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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나이 오십에 ‘자전거 여행가’로 변신한 차백성

“좋아하는 일을 해서 후회 없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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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세 때 대우건설 상무로 퇴직, 자전거로 미국·일본·유럽 등 33개국 5만 km 여행
⊙ 어린 시절 《김찬삼 세계여행기》 보면서 자전거로 세계여행하는 꿈 꾸기 시작… 高1 때 서울-대구 자전거 여행
⊙ 1976년 대우건설 입사, 수단 발령받자 한여름에 내복 입고 다니면서 酷暑 대비 훈련
⊙ “자전거 타고 세계여행하는 꿈 이루려면 다리에 힘이 그나마 있을 때 해야 한다”
⊙ “자전거 여행 때에는 먹고 자고 입는 것은 최소화, 보고 듣고 만나는 것은 최대화”
⊙ “자전거 여행을 나갈 때마다 태극기와 그 나라 국기 달고 달려”
일본의 어느 야영장에서. 사진=차백성 제공
  공무원이나 공사 같은 ‘신(神)이 내린 직장’에 다니지 않는 한 나이 오십이 넘어가면 직장인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직장에서 자기 위치가 한계에 도달한 것이 느껴지고, 아래위에서는 ‘넌 언제 나갈 거냐?’며 눈총을 준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직장을 그만둔 후의 삶, 정확히 말해 생계를 생각하면 막막해진다. 자녀들의 대학 입학이나 결혼 등으로 큰돈 들어갈 일도 많다. 결국 악착같이 직장에서 버텨내려고 발버둥 친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동안의 경력을 바탕으로 다니던 곳보다 한두 단계 낮은 레벨의 직장에서 다시 몇 년간 직장 생활을 이어간다. 설사 잘나가는 대기업 임원이라 해도 이런 서글픈 궤적은 별반 다르지 않다.
 
차백성씨는 지금까지 네 권의 자전거 여행기를 냈다.
  직장인들의 이런 빤한 스토리에 반기(反旗)를 든 사람이 있다. 그는 대우건설 상무까지 올라갔지만 우리 나이로 오십 세가 되자 사표를 던졌다. 그러고 어려서부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나섰다. 그 꿈은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달려보겠다는 꿈이었다. 20여 년 동안 미국을 종횡(縱橫)으로 달렸고, 터키에서 아일랜드에 이르는 유럽, 그리고 일본을 누볐다. 그동안 여행한 나라는 33개국, 자전거로 달린 거리는 5만 km가 넘는다(열차나 버스로 이동한 거리까지 합치면 10만 km에 달한다). 참고로 지구의 둘레(적도 둘레)는 4만75km이다. 그동안의 자전거 여행담을 엮은 책도 네 권이나 냈다. 《아메리카 로드》(2008년), 《재팬 로드》(2010년), 《유럽 로드》(2014년), 그리고 금년 1월에 펴낸 《자전거 백야기행》이 그 책들이다. 우리나라 자전거 여행가 1세대로 꼽히는 차백성(車白星·71)씨의 이야기다.
 
 
  《김찬삼 세계여행기》
 
故 차영근 교수.
  서울 마곡나루역 근처 인터뷰 장소에서 만난 차백성씨는 헬멧과 고글까지 갖춘 사이클링 복장이었다. 그곳에서 자전거로 20여 분 거리인 자택에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 자전거에 관심을 갖게 됐느냐’고 묻자 그는 선친(先親)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선친은 차영근 전 한국외국어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일제(日帝) 시대에 만주 하얼빈대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했지만 해방으로 인해 졸업은 하지 못하고 귀국한 선친은 독학으로 영어와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6·25 때는 미군부대 통역으로 일했는데, “차영근이는 미국인보다 영어를 더 잘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문맹(文盲)인 미군 병사들이 고국에 있는 아내나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신 써주면서 생긴 소문이었다. 문교부 학무국에 잠시 근무하다가 1954년 한국외국어대학이 생기면서 노어노문학과 교수(전임강사)가 됐다. 대구 소년 차백성과 온 가족이 상경(上京)한 것은 이듬해인 1955년이었다.
 
  소년 차백성이 10세 때인 1961년 아버지는 하버드대 교환교수가 되어 미국에 갔다. 아버지를 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2년 후 미국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차백성씨는 “아버지의 죽음은 이후 제 인생관(人生觀)에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인생은 길지 않다는 것,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나이 오십에 직장을 그만두고 자전거 여행가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활은 어려웠지만, 아버지가 교수였던 덕분에 집에 책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책이 《김찬삼 세계여행기》였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파리의 에펠탑과 개선문, 로마의 콜로세움이 어린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高1 때 서울-대구 자전거 여행
 
  자전거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이었다. 5환(1953~ 1962년 화폐 단위)을 내면 30분, 10환을 내면 1시간을 빌려서 탈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게 있나’ 싶었다.
 
  “얼마 전에 비토리오 제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 도둑〉을 봤어요. 제2차 세계대전 후 피폐한 이탈리아의 모습을 그린 영화인데, 제 어린 시절 생각이 나더군요. 그때는 아이들을 속여서 자전거를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이들에게 자전거 좀 빌려오라고 유혹한 후 자기가 잠깐 타보겠다고 하고 그대로 달아나는 거죠.”
 
  중1 때 ‘내 자전거’가 생겼다. 그것도 ‘미제(美製)’였다. 군인이었던 이모부가 주한미군 장교가 넘기고 간 자전거를 조카에게 준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내던지고 자전거를 탔어요. 문득 《김찬삼 세계여행기》에서 봤던 외국의 풍광들이 떠오르면서 ‘자전거를 타고 세계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전거 여행’이라는 꿈은 그냥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까지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지고 대구까지 내려가는데 3박 4일 걸렸어요. 평택에서 첫날밤을 잤고, 옥천에서 다음 날 밤, 김천에서 셋째 날 밤을 잔 후 나흘째에 대구에 도착했어요.”
 
  ― 식사와 잠은 어떻게 해결했나요.
 
  “끼니는 10원짜리 삼립 보름달 빵으로 때웠고 잠은 여관을 찾아갔어요. ‘○○고등학교 학생인데 서울에서 대구까지 자전거 여행 중’이라고 말하니, 주인은 ‘부모님 허락은 받았느냐’고 물어보고, ‘허락을 받았다’고 하니 대견해하면서 잠을 재워줬어요. 김천에서는 주인이 자기 가족과 아침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더군요. 저는 사례로 마당을 쓸어주고 나왔습니다.”
 
  ― 그 시절에 정말 대단합니다. 길도 별로 안 좋았을 텐데….
 
  “1번 국도가 포장이 되기 전이었어요. 제게는 이때의 자전거 여행이 후일 미국 종단(縱斷)보다 더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후일 제가 자전거 여행가가 되어 이름을 알리니까 친척들이 ‘쟤는 어려서부터 알아봤어’라고 하더군요.”
 
 
  기자의 꿈
 
  청소년 시절 차백성의 꿈은 기자였다. 워싱턴 특파원이나 전쟁터를 누비는 종군기자가 되고 싶었다. 적성도 문과(文科)였다. 수학보다는 국어가, 물리·화학보다는 영어가 재미있었다. 하지만 기자는 경쟁률이 100대 1이 넘었다.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야 했고, 그러자면 이공계 대학으로 진학해야 했다. 한국해양대학에 진학, 세계를 누비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위험하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결국 선택한 곳이 인하공대 토목공학과였다. 공대라고 하면 연·고대보다 더 인하공대를 알아주던 시절이었다.
 
  군대는 ROTC 장교로 춘천에 있는 2군단 예하 공병여단에서 근무했다. 첫 월급은 1만5000원이었다. 그중 1만원을 털어서 삼천리 자전거를 샀다. 마음 같아서는 춘천에서 서울까지 달리고 싶었지만 위수(衛戍) 구역인 가평까지 갔다가 아쉽게 자전거를 돌리곤 했다.
 
  북한의 남침 땅굴이 많이 발견되던 시절이었다. 7사단 관할 DMZ 지역에 측량 장교로 땅굴 탐지 작업을 하기 위해 들어갔다.
 
  “땅굴 수색 작업을 하러 DMZ로 들어가기 전에 행정장교가 유서를 쓰고 들어가래요. 화가 나더군요. 유서에 ‘××× ×× ××. 차백성’이라고 욕설을 써서 냈더니 행정장교가 확 찢어버리면서 ‘차백성이 너, 겁도 없구먼!’이라고 하더군요. ‘그래, 죽으러 가는데 내가 겁날 게 뭐 있겠소’라고 대꾸했죠.”
 
  땅굴 탐지 작업 중 눈앞에서 7사단 공병장교가 지뢰를 밟아 산산조각이 났다. 사단장이 달려와 시신 앞에서 군모를 벗고 “내 부하 죽었다!” “내 부하 죽었다!”면서 땅을 치며 울었다. 사단장은 하소곤(河小坤) 소장. 12·12사태 당시 육군본부작전참모부장으로 있다가 신군부 측 병력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때를 비롯해서 인생을 살면서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어요. 운이 좋아서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기업에 들어가서 상무까지 올라가고,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도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와서 책도 네 권이나 냈으니, 참 행복한 인생입니다.”
 
 
  대우 입사
 
1979년 대우는 ‘새한버드’라는 브랜드로 소형차 2000대를 수출했다. 차백성씨는 그중 한 대를 몰고 포트수단을 출발, 1650㎞를 달려 카르툼의 딜러에게 전달했다. 이 사실은 수단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고 ‘새한버드’는 인기리에 팔려나갔다.
  1976년 중위로 제대하면서 동시에 대우개발(대우건설)에 공채 1기로 입사했다. ROTC 출신이라면 충성심과 리더십이 있다고 해서 기업들이 열심히 뽑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우그룹이 작은 회사여서 신입사원 뽑을 때 김우중(金宇中) 회장님이 심사위원장으로 직접 나와서 면접을 봤어요. 김 회장님의 첫 질문이 뜻밖에도 ‘아버지는 뭐 하셨나’였습니다. ‘대학교수셨는데 미국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니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하더군요. 나중에 교육자였던 김 회장님 부친이 6·25 때 납북(拉北)되었고, 생활이 어려워서 김 회장님이 신문 배달을 하면서 고학(苦學)을 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마 김 회장님은 나를 보면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情)을 느꼈던 것 같아요. 또 ‘아버지가 대학교수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다’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입사 이듬해 26세 청년 차백성은 아프리카 수단으로 파견됐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수단에 대해서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친구들은 “그곳은 수단(手段)이 좋아야 살아남을걸!”이라며 농담을 던졌다.
 
 
  ‘여름 내복’
 
  수단의 수도(首都) 카르툼은 여름철 평균 기온이 섭씨 42도인, 지구상에서 가장 더운 수도로 알려져 있었다. 일보다는 그 혹서(酷暑)를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차백성은 그때 어린 시절의 ‘멘토’였던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이 남극 탐험을 앞두고 영하 50도의 혹한(酷寒)에 대비해 훈련 삼아서 오슬로의 집에서 겨우내 창문을 열고 팬티만 입고 잤다는 얘기를 떠올렸다. 차백성은 역발상(逆發想)을 했다. 수단으로 나가기 전, 그해 여름 내내 겨울 내복을 입고 다녔다.
 
  “수단으로 나갈 무렵이 되자 ‘사람이 이상해졌다’ ‘독하다’ 하는 얘기가 사내에 돌더군요.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들이 내 인생 대신 살아주는 건 아니니까’ 하는 생각이었지요. 지금도 저는 해외 장거리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당시 수단 출국을 앞두고 ‘여름 내복’을 입었던 마음가짐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야만 힘든 여행에서 소기의 목적을 거두고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죠. 사소한 것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이 준비하는 정신은 대우 시절에 체득한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많이 읽었던 《김찬삼 세계여행기》의 저자 김찬삼 교수에게도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다. 김 교수는 “그곳에는 말라리아가 창궐하니 모기약을 충분히 챙겨가라”고 일러줬다.
 
 
  ‘IBM의 나라’
 
  당시 대우개발은 수단의 수도 카르툼의 청나일강과 백나일강의 합수(合水) 지점(차백성씨는 ‘양수리’라고 표현했다)에 영빈관(迎賓館)을 짓고 있었다. 지상 12층, 지하 1층, 객실 200개 규모의 이 영빈관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차백성이 맡은 일은 자재 조달이었다. 현지에서 조달하는 모래와 자갈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자재를 실어가야 했다. 수단의 항구는 포트수단이 유일했다. 이 항구는 1956년 수단이 독립한 후 한 번도 수리하지 않아 하역(荷役) 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생필품을 실은 선박이라고 해도 접안(接岸)을 하려면 외항(外港)에 닻을 내리고 순서를 기다려야 했는데, 한두 달 기다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수단은 다른 이슬람국가들과 마찬가지로 ‘IBM의 나라’였습니다. 수단인들은 늘 인샬라(Inshalla·신의 뜻대로), 부크라(Bukra·내일), 말레이시(Maleisi·미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공무원이건 기업이건 같이 일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일본 유수의 해운회사인 니폰유센(日本郵船)은 포트수단에서의 접안 순서가 대우보다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접안 순서가 뒤로 밀린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금전적 손실을 의미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주재하던 니폰유센 중동본부장이 본사의 지시를 받고 포트수단으로 달려와 알리 말리크 포트수단 항만청장을 만났다. 항만청장은 접안 순서를 당겨달라고 요청하는 그에게 뜬금없이 “남한의 대우에서 온 모하메드 이브라임 마무드 씨를 만나보라”고 했다.
 
  니폰유센 중동본부장은 포트수단의 레드씨호텔에 묵고 있는 모하메드 이브라임 마무드를 찾아갔다. 모하메드 이브라임 마무드는 바로 청년 차백성이었다. “접안의 비법을 알려달라”는 니폰유센 중동본부장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결은 없다. 다만 몇 가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말해줄 수 있다. 숫자와 요일, 음식 이름 등은 물론 상용(常用) 단어를 하루에 10개씩 외운다. 수단인들의 길고 다정한 ‘인사예절’에 대해서 익숙해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 삶에 근간이 되는 종교, 이슬람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일본인도 놀라게 한 차백성식 ‘수단化’
 
수단 근무 당시 차백성씨는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현지인 복장을 하고 다니는 등 자신을 철저히 현지화했다. 옆은 싸디크(절친)이던 포트수단 항만청장 알리 말리크.
  니폰유센 중동본부장은 그에게 들은 얘기를 ‘수단인과 친구가 돼라’는 제목으로 자사(自社) 사보(社報)에 실었다. 그 내용의 일부다.
 
  〈내가 담당하는 일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수단화(Sudanization)’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우선 나의 이름은 ‘미스터 차’가 아니라 ‘모하메드 이브라임 마무드’이다. 그리고 나의 종교는 이슬람교다.
 
  머리에는 ‘엠마(작은 아랍식 모자)’를 쓰고 터번을 두른다. 그리고 ‘젤라비아’라는 흰색 전통의상을 입고 거리를 다닌다. 금요일이면 모스크에 가 영어판 코란을 들고 예배를 본다. 식사도 맨손(오른손)으로 하고 소변도 (현지인들처럼) 앉아서 해결한다. 한국식으로 그들의 애경사(哀慶事)에 전부 참석한다. 수단인들은 본성이 순박하지만 자존심이 강해 사귀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단 ‘싸디크(친구)’가 되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준다.〉
 
  ‘수단화’를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 감탄한 것은 니폰유센 중동본부장뿐만이 아니었다. 포트수단 항만청장도 그에게 반했다. 항만청장에게는 스물두세 살쯤 된 딸이 있었다. 영국의 명문대학을 나온 재원(才媛)이었다. 항만청장은 ‘모하메드 이브라임 마무드’에게 딸을 주겠다고 했다.
 
  “솔직히 저는 생각이 없지 않았어요. 어려서부터 세계를 떠도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거죠. 김우중 회장님은 제가 그렇게 해서 현지에 뿌리를 내리면 수단에서의 사업이 더 잘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어머니 귀에도 들어갔어요. 어머니가 ‘김 회장님을 만나서 얘기하겠다’고 펄펄 뛰시는 바람에 그 결혼은 없던 일이 되었어요. 하하하.”
 
 
  ‘아라비아의 로렌스’
 
1977년 가을 영빈관 공사장을 찾은 니메이리 수단 대통령(가운데 지팡이 짚은 사람). 오른쪽에서 두 번째 헬멧 쓴 사람이 차백성씨.
  간신히 하역을 하더라도 포트수단에서 1650km나 떨어져 있는 카르툼까지 화물을 옮기는 일도 쉽지 않았다. 철도는 협궤(狹軌)인 데다가 낡았고, 부족한 화차(貨車)는 배당받기조차 힘들었다. 결국 ‘로리’라고 하는 20톤 트럭을 10~15대쯤 수배해 육로(陸路)로 운송해야 했다. 길은 대부분 비포장이었고, 어쩌다 비가 와서 도로가 수렁으로 변하면 며칠씩 통행을 할 수 없었다. 중간에는 500km의 누비아사막이 있었다. 기간은 보통 닷새 정도 걸렸다.
 
  “우리가 자재를 가져다주지 않으면 공사가 진행될 수 없었어요. 공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포트수단에서 카르툼까지 자재를 운반하는 일이었어요. 트럭 한 대당 기사와 1~2명의 조수가 따라붙었으니 한 번에 서른 명 정도가 움직였지요. 군대 시절 소대장을 하듯이 수송단을 이끌었습니다. 그때는 마치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나이에 어떻게 그 일을 해냈는지 모르겠어요.
 
  하붑이라고 하는 모래폭풍이 불면 대낮에도 라이트를 켜야 했어요. 이렇게 말하면 ‘꼰대’ 소리 듣겠지만, 그때 사막에 나가서 모래바람 마시면서 일한 사람들이 오늘날 대한민국 부(富)의 토대를 닦은 것입니다. 저도 처음 수단에 갔을 때에는 3년 동안 휴가 한 번 없이 일했어요.”
 
  배에서 구해온 라면을 먹는 게 유일한 낙이었지만, 이동 중에는 깨끗한 식수를 구하기 어려웠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었지만, 영화에서와 같은 맑은 물이 솟아나는 곳이 아니었다. 흙탕물에 가까운 양과 낙타와 인간이 함께 먹는 물이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그 물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현지인들이 ‘뻐띠흐’라고 하는 커다란 수박을 잘라 부수어서 물을 짜낸 후 그 물로 수분을 보충하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걸 ‘수박라면’이라고 불렀어요. 맛이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영빈관 건설은 니메이리 수단 대통령과 김우중 회장의 관심 사업이었다. 니메이리 대통령과 김 회장은 현장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니메이리 대통령 집무실에서는 영빈관 공사 현장이 보였어요. 타워크레인으로 매일 한 층씩 골조를 올리는 것을 보고서는 ‘쟤들은 하루에 한 층씩 올리네!’ ‘코리(한국인)들은 마법사인가 봐!’라며 감탄했대요. 대우가 처음 진출할 당시 수단은 한국과 미수교국이었는데, 대우의 활약에 힘입어 외교관계를 맺게 된 겁니다.”
 
 
  10년을 아프리카에서 보내
 
  청년 차백성은 수단에서 3년을 일하고 1980년 귀국, 결혼을 했다. 그리고 1983년에는 나이지리아 화학공장 건설 현장으로 가서 4년간 근무했다. 수단은 가난한 나라이기는 했어도 사람들은 순박했는데, 산유국(産油國)이어서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제법 살 만한 나라였던 나이지리아는 살벌했다. 무장강도의 습격이 다반사였고, 운전 중에 시비가 붙으면 총질을 했다. 주나이지리아 한국대사관에 강도가 든 적도 있었다.
 
  1987년에는 다시 수단으로 가서 3년을 근무했다. 대우무역 직원으로 현지 법인을 세우고 디스토마약 공장을 짓기 위해서였다. 수단에는 디스토마 환자가 많았다. 이번에는 가족과 함께였다.
 
  “당시 수단은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남수단과 내전(內戰) 중이었어요. 2011년 독립한 남수단은 고(故) 이태석 신부가 봉사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아이들과 난민촌을 찾아가서 ‘우리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런 비극을 겪게 된다’고 말해준 적도 있습니다.”
 
 
  김우중, “너, 자전거 타면서 밥은 먹냐?”
 
  ― 김우중 회장과는 자주 뵈었나요.
 
  “김 회장님은 수단에 애착이 많으셨어요. 수단에 왔을 때 자주 뵈었지요. 대우그룹이 몰락하고 난 후 베트남에 계시다가 일시 귀국하셨을 때에 《재팬로드》와 《유럽로드》 책을 갖고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무심코 ‘주인을 잃은 로닌(浪人)이 세상을 떠도는 심정으로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달리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좌중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실수한 거죠.
 
  김 회장님께서 ‘너, 자전거 타면서 밥은 먹냐?’고 하시더군요. ‘자전거 여행할 때에 식사를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인 줄 알고 ‘네. 캠핑하면서 식사합니다’라고 대답했죠. 옆에서 ‘그게 아니라 지금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는 말씀’이라고 일러주더군요.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고 했더니, 책을 훑어보시고는 ‘이 책들을 100권씩 사서 베트남(베트남에서 김우중 회장이 운영하던 창업사관학교)으로 보내라’고 하셨어요.”
 
  차백성씨는 “지금 생각하면 당시 경영자들은 직원들을 중시했고, 직원들에게는 근성, ‘깡’이 있었던 것 같다”면서 “지금 젊은이들은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겠지만 근성이 부족한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시절 10년을 수단과 나이지리아 현장에서 보냈다. 1990년 귀국한 후에는 국내 주택사업 등을 담당했다. ‘푸르지오’라는 브랜드가 만들어진 것도 그때였다. 1995년에는 이사, 1997년에는 상무가 됐다. 그리고 대우 입사 25년째인 2000년 그는 사표를 던지고 직장인 생활을 접었다. 왜였을까?
 

  “나이 오십(만 49세)이 되니 사추기(思秋期)가 왔어요. 원래부터 직장 생활을 인텐시브하게, 굵고 짧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해외 근무를 오래 했는데 당시 해외 근무를 하면 국내에서 근무할 때보다 2.5배를 받았어요. 요새는 1.5배를 받는다고 하던데. 오십이 되니 내가 하고 싶었던 일, 어려서부터의 꿈이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어려서부터 지내온 삶을 돌이켜보니, ‘내가 나 자신에게 훈장을 주고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는 생각과 함께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도 앞으로도 잘되겠지. 안 될 게 뭐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자녀 교육이나 결혼, 노후(老後) 대책 등을 생각하면서 몇 년은 더 일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그때 제 연봉이 9000만원 정도였는데, 몇 년 더 일하면 3억~4억원 정도는 더 모을 수 있을 것 같더군요. 하지만 저는 마음이 급했어요. 자전거 타고 세계여행하는 꿈을 이루려면 다리에 힘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 있을 때 해야 이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돈보다는 시간과 체력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 가족들은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지 않고 죽으면, 죽을 때 후회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아내, 아이들 모두 낙천적이어서 생활을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죽을 때 후회를 덜할 것 같아”
 
  ― 생활에는 정말 걱정이 없습니까.
 
  “빚 없이,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어느 고등학교에 강연을 갔을 때에 ‘아저씨, 뭘 먹고살아요?’라고 묻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내가 돈이 많았으면 이런 여행을 못 했어. 겨우 먹고살 수 있어서 이런 여행, 어려서부터 품어왔던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꿈이 가능한 거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 옛날 직장 동료들은 뭐라고 하나요.
 
  “대우나 다른 기업에서 사장까지 하고 나온 친구들도 이제는 자전거 세계여행을 하고 그에 대한 책을 네 권이나 낸 저를 보면서 ‘차백성이가 맞았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인생길에서 제가 그렇게 처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 후회가 없습니다. 죽을 때에도 후회를 덜할 것 같아요.”
 
 
  태극기와 그 나라 국기 함께 달고 달려
 
이베리아 반도 남단의 영국령 지브롤터에서. 해외여행 때에는 자전거에 태극기와 그 나라 국기를 단다.
  직장을 그만둔 것은 2000년이지만, 처음으로 자전거 여행에 나선 것은 2002년이었다. 2년 동안은 국내의 주요 국도들을 달리며 훈련을 했다. 수단에 나가기 전에 ‘여름 내복’을 입었던 것처럼.
 
  첫 자전거 해외여행은 미국 종단이었다. 월드컵이 끝난 후 시애틀에서 샌디에이고까지 한 달 동안 3000km를 매일 100km씩 달렸다. 자전거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달았다. 2004년 5~7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옐로스톤까지 미국 횡단(橫斷) 자전거 여행을 했고, 2007년에는 하와이 자전거 여행을 했다.
 
  “저는 해외에 자전거 여행을 나갈 때마다 태극기와 그 나라 국기를 달고 달립니다. 태극기를 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대한민국에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고, 그 나라 국기를 다는 것은 그 나라의 법을 준수하겠다는 다짐입니다.”
 
  2003~2006년에는 세 차례에 걸쳐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에 이르는 일본 전역을 돌았다. 이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일본 규슈 가고시마에 사는 조선 도공(陶工)의 후예 심수관(沈壽官) 선생을 찾아간 일이었다.
 
  “한국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라고 했더니 심수관 선생께서 ‘한국 젊은이의 기백이 살아 있다’면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하시더군요. ‘저도 오십이 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심 선생 비서가 ‘선생님은 누가 와도 자고 가라고 하는 일이 없다’면서 놀라워했습니다. 다음 날 휘호도 하나 받았습니다.”
 
유럽 여행 당시의 모습. 자전거에는 모두 7개의 패니어를 달고 달린다.
  그다음은 유럽이었다. 2010~ 2011년에는 3차례에 걸쳐 터키에서 시작해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독일,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지를 자전거로 달렸다. 2019년에는 6월부터 두 달여에 걸쳐 러시아, 발틱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노르딕 3국(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 ‘백야(白夜)의 나라’들을 여행했다.
 
  ―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힘든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먹고 자고 입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겠죠. 자전거를 타고 계속 달리기 위해서는 생리적 욕구를 최소화해야 하고, 그러려면 적게 먹어야 합니다. 될 수 있으면 에너지바 같은 것으로 끼니를 해결합니다. 대신 여행이 끝날 때쯤 해서 맛집을 찾아갑니다. 잠은 대개 텐트를 치고 자거나 공동숙소를 이용합니다. 호텔은 이용하지 않습니다. 고생을 해야 글이 나오는 법이죠. 기후의 변화에 대비해 두꺼운 옷, 얇은 옷 등이 필요하지만, 많이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최대한 절약을 해야 합니다. 대신 보고 듣고 만나는 것은 최대화해야죠.”
 
  ― 여행용 자전거는 일반 사이클과 같나요.
 
  “짐을 많이 실어야 하기 때문에 여행용 자전거는 일반 사이클과는 다릅니다. 앞에 서스펜션이 없는 대신 패니어(pannier·자전거 짐받이에 달 수 있는 가방)를 달 수 있게 되어 있어 수납공간이 모두 7개나 됩니다. 몇 개의 큰 덩어리로 분해하면 가방에 넣을 수 있지요.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조립하거나 숙소에 가서 조립합니다.”
 
  ― 사용하는 여행용 자전거는 얼마쯤 합니까.
 
  “요즘 수천만원짜리 자전거도 많지만, 제가 타는 것은 100만~150만원 정도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도 외국에 나가보면 제 자전거가 제일 좋은 것이더군요. 견고하고, 고장이 잘 안 나고, 부품을 교체하기 쉬운 자전거가 좋은 자전거지요.”
 
 
  “美여행, 30일간 300만원 들어”
 
  ― 가져가야 할 짐은.
 
  “아무리 절약한다고 해도 예비용 체인, 타이어, 튜브, 텐트, 코펠, 버너, 두꺼운 옷, 그리고 약간의 고추장 정도는 가져가야 하죠. 효자손과 이쑤시개까지 합치면 가져가야 하는 품목이 100여 가지나 됩니다.”
 
  ― 짐의 분량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출국할 때 보면 자전거 무게가 15kg, 기타 물품이 25kg쯤 됩니다. 거기에다가 현지에서 구입하는 식료품이 5~10kg 정도 되지요.”
 
  ― 자전거 여행 비용은 얼마나 듭니까.
 
  “전에 30일간 미국을 여행할 때에는 항공권 빼고 300만원이 들었습니다. 잠은 대개 캠핑장에서 잤는데 3달러를 내면 샤워까지 할 수 있고 식탁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식사는 슈퍼마켓에서 빵, 잼, 버터를 사다가 해결했습니다. 대신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다 관람했습니다. 모텔 같은 데서 자려고 하면 비용이 확 올라가지요.”
 
  어려움이 있으면 즐거움도 있는 법. 차백성씨는 자전거 여행의 즐거움으로 ‘인정(人情)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자전거 여행을 하다 보면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할까…. 아마 ‘저렇게 고생해가면서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드나 봐요. 미국 와이오밍주의 브로크백 마운틴 근처를 달릴 때였는데, 제 곁을 지나친 자동차 하나가 저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더군요. 거기까지 가서 보니 길가에 생수병 두 개가 놓여 있더군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여러 곳에서 했어요. 저를 보고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가더니 길가에 콜라를 놓고 간 경우도 있고요.”
 
  차백성씨는 “저도 여행 중에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꼭 도움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한번은 프랑스에서 자전거에 펑크가 나서 쩔쩔매고 있는 아가씨를 도와준 적이 있어요. 사례를 하려고 하기에 ‘오늘 내게 도움을 받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행(善行)이 순환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어에 약하다는 것 등을 이유로 여행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열정과 의지만 있으면 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자전거 여행자는 집시들의 밥’
 
  ―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도난이지요. 유럽에서는 ‘자전거 여행자들은 집시들의 밥’이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항상 자전거를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곳에 두어야 합니다. 자전거를 잃어버린 적은 없지만, 카메라 삼각대나 옷을 잃어버린 적은 있습니다.”
 
  ― 가장 위험했던 경험은.
 
  “일본 히메지로 갈 때였는데 해변에 텐트를 쳤더니 지나가던 노인이 ‘내일 태풍이 온다는데 제정신이냐’고 야단을 치더군요. 그 말을 듣고서 마을로 들어가 숙소를 구해서 잤는데, 그날 300mm의 폭우가 내렸어요. 해변에서 텐트 치고 잤으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그 노인은 내가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어서 하늘이 보내주신 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브롤터에서도 아찔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호텔비가 너무 비싸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이 근처에 펜션은 없느냐’고 물었어요. 꽁지머리에 50대쯤으로 보이는 그는 ‘내가 혼자 사는데, 빈방이 있으니 우리 집에서 묵어라’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하기로 했더니 그가 슈퍼마켓에 갔다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는 거예요. 그를 보내 놓고 보니 느낌이 안 좋아요. ‘남자 혼자 산다고 하는 집에 덜컥 들어갔다가 무슨 일을 당하면…’ 하는 생각이 확 들더군요. 그냥 자리를 떴지요.”
 
  ― 여행 중에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에스토니아의 한국 식당에서 만난 고려인 3세 세르게이 마가이라는 분입니다. 연해주에 살다가 스탈린의 강제이주 때 우즈베키스탄으로 추방된 고려인의 손자였지요. 저와 동갑인 그에게서 강제이주 당시의 참상을 들었는데 나라 없는 설움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또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좀 충격적인 얘기를 했습니다.”
 
  ― 무슨 얘기인가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기에 망정이지, 만약 러시아가 이겨 그들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카레이스탄’으로 전락해 아마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한국인으로서 정서적으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였지만,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와 러시아를 전전하던 끝에 에스토니아에 정착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체험자인 그의 말도 한 번 곱씹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버지가 가고 싶어 했던 러시아의 카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리테라투르노예 카페. 푸시킨 등 러시아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다.
  33개국을 누빈 자전거 여행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어디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소 뜻밖이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리테라투르노예 카페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1816년에 문을 연 곳인데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비롯한 당대 러시아 문인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습니다.”
 
  ― 그곳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가 있습니까.
 
  “노문학자였던 아버지께서 생전에 무척 가보고 싶어 하셨던 곳이었거든요.”
 
  하버드대에 교환교수로 가 있던 아버지 차영근 교수는 어린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방학이 되면 미국 학생들은 교수들과 함께 러시아로 연수를 떠나지. 모스크바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하지만 내 여권으로는 갈 수가 없으니 하루에 두 번씩 와이드너도서관에 가 푸시킨의 책을 읽는다. 정말 쓸쓸하구나. 너라도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카페 2층 문을 열고 들어가니 푸시킨이 생애 마지막으로 앉았던 창가 4인용 ‘바로 그 자리’가 비어 있더군요. 누가 막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는지 웨이터가 자리를 치우고 있었어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음덕(陰德)인가 싶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가 그 자리를 차지했죠. 그러고 웨이터에게 팁을 건네주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코스요리를 시켰습니다. 많은 사람이 들어와 내 자리를 호시탐탐 노려보면서 눈총을 주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제게 주어진 행운의 시간을 만끽했습니다.”
 
 
  “현업에 있을 때부터 인생 후반전 생각해야”
 
차백성씨는 4대강 사업에 자문했던 인연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라이딩을 했다.
  ROTC 12기 출신인 차백성씨는 현재 알자연(ROTC자전거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알자연은 금년에 ROTC 창립 61주년을 기념해 오는 5월 중순경 4박 5일 일정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경기도 파주 망배단(望拜壇)에 이르는 휴전선 155마일을 자전거로 달리는 ‘DMZ 155마일 평화지킴이 61년의 기억’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원래 작년에 ROTC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하려다가 코로나19 때문에 못 하고 금년에 행사를 하게 됐습니다. 자전거로 달리는 구간에 있는 군부대들을 방문해 선배로서 장병들을 격려하는 행사도 할 예정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기 전에 다시 물었다.
 
  ― 정말 한창나이에 회사를 그만둔 것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큰 상장회사 임원을 그만두고 후회가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애들이 대학에 다닐 때하고 결혼할 때에는 조금 후회가 되더군요.
 
  하지만 선택의 문제입니다. 저는 전무나 부사장으로 올라가는 대신에 어렸을 때부터의 제 꿈을 선택한 것입니다. 책을 한 권 내고, 두 권 내고, 세 권 내고, 네 권까지 내면서 꾸준히 하다 보니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일가를 이루려면 꾸준해야 합니다.”
 
  ― 나이 오십 즈음에 인생 2모작을 준비하려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용감하게 터닝포인트를 만들되, 아직 현업(現業)에 있을 때부터 인생 후반전을 생각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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