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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22〉 君子가 사람을 부리는 도리, 도리로 임금을 섬기는 신하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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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君子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렵고, 小人은 섬기기는 어려워도 기쁘게 하기는 쉽다”(《논어》)
⊙ 유방, 전투 중 자기를 죽이려 한 계포는 사면, 자기를 살려 보낸 정공은 처형
⊙ 유방, 조왕을 위해 자기를 죽이려 했던 관고 휘하의 조나라 빈객들을 중용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漢 高祖 유방은 자기를 죽이려 한 관고 밑에 있던 빈객들을 중용했다.
  《주역(周易)》을 《논어(論語)》로 풀고 다시 《조선왕조실록》과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비롯한 중국사의 사례를 통해 검증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주 사용하게 되는 열쇠가 있었다. 《논어》 자로(子路)편에 나오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군자는 섬기기는 쉬워도[易事]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難說], 기쁘게 하기를 도리로써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 그 그릇에 맞게 부린다[器之].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워도[難事] 기쁘게 하기는 쉬우니[易說], 기쁘게 하기를 비록 도리로써 하지 않아도 기뻐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 한 사람에게 모든 능력이 완비되기를 요구한다[求備].〉
 
  짧지만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주제가 녹아들어 있다. 군자와 소인의 대비, 섬김과 기쁘게 하기의 대비, 도리의 문제, 그 그릇에 맞게 부리는 지도자의 너그러움[寬·관]과 아랫사람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기를 바라는 지도자의 게으름[倦·권] 등이 그것이다. 이를 송(宋)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는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이렇게 풀었다.
 
  〈군자의 마음은 평온하면서도 인자하니[平恕] 섬기기가 쉬운 것이고 그 태도가 바르고 크니[正大] 기쁘게 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오직 평온하고 인자함으로 일관하니 사람을 부림에 있어서도 각각이 가진 장점을 취합니다. 반면 소인의 마음은 모질고 각박하니[刻刻] 섬기기가 어려운 것이고 그 태도가 치우치고 사사로우니[偏私] 기쁘게 하기는 쉬운 것입니다. 오직 모질고 각박함으로 일관하니 사람을 씀에 있어 반드시 그에게 모든 것이 갖춰져 있기를 요구합니다.〉
 
 
  계포와 정공
 
  이런 군자의 모습은 한(漢)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劉邦)에게서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먼저 군자의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의 사례를 보자.
 
  초한(楚漢)전쟁이 한창일 때 유방은 항우(項羽)의 장수 정공(丁公)과 팽성(彭城) 서쪽에서 접전을 벌이다가 궁지에 몰린 적이 있었다. 이때 유방이 말했다.
 
  “우리는 둘 다 좋은 사람들인데 어찌 서로 힘겹게 싸워야 하는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공은 싸움을 멈추고 군사를 거둬 돌아갔다. 그는 계포(季布)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계포 또한 초(楚)나라 사람으로 여러 차례 유방을 곤경에 빠트린 적이 있다. 항우가 멸망하자 유방은 1000금을 내걸고 계포를 잡으려 했고, 마침내 붙잡았다. 이때 계포가 말했다.
 
  “제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신하는 각자 자기 군주를 위해 일합니다. 항우의 신하라고 해서 어찌 다 주살(誅殺)해야 합니까?”
 
  이 말에 유방은 계포를 사면하고 그에게 관직을 내려주었다. 이에 정공은 유방을 찾아갔다. 그러나 유방은 정공을 붙잡아 군중 앞에서 조리돌림[徇]을 시킨 뒤에 이렇게 말했다.
 
  “정공은 항왕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다하지 않아 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만든 자다. 후세에 다른 사람의 신하 된 자들에게 정공을 본받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정공의 목을 베었다. 계포는 과거 자기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했기에 살 수 있었고, 정공은 과거 자기 임금을 도리로 섬기지 않았기에 목이 달아난 것이다. 이는 도리를 아는 군자다운 임금 유방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왕을 위해 복수를 꾀한 관고
 
  우리는 흔히 충(忠) 혹은 충신(忠臣)이라 하면 직언(直言)・직간(直諫)하는 신하를 떠올린다. 그러나 말로 충성하는 신하보다 일로 충성하는 신하가 윗길이며, 일로 충성하는 신하보다 몸으로 충성하는 신하가 윗길이다. 물론 몸으로 충성하는 것과 자신의 이득을 도모해 몸으로 충성하는 척하는 아첨은 구분해야 한다.
 
  도리로 임금을 섬긴 신하 중에 잊어서는 안 될 이름 하나가 관고(貫高)다. 유방이 한(漢)나라를 세워 천자가 된 후의 일이다. 고조가 조(趙)나라를 지날 때 조왕(趙王) 장오(張敖)는 아침저녁으로 직접 음식을 올리고 몸을 크게 낮춰 (예비) 사위로서의 예를 갖췄다. 그런데 고조는 양다리를 상 위에 내뻗고 욕을 해대며 아주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조나라 재상 관고와 조오(趙午)는 60세가 넘었는데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리 왕은 유약한 왕이다.”
 
  그러고는 조왕 오(敖)를 설득해 말했다.
 
  “(지금은) 천하의 호걸들이 다투어 일어나 능력이 있는 자가 먼저 왕이 되는 때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황제를 심히 공손하게 섬기는데 황제가 왕을 대하는 것은 예(禮)가 없으니 청컨대 왕을 위해 그를 죽여야겠습니다.”
 
  오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면서 말했다.
 
  “그대들은 어찌 그리 함부로 말을 하는가! 그리고 선왕께서 나라를 잃었을 때 황제에 힘입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어 그 은덕이 자손들에게까지 흐르고 있으니 가을 터럭만한 것도 모두 제(帝·유방)의 힘 때문이오. 바라건대 그대들은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마시오.”
 
  관고 등 10여 명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이오. 우리 왕께서는 그릇이 큰 분[長者]이라 은덕을 배반하지 않소. (하지만) 장차 우리는 의리상 우리 왕이 모욕당하는 것을 그대로 둘 수가 없소. 지금 제(유방)가 우리 왕을 모욕하여 그 때문에 우리가 그를 죽이려는 것이니 그것이 어찌 우리 왕을 더럽히는 것이겠소? 일이 이루어지면 공은 모두 왕께 돌리고 일이 실패하면 오직 우리가 책임질 뿐이오.”
 
  이듬해 고조 유방은 동원(東垣)에서 한왕 신(信)과 여(餘)의 무리를 치고 돌아오는 길에 조나라를 지나갔다. 관고 등이 이때 백인현(柏人縣)에서 벽 사이에 사람을 숨겨두고 뒷간에서 상(유방)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은 그곳을 지나다가 묵고 가려고 했는데 마음이 동요되어 물었다.
 
  “이 현의 이름이 무엇인가?”
 
  “백인(柏人)입니다.”
 
  “백인이면 다른 사람에게 협박을 당한다[迫]는 뜻이도다!”
 
  묵지 않고 떠났다.
 
 
  관고의 죽음
 
  1년 후에 관고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사람이 그 음모를 알고서 이를 고발했다. 이에 유방은 조왕과 여러 반란자를 붙잡았다. 조오 등 10여 명은 모두 다투어 스스로 목을 찔렀는데 관고만이 홀로 화를 내며 꾸짖어 말했다.
 
  “누가 공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했는가? 지금 왕께서는 진실로 아무런 모의도 하지 않았는데 함께 붙잡혔소. 공들이 죽어버리면 누가 마땅히 왕은 반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힐 것이오?”
 
  마침내 죄인을 싣는 수레에 실려 조왕과 함께 장안에 도착했다. 관고는 옥리에게 말했다.
 
  “오직 우리만이 한 것이지 왕은 알지 못하오.”
 
  옥리가 몽둥이로 수천 대를 치고 쇠로 살을 찔러 몸이 성한 데가 없었는데도 관고는 끝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정위(廷尉)가 관고를 조사한 결과를 보고하자 유방은 이렇게 말했다.
 
  “장사(壯士)로구나! 누가 그를 아는 자가 없는가? 사사로운 것을 갖고서 물어보게 하라.”
 
  중대부 설공(泄公)이 말했다.
 
  “신이 평소 그를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조나라에서 명예와 의로움을 중히 여기고 남에게 침범을 당하지 않으며 한 번 하겠다고 한 것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입니다.”
 
  유방은 설공으로 하여금 부절을 가지고 대로 만든 가마를 타고 가서 관고를 만나보게 했다. 고가 설공을 올려다보자 고생하는 것을 위로하며 평소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왕(張王·조왕 장오)이 결단코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관고가 말했다.
 
  “사람이라면 어찌 각자가 자신의 부모와 처자식을 아끼지 않겠소? 지금 나는 삼족(三族)이 다 죽게 된 죄를 선고받았는데 어찌 왕과 내 가족을 바꿀 수 있겠소? 생각건대 왕은 진실로 모반하지 않았고 오직 우리가 그것을 한 것이오.”
 
  이 일을 일으키게 된 이유와 원인, 그리고 왕은 이 사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갖추어 말했다. 이에 설공은 갖추어 유에게 그대로 보고했고, 유는 마침내 조왕을 풀어주었다.
 
  상은 고가 능히 스스로 한 번 하겠다고 한 것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는 점을 뛰어나게 여겨 설공으로 하여금 그를 용서해주도록 하니 가서 일러 말했다.
 
  “장왕은 이미 풀려났고 상께서는 족하(足下)를 아름답게 여겨 족하를 풀어주라고 하셨소.”
 
  관고가 말했다.
 
  “내가 죽지 않았던 까닭은 장왕께서 모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일 뿐이었소. 이제 왕께서 풀려나셨으니 나의 책임은 다했소. 그리고 남의 신하 된 자로서 찬탈하고 시해하려 했다는 이름을 가지고 어찌 얼굴을 들고서 다시 상을 섬길 수 있겠소이까!”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스스로 목을 끊어 죽었다.
 
 
  뛰어난 이를 알아본 유방, 그들을 쓰다
 
  이에 유방은 조왕의 살아남은 여러 빈객이 뛰어나다고 여겨 모두 제후의 재상이나 군수 등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그릇에 맞게 부리는 것[器之]이다. 반고의 《한서》 전숙전(田叔傳)의 내용이다.
 
  〈효문제(孝文帝)는 즉위한 초기에 전숙을 불러 물었다.
 
  “공은 천하에 훌륭한 이[長者]들을 알고 있는가?”
 
  대답했다.
 
  “신이 어찌 그런 자들을 제대로 알겠습니까?”
 
  상이 말했다.
 
  “공은 훌륭한 사람이니 마땅히 알 것이다.”
 
  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전에 운중(雲中) 군수를 지낸 맹서(孟舒)가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 무렵 오랑캐가 운중군을 대거 침입한 일로 말미암아 맹서는 면직당한 상태였다. 상이 말했다.
 
  “선제(先帝)께서 맹서를 운중 군수로 두신 지가 10여 년이나 되었는데 오랑캐가 일거에 침입했을 때에 맹서는 굳게 지키지 못했고 이유도 없이 사졸들만 수백 명이나 전사했다. 훌륭한 이가 어찌 본래 사람을 죽게 만든다는 것인가?”
 
  숙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 관고 등이 모반했을 때 천자께서는 밝은 조서를 내리시어 조나라에서 감히 조왕을 따르는 자들은 삼족을 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맹서는 스스로 삭발을 하고 목에 쇠칼을 차고 조왕 장오가 가는 곳마다 따랐고,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한 목숨을 돌보지 않았는데 어찌 그 자신이 운중 군수가 될지 알았겠습니까?
 
  (또 당시에는) 한나라가 초나라와 서로 대치하고 있어 사졸들은 몹시 지치고 힘들어했습니다. 흉노의 묵돌(冒頓)이 새롭게 흉노의 북쪽에 있는 오랑캐의 무리를 복속시키고 우리의 변경을 침략해 해악을 끼쳤습니다. 맹서는 장졸들이 매우 지치고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서 차마 그들에게 싸우라는 명을 내리지 못했는데 사졸들이 다투어 성을 지키며 적과 죽기로 싸웠습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려는 것과 같았고, 이 때문에 전사한 병졸이 수백 명이나 속출했던 것이지 맹서가 어찌 고의로 그들을 (사지로) 내몰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맹서가 훌륭한 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이에 상이 말했다.
 
  “뛰어났구나! 맹서는.”
 
  다시 (맹서를) 불러 운중 군수로 삼았다.
 
 
  도리를 아는 신하 전숙
 
  몇 년 후에 전숙이 법에 걸려들어 관직을 잃었다. 양효왕[梁孝王·경제(景帝)의 동생인 유무(劉武)]이 사람을 보내 한나라의 의신(議臣) 원앙(袁盎)을 살해하자 경제(景帝)는 숙을 불러 양(梁)나라로 가서 그 사건을 조사하게 하니, 숙은 그 사건을 샅샅이 조사했다. 돌아와서 보고하자 상이 말했다.
 
  “그 일의 실상은 어떤 것인가?”
 
  숙이 말했다.
 
  “상께서는 양나라의 일에 관해 묻지 마시길 바랍니다. 지금 양왕을 법대로 사형에 처하지 못하면 한나라의 법이 폐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만약 그를 사형에 처하게 되면 태후(太后·문제의 황후이자 경제와 양왕의 친모)께서는 식사를 하셔도 맛을 못 느끼실 것이고, 잠자리에 들어도 편히 주무시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렇다면 폐하께도 큰 근심이 될 것입니다.”
 
  상은 그를 매우 뛰어나다고 여겨 노(魯)나라 재상으로 삼았다.
 
  숙이 노나라의 재상이 되어 부임한 초기에 백성 중에서 왕이 자신의 재물을 빼앗아갔다고 호소한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 숙은 그들 중에 주동자 20여 명을 붙잡아 각기 태형(笞刑)을 시행하고서 그들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왕은 그대들의 군주가 아니던가? 어찌해서 감히 자신들의 군주를 헐뜯을 수 있단 말인가!”
 
  왕은 이 소식을 듣고서 크게 부끄러워하며 재물창고에서 돈을 꺼내어 재상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재상이 말했다.
 
  “왕께서 스스로 재물을 탈취하시고 저에게 그것을 상환하도록 하면 이는 군왕께서는 악행(惡行)을 저지르시고, 저는 선행(善行)을 베푼 것이 됩니다.”
 
  노나라 왕은 사냥을 좋아해 재상은 늘 왕을 시종하여 사냥터에 갔는데 왕은 그때마다 재상에게 관사(館舍)에 가서 쉬라고 했다. (그러나) 재상은 사냥터에 나와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 앉아서 왕을 기다리며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왕께서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 계시는데 나 홀로 어찌 관사 안에 가서 쉴 수 있겠는가!”
 
  왕은 이 때문에 자주 사냥을 하는 것을 삼가게 되었다.
 
  몇 년 후 숙은 재임 중에 사망했는데 노나라 왕은 100근의 황금을 내려주어 장례비용에 쓰게 했다. 막내아들 인(仁)은 이를 받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의리상으로 선친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도리를 아는 임금과 신하가 만들어가던 세상이 새삼 그리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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