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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20〉 신뢰를 얻지 못한 諫言은 비방으로 들린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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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의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는 ‘임금이 신뢰하는 신하가 먼 곳에서 돌아와 귀에 거슬릴 수도 있지만 곧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의미
⊙ “한 동이 술과 두 그릇의 밥을 질그릇에 담고 마음을 결속시키기를 창문을 통해서 하면 끝내는 허물이 없다”(《주역》)
⊙ 漢 高祖 때의 상산사호, 武帝 때의 전천추, 조선 태종 때의 권근 등이 신뢰를 바탕으로 지혜로운 諫言을 한 사례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淸나라 黃愼의 〈常山四皓圖〉.
장량은 이들 네 현자를 끌어내 혜제가 태자 자리를 지키도록 도왔다.
  《논어(論語)》 이인(里仁)편에서 공자(孔子)의 제자 자유(子游)는 이렇게 말한다.
 
  “임금을 섬김에 자주 간(諫)하면 욕을 당한다.”
 
  흔히 ‘직언(直言)’, ‘직간(直諫)’만을 강조해온 성리학이나 주자학에 익숙한 우리가 볼 때는 조금은 낯선 소리다. 그러나 자장(子張)편에서 또 다른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는 이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윗사람에게 믿음을 준(혹은 신임을 얻은) 연후에 간언해야 하는 것이니, 만일 믿음을 주지 못하고서 간하면 윗사람은 자신을 헐뜯는다고 여길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관계를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이다. 사실 공자도 바로 이런 뜻에서 한 말이 있는데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가 바로 그것이다. 애초에 오역(誤譯)을 하고 있으니 그 뜻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기존의 흔한 번역이다.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이 오역의 방점은 ‘먼 곳’에 찍혀 있다. 물론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면 반갑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내용이 《논어》의 첫머리 세 가지 중의 두 번째를 차지할 수는 없다. 만일 이런 번역이 맞는다고 한다면 반문을 해보겠다. 가까이에서 자주 보는 친구가 찾아오면 즐겁지 않다는 말인가? 공자가 기껏 ‘가까이에서 자주 보는 친구보다는 먼 곳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벗에게 즐거운 마음을 가지라’는 《명심보감(明心寶鑑)》만도 못한 처세의 노하우를 던졌고, 또 미지의 편집자는 그 뜻을 받아 《논어》의 첫머리 세 가지 중의 두 번째 자리에 두었겠는가? 당연히 아니다.
 
 
  ‘朋’은 同志之友
 
  이런 오역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실마리는 ‘붕(朋)’에 있다. ‘붕’은 그냥 친구가 아니다. ‘뜻을 같이하는 친구[同志之友(동지지우)]’가 ‘붕’이다. 임금에게 동지와 같은 신임을 받고 있는 신하다.
 
  두 번째는 ‘원(遠)’이다. ‘멀다’는 뜻밖에 모르면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여기서 ‘원’은 ‘멀다’가 아니라 ‘밝다’는 뜻이다. 《논어》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원’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자장이 밝다 혹은 밝음[明]에 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점점 젖어 드는 (동료에 대한) 참소와 살갗을 파고드는 (친지들의 애끓는) 하소연을 (단호히 끊어) 행해지지 않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밝다[明]고 말할 수 있다. (그 같은) 점점 젖어 드는 (동료에 대한) 참소와 살갗을 파고드는 (친지들의 애끓는) 하소연을 (단호히 끊어) 행해지지 않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음과 어두움으로부터) 멀다[遠]고 말할 수 있다.”〉
 
  요즘은 참소나 참언[讒]이란 말보다는 중상모략・무고・헐뜯기 등이 더 자주 사용된다. 공자의 이 말도 군주나 지도자를 향해 하는 말이다. 리더가 미리 알아서 신하들 간에 실상과 동떨어진 중상모략이 행해지지 않게 하고 주변 사람들의 사사로운 청탁을 끊어낼 때 그 리더십은 공명정대하다[明=遠]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붕(朋)과 원(遠)을 풀면 거의 다 된 셈이다.
 
  신하들 중에 신뢰하며 뜻을 같이하는 신하가 있는데 먼 곳에, 즉 군주 주변의 사사로운 측근이나 근신(近臣)이나 후궁(後宮)들이 늘 해대는 익숙한 세계[近]에서 벗어난 곳에 가서 공정하고 비판적이고 때로는 귀에 거슬릴 수도 있는 불편하지만 곧은 이야기들을 듣고서 바야흐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당연히 어떤 식으로건 그런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군주로서 불편한 정도를 넘어 불쾌하고 크게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신뢰를 공유하고 뜻을 같이한다 해도 신하의 입장에서 쉽게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그것은 온전히 군주의 마음 자세에 달렸다. 겉으로만 즐거워해서도 신하는 입을 떼기 어렵다. 진실로[亦] 그러할 때라야 신하는 조심스럽게 군주의 허물들을 피하지 않고 전달할 수가 있다. 눈 밝은 독자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고대(古代) 중국부터 우리 조선시대까지 면면하게 이어진 언관(言官)의 간쟁(諫爭) 정신은 바로 이 같은 임금의 열린 마음이 전제될 때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다.
 
 
  한 동이 술과 두 그릇의 밥
 
  이것이 지금까지 필자가 10여 년 논어 공부를 통해 알아낸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의 속뜻이었다. 그러나 최근 《주역(周易)》 공부를 통해 이를 더욱 심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감(坎)괘( )의 밑에서 네 번째 음효에 대한 풀이 덕분이다. 이를 소개한다. 이른바 감괘의 육사(六四・밑에서 네 번째 음효)에 대한 주공의 풀이다.
 
  “한 동이 술과 두 그릇의 밥을 질그릇에 담고 마음을 결속시키기를 창문을 통해서 하면 끝내는 허물이 없다.”
 
  무슨 시구(詩句)처럼 보이는 이 모호한 표현을 송(宋)나라 학자 정이천(程伊川)은 이렇게 풀어냈다.
 
  “이는 신하 된 자로서 위험에 대처하는 도리[處險之道]를 말하고 있다. 대신이 위험과 어려움의 때에 직면했을 때에는 오직 지극한 열렬함으로 임금에게 믿음을 보이고 군자와의 사귐을 튼튼하게 해서 틈이 생겨서는 안 되고, 또한 능히 임금의 마음을 열어 밝히며[開明] 가히 허물이 없는 상태를 보존할 수 있다. 무릇 윗사람의 두터운 신임을 바란다면 오로지 그 질박한 진실함[質實]을 다할 뿐이다. 허례허식을 많이 하고 꾸밈을 요란하게 하는 데에는 음식을 잘 차린 잔치만 한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잔치를 갖고서 비유한 것이니 이는 마땅히 요란하게 꾸미지 말고 오직 질박한 진실함만으로 군주를 대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즉 한 동이 술과 두 그릇의 밥만 사용하되 다시 소박한 질그릇을 집기로 사용하는 것은 질박함이 지극한 것이다.
 
  그 질박함이 이와 같고 또 모름지기 ‘마음을 결속시키기를 창문을 통해서’ 해야 한다. 마음을 결속시킨다는 것은 군주에게 나아가 군주의 마음을 결속시키는 방도를 말한다. 창문[牖]이란 열어서 빛을 통하게 하는 것이다. 방은 어둡기 때문에 창문을 두어 빛을 통하게 해서 밝힌다. 창문을 통해서 한다는 것은 빛이 통하는 밝은 곳으로부터 먼저 한다는 말이니 군주의 마음이 밝은 곳을 비유한 것이다.
 
  남의 신하 된 자가 진실한 믿음[忠信]과 좋은 도리[善道]로 군주의 마음을 결속시키려 할 때에는 반드시 군주가 밝게 알고 있는 곳에서부터 먼저 하면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가려져 막힌 곳이 있고 쉽게 통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가려져 막힌 곳이 어두운 부분이고 쉽게 통할 수 있는 곳이 밝게 알고 있는 부분이다. 마땅히 그가 밝게 알고 있는 부분을 취해서 설명하고 이해시켜 신임을 구한다면 쉽다. 그래서 ‘마음을 결속시키기를 창문을 통해서’ 한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설사 위험하고 어려운 때에 처하더라도 끝내는 허물이 없을 수 있다. 또 군주의 마음이 환락에 빠져 가려져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가려졌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데 강력하게 그 환락의 잘못됨만을 비판하여 군주가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다면 어쩌겠는가? 반드시 가려져 있지 않은 일에서부터 차근차근 미루어 헤아려 가려진 부분을 언급한다면 그 마음을 깨칠 수가 있는 것이다.”
 
 
  유방의 마음을 바꾼 상산사호
 
漢高祖가 신뢰했던 張良.
  ‘명(明)’이란 창문 중에서도 가장 밝은 남쪽 창문, 즉 임금도 공감할 수 있는 밝은 도리를 가리킨다. 이렇게 해서 임금의 마음을 바꾼 사례로 정이천은 한나라 유방(劉邦)이 척희[戚姬·척부인(戚夫人)을 가리킨다. 고조(高祖)의 총희(寵姬)로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낳았다]를 아껴 태자를 여의로 바꾸려 했을 때 그의 마음을 바꾼 사호(四皓)의 이야기를 든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장량전(張良傳)이다.
 
  〈한나라 12년 상이 나아가 포(布·경포)의 군대를 쳐서 깨트리고 돌아왔는데 병이 더 심해지자 더욱더 태자를 바꾸고 싶어 했다. 장량이 간언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장량은 병을 핑계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숙손태부(叔孫太傅·숙손통)는 고금의 일을 끌어들여 설득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태자를 위하는 간쟁을 했다. 상은 거짓으로 그러겠노라고 했지만 오히려 어떻게든 바꾸고 싶어 했다. 연회가 열려 술자리가 마련됐는데 태자가 상을 모시게 됐다. 네 사람이 태자를 시종했는데 나이가 모두 80여 살이었고 수염과 눈썹이 은빛으로 희었으며 의관이 몹시 훌륭했다. 상이 이들을 괴이하게 여겨 “저들은 무엇을 하는 자들인가?”라고 하자 네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며 각자 자신의 이름과 성을 말하기를 동원공(東園公), 녹리선생(角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이라고 했다.
 
  이에 상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찾은 것이 여러 해인데 그대들은 나를 피해 달아나더니 지금은 그대들이 어찌 스스로 내 아이를 따르며 교유하고 있는가?”
 
  네 사람 모두 말했다.
 
  “폐하께서는 선비를 하찮게 여기고 욕도 잘하시니 신들이 욕을 먹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에 달아나 숨었던 것입니다. 남몰래 듣건대 태자께서는 사람됨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고 삼가면서[仁孝恭敬] 선비를 아끼시니 천하에서는 목을 빼고서 태자를 위해 죽으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이므로 그 때문에 신들이 온 것일 뿐입니다.”
 
  상이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그대들은 잘 해서 끝까지 태자를 보살피며 지켜주시오.”
 
  네 사람이 축수를 이미 마치고 총총히 떠나가자 황상은 그들을 멀리 안 보일 때까지 전송했다.〉
 
 
  漢武帝의 마음을 돌린 전천추
 
漢武帝.
  한나라 역사에서 이 같은 지혜로운 간언을 했던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한무제(漢武帝)가 여태자를 죽이고서 오랫동안 용서를 하지 않았다. 이때 전천추가 글을 올려 그 처사가 잘못됐음을 지적했는데 이 또한 구사의 도리에 해당한다. 반고의 《한서(漢書)》 전천추전(田千秋傳)이다.
 
  〈차천추(車千秋)는 본래의 성이 전씨(田氏)인데 그의 선조는 제(齊)나라의 (명문가였던) 전씨 중에서 (함곡관 동쪽인) 장릉(長陵)으로 이주한 집단에 속했다. 천추(千秋)는 고침랑(高寢郞・고조의 능을 지키는 낭관)이 됐다. 여태자가 강충에게 중상모략을 입어 패망한 일이 있은 지 오랜 시간이 흘러 천추는 급변의 사태를 논하는 글을 올려 태자의 원한을 대변해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군대를 가지고 농간을 부렸다면 그 죄는 태형에 해당합니다. 천자의 아들이 잘못해서 사람을 죽였다면 무슨 죄에 해당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꿈을 꿨는데 머리가 하얀 노인 한 분이 신에게 일깨워준 이야기입니다.’
 
  이때 상은 태자가 두려움에 떨어서 그런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추의 말을 듣고서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천추를 불러 만나보았다. 어전에 이르렀는데 천추는 키가 8척 남짓에 체모가 매우 수려했으며, 무제는 그를 만나보고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자간의 일에 대해서는 남들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건만 공만이 홀로 그렇지 않음을 밝혀주었다. 이는 고묘(高廟)의 신령이 공을 시켜 나를 일깨운 것이니 공은 마땅히 나를 보좌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는 즉석에서) 천추를 세워 제배(除拜)해 대홍려(大鴻臚・귀순한 이민족과 제후들을 관할하는 벼슬)로 삼았다. 여러 달이 지나 드디어 유굴리를 대신해 승상으로 삼고 부민후(富民侯)에 봉했다. 천추는 다른 재능이나 술학(術學・경학)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문벌이나 공로도 없이 단지 한마디 말로 상의 뜻을 일깨워 불과 몇 달 만에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봉후(封侯)됐으니 이는 세상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태종의 마음을 바꾼 권근
 
  우리 역사에서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이 같은 밝은 간언[明諫]의 사례가 있다. 1406년(태종 6년) 8월 18일 태종은 전격적으로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겠다는 전위(傳位) 의사를 밝혔다. 당연히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하륜, 성석린 등 재상들이 전위 의사 철회를 청했으나 태종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런 가운데 길창군 권근(權近)이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중 일부다.
 
  〈《주역》에 이르기를 “일을 함에 있어 그 처음을 잘 도모하라[作事謀始·송(訟)괘( )의 상(象)에 대한 풀이에 나오는 말이다. ‘하늘과 물이 어긋나게 가는 것을 송(訟)이라 하는데 군자는 이를 보고서 일을 함에 있어 그 처음을 잘 도모한다’]”고 했으니 그 처음 단계에서 잘 도모하지 못하면 마침내 반드시 근심이 있는 법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대사(大事)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세자께서 비록 총적(冢嫡·적장자)이라 하더라도 어리고 약하시어 여러 사람의 마음에 미흡하오니 하늘의 뜻이 아직도 모이지 않았음을 진실로 알 만합니다. 전하께서 나라의 형세가 염려스러운 것은 걱정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뜻을 어기고 많은 사람의 마음을 거슬러가면서 억지로 어리고 약한 자에게 (나라를) 전해주려고 하시니, 이는 종묘사직을 가벼이 여겨 내팽개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자세히 살펴 조치하시어 국새(國璽)를 다시 거두시고 친히 만기(萬幾)에 임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자의 연기(年紀·나이)가 장성하여 공덕(功德)이 더욱 나타나고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즐겨 따르며 천명(天命)이 모이기를 기다린 연후에 먼저 (명나라) 조정(朝廷)에 보고하고 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려서 그것을 전하신다면 종묘사직에 심히 다행할 것이요, 국가에도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
 
  많은 이의 글이 올라왔지만 실록은 유일하게 이 글에 대해 “상은 비록 윤허하지 않았지만 뜻이 조금은 움직였다[感悟]”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틀 후 마침내 태종은 전위의 명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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