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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국수 맛의 비밀

“반죽과 숙성이 맛을 가른다”

글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ironin@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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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중국에서 전파된 국수를 ‘삶은 면(麵)을 물에 헹구어 건져 올린다’는 뜻에서
    국수(掬水)로 표기하기도
⊙ 옛날국수 맛은 뽑은 면을 햇볕과 바람에 자연 건조하며 숙성시켜야 제대로 된 맛 나와
⊙ 중력분·강력분 밀가루의 배합과 쌀가루, 전분 등의 천연재료 첨가에 따라 식감 달라져
  “올해는 국수 먹여 줄 거지?”
 
  새해가 되면 마을 어른들이 “어서 장가들라”는 의미로 동네 총각들에게 건네던 인사말이다. 결혼식이 있을 때면 응당 하객들에게 국수를 대접한 데서 유래한 말인 듯하다. 희고 긴 국수가락에는 장수(長壽)의 의미가 담겨 있다. 혼례문화가 서구화한 요즘에는 축하 음식으로 국수를 삶아 내는 집도 드물거니와 이런 인사말을 건네는 어른도 흔치 않다. 온 마을 잔치였던 결혼의 의미가 퇴색해 가면서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수는 결혼식이나 회갑연 같은 잔치에 가면 으레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이때의 국수는 대개 닭고기나 꿩고기 육수에 말아 주는 물국수, 일명 잔치국수였다. 한겨울 찬물에서 건져 올린 국수를 뜨거운 닭고기 육수에 말아 갖가지 고명을 얹어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밤참으로 얼음 동동 뜨는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 국수 맛은 또 얼마나 기막혔던가.
 
 
  관혼상제에 쓰던 고급 음식
 
  잔치 음식으로는 갈비탕에, 밤참으로는 라면에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국수는 여전히 우리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음식 중 하나다. 우리는 언제부터 국수를 먹었으며, 맛있는 국수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본격적인 국수 탐구에 앞서 기자는 국수의 종류가 워낙 많아 이번 기사에서는 건면(乾麵)을 중점적으로 다루기로 했다. 사실 일부 학자는 국수를 ‘삶은 면(麵)을 물에 헹구어 건져 올린다’는 뜻의 한자어 ‘국수(掬水)’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때의 국수는 건면이다.
 
  국수의 세계사적 의미는 2008년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 다큐멘터리 <누들 로드>를 통해 이미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아 온 국수는 빵보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기원전 6000~5000년경부터 아시아 지역에서 국수를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이를 뒷받침할 만한 흔적이 중국에서 발견되었다. 2002년 중국사회과학원이 중국 중서부 칭하이성(靑海省) 지역의 신석기 유적지에서 화석화한 국수를 발굴한 것이다. 학자들은 이 국수를 4000년 전(前) 것으로 추정했다.
 
  국수는 중국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달해 왔다. 6세기경 기술된 중국 농서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국수 만드는 법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 국수 제조법이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고려시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송나라 사신이 쓴 여행기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에는 밀이 적기 때문에 주로 화북지방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밀가루의 값이 매우 비싸 성례(成禮) 때가 아니면 먹기 힘들다’는 구절이 있다. 또한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에는 ‘국수는 본디 밀가루로 만든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메밀가루로 만든다’는 기록도 있다.
 
  문헌에 기록은 없지만 삼국시대에 이미 국수를 만들어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에서 전파된 국수가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본에서 발행된 《면류백과사전》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 사전에는 일본의 국수가 신라시대 경남 양산의 통도사를 통해 유입된 후 발달했다고 기술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문헌에 국수가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세종실록》에는 수륙재 때 공양 음식으로 면을 올렸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음식디미방》에는 다양한 종류의 국수 요리가 소개돼 있다. 이들 기록의 공통점은 밀가루보다는 메밀이나 녹말로 만든 국수를 즐겨 먹었다는 것과 결혼이나 생일 혹은 제사 등 중요한 행사 때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는 점이다. 이때의 전통이 밀가루가 흔해진 오늘날까지 전해져 집안의 중요한 행사 때 국수를 삶아 낸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귀한 국수가 서민 음식이 된 것은 6·25 직후 미국의 식량원조로 밀가루가 대량 유입되면서부터다. 당시 밀가루는 부족한 쌀을 대신하는 서민들의 식량으로 보급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수제비와 칼국수가 대중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장터국수 맛은 후덕한 인심
 
전북 임실군 강진면에 있는 국수 전문 식당 ‘행운집’. 시인 안도현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국수집’으로 꼽으면서 유명해진 집이다. 주인 김봉례씨는 올해로 30년째 국수를 팔고 있다.
  오늘날의 국수는 제조 방식에 따라 납면(拉麵), 압면(押麵), 절면(切麵), 소면(素麵), 하분(河紛)으로 구분된다. 납면은 밀가루 반죽을 양쪽에서 당기고 늘려 여러 가락으로 만드는 국수다. 수타로 만든 짜장면과 짬뽕면이 대표적인 납면이다. 압면은 구멍이 숭숭 뚫린 용기에 반죽을 밀어 넣어 면을 뽑는다. 메밀국수가 여기에 속한다. 절면은 반죽을 얇게 밀어 칼로 써는 칼국수가 대표적이고, 하분은 쌀로 만든 국수를 일컫는다. 소면은 반죽을 손으로 늘려 가늘게 만드는 일본식 국수다. 수연(手延)소면이 여기에 속한다.
 
  현재 국내에서 생산하는 건면은 반죽을 성형틀에 넣고 뽑아 건조시키는 일반면과 반죽을 손으로 늘려 건조시키는 수연소면이 있다. 제조 공정이 많이 다른 두 국수의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대표적인 국수 공장 몇 군데를 취재했다. 가급적 대량생산 업체보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소량만 생산하는 곳을 골랐다. 일반면을 만드는 전북 임실의 ‘백양국수’와 인천의 ‘권오길 손국수’,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수연소면 제조업체인 충북 음성의 ‘강식품’이 바로 그곳이다. 이 세 업체는 국수 장인의 이야기를 다룬 MBC 주말 드라마 <백년의 유산> 팀이 제작 준비 당시 자문을 구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백양국수는 임실 강진시장에 있는 ‘행운집’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다. 행운집은 5일장이 서는 산골 면소재지 장터에 있는 작고 허름한 식당이다. 이 집은 전국적으로 소문난 국수집이다. 김용택(金龍澤), 안도현(安度眩) 등 전북 지역에 사는 문인들이 즐겨 찾으면서 맛집으로 알려졌다. 전주에 사는 안도현 시인은 이 집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국수집”이라고 극찬했다. 이 집에서 쓰는 국수가 바로 백양국수다.
 
  30년째 이곳에서 국수를 팔고 있는 주인 김복례(67)씨는 “15년째 백양국수만 쓰고 있다”며 “면발이 부드럽고 고소해서 좋다”고 말했다. 김씨의 말이다.
 
  “전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국수 공장 제품을 받아서 썼어요. 그런데 국수가 쉽게 뭉크러지고 맛이 없대요. 그래서 이집 저집 좋은 국수를 찾아다니다 임실 읍내에 있는 백양국수를 알게 되어 쓰기 시작했지요. 백양국수는 배달을 해 주지 않아서 내가 직접 사러 가야 하는데, 같은 임실이라도 여기서는 꽤 멀어요. 차를 대절해서 가야 하니까 기름값도 들고요. 그래도 맛이 이만한 국수가 없으니까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사러 가곤 합니다.”
 
  김씨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바지런히 손을 놀려 장터국수 한 그릇을 말아 냈다. 금방 김칫독에서 꺼내 온 잘 익은 김치와 석박지가 찬으로 나왔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우선 뜨거운 국물부터 들이켰다. 멸치국물인데 유난히 시원하고 감칠맛이 났다.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려 고소한 맛도 있었다.
 
  김씨에게 “국물 맛을 어떻게 내느냐”고 하자 “멸치로 우려내는데, 오늘은 누가 황태를 몇 마리 주어서 머리를 좀 넣었다”고 말했다. 면발은 김씨의 표현대로 식감이 쫄깃거리기보다는 부드럽고 뒷맛이 고소했다. 1970, 80년대 시골 장터나 잔칫집에서 먹는 국수 맛 그대로였다.
 
  김씨가 밭에서 직접 키운 재료로 담갔다는 김치 맛도 훌륭했다. 특히 석박지가 아삭하면서도 시원해 맛이 그만이었다. 김씨는 “손님들이 김치를 얼마나 많이 찾는지 김칫독이 바닥날 지경”이라면서도 “맛있게 먹으니 기분이 좋네”라며 석박지를 자꾸 썰어 주었다. 고향 어머니의 푸근함과 싱싱함이 묻어 나는 이 맛 때문에 3000원짜리 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먼 거리를 마다않고 찾아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옛날국수 만드는 임실 백양국수
 
  국수는 자연 건조해야 맛있어
 
‘백양국수’는 기계로 면을 뽑아 바람과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건조시킨다. 숙성은 자연적으로 이뤄진다.
  백양국수 공장은 강진면에서 승용차로 20여분 거리인 임실읍내에 위치해 있다. 여느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주택과 마당에 국수 공장이 차려져 있었다. 1층은 살림집이고 옥상에 얼기설기 엮은 듯 세워 놓은 건물이 면발 생산 공장과 건조 시설이라고 한다. 1층 살림집은 건조 중인 국수 면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2층에도 기다란 면발이 빼곡하게 널려 있었다.
 
  영하 10℃ 안팎을 오르내리는 날씨인데도 곽강찬(郭康贊·72)·이명희(李明姬·65) 부부는 밀가루를 반죽해 국수를 뽑느라 여념이 없었다. 코끝이 얼얼할 정도로 바람이 찬데도 노부부는 장갑도 끼지 않은 채 국수를 뽑고, 뽑은 국수를 햇볕이 잘 드는 옥상과 마당에 쉬지 않고 널었다. “손 시린데 왜 장갑을 끼지 않느냐”고 하자 “장갑을 끼면 반죽의 점도를 가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곽씨의 말이다.
 
  “우리는 국수 만드는 것밖에 공부한 것이 없어. 국수는 양심을 가지고 정성껏 이 손으로 만드는 것이지 머리로 만드는 게 아녀. 수십 년 동안 맨손으로 했는데 춥다고 이제 와서 장갑을 끼면 맛이 제대로 나겠어?”
 
  곽씨는 숙련된 동작으로 밀가루 포대를 뜯어 중력분과 강력분의 비율을 8 대 2로 섞었다. 제빵용 밀가루인 강력분은 중력분에 비해 두 배 넘게 비싸지만 면발의 탄력과 고소한 맛을 높이기 위해 적당한 비율로 섞고 있다고 했다.
 
  곽씨가 반죽 준비를 하는 동안 부인 이씨가 아래층 장작불에 걸린 가마솥에서 온수를 길어 날랐다. 겨울에는 따뜻한 물로 반죽을 해야 맛이 산다는 것이었다. 이씨는 “우리 집 양반은 고지식해서 밀가루든 소금이든 최고로 좋은 것만 쓴다”고 말했다. 마당에는 목포 신안에서 공수해 온 천일염 가마니가 쌓여 있었다.
 
 
  물려받을 자식이 없어 서운해
 
전북 임실읍에 위치한 ‘백양국수’ 공장. 이곳에서 만드는 옛날국수는 가 락이 굵은 중면이다. 30년 넘게 국수를 만들어온 곽강찬·이명희 부부.
  잠깐 멈췄던 국수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롤러를 통과하며 납작해진 반죽이 또 하나의 롤러를 통과하며 하나로 합쳐진 후 둥글게 말렸다. 곽씨는 이 반죽이 다시 두 개의 롤러를 통과하도록 원위치에 갖다 놓았다. 이 과정을 무려 8번 반복했다. 곽씨는 “힘들고 번거로워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국수 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3개의 롤러를 8번 통과하며 다져진 반죽이 비로소 성형틀을 통해 국수가락으로 나왔다. 부부는 이 국수가락을 대나무 발에 밭쳐 신속하게 옥상 건조대에 널었다. 이렇게 널어 놓은 국수가 완성되기까지는 햇볕이 좋은 여름의 경우 3일, 요즘처럼 추운 겨울의 경우 보름이 걸린다고 한다. 국수는 바람과 햇볕에 건조되는 동안 자연 숙성이 된다. 인내와 끈기 없이는 어려운 작업이다. 곽씨의 말이다.
 
  “힘든 과정에 비하면 수입이 너무 적어. 국수 공장이 많았을 때는 힘들게 만들어 놓고도 팔지 못해 버릴 때가 많았지. 그럴 때는 아이들이 학비를 벌기 위해 전주에서 막노동을 하곤 했어. 그때 임실이며 남원 등에 있던 국수 공장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지. 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문을 닫지도 못하고 지금껏 국수만 뽑았지. 그 덕에 지금은 국수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됐는데 나이가 들어서 너무 힘들어. 물려받겠다고 나서는 자식도 없고. 애들은 그만 접고 편하게 살라고 하는데, 우리 국수 맛있다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두고 어떻게 문을 닫아. 난 그렇게 못해.”
 
  곽씨는 군 제대 후 3년 동안 임실 오수에 있는 국수 공장에서 기술을 익힌 후 1972년 공장을 차려 독립했다. 이후 42년째 국수를 만들고 있지만 들어가는 품에 비해 단가가 낮아 큰돈은 벌지 못했다. 2남1녀의 자녀들 굶기지 않고 남부끄럽지 않게 공부시킨 것 정도였다고 한다. 부인 이씨의 말이다.
 
  “저 양반은 국수를 만들 줄만 알았지 장사할 줄은 몰랐어요. 남들보다 좋은 재료로 만들면 값을 더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거든. 우리 국수 맛에 길든 사람은 다른 집 국수 못 먹어요. 맛의 차이를 귀신같이 알아요. 한 번은 국수를 좀 쉽게 빨리 만들어 볼 생각으로 불을 넣은 방에서 건조했더니 거래처에서 맛이 없다고 반품이 들어왔지 뭐예요.”
 
  노부부는 평생 국수 때문에 고생했지만 물려받을 자식이 없는 것이 못내 서운한 듯 “이 힘든 일을 누가 하겠느냐”며 웃었다.
 
 
  인천 권오길 손국수
 
  소량 생산으로 품질 유지
 
국수 공장 아래층은 국수 전문 식당으로 운영 중이다. 입소문이 나서 주말이면 하루에 1000명이 넘는 손님이 다녀간다. 김혜경·권오길 부부.
  호남 지역이 백양국수를 으뜸으로 친다면 수도권에서는 단연 ‘권오길 손국수’가 최고로 꼽힌다. ‘권오길 손국수’의 주인은 권오길(權五吉)씨다. 그는 허영만의 인기 만화 <식객>(국수완전정복 편)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더욱 유명해졌다.
 
  인천광역시 불로동에 있는 그의 국수 공장은 국수 전문 식당을 겸하고 있다. 국수와 즉석 칼국수를 파는 이 식당은 주말이면 하루 1000여 명이 다녀갈 정도로 유명 맛집이 되었다. 또한 ‘권오길 손국수’는 이 식당이 아니면 구매할 수 없다. 권씨는 “워낙 적게 만들기 때문에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줄 물량이 없다”며 “국수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양을 늘리지 않고 내가 관리할 수 있을 만큼만 생산한다”고 말했다.
 
  이 공장의 국수는 기업이나 단체에서 선물용으로 많이 구입해 간다. 이 역시 양이 부족해 기업 간 국수 확보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기자가 방문한 이날도 서울 강남의 모 은행 지점장이 선물용 국수를 선점하기 위해 공장을 직접 방문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는 “한동안 했던 온라인 판매도 지금은 중단한 상태”라고 했다. 권씨가 이렇듯 잘나가는 국수 공장 오너로 성공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혼분식 장려 운동이 정점을 달리던 1970년대 중후반 서울 신길동 산동네 판자촌에서 작은 국수 공장을 했다. 당시만 해도 동네 여기저기에 소규모 국수 공장이 많았다. 어려운 형편에 한양공고에 진학한 그는 틈틈이 국수 공장 일을 돕기 위해 근처 구로공단과 해군본부, 공군본부 등지에 배달을 많이 나갔다. 그런 아들이 안쓰러웠던지 아버지는 “공부 열심히 해서 국수 장사는 하지 마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 역시 고생만 하고 돈은 얼마 되지 않는 국수 장사는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학교 졸업 후 건설업부터 택시 기사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사소한 신호위반으로 면허가 취소된 후에는 운전도 할 수 없어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청소부까지 했지요. 주머니에 돈 1000원이 없을 정도로 비참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차를 팔아 경기도 부천에 있는 재래시장에 가게를 하나 얻었다. 33m2(10평)도 안 되는 공간을 베니어판으로 칸막이를 한 후 한쪽은 닭튀김과 만두피를 만들어 파는 가게로, 다른 한쪽은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옆집은 두부집인데 국수까지 팔았다. 국수가 잘 나가는지 공장에서 가져온 국수 상자를 그의 가게 앞까지 쌓아 놓곤 했다. 영업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식당 운영하며 국수 맛 연구
 
  국수 기술자인 그가 상도덕을 지키느라 참고 참다 화가 나서 국수 기계를 들여놓고 국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뽑은 국수를 살림집 천장에 매달아 널고 식구들은 그 아래서 잠을 잤다. 국수는 가게 앞에 20m 넘게 줄을 설 정도로 잘 팔렸다. 결국 힘들다고 하지 말라던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고 국수를 만들게 된 것이다. 권씨는 “돌고 돌아 국수 공장을 하게 된 걸 보면 국수는 내게 운명이 아닌가 싶었다”고 말했다.
 
  “국수뿐만 아니라 만두피랑 닭강정도 만들어 팔았는데, 모두 천연재료만 사용해 정성껏 만들어서 그런지 늘 손님이 많았어요. 가게 앞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릴 때면 며칠 밤을 새우면서 닭강정을 만들었죠. 그 와중에 국수집을 무대로 가수 ‘신화’의 김동완씨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주말 드라마 <슬픔이여 안녕> 제작 자문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의 국수집 못지않게 드라마도 인기가 있었다. 권씨는 더욱 유명해졌고 장사도 잘되었다. 얼마 후 그는 아파트를 한 채 장만해 살림집을 분리시키고 가게는 목동 곰달래 시장을 거쳐 고향 신월동 시장으로 확장 이전했다. 이곳에서는 국수만 했는데 손님이 몰려 매출이 상당했다. 그는 “아버님이 돈을 물려주시지 않았지만 국수 뽑는 기술을 물려주신 덕에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장사가 잘되니까 분점을 내라는 제의가 많이 들어왔어요. 품질관리를 위해 모두 거절했습니다. 대신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선 사람들에게 국수 뽑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어요. 이분들은 현재 부천과 인천, 일산 등지의 재래시장에서 국수를 팔며 잘살고 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시절에도 국수는 잘 팔렸다. 그 덕에 그는 적지 않은 돈을 모았고, 지금의 자리에 4층짜리 빌딩을 지을 수 있었다. 그는 이 건물 1층은 상가로 임대하고, 2, 3, 4층은 각각 식당과 사무실, 공장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평일 오전 식당을 찾았다. 아직 점심때가 아닌데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특이하게도 테이블에는 작은 모래시계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권씨는 “점심때가 되면 자리가 없으니 우선 맛을 보라”며 김치말이 국수 한 그릇을 내왔다. 백양국수에 비해 가는 면은 차지고 쫄깃하면서 글루텐 특유의 풍미가 느껴졌다. 김치가 들어간 소스는 조미료 맛이 나지 않으면서도 새콤달콤 혀에 감겼다. 권씨의 말이다.
 
  “이 식당을 내기 전까지 저는 건면만 만들었지 국수를 끓여 본 적이 없어요. 맛을 내기 위해 저희 집 국수를 갖다 파는 식당 중 매출이 가장 높은 곳을 찾아가 그 노하우를 비용을 지불하고 배웠지요. 거기다 별도로 연구한 재료를 넣어 이 맛을 내기까지 1억원 정도의 돈이 들어갔죠.”
 
 
  밀가루에 쌀가루와 전분 섞어
 
인천광역시 불로동에 위치한 ‘권오길 손국수’. 권오길 대표가 중력분과 강력분에 쌀가루와 감자 전분을 섞어 면을 뽑아내고 있다.
  국수를 먹는 동안 테이블 위의 냄비가 끓었다. 권씨가 방금 썰어 내온 칼국수 면을 냄비에 넣은 후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모래시계는 3분에 맞춰져 있었다. 끓는 물에 3분 익힌 칼국수 맛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면은 씹기 좋을 만큼 쫄깃거렸고, 국물은 비리지 않은 해산물로 육수를 낸 듯 시원했다. 국물에는 오징어, 멸치, 새우가루, 미더덕 잘게 부순 것 등이 들어갔다고 한다. 듣고 보니 입안에서 미더덕 조각이 기분 좋게 씹혔다.
 
  12시가 되자 식당은 만원이 되었다. 손님들 중에는 그를 알아보는 이가 많았다. 그는 손님들에게 인사하고 즉석 칼국수 끓이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 손님들 중에는 “맛있게 먹었다”며 계산대 앞에 진열된 건면을 한두 개씩 사 가는 이가 많았다. 그는 “5000원 국수 한 그릇 먹기 위해 멀리서 이곳까지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 한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점심 식사 후 그는 4층 공장에서 면을 뽑았다. 100m2(30평)가 채 안 되어 보이는 공장은 청결했다. 건조실도 실내에 만들어져 있었다. 자연 건조 시설이지만 환경오염 문제를 고려해야 하는 도심이라 부득불 실내에 마련했다고 한다. 선풍기와 난로가 마련돼 있는 이곳의 평균 건조 시간은 3일이다.
 
  면발은 백양국수 공장과 유사한 방법으로 뽑아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밀가루 중력분과 강력분을 섞는 것 외에 쌀가루와 감자 전분을 추가한다는 점이었다. 또한 여기에 쑥이나 백년초 같은 천연재료를 넣어 색과 향을 낸다는 점도 달랐다. 권씨의 말이다.
 
  “저는 이제 돈에는 큰 욕심이 없습니다. 최고 품질의 국수를 만들어 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죠. 저희는 올해로 7년째 모 대기업의 주문으로 대한민국을 이끄는 670명의 리더들에게 선물용 국수를 배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업으로부터 최고란 고객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건물을 내려오는데 식당 입구에 커다란 스티커 벽판이 눈에 띄었다. 수도권 지도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권오길 손국수 집이 생겼으면 하는 곳에 스티커를 붙이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었다. 권씨의 설명이다.
 
  “IMF 때처럼 실직한 분들을 돕고자 마음을 고쳐 분점을 내 주기로 했습니다. 대신 제가 관리할 수 있을 정도로 한정하고, 후보자도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쳐 엄선할 예정입니다. 1호점은 지난해 12월 말 서울 은평구에 오픈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아요. 국수는 물론 다른 재료까지 본점과 동일한 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맛도 같습니다.”
 
  그는 프랜차이즈뿐만 아니라 경기도 파주에 국수학교도 설립할 예정이다. 이곳에는 국수 역사관을 비롯해 온 가족이 직접 국수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관 시설이 들어선다고 한다. 그는 “올해는 할 일이 많다”며 웃었다.
 
 
  일본식 소면 만드는 강식품
 
  12공정 거치며 8번 숙성
 
충북 음성에 위치한 (주)강식품의 최우국 대표.
  충북 음성에 있는 강식품은 백양국수나 권오길 손국수와는 다른 방식의 국수를 만드는 곳이다. 이곳은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치대고 늘려서 만든다고 해서 ‘수연소면’이라 이름 붙여진 일본식 국수를 생산한다. 국내에서 수연소면을 만드는 국수 공장은 이곳이 유일하다. 창업주인 강희탁(姜熙卓・83) 회장에 이어 2대째 국수를 만들고 있는 사위 최우국(崔佑國) 대표는 수연소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수연소면은 반죽을 해서 완성하기까지 총 12단계의 공정을 거칩니다. 이 공정 사이사이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30분씩 8차례 숙성시키기 때문에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국수죠. 그만큼 면발이 부드럽고 쫄깃하면서 풍미가 있습니다. 물에 오래 두어도 붇지 않을 정도로 면발이 탄탄하고요.”
 
  제조 공정이 까다롭고 긴 것은 물론 사람 손을 많이 필요로 하다 보니 국수 값이 비싼 편이다. 소매가격이 일반 기계면보다 무려 3~4배 정도 높다. 이 때문에 일반 기계면을 수연소면으로 속여 파는 ‘짝퉁 수연소면’도 등장했다. 최 대표는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수연소면 중 제조사가 강식품이 아닌 것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식품은 현재 생산 중인 제품의 절반을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오뚜기식품과 한국 암웨이(주)에 납품하고 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판매하고 있는 오뚜기의 ‘옛날 수연소면’과 한국 암웨이의 ‘정기품오색소면’은 모두 이 회사 제품이다. 나머지 절반의 제품은 국내 기업들의 판촉용으로 나가거나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강식품은 전체 직원이 30명이 채 되지 않는 중소업체다. 하루 10~20t의 국수를 생산하는 규모지만 2010년 국내 국수 공장으로는 최초로 해썹(HACCP·위해요소 중점관리기준) 인증을 받았다. 원료, 제조, 가공, 유통 등 전 과정에서 안전성이 확보되어 있다는 것을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승인한 것이다. 작지만 대기업 못지않은 시스템을 갖춘 기업인 셈이다. 최 대표는 “작은 기업이지만 고객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도록 제조 공정이나 시설을 공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희 회사는 규모는 작지만 역사가 꽤 오래된 식품업체입니다. 역사만큼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속상할 때가 많죠. 그래서 고객들이 찾아오면 언제든 공장을 견학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습니다.”
 
 
  부드럽고 소화 잘되는 게 특징
 
  강식품은 1975년 경남 양산에서 출범한 회사다. 강희택 회장은 일본에 돈육(豚肉)을 수출해 오던 중 돈육 파동이 일자 일본 지인들의 소개로 수연소면 공장을 시작했다고 한다. 최 대표의 말이다.
 
  “어른께서는 6·25 전쟁 중 두 팔을 잃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분이세요. 그걸 잘 아는 일본 지인들이 한국에서 수연소면을 만들어 전량 일본에 수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죠. 어른은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기술을 익힌 후 국수 기계를 들여와 경남 양산에 공장을 설립했어요. 양산은 신라시대에 국수를 일본에 전파한 곳이라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었죠.”
 
  이런 연유로 강식품 국수는 1970년대 말까지 ‘신라면(新羅麵)’이라는 브랜드로 일본에 전량 수출되었다.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에는 130만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여 정부로부터 수출화 기업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 NHK 방송은 “한국 국수 업체가 고급 소면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하고 있다”고 소개했고, 이를 본 관광객들이 단체로 견학을 오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수출은 2002년 이후 중단되었다. 오랜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에 비해 국내 인건비며 물가가 상대적으로 많이 오른 까닭이다.
 
  수연소면이 국내에 시판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서울 소공동에 롯데백화점이 생기면서다. 일본 사정에 밝은 백화점 직원이 ‘수연소면이 국내에서도 생산된다’는 얘기를 듣고 입점시킨 것이라고 한다.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회장이 이 국수를 사다 먹어 보고 제일제당 직원에게 “어느 밀가루를 쓰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강식품은 제일제당이 수연소면용으로 특수 제조하는 밀가루만 사용하고 있다. 최 대표는 “이 밀가루의 제조법은 영업 비밀이라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1975년 일본에서 들여온 방식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만 전했다.
 
  강식품은 이 밀가루를 매일 새벽 2시30분에 반죽한 후 치대고 늘리는 작업을 반복하며 저녁 9~10시쯤 면을 완성한다. 최 대표는 “이 공장에 온 후 지금껏 하루 3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한 최우국 대표는 1989년 이 회사에 입사했다. 대학 재학 중 만난 강 회장의 네째 딸을 사랑한 것이 이 국수 공장에 입사한 계기였다. 최 대표는 “집사람이 자매만 여섯인데, 어려운 업종이라 아무도 국수 공장 일을 하지 않으려 해서 맡게 되었다”며 웃었다. 최 대표에게 진짜 수연소면의 특징을 묻자 “한 올 한 올 정성들여 늘린 후 여러 번 숙성시키기 때문에 면이 부드럽고 소화가 잘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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