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일본역사기행

사무라이의 도시 아이즈와카마쓰

150년을 이어온 東北의 恨

글·사진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막부에 절대 충성하다가 戊辰전쟁에서 패망… 미국 남부와 비슷한 소외의식 간직
⊙ 불타는 城을 보며 소년병 백호대 19명 집단 자결… 武士道의 표상으로 추앙
⊙ 센다이 출신 도이 반스이, 東北民의 소외의식 담아 명곡 ‘황성의 달’ 지어
아이즈와카마쓰의 쓰루가성. 아이즈번의 중심지로 1868년 무진전쟁 당시 격전지였다.
  무사(武士)가 손을 눈 위에 얹고 먼 곳을 살핀다. 앳된 얼굴이다. 14~15세나 되었을까? 그는 무릎을 꿇고 귀에 손을 대고 적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가만히 손가락을 꼽아보며 적이 얼마나 되는지를 헤아려본다. 드디어 나타난 적! 무사는 절도 있게 칼을 휘두르며 사방의 적을 벤다. 하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 힘이 다한 무사는 쓰러진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그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칼을 당겨 자신의 배를 찌른다.
 
  일본 아이즈와카마쓰(會津若松)에서 해마다 봄가을로 행하는 백호대(白虎隊·일본 발음으로는 뱍코타이) 검무(劍舞)다. 아이즈와카마쓰는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 당시 쓰나미의 여파로 원전(原電)사고가 난 후쿠시마(福島)현 서부의 중심 도시다.
 
아이즈와카마쓰시는 2018년을 ‘메이지유신 150주년’이 아니라 ‘무진150주년’으로 기억했다.
  아이즈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과정에서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편에 서서 끝까지 메이지 신정부에 맞섰던 곳이다. 백호대는 당시 아이즈의 선봉에 선 소년병 부대다. 백호대 검무는 그 원한을 달래는 살풀이다. “후쿠시마에 다녀왔다”고 하면 “어떻게 거길…”이라며 동그랗게 눈을 뜨는 판에 아이즈와카마쓰를 찾아간 것은 바로 이 백호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내 오랜 소망이었다.
 
  센다이(仙臺)에서 자동차로 2시간 30분 거리인 아이즈와카마쓰로 가는 길. 3월 말인데도 눈발이 날렸다. 첩첩산중에 바람은 매서웠다. 아이즈가 사쓰마(薩摩)-조슈(長州)로 대표되는 메이지 신정부에 맞선 것도 이런 깡촌에서 매운바람을 맞으며 자라온 사람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즈와카마쓰 시내에 접어들면서부터 ‘무진(戊辰) 150주년’이라고 적힌 깃발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시렸다. 무진년은 메이지유신이 있던 1868년을 말한다. 그해부터 이듬해 5월까지 메이지 신정부와 막부 잔당 간에 벌어진 내전(內戰)을 ‘무진(일본어 발음으로는 보신)전쟁’이라고 부른다. 몇 년 전부터 옛 조슈였던 야마구치(山口)에는 ‘메이지유신 150주년’ ‘유신의 책원지(策源地)’ 같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사쓰마였던 가고시마(鹿兒島)에는 작년 한 해 동안 ‘유신의 고향’이라는 깃발이 거리를 뒤덮었다. 하지만 아이즈에 ‘유신’은 일본 열도 남서쪽 조슈와 사쓰마가 저지른 막부 타도를 위한 쿠데타일 뿐이었다. 그래서 유신과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지방마다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기념하고 있을 때, 아이즈는 홀로 ‘무진 150주년’의 한(恨)을 곱씹고 있던 것이다.
 
  동행한 친구는 아이즈의 이런 심리를 남북전쟁이 끝나고 150여 년이 지나도록 남부연맹기를 공공장소에 내걸던 미국 남부의 정서와 비교했다.
 
 
  초라한 백호대기념관
 
백호대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쓰마군의 대포. 아이즈와카마쓰에서는 당시 官軍을 ‘西軍’이라고 부른다.
  백호대의 자취가 남아 있는 이이모리산(飯盛山)을 찾았다. 입구의 안내판과 동상부터 낡고 녹이 슬어 있었다.
 
  백호대기념관은 초라했다. 궁기(窮氣)가 느껴졌다. 가고시마의 ‘유신후루사토(유신의 고향)관’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이것이 승자(勝者)와 패자(敗者)의 차이일까….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눈길을 끄는 것은 빛바랜 사진들이었다. 무진전쟁 당시 이이모리산에서 자결한 백호대원 19명의 사진이었다. 사진이라는 게 참 묘하다. 아이즈 소년 무사들의 형형한 눈빛, 성깔 있어 보이는 표정이 생생하게 잡혀 있다.
 
  백호대의 출진과 전투, 자결을 묘사한 모형은 공들여 만든다고 만든 것 같은데, 그리 인상적이진 않았다. 당시 사용한 소총과 창, 칼, 대포, 그리고 아이즈를 공격한 메이지 정부 요인과 군인에 대한 사료가 눈길을 끌었다. 나는 사료에 금방 빠져들었지만, 친구는 연방 혀를 끌끌 찼다.
 
  “백호대는 도호쿠(東北)의 자존심인데, 이렇게밖에 못 하다니….”
 
이이모리산에서 자결한 백호대 대원 19명의 묘. 이들의 묘소는 후일 군국주의의 상징이 됐다.
  백호대 관련 자취들은 기념관 뒤에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이이모리산에서 자결한 19명 백호대 대원의 묘소다. 전(前) 아이즈 번주(藩主) 마쓰다이라 다카모리(松平容保・1836~1893)가 지은 조시(弔詩)를 새긴 비석이 있다.
 
  “많은 이의 눈물이 돌 위에 쏟아지겠지만, 그 이름은 세세토록 멸(滅)하지 않으리라.”
 
  자신의 선택이 어린 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젊은 영주의 심정은 어땠을까.
 
  사실 아이즈의 운명은 그가 혼자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즈의 영주 마쓰다이라는 도쿠가와 막부의 방계(傍系)였다. 초대 번주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1611~1673)는 도쿠가와 막부의 2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1579~1632)의 서자(庶子)였다. 히데타다는 평생 측실(側室)을 두지 못하고 공처가로 살았는데, 어쩌다 한 번 바람을 피웠다 낳은 아들이 호시나 마사유키였다. 소심한 히데타다는 이 사실을 아내는 물론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마사유키를 시나노 다카토 번주 호시나 마사미쓰(保科正光)의 양자로 들여보냈다. 호시나 마사미쓰가 죽자 마사유키는 호시나 가문을 계승했다.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1604~1651)는 호시나 마사유키가 자신의 이복(異腹)동생이라는 것을 인정, 에도(江戶・도쿄)로 들어가는 요충(要衝)인 아이즈의 번주로 임명했다. 호시나 마사유키는 이에미쓰의 치세(治世) 동안 막부의 제도 정비 등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이에미쓰는 죽기 전에 호시나 마사유키에게 “도쿠가와 종가(宗家)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감격한 호시나 마사유키는 다음과 같은 유훈(遺訓)을 남겼다.
 
  “쇼군과의 의리는 한마음으로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으로, 다른 번의 사례에 비추어 만족해서는 안 된다. 만약 두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 자손이 아니기 때문에 가신(家臣)도 그런 주군(主君)을 따라서는 안 된다.”
 
  가문의 성(姓)이 호시나에서 도쿠가와의 방계 성씨인 마쓰다이라로 바뀌었지만, 막부에 대한 절대 충성을 강조하는 선조(先祖)의 유훈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즈의 번교(번의 공립학교)인 닛신칸(日新館)에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과 검술(劍術), 궁술(弓術) 등을 주로 가르쳤다. 조슈나 사쓰마 등 다른 번에서는 역사와 지리, 과학・기술・수학, 심지어 서양학문까지 가르치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교육은 강건한 아이즈 사무라이들을 길러냈지만, 시대의 흐름에서는 뒤처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이즈의 항전
 
  존왕양이의 격랑이 일던 1862년부터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골치 아픈 교토슈고(京都守護・교토경비사령관)를 맡아 막부 체제를 위협하는 존왕양이파를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후일 유신의 주력이 되는 조슈 및 사쓰마, 특히 조슈와 원수가 됐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 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반납했다. 그는 통치권을 반납하더라도 전국에서 가장 큰 영지(領地)와 군사력을 가진 대영주로서 다이묘(大名・영주)평의회 의장을 맡아 국정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의 주력이던 조슈와 사쓰마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도쿠가와 막부를 ‘적폐(積弊)’로 몰면서 영지와 관작(官爵)까지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참다못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1868년 1월 군대를 교토로 진격시켰다. 이때 막부군의 주력을 이룬 것이 아이즈번의 군대였다.
 
  역사의 흐름은 그들 편이 아니었다. 오사카에서 교토로 들어가는 길목인 도바-후시미에서 막부군은 천황을 상징하는 금기(錦旗)를 앞세운 사쓰마-조슈군에게 패배했다.
 
  오사카에서 에도로 탈출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더 이상 싸울 생각을 않고,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앞세워 사쓰마-조슈군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어디서나 강경파는 있는 법. 이에 승복하지 않은 막부 잔당들은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즈번은 이웃한 도호쿠의 번들과 함께 오우에쓰 열번 동맹(奥羽越列藩同盟)을 결성, 결사항전(決死抗戰)을 다짐했다. 아이즈는 번의 무사들을 총동원, 나이에 따라 주작・현무・청룡・백호대라는 부대를 편성했다. 백호대는 소년 무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16~17세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나이를 올려서 참가한 이들도 있었다. 총원은 343명이었다.
 
 
  백호대의 비극
 
백호대기념관 입구의 백호대 대원 동상. 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초라하다.
  백호대 가운데 상급 무사의 자제들로 편성된 2번대 37명은 1868년 8월 22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따라 출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식 무기와 전술로 무장한 신정부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8월 23일 백호대 2번대 패잔병 20명이 이이모리산에 이르렀다. 심신이 지친 이들의 눈에 쓰루가(鶴ヶ城・아이즈성)에서 연기와 불길이 치솟는 것이 보였다. ‘성이 함락됐고, 아이즈는 패망했다’는 절망감이 소년들을 엄습했다. 이들은 불타는 성을 바라보면서 번교에서 평소 배운 대로 무사답게 삶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했다. 유일한 생존자인 이누마 사다키치[飯沼貞吉・1854~1931・후일 사다오(貞夫)로 개명]의 회고다.
 
  〈처음에 다키자와 부근 산간에서 적과 마주쳐 전투를 벌였지만 아군은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랐다. 적은 이미 빠르게 전진하여 (쓰루가)성에 임박했다. 화염이 하늘을 뒤덮었고 누구 하나 와서 돕는 자도 보이지 않았던 터라, 도저히 대적할 수 없다고 여겨져 각자 결심을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적의 손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깝다고 서로 상의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 성의 모습이 보이는 곳을 골라 각각 절을 올리고 자결했다. 나 역시 줄곧 목을 찔렀지만 관통하지 않아 몸에 칼을 꽂은 채로 두 손으로 나무뿌리를 잡아당기고 몸으로 누르니 인사불성이 되었다. 이렇게 도움을 받아 되살아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5세 난 이누마 사다키치는 아들이 걱정되어 찾아나선 다른 백호대 대원의 어머니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이때 쓰루가성은 함락된 것이 아니었다. 이이모리산에서 백호대 대원들이 본 불길은 실화(失火)로 인한 화재 때문에 발생한 불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혹자는 성을 공격하는 정부군의 포화(砲火) 연기였다고 한다. 심지어 저녁 무렵 밥 짓는 연기, 혹은 여름날의 아지랑이였다고도 한다. 상황을 좀 더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경험 있는 지휘관이 있었다면, 백호대의 열아홉 소년은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휘관은 전투 중에 행방불명이 됐다. 성이 함락된 것은 한 달 뒤였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 죽은 것일까? 고향을 위해서?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처럼, 많은 남부인은 그들의 고향과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아이즈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막부 체제 아래서 각 번은 사실상 하나의 나라였다. 번주가 임금이었다. 일본 열도 동북부에 살던 그들에게 열도 서남부에서 온 사쓰마나 조슈, 도사[土佐・지금의 고치(高知)] 사람들은 외래(外來) 침략자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무사가 패망한 조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미화(美化)하기엔 백호대 소년들의 죽음은 너무나 가엾다.
 
 
  산 자와 죽은 자
 
  소년들만 죽은 게 아니었다. 소녀들도 죽었다. 무사의 아내 다카코(孝子)와 딸 다케코(竹子), 유코(優子) 등 20명의 여성도 장창(長槍)을 들고 싸웠다. 이들은 “부녀자들이 싸우게 하는 것은 아이즈의 수치”라며 거절하는 무사들을 설득해 전장(戰場)에 나섰다. 후일 이들은 역사에 낭자군(娘子軍)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됐다.
 
  이누마 사다키치의 이야기를 전한 1869년 4월9일자 지방신문은 “이처럼 어리고 연약한 몸으로 깨끗하게 결심한 것을 보면, 성장한 후에는 영재(英才)가 되었을 터인데 아쉽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생존한 백호대원들이나 아이즈의 젊은 여성들은 패전의 아픔 속에서도 치열하게 살면서 역사에 족적을 남겼다.
 
  이이모리산에서 살아남은 이누마 사다키치는 후일 체신성 전신기사가 되어 천수(天數)를 누렸다. 그는 혼자 살아남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고향을 떠나 인근 센다이에서 전신기사로 일했다. 조선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그는 죽은 후에야 이이모리산에서 죽은 동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안장됐다. 그의 사촌인 야마가와 겐지로(山川健次郞・1854~1931)는 후일 미국으로 유학, 일본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됐다. 그는 후일 도쿄제국대・규슈제국대・교토제국대 총장을 역임했다.
 
  그의 여동생 스테마쓰(捨松・1860~ 1919)도 미국으로 유학했다. 메이지유신 후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었다. 그녀는 12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사쓰마 출신의 군부(軍部) 실력자 오야마 이와오(大山巖・1842~1916)와 결혼했다. 이때 오야마 이와오는 아이가 셋 딸린 홀아비였다. 둘의 결혼은 당시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특히 아이즈 사람들에게 무진전쟁 당시 아이즈를 포격했던 오야마와의 결혼은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다. 하지만 스테마쓰는 일본 적십자사 활동과 여성 교육에 큰 업적을 남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야마가와 남매를 도운 것은 아이즈의 원수인 조슈와 사쓰마 출신 거물 정치인들이었다. 조슈 출신으로 ‘유신 10걸(傑)’ 중 하나던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1834~1876)는 두 사람의 유학을 주선했다. 사쓰마 출신으로 제2대 총리를 지낸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1840~1900)는 미국 유학 중인 야마가와 겐지로에게 “아이즈를 위해 죽는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아이즈 사무라이의 사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가 백호대 대원들을 기려 기증한 伊國기념비.
  백호대 대원들보다는 한 세대 아랫사람이지만, 1000엔권 지폐 속 인물인 병리학자(病理學者)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1876~1928)도 아이즈 출신이다. 그는 매독균 발견 등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의료윤리나 사생활 등에서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퇴출된 1000엔짜리 지폐 속 인물로 그를 선택했다. 아마 한국이라면 어림없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하지만 이런 행운을 누린 사람들은 소수였다. 대다수 아이즈 주민은 패전의 대가(代價)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관군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조차 금했다. 수많은 시신이 들판에서 그야말로 까마귀나 들개의 밥이 됐다.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근신(연금) 처분을 받았다. 번의 중신(重臣) 간노 곤베에(管野權兵衛) 등은 할복했다. 1만7000여 명의 주민은 혼슈(本州) 북단 아오모리(靑森)의 황무지 도나미[斗南・지금의 무쓰(陸奧)]로 집단 유배됐다.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치는 그곳에 가서 죽으라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일부 무사는 홋카이도(北海道)로 쫓겨갔다. 홋카이도 요이치(余市)로 이주한 103가구 333명은 자신들이 훌륭하게 그곳을 개척해야 주군의 죄가 가벼워지고 그것이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다짐했다. 정부는 이들에게 미국에서 들여온 사과나무 묘목을 나누어줬다. 이들은 4년여의 노력 끝에 1879년 홋카이도의 불모지에서 사과를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농부가 된 아이즈의 사무라이들은 이 사과에 ‘히노코로모(ひのころも・주홍색의 옷)’라는 이름을 붙였다. 히노코로모란, 주군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교토슈고로 활약하던 시절 고메이(孝明) 천황이 하사한 주홍빛 진바오리(陣羽織)를 일컫는 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진전쟁에서 패배해 정부군에게 항복할 때, 항복식장에 깔린붉은 양탄자를 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아이즈의 무사들은 ‘비운(悲運)의 역사’를 잊지 말자면서 이 양탄자를 잘라서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아이즈 사무라이의 사과’로 알려진 히노코로모는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홍옥(紅玉)・국광(國光)과 더불어 오랫동안 이름을 떨쳤다.
 
  청일(淸日)전쟁 이후 군국주의(軍國主義)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백호대의 비극은 신화(神話)가 되어 갔다. 백호대 소년들은 실제로는 양복(洋服)에 일본도를 차고 양총(洋銃・게베르소총)을 들고 전장으로 나갔지만, 차츰 하오리(羽織)에 일본도만으로 무장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백호대의 장렬한 최후에 감동받은 유럽의 지도자가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다. 무솔리니는 1928년 로마시의 이름으로 백호대를 기리는 독수리상을 만들어 아이즈시에 기증했다. 지금도 이 독수리상은, 파쇼(막대기로 감싼 도끼. 로마 집정관의 상징이었다가 파시즘의 상징이 됨)만 제거된 채 ‘이국(伊國)기념비’라는 이름으로 백호대원들의 무덤 곁을 지키고 서 있다.
 
 
  지도자를 잘못 만난 비극
 
이이모리산에서 백호대 대원들이 자결한 곳. 멀리 쓰루가성이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는 듯한 형상이다.
  열아홉 명의 백호대 대원이 자결한 자리에는 ‘백호대 자인지처(白虎隊自忍之處)’라는 비석이 서 있다. 눈 위에 손을 얹고 쓰루가성 쪽을 바라보는 백호대원의 석상이 함께 있다. 초라하다. 아무리 ‘끝까지 막부에 대한 의리를 지킨 우리야말로 진정한 무사’라고 자부하면서 ‘사무라이의 도시 아이즈(Samurai City Aizu)’를 자처해도, 결국 그들은 패자였다. 메이지 시대 내내 ‘역향(逆鄕)’이라고 차별받던 아이즈 등 도호쿠 지방은 이후에도 내내 개발에서 소외됐다. 이렇다 할 산업기반이 없고, 인구가 적은 곳에 정부는 원전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2011년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이 지역에 또 다른 상처를 남겼다.
 
  이 모든 비극은 따지고 보면 당시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잘못이다. 그는 막부 말에서 메이지유신에 이르는 격변기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 시대의 변화와 국내외의 추이를 읽지 못하고 낡은 생각을 고수하다가 자신을 믿고 따르던 수많은 주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국민을 학대하고 학살하는 지도자만 국민을 죽이는 게 아니다. 역사의 고비에서 판단을 그르치는 지도자도 국민을 죽인다. 그 상처는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물지 않고 있다.
 
  쓰루가성은 이이모리산에서 4.5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패전과 폐번치현(廢藩置縣・1871년 메이지 정부가 종래의 번을 통・폐합해 중앙정부가 직할하는 현을 설치한 조치) 과정에서 무너졌던 것을 1966년에 재건한 것이다. 휴일을 맞아 제법 많은 사람이 찾고 있었지만, 쓸쓸한 날씨 때문인지 을씨년스러움을 지울 수 없었다.
 
 
  황성의 달
 
센다이의 아오바성. 도이 반스이는 이 무너진 성터에서 이웃 번인 아이즈 무사들의 최후를 생각하며 노래 ‘황성의 달’을 지었다. 왼쪽에 센다이번을 개창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동상이 보인다.
  아이즈를 비롯한 도호쿠 사람들의 소외(疎外)의식을 담은 노래가 ‘황성의 달(荒城の月)’이다. ‘황성옛터’와 제목에서부터 흡사한 이 노래는 정서도 흡사하다. 도이 반스이(土井晩翠・1871~1952)의 시(詩)에 타키 렌타로(瀧廉太郎・1879~1903)가 곡을 붙인 노래인데,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다. 센다이 출신인 도이 반스이는 무너진 센다이성(아오바성) 성터에서, 쓰루가성과 아이즈 무사들의 장렬한 최후를 떠올리며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봄날 고루(高樓)의 꽃의 향연, 돌고 도는 술잔에 (달빛) 비치네.
  천년 노송(老松)의 가지로 (달빛) 비췄네, 옛날의 빛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가을 진영(陣營)의 서릿발, 울며 가는 기러기 세어보았네.
  늘어진 칼날에 (달빛) 비췄네, 옛날의 빛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지금 황성(荒城)을 비추는 한밤의 달빛, 변함없는 달빛은 누구를 위함인가
  성의 담장에 남은 것은 칡넝쿨, 소나무에 노래하는 세찬 바람뿐.
 
  천상의 그림자는 변함이 없건만 영고(성쇠)는 바뀌는 것이 세상의 모습,
  비추려고 하는가 지금도 역시, 아아 황성의 한밤의 달이여.〉 (박상후 번역)

 
  뤼순(旅順)감옥에서 간수로 일하면서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의 마지막 나날을 지켜보다가 안 의사에게 감화된 일본 헌병 하사관 치바 도시치(千葉十七)도 도호쿠 지방의 중심지인 미야기현(宮城縣・옛 센다이번) 출신이다. 그는 귀국 후 집안에서 안중근 의사의 제사를 지냈고, 죽을 때에는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안 의사의 제사를 모시라고 유언했다. 이후 안 의사의 제사는 치바의 고향집 인근에 있는 다이린지(大林寺)에서 계속 이어오고 있다. 다이린지에는 안 의사를 기리는 비석도 서 있다. 안중근 의사의 기일(忌日)인 지난 3월 26일에도 안 의사를 존경하는 미야기현 인사들이 방한(訪韓)했다.
 
  그 이면(裏面)에는 도후쿠 사람들이 메이지유신 이후 은연중 품어온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들은 이토 히로부미(조슈 출신)를 사살한 후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개진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은 안중근 의사를 ‘조선의 사무라이’로 이해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종족주의적 반일(反日) 캠페인이 기승을 부리다 보면, 그런 작은 상호이해의 여지마저 좁아질지 모른다. 안타깝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5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