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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美 월스트리트의 시각 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

아홉 살에 시력 잃은 소년, 월스트리트 투자 회사 이사가 될 수 있었던 세 가지 비결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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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투자 회사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 이사
⊙ 시각장애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증 취득
⊙ 지금의 그를 만든 건 좌절에서 일어서는 회복탄력성과 도전정신 그리고 행운
⊙ 보육원 아이들 돕는 단체 ‘야나(YANA)’ 설립해 활동 중

愼盾揆
1967년생. 9세에 시력 상실. 美 하버드대 심리학과 졸업, MIT경영학·조직학 박사, 美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에서 이사로 재직 중 / 저서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어둠 속에 빛나는 것들》
신순규씨가 미국 맨해튼 월가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뉴욕 근교에 사는 그는 혼자 기차를 갈아타며 출퇴근한다. 사진=판미동
  아홉 살 때였다. 소년의 세상이 완전히 어두워진 건 말이다. 녹내장과 망막 분리로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의 수술을 받은 후였다. 엄마 손을 잡고 맹학교에 가던 날, 얼마 남지 않은 시력으로 소년은 은행나무를 보았다. 비로소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은행나무도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슬프진 않았다. 더 이상 아픈 수술을 받지 않아도 되니 잘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머니는 소년을 피아노 건반 앞으로 데려다 놨다. 아들이 침술이나 안마가 아닌 피아노로 먹고살게 되길 바라서였다. 길이 아니었을까, 피아노 선율은 그를 음악의 세계로 데려가진 못했다. 대신 미지의 세계로 데려갔다. 미국. 맹학교 아이들이 떠난 미국 공연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던 소년을 미국의 맹학교 교장이 눈여겨봤다. 미국 유학을 제안했다. 소년의 나이 14세 때였다.
 
  이듬해 소년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미국에서 만난 수양부모는 그를 친자식처럼 대했다. 소년은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공립학교에 다니며 학생회장으로 뽑혔다. 미국으로 그를 이끈 피아노를 접고, 소년은 하버드대에서 심리학을,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경영학과 조직학을 전공했다. 학업을 마친 후인 1994년 어느덧 27세가 된 소년은 세계적인 금융사 JP모건에 입사한다. JP모건 최초의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가 된 것이다. 동갑내기 동포 한근주씨와 결혼해 아들도 낳았다. 9세 때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어머니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에겐 낳아주신 어머니와 미국에서 길러주신 미국 어머니, 그리고 아들딸의 어머니가 된 아내가 있다. 그는 현재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Brown Brothers Harriman)에서 이사로 재직하며 애널리스트 일을 계속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57)씨 얘기다.
 
  한국을 찾은 신씨를 지난 2월 16일 CGV 씨네드쉐프 용산에서 만났다. 이날 그에겐 특별한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팜프리츠(Farm Frites)라는 회사가 준비한 ‘일상의 빛’이라는 행사였다. 팜프리츠는 네덜란드에서 출발한 냉동감자 생산 업체다. 서울맹학교 재학생·졸업생 네 명이 선배인 신씨를 인생의 멘토로 만나는 자리였다. 감자를 활용한 요리를 먹으며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기자는 이 자리에 동석했다가 행사가 끝난 후 따로 앉아 인터뷰를 했다. 알고 싶었다. 아홉 살에 시력을 잃은 소년이 월스트리트의 투자 회사 이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세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아홉 살에 시력 잃어 다행”
 
  첫째, 회복탄력성이다.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시련과 실패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회복해 그 경험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한다. 회복탄력성을 갖춘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다. 신씨는 이런 얘기들을 했다.
 
  “아홉 살에 시력을 잃어서 다행입니다. 이보다 더 나이 들어 잃었다면 방황했을지도 모릅니다.… 제 인생에서 시험을 치르지 않고 1급을 딴 건 장애가 유일할 거예요.”
 
  유머 감각도 풍부하다. “출퇴근길을 하도 오가서 이제 눈감고도 다닐 정도입니다”라고 해 좌중을 웃겼다.
 
  삶을 보는 긍정적 시각과 여유가 엿보인다. 그의 말이다.
 
  “제게 신조가 있다면 이겁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보자.’ 영어로 무언가 할 수 있는 걸 ‘어빌러티(ability)’라고 합니다. 할 수 없는 건 ‘디서빌러티(disability)’입니다. 디서빌러티에 ‘dis’가 들어 있잖아요? ‘할 수 없다’에서 ‘할 수 있다’로 넘어가는 데도 ‘D, I, S’ 이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 그게 뭔가요.
 
  “D는 ‘Determination(결단)’입니다. 살다 보면 좌절하게 하는 일과 맞닥뜨리곤 합니다. 저는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하버드에서 심리학을 공부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미국 의사협회에서 시각장애인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지침을 만들었어요. 의사의 꿈을 하루아침에 잃은 거지요. 의사의 꿈을 포기한 후 한참 방황했습니다. 그러다 대학원에서 조직학을 공부하기로 했어요. 의학에서 기업의 비즈니스 심리 쪽으로 심리학 공부 방향을 바꾼 겁니다.”
 
  ― 그러다 금융 분야로 방향을 튼 건가요.
 
  “조직학 연구를 하다 보니 금융 애널리스트의 세계에 흥미가 생겼어요. 월스트리트에서 일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입사가 쉽지는 않았어요. 당시 애널리스트 중엔 시각장애인이 거의 없었어요. JP모건의 어떤 분이 저에게 기회를 주셨어요. 그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국 한 사람이구나. 한 사람이 나를 믿어주고, 기회를 준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어떤 한 사람이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결심했지요. ‘언젠가 나에게도 간절한 사람이 다가온다면 용기를 내서 기회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 JP모건에 오래 근무했나요.
 
  “입사하고 4년 후에 감원으로 해고를 당했어요. 결혼한 지 2년도 안됐을 때입니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고민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렸어요. ‘이 일이 내게 잘 맞고, 내가 즐기는 일이니 계속 가자.’ 이직할 곳을 계속 찾아다녔어요. 6월 30일에 JP모건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6월 29일에 새 회사로 출근할 수 있게 됐어요. 연봉을 70% 올려 받으면서요. 의사의 꿈을 잃었을 때도, 해고를 당했을 때도 굴하지 않고 결단을 내린 겁니다.”
 
 
  “지하철 두 번 갈아타며 출퇴근”
 

  ― D, I, S의 I는 뭔가요.
 
  “‘Identity(정체성)’입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하버드 출신들은 자기 소개할 때 결국 출신 대학 얘기를 한다.’ 저처럼 대학 떠난 지 30년 넘은 사람이 자기 소개하며 하버드 얘기를 하는 건 어리석은 겁니다. 장애도 마찬가지예요. 장애로 좀 불편한 삶을 사는 사람인 거지, 장애를 본인의 정체성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려면 S, 즉 Skill(기술)을 익혀야 해요. 시각장애인의 경우 점자(點字)라든가, 보행 기술입니다.”
 
  ― 점자를 익히지 않는 시각장애인도 있나요?
 
  “점자를 모르는 시각장애인들이 많아졌어요. 컴퓨터와 휴대폰이 잘되어 있으니 굳이 익히지 않는 거죠. 저는 출근하면 브리핑을 합니다. 제가 분석을 책임지고 있는 분야와 기업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트레이더들에게 들려주는 거죠. 점자를 모른다면 외워서 할 수밖에 없어요. 점자를 알면 메모를 읽으면서 발표할 수 있고요.”
 
  ― 보행 기술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겠네요.
 
  “그렇지요. 예를 들어 대학교에서는 보행 도우미가 따라다닐 수 있어요. 졸업한 후엔 어떨까요? 대기업이 시각장애인을 고용하면서 도우미도 같이 고용해줄까요? 그런 회사가 있을지 전 모르겠네요. 저는 일주일에 사흘은 뉴저지에서 뉴욕 맨해튼까지 출근합니다. 분당에서 여의도까지 출근하는 셈입니다. 기차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탑니다. 1시간30분이 걸려요. 뉴욕에서는 매일 같은 시각에 타는 기차라도 탑승 플랫폼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순규씨가 2015년 출간한 첫 책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
  ―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플랫폼에 서서 외칩니다. ‘5:50 train, which track?(5:50분 기차, 어느 플랫폼에서 타나요?) 그럼 누군가가 가르쳐줍니다. 뉴욕 거리의 경우, 어찌나 사람들이 빨리 걷는지 지팡이가 몇 번이나 부러졌어요. 사람들이 걸려 넘어져서죠.”
 
  ― 그러고 보니 안내견과 함께 다니지 않는군요. 이유가 있나요?
 
  “안내견의 삶은 인간의 삶에 비하면 너무 짧습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살다 보니 빨리 죽어요. 안내견은 제 몸의 일부가 되다시피 합니다. 그런 존재가 하루아침에 죽는 걸 견디는 게 쉽지 않더군요. 10년에 한 마리씩, 두 마리를 보내고 나서 생각했어요. ‘더 이상 안내견은 안 되겠다.’ 이후로 지팡이를 쓰고 있습니다. 참고로 시각 장애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거나 할 때 지팡이를 절대 잡으면 안 됩니다. 안경 쓴 사람의 안경을 벗기는 것과 같아요.”
 
  ― 안내견과 함께 다니는 것과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은 어떤 점이 다른가요.
 
  “일반인들이 오해하는 게 있어요. 안내견이 길을 알아서 가는 게 아니에요. 주인이 길을 알아서 함께 가는 거예요. 안내견의 책임은 장애물이나 계단을 만나면 돌아간다거나, 정지해서 알려주는 거예요. 잘 교육받은 안내견은 갑자기 길에서 차가 달려든다거나 하면 멈추는 게 아니라 주인을 뒤로 잡아끌어요. 안내견이 ‘아이스브레이커(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주식 분석할 때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제가 분석하는 회사의 CEO들을 만나면, 그들이 안내견에 대해 묻기 위해 저에게 먼저 다가오곤 했거든요.”
 
  ― 큰 장점이었네요. 요즘엔 길을 음성으로 알려주는 휴대전화 앱도 있지 않나요?
 
  “신기한 앱이 많아요. 이어폰을 꽂고 다니면 ‘10시 방향 300피트 전방에 택시가 있는데 번호는 몇 번이다’ 이런 것까지 알려주는 앱도 있어요. 그런데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니는 건 위험합니다. 저는 사용하지 않아요.”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공인재무분석사
 
신순규씨는 2021년 두 번째 책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들》을 냈다. 사진=판미동
  기자가 본 그의 두 번째 미덕은 ‘도전 정신’이다. 15세에 미국으로 건너간 것 자체가 이미 도전이었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에 간 그는 한국에서 보내준 점자 영한사전 수십 권을 읽어가며 영어를 익혔다. 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을 획득하기도 했다.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다. 이후 다른 시각장애인들도 간혹 합격한단다. 그가 응시 방법을 두고 시험을 주관하는 CFAI 측과 잘 협상해 전례를 만들어둔 덕이다.
 
  ―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어떻게 해서 갖게 됐나요.
 
  “한국에서 서울맹학교를 6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는 시각장애인이 정상입니다. 점자를 모르는 정안인(正眼人·시각장애가 없는 사람들)들이 비정상입니다. 학교 안에서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 처지가 다른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못 하고 살았어요. 시각장애가 있어서 뭘 못 하겠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자란 겁니다.”
 
  그는 지난 2021년 출간한 책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에서 ‘가끔 눈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 그가 손으로 테이블 위를 조심스럽게 훑으며 아이스커피가 담긴 잔을 찾았다. 그러며 말했다.
 
  “태어나서 아홉 살까지는 눈이 보였기 때문일까요. 지금도 테이블을 마주하고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돼요.”
 
  ― 눈이 안 보여서 오히려 업무에 유리한 점도 있나요.
 
  “세상엔 소음과 신호가 있습니다. 기업 분석을 하려고 보면, 정보들이 사방에서 쏟아져요. 이 중엔 정확한 뉴스도 있지만, 루머도 있고 오류도 많습니다. 사람이 습득하는 정보 중 거의 80%가 시력을 통해서 들어온다고 합니다. 저의 경우는 정보가 들어오는 파이프가 좁아서 그런 정보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어요. 보는 것만 봅니다. 기업들이 내는 보고서와 제가 진짜 존경하는 애널리스트들의 분석 등입니다. 뉴스도 《월스트리트저널》, 블룸버그 뉴스 같은 것만 봅니다.”
 
  ― 장애 덕분에 소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가요.
 
  “투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지능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감정을 빼는 겁니다.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감정적으로 흔들릴 수 있어요. 저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채널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좁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뭘 사고팔지 않습니다. 이런 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방어가 되는 겁니다. 소음이 많은 세상에서 신호를 더 쉽게 골라낸다고 할까요.”
 
  ― 코로나19 때문에 한동안 전 세계가 힘들었습니다. 그 시기를 돌아보면 어떤 걸 깨닫게 되나요.
 
  “기업 분석을 할 때 ‘스트레스 테스트’라는 걸 합니다.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가 이거였어요. ‘1918년에 왔던 스페인 독감 같은 글로벌 팬데믹이 온다면 이 회사는 어떻게 될까.’ 그때 나온 테스트 결과와 비교하면, 2020년에 왔던 글로벌 팬데믹을 우리는 잘 극복해냈어요.”
 
  ― 초기에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지만, 결국 일상으로 돌아왔지요.
 
  “사실 1918년 같은 전염병 사태가 일어나면 의료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는 백신이 빨리 개발됐고, 집단 면역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형성됐어요. 스트레스 테스트라는 것도 결국 상상이잖아요. 우리는 실제보다 훨씬 더 심한 고난을 상상하곤 한다는 거지요.”
 
 
  “견고해지려면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국 사회는 언젠가부터 ‘금수저, 흙수저’란 말을 당연한 듯이 쓰고 있다. 사람마다 태어난 환경의 차이는 당연히 있지만, 그런 표현은 현실을 실제보다 더 부풀려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그의 말이다.
 
  “저는 늘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과 뉴스에 귀를 기울입니다. 자살 얘기가 들려오면 가장 안타까워요. 자살은 심리적으로는 모방 행동입니다. 안타까운 건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정치가들입니다. 이들이 자살할 때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끌고 자살하는 거라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선택이 다른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아야 해요. 연예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요. 삶에 도전과 풍파는 항상 닥쳐옵니다. 그런 어려움을 견뎌내는 게 삶의 ‘견고함’입니다.”
 
  ― 어떻게 하면 삶이 견고해질 수 있지요?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 자기 자신을 함부로 해할 수 없어요. 꼭 신체장애가 아니더라도 타고난 환경을 장애로 여기는 의식이 한국 사회엔 많은 것 같아요. ‘흙수저’ 같은 표현이 생기면서 누구나 자신에게 어떤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 경우를 많이 봤어요. 금수저 출신이라 부모가 평생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것들을 이루지 못하는 친구들을 많이 봤어요.”
 
  ― 한국 사회가 경쟁이 치열하긴 합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그렇습니다. 어떤 분야든 경쟁이 예전보다 치열해졌어요. 제가 하버드, 프린스턴에 합격할 때와 지금은 경쟁률 자체가 달라요. 그때 경쟁률이 10대 1쯤이었다면 지금은 30대 1이에요. 스포츠도 그래요. 마라톤 기록이 계속 단축되고 있잖아요. 심지어 많이 먹기 대회도 치열해졌어요. 미국에서는 7월 4일이면 핫도그 많이 먹기 대회가 열려요. 통상 20개, 30개를 먹으면 우승했는데 2001년 고바야시 다케루라는 일본인이 나타나 단번에 50개를 먹어 기록을 경신했어요. 지금은 70개를 넘게 먹어야 우승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미국보다 살기 좋아”
 
  ― 오늘 후배들을 만나보니 어땠습니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자랄 때는 한국에서 시각장애인으로 산다는 게 참 힘들었어요. 대학 가는 것도 어려웠고 스스로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어요. 한데 지금은 달라요. 시각장애인들이 살기에 미국이 한국보다 좋을 거라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는데, 절대 안 그래요. 한국이 더 좋습니다. 한국의 복지 정책이 미국보다 잘되어 있어요. 미국엔 ‘복지콜’이 없습니다. 나라에서 생활 도우미를 집으로 보내주는 서비스는 한국에나 있지 미국엔 없습니다. 기차 탈 때 자리까지 안내해주는 서비스도 없어요. 장애인 화장실도 별로 없고요. 뉴욕 지하철 한번 보세요. 진짜 위험합니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같은 거 없어요. 저는 제가 선로로 떨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제 지팡이에 누가 걸려 넘어져서 선로로 떨어질까 항상 두려워요.”
 
  ― 한국이 미국보다 살기 좋군요.
 
  “단 한 가지는 예외예요. 진로 선택의 폭이 여전히 좁습니다. 명문대에 진학하고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하는 시각장애인이 더러 있지만, 여전히 침술이나 안마사로 일하는 시각장애인이 대다수예요. 컴퓨터 화면을 읽어주는 소프트웨어나 시각장애인용 노트북 등 업무를 보조해주는 기기들이 잘 만들어져 있어요. 사무직 업무는 시각장애인들이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업이나 사회가 장애인들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장애인들 스스로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서 벗어나야 해요. 스스로 뭔가를 해나가는 데 시선을 돌리면 좋겠어요.”
 
  ― 그럴 수 있겠네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아는 한 시각장애인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왔어요. 대학 측은 도서관의 한 컴퓨터를 정해놓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줬어요. 그랬더니 이 학생이 항의를 한 거예요. 왜 다른 학생들은 도서관에 가서 아무 컴퓨터나 쓸 수 있는데 나는 왜 이 컴퓨터만 써야 하냐며 항의를 한 겁니다. 그래서 학교 측과 싸우다 이 학생이 감옥까지 간 일이 있었어요. 제가 물었어요. ‘그럼 대학에서 너 한 사람을 위해 1000달러짜리 소프트웨어를 모든 컴퓨터에 깔아야 하나’ 그랬더니 그 친구가 ‘그게 공평한 거 아니냐’고 해요. 그렇게 해줄 줄 알았다는 거예요. 이런 환상에서 빠져나와야 해요.”
 
 
  “어린 시절엔 특수교육해야”
 
  ― 이전에도 맹학교 후배들을 만나본 적이 있나요?
 
  “첫 책을 낸 후 맹학교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후배들도 좋지만 학부모들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장애아 부모들 사이에서 통합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였어요. 제가 그랬어요. ‘점자나 보행은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가르치는 게 낫다. 그래야 몸에 밴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반 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통합 교육을 고집하면 점자도 보행도 제대로 못 배운다. 아이를 고생만 시키다가 결국 중·고등학교 때가 돼서야 특수학교에 보내면 아이가 점자도 보행도 익히기 힘들어진다.’”
 
  ― 반대로 하는 거군요.
 
  “통합 교육을 정말 원한다면 초등학교 때는 맹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이 아이가 일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게 된 후에 일반 학교에 보내야 됩니다.”
 
  그는 문득 노벨상 이야기를 꺼냈다.
 
  “매년 10월이 되면 뉴스에 귀를 기울입니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때문이에요. 노벨평화상 빼고는 한국인 수상자는 아직 1명도 없어요. 한국계면서 외국에서 사는 이들 중에서도 안 나왔어요. 일본인들은 많아요.”
 
  ― 그러고 보니 한국 국민뿐 아니라 한국계 외국인 중에서도 안 나왔네요. 이유가 뭘까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이 문제에 오래 신경 쓴 사람으로서 생각해보면 그래요. 한국은 제품을 만드는 건 잘합니다. 반도체나 전자제품, 게임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노벨상을 주는 건 순수 과학 분야거든요. 순수 과학은 연구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시간을 들인다 해서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어요. MIT 다닐 때 교수님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기업 후원을 받아 연구를 하면, 기업 측에서 5년 후쯤에 온대요. 묻는답니다. ‘잘하고 있나’, 그러면 이렇게 답한대요. ‘잘하고 있다. 돈이나 주고 가라.’”
 
  ― 인내하며 연구를 바라봐주는 문화가 있는 거군요.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 논문을 조작했다며 이슈가 된 적이 있잖아요. 이분이 거의 매장을 당했지요. 그 연구에서 배울 점을 학계에서 제대로 짚고 넘어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부문에서 노벨상이 나오거든요.”
 
 
  네 명의 부모님
 
  그의 말에서 한국에 대한 진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는 한때 한국 금융사로 이직해 모국으로 돌아오려 노력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럴까.
 
  ― 여전히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나요.
 
  “지금은 너무 늦은 것 같아요. 미국에는 애널리스트로서 한 분야를 20~30년간 책임지며 일하다 퇴직하는 경우가 많아요. 나이가 들어도 현장에 있는 거지요. 한국은 그게 불가능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제가 하는 증권 분석 일은, 따지고 보면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만약 제가 한국으로 돌아와 일을 한다면 지금 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을 하고 싶어요.”
 

  ― 그게 어떤 일일까요.
 
  “기업의 장애인 고용과 관련해 지원하는 업무나 전자제품의 디자인에 접근성을 가미하는 업무 같은 일입니다. 저는 철학자들이 말하듯 인간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모두에게는 여기에 와 있는 목적과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이유예요. 살아오며 정말 많은 걸 받았습니다. 저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가 현재까지 올 수 있었던 세 번째 비결은 바로 ‘행운’이다. 그가 믿는 기독교의 언어로는 ‘주님의 은총’이라고 할까. 이게 아니면 아들을 위해 점자로 책을 만들고 피아노를 가르친 친어머니를, 미국에 건너가 그 못지않게 정성으로 그를 돌본 양부모를 만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양부모는 그를 키운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돈을 받지도 않았다. 미국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너도 당연히 할 수 있다’며 시각장애인 제자에게 양궁까지 가르친 교사를 만난 인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행운이라는 진부한 단어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보육원 아이들 돕고 있어
 
  그는 그가 받은 행운 혹은 은총을 다른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8년부터 한국의 보육원 아이들을 돕고 있다. 아이들이 미국을 방문해 연수를 받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위해 ‘야나(YANA·You Are Not Alone)’라는 단체도 만들었다.
 
  ― 보육원 아이들을 돕기 시작한 계기가 있나요?
 
  “2007년, 2008년쯤 한국에 아직 보육원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한국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됐잖아요. 그런 나라에서 2만 명 정도의 아이가 보육원에 산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요. 저에겐 한국에서 저를 낳아주시고 사랑으로 키워주신 부모님과 저를 입양한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돈을 받은 것도 아닌데 저를 책임지고 키워주신 미국 부모님이 계세요. 제게는 부모님이 네 분이나 계신데 가족이 한 명도 없는 아이들이 2만 명이나 된다니,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그런 이유였군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왜 당신은 시각장애인을 안 돕고 보육원 아이들을 돕나요.’ 답했어요.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저에게 와서 도와달라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보육원 아이들은 있었어요. 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겁니다.’ 16년 전 제가 보육원 출신 친구들을 위한 일을 시작했을 때는 보육원 아이들을 돕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 그동안 여러 아이를 만났겠네요.
 
  “보육원 출신 아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사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보육원 출신 여자 아이를 미국에 방문하게 한 적이 있었어요. 이 아이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과 졸업 후 진로 상담을 했답니다. 그때 교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는 거예요. ‘너 예쁘잖아, 너 같은 애가 갈 데는 뻔하잖아.’ 이 얘기를 전해 듣고 크게 충격받았어요. 보육원 출신 아이들을 위한 지원이 여러 가지 생겼는데, 실효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딸 예진이
 
신순규·한근주 부부. 2021년 한국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사진=조선DB
  ―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야나 활동을 하며, 미국으로 처음 데려온 아이가 예진이입니다. 예진이는 지금은 저희 부부의 딸이 됐습니다. 이 아이가 미국에 와서 갑자기 가족이 생기고 보통 아이가 되니 약간 욕심이 났던 것 같아요. 저희 부부가 낳은 아들인 남동생과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성이 다른 게 신경 쓰였던 거예요. 묻더군요. ‘학교에서만 성을 바꾸면 안 되나.’ 답했어요. ‘네가 너인 것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마라. 네가 보육원에서 성장한 데는 네 잘못은 전혀 없다. 어른들이 잘못한 거다.’ 그 얘기를 아이에게 늘 했어요.”
 
  ― 아이가 알아듣던가요.
 
  “이 아이가 저희와 7년을 살고 대학교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대학에 가서 만난 친구들에게 자기 얘기를 했다는 겁니다. ‘나는 뉴저지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한국 보육원에서 12년 살다 뉴저지에 사는 가족에게 입양이 돼서 자랐다’고 말이에요.”
 
  ― 그래서 예진이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 얘기를 왜 했냐고 물었어요. ‘나는 뉴저지에서 왔고, 엄마, 아빠, 동생은 뉴저지에 있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그게 거짓말도 아니고요. 물었더니 예진이가 그래요. ‘그걸 감추면 친구들과의 사이에 거짓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친구를 진실되게 못 사귈 것 같아요.’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나인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메시지가 아이 마음속에 제대로 들어갔구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참된 우정을 위해 솔직해질 수 있는 아이가 됐구나.’ 굉장히 보람스러웠어요. 우리가 뭔가를 했구나. 아내랑 함께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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