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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春園의 막내딸 이정화 박사 고국 방문 동행기

“‘친일 연설 하지 마라’는 어머니를 보며 운 아버지”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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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원 이광수의 막내딸 이정화 박사… 미국에서 생화학 공부한 후 인도인 독립운동가 출신 학자와 결혼해
⊙ 이정화 박사, “1991년 북한이 오빠 이영근 존스홉킨스대 물리학과 교수 초청해 생화학 무기 기밀 요구했다”
⊙ 문학교과서에서 모두 빠진 춘원의 작품들. 춘원이 몸담으며 교가 작사한 광동중학교는 교가 바꾸라는 요구도 받아
⊙ 방민호 서울대 교수(춘원학회 회장), “춘원 없는 한국 현대문학은 너무 빈약… 춘원은 한국 현대문학에 얽힌 난제들을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화두다”

李廷華
1935년생. 이화여고 졸업 후 도미(渡美), 펜실베이니아대학 화학과 졸업, 브린모어대 박사 / 서울대 초빙교수 역임 / 《그리운 아버님 춘원》(1955) 출간
사진=하주희
  춘원은 고아였다. 열 살에 부모를 콜레라로 잃었다. 국문학자 김윤식 교수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년)의 일생을 ‘고아 의식’으로 정의했다. ‘이 고아는 평생을 두고 아비상 찾아 헤매기로 일관했다. 그 아비는 동학, 상해임시정부, 도산과 흥사단, 법화경, 창씨개명으로 계속 변했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아비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 춘원의 비극이었다.’
 
 
  죽은 아들의 환생이라 생각했던 아이
 
춘원과 가족들의 사진. 왼쪽부터 허영숙, 이정화, 이정란, 이영근, 이광수다.
  평생 아비를 찾아 헤맸다는 그 고아는 자식들에겐 어떤 아비였을까. 춘원의 막내딸 이정화(李廷華·89) 박사를 만났다. 미국에 살고 있는 이 박사는 서울을 방문해 춘원학회 회원들과 지인들을 만나고 모친 허영숙의 묘역, 광동학교 등을 찾았다. 바쁜 일정이었다. 기자는 그의 여정에 함께했다.
 
  지난 5월 1일, 이정화 박사와 처음 만나고 기자는 내심 놀랐다. 구순을 앞둔 노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뿐한 걸음걸이며 표정과 손짓이 소녀 같았다.
 
  ― 1935년생이 맞습니까.
 
  “실은 1934년 12월에 태어났어요. 그 열 달 전에 둘째 오빠가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죽은 오빠가 다시 태어나는 걸로 생각해 그렇게 출산을 기다렸답니다. 그런데 낳고 보니 딸이잖아요. 그래서 실망을 해서 출생신고를 안 한 겁니다. 다음 해에 어머니가 채근을 했지요. ‘왜 아직 신고를 안 했습니까?’ 그러자 마지못해 1935년 2월 초하루에 신고를 하셨어요. 아버지의 생일날이었지요.”
 
  춘원은 두 번의 결혼에서 3남 2녀를 두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첫째 아들 이진근씨를, 두 번째 결혼에서 차례로 2남(이봉근, 이영근) 2녀(이정란, 이정화)를 얻었다.
 
  이 박사는 세 살이 되어서야 아버지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나고 어머니 허영숙이 어린 딸들을 데리고 도쿄로 유학을 떠나서다.
 
  “일본에서 아주 고생했대요. 어머니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아기를 봐주기로 한 사람이 도망을 간 겁니다. 어머니가 피곤해하며 돌아왔는데, 제가 배가 고파 울면서 신문지를 먹고 있더랍니다. 그러면서 문을 가리키더래요. 보모가 도망갔다는 거죠. 오빠는 아버지와 한국에서 살고 있었어요.”
 
 
  최초의 여성 개원의 허영숙
 
  이 박사의 어린 시절을 얘기하자면 어머니 허영숙(許英肅·1897~1975년)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허영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개원의다. 1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한 후 돌아와 최초의 산부인과인 ‘영혜의원’을 열었다. 이후 《동아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허영숙은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성품이었던 듯하다.
 
  “외갓집이 부유했는데도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의 일본 유학을 허락하지 않았대요. 그러니 어머니가 밤을 많이 사서 이불 속에 몰래 감춰놓고 먹으면서 며칠 동안 단식 투쟁을 했대요. ‘유학 안 보내주면 나는 죽는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 가게 된 거죠. 그런데 일본에서 아버지를 만난 겁니다.”
 
  ― 같은 유학생이라 만나게 된 건가요.
 
  “병원에 있는데 의사가 그러더래요. ‘조선인 환자가 왔으니 만나보지.’ 아버지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느꼈대요. ‘이 사람은 우리 조선을 위해 일하고 조국을 건져줄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사랑하게 됐답니다. 아버지가 돈이 없으니, 병원비까지 어머니가 다 내어주고 병구완을 하셨대요. 피를 토하면 다 치워주고요.”
 
  ― 춘원이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도 어머니가 찾아가셨지요?
 
  “아버지 생각이 계속 나더래요. 어머니가 집에 있는 금고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돈을 다 꺼내서 편지를 쓰셨어요. ‘이 돈을 가지고 상해로 가겠습니다. 대신 저는 다른 상속은 받지 않겠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상해에 산원(産院)을 차려 아버지랑 살아야겠다 생각하고 돈을 들고 떠났답니다. 일본인 의사에게서 추천서를 받아 들고요.”
 

  ― 대담하셨네요.
 
  “만주를 통해 가는데 어머니가 보통 칸에 타고 있었답니다. 1등석에 타고 있던 선교사가 자꾸 ‘거기는 위험하니 여기로 오라’고 했대요. 싫다고 했는데도 선교사가 성화를 부리자 결국 자리를 옮겼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처음 앉아 있던 칸에 마적 떼가 몰려와서 강도짓을 했답니다.”
 
  ― 천만다행이었네요.
 
  “상해에 도착해 아버지를 만났는데 참 좋더래요. 두 분이 함께 고급 호텔에서 묵었는데, 그런데 그게 임시정부에 알려진 거예요. 일본인의 추천서까지 들고 왔다며 어머니가 ‘일본 앞잡이’라는 소문이 돈 겁니다. 임시정부 안에서 우리 어머니를 체포하라는 명령까지 내려졌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떡해요. 양자강에 몸을 던져 죽어버릴까 했는데, 물이 너무 더러워서 도저히 뛰어들 수가 없더래요. 살고 싶어서 그러셨겠지요. 어머니가 서울로 돌아오자 아버지도 따라왔어요.”
 
  ― 어머니 때문에 상해 생활을 포기하신 건가요.
 
  “상해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끼셨대요. 미국에, 영국에, 프랑스에 조선이 독립을 원한다고 알렸으니 아버지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신 거죠. ‘마하트마 간디처럼 독립운동은 자신의 나라에서 해야 한다’ 생각이 들어서 귀국했다고 해요. 어머니 생각이 나시기도 하셨겠죠.”
 
 
  자녀들에게 영어 가르친 춘원
 
왼쪽부터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 1932년경의 사진이다.
  도쿄 유학에서 돌아온 후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한 상태였던 춘원은 1921년 허영숙과 결혼한다. 이후 네 아이를 낳았다. 자녀들 중 춘원과 가장 마음이 통했던 건 막내딸 이 박사였던 것 같다.
 
  “제가 여덟 살 때였던가요, 추운 날이었는데 길에 빨가벗은 남자가 있더라고요. 그 모습이 어찌나 불쌍한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막 울었어요. ‘추운데 빨가벗고 있으니 그걸 어떻게 해’ 하면서. 그런데 아버지가 저의 그런 모습을 좋아하셨어요. 아버지는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면 주머니에 있는 돈 중 가장 큰 돈을 내줬어요. 어머니는 가장 작은 돈을 내주셨고요. 그러니 아버지가 집에 계신 때만 골라 구걸을 오는 이도 있었어요.”
 
  춘원은 자녀들을 무척 생각했던 것 같다. 직접 영어도 가르쳤다.
 
  “자려고 누우면 아버지가 안데르센 동화책을 읽으면서 번역해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하루는 아버지가 동화책을 읽어주시는데 손님이 온 거예요. 이에 책을 두고 손님을 만나러 가셨어요. 그러자 당시 함께 살던 피천득 교수님이 와서 마저 읽어주셨어요. ‘어머, 천득이 오빠도 영어를 할 줄 아네’ 그러면서 잠이 들었지요.”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1910~ 2007) 역시 춘원처럼 부모를 일찍 여읜 고아였다. 춘원은 피천득을 데려와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영어와 영시를 가르쳤다. 금아라는 호를 지어준 것도 춘원이다. 춘원은 영어를 가르치면서 문학책도 읽게 했다.
 
  “정란 언니는 아버지와 매주 1시간씩 소설 《테스》를 원서로 읽었어요. 언니가 《테스》를 아주 좋아했어요. 백인제 박사의 따님도 함께 배웠지요. 저도 일곱여덟 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문 책을 읽었어요.”
 
  아버지에게 배운 영어로 훗날 이 박사는 미국 땅을 밟게 된다. 이화여고 재학 시절인 1952년 미국의 《뉴욕 해럴드 트리뷴》 지가 연 세계학생토론대회에 한국 대표로 뽑혀 미국을 돌며 연설을 했다. ‘우리가 원하는 세계’라는 주제였다. 그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허영숙은 결혼 생활 성공한 신여성”
 
  다음 날인 5월 2일 이 박사와 경기도 양주의 한 천주교묘원으로 향했다. 허영숙의 묘역이 있는 곳이었다. 배화승 선생 부부와 함께였다. 배 선생은 이정화 박사의 오빠, 이영근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처남이다. 이 교수의 부인 배옥경 타우슨대 명예교수의 남동생이다. 이 교수는 2019년 별세했다. 이 박사에게는 배 선생이 한국에 있는 거의 유일한 인척인 셈이다.
 
  5년 만에 찾아가는 어머니. 화원에 들렀다. 이 박사는 웬일인지 꽃이 피지 않은 모종을 골랐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일까. 내년이면 틀림없이 나리꽃이 필 거라고 화원 주인은 말했다. 묘역으로 향하는 이 박사의 발걸음이 청년처럼 가벼웠다
 
  ― 어머니는 춘원에게 어떤 아내였나요.
 
  “사람들이 그랬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병 주고 약 준 사람이라고요. ‘당신은 착한 척해서 남에게 존경을 받는다. 나는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 그것도 모르니 어떡하느냐’ 하소연을 하시곤 했어요. 아빠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셨지요.”
 
  춘원이 쓴 시 ‘아내의 설교’의 한 구절대로다.
 
  ‘당신은 악인(惡人)/ 나도 악인/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악인이라고 인정하는데, 당신은 선인(善人)인 척해 남들로부터 존경받는다/ 나는 손이 닳도록 당신을 위해 살았는데 당신은 나를 위해 무얼 했소/ 그러니 나를 이해하는 남편이라도 돼주소서.’
 
  강인숙(姜仁淑) 영인문학관 관장은 허영숙을 두고 “신여성 중 결혼 생활에서 가장 성공한 경우”라고 평가했다. 강 관장의 말이다.
 
  “허영숙은 결혼 후 두 번이나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났지요.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춘원이 그걸 허락한 거예요. 한때는 허영숙이 춘원 대신 《동아일보》에서 문화부장 역할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알려준 모윤숙 시인
 
  춘원 역시 아내에게 병 주고 약 주는 남편이었는지 모른다.
 
  “큰오빠가 죽고 아버지가 중이 되겠다며 홍지동 산장에 가 계셨어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말리러 영근 오빠를 데리고 갔대요. 가서 앉아 있는데 사진 배달이 오더래요. 보니까 아버지와 모윤숙씨가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어머니가 막 화가 나서 일어나서 돌아오셨지요. 아버지가 후회가 됐는지 돌아오셨대요.”
 
  ― 춘원이 모윤숙(1910~1990년) 시인을 아꼈다는 얘기는 유명하지요.
 
  “아버지가 모윤숙씨를 천재 소녀라고 하셨어요. 어머니가 불평하셨지요. ‘(남편이) 모윤숙씨는 천재고 나는 의사 노릇밖에 못 하는 사람이라고 나를 나쁘게 평가한다.’ 1946년엔 두 분이 이혼을 하셨어요. 미워서 이혼한 게 아니라 자식들과 재산을 지키느라 그러셨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나중엔 모윤숙씨에게 아주 고마워했어요. 북한으로 끌려간 아버지의 소식을 알려준 게 모윤숙씨였거든요.”
 
  조선총독부는 1940년부터 춘원이 책 내는 걸 금지했다. 1944년엔 서점에 나와 있는 책도 압수했다. 남편을 대신해 허영숙이 병원을 운영하며 생활을 꾸려나갔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법이 제정되면 소위 ‘친일 인사’로 분류, 재산을 압류당할 위험도 있었다.
 
 
  남편과 아들 중 아들 택한 어머니
 
  이 박사는 1955년 책을 냈다. 《그리운 아버님 춘원》. 17세에 쓴 원고였다. 출간 당시 화제가 됐던 이 책은 미국 생활 얘기를 덧붙이며 1993년 재출간됐다.
 
  ― 그 책은 왜 썼나요.
 
  “한국 학생 대표로 미국에 다녀왔을 때예요. 한 잡지사에서 다녀온 얘기를 써달라고 해서 써줬더니, 아버지 얘기도 써달라고 해요. 그래서 썼어요. 책에 어머니 생각이 한 5% 정도는 들어간 것 같아요.”
 
  ― 어떤 부분인가요.
 
  “아버지가 1·4 후퇴 후 공산당원들에게 붙들려 가는 대목이에요. 경찰서에 끌고 가기 전에 자술서를 쓰라고 하니 아버지가 종이를 찢고 만년필을 꺾어버리는 대목이 나와요. 거기에 어머니가 쓰신 표현이 나오지요. 인민군을 피해 집 지하실에 숨어 있던 오빠가 담을 넘어 탈출하는 대목도 어머니가 손을 대신 거예요. 실제보다 더 아슬아슬하게 쓰셨지요. 책의 마지막 구절도 어머니가 쓰셨습니다. ‘나는 나에게 아버지요, 스승이요, 종교요, 희망이던 아버지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다.’”
 
  ― 춘원이 납북된 후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9·28 서울 수복 후 효자동 집으로 돌아갔을 때를 두고 책에 이렇게 쓰여 있어요. ‘우리가 잘못하여 아버지를 잡혀가시게 한 것 같았다.’ 저는 저 때문에 아버지가 잡혀갔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머니 생각이었죠. 어머니는 본인 잘못 때문에 아버지가 잡혀가신 것 같다고 생각하셨어요. 인민군에게 끌려가야 할 상황에서 아들과 아픈 남편 중 선택을 해야 했던 것이었어요. 아들을 살리려다 보니 아버지를 완전히 보호할 수 없었던 거죠.”
 
 
  “北, 생화학 무기 정보 요구”
 
북한 평양 룡성구역에 있는 춘원의 묘. 1991년 이영근 교수가 방북 당시 촬영한 사진이다.
  ― 행여 아버지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 하셨나요.
 
  “1953년, 1955년까지는 생존하셨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밭을 갈면서 살았다는 소문도 있었고요. 그렇지만 1950년 10월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진실이겠다고 나중에 결론을 내렸지요. 납북되시던 해 1월에 벌써 피를 토하셨으니까요.”
 
  1991년 이영근 교수는 북한 당국의 연락을 받는다. 아버지의 묘소를 방문하게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애초 2주 일정으로 북한을 찾은 이 교수는 부친의 묘소를 확인했다. 평양 룡성구역 재북인사 묘역이었다. 묘소를 참배한 후 일정을 당겨 급히 한국으로 와버렸다.
 
  ― 북한 당국이 이 교수에게 무슨 얘기를 한 겁니까.
 
  “오빠가 존스홉킨스대 물리학 교수였잖아요. 오빠는 컬럼비아에서 원자탄을 만드는 데 직접 참여도 했었지요. 1991년에 벌써 북한은 원자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대요. 원자탄 지식이 아니라 생화학 무기에 대한 기밀정보를 요구하더랍니다. 존스홉킨스대 생물학과가 굉장히 유명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오빠가 저보다 더 예민하거든요. 그러니 얼른 빠져나왔지요.”
 
  ― 오빠가 해방 후에 《백범일지》 원고를 경교장에 배달하곤 했다지요?
 
  “그랬어요. 김구 선생님이 굉장히 한문을 잘 쓰시더라고요. 한문 《백범일지》를 한글로 고쳐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하셨지요. 백범의 비서를 하셨던 선우진 선생이 매주 한두 번씩 와서 아버지와 같이 고쳤어요. 아버지가 정리한 후 오빠가 원고를 들고 경교장에 간 거죠. 김구 선생님도 만났다고 해요. 아버지가 저희에게 김구 선생님 어린 시절 얘기도 들려주셨어요. 엿이 먹고 싶어서 멀쩡한 수저를 구부려서 엿장수에게 갔다고 해서 우리가 막 웃었지요.”
 
 
  혈서 들고 반민특위로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춘원을 체포한다. 스무 살이던 이영근은 아버지를 위해 혈서를 쓴다.
 
  “오빠가 성격이 불같았어요. 아버지가 끌려가신 후 오빠가 막 화를 냈어요. 조용하더니 어머니가 우는 거예요. 오빠가 방에 들어가서 이로 손가락을 물어뜯은 거예요. 칼로 베어도 피가 뚝뚝 나올 텐데 이로 물어뜯은 거죠. 그게 그렇게 아팠대요. 그 피로 혈서를 썼어요. 어머니가 우시면서 소독을 했어요. 다음 날 오빠가 혈서를 가지고 반민특위에 갔지요.”
 
  혈서의 내용은 이랬다.
 
  〈제 아비 이광수를 보석해주시옵소서. 제가 대신 갇히겠나이다. 제 아비 이광수는 폐병 삼기, 신장결핵, 척추결핵, 늑골결핵 등으로 사선에서 방황했던 것은 세상이 다 주지하는 사실입니다. 이제 병중에서 잡혀갔나이다. 건강한 이 자식이 대신 갇히게 해주시옵소서. 위원장 선생님께 엎드려 애원하옵나이다.〉
 
  ― 혈서가 효과가 있었나요.
 
  “오기열 국회의원이 혈서를 받아 들고 아주 슬퍼하셨대요. 그러면서 오빠가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해주셨어요. 나중엔 어떤 분이 집에 와서 몰래 알려주셨어요. ‘우리가 지금 아버지를 불기소되게 하려고 열심히 하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라.’”
 
  아들의 혈서 덕이었을까, 병보석으로 풀려난 춘원은 그해 8월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운허스님과 춘원
 
봉선사에 있는 춘원기념비 앞에서 이정화 박사와 안경홍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허영숙의 묘역을 떠나 남양주에 있는 봉선사로 향했다. 봉선사는 세조 광릉(光陵)의 원찰이다. 원찰은 선왕(先王)을 추모하고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한 사찰이다. 정희왕후 윤씨와 아들 예종이 1469년에 창건했다. 봉선사는 춘원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운허(耘虛·1892~1980년)스님 덕분이다.
 
  운허와 춘원은 8촌지간이다. 비교적 먼 촌수에도 두 사람은 가까이 지냈다. 일제 치하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운허는 해방이 되자 봉선사 옆에 광동학교를 설립한다. 춘원은 운허가 있는 봉선사에 몸을 의탁했다. 광동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교가도 작사했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는 운허와 춘원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춘원은 8촌 동생이었던 운허스님에게 정신적으로 기댔지요. 춘원이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데도 독립지사였던 운허스님의 역할이 배경에 있었습니다.”
 
  이 박사와 함께 ‘춘원 이광수 기념비’ 앞에 섰다. 봉선사로 들어가는 길, 부도탑 옆이다. 기념비 뒷면엔 주요한의 추모글이 새겨져 있다. 미국에서 자녀들과 거주하던 허영숙은 이 추모비를 세우기 위해 1975년 한국에 들어왔다가 제막식을 못 보고 별세했다.
 
이정화 박사가 춘원이 아이들을 가르쳤던 광동중학교에서 설립자 운허스님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추모비 왼쪽에 있는 비석이 눈에 띈다. 월파 이후락(李厚洛·1924~ 2009년)을 기리는 비다. 불심이 깊었던 월파는 봉선사 중창 당시 크게 시주를 했다고 한다.
 
  이 박사는 아버지의 기념비 앞에서 안경홍씨와 인사를 했다. 초대 문교부 장관 한뫼 안호상 박사의 아들이다. 두 사람은 안씨에게는 새어머니였던 시인 모윤숙에 관한 기억을 나눴다. 문득 이 박사가 춘원이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진근씨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큰오빠와 저는 사이가 좋았어요. 늘 만주국 오빠라고 불렀지요. 오빠가 초콜릿을 사 올 거라며 기다렸지요. 왜 만주국 오빠라 불렀을까. 오빠가 그 부근에서 살지 않았나 싶어요. 1945년에 오빠가 죽었어요. 우리가 38선 이북으로 갈 수 없으니 봉선사에 와서 오빠의 장례식을 치렀지요. 봉선사 아저씨(운허스님)가 치러주셨어요.”
 
  봉선사를 떠나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광동중고등학교로 갔다. 광동중학교 학생들이 이 박사를 위해 교가를 불러줬다. ‘운악산 구름 속이 우리들 배우는 집’으로 시작되는 교가다. 춘원이 작사하고 현제명이 작곡했다. 정홍권 광동중 교장은 “경기도 교육청에서 교가를 바꾸라는 공문이 내려온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친일 인사가 작사했다는 이유다. 학교 측은 요구를 거부했다. 어차피 아이들은 춘원이 누구인지 모를 터다. 2019년부터 춘원의 작품은 일체 문학교과서에서 빠졌다.
 
 
  아직도 남아 있는 춘원 집필터
 
아버지와 함께 살던 사능리 초막 터를 둘러보는 이정화 박사.
  이번에는 남양주 사능리로 갔다.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무덤인 사릉이 있는 곳이다. 1944년 허영숙은 사능리에 땅을 사고 초막을 짓는다. 기력이 쇠한 춘원과 삼 남매를 이곳에 데려다 놓고 자신은 서울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아직도 그곳에 초막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당에는 집필터임을 알리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이 박사는 사릉 시기를 아버지와 보낸 날들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 말했다. 이곳에서 삼 남매는 아버지와 함께 새벽이슬을 헤치고 버섯을 따러 다니고, 함께 윷놀이를 했다.
 
  “아버지는 윷놀이를 할 때면 제가 말을 잘 놓는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이 박사는 아버지를 통해 관세음보살과 하나님을 알게 됐다. 아버지와 함께 풀밭 위에 꿇어앉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합장을 하고 관세음보살을 불렀던 기억을 회고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좋아하던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를 동네 아이들과 함께 불렀다.
 
  ― 춘원의 종교는 무엇이었을까요.
 
  “불교, 기독교 그 모두지요. 무속적인 모습도 있지 않았나 싶네요. 영적인 면이라고 할까요? 아버지가 밤에 혼자 다른 방에서 가만히 앉아 있더래요. 어머니가 하도 이상해서 물었대요. ‘왜 그러세요?’ 아버지가 그러더래요. ‘이렇게 있으면 사람들의 얼굴이 다 떠오른다. 그러면 대화를 나눈다.’”
 
  이 박사는 어머니에게 사릉 집을 상속받았다.
 
  “어머니에게 그랬어요. ‘아무 재산도 원하지 않지만, 사릉 집만은 저에게 주세요.’ 그때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비행기 값보다 사릉 집의 가격이 더 쌌어요.”
 
 
  돌베개를 베고 잔 춘원
 
춘원의 사릉 시기가 담겨 있는 책들. 왼쪽부터 이정화 박사가 쓴 《그리운 아버님 춘원》 《돌베개》 《도산 안창호》.
  사릉과 광릉(봉선사)에 머무른 4년 반 동안, 춘원은 여러 작품을 썼다. 《도산 안창호》를 냈고 《돌베개》와 《나의 고백》을 썼다. 1948년 서울로 돌아온 후 1950년 납북됐으니 인생의 마지막은 사릉에서 보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자신이 쓴 책의 제목대로 춘원은 광복 후 돌베개를 베고 잤다. 참회의 의미였다. 그 때문에 입이 돌아가 치료를 받기도 했다. 돌덩이에 머리를 얹으며 그는 예상했을까. 그가 쓴 《나의 고백》을 가지고 후학들이 그를 공격해올 것을 말이다.
 
  전날 있었던 춘원학회 모임에서 이 박사는 가족의 창씨개명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춘원은 1939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했다. 이 박사의 말이다.
 
  “학교에 가면 오빠는 미쓰아키, 언니는 미쓰요, 저는 미쓰에로 불렸어요. 집에서는 정화였고요. 아버지는 묘향산을 생각해 가야마(香山)라 지었어요.”
 
  이 박사는 몇 년 전까지도 ‘아버지의 친일에 대해 사과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번 방한에서도 춘원 연구자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춘원이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나.’
 
  아버지와 헤어지고 70년도 더 지난 후 또다시 아버지의 친일을 따져 묻는 질문을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옆에서 보고 있으려니, 춘원의 딸로 산다는 것의 한 면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연구자의 질문에 이 박사가 답했다.
 
  “아버지는 평생 두 번 우셨어요. 오빠가 어린 나이에 죽었을 때, 그리고 어머니에게 ‘왜 친일 연설을 하고 다니냐, 그러지 마라’라고 힐난을 들으셨을 때예요. 아버지는 그러셨어요. ‘일본이 지면 우리는 독립을 하겠고, 만약 일본이 이긴다면 내가 친일한 것이 우리 민족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이 말을 듣고 어머니가 ‘미쳤다’며 울기 시작했어요. 아버지도 울었어요. ‘이것이 내가 가는 길이다.’”
 
  이 박사의 말이 이어졌다.
 
  “나중에 아버지가 쓰셨잖아요. ‘우자(愚者)의 효성’이라고요. 전쟁이 시작되고 공출을 했어요. 저희 집에 있는 철문까지 공출해 갔어요. 그렇게 만드는 무기 중 절반은 망가져서 쓸 수 없다는 얘기가 돌았어요. 그때는 일본이 조선인 지도자 3000명에 대한 살생명단을 작성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비슷한 증언을 고하 송진우(宋鎭禹·1890~1945년)의 손자 송상현 서울대 명예교수도 했다. 《월간조선》 2023년 12월호에 실린 송상현 교수 인터뷰에서 그는 “해방 직전 일제가 조선의 지도자를 모두 죽이고 철수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고하는 미리부터 병이 깊어 운신을 못 하는 시늉을 했다”고 말했다.
 
 
  끊이지 않는 친일 논란
 
1992년에 열린 춘원 탄생 10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이영근 교수(왼쪽)와 이정란 박사. 사진=조선DB
  춘원학회 모임에서 춘원의 친일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송현호 아주대 명예교수가 춘원의 재판 얘기를 들려줬다. 송 교수는 춘원학회 회장을 지냈다.
 
  “춘원의 수양동우회 사건 재판 기록을 보면, 최종심에서 검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황민화를 이야기하고 창씨개명을 했는데 그것은 결국은 네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민족 운동이 아니었느냐.’ 이런 기록을 사람들이 봐야 되는데 무시하는 거예요.”
 
  김동인 작가가 쓴 회고록(김동인 전집6 《문단30년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수양동우회 형사 피고인으로 보석 중이던 김동인의 친형 김동원이 김동인에게 한 말이다. ‘만약 이광수가 당국에 전향을 표명(친일)하면, 수양동우회 동지 40여 명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산 안창호가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난 뒤, 동우회는 오직 이광수의 전향 여하로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춘원의 공개적인 전향, 그 뒷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송 교수에 이어 현재 춘원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말했다.
 
  “춘원이 대일 협력을 했느냐 안 했느냐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게 진공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가 잡혀가서 죽고, 이광수도 죽느냐 사느냐의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일제 강점기라는 구조적 폭력이라는 조건 위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야 되는 겁니다.”
 
  친일이냐 반일이냐 하는 단순한 이분법 프레임에 스스로 갇히는 건 학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위급 사교모임인 낙랑클럽을 두고 ‘김활란이 미 군정 시기 이화여대 학생들을 미군 장교들에게 성상납시킨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판이니 말이다.
 
“내가 지은 업보는 내가 감당할 거다”
 
유재원 한국외대 명예교수
  해방 후 춘원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있다. 유재원(劉載源·74)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증언이다. 일제 강점기 경성에는 서점과 출판업을 한 ‘영창서관’이 있었다. 바로 유 교수의 외가가 영창서관을 경영했다. 춘원은 영창서관의 인기 필자였다. 영창서관은 춘원의 작품을 출판하며, 지형(紙型)까지 보관해두고 있었다. 해방 당시 유 교수의 부친 유장렬(劉章熱) 선생이 영창서관의 사장을 맡고 있었다. 유 교수의 말이다.
 
  “아버지가 춘원을 찾아뵙고 말했답니다. ‘시절이 수상하니 피해 계십시오.’ 도피 자금으로 쓰시라고 돈까지 들고 갔지요. 그러자 춘원이 말했답니다. ‘유군, 내가 착을 못 버려서 그래. 나는 나라도 민족을 위해 일본놈들한테 붙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는 변명을 할 수 없다. 내가 지은 업보는 내가 감당할 거다.’ 돈도 안 받으셔서 아버지가 그냥 돌아오셨답니다.” ‘착(著)’은 불교 용어다. 마음이 어떤 사물 혹은 사리를 고집하고 있는 걸 뜻한다. 쉽게 말하면 ‘집착’이다.
 
  인도 독립운동가 남편
 
  아버지를 잃은 막내딸은 그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정화 박사는 1952년 세계학생토론대회에 한국 대표로 뽑혀 미국을 방문한 후 같은 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때는 유학 가는 걸 장려했어요. 17세에 화물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요. 피츠버그에 가서 4년 동안 공부를 했어요. 오빠, 언니도 함께였지요. 1956년 학교를 졸업하며 어머니에게 그랬어요. ‘이제 한국에 가서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 한데 어머니가 제발 오지 말라는 겁니다. 글쎄 저를 그렇게 보고 싶어하면서도 말이에요. 박사 학위를 따고 오라는 겁니다.”
 
  ― 대학원에 진학했나요.
 
  “석사 학위 과정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남편을 만나 사랑하게 됐어요. 남편 라자 아엥가는 인도에서 온 독립운동가 출신 유학생이었어요. 간디를 존경했고 독립운동을 하다 대학에서 쫓겨났지요. 다시 공부를 해 미국으로 와 박사 학위를 받고 펜실베이니아대 교수가 됐어요. 남편의 가문인 아엥가(Iyengar) 가문은 카스트의 최상위층인 브라만 계급에 속했어요. 그런데도 남편은 계급에 그리 연연하지 않았어요.”
 

  브라만(Brahman)은 힌두 사회의 신분제인 카스트에서 최상위 카스트이다. 성직자 및 학자 계급을 뜻한다. 바라문(婆羅門)이 바로 브라만을 뜻한다.
 
  이 박사는 상당히 머리가 좋았던 것 같다. 같은 시기에 피츠버그에서 유학한 차윤 CPR 회장의 말이다.
 
  “이 박사는 한국인 남자 유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어요. 피츠버그 북클럽에 나왔는데, 정치, 문학 모든 주제에서 토론을 이끌었어요. 라자를 만나고, 어느 날 빈디를 찍고 학교에 오는 걸 보고 한국 남성들이 포기했습니다.”
 
  빈디는 인도 여성들이 이마 가운데나 미간에 점을 칠하거나 보석을 붙이는 걸 뜻한다.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다.
 
 
  한국 남자들은 ‘이광수의 딸’에 관심
 
  어머니 허영숙의 반대는 대단했다. 막내딸이 결혼을 포기하도록 설득해보라고 유학생들에게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
 
  ― 한국 남성과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한국 남자들은 이광수의 딸이라는 것만 보고 다가오는 것 같았어요. 남편은 저 자체를 사랑했지요. 남편은 8세 때 어머니를 병으로 잃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이를 낳고 나서는 집에 있어주길 바랐지요. 제가 가정의 중심이자 영적 지도자라면서요. 남존여비 같은 건 아니었어요. 공부를 그만두고 아이 셋을 낳아 키웠지요. 근데 어머니가 오신 거예요.”
 
  ― 어머니가 화를 내셨나요?
 
  “언니랑 오빠 둘 다 박사 학위를 받았거든요. 저한테 그러셨지요. ‘나는 너한테 제일 기대를 했는데, 제일 실망했다.’ 제가 누가 뭐라고 하면 ‘노(No)’를 못 해요. 그래서 다시 박사 학위 공부를 시작했지요.”
 
  살아온 삶에 후회가 있을까? 이 박사에게 물었다. 과거 속으로 돌아가는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가 오른손을 제대로 못 쓰셨어요. 환자를 치료하다 매독균에 노출돼 오른손이 마비됐거든요. 미국에서 함께 살 때 등을 밀어달라고 하셨는데, 한 번밖에 못 밀어드렸어요. 그때는 아이 키우랴 공부하랴 왜 그렇게 바빴는지. 한 번밖에 못 밀어드린 게 후회돼요.”
 
 
  “춘원 없는 한국 문학은 너무 빈약”
 
이정화 박사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이정화, 큰 딸 아니타, 허영숙, 라자 아엥가, 아들 아론.
  이 박사는 브린모어대학(Bryn Mawr College)에서 생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한때 서울대 초빙교수로 모국 교단에 서기도 했다. 큰 딸 아니타 아엥가는 펜실베이니아대학 간호학과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들 아론 아엥가는 MIT를 나와 IT 분야에서 종사 중이다. 둘째 딸 다라 아엥가는 의사 출신으로 의학 관련 회사를 운영 중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작가가 된 후손은 없을까. 이영근 교수의 딸 이성희씨가 문학의 길을 밟았다. 이씨는 컬럼비아대에서 동아시아 언어 및 문화로 박사 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워싱턴대 등에서 한국 문학과 문화를 가르쳤다. 춘원의 《무정》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춘원은 이제 한국문학사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중·고등학생들은 ‘이광수’라고 하면 배우 이광수를 떠올리지 《무정》이나 《흙》 《유정》을 떠올리지 못한다. 방민호 교수는 “이광수가 없으면 한국 현대문학이 너무 빈약해진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이광수는 한국 현대문학에 얽힌 난제들을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화두입니다. 이광수의 사상은 여러 겹으로 복합적이에요. 그런데 친일만 문제 삼으며 찌그러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주로 얘기합니다. 과거에 대한 책임도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깊은 공동체적 유대감을 가지고 그들을 끌어안아야 해요.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겁니다. 내 편이다 네 편이다, 죽일 듯 싸울 게 아니라 공동의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풀어야 합니다. 이광수 소설 핵심도 결국 사랑이에요. 도산 안창호에게서 배운 겁니다.”
 
  이 박사의 한국 일정에 함께하며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잠시나마 일별할 수 있었다. 놀라운 건 그 시대 그들의 지평이 어째 21세기를 사는 현세대보다 더 넓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100년 전, 춘원은 상해며 만주, 도쿄,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를 누볐다. 그의 자식 세대들은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며 누구는 독재를 했다, 친일을 했다 벌이는 논란들. 왜 우리의 영토를 더 좁히지 못해 안달인 걸까.
 
  춘원은 그토록 찾아 헤맨 ‘아비’를 결국 찾아낸 게 아닐까.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간 사람들에게서 말이다. 그에게 병 주고 약을 준 아내, 아버지를 위해 혈서를 쓴 아들, 뜻을 함께했던 동지들, 길가의 비렁뱅이, 한민족. 춘원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의 말대로 그는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우자의 효성으로 친일을 한 게 아니었을까. 왜 한국 사회는 춘원을 다시 고아로 만들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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