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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아들 윤기의 人生

‘목포 시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어머니 사랑을 세상에 알리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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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학자는 1961년 국내 거주 외국인 여성 최초로 문화훈장 받아
⊙ 오는 10월 말 ‘윤학자 탄생 110주년’ 맞아 韓日 정상이 목포에 온다면…
⊙ 한 아이의 “어머니 나라에 가고 싶어요”라는 말이 인생 변화시켜
⊙ 1972년 일본인 아내와 결혼… 한국·일본서 2代 걸쳐 사회사업
⊙ 매년 무안공항 통해 일본 관광객 초청해 목포 알릴 계획

尹基
1942년생. 목포 중고교, 중앙신학 사회사업과 졸업 / 1968년 목포 공생원 원장 취임 이래 목포, 서울, 오사카, 사카이, 고베 등에서 복지시설 운영 / 한국 청소년 문제연구소 소장, 한국 사회복지사협회 회장, 일본 후생성 ‘사회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복지의 새로운 형태의 검토회’ 회원 역임 / 저서 《어머니는 바보야》 《김치와 우메보시》 《깡통인생》 등
윤기 공생복지재단 회장.
  ‘고아의 어머니’가 낳은 아들은 애초에 고아일까 아닐까?
 
  ‘고아의 아버지’의 다른 별명이 ‘거지대장’이라면 그 대장의 장남은 거지일까 아닐까?
 
  어린 시절 아들은 자신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정체성(正體性) 혼란에 빠져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고아의 어머니’가 친모(親母)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지만 6·25 당시 인민군에게 끌려가 감감무소식이었다.
 
  철이 없던 시절부터 고생, 고생하며 지냈는데 부모님이 고생하는 걸 보면서 자신의 사전에서 ‘고생’이란 낱말을 지워버렸다. 주위에서는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해야 한다”고 늘 부담을 주었다.
 
  지금은 ‘어머니의 나라’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동포 노인들과 살고 있다. 평생을 사회사업가로 살았는데 아직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
 

  기자는 지난 6월 28일 서울 마포구 공생(共生)복지재단 사무실에서 ‘거지대장’ 윤치호(尹致浩·1909~?)의 장남이자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尹鶴子·다우치 지즈코·1912~1968년)의 아들인 윤기(尹基·80)씨를 만났다.
 
  제16회 호암상(사회봉사)과 제19회 자랑스런한국인대상(국위선양) 수상자인 그는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 공생복지재단 회장, 윤학자공생재단 회장이란 직함을 갖고 있다.
 
  ‘제창자’라는 낯선 직함도 있다. 유엔 ‘세계 고아의 날’ 제창자. 기자에게 건넨 명함에는 자신을 ‘소셜 워커(Social Worker)’라고 소개한다. 인터뷰 도중에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일본어 통화가 끝나면 한국어 통화가 이어졌다. 정신이 없었다.
 
 
  이어 붙인 고아들의 집합소
 
1938년 10월 15일 공생원 윤치호 원장과 윤학자 여사의 결혼식 모습이다. 사진=공생복지재단 제공
  문답(問答)으로 대화하기보다 1세기 전의 서사적인 이야기체로 탐험을 시작한다. 한국 근대의 공간인 ‘목포’라는 도시의 지리적 단층(斷層), 온전한 하나가 아니라 이어 붙인 고아들의 집합소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1928년 전라도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한 기독교 전도사가 있었다. 그는 다리 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고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하였다. 목포 공생원(共生園)의 시작이었다.
 
  전도사의 이름은 윤치호. 부모 없는 아이들은 항상 그의 뒤를 줄줄이 따라다녔고 ‘거지대장’이라 불렀다.
 
  이 대장이 조선총독부 관리의 외동딸과 결혼했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일대 사건으로 회자되었다. 윤학자는 그렇게 한국인이 되었다. 몸이 허약해 ‘석녀(石女) 판정’을 받은 아이 못 낳는 아내였지만 결혼하고 귀한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하나님께 바칩니다”라는 뜻으로 기독교의 ‘기(基)’ 자를 넣어 윤기라고 이름을 지었다.
 
  아들은 자신의 기억 속 어머니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어머니의 입은 참으로 바위처럼 무거웠다.’
 
  이 문장에 기자는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많은 표현 중에 입이 무겁다니…. 어머니는 결코 한쪽으로 기우는 법이 없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흐트러진 자세를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언제나 일찍 일어나 머리를 단정히 빗었다. 몸이 약했지만 아프단 말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늘 존댓말을 썼다. 그것이 어머니의 천품(天稟)이었다.
 
  6·25 직후 행불자(行不者)가 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고아들을 떠맡았다. 아들은 항상 고아 속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 사진이라곤 고아들과 함께 찍은 마른버짐 같은 사진뿐이다. 가끔 혼란에 빠졌다. 자신에게 진짜 부모가 있기나 한지, 아니면 진짜 고아인지…. 어머니가 공생원 아이들과 차별 없이 키웠기 때문이었다.
 
  잊히지 않는 또 다른 기억도 있다. 윤기가 중학교에 다니던 무렵,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가 정원에서 앉아 울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에 편지가 들려 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 겨우 하신 말씀 한마디.
 
  “바다 저쪽에 고치(高知)가 보인다.”
 
  아들 눈에 보이는 것은 바다에 떠 있는 두어 척의 배가 전부였는데 어머니는 당신의 고향인 일본 고치현이 보인다니…. 그때는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 편지에는 외할머니가 고치에 있는 양로원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한 분밖에 없는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 채, 당신은 이역만리 한국에서 부모 없는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아들은 그때 일이 떠오른다.
 
  “‘바다 저쪽에 고치가 보인다’고밖에 할 수 없었던 당신의 운명 앞에서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목포시민 감사비’ 제막 행사
 
1968년 11월 2일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으로 치러진 윤학자 여사의 영결식 사진이다.
  인터뷰 중에 공생복지재단 윤기 회장은 〈‘목포시민 감사비’ 제막 행사 추진계획〉이라는 8장짜리 서류를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오는 10월 말 ‘윤학자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목포 공생원에 감사비를 제막하는 행사를 담은 보고서였다.
 
  참석 규모를 3500명으로 예상하는데 그중 일본인이 3000명이란다. 눈을 비비고 다시 읽었다. 이 팬데믹 시대에 일본에서 그만한 수가 몰려올 수 있을까. 온다고 해도 목포에서 잘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다시 창궐할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라남도에서 올해와 내년을 ‘전남 방문의 해’로 지정하고 대대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심지어 윤 회장은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까지 초청 인사에 포함시켰다.
 
  ― ‘목포시민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감사비 제막식을 준비하고 있군요.
 
  “격동의 1세기 동안 입으로 불면 금방 날아가버릴 조그만 여성을 보듬어준 게 바로 목포시민의 사랑이 아니었나요? 그 사랑이 아니었다면 공생원이 존재할 수 없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적에 당시 목포시민 7만 명 중 3만 명이 영결식에 참석했다고 해서 언론이 ‘목포가 울었다’고 기사를 썼거든요.
 
  생전 어머니가 고생하시고 수고도 하셨기에 목포분들이 같이 울어줬겠지만, 국적을 넘어 인간애로 어머니를 보듬어준 것에 대해 일본이 감사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의 말인즉 목포 고아·거지들을 ‘씻기고 입히고 먹인’ 윤학자에게 목포시민들이 감사하다는 감사비가 아니라 일본이 윤학자를 대신해 목포시민에게 감사해하는 감사비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기자가 잘못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들렸다.
 
  “요즘 한일 관계가 나쁘잖아요. 그래서 이런 기회에, ‘윤학자 탄생 110주년’을 맞이해, 양국 정상이 목포에 오면, 조그만 ‘바늘구멍’이나마 서로 소통해 양국 관계가 개선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당시 《조선일보》를 보니…
 
  《조선일보》는 윤학자의 안타까운 죽음을 신속히 알리며 ‘목포를 울린 장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다음은 1968년 11월 3일 자 7면의 기사 일부다.
 
  〈“어머니, 어린 저희들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고아들의 애끓는 울음소리에 항도 목포가 울었다. 2일 오전 10시 목포역광장을 메운 3만 조객들의 흐느낌 속에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56) 여사의 시민장이 엄수됐다. 목포 개항 이래 최초의 시민장이었다. (…)
 
  작년 10월 19일 윤 여사는 고아들을 보살피다 갑자기 졸도하고 말았다. 과로에 지친 것이다. 서울성모병원에서 받은 진단 결과 병명은 조기노쇠(早期老衰). (…)
 
  윤 여사의 별세가 전해지자 일본과 국내에서 100여 통의 조전이 오기도 했다. 윤 여사는 1961년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여성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1965년에는 제1회 목포시 시민상을 수상했다. 일본에서도 윤 여사는 1967년 사회에 공헌이 큰 사람에게 수여하는 일본 정부의 최고영예상인 총리의 헌창 수상자로 선정됐다.〉
 
  ‘윤학자 정신’ 통해 목포를 세계에 알린다면…
 
‘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
  윤기 회장은 “우리나라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목포에서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꿈을 갖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놀라서 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데 성사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고 한날한시에 두 분이 같이 안 오시더라도, 따로 잠시 들르시면…. 하다못해 (일본) 총리실 비서관이라도 올 수 있고, 영상 메시지라도 줄 수 있지 않겠어요?
 
  마음이 통하는 게 중요한 거지 어떤 이벤트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계획을 짜지 말고 느슨하게 숨통을 틔어놓는 게 좋지 않겠어요?”
 
  ― 그렇습니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윤학자 탄생 110주년’을 준비하고 있어요.”
 
  ― 감사비에 무슨 문장을 넣을지는 정했나요.
 
  “한국의 작가 한 분, 일본의 작가 한 분한테 (문장을) 받으려고 그래요. 한쪽만 받으면 좀 뭐 하니까.”
 
  ― 손님 3500명을 목포가 다 수용할 수 있나요? 일단 코로나19가 잠잠해져야 할 텐데 말이죠.
 
  그가 건넨 서류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매년 300만 명 이상 방문하는 일본 관광객이 무안공항과 목포항을 통해 입국을 유도하기 위함.〉
 
  윤 회장의 계속된 말이다.
 
  “목포(의 숙소)를 알아보니 한 7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다고 해요. 광주는 1500명 정도 여유가 있고요. 나머지는 서울에서 묵으면 됩니다. 행사를 오후 2시로 잡아서 그 시각에 맞춰서 서울서 KTX 타고 내려오면 되니까요. 행사가 끝나는 오후 6시쯤 상경하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이 대목에서 눈매가 날카로워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윤학자 정신’을 통해 민간 차원에서 한일 양국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면, 어머니가 꿈꾸었던 국경을 초월한 고아, 장애인 등 소외계층에 대한 사랑을, ‘목포’라는 공간을 통해 세계에 알린다면….
 
  매년 정기적으로 무안공항을 통해 일본 관광객을 초청해 관광도시로 목포를 널리 알려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할 계획입니다.”
 
  그는 평범하고 쩨쩨한 사회사업가가 아니라 비전이 있는 큰 인물처럼 느껴졌다.
 
 
  목포 공생원 ‘총각 원장’ 시절 이야기
 
윤기 회장과 부인 다우치 후미에(田内文枝, 윤문지).
  사실, 윤기 회장의 아내도 일본인이다. 다우치 후미에(田內文枝). 남편 성을 따라 한국 이름은 윤문지(尹文枝).
 
  “제가 사회사업을 하잖아요. 아버지가 시작하신 그 일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6·25 때 행방불명되시고 일본 여자였던 어머니가 고생을 하셨잖아요. 어머니가 떠나시고 총각 때 목포 공생원을 떠맡았으니….”
 
  ― 스물여섯 때?
 
  “자격이 없죠. 우선 후계자 자격이 없는 거예요.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들이고 장남이니까 맡아야 한다고 해서. (잠시 침묵) 무거운 짐을 그때는 모르고 졌거든요.
 
  평생 부모님이 남기신 일만 쭉 하다 보니 결혼 10주년, 20주년… 한 번도 안 챙겼어요. 아니 못 챙겼어요. 1972년에 결혼했는데 올해가 결혼 50주년입니다.
 
  그런데 제가 올해 여든입니다. 여든 생각은 안 하고 있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죠. 더 중요한 일들이 있어서….”
 
  ‘윤학자 탄생 110주년’을 준비해야 하니, 개인적인 팔순이나 금혼식은 안중에 없다는 얘기였다.
 
  일본인 아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니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총각 원장’ 시절을 회고하기 시작했다.
 
  공생원이 자리 잡은 목포 대반동은 앞으로는 물(바다)을 면하고 뒤로는 산(유달산)이 받쳐주고 있다. 말은 배산임수(背山臨水) 형세라 해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겨울 북서풍이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다. 그 시절 다 그랬겠지만, 난방 가동이 어려워 원생들은 추위에 덜덜 떨기 일쑤였다.
 
  당시 공생원 원생들은 300여 명. 보육교사 20명이 한 사람당 평균 15명의 원생을 맡았다. 정부에서 공생원에 지급하는 식량 이외 나머지 부족분은 원장 책임이었다.
 
  “항상 식량이 달려 가게에서 외상으로 쌀을 구매한 다음 정부미가 배급되면 갚는 악순환의 되풀이였어요. 문제는 가게 쌀은 햅쌀인데 정부미는 묵은쌀이어서 그 차이만큼 현금을 얹어주어야 했어요.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살이가 한층 더 찌들 수밖에요.”
 
  형편이 이렇다 보니 원생들은 점심 끼니를 죽으로 대신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과자로 빚은 집에서 사는 나라…
 
1960년대 윤학자 여사가 초등학교에 진학하는 목포 공생원 아이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1970년대 초 어느 날, 윤기 원장은 배고파 축 늘어진 아이들과 함께 동요 〈가고픈 나라〉(이응찬 작사, 이수인 작곡)를 불렀다.
 
  언제나 내가 가고픈 나라는
  일년 사시 아름다운 꽃피는 나라.
  나비가 훨훨 춤을 추고
  즐거운 꿈속의 나라.
  언제나 내가 가고픈 나라는
  과자로 빚은 집 속에서
  언제까지 들어도 재미만 나는
  옛날이야기 꿈속의 나라.
 
  -동요 ‘가고픈 나라’ 중 일부

 
  노래가 끝났을 때 초등학교 3학년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원장님. 우리를 키워주신 어머니 나라에 가보고 싶어요.”
 
  윤 원장 자신도 ‘어머니 나라’에 가보고 싶었다. 딸(윤학자)을 잃고 일본 양로원에 홀로 계신 외할머니를 뵙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영양실조로 쓰러질 지경인데 일본은 무슨 일본!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며 체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그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어머니 고향인 일본 고치현 지사에게 편지를 썼다.
 
  세상에! 얼마 후 초청장이 왔다. 하지만 300여 명 공생원 아이들이 다 갈 수는 없었다. 결국 ‘수선화 합창단’만 같이 가는 걸로 결정하고, 여권 발급, 단체 신원조회, 정부 추천(보건복지부, 문화공보부, 문교부)을 받기 위해 목포와 서울을 야간열차 타고 오르내리기를 수십 번, 우여곡절 끝에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윤 회장의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일본항공(JAL) 사장이 사연을 듣고 무상으로 비행기표를 끊어주었어요. 그분은 ‘좋은 일은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같이하는 게 좋다’면서 대한항공(KAL) 측에다 전화를 걸어주었지요. 결국 대한항공과 일본항공을 타고 서울~오사카를 오갈 수 있었답니다.”
 
  수선화 합창단은 오사카의 박애사(博愛社)에서 감동적인 교류회를 가졌다. 박애사는 기독교 정신으로 운영되던 아동복지시설. 어머니 윤학자가 공생원을 이끌 때 자매결연을 맺은 시설이었다.
 
  그곳 박애사에서 지금의 아내와 만났다.
 
  “아동복지 시설에 근무하는 여성이어서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이 길을 열어놓고 가셨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다
 
  그녀는 침착하고 공손했다. 다소곳하고 여성스러운 모습이 어머니와 많이 닮아 있었다. 돌아가셨지만 이 여성이라면 어머니도 환영하시리란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어 프러포즈를 했다.
 
  그해 가을, 예비 아내가 목포를 찾았고 얼마 뒤 친정 부모와 더불어 공생원을 찾았다. 아내는 “국제결혼이 어떻고, 고아 키우는 사람과 결혼하면 고생한다느니” 하는 주위의 자질구레한 장애물들을 지혜롭고 현명하게 뛰어넘었다.
 
  윤 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박애사의 나카가와(中川) 이사장에게 결혼 주례를 부탁했다.
 
  “주례를 부탁하러 갔는데 나카가와 이사장께서 결혼을 반대하더군요. 가족들은 물론 당사자들도 다 좋다고 하는 상황인데 반대하시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이사장 말씀은 ‘아내가 기독교 세례를 받지 않았고, 고생을 모르고 자란 막내딸이라는 점, 사회사업 현장 경험이 6개월밖에 안 된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약혼식을 먼저 올리고 내년 부활절 때 결혼식을 올리되 그사이에 성경을 공부하라’고 권하더군요.”
 

  처음에는 그 말이 섭섭하게 들렸다. 그러나 서로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결혼은 이상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분이 잘 아셨던 겁니다. 한번은 나카가와 이사장이 ‘결혼 하객들에게 무슨 선물을 줄 계획이냐’고 물어요. 저는 돈이 없어 ‘남대문 시장에서 복주머니를 준비했다’고 말씀드렸죠. 이사장께서 ‘얼마냐’고 묻기에 ‘1000원 정도 할 겁니다’고 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제작된 청첩장 맨 밑에 조그맣게 ‘1000원 이상 축하금은 사양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어요. 당황스러웠죠. 일본에서는 축하금을 받으면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답례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세상에, 저처럼 ‘1000원 미만 축하금을 부탁한다’는 청첩장을 돌린 이가 누가 있겠어요? 그때 돈이 없어 약혼선물도 성경으로 대신했거든요. 이해해준 아내가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 ‘어머니 나라’에 가고 싶다던 초등학생의 한마디 말이 뒷날 커다란 일을 성사시켰네요.
 
  “그렇죠. JAL과 KAL의 도움으로 일본에 가게 됐고 박애사와 연결, 그리고 아내와 결혼까지 하게 됐으니까요. 이처럼 복지 현장에서는 비록 어린아이의 속 없는 말일지언정, 귀 기울여 듣는 감성이 필요해요. 봉사 문고리 잡는 식으로 ‘저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데…’ 하고 생각하는 것이죠.”
 
 
  복지 현장에서 감성이 중요한 이유
 
윤기 공생복지재단 회장은 복지의 국제화, 문화화, 대중화를 추진하고 있다.
  윤기 회장은 다소 감격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아이의 그 말, ‘어머니 나라에 가보고 싶다’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게, 하나님이 길을 열어준 게 아닌가 생각해요. 다시 한 번 복지 현장에서 감성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기회였습니다.”
 
  ― 그 한마디 말이 오작교 역할을 했네요.
 
  “제 인생의 문을 열어준 것은, 물론 씨를 뿌려주신 아버지가 계시고, 거기서 눈물의 세월을 보낸 어머니가 계시지만 그 아이의 한마디 말이 인생에서 큰 계기를 만든 게 아닙니까?”
 
  ― 참! 그 아이도 일본에 같이 갔나요.
 
  “물론, 갔지요. 그 아이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해요.”
 
  ― 벌써 예순이 넘었겠네요.
 
  이 대목에서 잠시 심각해지며 이렇게 말했다.
 
  “가끔 공생원에서 함께 지냈던 이가 절 찾아와 ‘원장님 미안해요’라는 말을 해요.”
 
  ― 왜요.
 
  “사실은 복지시설에서 자란 이야기를 남편에게도 못 하는 경우가 있고 자식들한테는 더더욱 못 한다고 해요. 평생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줘야 합니다.”
 
  ― 올해는 윤학자 여사가 태어난 지 1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110주년을 맞이해 ‘목포시민 감사합니다’라는 큰 테마를 만들었어요. 복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지역에 필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부모님은 늘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남보다 먼저 시작하셨어요.”
 
  윤 회장은 마치 재즈밴드에서 드럼과 퍼커션으로 연주하듯 1세기의 역사를 가슴 절절하게 풀어갔다.
 
  “일제 시대 때는 가장 천대받던 거지·부랑인·장애인·고아를 모았잖아요. 1930년대는 학교에 못 가는 지역 주민들을 모아 공민학교를 열었고, 1940년대는 광복 후 해외에 흩어졌던 동포들이 대거 몰려들자 전국을 다니시면서 귀환동포 보호사업을 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6·25 때는 공생원이 피란민 집합소, 전쟁고아들의 공간이 돼서 500명이 넘게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적 같아요. 어떻게 500명이 먹고 자고 생활했는지. 다리 밑에서 자고 처마 밑에서 자고 강당에서 자고 이슬 내리는 밭에서도 자고…, 그런 상태였지요. 그때는 ‘복지’라는 말을 꺼내기도 어려운, 말 그대로 그냥 공동체였지요.”
 
 
  한국과 일본 복지시설 차이는…
 
목포 공생원의 현재 모습이다. 공생원을 시작으로 한 공생복지재단은 아동복지, 장애인복지, 노인복지, 직업전문학교, 정신보건복지 등 다양한 복지를 선도하는 재단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1960년대는요.
 
  “6·25가 끝나고 전사자 부인들이 자립을 해야 하는데 어린아이들 때문에 할 수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전국 최초로 전사자 부인을 위한 무료 탁아소를 시작했어요.”
 
  ― 이후 1970년대는 ‘총각 원장’ 시대네요.
 
  “네, 그 시절은 저의 시대인데 전쟁고아들이 커서 사회에 나가 자립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시작한 게 직업훈련 사업이고 장애인 사업이었습니다. 1980~1990년대에는 제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동포를 위한, 한국에서 보면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 복지’가 되겠지만, 동포를 위한 양로원을 만들었지요.
 
  이렇게 해서 아주 긴 세월이 흘러갔어요.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사업이라도 지역사회의 지지를 받고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성공할 수 없다고요.”
 
  ― 요즘 이야기를 해볼까요? 현재 목포 공생원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대한민국이 산업화의 땀을 흘린 보람으로 정부에서 복지단체에 많은 걸 지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50년 전 ‘총각 원장’ 시절과 복지예산을 비교하면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
 
  과거 일본 복지시설 직원 수가 우리보다 6배나 많았어요. 근데 지금은 우리가 더 많아요. 근무조건도 일본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좋아졌다고 할 수 있어요. 연말에 한국 직원은 ‘김치 보너스’도 줍니다.”
 
  ― 네? 김치 보너스?
 
  “‘김장 보너스’ 말입니다. 그 시절, 일본이 제일 부러웠던 게 ‘공동모금회’였습니다. 공화당 말기 때 목포에서 가까운 함평 출신 국회의원이 계셨어요. 그분한테 일본 공동모금회법을 그대로 복사해 건네면서 꼭 법안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훗날 실제로 법을 만드셨어요.”
 
  ― ‘사랑의 열매’ 말씀이시군요.
 
  “네. 지금은 한국의 공동모금회가 일본에 모금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어요. 일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한국의 복지가 발전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일본밖에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미흡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활동가들은….”
 
  ― 한국과 일본 양쪽을 다 보는 사람들 말이군요.
 
  “네, 양쪽을 다 보는 활동가들은 한국의 복지가 더 발전되고 전문화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일본은 전후(戰後) 유럽의 복지 제도를, 특히 영국 제도를 들여와 제도적으로는 한국보다 좀 더 발전된 측면이 있었어요. 근데 이제는 차이가 거의 없어지고, 뭐랄까….”
 
  ― 대등하다?
 
  “한국이 넘어섰다고 봐도 되겠죠.”
 
 
  이 시대에 ‘윤학자 정신’이 필요한 까닭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윤기 이사장은 재일동포 노인들을 위해 지난 2016년 도쿄 ‘고향의 집’을 건립했다. 오사카, 고베, 사카이 등 5곳에서 ‘고향의 집’을 운영 중이다.
  ―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윤학자 정신’이 필요할까요.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윤학자 정신’입니다. 지금 한국은 다문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요?
 
  1938년 10월 15일, 어머니가 주위 사람이 반대하는 아버지와 결혼했을 때 친정어머니, 그러니까 제 외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일본인, 조선인 구별 없이 모두가 형제자매’라고요.
 
  이 말씀은 지금도 유효한 말 아닌가요? 다문화 시대, 글로벌 시대에 가장 필요한 메시지 아닙니까?”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은 10년 전인 2012년 10월 ‘윤학자 여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며 유엔 ‘세계 고아의 날’ 제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몇 가지 난관에 부딪혀 제정 노력에 동력을 잃었다. ‘110주년’을 맞아 재차 유엔 ‘고아의 날’ 제정을 추진할 생각이다.
 
  “고아라는 용어 때문에 고생을 했어요. 이 말이 ‘차별 용어’라는 오해를 불러와 전문가일수록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또 고아의 개념도 과거와 달라졌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부모가 없는 자식을 그렇게 불렀는데 지금은 부모가 있어도 부모 역할을 못 하는 가정이 많아졌어요. 또 다양한 이유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가족도 존재하고요.
 
  주위에서 ‘고아의 날’ 대신 ‘새로운 가족의 날’이 어떠냐고 권해요. ‘새로운 가족’에는 고아·장애아·난민·고립 아동 등이 모두 포함돼 있어요. 제 생각에도 비전이 담긴 미래지향적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긴 해요. 김 기자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듣고 보니 훨씬 세련돼 보이네요.
 
  “그런가요? 유엔 ‘새로운 가족의 날’…. 이미지가 구체적이고 괜찮을 것도 같네요.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 다듬어 가겠습니다.”⊙
 
목포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윤기
  일본 5곳에서 ‘고향의 집’ 열다

 
  윤기의 아내 다우치 후미에는 ‘2대째 고아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삶에 지쳐 낯선 한국 땅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런 아내의 모습을 보고 윤기는 1982년 일본으로 이주했다.
 
  일본에 정착해 사회사업을 이어갔는데 재일동포 노인을 위한 양로원인 ‘고향의 집’을 열었다. 아이치현(愛知縣)에서 두 명의 재일조선인 노인이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는 신문 기사가 발단이었다.
 
  윤기는 1984년 6월 《아사히신문》에 〈재일한국인 노인홈 건설을!〉이라는 글을 투고했다. 어머니 윤학자가 한국에서 50년간 생활하며 한국말을 사용하고 치마저고리를 입었으면서도, 죽음을 앞둔 어느 날 일본어로 “우메보시(매실장아찌)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는 사연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재일동포 노인들이 마음 편히 온돌방에서 한국어를 말하며 민요를 부르고 김치를 먹을 수 있는 양로원을 건설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사실 재일동포 1세는 일본의 전시(戰時) 정책, 즉 강제 동원되어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이 보통의 긴 역사 속에서 생긴 뒤얽힌 감정 때문에 보통의 양로원에 들어가길 거부해온 터였다.
 
  《아사히신문》에 글이 실린 며칠 후 많은 일본인이 후원인을 자처, 1985년 450여 명의 후원회원을 모았다. 이후 1988년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이 설립됐고 이듬해 오사카 인근 사카이에 재일동포 노인을 위한 ‘고향의 집’이 마련됐다. 현재 오사카, 고베, 교토, 도쿄 등 5곳에서 노인요양시설을 운영 중이다.
 
  (참조: 지난 6월 24일 한국사회복지역사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이정선 조선대 교수가 발표한 논문 〈윤학자 원장과 목포 공생원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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