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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한국 도예를 대표하는 거장 신상호

“미친놈처럼 도자기 굽는 것만 좋아하면서 살았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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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 미군부대 부지에 세계 최고의 디자인 클러스터 만들자”
⊙ 박정희 대통령 시기, 도자기 산업 시찰단으로 ‘산업스파이’ 활동하기도
⊙ 레이건 대통령 방문 선물, 찰스 왕세자-다이애너 빈 결혼 축하 선물 도자기 만들어
⊙ 수백억원대의 수집품 양주시에 기증 예정

申相浩
1947년생. 홍익대 공예과, 同 대학원 졸업 / 前 홍익대 미술대학 학장, 홍익대 산업미술대학 대학원장,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초대 관장, 現 홍익대 명예교수
경기도 양주에 있는 자신의 갤러리에서 신상호 작가. 벽에 걸린 작품은 신작 〈묵시록〉이다. 사진=신상호스튜디오
  인간은 원래 죽지 않는 존재였다. 노쇠해지면 인간은 낡은 몸을 허물처럼 벗고 젊음을 되찾았다. 노파가 된 한 여인이 늙은 몸을 벗으러 강으로 갔다. 육체의 허물을 벗고 젊은 여인이 된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의 달라진 모습에 그녀의 아이는 낯선 이를 보듯 울어댔다. 여인은 강으로 돌아가 다시 허물을 뒤집어썼다. 그때부터 인간은 시한부 삶을 살게 됐다. 바누아투 군도에 사는 멜라네시아인들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神話)다. 신화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가 채록(採錄)해 자신의 저서 《황금 가지(The Golden Bough)》에 소개했다.
 
 
  허물과 不死
 
  흥미로운 건 비슷한 내용의 신화가 여러 문화권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현재 갖고 있는 모든 걸 버리는 자에게만 영생(永生)이 주어진다고 신화는 말한다. 인간이 한때 지녔다는 불사(不死)의 삶을 예술로 표현하려면, 어떤 재료가 가장 적합할까. 도자(陶瓷)라면 어떨까. 흙으로 빚어진 몸이 불 속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만, 한 번의 실수로도 산산조각 날 수 있는 불안정한 영생.
 
  11월 2일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부곡도방으로 가는 길에 문득 스친 생각이다. 부곡도방엔 신상호 작가의 작업실과 갤러리가 있다.
 
  신상호 작가는 한국 도예계의 ‘문제적 인물’이다. 그가 도예계에 미친 영향을, 한국보단 외국 평론가들이 더 주목해왔다. ‘아티스트 신상호는 한국 도예계의 한 발 앞을 달리고 있다.’ 일본의 미술잡지 《염예술(炎藝術)》의 편집장을 지낸 마쓰야마 다쓰오의 평가다. 마쓰야마는 올해 3월 《현대도예가의 초상(肖像)》이란 책을 냈다.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현대 도예계를 빚어온 66명의 도예가를 소개했다. 신상호 작가도 이 중 한 명이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하다.
 
  그의 작품은 영국 대영박물관, 빅토리아 알버트 뮤지엄, 프랑스 세브르 국립도자박물관, 일본 기후현 현대도예미술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등 세계 유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일본 한국대사관 관저 같은 공공시설은 물론이다. 대사관 관저에는 그의 달항아리 7개가 놓여 있다. 북두칠성을 상징한다.
 
 
  흙과의 50년 여정
 
광화문 콘코디언 빌딩 후면을 장식한 신상호 작가의 작품. 사진=신상호스튜디오
  안목 좀 있다 싶은 컬렉터의 컬렉션엔 어김없이 그의 도자가 있다. 남산 하얏트 호텔 곳곳을 장식한 인상적인 도자 작품도 그가 만들었다. 얼마 전 그의 고택(古宅)으로 옮겨 새롭게 개관한 국민대학교 명원박물관에서도 어김없이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초기 작품인 듯한 분청자기다. 참고로 명원박물관은 차(茶) 문화를 전시한 상설 전시장을 열었는데 한 번 가볼 만하다.
 
  그가 한국에선 처음 소개하다시피 한 ‘건축 도자’로 넘어가면 친숙한 지명들과 마주친다. 서울 센트럴시티 고속버스 터미널 승강장을 길게 장식한 〈밀레니엄 타이드-합창〉이 대표적이다. 타일 형태의 도자 작품을 붙였다. 높이 3m, 길이 160m 규모의 대작이다. 광화문 콘코디언 빌딩(구 금호아시아나 사옥) 후면 장식도 그의 작품이다.
 
센트럴시티 고속터미널 승강장을 장식한 신상호 작가의 도자 타일 작품 〈밀레니엄 타이드-합창〉. 사진=신상호스튜디오
  신 작가는 홍익대 공예과에 재학하던 중 도자기를 만났다. 방학이 되자 짐을 싸서 아예 경기도 이천에 있는 도자기 공장에 틀어박혔다. 한 달이 넘게 귀가하지 않는 장남을 찾아 부모님이 도요로 왔다. 어머니는 러닝셔츠 한 장 달랑 걸치고 흙투성이로 자기를 빚는 장남을 보자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장남의 고집을 아는 부친은 그 자리에서 아예 가마를 사주고 떠났다. 그때부터 흙과의 50년 여정이 시작됐다.
 
  빛나는 순간도 많았을 텐데 그는 그다지 지난 시절을 얘기하고 싶지 않아 했다.
 
  “나는 전통 도예를 거쳐 현대로 왔거든. 그러니 나한테 흠을 잡으려 해도 도자기에서는 흠을 잡을 수 없어요. 다 지나간 얘기, 여기까지 온 세월을 별로 회상하고 싶지 않아요.”
 
 
  최초로 ‘가스 가마’ 도입
 
  ― 왜 회상하고 싶지 않나요.
 
  “미친놈처럼 도자기 굽는 것만 좋아하면서 살았으니까. 돈이 없어서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가마에 일하러 다닌 적도 있었어요. 한 달에 보름은 일본에서 살았어요. 1970년대 얘기예요.”
 
  ― 월급이 얼마였나요.
 
  “15일 동안 일하면 50만 엔씩 받았던 것 같아요. 큰돈이었어요.”
 
  일본 가마에서 돈만 벌어온 게 아니었다. ‘가스 가마’를 알게 됐다. 그때까지 가스 가마에서는 청자나 백자를 구워낼 수 없다고 봤다. 한국에선 나무를 때는 장작 가마를 쓰고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불의 종류는 크게 산화염과 환원염이 있다. 산화염은 완전 연소하는 불, 환원염은 불완전 연소하는 불이다. 불완전 연소하는 과정에서 많은 양의 탄소 물질이 발생한다. 이 탄소 물질 덕에 청자 특유의 비색이 나타난다. 가스 가마에서는 탄소 물질이 안 생기니 푸른색의 청자를 소성할 수 없다고 봤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때 이미 일본에선 가스 가마를 쓰고 있었어요. 가스 가마에선 탄소 물질이 안 생긴다고 배웠거든. 일본 가마에서 일하면서 청자 유약을 가스 가마에 넣어봤어요. 그랬더니 이게 되는 거야. 새파란 청자가 나오는 거야.”
 

  ― 돈도 벌면서 연구도 했군요.
 
  “몇 번을 해보고 확신을 갖게 됐어요. 1500만원을 주고 가스 가마를 한국에 들여왔어요. 그때는 수표도 없을 때니 1500만원이면 현금으로 한 보따리였어요.”
 
  ― 한국에 들여와서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구웠겠네요.
 
  “난 그때 자살하려고 했어요.”
 
  ― 자살요?
 
  “한국에 가져와서 구우니까 색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럼 난 죽어야지. 돈을 빌리기까지 해서 엄청난 돈을 들여 사 왔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한국은 가스의 탈황(脫黃)시설이 안 돼 있던 거예요. 일본은 탈황시설이 갖춰져 있었고요. 그러니 탈황을 해야겠는데 이게 개인이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 가스가 원인이었군요.
 
  “그래서 연구를 했어요. 가마에 연결된 가스 노즐 속을 보니까 까만 기름기가 끼어요. 탈황이 안 돼서 그런 게 끼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걸 매번 일일이 닦았어요. 나중엔 탈황하는 기계를 구했어요.”
 
  ― 위기를 잘 넘겼네요.
 
  “저는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 안 되는 것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늘 이런 생각을 갖고 아주 집요하게 연구했어요.”
 
 
  ‘산업스파이’
 
  가스 가마와 함께 그의 시대가 열렸다.
 
  “1년 반 정도는 혼자 독점하다시피 했어요. 그때 나무 가마에서는 도자기 성공률이 10퍼센트 남짓이었어요. 가스 가마는 95퍼센트였죠. 비결이 뭔지 봐야겠는데 작업장에 안 들여보내 준다고 난리를 부리고….”
 
  ― 가스 가마로 만든 도자기 품질이 좋았나 보군요.
 
  “티 하나 없이 고운 색이 나오니까요. 일본 사람들이 와서 줄을 서서 사 갔어요. 그때 경리 일을 보는 여자 직원이 있었어요. ‘어제 대금이 얼마나 들어왔니’ 물으니 이렇게 답해요. ‘밤새 셌는데 아직 다 못 셌어요.’ 옛날 얘기지요.”
 
  ―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겠어요.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할까. 돈도 많이 벌었어요. 많이 새기도 했지만.”
 
  ― 다른 도예가들이 엄청 궁금해했겠네요.
 
  “제 가마의 직원들을 빼가더군요. 월급을 두 배로 준다면서요. 70명쯤이었던 직원이 한 명씩 한 명씩 나갔어요. 그렇게 남들이 쫓아오는 데 1년 반 걸리더군요.”
 
  ― 일종의 산업스파이군요.
 
  “원래 그렇게 영향을 주고받는 거예요. 저도 산업스파이를 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유럽도 다니고 동남아도 다녔어요.”
 
  ― 산업스파이를 했다고요?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각 산업 분야별로 사람을 뽑았어요. 해외 산업 현장을 보고 오라고요. 거기에 도자기가 있었어요. 일본 경제가 부흥할 때 중공업 다음으로 도자기 산업의 역할이 컸거든요.”
 
 
  “처음부터 잘난 건 없어요”
 
  무슨 얘기인가 싶겠지만, 일본은 도자기 산업으로 ‘탈아입구(脫亞入歐)’ 경제대국의 발판을 마련했다. 18세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유럽에 아리타 도자기를 수백만 점 이상 수출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 심수관 집안의 역할이 컸다. 일본 도자기의 인기는 19세기에도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시기 한국 정부도 도자기에 주목했다. 1979년 1월 24일에 열린 ‘무역진흥확대회의’에서 상공부는 10대 전략 산업(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시멘트, 도자기, 섬유) 육성계획을 발표했다. 전략 산업 시찰단에 도예가가 들어간 이유다.
 
  ― 동남아 국가에도 배우러 간 겁니까.
 
  “그럼요. 그때는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가 없었어요. 필리핀이 우리보다 훨씬 잘살았어요. 대만에 가서 백화점에 들어가면 갑자기 조명 조도가 뚝 떨어져요. 우리가 물건을 못 보게 하려고요. 그렇게 치열했어요.”
 
  ― 그런 노력들이 쌓여 한강의 기적이 탄생했군요.
 
  “일본도 그런 시찰단을 내보냈어요. 어느 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주친 거예요. 일본 팀은 핸드백이든 치약이든 무조건 사더군요. 큰 가방에 넣어서 가져가요. 우리는 돈이 없으니 사진만 이렇게 저렇게 여러 장 찍었어요.”
 
  ― 구입해서 실물을 직접 보면 모방하기 쉽겠네요.
 
  “그러니 일본은 직접 뜯어보고 일주일, 보름이면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냈어요. 우리는 나라에 돈이 없었으니까요. 처음엔 원래 그렇게 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잘난 건 없어요. 좋게 말해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하는데, 모방하는 거죠. 다 그런 과정을 거쳐요.”
 
 
  찰스-다이애너 결혼 선물로
 
  ― 1970년대 그 가난했던 시기에 시찰단도 보내고 정부에 혜안이 있었네요.
 
  “독재를 했느니 군사혁명을 일으켰느니 해도,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으면 오늘날이 있기 힘들어요. 박 대통령이 그때 ‘한국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국민의 역량도 민주주의를 수용할 만큼 성장해야 하는 겁니다. 먼 훗날 돌아보면 박 대통령이 가장 역사에 깊은 자취를 남긴 대통령으로 기억될 겁니다.”
 
  이제는 무슨 금기어처럼 된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그의 작품은 사랑을 받았다.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러 미국에 가면서 그가 만든 달항아리를 들고 갔다. 미국 언론에 실린 사진을 보고 알았단다. 찰스 3세가 왕세자 시절인 1981년 다이애너 빈(嬪)과 결혼할 때도 한국 정부는 결혼 축하 선물로 신 작가의 도자기를 보냈다. 영국의 어느 언론은 각국에서 도착한 결혼 선물 중 신 작가의 도자기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았다고 한다. 훗날 찰스 3세는 한국을 방문하며 신 작가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연락을 해왔다.
 
  그는 도자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1981년 당시 유엔에서는 남북한이 ‘투표 대결’ 중이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을 회유하기 위해 남북한이 경쟁했다. 당시 자이르(현재 콩고민주공화국)는 친북 국가였다. 북한 군사 교관들이 자이르에 파견돼 군사 훈련을 도울 정도였다.
 
  당시 주 자이르 대사였던 이종업 대사는 신 작가에게 부탁을 했다.
 
  “자이르 대통령인 모부투 세세 세코를 직접 만나 작품을 전해 달라.”
 
  모부투는 32년간 권좌에 머무른 독재자이자 예술 애호가였다. 예술가들과 예술기관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통치 시기를 ‘자이르 예술의 황금기’라 부를 정도다.
 
  신 작가는 높이 60cm 크기의 청자 투각 항아리를 들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그 덕이었는진 몰라도 자이르는 예정되어 있었던 대통령 특사의 북한 방문을 취소했다고 한다. 벌써 40년도 더 된 이야기다.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의 주 전시장인 돔하우스는 외벽을 신상호 작가의 도자 타일로 마감했다. 사진=신상호스튜디오
  분청사기와 청자, 백자로 이어지던 그의 도예 여정은 1990년대 현대적인 조형세계로 넘어갔다. 그는 자이르 방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아프리카를 찾았다. 그 결과가 〈아프리카의 꿈〉 시리즈다. 그가 빚어낸 동물들은 보는 이에게 경계심을 풀게 만든다. 무구(無垢)한 눈빛 때문일까.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작업을 이어가던 그는 2005년 대학교수직을 그만뒀다. 정년퇴임을 5년 남긴 이른 퇴임이었다.
 
  “‘아, 사립대학에서 나의 한계가 여기까지구나’… 학장과 대학원장을 마치고 난 후 든 생각이었어요. 빨리 그만두고 내 작업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2007년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장 시절의 신상호 작가. 왼쪽으로 그의 작품 〈아프리카의 꿈〉이 보인다. 사진=조선DB
  이듬해 그는 김해에 설립된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초대(初代)관장을 맡았다.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은 세계 최초의 건축 도자 미술관이다. 클레이(clay)는 흙을, 아크(architecture)는 건축을 뜻한다. 이름처럼 도예와 건축이 어울려 있다. 주 전시관인 돔하우스 외벽은 신 작가의 작품인 〈파이어드 페인팅(Fired Painting)〉 타일 5000여 장으로 마감했다. 세계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장관이다. 공공(公共)이 주도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혁신적이다. 클레이아크 미술관은 2020년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2020 Asia Design Prize, 아디프)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클레이아크 같은 시립미술관 관장을 해보니 어떻든가요.
 
  “시(市)의 간섭을 안 받는 조건으로 맡았지요. 문제는 행정적인 간섭이 아니었어요. 미술관을 짓는데, 조경은 이 업체가 맡고, 가로등은 저 업체가 맡고 하는 식으로 연관 관계가 있는 곳들이 미리 정해져 있더라고. 그럴 수는 없다고 실랑이를 했어요. 결국은 내 뜻대로 됐지요. 그 결과 그나마 지자체 미술관 중 가장 나은 미술관이 됐다고 생각해요.”
 
 
  “관장은 30년씩 맡아야”
 
  ― 미술관 지을 때 말이 많았겠어요.
 
  “외벽을 내가 맡았으니 내가 부정하게 돈을 해먹은 거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어요. 나중에 감사원 감사를 해보니 해먹기는커녕 내 돈 찔러 넣어가며 작업한 게 밝혀졌지요. 보람 있게 한다고 그렇게 했지. 난 일단 십원이라도 부정한 돈을 쓰는 건 옴이 오르는 것 같고 싫어요.”
 
  ― 개관하고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적인 미술관이란 평가를 받으니 보람이 있겠군요. 그렇게 공들여 개관했는데 왜 금방 그만뒀나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계속 눌러앉아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제 저는 갑니다’ 하고 털고 나왔어요. 사실 미술관을 보람 있게 키우려면 영국의 테이트(Tate)미술관처럼 한 사람이 30년씩 맡아야 해요. 지자체 시장이 계속 바뀌잖아요. 미술관에 몸을 다 바쳐 키우고 싶어도 여건이 안 되더라고요.”
 
  영국 테이트미술관은 영국의 국립현대미술관이다. 테이트에서 열리는 전시는 늘 미술계의 화젯거리가 된다. 기자도 런던을 찾으면 테이트에서 어떤 전시를 열고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미술계 트렌드를 파악하고 싶으면 역시 테이트의 최근 전시 목록을 확인하면 된다. 전 세계인이 찾고 주목하는 살아 있는 미술관이다.
 
  1897년 개관해 120년이 넘었지만, 역대 관장 목록은 역사만큼 길지 않다. 한번 관장을 맡으면 오래 머물러서다. 30년 가까이 관장직을 맡은 존 로덴슈타인(1938~1964년), 니컬러스 서로타(1988~2017년)가 대표적이다. 테이트미술관뿐만 아니라 유럽의 주요 미술관들의 관장 임기는 10~15년이 보통이다. 신 작가의 말이 이어졌다.
 
  “시장이 바뀌었는데 시청에서 연락이 왔어요. ‘시장님이 좀 보자십니다’… 만나고 싶으면 미술관으로 오지 내가 왜 가느냐며 안 갔어요.”
 
 
  ‘도예는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
 
  2015년부터 2019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맡았던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도 국현 관장 시절 이런 말을 했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진 한국에서 짧은 임기는 핸디캡이다. 유럽에서는 미술관의 단기 실적을 기대하지 않는다. 또 관장이 바뀌더라도 전임의 기획 전시에 큰 문제가 없다면 존중받는다.”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 신 작가는 칩거에 들어갔다.
 
  “말하는 걸 까먹을 정도로 사람을 안 만나고 살았어요. 10여 년간 친구도 안 만났어요. 혼자 노는 걸 배우는 데 3년이 걸리더라고. 3년 지나니 아주 편해요.”
 
  ― 혼자서 어떻게 지내나요.
 
  “오후 4시 반이면 저녁을 먹어요. 6시면 집에 들어가서 8시쯤 잠에 들어요. 그러면 2시쯤 깨서 작업장에 나와요. 그때부터 담배 한 갑 피우면서 드로잉도 하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요. 얼마나 집중이 잘 되고 시간이 잘 가는지 몰라요.”
 
  ― 왜 혼자 놀기로 결심했나요.
 
  “남 얘기, 정치 얘기 재미없어요. 도예과는 제가 대학을 떠날 때 이미 폐과 될 위기에 있었어요. 도예는 어디로 가야 하나 새벽에 일어나 고민하는 겁니다. 입체에서 평면으로 가자, 어떻게 하면 흙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굉장히 많은 단계를 거쳐 2017년에 현실화했어요.”
 
  그 결과가 〈나무(Tree of life)〉 시리즈와 최근작 〈묵시록〉 시리즈다. 도자기로 빚은 회화 작품이다. 아마 세계 최초가 아닐까.
 
 
  수집에 수백억원 써
 
  신 작가와 함께 작업실 한쪽 ‘수장고’를 둘러봤다. 그의 작품은 물론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창이며 복식, 중국 고대 유물 등 수집품이 한가득이다. 그는 알 만한 이들은 아는 수집광이기도 하다. 인터뷰를 할 때도 무슨 골동 스키 세트를 들인다며 연신 전화통화를 했다. 남이 돈 쓰는 것도 퍽 재밌는 구경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수집에 돈을 얼마나 썼나요.
 
  “몇백억원은 썼을 거예요. 인정사정없이 샀으니까.”
 
  ― 수집품 중에 뭐가 제일 비싼가요.
 
  “아프리카 전통 유물이 비싸요. 잘 때 베는 목침인데 몇천만원인 것도 있어요.”
 
  ― 왜 그렇게 비싼가요.
 
  “수량이 많지 않으니까요. 세상에는 부자들이 많아요. 희귀한 걸 자기 걸로 만들려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 제일 어렵게 구한 건 어떤 유물인가요.
 
  “뉴욕에서 서울로 귀국했는데 물건이 들어왔다고 전화가 와서 바로 뉴욕으로 돌아간 적이 있어요. 지팡이였어요.”
 
  ― 지팡이 때문에 다시 뉴욕으로 날아갔다고요?
 
  “그 세계가 묘해요. 거래를 하고 신용이 쌓이면 뭐가 들어왔다고 먼저 전화를 해요. 처음 만나는 상인과 거래를 할 경우, 그쪽에서 물어요. ‘전에 누구와 거래했느냐’고. 런던 누구라고 하면 상인끼리 연락을 해요. 그걸로 다 돼요. 저는 외국 어딜 가도 돈을 안 갖고 다녀요.”
 
  ― 돈이 없는데 어떻게 사나요.
 
  “아프리카에 가도 마찬가지예요. 사고 싶은 게 보이면 말해요. ‘나를 알고 싶으면 런던의 누구누구와 얘기를 해봐라’ 그러면 런던 상인이 아프리카 상인에게 얘기해줍니다. ‘그 사람한텐 외상으로 팔아도 돼요.’”
 
  ― 그런 국제적인 규모의 신용도는 어떻게 쌓습니까.
 
  “일단 많이 사야지. 대금은 정확히 지불하고요. 옛날에 제 아내가 한국에서 외국으로 돈 송금한다고 아주 고생했어요.”
 
 
  양주시에 기부 예정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신상호 작가의 작업실과 갤러리.
  이렇게 모은 수집품을 그는 경기도 양주시에 기부하기 위해 양주시와 협의 중이다. 수집품은 물론 그의 작품 6400여 점, 작업실과 작업실이 있는 토지 일체를 기부할 계획이다. 시립미술관으로 운영하는 조건이다.
 
  그는 양주 토박이다. 현재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서 태어났는데 그때는 도봉구가 양주에 속했다. 남양주와 의정부도 양주시의 일부분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양주의 크기가 엄청났다. 현재의 의정부시, 동두천시, 남양주시, 구리시, 연천군 전곡읍, 서울특별시 동북부 일대의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광진구 등이 모두 양주에 속했다. 그의 집안은 양주에서 17대를 살았다. 그래서 그런가 그는 전형적인 경기 북부 방언을 구사했다. 경기 북부 방언은 서울 사투리와 거의 같다. ‘나중에’ 대신 ‘낭중에’, ‘이제’ 대신 ‘인제’라 말하는 식이다. 그처럼 서울 사투리를 많이 쓰는 사람을 만난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는 경기도 이천의 가마를 처분하고 1976년 양주로 돌아왔다.
 
  ― 가족들이 기부에 동의했나요.
 
  “아내와 딸들이 동의해줬어요. 딸이 그러더군요. ‘아빠가 만들고 모아놓은 것들 우리에게 남기지 말고 다 기증해’라고요.”
 
  희한한 건 그가 과거의 영광을 털어놓는 데 인색하다는 점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에게 선물로 건네진 작품이 뭐였느냐, 찰스 왕세자는 어떤 작품을 사 갔는지 취조하듯이 캐물어도 심드렁했다. 시선이 그저 앞을 향해 있는 사람 특유의 습성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나, 끊임없이 곁눈질하는 이들은 옆구리를 찌르기만 해도 자신의 삶에서 조금이라도 빛났던 순간들을 줄줄 왼다.
 
 
  미군기지에 디자인 클러스터를
 
  그의 시선은 의정부시를 향하고 있다. 정확히는 의정부 시내에 있는 ‘캠프 레드클라우드(Camp Red Cloud)’ 부지다. 2018년까지 주한미군 레드 클라우드 사령부가 주둔했던 땅이다. 약 83만6000㎡(약 25만3000평) 규모다. 지난 2월 한미 정부는 기지 반환을 확정했다. 의정부시로서는 졸지에 시내에 금싸라기땅 25만 평이 생긴 격이다.
 
  전임 의정부 시장은 이 자리에 물류센터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트럭들이 드나들 물류센터가 나을까, 잘만 만들어놓으면 세계인이 찾아올 복합문화공간이 나을까. 의정부 시민이 선택할 문제다. 의정부 얘기가 나오자 신 작가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시내에 군부대가 있었던 탓에 오랜 기간 의정부 시민들은 피해를 봤어요. 지금도 의정부 하면 부대찌개를 떠올리잖아요. 그 땅에 디자인 클러스터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갤러리와 작가 레지던스, 미술·디자인학교, 연구센터가 있고 아트페어도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자는 겁니다. 이리 하면 의정부 시민들의 그동안의 고통과 인내심에 보상이 되지 않겠어요?”
 
  김동근 의정부 시장은 지난 총선 기간 캠프 레드클라우드 부지에 디자인 클러스터를 짓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지금은 청사진을 그리는 단계다. 워킹 그룹에서 기본 개념부터 논의 중이다. 신 작가는 워킹 그룹의 좌장이다.
 
  ― 어느 정도 진행됐나요.
 
  “마스터플랜을 논의 중입니다. 요새는 건물들을 그대로 두고 리노베이션해서 문화공간으로 쓰는 게 세계적인 추세예요. 그대로 둬야지, 부수고 새롭게 지으면 재미없어요. 싱가포르의 길맨 배럭스, 영국 런던의 배터시 발전소, 독일 카를스루에 예술과 미디어 센터(ZKM)를 보세요.”
 
  싱가포르의 길맨 배럭스(Gillman Barracks) 현대미술단지는 15개의 갤러리가 모여 있는 싱가포르 현대미술의 중심지다. 원래는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군 주둔지였다. 싱가포르 독립 후엔 군대 훈련시설로 이용됐다. 2012년 9월, 아트 갤러리와 미술 교육 연구기관이 자리한 아트 콤플렉스로 재탄생했다. 싱가포르의 명소다.
 
 
  기존 건물 활용이 추세
 
  런던의 배터시 발전소는 템스강 남쪽에 있는 화력발전소다. 세계에서 가장 큰 벽돌 건물 중 하나로, 내부엔 두 개의 발전소가 존재한다. 1930년대에 완공되어 운행하다, 1975년 운행을 정지했다. 운행이 끝난 후에도 건물을 보존했다. 지금은 복합 문화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영국의 록밴드 핑크 플로이드는 배터시에서 앨범 커버 사진을 촬영했다. 내년엔 애플 사무실(캠퍼스)이 입주한다. 애플은 배터시 발전소 공간의 40%를 임차했다.
 
  독일 카를스루에 예술과 미디어 센터(ZKM)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속하는 카를스루에(Karlsruhe)에 있다. 원래 탄약공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지어졌다.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의 미디어 아트 전진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전시회, 이벤트, 연구 및 제작, 아카이브 및 컬렉션 기능을 맡고 있다.
 
  ― 캠프 레드클라우드 기지 건물은 그대로 쓸 만한가요.
 
  “25만 평 부지에 건물이 280동 넘게 들어서 있어요. 잘 지어놨어요. 도서관, 식당, 호텔은 물론 야구장, 골프장도 있어요. 부지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절차가 있다고 하는데, 되도록 건물을 그대로 활용했으면 합니다. 부지를 둘러싼 벽돌담만 바꾸면 어떨까 싶어요. 통유리로 바꾸고 그 위에 그 땅에 얽힌 이야기를 쓰는 겁니다. 전쟁도 결국 역사의 일부니까요.”
 
  그는 얼마 전 파리와 런던을 각각 한 달간 다녀왔다. 마스터플랜에 참고할 만한 외국 사례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 프로젝트가 오랜 제 꿈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파리고 런던이고 내 돈으로 다녀왔지. 내 생애 마지막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보람 있게 결과를 만들고 싶어요.”
 
  그는 미술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학위에서 자유로운 학교, 외국에서 다양한 예술가들을 그때그때 초청해서 가르치는 그런 학교 말입니다.”
 
  자신의 예술 여정을 두고 그는 ‘팔리면 돌아서는 인생이었다’라고 표현했다.
 
  “팔린다고 하면 안 해. 가만히 보니까 지나간 인생을 살면서 세 번 그랬어요. 장사꾼이 되는 게 기분 나빠. 그러니 작가로서 내 아이덴티티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죽은 후에 받는 평가가 뭐가 중요해.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
 
  ― 현재의 시대정신은 뭘까요.
 
  “새로움.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어요. 그 변화를 느낄 수 있는지는 얼마만큼 열심히 공부하느냐에 달렸어요. 현시점에 나는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환경에 있는지 자꾸 원을 늘려서 살펴봐야 해요. 그러려면 좋은 미술관, 훌륭한 전시에 가봐야지. 가서 느껴야 해요.”
 
  ― 매일같이 주변의 익숙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밥 먹고 술 마시는 생활은 안 되겠네요.
 
  “남 흉이나 보고 쓸데없는 대화하느니 차라리 혼자 맛있는 걸 먹는 게 나아요. ‘올리브를 이렇게 먹으면 이런 맛이 나는구나’… 그러니 혼자 놀기도 바빠요.”
 
  ―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군요.
 
  “도예의 미래를 생각하죠. 달로 가는 우주 항공기에도 세라믹(ceramic)이 쓰입니다. 흙은 고갈되지 않는 자원이에요. 나는 그런 세상을 못 보겠지만 훗날 세라믹이 중심이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새 이름 ‘申怪’
 
  ― 안목은 어떻게 해야 갖출 수 있나요.
 
  “집요해야지. 안 된다고 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해요. 남들이 안 된다고 하는 걸 되게 만들 때 새로운 걸 만들 수 있어요. ‘이건 안 되는구나’ 물러서면 아무것도 안 돼요. 좋은 걸 보는 것도 중요해요.”
 
  ― 좋은 거라면요?
 
  “좋은 예술 작품들을 많이 봐야 해요. 음악도 대중음악도 듣고 클래식도 듣듯이, 모든 걸 다 같이 수용해서 자신 안에서 녹아내려야 해요. 명품 브랜드 제품 사는 게 사치라고 하는데 좋은 것도 한번 사봐야 해요. 좋은 걸 못 가져보면 어떤 게 좋은지 잘 몰라요. 맛있는 것도 먹어봐야 하고요. 무엇보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걸 집요하게 추구하는 자세가 중요해요.”
 
  그의 최근작 〈묵시록〉 시리즈에는 ‘신괴(申怪)’라는 서명이 새겨져 있다. 그의 새로운 이름이다. 신상호에서 신괴로, 일흔다섯의 도예가는 또 한 번 허물을 벗을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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