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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인물 발굴

조선 유일무이 식물학자 張亨斗

이름 없던 들풀·나무를 보물로 만들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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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식물학자. 전국 돌며 채집한 식물표본 7000여 본 기증
⊙ 창씨개명 거부하고 일본어로 된 한국 식물 표기 거부… “조선 식물에 조선 이름 지어야”
⊙ 1936년 8월 《조선일보》와 함께 백두산 탐험에 참여… 백두산 식물 전람회 추진
⊙ 해방 후 학생·교사 위한 《조선식물圖譜》 간행… 1949년 좌익으로 몰려 사망
왼쪽 작은 사진이 장형두 선생. 광주MBC 다큐 캡처.
  산과 들에 활짝 핀 4월과 5월의 꽃들을 보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인물이 있다. 장형두(張亨斗·1906~1949년) 선생. 그는 1세대 한국 식물학자다.
 
  서구의 식물분류학이 일제를 통해 수입되던 시절, 제주에서 백두까지 방방곡곡을 돌며 우리 산하의 식물을 채집하고 정리한 인물이다. ‘일본 식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郞·1862~1957년)에게 사사했지만 “조선 식물에 조선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외친 고집불통이었다.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해 설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름 없던 들꽃과 낯선 희귀식물에 고유의 한글 이름을 붙였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한자어 ‘식물’을 묻혀 산다는 뜻의 ‘묻사리’로 표기한 이가 장형두다. 또 아가풀, 애기똥풀, 괴불주머니, 놋젖가락나물, 맞돋이닢 덩굴풀(對生葉蔓性草本), 깃꼴닢 묻사리(羽狀複葉植物)라는 한글 들풀 이름을 동료 학자들과 함께 붙여주었다.
 

  당시 일제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20년 동안 조선의 식물을 연구 분류하던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1882~1952년)이라는 거물 학자가 있었다. 지금도 한반도의 고유식물 527종 중 327종에 식물 발견자 ‘나카이’ 성(姓)이 새겨져 있다.
 
  장형두는 1930~40년대 ‘전라남도의 식물’을 연구하면서 일명 ‘나카이 식물’을 외면하는 기개를 보였으니 한국 식물학의 선구자로 손색이 없다.
 
 
  한국 식물학의 선구자
 
《조선일보》 1936년 7월 15일 자 1면에 실린 ‘백두산 탐험단원 모집’이라는 대형 사고(社告). 당시 탐험단은 백두산의 16봉과 천지(天池)를 왕복했다.
  《조선일보》는 1936년 7월 15일 석간 1면에 ‘역사적 성지 순례, 백두산 탐험 결행’이라는 대형 사고(社告)를 실었다.
 
  〈백두의 성산(聖山)! 조선인으로서 누가 이를 숭앙치 아니할 자 있으며 장백의 영봉(靈峯)! 백의인(白衣人)으로 누가 이를 경모치 아니할 자 있으리오.〉
 
  이전에도 여러 신문사에서 백두산에 등정해 기사를 쓴 적이 있지만 백두산 생태와 역사를 탐사한다는 계획으로 신문사에서 직접 대규모 탐험단원을 모집해 산행에 나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교수, 교원, 의사, 학생, 실업가 등 다양한 직업으로 구성된 참가자 32명은 4~6명씩 5개 반(班)으로 편성됐는데 여기에 ‘조선식물학회 간사’ 자격으로 장형두(3반)가 참여했다. 탐험단은 백두산의 16봉(峰)과 천지(天池)를 왕복했다. 당시 기사와 사진은 비둘기를 통해 전달됐다고 한다.
 
《조선일보》 1936년 8월 19일 자 2면에 실린 장형두의 기고문 ‘수확은 크다’. 백두산을 탐험하고 쓴 글이다.
  다음은 《조선일보》 1936년 8월 19일 자 2면에 실린 장형두의 기고문 ‘수확은 크다’의 일부다.
 
  〈이번 백두산에서 문헌에서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던 식물로, 백길경(白結梗)류의 두 종류와 만주 사삼(沙蔘)을 채집하였고, 사초과(莎草科) 화본과(禾本科)는 완전히 채집하였다. … 무두봉에서 천지까지는 완연히 고산식물의 전람회장 같은 감을 주는 만큼 그 식물은 다종다양하여 세계에도 비교가 적을 줄 안다. … 전부 채집한 것은 200여 종류에 달하는데 다시 연구 조사하여 가을에는 식물학회에 발표하는 동시에 백두산 식물 전람회를 개최할 작정이다.〉
 
  백두산 식물 전람회를 꿈꾼 장형두의 열정, 산하에 새긴 땀의 발바닥은 한국인이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정신적 유산이 아닐까.
 
 
  산하에 새긴 땀의 발바닥
 
장형두 선생의 아들 장득성씨.
  장형두는 아내 김영이(金鈴伊· 1907~1996년)와 슬하에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張一城·1930~?)은 6·25전쟁을 거치며 소식이 끊어졌고 장녀(張惠卿·1932~)는 이화고녀를 나와 1950년대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이용민(李庸民·1916~1982년) 감독의 영화 〈산유화〉(1957)에 출연했으며 현재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다.
 
  차남 장득성(張得成·1936~)은 서울대 독문과,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나왔으며 대한통운 국제영업부장, 교통부 해외과장, 롯데관광 대표이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지난 3월 30일 경기도 수원의 한 실버타운에서 그를 만나 ‘조선 유일무이 식물학자’였던 선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기자는 먼저 국립중앙도서관을 방문해 장형두가 남긴 저서와 논문을 찾았다.
 
  1. 〈전라남도산(産) 수목의 종류와 그의 분포지〉, 《전남 산림회 기관지 청구(靑邱)》, 1938년 발행.
  2. 《(학생)조선식물도보》, 서울: 수문관, 1948년.
  3. 《(학생)식물도보(圖譜): 보통(譜通)식물대백종(大百種)수록》, 서울: 수문관, 1949년.
  4. 《(학생)식물도보: 초등학교, 중등학교 통용(通用)》, 서울: 수문관, 1949년.
  5. 《(학생)식물도보: 초등학교. 중등학교 통용》, 서울: 수문관, 1950년.
  6. 《(학생)조선식물도보》, 서울: 수문관, 1958년.
  7. 《식물도보: 보통식물대백종수록(학생, 초등학교, 중등학교 통용)》, 서울: 수문관, 1960년.
 
  장형두가 사망한 뒤에도 식물 관련 연구서가 그의 이름으로 출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로 식물학자 이영노(李永魯·1920~)의 저서 《한국식물도감》(1956)의 머리말에 그를 회고하는 글이 나온다.
 
  〈… 중학교에서부터 가르쳐주신 은사 최기철 선생님과 모리(森爲三) 박사님께 감사드리며 돌아가신 장형두 선생님의 예리하고 다정스럽고 지극히 후진의 발전을 사랑하시던 지도에 감사하고…〉
 
 
  ‘예리하고 다정스럽고 후진을 사랑하시던…’
 
일본 국립과학박물관에 보관 중인 장형두 선생의 채집 식물. 1940년 경기도 가평에서 채집했다.
  1920~30년대 경성제국대학에서도 동식물 연구는 본격 학문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겨우 예과(豫科) ‘동식물학 교실’에서 연구가 이뤄졌다. 조선인이 직접 참여하는 한반도 생태학 연구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모든 식물학적 조사 연구는 조선총독부 산하 각 조사시험기관에서 일본인 기술자와 학문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극소수 조선인이 참가하여 일본인의 연구에 협조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소수의 연구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한반도 식물의 조사 정리를 시작으로 순수·응용 방면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국내 식물학계의 태두 정태현(鄭台鉉·1882~1971년)과 장형두였다.
 
  원로 식물학자 이덕봉(李德鳳· 1918~?)이 발표한 논문 〈최근세 한국식물학 연구사〉(1961)에 따르면 장형두는 일제 강점기 지리산, 대둔산, 순천, 백양산, 내장산 등 전라도의 식물을 조사하면서 난지(暖地)식물의 북한(北限)을 조사했다고 한다. 또 당시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등 한반도 전역은 물론 만주, 몽골, 북지(北支·북중국) 황하 유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조사 연구의 족적을 남겼다.
 
  조선인 식물학자 중에서 유일하게 라틴어로 종(種) 기재를 할 수 있었던 학자였고, “일본어로 조선 식물을 표기한다는데 나는 못 하겠소. (채집자 이름에) 내 이름을 빼주시오”라고 외쳤던 고집불통 꼰대였다. 또한 1세대 식물학자이자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전국을 돌며 교원강습회를 열어 조선 식물과 식물학의 소중함에 눈을 뜨게 만들고 혼을 불어넣었다.
 
 
  “일본어로 조선 식물을 표기한다는데 나는 못 하겠소”
 
  다음은 광주에서 발행된 《동광신문(東光新聞)》 1947년 5월 9일 자 2면에 실린 기사 중 일부다.
 
  〈초중등 교원에 생물실지(實地) 강습… 도학무국 주최로.
 
  금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도 학무국 주최로 생물학교 교원강습회를 개최하였는데 각 학교 교원 약 100명이 중앙청에서 온 박만규(朴萬奎), 장형두(張亨斗)씨 등 강사를 중심으로 실물에 대해서 강습 중이다.〉
 
  장형두의 원적은 ‘전남 광주군 광주면 누문리(현재 누문동) 119번지’.
 
  일찌감치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부립원예학교(府立園藝學校)에 입학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귀국해 이리농림학교 2학년을 수료한 뒤 다시 건너가 1928년 도쿄 고등조원학교(高等造園學校·1925년에 개교한 일본 최초의 농업대. 現 도쿄농대 전신)를 졸업했다.
 
  일본 식물 연구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마키노 도미타로 선생에게 사사하여 식물학을 배웠다고 한다. 마키노가 주최한 ‘일본 전국 식물명 찾기 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할 만큼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다음은 차남 장득성씨와의 문답이다.
 
  ― 집안 유래를 짧게 설명해주세요.
 
  “그러니까 조금 복잡해요. 제 증조부, 그러니까 선친의 할아버지는 인동장씨 집성촌인 경상도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인동장씨 집성촌이 있던 인동(仁同)은 오늘날 경북 구미와 칠곡군에 위치한다. 과거엔 인동군이란 별도 지명이 존재했을 만큼 규모가 컸다.
 
 
  악착스럽고 모험심 강해
 
  득성씨의 계속된 말이다.
 
  “그 인동 땅에 한 무리의 남사당패가 들어왔는데 제 증조부가 일곱 살 때 남사당패를 쫓아간 거예요. 손이 귀한 집안이어서 난리가 났죠. 증조부는 악착스럽고 모험심이 강했던 모양이에요. 그러고 보니 아버지나 저나 그런 성격을 타고났나 봐요.”
 
  ― 그러니까 증조부가 가출했고, 고조부가 뒤를 쫓아 광주까지 갔다는 건가요.
 
  “그렇죠. 남사당패 흔적을 물어 물어 찾다가 광주에서 만난 겁니다. 그런데 경상도 땅과 달리 호남 땅이 비옥하더란 겁니다.”
 
  ― 호남평야를 제대로 본 거네요.
 
  “고조부가 이후 인동 땅을 모두 정리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가 정착했다고 합니다. 조부가 구한말 동학란(東學亂) 때 돌아가시면서 연간 소출 5000석 땅을 남겼어요. 혹자는 아버지가 유복자라는 얘기도 있고, 하여튼 그래요.”
 
  ― 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요.
 
  “어려서 선교사나 누구한테 영향을 받아 식물학에 탐닉하게 된 거예요. 탐닉하며 5000석을 다 털어먹었는데 굳이 따지면 3000석은 집안 삼촌들에게 넘겼어요. 삼촌이 볼 때 창씨개명을 안 하겠다고 버티는 조카(장형두)를 두고 볼 수 없어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을 택한 것이었죠.”
 
 
  2000석 땅을 ‘식물 채집’과 바꿔
 
장형두의 스승이었던 일본 식물학계의 전설인 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郞·1862~1957).
  ― 당시 식물학 분야가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 학문이었나요.
 
  “백두산에 가서 식물 채집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기차 타고 백두산 입구까지야 쉽게 갈 수 있지만 길잡이를 잡아 산하를 탐험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죠. 몇 달 몇 년이 걸릴 수 있어요. 전인미답의 처녀림을 연구하기 위해선 현지인들을 수소문해야 해요. 깊은 산속 암자의 스님이나 저 산 너머에 농사짓는 아무개, 밭 가는 할머니가 산다는 말만 듣고 물어 물어 채집 정보를 얻었을 겁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죠.
 
  (제가) 어릴 때는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당시 식물학 연구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었겠다 싶더라고요. 게다가 도쿄 가서 직업도 없이 식물학을 연구하셨는데 그 돈이 남아납니까? 창씨개명도 안 하는데 일자리를 누가 줍니까? 몇천 석 금방 말아먹을 수밖에….”
 
  ― 아들이 지켜본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저는 광주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도쿄에 갔어요. 아버지는 당시 직업도 없으셨죠. 겁도 없이 도쿄에 간 거예요. 우에노 공원 안에 국립과학박물관이 있었는데 380만 개의 희귀 동식물 표본이 소장돼 있었어요. 아버지는 아침 식사를 마치시면 그곳으로 출근하시는 거예요.
 
  돈 받고 하는 연구가 아니었죠. 죽어라 한 우물만 팠어요. 그곳에 마키노 도미타로가 있었다고 해요. 우리 집에도 마키노 사진이 걸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버지가 그분을 존경하고 있었음이 분명해요.”
 
  일본 지역에 분포한 약 6000여 종 식물 가운데 2500여 종의 이름에 마키노(Makino)라는 학명이 붙어 있을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다.
 
 
  마키노에게 식물학을 배우다
 
  ― 장형두 선생은 식물학 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지녔어요.
 
  “무슨 마음을 먹고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도 궁금해요. 여러 방면에서 피해를 입어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안 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당시 일왕도 어려서부터 식물학을 연구했어요. 그것도 해양 식물학 분야를.”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메이지(明治) 일왕의 손자인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식물학자로서 해양생물학 분야에 있어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자신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출판한 것만도 7권에 이른다고 한다.
 
  “이란 팔레비 왕도 해양식물 연구에 관심이 많아 히로히토와 친했다고 합니다. 팔레비가 18세 때인가 도쿄에 왔다가 조선의 식물이 궁금해 당시 경성(京城)을 찾았다고 해요. 일왕의 소개로 조선호텔에서 아버지와 팔레비가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당시 아버지 나이가 서른 살이었다고 하니 1935년 안팎이었을 겁니다. 그 이야기를 저는 누나에게 들었고, 누나는 아버지에게 직접 들었다고 해요.”
 

  그러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1943년 무렵 도쿄제국대와 경성제국대가 합동으로 북지(北支)탐험대를 조직한 적이 있어요. 기록은 없지만 당시 조선에서 식물을 연구할 만한 사람을 찾아봐도 장형두밖에 없었대요. 그런데 ‘조센징이 창씨개명을 거부하니 못 데리고 간다’고 그랬대요. 압력이 들어온 것이죠. ‘창씨개명을 해라. 그럼 데리고 간다.’ 아버지는 ‘뭐? 그럼 안 가’ 충분히 그랬을 사람이야. 완전히 꼴통이거든.
 
  연구가 제일 중요한데 그를 제외한다니 말이 안 되죠. 할 수 없이 아버지를 모시고 갔던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예정보다 빨리 귀국하셨어요. 동북아 지역을 둘러보다가 러시아, 중국 인민군을 만나 도망친 것이죠. 아버지는 귀국 후 열병을 앓으셨는데 어머니가 점쟁이를 찾아가셨어요. 머리맡에다 부적을 태우면 낫는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연희전문에 식물표본 7000여 종 기부
 
《동아일보》 1933년 1월 21일 자 3면에 실린 ‘장형두가 연희전문에 식물표본 7000여 종을 기부한다’는 기사.
  《동아일보》 1933년 1월 21일 자 3면에 광주발(發) 기사로 ‘장형두가 연희전문학교에 식물표본 7000여 종을 기부한다’는 글이 크게 실렸다. 부제는 ‘2만원의 거비(巨費)와 10개년의 적공(積功)’이었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다.
 
  〈[광주] 곡성의 정씨 문중에서 만 권의 한 서적을 경성 연희전문학교에 기부하였다는 사실은 세상의 기억에 아직도 새로운 바이려니와 광주읍 대정정(光州邑大正町)에 사는 장형두(張亨斗)씨는 2만여원의 거대한 자금을 들여가면서 10개년이란 긴 세월을 전심력을 기울여 수집 연구하여 오던 식물표본 7000여 종을 또한 연희전문학교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표본으로 말하면 우리 조선에서는 물론이요, 전 동양에서 별로 얻어보기 어려운 진귀한 조선의 보물이라는 바, 이것을 완성하기까지 장형두씨는 그 가정에 반역자가 되었음은 물론 전 가산을 탕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험한 산과 거친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길 뻔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기사 하단에 실린 장형두 인터뷰에 새삼 놀라게 된다. 당시 그는 도쿄 고등조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제대 강사 이시도야 쓰토무(石戶谷勉)의 연구실에 있다가 ‘연구비 조달이 극히 곤란해 고향에 돌아온’ 터였다. 생활고를 겪으면서 식물표본 7000여 종을 쾌척한 셈이었다.
 
  당시 장형두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원래 누구에게 치하를 받고 싶거나 자아를 선전하기 위하여 기부한 것이 아니올시다. 그러나 아시고 찾아주신 데 대하여 사실을 숨기지는 아니하겠습니다. 앞으로 일이 내 뜻과 같이 되기만 한다고 하면 연전(延專)에다가 동양 제일의 식물표본실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 조선에서는 아직도 이 방면에 이해를 가지고 있는 이가 별로 많지 못한 것이 큰 유감인 동시에 … 점점 이 방면의 사람이 생겨날 줄 믿습니다. 저는 평생을 여기에 바칠 작정입니다.”
 
  경성제국대가 아닌, 연희전문에 장형두가 기부한 식물표본 7000여 종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 7000여 종의 표본이 지금도 있나요.
 
  “지금은 흔적이 없는데 6·25 당시 (연전에) 인민군 사령부가 주둔했는데 추우니까 식물표본을 가져다 불태워 사라진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어요.”
 
  ― 정말 그럴까요? 북으로 가져갔을 가능성은.
 
  “이북으로? 그럴 가능성도 있고 훔쳐서 외국에다 팔아먹었을 수도 있고….”
 
  ― 어쨌든 아쉽네요.
 
  “그렇죠. 아쉽죠.”
 
  서울대 산림과학부 장진성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45년 이전 한반도에서 채집한 식물표본 중 장형두의 ‘마디 굵은 손’을 거친 표본 수는 모두 2170점에 이른다. 또 일본 국립과학박물관에 그의 이름으로 채집된 표본 900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연희전문에 기증한 7000여 점의 표본 중 일부로 추정된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 어떤 아버지였나요.
 
  “(웃으며) 아버지와 거의 대화를 안 했어요. 하면 손해 보니까…. 아니, 아버지하고 할 얘기가 뭐가 있어요? 돈 달라는 거 외에는.”
 
  ― 할 얘기 많죠.
 
  “없어요. 제가 심통 맞기도 했지만 중학교 2학년 때인가요? 월사금 안 냈다고 교장 선생님이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셨어요. 속으로 잘됐다 싶었죠. 그때 을지로 5가에 서울대 사범대학 건물이 있었어요. 어머니한테 얘기해도 되는데 아버지를 골탕 좀 먹이려고 연구실에 찾아갔어요. ‘아버지. 학교에서 오시래요.’ ‘왜?’ ‘월사금 안 가져왔다고.’ ‘그건 네 어미한테 가서 얘기해. 집에 가!’
 
  책을 좋아하셔서 저를 데리고 명동 책방에 간단 말이에요. 10권짜리 《천일야화》를 사달라고 하니 아버지는 소리를 질렀어요. ‘지금은 돈이 없으니 나중에 사라’든지 다정하게 말하면 되는데….”
 
  ― 아이고….
 
  “자상… 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데, 술은 매일 잡쉈거든. 누가 공짜로 사주겠어요? 자기 돈으로 드셔야지. 근데 혼자 드실 수는 없어서 다른 교수들 데리고 먹는데 그 양반, 남한테 얻어먹는 성질이 아니야. 그러니 집에 가져올 돈이 없지요. 아마 힘들 때마다 어머니가 친정에다가…. 제 외갓집도 독립운동 집안이에요. 김규식(金奎植·1881~1950년) 박사의 사돈이죠.”
 
 
  《우리말 큰사전》, 해방 직후 제일 먼저 산 책
 
장형두가 참여한 《조선일보》 백두산 탐험단 모습이다. 조선식물학회 간사 자격으로 참여했다. 앞줄 오른쪽에서 5번째가 장형두다.
  ― 연구자이신 정종배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장형두 선생이 채집한 식물을 우리말로 부르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고 하더군요.
 
  “해방 직후 아버지가 제일 먼저 사온 책이 《우리말 큰사전》이었어요. 그때 속으로 ‘우리말을 몰라 사전을 사느냐. 아버지도 참 답답한 양반’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식물 이름을 알아가면서 기쁨을 느껴본 사람은 알겠지만, 식물 분류학 관련 서적에 적힌 어려운 한자와 전문적인 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고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아버지는 한글학자 중에서도 이희승(李熙昇·1896~1989년)보다는 최현배(崔鉉培·1894~1970년) 선생의 한글 이론에 친숙했어요. ‘순우리말’ 순화를 따랐거든요.”
 
  긴잎별꽃, 큰별꽃, 놋젖가락나물, 들바람꽃, 그늘바람꽃, 매발톱꽃, 꿩의바람꽃, 바람꽃, 꿩의다리, 눈빛승마(升麻·미나리아재빗과의 여러해살이풀), 좀사위질빵(낙엽 활엽 덩굴나무), 한해살이풀인 넓은잎애기고추나물, 가는마디꽃, 애기마름, 그리고 두해살이풀인 달맞이꽃 등이 장형두와 당시 식물학자들이 고안해낸 우리말 식물 이름들이다.
 
  1937년에 간행된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에 이들의 우리말 순화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방 이후 국가표준식물 명칭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다만 일제 잔재를 완전히 털어내지 못했다는 후대 학계의 지적도 있다.
 
 
  긴잎별꽃, 큰별꽃, 놋젖가락나물, 들바람꽃…
 
수문관에서 펴낸 장형두의 저서 《(학생)식물도보》.
  해방 후 본격화된 식물학 연구를 주도하던 장형두는 뜻밖의 사건에 휘말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49년 10월 21일 서울 중부서에 연행되어 인천경찰국으로 이송된 후 사흘 만인 23일 사망했다.
 
  경찰의 취조 도중 기절하게 되고 의사가 인공호흡을 했지만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어처구니없는 고문치사였다.
 
  38선 가까이에 있던 황해도 연백 염전(6·25 이후 염전은 휴전선 위로 넘어갔다)에서 근무하던 운전수 국한종(鞠漢鍾)이 좌익 지령으로 의심되는 문서를 장형두(당시 44세)에게 전달했다는 것이 혐의 내용이었다.
 
  제헌국회는 그해 10월 26일 임시회의를 긴급 소집해 이른바 ‘장형두 변사사건 진상보고의 건’을 토의했다. 당시 신현모(申鉉謨·1894~1975년) 의원의 발언이다.
 
  “장형두씨로 말하면 본래 전남 광주 사람으로 조선의 유일무이한 식물학자입니다. … 식물 연구를 한 20년 동안이나 하고 자기 추수 2000석이나 되는 재산을 다 없애고 백두산으로부터 태백산, 지리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식물을 수집해서 표본을 만들고 장차 사범대학에 식물표본실을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을 만들겠다고 그런 포부를 가진 분입니다.”
 
  이날 국회는 재석 118석 중 찬성 100표로 진상조사안을 통과시켰다. 반대표는 한 표도 없었다.
 
 
  어이없는 죽음
 
  ― 이 사건이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겁니까.
 
  “어머니의 친정 손위 언니가 국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어요. 그 집 큰아들이 만주에서 운전을 배웠는데 귀국해 염전에 취직을 했어요. 그가 트럭을 몰고 다니다가 무슨 밀수에 걸렸어요. 무얼 밀수했는지는 몰라요. 하여튼 잡혀 들어가니까 무슨 ‘백’을 좀 써야 되는데, 그때는 ‘백’ 없으면 못 사는 시대였거든요. 이모부가 서울대 교수니까 끌어넣은 거예요.
 
  아니, 끌어넣은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이모부가 서울대 장아무개 교수’라고 하니까, 경찰이 아버지를 억지로 엮어서 이북하고 무슨 내통을 한 것처럼 만든 거예요. 당시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사건이 있었잖아요. 걸면 다 걸리던 때였어요.
 
  나중 혐의는 온데간데없고, 사망 원인이 고문치사냐 병사(病死)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어요. 이건 뭐 초등학생한테 물어봐도 고문치사지….”
 
  ― 기가 막히네요.
 
  “아버지는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어요. 다른 더 좋은 것도 많은데도 아무것도 안 하시고, 오직 식물 연구만 열심히 한 분이시죠. 다른 거는 관심이 없으셨어요, 전혀….”
 
  ― 이후 어떻게 생활하게 됐나요.
 
  “그 일을 겪고 6·25까지 나니 아버지와 관련된 자료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어요. 아버지 사진 한 장 없습니다. 생전 아버지에게 3교까지 마친 식물학 관련 원고가 있었어요. 그렇게 돌아가시니까 아버지 이름으로 책을 낼 수 없었죠. 문교부 편수국장, 고려대 교수를 지낸 박만규(朴萬奎·1906~1977년) 선생 이름으로 책이 출간됐어요.
 
  1949년 11월에 발간된 그 책은 100% 아버지가 쓴 게 맞아요. 출판사로부터 인세를 몇 차례 받은 적도 있어요. 대단한 돈은 아니었지만 대학 등록금에 보탰죠.”
 
  훗날 박만규는 한국식물학회장·식물분류학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문화재위원과 국립공원위원 등도 지냈다.
 
 
  ‘미스칸투스 캉기’를 찾아서…
 
  장득성씨는 인터뷰 끝에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 내년에 일본 NHK에서 전설적인 식물학자 마키노 도미타로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를 제작한대요.
 
  그리고 뜻밖에 《월간조선》에서 아버지 흔적을 찾겠다고 하고 연구자인 정종배 선생님이 연락이 오고… 이상하게도….”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5월의 ‘장억새’가 그립다. 장억새는 원로 식물학자 이영노가 경기도 가평 등 중부지방에 분포하는 희귀 억새를 발견한 뒤 선배학자 장형두를 기리는 뜻에서 그의 성(姓)을 따서 명명한 억새 이름이다. 장억새의 학명은 미스칸투스 캉기(Miscanthus changii Y.N.Lee). 미스칸투스는 억새, 캉기는 장형두, Y.N.Lee는 발견자인 이영노를 뜻한다.
 
  5월이 오면 ‘미스칸투스 캉기’를 찾아 가평과 북한산을 오르면 어떨까. 그곳에서 고집불통 장형두, 홀로 산천을 헤매며 식물에 빠져들었던 한 남자의 생을 더듬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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