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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기적의 시작〉 이승만 역 맡은 원로 배우 임동진

“이승만은 우리나라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던 분”

글 : 장원재  ㈜戰後 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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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이들에게 눈물 젖은 역사를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고민”
⊙ 중3 때 연극 경연대회에서 주연 맡아… 엄마 역 맡았던 1년 후배가 가수 남진
⊙ 인기 절정이던 2001년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목숨 건져
⊙ 신학대학원 졸업한 후 2006년 교회 개척, 2014년까지 목회 활동한 후 배우로 돌아와
⊙ “이산가족이라 공산주의자들 용서할 수 없고, 대한민국 흔드는 사람들에게 분노”
사진=조선DB
  그의 얼굴엔 시대와 역사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배우 임동진(林東眞·79)이다.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가 있다. 1964년 연극 〈생명〉으로 데뷔한 이래, 그가 거친 배역이 ‘시대와 역사’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성계와 김종서, 수양대군, 흥선대원군 등을 연기했다. 〈제4공화국〉에서는 김영삼, 〈제5공화국〉에서는 김대중으로 열연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기적의 시작〉(권순도 감독)에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그의 배역이었다. 그를 캐스팅한 숱한 연출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의 얼굴엔 역사의 고뇌가 담겨 있고, 그의 연기엔 역사의 심연(深淵)이 담겨 있는 듯하다고. 이 대배우는 두 번의 사망설이 돌 만큼 죽음 직전까지 갔다 왔다. 이승으로 귀환한 뒤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활발하게 목회(牧會)를 하다 은퇴했고, 지금은 극단을 만들어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기침부터 하고 태어난 아기
 
임동진은 권순도 감독의 영화 〈기적의 시작〉에서 이승만의 대역 연기를 했다.
  ― 실향민(失鄕民)이라고요?
 
  “네, 함경남도 홍원(洪原)이 고향입니다. 함경북도는 우리 이순재 형님이 회령(會寧) 분이시죠. 6월 보훈의 달에 남북 이산가족 이야기를 담은 연극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같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 홍원에 대해서 기억나는 게 있나요?
 
  “전혀요. 왜냐? 제가 8·15 해방 직후에 어머니 등에 업혀서 월남(越南)했거든요.”
 
  친가의 기억은 있다. 아버지의 고향 인천 남동구. 지금은 다 공단이 들어선 자리지만, 1940~50년대만 해도 인천 시내에서 수인선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던 시골이다.
 
  ― 아버님과 어머님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인천하고 함경도라면 쉽게 만나셨을 것 같진 않은데요.
 
  “아버지가 측량 기사였습니다. 함경도 갔다가 어머니를 만나신 거죠.”
 

  어머니는 친정을 찾아 임동진을 출산했다. 그런데 그의 생애는 출산부터 유년기까지 파란곡절(波瀾曲折)로 가득하다.
 
  “제가 엄마 배 속에서 거의 죽어가지고 나왔답니다. 숨을 안 쉬고 영 반응이 없으니까 다음날 새벽에 미리 만들어둔 배냇저고리와 포대기로 꽁꽁 싸서 건넛마을 동산으로 갔답니다. 죽은 줄 알고 묻으려고. 외할머니가 저를 안고 할아버지가 삽 들고 앞장서셨는데 좁은 논두렁길로 누가 오더래요. 길이 좁으니까 서로 피해줘야 하잖아요? 그분이 외할아버지의 동생 분이셨어요. 이분이 동네 한의사셨답니다.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뭘 안고 가느냐’ ‘애가 죽었지비’ ‘갖다 묻어줄 거 얼굴이나 한 번 봅세’ 작은 외할아버지가 펴 보시고 소리를 꽥 지르셨대요. ‘이 양반들이 미쳤다’고, ‘얘는 죽은 아가 아니다’라고요. 그렇게 살아났죠.”
 
  작은 외할아버지는 아기 임동진을 빨리 따뜻한 아랫목에 눕혀 놓으라고 했다. 죽은 줄 알았던 아기는 그날 밤에 기침을 했단다. 그러고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제가 우스갯소리로 가끔 말해요. 난 기침부터 하고 태어난 사람이다, 사극(史劇)을 많이 할 운명이라고요.”
 
 
  휴전 후 다녀간 외할아버지
 
  ― 생명의 은인인 작은 외할아버지는 월남했습니까.
 
  “북에 남으셨습니다. 외할아버지도 어렸을 때 한 번 인천까지 오셨다가 다시 함경도로 가셨어요. 어머니가 떠나신 얼마 뒤죠. 휴전선 넘고 물어물어 저를 찾아오셨을 겁니다.”
 
  ―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아뇨. 옛날엔 길에 얼음이 얼면 거기서 애들이 썰매를 타고 놀고 그랬잖아요. 그때 어떤 노인이 저를 쭉 쳐다보시는 거예요. 외할아버지셨죠. 와서 보니까 딸은 이미 떠났겠다, 그래서 그대로 돌아가신 것 같아요. 그때 외할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기억하기로는 6·25 휴전 후의 일이다. 키 큰 노인이 노는 걸 따라다니면서 보기에 의아하다 여겼다.
 
  “외할아버지 키가 크시다는 얘기를 어려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외할아버지가 딸 소식도 듣고, 이런저런 사정을 살피러 내려오셨다가 저만 이렇게 보시고서는…. 그분이 외할아버지라는 건 세월이 한참 지나고야 알았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참 가슴이 아파요.”
 
  6·25 휴전 후인데 어떻게 내려왔을까? 또 어떻게 올라갔을까? 그때는 왔다 갔다 하는 밀무역 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교사나 기독교 신자들이 남북을 왕래하는 비밀 루트가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외할아버지는 반공(反共) 의식이 투철한 분이었다. 부농(富農)이었으니, 나름대로 상황 인식과 판단이 빨랐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마자 딸에게 ‘얼른 먼저 내려가라’고 권유했던 분이다. 그때 어머니 등에 업혀 있던 16개월 갓난아기가 바로 임동진이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
 
  38선을 걸어서 넘었던 어머니는 임동진이 9세 때 세상을 떠났다. 80이 가까운 나이인데도, ‘어머니’보다는 ‘엄마’가 더 먼저 나오는 이유다. 엄마의 함경도 사투리를 지금도 기억한다. 체온도 기억한다. 가신 후 원망도 많이 하고 울기도 했다. 엄마를 그리며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수많은 ‘드라마’가 그를 배우의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엔 토요일을 반공일(半空日)이라고 그랬잖아요? 토요일마다 오전 수업 마치고 엄마 모신 묘원엘 갔어요. 거기까지 걸어가면서 들꽃도 뽑고 냇가도 건너고 엄마랑 마음속으로 얘기도 나눴죠. 부평 삼거리 공동묘원입니다. 지금처럼 묘가 많지 않고, 뜨문뜨문 있었어요. 엄마 묘 앞에 꽃 놓고 잠이 드는 거죠. 어둑어둑해지면 집에 오고. 제 어린 시절의 추억입니다.”
 
  ― 어머니 성묘를 자주 갔네요.
 
  “자주 갔었죠. 엄마 아시는 분들이 저를 찾아오면 안내해서 모시고 가기도 했고요. 그분들이 우시던 모습이 하나하나 제 마음속에 앨범으로 다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와 관련해서라면, 6·25 때의 기억도 잊을 수 없다. 6월 24일 어머니가 맹장 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맹장염은 다 죽는 병이었습니다. 인천 도립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는 마취가 없었어요, 우리나라 의료 환경이. 엄마를 수술대에 눕혀놓고 못 움직이게 가죽띠로 묶는 걸 제 눈으로 봤습니다. 생 배를 째고 맹장을 잘라낸 거죠. 옛날엔 그랬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랬던 나라예요.”
 
 
  ‘인생 최고의 절실했던 연기’
 
  수술 다음날 6·25가 터졌다. 인천에도 곧바로 북괴의 남침 소식이 전해졌다. 수술 환자가 있으니 피란이 불가능해 1·4 후퇴 때까지 전 가족이 인천 남동에서 남았다. 6·25 터지고 바로 며칠 후, 완장 찬 사람들이 아버지, 큰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총 들고 구둣발로 집 안에 난입한 것을 기억한다. 어른들의 목숨을 구한 건 어린이 임동진이었다.
 
  “총 든 사람들 바짓가랑이를 잡고 ‘우리 아버지 살려주세요’를 비극적인 톤으로 읊었죠.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군지 알겠더라고요. 보니까 다 아버지랑 아는 사람이었어요.”
 
  이른바 ‘바닥 좌익’들이었다. 어린아이가 눈물로 호소하니 총 든 자들은 임동진에게 몇 번 발길질을 하고는 수색 없이 집에서 나갔다. 임동진이 기억하는 ‘인생 최고의 진실했던 연기’다.
 
  “자기들도 자식이 있으니까 마음이 움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희가 살던 집이 적산(敵産)가옥이었는데, 아버지는 제가 ‘연기’하는 그 순간 옷장 속에 숨어계셨어요.”
 
  아버지의 은신처가 발각된 건 리어카(손수레) 때문이다. 맹장수술 후 도립병원에서 남동 집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거리마다 ‘완장 찬’ 사람들이 검문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리어카를 하나 구해서 어머니를 눕히고 이불 덮어서 집까지 옮기려 했어요. 아내가 맹장 수술해서 지금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니까 봐주더라고요.”
 
  엄마는 고통을 호소했다. 집까지 가지 못하고 소래 쪽으로 모셨다. 어느 집 뒤뜰에서 피란 못 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임동진의 가족도 그곳에서 거적을 깔고 여름을 지냈다.
 
  “마취를 안 하고 수술하면 회복이 빠르다고 하더군요. 닷새쯤 지나고 일어나셨죠. 먹을 게 없으니까, 금반지 빼서 인천 읍내 나가 팔아 불그죽죽한 수수쌀을 잔뜩 사 가지고 오셨어요. 수수밥에 새우젓을 곁들인 그날 식사가 제 ‘인생의 한 끼’입니다.”
 
 
  부산 피란 시절
 
  1·4 후퇴 때 LST를 타고 부산까지 갔다.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지옥철보다 많은 사람이 탔는데, 뱃멀미에 많은 토사물이 쌓였고 치울 길이 없어 지옥 같은 냄새가 났다.
 
  “부산진역 앞 중앙동이 피란민 판자촌 동네였습니다. 거기에 어렵사리 방 하나, 부엌 하나 딸린 판잣집을 얻었어요. 어머니가 좌판 백반 장사를 하셨죠. 길거리에 상 놓고 반찬 놓고 밥해서 파는 겁니다. 저는 봉래국민학교에 다녔는데, 학교 마치면 엄마한테 가서 밥 잡순 분들한테 돈도 받고 그릇도 치웠죠.”
 
  부산 시절의 가장 강렬한 기억은 중앙동 대화재다. 1953년 11월 27일 새벽, 40계단 근처에서 발생한 큰 사고다. 부산역, 부산일보, KBS 부산방송총국 등이 전소되었고 29명의 사상자와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피해액은 177억환, 지금 물가로 치면 1조7000억원 정도다.
 
  “판자촌에서 불이 나니까 대책이 없었어요. 부산이라는 도시는 불이 한 번 나면 대형 화재로 발전하기 쉽습니다. 바람이 부채처럼 부는 땅이 부산이거든요. 국제시장 화재나 중앙동 화재가 다 세계적인 재난이었어요. 심지어 불꽃이 날아가서 부산진역 앞에 있는 기차 천장에 붙어서 열차들도 다 타고 그랬습니다. 저는 한참을 신나게 놀다가 업어가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엄마가 마구 때리고 꼬집어 뜯고 해서 겨우 잠에서 깨어나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 화재 현장을 기억합니까.
 
  “그럼요. 잠결에 보니까 뭐 중앙동이 산비탈 같은 곳인데 당시에 온통 불바다더라고요. 불길이 너무 심하니까 부산진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초량이라는 곳까지 피난을 갔죠. 그런데 그 기차에도 불꽃이 튀어서 객차에 불이 붙었어요.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죠. 옛날에는 어디 피란 간다 그러면 제일 먼저 싸는 게 이불 보따리였어요. 엄마가 기차에 올려놓은 이불 보따리 풀어서 저를 똘똘 마시더군요. ‘엄마 왜 그래?’라고 물으니 아무 소리 말라고 하셨어요. 절 집어던지려고 그러신 겁니다. 아들 살리겠다고.”
 
  ―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후미진 곡선 구간에서 서행하다, 기관사가 맨 뒤 객차에 불이 붙은 걸 보고 차를 세웠어요. MP라는 미국 헌병, 한국 헌병들이 곡괭이 가져와서 천장을 부수고 불을 껐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해프닝으로 끝난 미국행
 
  초량 철도 관사 인근에서 또 한참을 살았다. 부산 시민들은 피란민이 몰려들었는데도 인심이 좋았다. 천막촌에서 지내다 서서히 안정이 될 무렵 다시 인천으로 올라왔다.
 
  “인천 신흥동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신흥국민학교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어요. 미군 부대 정문, 그러니까 학교 정문에 아이들이 그야말로 벌떼처럼 모였습니다. 기브 미 껌, 기브 미 쪼꼬렛. 그 시대 제가 어렸을 때 입에 달고 살았던 말입니다. 헬로, 껌! 그러면 던져주고 그랬죠.”
 
  어느 날 한 미군이 임동진을 덥석 안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하우스보이 통역을 통해 집을 묻더니 같이 가자고 했다. ‘나 얘 데리고 미국 가도 되겠냐?’며 입양을 제의했다. 주변에선 ‘복이 굴러들어왔다’고 했지만, 엄마가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미국행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은 목포 앞 고화도다.
 
  “아버지가 보건사회부 공무원으로 임용되셨어요. 그 섬에 일제 말부터 소위 공생원이라는 이름의 시설이 있었습니다. 아동 보호소 같은 곳이죠. 해방 후에는 감화원이라고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감화원 서무과장으로 발령받으셨어요. 국민학교 5학년 때 혼자 영등포역까지 가서 가방, 옷 보따리 들고 목포역까지 내려갔습니다.”
 
  목포는 항구고 인천도 항구다. 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가는데 첫날부터 인천의 친구들이 그리웠다.
 
  ― 섬에서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혼자 바닷가에 나가서 애들 이름을 부르고 그랬죠. 섬에 살던 형들이 물에다 빠뜨려 수영 가르쳐주고.”
 
  중학교는 목포로 나와서 다녔다. 당시 명칭은 목포 2중, 지금 이름은 유달중학교다.
 
  “목포역 앞 목포공업고등학교의 부설 중학교로 2중이라는 게 있었는데, 거기에 합격했죠. 목포 2중학교가 산정동에 제대로 건물을 지어 이사하면서 교명을 유달중학교로 바꾸었습니다.”
 
 
  차범석, “꼭 연극 배우 해라”
 

  유달중학교는 배우 임동진을 구체적으로 잉태(孕胎)한 곳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연극 경연대회가 열렸고 임동진은 학교 대표로 주인공을 맡아 출연했다.
 
  “〈역마을 소년〉이라는 작품이었어요. 공연장은 유달초등학교 강당. 목포 방송국에 다니던 연출자 얼굴도 기억합니다. 비쩍 마르고 안경 쓴 분이었어요. 성함은 홍순태.”
 
  임동진의 역할은 섬마을 소년. 얼굴이 곱상한 1년 후배가 임동진의 엄마 역을 맡아 열연했다. 훗날의 대가수 남진이다.
 
  “본명은 김남진이죠. 아버님이 김문옥씨라고 목포에서 유명한 정치인이자 부자였습니다. 《목포일보》 사장이었나? 남진이랑은 지금도 친하게 지냅니다.”
 
  당시 심사위원장이 목포 출신의 극작가 차범석(車凡錫)이었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분을 실제로 보니 감격스러웠다. 차범석 선생이 따로 불러 손을 잡고 “꼭 연극 배우 해라”고 했다. 그때 받은 연기상 은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 그전에는 연극배우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까.
 
  “없었죠. 매해 학예회에 뽑혀 나가기는 했지만, 재능이 있다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요.”
 
  대가의 한마디로 서울 가서 공부하겠다는 꿈이 생겼다. 아버지도 허락했다.
 
  “은컵을 볼 때마다 벅차고, ‘너 꼭 배우 해라’라는 말이 환청처럼 계속 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술로 유명한 서라벌고등학교에 들어갔죠.”
 
 
  “살려고 열심히 했다”
 
배우 이정길은 같은 실향민으로 ‘혈육 같은 친구’다. 사진=TV조선
  서라벌고등학교는 연극, 음악, 문학 등 예술 특기자들을 모집해 가르치던 학교다. 입학 후에 보니 아역 배우 출신들도 많았다. 고등학교 선배로는 〈형사 콜롬보〉의 성우 최응찬, 동기로는 연극반 활동을 함께한 이정길이 유명하다. 임채무, 한인수, 서인석은 몇 년 후배다.
 
  “이정길은 제 혈육 같은 친구예요. 요즘도 일주일에 몇 번은 봅니다. 정길이도 실향민입니다. 월남할 때 폭격에 맞아 가족을 잃은 아픔이 있습니다.”
 
  대학은 정통 연극을 배워보고 싶어 서울연극학교로 갔다. 지금의 서울예술대학이다. 2기였고, 한 해 위의 선배가 신구, 전무송, 이호재, 민지환, 반효정이다. 졸업 후 여러 극단에서 활동했지만, 생활고가 밀려왔다. 연극을 하면 1년에 3000원도 벌기 어려웠는데 TV에 나가면 엑스트라도 3000원을 준다고 했다. 원서를 넣었는데 덜컥 TBC에 합격했다.
 
  첫 출연은 김영수 작 〈거북이〉(1968). 주연 강부자가 “영감, 저기 뭐 누가 지나가는 거 못 봤어?”라고 하면 “저리 갔수다” 한마디 하고 퇴장하는 나무꾼 노인 역할이었다. 녹화하다 어긋나면 처음부터 다시 촬영해야 했던 시절이다. 이 문제는 몇 년 후 촬영 카메라 한 대를 더 들이면서 해결된다. 두 대로 번갈아 찍어 ‘실수한 부분부터 녹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NG를 자주 내면 배우 못 했죠. 저는 살려고 열심히 했습니다.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외워서 NG를 내지 않았습니다.”
 
  초창기 은인으로 작가 김영수(金永壽·1911~1977년) 선생도 잊을 수 없다.
 
  “대표작으로는 〈혈맥〉이 있고 〈박서방〉도 있죠. 이분에게 배우가 ‘선생님 저는 가정이 이렇습니다’라고 하소연하면 작품을 다 뜯어서라도 배역을 만들어 주셨어요. 연출자는 기절할 노릇이죠. 김영수 선생님이 ‘야, 이 자식아, 작가가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그러고 소리를 지르셨죠. 그분이 한쪽 다리가 고무다리였어요. 쿵쿵 발 구르며 끝까지 배우들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감성적이어서 불쌍한 걸 못 보셨어요. 〈산 그림자〉라는 드라마 할 때도 ‘회사원 B’로 나오던 친구가 ‘선생님, 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이렇게 여기까지 왔는데 좀 빼지 말고 나오게 해주세요’라고 읍소(泣訴)하니까 아예 다음 회차부터 주연으로 세워주더군요.”
 
 
  “유골은 여의도 보이는 한강에 뿌려달라”
 
임동진은 1983년 KBS 사극 〈개국〉에서 이성계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다.
  실수가 없자 드디어 비중 있는 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70년대를 관통하며 입지를 넓혀가던 임동진은 1983년 KBS 대하드라마 〈개국(開國)〉에서 태조 이성계 역을 맡았다. 이 작품으로 임동진의 명성은 불멸이 되었다.
 
  1987년 KBS 6·25 특집극 〈환멸을 찾아서〉에선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한 월북 지식인 역할을 맡았다. 월북 후 북한의 실상을 보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신적 갈등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현미경과 같은 내면 연기였다. 주관적 판단이지만 ‘탄광 강제 노동에 종사하는 지식인’의 역할을 그만큼 잘 해낼 배우는 지구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임동진은 이 작품으로 그해 연말에 신설된 K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배우로서 승승장구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건너뛰자. 다만 아내 역의 장미희, 딸 역의 강수연과 열연한 멜로드라마 〈달무리〉가 방영되는 시간엔 전국의 수돗물 사용량이 급감했다는 전설이 있다.
 
  ― 2001년 사망설이 돌았습니다.
 
  “지금 인터뷰하는 바로 이 자리(집 거실)에서 사고가 났어요. 일정이 엄청나게 빡빡하던 시절입니다. 3일 일정으로 미국에 다녀오고 그랬으니까요. 내가 이 자리에서 쓰러졌는데, 꽈당 소리에 방에 있던 집사람이 얼른 달려 나와 ‘여보, 왜 그래?’라며 소리치는데 그 소리가 모깃소리처럼 작게 들려요. 그래서 제가 ‘119 오기 전에 하나님이 나 데려가실 것 같으니까 지켜줘’라고 했어요. 그러고 정신을 잃었죠. 당시 119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렸는데, 옆집에 수지침 하는 분이 계셔서 그분이 혈자리를 찔러 피를 내준 덕에 다시 의식이 돌아와서 제가 유언을 했습니다.”
 
  ― 뭐라고 했습니까.
 
  “유골을 여의도가 보이는 한강에 뿌려줘. 명색이 장로인데 교회가 아니라 방송국 생각을 먼저 한 겁니다. 그랬더니 집사람이 싫다고 그러더군요. 유골을 자기가 품고 있다 당신 따라갈 거라면서 통곡하더라고요. 119가 오고 또 정신을 잃었죠.”
 
 
  ‘기적’
 
임동진은 병마로 쓰러진 후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극복했다.
  아내는 임동진 연극의 팬이었다. 가난한 배우에게 연민을 가졌다. 무대 위의 임동진이 불쌍해 보였단다.
 
  “내 처지와 사정을 다 이해해주고, 지금까지 나를 불쌍히 알고 내 곁에 있어주고, 목사 사모 하느라고 고생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유방암으로 투병 중입니다. 이 사람에겐 제가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이 많습니다.”
 
  병원에서는 장례를 준비하라고 했다. 3일 생존이 한계라고 했다. 좌측 소뇌가 부어서 뇌신경을 누르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누르는 부분이 팽창하고 있어 가망이 없다고 했다.
 
  ― 그래서 뇌 수술을 받은 겁니까.
 
  “안 받았습니다. 자연치유인데, 저는 종교인이니까 하나님의 가호(加護)라고 생각합니다. 병원에서는 뇌 수술하기에도 너무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어요. 감사한 것이 병원장님이 저와 교도소 선교를 같이하는 회원이었어요. 제가 병원에 실려 왔다니까 달려 나온 겁니다. 응급실이 아니라 바로 중환자실로 딱 옮겨놓고 귀한 기계를 저한테 장착한 뒤 링거를 놨죠. 3일 만에 깨어났습니다.”
 
  병원에서는 ‘기적’이라고 했다. 한데 의료진이 아내를 불러내더니,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 휠체어를 타야 된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하나님이 떠올랐다.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 저를 살려놓으셨을 땐 아직도 할 일이 많고 책임져야 할 일도 많다는 뜻 아닙니까’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기도가 통했는지, 쓰러진 지 24일 만에 걸어 나왔다. 그동안 병원에서는 요시찰 인물이었다. 언제 잘못될지 모르는 중환자였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 죽음에 근접했던 나날이다. 8월 1차 사망설, 9월 2차 사망설이 떠돌았던 배경이다.
 
  “하나님이 응답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휠체어 신세를 면했습니다. 대신 장애와 더불어 살고 있지요. 소뇌가 요만큼만 피가 흘러요. 그러니까 저만 느끼는 장애가 있습니다. 몸 어딘가가 시리고, 얼음 끼얹은 것 같고, 이걸 이기며 살고 있습니다.”
 
 
  김준곤 목사의 경고
 
김준곤 목사. 사진=조선DB
  이때의 경험이 임동진을 목회자의 길로 이끈다.
 
  “제가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만드신 김준곤(金俊坤·1925~ 2009년)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세계 CCC 연맹 대회를 한국에서 할 때 무료로 광고에 출연했거든요. 그때 저를 잘 보셨는지 국가조찬기도회 문화분과위원장을 시키시더라고요.”
 
  김준곤 목사는 전남 신안 출신 목회자로, 6·25 전쟁 중에 아버지와 아내를 인민군의 손에 잃었다. 본인도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그는 가해자를 용서했다. 평생을 민족복음화와 군 선교에 헌신했으며 자유민주주의자로서의 원칙을 고수한 교계의 큰어른이다. “그분이 늘 하시던 얘기가 있었어요. ‘아이고, 우리 임 장로 좋겠어.’ ‘왜요?’ ‘늘 하나님 음성 듣잖아.’ ‘무슨 말씀이세요?’ 그랬더니, ‘레디 고! 큐! 준비하고 행하라! 이게 하나님 음성 아니요?’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한다는데, 그 말씀이 딱 떠오르는 겁니다.”
 
  ― 목회는 그럼 언제 결심하고 시작한 겁니까.
 
  “병원에서 결심했어요. 불가능한 자를 살리신 하나님께 보답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수요일마다 저에게 성경 공부를 시켰는데 공부 끝나면 ‘임 장로, 대한민국 위험합니다. 큰일 났습니다. 내가 가르친 교계(敎界) 제자들이 전부 좌(左)의식이 있는데 요소요소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걱정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짜 이름 없이 빛 없이 그야말로 봉사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 투병은 몇 년이나 했습니까.
 
  “지금까지 투병하고 있습니다. 제가 갑상샘도 없어요. 갑상샘 종양이 먼저 와서 다 떼어냈고 복용해야 하는 약도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못 하는 일은 없어요. 다 합니다.”
 
 
  열린문교회
 
신학대학원 졸업식에서 아내와 함께. 사진=임동진
  신학대학에 가려니 연령 제한에 걸려 입학이 불가능했다. 함경도 홍원 출신인 극작가 고(故) 이반(숭실대 문창과 교수)에게 “형, 내가 이렇게 살아서 움직이게 되었으니 하나님 공부 좀 하고 싶다”고 호소하니 길을 찾아줬다. 이반 교수와 함께 만난 루터대 총장은 쭉 상황을 듣더니 “들어오세요”라며 대학원 입학을 허가했다.
 
  “지각이나 결석 한 번도 안 했습니다. 개근상 받았어요. 인생 경륜이 특별하다고 특별 허가를 내주신 건데, 제가 불성실하면 추천해주신 분들에게 다 누를 끼치는 거니까요.”
 
  루터교는 스칸디나비아 북유럽 계통이라 한국에서는 교세가 그렇게 크지 않지만, 유명한 신자도 있다. 축구선수 김민재다.
 
  ― 목회는 언제부터 했습니까.
 
  “2006년부터입니다. 처음엔 집에다 의자 50개 놓고 개척을 했죠. 집사람하고 기도하는 식구가 몇 있었어요. 임동진이 가정교회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나니까 자리가 금방 찼습니다. 차가 많아지니 민원이 들어갔고 계고장(戒告狀)이 왔는데 벌금이 어마어마해요. 말 안 들으면 감옥 끌려가게 생겼고. 교회 어른 몇 분과 상의하니 요 옆에 빈 식당을 얻자고 하더군요. 그곳을 개조해서 교회 간판을 제대로 걸고 사역(使役)했습니다. 열린문교회는 루터교단에서 제일 성도(聖徒)가 많은 교회가 됐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공연
 
  루터교 70세 정년 규정에 따라 임동진은 2014년 목사직을 은퇴했다. 교회를 후임한테 다 맡기고 나왔다. “저를 살려놓으셨으니까 이제는 예술로 하나님께 보답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 만들어놓았던 극단 예맥을 다시 활성화시킨 이유입니다.”
 
  극단 예맥은 오는 6월 25일 원로 연출가 표재순의 연출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공연한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저도 이산가족이니까요. 북에 외할머니랑 이모가 계시고, 외삼촌이 월남하셨습니다. 6·25 때 반공포로로 계시다가 나오셨어요. 수학 전공자로, 나중에 한양고등학교 교감을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참 가슴 아픈 것이, 외삼촌이 저만 보면 끌어안고 우셨어요. 이북에 저하고 동갑짜리 딸이 있었거든요. 이것이 우리 민족의 아픔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산주의자들을 용서할 수 없어요. 대한민국을 흔드는 사람들에게도 분노합니다.”
 
  ― 외삼촌은 언제 만났습니까.
 
  “누가 알려줘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가서 뵈었습니다. 그때는 거제도로 배가 들어가질 못해서 중간에 노 젓는 배가 사람들을 실어서 날랐어요. 반공포로 석방 전에 면회가 가능했습니다.”
 

  임동진은 최근 영화에 출연했다. 오랜만의 스크린 귀환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기적의 시작〉(2024)이다.
 
  “황교안 전 총리가 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취임한 후 개인적 인연으로 제가 자문위원 위촉을 받았어요. 그 모임에서, 젊은 감독이 어렵사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 재연(再演) 장면을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배우는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때 그 사람을 얼마나 근사치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염두에 둡니다. 제가 이승만 대통령과 비슷한 이미지가 아니잖습니까. 아무리 잠깐 나오는 거라 해도, 연극도 아니고 화면에 보이는 건데 조금 그랬죠.”
 
  ― 그런데 왜 수락했습니까.
 
  “권순도 감독이 ‘꼭 해주십시오’라기에 저랑은 이미지상 거리가 너무 멀다고 그랬어요. 권 감독이 굉장히 지혜로운 청년입니다. ‘요즘은 가슴으로 연기하는 시대 아닙니까?’라고 해요. 그 얘기에 탄복했습니다. ‘이 친구가 젊은 감독이지만, 뭔가 깊이가 있는 감독이구나’라는 의식이 왔어요. 감동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4·19가 일어났거든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下野)하는 모습을 다 보고 체감한 세대가 저희 세대입니다. 영화 찍으러 이화장(梨花莊)에 자주 가면서 그분의 체취를 제가 느꼈어요. 좁은 방에서 연구하시고…. 화면에 나오는 그 방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공부하시던 방입니다.”
 
  권순도 감독은 “대배우에게 재연 장면 부탁을 드리는 건 실례인데 흔쾌하게 수락해주셔서 놀랍고 감사했다”면서 “대본을 드리니 여타 연구 서적까지 구입해 이승만을 공부하는 대배우의 프로의식에 머리가 숙어지더라”고 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 이런 대통령이 있을까요”
 

  ― 공부한 바로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분입니까.
 
  “정말 나라를 위해서 온몸을 불사르신 분이죠. 세계 어느 나라에 이런 대통령이 있을까요? 저는 자신 있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독재자다’ ‘살인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아니지요. 모르는 게 죄입니다. 알아야 해요. 역사를 모르면 죄인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은퇴 목사니까 신앙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분은 우리나라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분입니다. 조선왕조 500년을 실질적으로 끝낸 분이고 한성감옥에서 하나님을 영적(靈的)으로 만나신 분이죠.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대한민국을 살렸고, 대한민국이 살길을 만들어놓으신 분입니다. 재연을 하면서도 이런 위대한 인물이 오해와 망각 속에 묻혀 있다는 사실에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서라벌고등학교 다닐 때 인천에서 통학을 한 2년 했습니다. 그때 서울역에 내리면 지게꾼들이 서울역 광장에 쪽 깔려 있었어요. 지금은 택시 불러서 타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땐 지게꾼들이 원효로, 미아리까지 지게를 지고 걸어서 짐을 날랐습니다. 그런 분들의 피와 땀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겁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자녀들을 다 공부시켰습니다. 저는 공부 얘기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떠오릅니다. 우리나라에서 문맹(文盲)을 없앴다는 건 아무나 못 하는 일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기 전 노배우는 꼭 써달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는 피란지에서도 진짜 거적때기 천막 학교에 다닌 사람입니다. 미제 구호물자 우유와 옷으로 연명했어요. 젊은이들에게 눈물 젖은 역사를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를 알고 그다음에 대한민국을 정말 소중히 가슴에 품고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건국전쟁〉과 〈기적의 시작〉이 역사를 전하는 일에 일조하기를 기대합니다.”
 
  임동진의 기대는 배신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도 하나님이시지만, 양만춘, 대조영, 이성계, 세조 그리고 그가 연기했던 숱한 위인들의 영혼이 대한민국과 임동진을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평생 임동진만을 사랑한, 독립유공자 권혁조 선생의 차녀인 그의 아내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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