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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29〉 일본, 유럽 무역전쟁의 중심에 서다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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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무역 놓고 경쟁하던 영국과 네덜란드, 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 1619년 공조체제 구축
⊙ 영국·네덜란드가 나포한 일본 주인선에서 가톨릭 신부 발견한 히라야마호 사건 계기로 일본 내 기독교 탄압 가속화
⊙ 네덜란드 VOC, 인도네시아 암본섬에서 영국 상관원들과 일본인 용병들 처형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現 기리야마 대표 / 저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1623년 3월 암본섬의 네덜란드 세력은 경쟁관계이던 영국 상관원과 일본인 용병들을 학살했다.
  1620년 8월, 한 척의 영국 배가 히라도(平戶)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 동인도회사(EIC) 소속 무장상선 엘리자베스(Elizabeth)호였다. 히라도에는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1613년 EIC가 각각 상관(商館)을 두고 대(對)일본 교역에 나서고 있었다. 엘리자베스호는 큼지막한 정크선 한 척을 꼬리에 달고 있었다. 같은 날 EIC 선박 한 척과 VOC 선박 한 척이 연달아 히라도에 입항했다.
 
  VOC 선박과 EIC 선박이 사이좋게 일본에 내항(來航)하는 것은 그때까지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VOC와 EIC는 1605년 VOC의 인도네시아 암본 진출 이래 동아시아 일대에서 향신료 무역을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무력(武力)충돌도 마다하지 않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기 때문이다.
 
  두 회사 간의 알력(軋轢) 다툼은 장소가 일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바로 한 해 전인 1619년에는 VOC 선박이 EIC 선박 두 척을 나포한 채 히라도에 입항하여 큰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서로 번(藩)과 막부를 상대로 호소전(呼訴戰)에 나서 일본인의 골치를 썩였다. 급기야 영국 선원 일부가 감금처인 VOC 상관을 탈출하여 EIC 상관으로 도피하자 VOC가 그 보복으로 EIC 상관을 습격하는 무력충돌 사태까지 발생했다. 수백 명이 무기를 소지한 채 난동을 벌여 히라도 주민에게 큰 불편과 혼란을 초래했다. 참다못한 영주 마쓰라 다카노부(松浦隆信)가 무력 진압을 위협하고 나서야 사태가 진정될 정도로 VOC와 EIC는 일촉즉발의 대치관계에 놓여 있었다.
 
 
  영국-네덜란드 공조체제
 
  대(對)스페인 독립전쟁에서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영(英)·란(蘭) 양국은 VOC와 EIC의 무역경쟁을 완화할 정치적 협약이 필요했다. 영국의 제임스1세와 네덜란드 연방의회(Staten-Generaal)는 두 회사를 종용하여 방위협정(Defence Treaty)을 체결토록 했다. 1619년 6월 런던에서 체결된 협정에 따라 VOC와 EIC는 동인도 지역에서 스페인·포르투갈 세력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한편, 획득한 향신료를 정해진 비율로 분배하는 등 진출지에서 경쟁을 자제하고 이권(利權)을 공유(共有)하는 공조(共助)체제를 구축했다.
 
  히라도에 입항한 영·란 선박은 런던협정에 따라 1620년 5월 양측 소속 상선 각 5척인, 총 10척으로 구성되어 바타비아에서 출항한 연합선단의 분견대(分遣隊)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동중국 해역에서 경쟁국 상선을 나포하는 것이었다. 주된 타깃은 교전 상대국 스페인·포르투갈 상선이었고, 중국·일본 등 제3국 선박은 원칙적으로 나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마닐라를 왕래하는 중국 상선은 적국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예외적으로 나포를 허용하는 지침이 내려졌다.
 
  엘리자베스호는 목적지 히라도로 향하는 도중 대만해협에서 마침 마닐라 항로를 운항하던 정크선을 발견하고 이를 나포한다. 중국 배인 줄 알았던 이 정크선은 사카이(堺) 출신 상인 히라야마 조친(平山常陳) 지휘하에 마닐라를 다녀오던 일본의 남방 주인선(朱印船)이었다.
 
  히라야마선(船)은 쇼군의 주인장을 발급받은 공인 무역선으로 바타비아의 지침대로라면 나포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호 승조원이 임검(臨檢)할 때 선박 화물칸에서 유럽인들이 발견되자 상황이 일변했다. EIC 측은 이 유럽인들을 가톨릭 선교사로 단정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금교령(禁敎令)에 따라 일본 입국이 금지된 상태였다. EIC 측은 불법을 저지른 상선은 보호 대상이 아님을 들어 히라야마 주인선을 히라도로 예인(曳引)한 후, 나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기독교 탄압과 무역 규제의 시작
 
기독교 탄압을 감행한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당시 일본의 대외무역은 주인선 무역을 경영하는 일본 국내 세력, 구(舊)유럽세인 포르투갈·스페인, 신(新)유럽세인 영·란의 3파전 양상이었다. 오랜 기득권을 구축해온 전자(前者)의 두 세력에 비해 후발주자인 영·란은 고전을 면치 못할 구도였다.
 
  1610년대 이후 쇼군가의 관심은 정권 안정화에 집중됐다. 막부의 권한 강화와 다이묘(大名·영주) 세력 약체화가 동전의 양면으로 제도화 대상이 되었다. 대외무역과 기독교 포교 문제는 그러한 제도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1609년 쇼군 측근 중에 기독교도가 다수 잠복해 있음이 발각된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大八) 사건’ 이래 기독교 포교는 막부에 대한 충성심을 내부로부터 해체하는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1612년 막부는 직할령에 대해 공식적으로 금교령을 발포(發布)했다. 다이묘들에 대해서는 가이에키(改易·봉토를 박탈함), 감봉(減封·봉토를 축소함), 전봉(轉封·봉토를 변경함) 등의 처분으로 위협하며 기교(棄敎·기독교를 포기함)를 압박했다. 이듬해에는 전국으로 금교령을 확대했다. 1614년에는 선교사 추방령에 따라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비롯한 기리시탄(기독교 신자) 다이묘와 선교사들의 국외 추방을 강행했다.
 
  이러한 기독교 탄압 노선은 교역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스페인의 경우 무역과 선교가 분리되기 어려운 2인3각 관계였기 때문이다. 선교사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스페인 선교사들의 밀입국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야스의 뒤를 이은 2대 쇼군 히데타다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도 그에 비례해 커져갔다. 1616년 히데타다는 포르투갈·스페인 선박의 기항지를 나가사키, 영·란 선박의 기항지를 히라도로 한정하는 금령(禁令)을 내린다. 이른바 ‘바테렌금제봉서(伴天連禁制奉書)’ 발령이다.
 
  그전까지는 오사카·에도를 비롯하여 주요 항구에 유럽인들의 출입을 제한적이나마 허용했으나, 이때 금령으로 허가된 기항지 이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됐다. 영내에 흑선(黑船)이 내항하면 모든 다이묘는 반드시 이를 막부에 보고하고, 해당 선박을 나가사키나 히라도로 회항(回航)시켜야 했다. 교역을 허용하되 외부 세력을 물리적으로 격리시키는 쇄국(鎖國)정책의 원형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막부에는 기독교 탄압을 구실로 다이묘들의 교역을 차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었다.
 
 
  가톨릭 세력의 초조감
 
  1617년 추방당한 것으로 보고된 선교사가 버젓이 일본 국내에 체류함을 알게 된 히데타다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선교사 색출과 처형을 지시한다. 이에 따라 4명의 선교사가 오무라(大村) 가문의 영지에서 발각되어 참수(斬首)됐다. 에도 막부 성립 후 최초의 선교사 처형이었다.
 
  가톨릭 입장에서는, 유럽 대륙에서 신교의 거센 도전에 직면한 위기 속 해외 포교에 역점을 둔 시기였다. 필리핀이 확보되고, 염원의 중국 선교도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동아시아 최대 포교 거점인 일본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만(南蠻)무역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이 신교국 영·란의 진출로 일본에 대한 레버리지로서의 의미가 점차 상실되자 가톨릭 세력은 초조함이 커져갔다.
 
  1617년 선교사 처형 사건 이후에도 마카오와 마닐라에서 경쟁적으로 선교사가 잠입하자 막부의 불쾌감과 가톨릭 세력의 초조함이 부딪쳐 파열음을 내어 상황은 긴장을 넘어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선교에서 자유로운 영국과 네덜란드였다. VOC 상관장 야크 스벡스와 EIC 상관장 리처드 콕스는 1610년대 이래 막부의 정책 기조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이해 구도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히라야마 사건에서 대일본 무역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다. 이들에 의해 히라야마 주인선 사건은 나포의 적법성 여부를 넘어 대일(對日)무역 구도에 큰 파급 효과를 불러오는 일대 사건으로 발전했다.
 
 
  콕스와 스벡스의 책략
 
영국 선원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이 된 윌리엄 애덤스.
  스벡스와 콕스는 히라야마선의 고가(高價) 화물을 몰수했다. 그에 대해 선주 측이 항의하자 그들은 에도로 사절단을 올려보내 막부에 사건의 진상과 화물 몰수의 정당성을 직보(直報)했다. 이들에게는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는 윌리엄 애덤스의 존재로 인해 막부 최고위층 접근이 용이한 어드밴티지가 있었다.
 
  이들은 나아가 히라야마 주인선의 사례를 들어 “마카오·마닐라를 왕래하는 주인선이 국법을 어기고 포르투갈·스페인과 내통해 몰래 기독교 포교를 돕고 있다. 일본 선박의 마닐라·마카오 도항(渡航)이 계속되는 한 선교사 잠입이 근절되지 않을 것이며, 이는 막부의 권위와 안전을 해(害)할 것이다”라고 히데타다에게 진언(進言)한다. 몰수 화물의 소유권 확보보다 주인선의 마카오·마닐라 도항 저지가 이들의 본심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영·란으로서는 포르투갈·스페인 선박은 해상 전력의 우위를 통해 일본의 개입 여부와 관계없이 자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 주인선의 마카오-마닐라 교통만 봉쇄하면 (비유럽 세력을 제외하고) 사실상 대일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스벡스와 콕스가 일본 사정을 꿰뚫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책략이었다.
 
  콕스와 스벡스가 움직이자 나가사키 다이칸(代官) 스에쓰구 헤이조(末次平蔵)를 필두로 마카오·마닐라 주인선 무역에 이해관계가 있는 국내 무역세력이 즉각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주인선 무역을 직접 경영하는 것 외에 포르투갈의 마카오·나가사키 무역에 ‘토긴(投銀)’으로 불리는 투자를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남만무역의 지속은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스에쓰구는 당사자인 히라야마 조친과 함께 에도로 직접 올라가 “영·란 측이 선교사라고 주장하는 유럽인들은 상인일 뿐이며, 이들이 히라야마선을 나포한 것은 무도한 해적 행위에 해당하므로 이들의 교역을 금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히라야마선에 탑승한 유럽인들이 과연 선교사인지를 증명하는 문제가 사안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元和의 大殉敎’
 
1622년 ‘겐나의 대순교’ 당시 55명의 기독교인이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했다.
  EIC 측은 나포 후 선상 신문(訊問)에서 이들이 아우구스티노회의 페드로 데 주니카 신부와 도미니코회의 루이스 플로레스 신부임을 자백받은 상태였다. 그 증거로 아우구스티노회 마닐라교구장 명의의 서한도 확보했다.
 
  그러나 이들이 상륙 후 자신들은 상인이라고 진술을 번복함에 따라 영·란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막부 직속 나가사키 부교(奉行) 하세가와 곤로쿠(長谷川權六)가 스에쓰구를 편들어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영·란 측이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압박하고 나섬으로써 영·란 측이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사실 주니카 신부는 일본에 머물다가 퇴거한 후 재입국을 시도하던 인물이었다. 하세가와는 예전에 나가사키에서 주니카 신부를 만난 적이 있고 얼굴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세가와는 막부의 금령에 따라 나가사키 일대의 기독교도 색출과 탄압에 철저를 기한 것으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신분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증거를 대라’고 다그친 이유는, 그 역시 스에쓰구와 결탁하여 나가사키 남만무역 이권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 입증을 둘러싸고 지루한 진흙탕 싸움이 계속되자 다급해진 콕스는 주니카·플로레스 신부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가해 재차 자백을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1622년 8월 막부의 명에 의해 두 신부는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히라야마와 일본인 선원 12명도 기독교도 밀입국 협조의 죄를 물어 함께 참수되었다. 이로써 히라야마 주인선 사건은 영·란 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막부는 이를 계기로 더욱 강력한 기독교 탄압에 나섰다. 주니카 신부 등이 처형된 지 불과 한 달 후에는 9월 예수회의 카를로 스피노라, 도미니코회의 요세라 데 산하시트, 프란시스코회의 리카르도 데 산타아 신부 등 종파를 불문한 선교사와 일본인 신도 55명이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른바 ‘겐나(元和)의 대순교(大殉敎)’ 사건이다. 1622년 한 해에만 전술한 사건을 포함해 120명이 넘는 선교사와 기독교도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듬해인 1623년에는 순교자가 500명에 달했다. 이때부터 일본은 기독교도임을 밝히고는 온전히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가혹한 ‘금교(禁敎)의 시대’로 돌입했다.
 
 
  포르투갈 세력의 퇴출
 
  막부의 철저한 기독교 탄압 방침은 즉각 대외교역 통제로 이어졌다. 1623년 막부는 포르투갈인들의 출국을 명하는 한편, 재입국 시 기독교도 가택의 기거를 금했다. 일본인에 대해서는 마닐라 도항 주인장을 폐지하고, 기독교도의 해외 도항, 일본 선박의 포르투갈인 항해사 고용을 금지했다. 마닐라로부터 선교사 잠입이 끊이지 않는 데 충격을 받은 막부는 1624년 필리핀과 통교를 전면 금지했다. 포르투갈에는 모든 선박의 탑승자 명부를 제출토록 하고, 명부에 기재되지 않은 자는 상륙을 금지하는 등 기독교 세력과 일본인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격리정책 제도화를 가속화했다.
 
  1633년에는 주인장 제도에도 손질을 가하여 주인장 외에 로주(老中) 3인이 연서(連署)한 도항면허장을 소지토록 하는 봉서선(奉書船) 제도가 시행됐다. 유력 상인이나 다이묘가 막부 고위층을 매수하여 주인장을 발급받는 기존 폐단을 방지하고 상호 감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주인선의 마닐라 도항 금지에 이어 봉서선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1630년대 이후 일본 국내 세력에 의한 대외무역은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포르투갈의 마카오·나가사키 무역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히라야마 주인선 사건을 계기로 대일무역의 승기를 잡은 영·란이었지만, 최후의 승자로 남은 것은 VOC였다. VOC와 EIC가 대일무역에 집착한 것은 일본이 여타 지역과 달리 원료공급지를 넘어 소비시장으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 시장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품이 중국산 생사(生絲)였다. 마카오·마닐라라는 중국 교역 거점을 선점한 포르투갈·스페인과 달리 중국과의 교역이 제한된 VOC와 EIC는 일본과의 교역에서 수익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제무역·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한 암스테르담의 풍부한 자금을 배경으로 정부에 필적하는 자율권을 행사하는 VOC에 비해 EIC는 설립 초기부터 회사 운영에 자금 압박이 심했다. 당장 수익이 급한 런던 본부에서는 저조한 대일무역 실적을 이유로 히라도 상관을 철수하려는 분위기가 일찍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상관장 콕스가 가톨릭 신부에 대한 비인도적 고문을 마다하지 않으며 사활을 걸고 대일무역 주도권을 확보하려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암보이나 학살 사건
 
  VOC와의 공조로 한숨 돌리는 듯한 것도 잠시, EIC는 1623년 결국 히라도 상관을 폐쇄했다. 같은 해 3월 암본섬의 VOC 감독관 헤르만 반 스페울트(Herman van Speult)가 EIC 상관장 가브리엘 타워슨(Gabriel Towerson)을 포함한 10인의 상관원과 9인의 일본인 용병을 내란음모 죄목으로 처형한 이른바 ‘암보이나 학살 사건’(Amboyna Massacre)이 발생한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VOC 측은 EIC 상관원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발각되어 정당하게 이루어진 사법 처벌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VOC가 자신들을 터무니없는 혐의로 무고(誣告)한 후 가혹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이끌어내어 자행한 부당한 학살이라고 반박했다. 그 후 런던과 암스테르담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험악한 외교·사법 공방전이 벌어졌고, 동인도 지역에서 VOC·EIC의 공조 여지도 사라졌다.
 
  1619년 런던협정은, 동인도 현지 실정을 무시하고 정치적 필요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당초부터 두 회사 간 치열한 경쟁관계가 한 장의 문건으로 해소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바타비아의 VOC 총독 쿤(Jan Pieterszoon Coen)은 런던협정 체결 소식을 듣고 격노했다. EIC와의 공조체제에 부정적인 그는 ‘EIC를 하루속히 축출(逐出)해 VOC의 향신료 무역 독점을 추구해야 한다’는 강경론자였다. 암보이나 사건은 쿤이 기획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실제 그는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독직을 사임했다가 1627년 다시 총독직에 복귀했다.
 
  암보이나 사건의 진상이 무엇이건, 규모·자금 면에서 열세던 EIC는 이후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일대에서 활동을 포기하고 인도 진출에 주력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전환했다. 1623년 12월 콕스가 바타비아로 소환되면서 EIC 상관이 폐쇄되자, VOC는 일본 무역 독점에 한발 더 다가섰다.
 
 
  에도 시대를 알아야 하는 이유
 
  대일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유럽 열강들의 각축은 오늘날 무역전쟁 못지않았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때로는 주연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등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아리마도자기 등 도자기를 수출하고, 그 과정에서 인상파(印象派)에 영향을 준 우키요에(浮世繪)가 알려지면서 만만치 않은 문화적 역량을 가진 나라로 인식됐다. 19세기 말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의 《무사도(武士道)》는 서양인들에게 일본이 ‘기사도’ 못지않은 멋진 윤리를 가진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늦게 세계무대에 알려졌다. 일본처럼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도 못했다. 근래에 와서 경제발전과 ‘한류(韓流)’ 등에 힘입어 한국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지금까지 에도(江戶) 시대의 역사를 살펴본 것은, 이 시대는 한일(韓日) 간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점점 더 벌어져 간 시대였기 때문이다. 메이지(明治)유신이나 조선의 망국(亡國)은 그 결과였다. 감정으로만 일본을 볼 일은 아니다. 일본과 가까이 지내든, 반일(反日)을 하든 극일(克日)을 하든, 우리 자신을 알고 일본을 아는 일에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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