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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터뷰

스티븐 케이시 LSE 교수가 말하는 루스벨트 리더십

“국제질서 파괴에 대한 반발이 루스벨트 전쟁 리더십의 動因”

글 : 유민호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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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침략하는 일본 견제하던 1930년대 루스벨트와 중국 견제해야 하는 바이든 흡사
⊙ “바이든, 지지 기반 확고하던 루스벨트보다 한국전쟁 이후 부정적 여론 직면했던 트루먼과 비슷”
⊙ “루스벨트, 여론 살필 때 지지율이 아니라, 반대자와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살펴”(딕 모리스)
⊙ “전쟁의 우선순위 결정, 인재 등용 탁월”
⊙ “공화국·종교·문명 보존, 고통받는 인류 해방” 같은 보편적 가치를 전쟁의 목적으로 제시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부터 11년간 라디오 방송 〈노변정담〉을 통해 국민과 소통했다. 사진=미 국립문서청(퍼블릭 도메인)
  에이브러햄 링컨, 조지 워싱턴,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베스트 3’ 대통령이다. 링컨·워싱턴·루스벨트 세 명의 대통령은 파란만장했던 미국 정치 무대의 핵심 주인공이다. 미국 시민들은 물론 정치계·학계 모두가 공인하는 대통령 리더십의 모델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세 명의 대통령에 대한 미국인의 인기 평가는 남녀노소 관계없이 대동소이하다. 수많은 여론조사의 대략 9할 정도는, 링컨 1위, 워싱턴 2위, 루스벨트 3위로 굳어져 있다. 링컨은 내전(內戰)을 극복한 통합 지도자로, 워싱턴은 독립을 획득하고 왕정(王政)이 아닌 민주주의체제를 수립한 인물로, 루스벨트는 경제공황을 극복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리더로 해석되고 있다.
 
  2022년 세계는 《성경》에도 등장하는 ‘아마겟돈(Armageddon)’, 즉 지구 종말기에 벌어지는 최후의 전쟁에 비견될 상황이다. 이미 7개월째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과 초읽기에 들어간 중국의 대만 침략 가능성 때문이다. 미중(美中) 디커플링(Decoupling)의 영향이 글로벌 구석구석 밀려들고 있다. 에너지와 식량 가격 급등도 일상화되고 있다. 마구 찍어낸 국채(國債)를 통한 퍼주기 예산으로 버티고 있지만, 미국 달러가 유동성을 줄이면서 여러 나라가 국가 부도나 외환(外換)위기를 겪게 될 전망이다.
 

  미국의 베스트 3 지도자 가운데 2022년 상황을 해결해낼 최적(最適)의 인물은 누구일까?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답이 될 듯하다. 남북화합의 링컨이나 국부(國父) 워싱턴은 미국과 미국인 만들기, 즉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 지도자라고 볼 수 있다. 건물로 치자면, 강력한 지반과 콘크리트에 해당되는 지도자다.
 
  1932년 당선 이래 4선 대통령을 지낸 루스벨트는 다르다. 일단 시대가 20세기 중반이다. 네이션 빌딩과 같은 총론(總論) 수준에서 벗어난, 각론(各論) 차원의 위업을 달성한 인물이 루스벨트다. 미국 국민과 언론 모두가 공감하지만, 루스벨트는 내치(內治)·외치(外治) 동시 성공을 통해 ‘마침내’ 미국을 글로벌 ‘1강(?)’으로 만든 지도자다.
 
 
  1930년대 美의 對日 견제와 흡사
 
스티븐 케이시 LSE 교수. 사진=스티븐 케이시
  필자가 보기에 2022년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상황과 유사하다. 특히 일본이 벌인 태평양전쟁과 당시의 대외(對外) 정책을 보면, 현재의 중국 팽창주의 정책과 거의 비슷하다. 미국 측 대응도 마찬가지다. 1930년대 말 미국의 대일(對日) 정책 흐름은, 21세기 바이든의 대중(對中) 견제와 유사하다.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은 ‘민주당 할머니 정치가의 노망’이 아니라, 반중(反中) 정서로 들끓는 미국 여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1930년대 미국은 일본의 침략 야욕 앞에 노출된 중국 국민당 정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위협이 노골화될수록 미국의 대만 수호 의지도 높아지고 있다.
 
  2022년 가을, 바이든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시(戰時) 대통령 루스벨트와 닮아가고 있다.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역사학과의 스티븐 케이시(Steven Casey) 교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통한다. 2001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출간한 《신중한 십자군(Cautious Crusade)》은 유럽과 아시아 전쟁에 개입하는 루스벨트의 세계 전략을 다룬 명저(名著)다. 케이시 교수는 루스벨트 당대에 발간된 수많은 기록물을 수집·분석하면서 전시 대통령 루스벨트의 리더십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 현재의 중국과 1930년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비교할 수 있다. 바둑이 그러하듯 제3자의 눈으로 보면 몇 단계 올라간다. 미국을 가장 잘 아는 나라는 영국이다. 루스벨트라는 키워드를 통해 21세기 미국 대중 정책의 근본적 배경과 방향을 짚어보자. 케이시 교수의 연구실로 줌(Zoom)을 연결해, 루스벨트가 남긴 리더십과 역사적 교훈에 대해 물어봤다.
 
 
  중국과 일본, 루스벨트와 바이든
 
무기대여법에 서명하는 루스벨트. 무기대여법을 통해 루스벨트는 영국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사진=미 국립문서청(퍼블릭 도메인)
  ― 1930년대 말 제2차 세계대전 직전과 2022년 상황을 비교한다면.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아시아에서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80여 년 전 루스벨트는 유럽과 아시아 가운데 어디를 먼저 다룰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결론은 유럽이 우선이었다. 1930년대 독일의 팽창은 유럽은 물론 북반구 전체의 ‘전면적인 세력 변화’를 의미했다. 당시 일본의 경우 독일과 비교할 정도의 파워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이 중국을 장악한다 해도, 독일과 유럽이 가진 경제 규모에 크게 못 미쳤다. 일본의 경우, 석유와 철강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서 수입한다는 결정적인 약점도 갖고 있었다.”
 
  ― 루스벨트는 어떤 식으로 유럽 전쟁에 개입했는가.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만들어 대서양 건너 영국을 도왔다. 당시 영국은 무기를 구입할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루스벨트는 의회의 협조를 얻어, 직접 판매가 아니라 장기 대여한 뒤 나중에 비용을 청구하는 형식의 정책을 폈다. 당시 스탈린의 소련도 미제 무기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미제 무기가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독일 잠수함 공격에 직면하게 되자 루스벨트는 1941년 9월, 이른바 ‘보는 즉시 공격(Shoot on sight)’ 연설을 통해 독일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하지 않았다.”
 
  ― 일본에 대한 루스벨트의 개입은 언제부터 시작됐는가.
 
  “유럽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일본에 대한 무력(武力) 개입은 차후로 미뤄졌다. 그러나 1941년 8월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가 이뤄지자 일본 스스로 본격적인 무력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독일 잠수함에 대한 공격 명령이 내려지고 3개월이 흐른 1941년 12월,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 사태에 직면한 바이든을 전시 대통령 루스벨트와 비교한다면.
 
  “루스벨트 당시와 비슷한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적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우, 미국이 경제제재만 하고 있을 뿐 무력 개입은 ‘처음부터’ 배제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과거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도 강하다. 군사적·경제적 차원에서의 중국의 파워는 81년 전 일본과 비교할 수 없다.”
 
 
  미국 의회의 분위기
 
  ― 미국 의회의 분위기를 비교하고 싶다. 펠로시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하고 미국의 상하 양원이 대만 지지에 적극 나서고 있다. 루스벨트 당시의 의회는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개입을 주저했는데.
 
  “1930년대 미국 의회는 민주당 파워 일색이었다. 대공황 시기에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뉴딜(New Deal) 정책을 간판으로 내세웠다. 공공사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뉴딜 정책의 핵심 중 하나다. 상당수의 미국인, 특히 중하류층 실업자들이 루스벨트 덕분에 안정된 생활에 들어설 수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 루스벨트 덕분에 의회도 민주당이 장악하게 됐다.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孤立主義)를 외교 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유럽·아시아에서의 전쟁에 개입하기를 주저했다.”
 
  ― 의회가 대서양·태평양 두 개의 전쟁에 전부 개입하게 된 경위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결정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의회의 반응은 수동적이고 미온적이었다.
 
  루스벨트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12월 8일 당시 미국의 군사력은 벨기에보다도 약한 수준이었다. 남북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미국은 전쟁의 고통을 절감했다. 그 결과, 군사력 보유 자체를 포기하다시피 했다. 징병제를 없애고,미국 우선 고립주의 정책을 지향했다. 해군 일부를 유지할 뿐이었다. 미국 육군이 독일이나 일본을 공격할 정도의 수준에 오른 것은 1943년 말~1944년 초로 전쟁 발발 2년 뒤부터다.
 
  고립주의만이 아니라, 군사 관련 예산 증액에 대한 의회의 반감도 강했다. 공화당만이 아닌 민주당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예산을 늘릴 경우 세금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주만 공격 이후 의회의 자세가 180도 변했다. 적에 대한 단호한 공격으로 의회의 공기가 변했다. 루스벨트는 1941년 12월 11일,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이탈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의회는 즉각 전쟁예산을 승인했다.”
 
 
  전쟁과 함께 진화한 미국의 군사력
 
  ― 2022년 미군의 전쟁 능력이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루스벨트 때보다 훨씬 강하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미국은 현재 강력한 군사력은 물론, 다양한 군사 산업을 갖고 있다. 루스벨트 당시에 없던 군사 능력과 자산이 2022년에는 존재한다.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와 비교해서 미국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가라는 문제는 남아 있다. 그러나 전쟁 수행 능력이란 측면에서 보면, 21세기 미국은 20세기 루스벨트 때와 전혀 다르다. 전쟁 수행 능력만이 아니라, 군사동맹에 대한 미국인과 의회의 시각도 80여 년 전과 다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은 전쟁 기간 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2022년 현재 미국은 이미 글로벌 차원의 수많은 동맹을 보유하고 있다. 21세기 미국의 군사력은 193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된 상태다.”
 
  1941년 말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17위 수준이었다. 1940년 국방예산은 90억 달러에 불과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의 국방예산과 군사력은 수직상승했다. 1945년 국방예산은 980억 달러로, 4년 만에 전쟁 전의 10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1945년 일본과 싸울 당시 미국의 군사장비 생산 규모를 보자. 1년간 지프 630만 대, 탱크 8만8000대, 비행기 30만 대, 전투함 1500척에 달한다. 당시 전 세계 군사 장비의 40%가 미국에서 생산됐다. 전투함 50여 척에 불과하던 1945년 초 일본이 어떤 상황에서 미국과 싸웠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요즘 거의 매일같이 중국의 군사력 급팽창 소식이 들려온다. 주목할 부분은, 미국의 경우 평시(平時)가 아니라, 전쟁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군사 장비 생산과 개발에 나선다는 점이다. 전쟁에 들어가기 전이 아니라, 적과 싸움에 들어갈 때부터 전쟁 능력이 급상승한다는 의미다.
 
  ― 루스벨트 당시와 비교할 때, 바이든의 전쟁 준비태세는 어떤가.
 
  “미국에서 합동참모본부(JCF· Joint Chiefs of Staff)가 만들어진 것은 진주만 공격 직후인 1943년 초다. 미국 군사력의 상징인 펜타곤 건물도 1943년 지은 것이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부터 미국의 군사력이 진화·발전했다고 보면 된다. 정치·군사·외교를 연결하는 정보기관 중앙정보국(CIA)은 1947년에 탄생했다. 바이든은 이 같은 루스벨트의 전쟁 관련 ‘레거시(Legacy)’를 전부 이어받은 대통령이다. 전쟁과 관련해 볼 때, 루스벨트에 비해 훨씬 더 준비된 대통령이라 볼 수 있다.”
 
 
  파나이호 사건
 
일본군에 의해 격침된 미국 포함 파나이호. 이 사건으로 미일 간 긴장이 고조됐다.
  ― 1941년 진주만 공격 직전 일본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어떠했는가.
 
  “일본이 미국의 여론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7년 12월 12일이다. 일명 ‘파나이 사건(USS Panay incident)’인데, 일본 해군이 상하이(上海) 주변 양쯔강(揚子江)에서 활동 중이던 미국 군함과 주변의 배 세 척을 공격, 침몰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현지 상황이 사진과 함께 자세히 알려지면서 미국인 전체가 분노했다. 군함 침몰과 함께 사상자도 나오면서 반일 분위기가 미국에서 굳어졌다.
 
  파나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인은 물론, 유럽 시민들의 일본에 대한 인지도 자체는 낮았다. 일본의 중국 공습 소식도 서방과 무관한 강 건너 불로 이해했다. 파나이 사건에 이어 곧바로 일본의 난징(南京) 점령이 시작되면서 반일 여론이 한층 더 거세졌다. 공교롭게도 당시 난징에 머물던 미국인이 동영상을 찍어 전 세계에 알리면서 반일 여론이 극에 달했다. 반대로 중국 국민당 정부에 대한 미국인의 친밀감은 한층 강해졌다. 일본은 미국과 유럽의 반일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하고 ‘사과 외교’에 적극 나섰다.
 
  덕분에 반일 여론이 주춤해지지만, 진짜 구원투수는 독일이었다. 오스트리아 합병에 이어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공격에 나서면서 미국 여론의 관심도 유럽으로 옮겨갔다. 이후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때까지 일본은 미국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 2022년 대만에 대한 미국의 여론을 난징 점령 당시 친중(親中) 정서와 비교하자면.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이 됐다. 중국은 루스벨트의 미국, 처칠의 영국, 스탈린의 소련과 함께 전쟁 주도 4개국의 자리에 올랐다. 현재의 대만은 중국 국민당을 뿌리로 하고 있다.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차지했지만, 1970년대 초까지 미국은 대만이야말로 정통 중국이라 믿었다. 당시 미국인 상당수는 자유민주주의 대만을 지키고 창조해낸 나라가 미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미국=아시아 자유민주주의 수호 동맹국’으로 인식되면서 대만을 대하는 미국 국민의 관심과 애정도 한층 더 강해졌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北京) 방문 이후 대만을 둘러싼 상황과 환경이 급변했지만, 장제스 국민당 정부로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인의 기억과 정서는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바이든, 트루먼과 비슷한 상황”
 
  ― 루스벨트는 여론에 대해 아주 민감한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인 동시에 여론에도 신경을 쓴, 극히 드문 지도자인데.
 
  “전쟁은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한다. 전쟁을 장기간 치러야 할 경우,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와 지지가 필수불가결하다. 그게 민주주의다. 기본적으로 루스벨트는 정치가다. 국민적 지지는 정치가의 생각과 비전을 지탱하는 근본 요소다. 루스벨트의 카운터 파트너였던 영국의 처칠 총리도 마찬가지다. 당파를 초월해, 두 사람 모두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전쟁 지지 여론을 확산해나갔다.”
 
  ― 최근 바이든은 유사시 대만에 대한 미군 지원을 3번이나 확인했다. 국민 여론을 대하는 바이든과 루스벨트의 차이점은.
 
  “루스벨트는 194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3선 연속 당선됐다. 루스벨트 덕분이지만, 민주당도 의회를 장악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전쟁에 본격 진입하면서 당시 국민은 물론 의회도 루스벨트를 전폭 지지했다. 공화당조차도 루스벨트를 전쟁 최고사령관으로 여기면서 따라갔다. 이미 지지 기반이 강력한 상태에서 국민 여론을 재확인·재다짐한 것이 루스벨트다.
 
  바이든은 다르다. 현재 공화당에 무시당하고 있고, 전반적인 여론도 부정적이다. 자기에게 나쁜 결과가 나오는 여론에 일일이 대응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루스벨트의 후임이던 트루먼 대통령이 현재의 바이든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트루먼은 의회·언론·국민들로부터의 부정적 여론에 직면했다.”
 
 
  루스벨트식 여론 읽기
 
  필자는 20여 년 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캠페인 컨설턴트로 일한 딕 모리스를 도운 적이 있다. 함께 일하는 동안 정확한 여론조사와 분석이 미국 정치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루스벨트는 딕 모리스가 자주 언급하고 극찬했던 인물이다. 여론조사는 물론, 여론을 읽는 감각에 관한 한 루스벨트를 넘어설 대통령은 없다는 것이다.
 
  루스벨트는 라디오를 정치에 본격 도입한, 첫 번째 미국 대통령이다. 〈노변정담(Fireside chats)〉이라는 타이틀의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1933년부터 1944년까지 11년간 진행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면서 지지를 호소하고, 소문이 아닌 진실과 팩트를 국민들에게 전했다. 딕 모리스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라디오 연설 뒤 반드시 국민 여론을 살폈다고 한다. 지지율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와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루스벨트식 여론 분석법이었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여론조사 결과가 정치의 권위와 정통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한국 정치무대에서 볼 수 있는 대통령 지지율이 좋은 예다. 한국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중구난방(衆口難防) 진영 논리의 연장선으로 느껴진다. 어느 것 하나 신뢰하기 어렵다.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정부에 등록된 여론조사기관이 무려 79군데라고 한다. 이 중 절반인 45개가 여론 분석 인력이 단 한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루스벨트라면 한국의 대통령 지지율 결과 같은 것은 그 자체를 철저히 무시해버렸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에 반대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근거와 팩트가 여론조사에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인기로 먹고사는 연예인이 아니다. 싫은 소리도 할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가면 미소에 감춰진 연예인이 아니라, 근거와 팩트에 대응해 움직인 정치가가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 獨·日과 타협 안 해”
 
루스벨트는 카이로회담에 장제스 총통을 초청, 중국을 연합국 열강의 일원으로 인정했다. 사진=미 국립문서청(퍼블릭 도메인)
  ― 전시 대통령으로서의 루스벨트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가 특별하다. 첫째, 전쟁의 우선순위에 관한 부분이다. 대서양 너머 독일과 태평양 반대편 일본에 대해 언제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루스벨트의 감각과 전략전술이 탁월하다. 군사력만이 아니라 외교력을 통해, 독일을 먼저 공략한 뒤 뒤이어 일본을 무조건 항복시켰다.
 
  둘째, 인재 등용이다.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사람들을 쓰면서 경제와 전쟁 두 전선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 태평양육군사령관 맥아더 장군, 유럽전선을 지휘한 아이젠하워 장군 등용은 루스벨트 용병술의 핵심이었다. 이들 장군들의 탁월한 지휘 능력이 있었기에 미국과 동맹국의 ‘압도적 승리’도 가능했다.”
 
  ― 루스벨트가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승리의 그날까지 전쟁을 지속한 이유는 무엇인가.
 
  “독일 히틀러에서부터 시작됐지만, 국제질서 파괴에 대한 반발이 루스벨트 전쟁 리더십의 동인(動因)이다. 독일이 팽창하면서 유럽체제가 무너질 경우 미국에 곧바로 영향을 주게 된다. 그 같은 인식은 당시 미국인 모두가 공유(共有)하고 있던 세계관이기도 하다.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루스벨트는 독일·일본과는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진 뒤에는, 일본·독일·이탈리아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국경선이나 이해조정을 위한 적당한 협상이 아니라, ‘원점(原點)으로 전부 되돌려놓고 나가라’는 것이 루스벨트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 대만 문제와 관련된 전망인데, 과연 미국은 중국에 맞서 싸울 것인가.
 
  “미국은 전쟁 억지력을 우선시할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이다. 중국이 미국의 억지력을 무시하고 나올 경우 어떻게 될까? 여러 가정이 있겠지만,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한국전쟁이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전쟁은 ‘결코’ 미국이 원치 않았던 역사다. 미국은 전쟁 억지력을 통해 전쟁을 피하려 애썼다. 그러나 일본과 북한은 선을 넘어 미국의 억지력을 무시했다. 그 결과 미국의 전쟁 참가는 불가피했다. 중국이 미국의 억지력을 무시할지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아직은 중국과의 전쟁을 막기 위한 억지력 확보가 미국의 주된 전략이다.”
 
  ― 루스벨트 리더십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카리스마가 강한 지도자다. 인간적 매력이 넘치는 인물로, 결코 이상주의(理想主義)에 빠지지 않았던 현실주의, 나아가 실험주의 대통령이었다. 물론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교훈을 얻은 뒤 성공으로 연결시켰다. 공황을 이겨낸 경제 정책, 독일을 먼저 상대한 뒤 나중에 일본과 전쟁에 나선 것도 선견지명(先見之明) 루스벨트 리더십의 핵심이다. 20세기 미국 1강 체제를 만들고 미국 민주주의를 전 세계에 확산시킨 주인공이 바로 루스벨트다.”
 
 
  미국의 명분, 중국의 명분
 
지난 6월 30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정상회담에서 연설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그는 1930년대 루스벨트와 흡사한 짐을 지고 있다. 사진=AP/뉴시스
  중국의 대만 침략 가능성이 논의될 때마다 상기되는 작전이 있다. 1944년 6월 6일 결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그것이다. 이 작전에는 바다를 건너 35만 명의 연합군이 참가했다. 대만은 우크라이나와 다르다. 바다를 넘어서야만 공략할 수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는 12개국 출신의 연합군이 참전했다. 압도적인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연합군 1만5000명이 희생됐다. 군사전문가들은 대만 상륙 시 중국도 엄청난 피해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했다. 기도를 겸한 6분30초 정도의 짧은 메시지였는데, 인터넷에서 이 연설을 찾아 들을 수 있다. 루스벨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미군이 영국해협을 건너고 있다”고 전하면서 “모두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호소했다. 필자가 이 연설에서 특히 주목하는 대목이 있다. 왜 미국 청년들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이 상륙작전에 나서야만 하는지에 관한 이유와 목적을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대목이다.
 
  “전능하신 신(神)이여. 미국의 자랑스러운 아들들이 공화국·종교·문명을 보존하고, 고통받는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한 막강한 노력과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루스벨트는 공화국·종교·문명을 지키고, 고통받는 인류의 해방이 노르망디 상륙의 이유이자 목적이라고 말했다. 이 연설을 들으면서 중국이 대만 침략에 나서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 될지 생각해보았다. 이미 시진핑(習近平)이 여러 자리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민족 통일, 자위(自衛)·자존(自尊), 미국 헤게모니 반대, 근대 이후 외세에 당한 치욕의 설욕, 중화민족이 가진 힘의 집대성, 대만의 반민족적 집권자들로부터 인민 해방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중국 내부나 공산당의 이념에 관련된 문제일 뿐이다. 인류 모두에 적용될 가치(價値)나 원칙과는 상관없는 얘기들이다. 세계의 흐름과는 무관한 중국식 일방통행 세계관이라고 할까?
 
  루스벨트가 말했던 공화국·종교·문명, 그리고 고통받는 인류의 해방은 미국만이 아닌, 전 세계가 공유할 영원한 가치이자 원칙이다. 이 같은 가치와 원칙은 2022년 미국 정치에도 계승·유지되고 있다. 전시 대통령 루스벨트가 미국만이 아닌, 글로벌 리더십의 최고 모델로 통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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