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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레이와(令和) 시대’ 맞아 ‘가깝고도 먼 나라’에 가다!

화려하면서도 심오한, 그러면서도 섹시한 일본의 민낯

글·사진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chosh760@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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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와(令和)’란 年號를 가지고 해본 空想
⊙ 새 시대 맞느라 바쁜 일본, 한숨 나오는 우리의 현실
⊙ 한 老人에게 ‘천황은 어떤 존재냐’고 물었더니…
⊙ 미쓰비시 빌딩, 오쿠라호텔과 관련 있는 ‘경영의 鬼才’
도쿄 긴자(銀座)의 가부키(歌舞伎) 극장.
  4월 29일 도쿄행 비행기에 탑승하자 가슴이 탁 트여왔다. 그간 일본을 몇 번 가봤지만 도쿄는 처음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 가보는 곳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다. 비록 그것이 일 때문일지라도….
 
  때마침 일본은 역사상 중요한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헤이세이(平成) 시대’의 일왕 아키히토(明仁)가 퇴위하고, 그의 장남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레이와(令和) 시대’를 열 채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환기를 눈으로 보고 싶은 생각에 2018년 말부터 준비한 일본행이었다.
 
 
  令和 시대 앞두고 활기 넘치는 도쿄
 
도쿄 긴자(銀座)의 명물 세이코(SEIKO) 시계탑.
  비행기에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일본은 왜 새 연호를 레이와라고 정했을까. 일본 정부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시가집(詩歌集)인 《만요슈(万葉集)》에 나오는 ‘初春令月, 氣淑風和’(초춘영월, 기숙풍화·초봄의 길한 달, 기는 맑아지고 바람은 부드럽다)라는 글에서 두 자를 따온 것이라고 했다.
 
  잘 살펴보면 헤이세이의 ‘평(平)’자와 레이와의 ‘화(和)’자를 합치면 ‘평화(平和)’라는 말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戰犯國)인 일본은 전후(戰後),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 군국주의의 탈을 벗고, 스스로 무장해제를 했다. 일본에 있어 ‘평화 추구’는 전범국이 치러야 할 혹독한 대가(代價)이자 당위적 명제였다. 그 무렵 일왕도 ‘신적(神的) 존재’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강등됐다.
 
  헤이세이와 레이와 시대의 일왕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 소재로부터 자유롭다. 아키히토 일왕은 재위 기간, 전력(戰力) 보유 금지로 대표되는 ‘평화헌법(일본 헌법 제9조)’ 준수는 물론, 일본이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뜻을 여러 번 피력해왔다. 나루히토 새 일왕도 비슷한 입장을 견지해왔다.
 
  즉 ‘우리의 평화 의지는 헤이세이 이후에도 변함없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치고자 ‘레이와’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는, 일종의 공상(空想)을 해본 것이다.
 
  하네다(羽田)공항에 착륙하자 작열하는 태양에 눈이 부셨다. 뜨겁게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은 취재를 하는 데 있어 길조(吉兆)인 듯 보였다. 도쿄 시내로 이동하기 위해 스카이라이너(우리의 공항철도와 같은 급행열차)에 탑승하자 이내 상황이 달라졌다. 순식간에 태양은 자취를 감추고 잿빛을 머금은 먹구름이 몰려온 것이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이동하는 데 걸린 1시간30분 동안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에노(上野)역에서 히비야선(日比谷線)으로 환승, 숙소가 있는 롯폰기(六本木)에 다다르자 이번엔 강풍이 온몸을 에워쌌다. 결국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택일(擇日)을 잘못했구나’라고 자책해야만 했다.
 
  그런 감정과 별개로 도쿄 시내 곳곳은 활기가 넘쳤다. ‘令和’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보였고, 지하철 가판대 등에서는 전후 일본의 연호(年號)인 ‘令和·平成·昭和(레이와·헤이세이·쇼와)’가 적힌 티셔츠도 특별 판매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법한 게 ‘레이와 시대’가 갖는 의미는 또 있다. 202년 만에 처음으로 일왕이 생존한 상태에서 양위(讓位)를 하기 때문이다. 기자가 일본을 방문한 시점엔 ‘두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 있는 형국이었다. 이 두 개의 태양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하나의 태양’으로 바뀌는 셈이었다. 한 시대가 종언(終焉)을 고하고, 새 시대가 오는 한복판에 나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묘한 감정이 일었다.
 
  때마침 일본은 ‘골든위크’ 기간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해마다 ‘쇼와(昭和) 일왕’ 히로히토(裕仁·1901~1989)의 생일인 4월 29일부터 5월 초 사이에 헌법기념일(3일), 녹색의날(4일), 어린이날(5일) 등 공휴일이 몰려 있는데, 이 휴일들과 주말이 겹치면 통상 일주일 정도 연휴로, 이 기간을 ‘골든위크’라고 부른다. 올해엔 새 일왕의 즉위도 맞물려 있어 무려 열흘간 이어지는 긴 골든위크였다. 어느 나라나 그렇듯 긴 연휴에 바빠지는 곳은 백화점과 상점들이다. 도쿄 시내 백화점과 상점들은 손님을 맞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부자 냄새’ 롯폰기, ‘땀 냄새’ 도쿄타워
 
도쿄의 名物 도쿄타워.
  숙소에 여장을 풀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롯폰기힐스였다. 롯폰기는 도쿄에서도 손꼽히는 부촌(富村)이다. 서울 성북동처럼 고대광실 같은 저택은 찾기 어렵지만 고급 빌라촌이 여러 군데 형성돼 있다. 외관은 수수하지만 내부는 깜짝 놀랄 정도라고 한다. 롯폰기 일대는 대도시의 한복판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롯폰기힐스에 위치한 ‘TV아사히’ 본사 앞에선 한바탕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 ‘전통주’ 사케를 파는 장(場)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젊은이들로 왁자지껄했다. 롯폰기 주택가에선 ‘사람 냄새’가 거의 안 느껴졌는데,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사람 사는 동네 같았다. 참고로 TV아사히는 유명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 말려〉(크레용 신짱·クレヨンしんちゃん)를 비롯해 몇 년 전 국내에서 리메이크된 의학 드라마 〈하얀 거탑(白い巨塔)〉을 최초(1967년)로 방영한 민영 방송사다. 방송사 로비는 각종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가득 차 있었다.
 
  알다시피 일본은 물가가 비싸다. 웬만한 거리는 도보(徒步)로 이동해야지 어설프게 지하철이라도 탑승하면, 한두 정거장 이동하는 데에만 2000원에 가까운 돈을 지불해야 한다(게다가 일본 지하철은 한국 지하철과 달리 매우 복잡하다). 쌈짓돈이라도 아낄 생각에 도쿄타워를 가기 위해 속보(速步)를 하기 시작했다. TV아사히 본사에서 약 1.8km밖에 안 돼 걸어가도 충분할 것 같았지만, 오산이었다. 타워가 고지대(高地帶)에 있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비가 와 다소 쌀쌀한 날씨임에도 온몸이 땀에 젖었다.
 
  그렇게 찾은 도쿄의 명물(名物) 도쿄타워. 하지만 우뚝 솟은 타워는 이 낯선 이방인을 반기지 않았다. 도쿄를 찾은 전 세계 관광객이 도쿄타워에만 몰려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줄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가까이서 눈으로 보는 데에만 만족하고 물러서야 했다. 일본인들이 골든위크를 이렇게 웃고 떠들며 보내는 데에는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일본은 미래를 향해 뻗어갈 채비를 착실하게 해왔다. 오는 6월엔 오사카(大阪) G20 정상회의, 8월엔 아프리카 정상회의, 9월엔 럭비 세계 월드컵을 앞두고 있으며, 내년엔 도쿄올림픽도 예정돼 있다. 그러는 중에 묵은 시대(헤이세이)를 보내고, 새 시대(레이와)를 앞두고 있으니 일본인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도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은 오직 미래, 그리고 번영만을 바라보며 뛰고 있는 듯했다.
 
  새 시대를 맞이하느라 부산을 떠는 일본을 보며 우리가 처한 현실에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과 한반도를 둘러싼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귀국 후, 이 글을 쓰고 있는 날(5월 5일) 북한은 동해안으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한국 정부는 미사일이 아닌 발사체라고 강변하고 있다. 로그 스테이트(rogue state·깡패 국가)에 면죄부를 주려는 우리 정부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대한민국이 ‘역사의 나침반’을 제대로 읽고 나아가고 있는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일본인에게 있어 日王은 무엇인가?
 
일본인들의 聖地인 황궁(皇居·고쿄).
  헤이세이의 마지막 날이자 레이와 시대를 하루 앞둔 지난 4월 30일, 일본의 성지(聖地) 황궁(皇居·고쿄)에 들렀다. 이날은 아키히토 일왕의 퇴위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29일부터 내린 비는 이날부터 굵어졌다. 그러나 비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황궁에 도착했을 때가 오전 11시쯤이었는데, 이미 도쿄 시민, 해외 취재진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일본인들은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 ‘덴노헤이카(천황폐하·天皇陛下)’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 경건한 표정으로 황궁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경시청 관계자들이 확성기로 ‘천황폐하나 황실 가족분들께서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고 방송했다. ‘이제 사람들이 자리를 뜨겠군’ 했지만 뒤돌아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계속 울려대는 방송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 멀리서 서너 무리의 새로운 사람이 떼를 지어 황궁 앞으로 오고 있었다.
 
  어쩌면 이들에게 일왕이 얼굴을 내미는 ‘이벤트’ 따위는 필요 없었을지 모른다. ‘역사의 현장’에 나와 일왕과 가까운 위치에서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은 만족하고 있었을 것이다. 굵은 빗방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리를 뜨지 않은 진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황궁을 한참 동안 지그시 바라보는 한 노인이 눈에 띄었다. 뭔가 상념에 잠긴 듯한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일본인에게 천황은 어떤 존재입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분은 우리의 등대’라고 했다. 모든 의미가 함축된 표현이었다. 현재 일왕은 상징적인 군주에 불과하고, 일본 국민들에게 그 어떠한 시혜(施惠)도 않는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일왕은 아직까지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듯하다.
 
  한때 군국주의란 망령(亡靈)이 스며들어 우리 민족의 혼(魂)을 말살하려고 했던 일왕과 일본인들이다. 원폭(原爆)을 맞아 재기 불능일 줄 알았던 일본은, 불과 몇십 년 만에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하계올림픽 두 번(1964년, 2020년), 동계올림픽 두 번(1972년, 1998년)을 개최한 나라가 됐다. 특유의 친절함과 상냥함이 몸에 배어 있어, 세계에서 가장 대우받는 국민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어떤 면에선 매우 권위적이다. 사실상 껍데기에 불과한 군주(君主)에게 한껏 예(禮)를 다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정치는 폐쇄적이기까지 하다. 자민당 ‘1당 집권 체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않나. 나는 이 형언할 수 없는 ‘부조화’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대체 이들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일본인을 한 단어, 한 문장으로 규정짓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도쿄에서 맡은 이병철 회장의 香臭
 
삼성본관의 모델이 된 미쓰비시(三凌) 빌딩.
  황궁에서 나와 도쿄 시내를 순회하는 ‘스카이버스’를 탔다. 마침 티켓 발매소가 미쓰비시(三菱) 빌딩 1층에 있었다. 1973년 준공된 이 빌딩은 지상 15층, 지하 4층의 흰색 건물이다. ‘경영의 귀재(鬼才)’ 이병철(李秉喆·1910~1987) 삼성그룹 회장은 1970년대 중반, 서울 태평로에 지상 28층짜리 삼성본관(三星本館)을 지을 때 이 미쓰비시 빌딩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실제로 두 건물은 많이 닮았다.
 
  이병철 회장은 생전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경영 구상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 초반, 이 회장이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최종 결심한 곳도 도쿄다. 삼성맨들은 이를 ‘도쿄구상(東京構想)’이라고 부른다.
 
  이병철 회장이 도쿄를 방문하면 으레 묵던 곳이 오쿠라(大倉)호텔이다. 이병철 회장이 서울 신라호텔을 지을 때 벤치마킹한 호텔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오쿠라호텔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일본에 갈 때마다 묵는 호텔은 오쿠라(大倉)이다. 동경 도심에 있는 이 호텔은 그 시설과 서비스가 구미(歐美)의 초일류급 수준일뿐더러 일본적 정서와 구미의 기능성이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훌륭한 호텔이다. “외관이나 내부는 일본 고유의 문화를 상징하도록 디자인했다”고 오쿠라의 노다(野田) 회장은 말한다. 헤이안(平安) 시대의 문화를 재현했다고 하는 로비에 들어서면 역시 하나의 ‘일본의 얼굴’을 감지할 수 있다.〉
 
  이 회장이 묵던 오쿠라호텔 본관은 현재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공사 중이라고 한다. 도쿄에서 느낀 호암(湖巖) 이병철의 향취(香臭)는 제법 강렬했다. 일본의 치밀한 기술과 서구의 합리적 경영 기법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던 이병철.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불모지(不毛地) 대한민국에 선진 산업을 이식(移植)한 그의 혜안(慧眼)에 고개가 숙어졌다.
 
 
  시부야에서 맞이한 ‘레이와 시대’
 
긴자 거리의 야경.
  무개차(無蓋車)인 스카이버스에 탑승하자마자 빗방울이 매우 굵어졌다. 우비를 챙겨줬지만, 소용이 없었다. 빗방울과 함께 몰아치는 강풍도 꽤나 힘들게 했다. ‘이 뭔 고생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추억을 많이 남기고 싶은 게 사람의 속성이다. 버스는 일본 유수의 언론사를 많이 지나쳤다. 기자가 본 것만 해도 《아사히(朝日)신문》 《요미우리()신문》, 지지(時事)통신, 니혼(日本)TV, 후지(フジ)TV 등이었다.
 
  버스는 오다이바(お台場)와 ‘레인보우 브리지’를 지나 긴자 중심부로 향했다. 긴자의 별칭은 ‘간판의 박물관’이란다. 일본의 초대형 오피스 빌딩 꼭대기엔 건물을 상징하는 간판이 거의 붙어 있지 않다. 1층 가까이 가서야 이 건물이 어떤 건물인지 알아챌 수 있을 정도다.
 
긴자의 파친코.
  그러나 긴자는 간판부터 화려함이 남다르다. 전 세계 명품 브랜드를 비롯해 쇼핑몰, 크고 작은 상점의 간판은 휘황찬란 그 자체였다. 현대식 건물 사이에 위치한 가부키(歌舞伎) 극장은 일본 전통 양식이라 더욱 눈에 띄었다. 긴자는 일본 국력의 상징이자 선진국 일본의 본산(本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정 무렵, 긴자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쿄 시부야(澁谷)로 향했다. 시부야는 긴자, 롯폰기, 신주쿠(新宿)와 더불어 도쿄 최대 번화가 중 한 곳이다. 시부야역 앞 교차로는 매우 유명하다. 일명 ‘스크램블(Scramble) 교차로’라고 불린다. 직선과 사선으로 복잡하게 얽힌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점등하면, 수많은 인파(최다 3000명 수준)가 일제히 ‘앞다퉈 건너’ 그런 이름을 붙였다. 우리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해 익숙한 장면이기도 하다.
 
‘레이와 시대’ 개막을 맞이하기 위해 도쿄 시부야(澁谷)역 앞에 모인 사람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자정 무렵, 시부야에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라고 했다. 레이와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그곳에 많은 사람이 모일 거란 얘기였다. 시부야역 플랫폼에서부터 이상한 차림을 한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밖으로 나오니 엄청난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비도 오고 해 시부야역 2층 큰 창문 앞에 자리를 잡고 창문 바로 앞 건물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이댔다. 기자 뒤, 그리고 좌우로 수많은 일본인이 셀카봉을 들고 연신 사진을 촬영했다. 몇몇은 즉석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간직하고 전하기 위해 유튜브 방송을 하기까지 했다.
 
  사실 이날, 우리의 ‘제야의 종’ 타종(打鐘) 행사 같은 카운트다운 이벤트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개원(改元)하는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비를 맞는 수고를 감내하고 있었다. 카운트다운은 기자 주변 사람들이 일본어로 ‘고! 욘! 산! 니! 이치!(5, 4, 3, 2, 1)’라고 한 게 다였다. 그래도 역사가 바뀌는 순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히에신사에서 느낀 이질감
 
도쿄 아카사카(赤坂)에 있는 낡은 다방 ‘메모리’의 내부.
  레이와 시대의 첫날인 5월 1일 아카사카(赤坂)의 히에(日枝)신사를 찾았다. 일본의 신사(神社)는 야스쿠니(靖國)신사 때문에 우리에게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하지만 일본인에게는 축원(祝願)의 장이자 마음의 안식처이다.
 
  히에신사가 위치한 나가타초(永田町)는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중·참의원 의장 공관, 자민당 본부가 있는 일본 정치의 메카다. 히에신사는 정·재계의 많은 인사가 자주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발원을 하면 번창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도 얇은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히에신사엔 이미 많은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 신사를 참배하는 줄, 축원을 드리는 부적을 구매하는 줄 모두 만원이었다. 3대(代)가 함께 나온 광경도 특이했다. 4~5세로 보이는 꼬마를 신사의 단(壇) 위로 데리고 가 참배하도록 하는 부모도 있었다. 히에신사는 배례전(拜禮殿) 좌우에 원숭이 석상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원숭이를 신(神)의 사자로 여기는데, 사람들은 그 원숭이상에도 고개를 숙이며 예를 다했다.
 
  레이와 시대의 첫날을 ‘미신’을 향한 간구(懇求)로 시작하는 일본인들에게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선진 국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비(非)합리성’ ‘비과학성’을 엿본 탓일까? 한편으론 그들만의 세시풍속이 일본인들을 더욱 일본인답게 만드는 원동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에(日枝)신사의 배례전(拜禮殿).
  참배는 내키지 않아 신사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약수터처럼 물이 흘러나오는 개수대를 발견했다. 데미즈야(手水)였다. 데미즈야는 약수처럼 보였지만 음용(飮用)을 위한 게 아니었다. 국자를 이용해 물을 퍼 왼손과 오른손을 순서대로 씻고 왼손에 물을 담아 입안을 헹군 뒤, 남은 물로 국자를 씻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야 소원이 성취될 수 있다나….
 
  히에신사의 데미즈야에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메이지(明治) 일왕(1852~1912)의 ‘5월의 말씀’이 써 있다. ‘천황의 빛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일본의 위엄은 결코 흐려질 수 없다’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글은 메이지 일왕이 했던 말들로 매달 새롭게 바뀐다.
 
  신사에서 나오니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길 건너 TBS방송국 방향으로 뛰어가다가 한구석에서 묘한 느낌의 다방을 발견했다.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는 이 다방의 이름은 메모리(メムリ·기억). 70대로 보이는 노인이 운영하는 메모리 다방의 역사는 40년이나 됐다.
 
  내·외부를 둘러보고 ‘정말 기억에 남을 다방이겠구나’ 싶었다. 일본 식당이나 커피숍은 대개 흡연이 가능하다(단, 대형 쇼핑몰에 입점한 곳은 금연). 메모리 다방은 4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의 담배 연기에 절어서인지 사방의 벽이 누렇게 변색돼 있다. 의자도 움푹 팬 채 헐어 있었다.
 
  비 오는 날, 다 낡아 빠진 다방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마시는 차 한 잔이 너무도 좋았다. 커피가 특별히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낡은 느낌, 거기서 오는 세월의 정취가 마냥 좋았을 뿐이다.
 
 
  國立新美術館에서 찾은 ‘뜻밖의 감동’
 
도쿄 국립신미술관의 야경.
  숙소로 돌아오면서 표지판 하나에 눈길이 갔다. 롯폰기에 위치한 도쿄 국립신미술관(國立新美術館). 한 나라의 수준은 그 나라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가늠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다. 비도 피할 겸 미술관으로 향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그냥 지나칠 그저 그런 미술관이 아니었다. 일단 규모부터 일본 최대였으며, 그리고 미술관을 설계한 사람이 바로 일본 건축의 거장(巨匠) 구로카와 기쇼(黑川紀章·1934~2007)였다.
 
  구로카와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1941~)와 더불어 일본 근대 건축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후쿠오카(福岡)은행 본점, 오사카의 소니타워, 나카진(中銀) 캡슐타워 등이 그가 설계한 작품이다. 1980년대 후반 롯데그룹이 잠실에 롯데월드를 지을 때, 설계를 맡긴 곳도 구로카와의 설계사무소였다.
 
  천재적인 건축가였지만, 말년은 조금 고달팠던 것 같다. 갑자기 정계에 투신, ‘공생신당’을 창당하고 2007년 도쿄도지사 선거와 제21회 참의원 선거에 출마한 것이다. 물론 결과는 모두 낙선. 갑작스런 정계 투신과 실패는 그의 건강을 좀 먹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07년 10월 12일 구로카와는 급성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떴다.
 
  그가 부인이자 일본의 유명 배우였던 와카오 아야코(若尾文子)에게 남긴 유언은 일본 사회에서 화제가 됐다. 와카오가 구로카와에게 “좋은 부인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이자 “무슨 그런 말을”이란 짧은 말을 남긴 채 구로카와는 눈을 감았다고 한다. 애절한 러브 스토리는 아니지만, 완숙한 중년 부부가 생애 끝자락에서 나눈 절제되고 진솔한 배려가 느껴진다. 1983년 재혼한 두 사람은 부부 금실이 퍽 좋았던 모양이다.
 
  약간의 배경을 공부한 뒤 미술관을 바라보니 새롭게 다가왔다. 유리로 된 미술관 외관은 마치 물결이 치는 듯 유려한 곡선으로 형상화돼 있다. 석양이 질 무렵, 미술관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비에 반사된 빛이 더해져 외관은 더욱 고급스럽게 변모했다. 내부는 은은한 조명과 회(檜)나무로 보이는 우드(wood)로 켜켜이 둘러쳐져 있어 편안한 느낌을 줬다.
 
국립신미술관 내부. 은은한 조명과 우드(wood)로 장식된 벽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날 관람한 전시는 ‘Vienna on the path to modernism(근대주의의 길에 오른 빈)’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의 작품을 일본에서 만나게 되다니…. 뭔가 묘한 감정이 교차함도 잠시, 한껏 부푼 마음으로 전시회장을 돌았다.
 
  에곤 실레도 에곤 실레였지만, 진짜 감동은 바로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오토 바그너(Otto Wagner·1841~1918)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바그너라고 해서 ‘히틀러를 매료시킨 바그너가 빈, 그것도 근대 미술과 무슨 관계가 있나’ 의아했던 게 사실이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혼동한 것이니, 엄청난 무식함(?)을 확인한 셈이다.
 
  오토 바그너는 지금의 빈이라는 도시를 만든 주역이다. 빈 곳곳의 건축물 중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게 거의 없을 정도니 말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우체국 저축 은행, 카를스플라츠(Karlsplatz)역 등이 있다. 하나같이 세계 건축사에 이름을 남긴 건축물이다.
 
  에곤 실레는 성적(性的)으로 조금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다. 여동생에게 집착하는 근친 성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어린 소녀들을 모델로 포르노그래픽적인 그림을 그려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는 에곤 실레의 개인 성향에 불과할 뿐 그의 소묘(素描) 실력이나 색채 감각은 어릴 때부터 천부적이었다. 에곤 실레의 작품은 적나라하다. 여성의 나신(裸身)은 물론, 성기까지 여과 없이 캔버스에 담아낸다. 섬세한 터치는 느낄 수 없지만, 다소 무규칙한 손놀림에서 그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우울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인간의 가장 밑바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체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을 타락시킨 욕망까지도 작품에 투영시킨 에곤 실레의 예술가적 기질은 극찬받을 수밖에 없다. 에곤 실레의 단명(短命)은 세계 미술사의 큰 손실이 아닐까. 그를 기억하기 위해 1700엔짜리 도록(圖錄)도 구입했다.
 
  이 전시회에서 유일하게 촬영이 허락된 작품은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의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이었다. 클림트는 에곤 실레와 달리 직설적이지 않은 에로티시즘으로 각광을 받은 작가다.
 
  2시간 넘게 관람한 뒤, 미술관 밖으로 나오니 이미 한밤중. 사방천지는 비로 새카맣게 젖어 있었다. 대지(大地)는 비에 젖었지만, 나의 가슴 한구석은 뿌듯함으로 충만해 있었다. 일본에서 만난 빈의 잔상(殘像)이 오랫동안 새겨질 것만 같았다.
 
 
  디테일의 극치, 성인용품점을 가다!
 
남성용 자위기구 텐가.
  일본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귀국을 코앞에 두고 3일간 내리던 비가 멎었다. 순간 짜증이 솟구쳤지만, 여행은 계속돼야 했다. 짐을 싸 들고 찾은 곳은 ‘오타쿠(オタク·특정 대상에 집착적 관심을 갖는 사람을 의미하는 일본어)’의 천국(天國) 아키하바라(秋葉原). 아키하바라에는 오타쿠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일본의 게임, 만화, 장난감이 총집결해 있다. 골든위크 기간이라 그런지 아키하바라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기왕 아키하바라에 왔으니 좀 더 참신한 그 무언가를 보고 싶었다. 그때 문득 든 생각이 바로 일본의 성(性)문화였다. 이른바 ‘성진국’(性進國·성의 선진국이라는 신조어)이라고 불리는 일본에 와 이를 구경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실례가 아닐까.
 
  과거 아키하바라에 성인용품점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재빠르게 휴대전화를 놀렸더니 곧바로 검색돼 나왔다. 다른 것엔 굼떠도 이런 분야(?)만큼은 권총의 탄환처럼 빨라지는 나 자신이 조금은 한심스러웠다.
 
  찾아간 성인용품점은 단층의 조그마한 매장이 아니었다. 6층 전체가 모두 성인용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쑥스러움도 잠시, 자동문을 열고 들어가니 초만원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종까지도 다양했다. 젊은 여성이 남자친구와 함께 방문해 이것저것 살펴보는 게 이채로웠다. 심지어 연세 지긋하신 노인도 당당하게 매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꿈도 못 꿀 광경이 아닌가!
 
  1~6층 어느 곳 하나 놀랍지 않은 곳이 없었다. AV(성인용 비디오) 여배우의 사진이 프린팅된 티셔츠, 베개, 마우스 패드와 같은 상품은 약과였다. 사진과 필설(筆舌)로 옮기기 힘든 남·여성용 자위기구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딱 한 가지만 첨언하자면, 그 모양이 실물(?)에 버금갈 정도로 아주 디테일했다는 점이다. 특히 ‘텐가(Tenga)’라고 불리는 남성용 자위기구는 마치 고급 탁상용 스피커처럼 생겨, 일본의 성(性)산업이 얼마나 발달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하는 AV DVD를 판매하는 곳이었다. 벽면 곳곳에 설치된 태블릿 PC에 AV 작품 몇 개를 샘플로 틀어놓고, 손님들을 유인하고 있었다. 화면은 물론 소리까지 고스란히 매장에 울리고 있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DVD 몇 개를 꺼내 보니 다소 익숙한(?) 여배우들도 눈에 띄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AV 여배우들은 일본 내에서 스타급으로 대우받는다. 매년 그해 최고의 여배우를 뽑아 시상식을 개최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남자 AV 배우 세계는 형편이 없다. 일단 ‘배우 기근(飢饉)’ 현상이 심각하다. 여배우들에 비해 박봉(薄俸)인 데다가,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웬만한 남자들은 얼마 못 가 나가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 AV는 더 이상 ‘음지의 영역’이 아니다. 최근 유명 여성 AV 배우와 남성 배우가 유튜브를 통해 한국어 자막을 달고, 방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을 상대로 이들은 자신의 근황, 취미 등을 소개하며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초·중·고교생들도 유명 AV 배우 한두 명과 그들이 출연한 작품 번호(흔히 ‘품번’이라고 함) 몇 개 정도는 꿰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일본 AV 시장 규모의 정확한 통계는 찾기 힘들다. 대략 수천억 엔이란 게 업계의 추산이다. 그로 인해 파생된 업종(성매매 등)까지 포함하면 수조 엔에 달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고급스러운 일본 문화를 향유하다가 직접 들여다본 일본의 적나라한 ‘섹스문화’는 긴 여운으로 남았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 지닌 표정은 그렇게 다양하고, 심오하고, 또 섹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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