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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저는 축구밖에 모르는 生計型 축구인”

글 : 장원재  배나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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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팀 감독은 결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
⊙ “지도자가 되어 보니까, 제가 얼마나 재능이 부족한 선수였는지 알겠더라”
⊙ 고2 때 축구 입문… 1974년·1976년 고교 청룡기 축구대회 경신고 우승의 주역
⊙ 베트남 문화·관습 존중하고 스태프들을 조직화·전문화한 것이 성공 요인
⊙ “人性교육 중요… 언젠가 베트남 유소년팀 가르치고 싶어”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할로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사진=전형찬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다.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며 수많은 문턱을 넘었다. 불가능을 뛰어넘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몰랐다. ‘30년 전엔 전(全) 세계에서 일본을 대단치 않게 보는 나라가 한국밖에 없었다면, 10년 전엔 한국을 대단치 않게 보는 나라가 한국밖에 없었다’는 농반진반(弄半眞半)의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만화가 이원복(李元馥) 교수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인식한 신호탄이자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징적이다. 전 세계의 대중을 움직이려면,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탁월한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더하여, 나라의 전체적인 실력과 매력, 국격이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박항서(朴恒緖)다. 그는 베트남 축구를 단숨에 몇 단계 끌어올렸다. 동남아 중상위권이던 베트남 축구는 그의 부임 이후 동남아 최강으로 우뚝 올라섰다.
 
  축구는 글로벌 차원에서 산업화를 이룩한 종목이다. 막대한 이익을 내는 산업이기에, 거의 모든 나라가 투자 가능한 최대치를 쏟아붓는다. 국가 주도의 단기적 압축 성장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박항서는 단기적 압축 성장을 실현했다. 박항서의 업적이 놀라운 이유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낸 남자. 그는 대한민국과 베트남의 영웅을 넘어, 전 세계적 개인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어머니 백순정 여사의 100세 생신을 맞아 일시 귀국한 영웅을 만난 이유다.
 
 
  고2 때 축구부 들어가
 
  ― 언제 축구가 ‘나의 천직(天職)’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까.
 
  “축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중학교 때까지는 선수가 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논두렁에서 동네 축구를 하는 정도였죠. 산청군에서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에 와서 배재고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습니다. 2차로 붙은 학교가 경신고입니다. 1학년 때 지나가면서 봤는데, 운동장에서 공 차는 선수들이 그렇게 멋있는 겁니다. 그래서 2학기 때 테스트를 받고 축구부에 들어갔죠.”
 
  매형이 축구부 이경이(李慶伊) 감독과 아는 사이여서 가능했던 일이다. 경신중을 졸업한 바로 위 형이 차범근(車範根)과 동기동창이라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 시험을 쳐서 들어온 일반 학생이 운동부에 입부(入部)하는 건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2학기엔 선수 등록이 불가하다기에, 미등록 상태로 연습에 참여했다. 2학년에 올라가며 다시 1학년으로 재입학하고 정식 등록을 마친 배경이다.
 

  ― 고등학교를 4년 다녔네요.
 
  “그때는 그런 일이 많았죠. 1957년 10월 1일이 진짜 생일인데, 나중에 어머니가 진주법원에 호적정정 신청을 하여 1959년 1월 4일로 법적 생일을 바꿨습니다.”
 
  고교 졸업 후 군(軍) 입대영장이 나올 수 있어 취한 조치다.
 
  ― 부모님 반대는 없었는지요.
 
  “제가 막내여서 그런지,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시골에서 몸에 좋다는 보약을 꼬박꼬박 올려 보내셨습니다.”
 
 
  아버지는 6·25 상이경찰
 
히딩크 감독과 박항서 감독. 사진=조선DB
  어머니 백순정 여사는 진주여고(일제 때 명칭은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이다. 부모님은 1923년생 동갑으로 외가는 사천(泗川)이고 친가는 산청(山淸)이다.
 
  “어머니가 저희 남매를 키우느라 정말 고생이 많으셨어요. 약방도 하시고 식당도 하시고, 소금 도매상 등 돈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다 하셨죠. 형님들도 중학교 졸업 후 다 서울로 유학 보냈고, 대학까지 모두 졸업시켰습니다. 제가 중학교 졸업 후 바로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박항서의 아버지 고(故) 박록 선생은 국가유공자다. 일제(日帝) 때 도쿄 주오대(中央大)에 유학했고, 해방 이후 경찰에 투신, 간부로 재직했다. 6·25 당시 밀양전투에서 부상(負傷), 공직 생활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상이용사(傷痍勇士)로, 2003년 별세(別世) 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安葬)됐다.
 
  “원호(援護) 대상자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20대 후반부터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습니다.”
 
 
  소년 영웅
 
  축구에 눈을 뜬 건 한양대에 진학한 이후다. 박항서는 “키도 작고 재능도 출중하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축구 명문 경신고에서 축구 입문 6개월 만에 주전으로 도약하고, 축구 명문 한양대가 그를 스카우트했다는 건 전문가들이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는 증거다. 다른 증거들을 더 살펴보자.
 
  1974년 29회 청룡기 전국축구대회, 슈팅 수 23대 6의 압도적 경기를 펼치고도 득점에 실패한 경신고는 연장 7분에 터진 고1 박항서의 결승골로 무려 25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기를 품었다. 여자축구연맹 오규상(吳奎相) 회장, 전 올림픽팀 감독 이상철(李相哲), 전 인천유나이티드 사장 안종복(安鍾福) 등이 이때의 우승 멤버다. 《조선일보》는 1974년 11월 10일 ‘박항서, 수훈의 결승골’이라는 부제가 붙은, 지면의 반을 차지한 커다란 기사를 냈다. 박항서의 이름이 ‘큰 활자’로 인쇄된 첫 지면이다.
 
  고3이던 1976년, 박항서는 영등포공고와의 청룡기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득점, 경신고의 우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2대 0 승리. 추가골의 득점자는 차세대 대형 스트라이커로 불리던 오석재(吳錫載)다. 6월에 열린 대통령배 고교축구, 경신은 광운전공과의 3회전을 3대 0으로 이겼다. 주장 박항서는 2득점으로 대활약.
 
  《경향신문》은 1976년 6월 18일 기사 ‘스타플레이어’ 란에 ‘득점력이 뛰어난 링커 박항서’의 사진과 인터뷰를 실었다. 박항서의 생애 첫 단독 인터뷰 기사다.
 
  박항서가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登極)한 건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이후’라고 알고 계신 분들이 많다. 아니다. 1978년에 이미 그는 소년 영웅이었다.
 
  1978년 10월 26일 오후 8시30분(한국 시각)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벌어진 제20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 준결승. 대한민국의 상대는 북한이었다. 많은 국민이 축구가 남북 간 체제의 우열을 가름하는 대리전(代理戰)이라고 믿던 시절이다. 연장전까지 간 격전 끝에 벌어진 승부차기. 한국은 골키퍼 박영수(朴英洙)의 선방과 여섯 번째 키커 이태호(李泰昊)의 마무리 골로 6대 5로 이겼다. 모든 신문이 1면 상단 절반을 할애해 보도한 쾌거였다. 같은 날 발견된 제3 땅굴이 아니었다면, 1면 톱기사가 될 만한 뉴스였다. 이때 한국의 첫 번째 키커로 나섰던 선수가 주장 박항서였다. 이라크와 공동 우승을 차지한 소년들은 김포공항에 내려 카퍼레이드까지 가졌다.
 
 
  “축구가 제 밥벌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2019 동아시안(SEA)게임 남자 축구에서 60년 만에 베트남이 우승하면서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의 국민영웅이 됐다. 사진=조선DB
  대학 졸업 후 제일은행 축구팀에 입단하고(1981년), 얼마 후 육군에 축구 선수로 입대, 3년을 복무했다(1981~1984년). 제대하니 그사이 프로축구가 생겼다. 1983년 할렐루야, 유공 등 2개의 프로팀에 대우, 포항제철, 국민은행 등 3개의 실업축구단이 결성한 슈퍼리그가 흥행몰이를 하자 이듬해 럭키금성(현 서울 FC), 현대(현 울산 현대)가 프로팀을 창단했다. 박항서는 럭키금성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프로 선수로서는 1985년 우승, 주장으로 활약한 1986년 준우승 등의 업적이 있다. 1988년까지 딱 다섯 시즌만 뛰고 은퇴, 30대 초반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는 나이 서른을 넘은 선수가 거의 없던 시절이죠. 은퇴할 때 중학교에서 감독 겸 교사로 오라는 제의가 있었는데, 안 갔습니다. 제 성격이 교직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교사이던 지금의 아내(최상아)에게 첫눈에 반해 압박 수비를 하는 심정으로 밀착 마크, 결혼에 골인했다. 가정을 꾸렸으니 가장(家長)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럭키금성 코치로 들어갔다.
 
  “축구가 제 밥벌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은퇴에 후회는 없어요. 지도자가 되어 보니까, 제가 얼마나 재능이 부족한 선수였는지 알겠더라고요. 저는 생계형(生計型) 축구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으니, 축구가 제 천직이죠.”
 
  프로팀 지도자, 2002년 월드컵 수석코치 등을 거쳐 2017년 10월 박항서는 베트남 축구팀 감독으로 부임한다. 외국인 감독의 평균수명이 8개월밖에 안 되던 곳에서 박항서는 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2018년), 아시안게임 축구 4위(2018년), 동남아시아 축구선수권 대회(스즈키컵) 우승(2018년), AFC 아시안컵 8강(2019년), 동남아시안게임 우승(2019년, 2021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최종 예선 진출(2022년) 등 혁혁한 업적을 세웠다. 그는 베트남 축구의 역사를 새로 썼다. 기쁨에 넘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베트남!’을 연호하면서, 박항서호는 베트남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성취가 훌륭한 한국인, 베트남 코치, 그리고 재능 있는 선수들을 만난 ‘행운의 결과’라고 말한다.
 
 
  성공 요인
 
  ― 가장 큰 성공 요인은 무엇입니까.
 
  “첫째, 베트남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한 것, 둘째 스태프들을 조직화하고 전문화한 것입니다.”
 
  ‘스포츠는 과학이다’라는 말이 있다.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과학적으로 검증해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2002년 전까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죠. 의무팀, 피지컬 코치, 비디오 분석관 등이 없었습니다. 이런 인력이 꼭 필요한데, 베트남은 아직 그 수준까지는 다다르지 못했어요. 감독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구조였습니다. 전문가가 전문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들면 그 팀은 강해집니다. 신규 인력을 고용하면 인건비가 추가로 들어가니까, 기존 인력을 활용하고 있어요.”
 
  베트남 코치 중 컴퓨터에 능숙한 인력에게 ‘당신은 코치 겸 분석관’이라고 했다. 대한축구협회 홍명보 당시 전무에게 지원을 요청, 대한축구협회 분석관이 베트남으로 날아와 2박 3일간 노하우를 전수해주기도 했다. 베트남 체육부에는 전 종목 국가대표팀을 담당하는 의료팀이 있었다. ‘통일성·일관성이 중요하니 축구팀에는 늘 오시는 분이 고정으로 오면 좋겠다’고 했다. 새 인물이 오면 팀 사정을 알려주는 작업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 분이 4년째 대표팀과 함께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함께한 최주영 의무팀장을 베트남 대표팀으로 초빙, 현장 지휘를 맡기기도 했다.
 
 
  전문가 존중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인지하면, 임무 세분화가 가능합니다. 전문가를 전문가로 존중하고 대우하면, 모든 사람이 명확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팀을 위해 기여합니다. 시너지가 일어나요. 세밀하게 준비하면 그만큼 이길 확률이 높아집니다.”
 
  전문가 존중은 경기장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해외 원정 일정이 잡히면 주방팀과 사전 미팅을 하고 메뉴를 정한다. 그리고 주방팀을 선수단 도착 2~3일 전 현지로 파견해 변수(變數)를 줄인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부상자를 언제 의무팀에서 피지컬팀으로 넘기느냐를 두고 다른 의견이 나온다고 하자. 감독의 역할은 양쪽의 의견을 듣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합의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최대로 권한을 주고, 최종 조정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아직 완벽하지 않아요. 하지만 한국의 발전 과정과 마찬가지로, 베트남도 경제 성장을 하면 보다 많은 전문인력을 대표팀에 지원해줄 수 있을 겁니다. 팀을 전문화·세분화해서 운영하는 것, 이 시스템을 남겨주는 것이 제가 베트남 축구를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프로팀과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언젠가, 누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후임 감독에게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도 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솔선수범
 
박항서 감독은 지도자의 솔선수범을 강조한다. 사진=베트남축구협회
  ― 베트남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했다는 건 어떤 이야기입니까.
 
  “2002년 히딩크 감독을 모시면서, ‘외국에 감독으로 나간다면 이런 점이 중요하겠구나’, 느낀 바가 있었어요. 베트남 코치들에게 ‘베트남 축구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대들이다. 나한테 맡기지 말고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으라’고 했죠.”
 
  쌀국수는 베트남의 국민 음식이다. 하지만 축구 선수들에겐 보다 고열량의 음식이 필요하다. 박 감독은 ‘먹지 마라’고 하는 대신 베트남축구협회에 지원을 요청했다. 베트남 영양학 최고 권위자를 불러 강의를 부탁했다. 선수들은 그런 교육을 처음 받아본다고 했다.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이제는 선수들이 먼저 우유를 마시고 자발적으로 섬세하게 몸을 돌본다.
 
  “처음엔 낮잠 문화도 이해 불가였어요. 그런데 제가 겪어보니까 더울 땐 쉬는 것이 효율적이더군요. 지금은 저도 낮잠을 잡니다. 연습 시각을 늦추면 효율이 더 높아져요. 현지 문화를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선택입니다.”
 
  솔선수범(率先垂範)은 박항서가 생각하는 지도자의 최고 덕목 중 하나다.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죠. 선수단과 동화(同和)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부임 초에 선수들에겐 베트남 음식을 주고, 저에게는 한식, 스테이크 등을 주더군요. 저한테야 당연히 한식이 좋죠. 하지만 선수들과 똑같은 음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안 보는 것 같지만, 선수들은 언제나 감독을 보고 있거든요. 제가 한식을 먹으면, 저와 선수들 사이에 조그만 심리적 벽이 생기죠. 그건 팀에 마이너스가 됩니다. 지금은 베트남 음식을 제가 좋아서 먹습니다.”
 
 
  ‘우리는 베트남이다!’
 
박항서 감독은 선수들과의 토론을 통해 ‘베트남 정신’을 도출해냈다. 사진=베트남축구협회
  ‘전문화, 세분화’ 전략은 선수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자발적 의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박 감독이 활용하는 방안이 있다. ‘분임토의’다.
 
  “대회 전에 30명 팀원을 세 그룹으로 나눕니다. 각 조(組)마다 스스로 조장을 뽑아서 토의를 하죠. ‘우리 팀의 목표는 무엇인가’ ‘목표를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각자가 팀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등을 토의하도록 합니다. 합숙 전에 선수단이 다 모여서 조별로 토의 내용을 발표해요. 이렇게 하면, 선수단 모두가 공통의 목표를 설정하게 되죠. 선수들 스스로가 책임감을 느끼고 의무를 이행합니다.”
 
  ‘우리는 베트남이다!’로 정리한 베트남 축구팀의 슬로건도 분임토의의 결과물이다. 2018년 중국에서 열린 AFC U-23 챔피언십에서 베트남이 승승장구하자 베트남 언론이 ‘베트남 정신이 살아났다!’고 했다. 눈이 내리는 추운 날씨 속의 거듭된 연장전, 연이은 연장전에 체력이 소진되었는데도 베트남은 기어이 승부차기로 상대를 꺾으며 결승전까지 내달렸다. 박 감독은 선수들이 자랑스러웠다.
 
  “결승에 오르는 과정이 숱한 강대국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킨 베트남 역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정신이 뭐냐?’라고 묻고, ‘난 한국 사람이니 잘 모른다. 너희가 알려달라’고 했죠. 분임토의를 통해 선수들이 ‘첫째, 단결심, 둘째 자존심, 셋째 영리함, 넷째 불굴의 투지’가 ‘베트남 정신’이라고 정리했어요. 이 네 가지는 축구와도 연관됩니다. 축구는 단체 경기라 단결심이 필요하고, 대표 선수는 자존심이 있어야 하며, 경기 운영은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영리하게 해야 하니까요.”
 
  어쩌면 박항서 감독의 다음 전략은 제1차 베트남 전쟁(1953년)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전쟁 영웅 보응우옌잡(1911~2013년) 장군의 3불전략(3不戰略)일 수도 있겠다. 상대가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고, 상대에게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지 않고, 상대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싸워 이기는 전략이다.
 
  과학적 방법론으로 실력을 배양하고, 넉넉한 지원과 전문인력의 헌신, 베트남 정신이 서로 시너지를 내면 베트남 축구는 어쩌면 다음 월드컵 예선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할 수도 있겠다.
 
 
  “2002년보다 戰力 더 낫다
 
  ― 2022년 월드컵, 한국팀 성적을 전망해주십시오.
 
  “결승까지도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만…. 2002년엔 유럽 리거가 안정환·설기현 딱 둘이었죠. 지금은 손흥민을 비롯, 유럽 리그에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활약한 선수들이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선수들의 능력과 경험인데, 우리 대표팀은 경쟁력이 충분해요. 대한축구협회의 지원도 흠잡을 데 없고, 벤투 감독의 역량과 네트워크도 세계적 수준이라고 봅니다. 2002년과 비교하면 전력(戰力)이 더 나아요. 운이 따라준다면, 4강 가지 말란 법이 없죠. 또 하나, 우리에게는 손흥민이라는 탁월한 선수가 있으니까요.”
 
  ― 손흥민 선수를 둘러싸고 월드클래스 논쟁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 리그 EPL 득점왕이 월드클래스가 아니면 누가 월드클래스입니까? 손웅정 감독이나 손흥민 선수 본인은 겸손의 뜻으로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기록이 모든 걸 딱 보여주잖아요? 저는 이러한 논쟁이 일어난다는 자체가 안타까워요. 손흥민 선수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는 거니까요. 손흥민 선수는 한국 축구의 보물입니다. 한국 축구에 오랫동안 기여할 수 있도록 잘 보듬어야 합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논쟁은 그만했으면 합니다.”
 
 
  판단 착오
 
  ― 다시 베트남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국가주석이 박 감독님을 주석궁으로 초대해 한글로 ‘백순정 여사님 만수무강 기원합니다’라고 적힌 글귀와 장수할 ‘수(壽)’자가 새겨진 액자를 증정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국회의장도 선물을 주었다죠? 베트남에서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베트남에서 5년 동안 가장 기뻤던 순간, 그리고 이것 하나는 되돌리고 싶다 하는 순간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기뻤던 순간은, 모든 대회가 다 소중하죠. 가장 아쉬운 순간은 딱 집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언제인가요.
 
  “2019년 12월 필리핀에서 동남아시안게임이 있었죠. 축구는 각국의 23세 이하 대표팀이 출전했습니다. 그 대회에서 60년 만에 우승했는데, 다음 대회에선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어요. 제 판단 착오로 벌어진 일입니다.”
 
  ― 어떤 착오가 있었나요.
 
  “일단은 동남아시안게임 우승 후 제가 교만했고, 선수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온 것이 실수였습니다. 우승 후 행사도 많아 통제된 환경에서 선수들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려고 한 것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베트남에서 선수들이 ‘우승’의 기쁨을 더 누리도록 하는 것이 옳았어요. 승리감을 만끽하면서도 얼마든지 통제 가능했는데, 한국으로 데리고 오니까 리듬이 깨졌어요. 제가 선수들의 성취감을 차단한 겁니다. 동기부여를 하고, 선수들이 더 능력 발휘를 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베트남 국민과 미디어의 높아진 기대 수준에 맞추려다 보니 스트레스가 늘고, 그래서 결단한 일인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언론과 갈등마저 생겼다. 월드컵 최종 예선 때도 패인(敗因)을 분석하는 글이 실리고, 선수 기용, 교체 타이밍 등에 대해 부정적인 논평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면 온전히 책임을 지는 것이 모든 감독의 숙명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이끈 명장(名將) 알렉스 퍼거슨 경(卿)은 ‘프로축구단은 매주 주주(株主)총회를 여는 기업과 같다’라고 했다. ‘경기력’이라는 팀의 실력이 정기적으로 대중에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스코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자국 언론이 진 팀 감독을 공격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경기 결과에 따른 비판적인 기사와는 별개로, 얼마 전 마음고생을 했다는 보도도 궁금했다.
 
  ― 일부 국내 유튜버들이 베트남축구협회와 박 감독님 사이에 불화가 있다, 갈등이 생겼다,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등등 온갖 얘기를 노출했습니다. 진실은 뭡니까.
 
  “갈등은 전혀 없고요, 협회와 저는 잘 소통하며 협조하고 있습니다. 일정 문제 등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다 사소한 것이지 심각한 문제는 전혀 없어요. 일부 유튜버들이 사실과 동떨어진 왜곡된 내용을 자꾸 올리던데, 조금 자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심지어는 한국말이 어색한 유튜버가 갈등설을 올리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내용 대부분이 사실무근이에요.”
 
  ― 실제로 그런 유튜버들 때문에 업무 수행에 지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 지인들이 보고 저한테 알려주는데, 저는 잘 안 봅니다. 제 업무에는 별 지장이 없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면 문제가 많은 거죠.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제해줬으면 좋겠어요.”
 
 
  “人性교육 중요”
 

  ― 동남아시아에 먼저 진출한 선배로서, 인도네시아 대표팀 신태용 감독, 말레이시아 대표팀 김판곤 감독에게 조언해주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제가 그 친구들한테 조언해줄 건 없습니다. 다 훌륭한 감독이니까요. 이미 모두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좋은 축구 감독이란 어떤 감독입니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죠. 대표팀 감독이라면 결과를 내는 감독이 좋은 감독이고, 유소년팀 감독은 육성과 인성(人性)교육을 잘 해야죠.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는 선수 관리, 전술적인 면을 종합적으로 봐야 하죠. 목표를 이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언제 어떤 방법을 택하는지도 감독의 능력입니다.
 
  육성하는 지도자는 결과물을 내는 것보다 선수들의 기술적인 부분, 인성적인 부분을 병행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선수가 성장하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기 관리를 잘 하도록 도움을 줘야죠. 가정에선 가정교육이, 회사에서는 업무교육이 필요한 것처럼, 유소년 축구 선수들에게는 인성교육이 꼭 필요합니다. 축구 선수들은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가 인생의 절정(絶頂)이잖아요? 그래서 성장하면서 어떤 자기 관리가 필요한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절제력이 왜 필요한지를 가르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래야 은퇴 이후에도 보람 있게 살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베트남 유소년 선수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각 분야의 베트남 전문가들을 모셔다가 심신(心身)이 건강한 선수들을 기르는 겁니다.”
 
 
  “연말 미쓰비시컵 정상 탈환이 목표”
 
  ― 중요한 말씀입니다. 마무리 질문입니다. 앞으로 남은 목표나 꿈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단기적으로는 연말 미쓰비시컵(구 스즈키컵)에서 정상을 탈환하는 겁니다. 2018년 대회에서 10년 만에 우승해 베트남 국민께 큰 기쁨을 드렸는데, 지난 대회 때는 준결승에서 태국에 져서 2연패(連霸)에 실패했잖아요? 이번에 빚을 갚아야죠. 장기적으로는, 저는 축구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 어떤 일을 맡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긴 인터뷰가 끝났다. 박항서 감독은 축구 지도 방법을 수출한 감독이 아니었다. 꿈, 희망, 선진 문명, 그리고 한류(韓流)를 종합적으로 전파(傳播)한 우리 시대의 ‘구루’였다. 그가 보여준 결과 덕분에, 지난 5년간 베트남 국민들은 한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도 더불어 행복했다.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옆에 있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모두 박항서가 만들어낸 현상이다. 행복은 전염성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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