그럼에도 200여 년 동안 타지(他地)에 버려졌다. 실록의 기록과는 전혀 맞지 않는 곳에서 흐느껴왔다. 위화도가 이 같은 상황을 맞은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시대 후기에 제작된 지도가 씻지 못할 사건의 발단(發端)이 됐다.
 
  17세기 중반 청나라는 자신들의 발상지인 간도 지역을 봉금(封禁)조치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봉금 지역에 있던 평안도와 함경도 마을들을 서서히 압록강 동쪽 지역으로 옮겨야만 했다. 이때 건국의 발상지인 위화도도 함께 옮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국토와 관련된 지도 제작이 활발해졌다. 이는 그 이전에 비해 지리적 인식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지도들에서 위화도를 살펴보면 위화도는 모두 현재의 압록강 하구 한가운데에 표시했다. 하지만 그 위치는 모두 제각각이다.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해동전도(海東全圖)》다. 이 도록은 18세기 중엽, 조선의 330여 개 군현(郡縣)의 지도와 이를 기록한 지지(地誌)이다. 그런데 같은 지도책임에도 불구하고 ‘평안도’와 ‘의주부’ 지도에는 위화도가 각각 다른 곳에 표시되어 있다. 평안도 지도에는 압록강 밖 바다에 표시되어 있고, 의주부 지도에는 압록강 하구의 구련성(九連城)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위화도가 아래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당시 지도 제작자들은 위화도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단지 국경지대에 있는 ‘섬(島)’이라는 생각으로 바다나 압록강 가운데에 그려 넣은 것이다.
 
 
  日帝의 왜곡
 
《조선역사지리》(1913) 부도에 그려진 위화도 위치 및 세부지도.
  대충 그려진 조선시대의 지도는 일제(日帝) 시대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었다. 이들이 편찬한 《조선사》에서 위화도의 위치를 비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 지도를 근거로 1913년 《조선역사지리》를 발간한다. 이 책에서는 현재의 압록강이 고구려・발해 이후 역사의 최북단 경계이며, 따라서 고려시대의 영토도 “강 가운데 섬까지 미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그러면서 위화도를 압록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비정해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부도(附圖)도 제작했다. 그중에는 위화도의 위치와 세부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이 책을 바탕으로 1938년에 《조선사》를 완성했는데, 그중 위화도 부분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확정했다.
 
  〈7일(경진) 좌우군(左右軍)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위화도(威化島·평안북도 의주군 강중)에 주둔했다(屯).〉(《조선사》 제3편 제7권, 283쪽)
 
  사료에 수없이 기록된 위화도를 무시하고 ‘평안북도 의주군 강중(江中)’이라고 확정해버린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조선사》를 집필할 때, 기본적인 사서는 물론 개인 문집까지도 샅샅이 검토하여 필요한 내용에 대하여는 세세하게 주석(注釋)을 달았다. 일본과 관련된 것은 주석이 수십 편에 이른다.
 
  위화도는 기본적인 사서에서만 160여 회가 나온다. 하지만 그들은 위화도에 관한 한 관련 주석을 하나도 달지 않았다. 왜일까. 위화도에 관한 각주(脚注)를 다는 순간, 그들이 그토록 정립하고자 했던 반도사관(半島史觀)이 거짓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반도사관 정립에 도움 되는 내용과 주석으로 《조선사》를 편찬한 것이다.
 
  1938년 일제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위화도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은 채 오늘까지 이어져왔다. 나아가 《조선역사지리》 부도에 그려진 위화도 세부지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검인정 사회과부도》와 관련 자료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위화도 위치를 올바르게 비정(比定)하는 것은 우리 역사지리(歷史地理)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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