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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인물 발굴

독립운동가 괴암 김주석 선생

항일운동 울분을 예술로 승화시키다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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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 때 비밀결사단 ‘學友同人會’ 결성… 日 총독 암살 계획
⊙ 日軍에 체포… 혹독한 고문에도 “차라리 죽여달라”
⊙ 하반신 마비로 평생 지팡이 신세… “나에게 원수는 없다”
⊙ 세계 최초 ‘자유상상화’ 기법 창안… “그림은 도화지에 꿈을 담는 것”
⊙ 고문 사실 가족에게도 안 알려… 타계 20년 만에 국가유공자 인정
독립운동가이자 지역 1세대 화가인 괴암 김주석 선생과 지금은 김주석기념관이 된 생전 선생의 집. 사진=(사)김주석기념사업회 제공
  각목과 송곳, 쇠고랑과 혁대. 어떤 것도 날개를 꺾지 못했다. 지팡이에 의지한 몸이 됐지만, 도화지 위에서만큼은 비상(飛翔)했다. 그리고 그 소재는 비상(非常)했다.
 
  괴암(魁巖) 김주석(金周錫·1927~ 1993년)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지역 1세대 화가다. 동급생들과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고, 해방 이후에는 46년간 경상남도 내 초·중·고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세계 최초로 ‘자유상상화’라는 장르를 창안했다. 일제 치하의 울분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혹자는 동시대를 산 피카소(1881~1973년)와 같은 반열에 놓기도 한다.
 
  그런 선생이 조명을 받은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제자는 물론 가족에게조차 과거사를 세세히 얘기하지 않아서다. 특히 고문 사실은 일절 말하지 않았다. 1993년 타계 후 10여 년이 지나서야 친필 기록과 그림이 발견됐고 유족들은 가슴을 쳤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제자들도 한달음에 달려왔다. ‘늦었지만 선생님을 이렇게 보내면 안 된다’며 2016년 (사)김주석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발족식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학생들이 찾아와 일제히 눈물을 흘렸다. 애국자이자 천재 화가이자 시대의 스승. 그의 발자취를 되짚어 봤다.
 
 
  항일운동의 길
 
  1927년 진해시 경화동. 동네에서 제일 큰 한약방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편이 넉넉해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주며 자랐다. 당시 동료들은 선생을 ‘구김살 없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불의를 못 참는 친구’로 기억했다.
 
  그림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딱히 배운 건 아니었다. 서화가(書畵家)였던 외사촌의 집에 자주 들러 서예와 묵화 그리는 모습을 보며 따라 그렸던 게 전부다. 소질도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내 미술실기대회 최고상을 시작으로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휩쓸었다. 점차 그림에 빠져들었다. 서울로 전시회를 보러 다녔고, 큰 도서관에서 미술 서적을 탐독했다.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1941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 유학길에 올라 경성전기학교(현 수도공고) 토목과에 입학했다.
 
  그때는 일제 말기였다. 한글 대신 일본말을 써야 했던 시대. 한글을 모르는 이도 많았다. ‘조선인은 조선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야학당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틈틈이 그림도 그렸고 교내에서는 학생지도위원 활동도 했다. 공개적으로 일본말 사용을 반대하는 발언을 하고 학생들에게 동참을 종용하다가 정학 처분도 받았다. 일본인 교사 사이 ‘요주의 인물’이 됐다.
 

  그러던 1942년 11월. 일본 국경일인 명치절(明治節) 때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명치절 기념식 중 한 학생이 작게 실소했는데, 일본인 교련 교관이 웃은 학생을 잡아내기 위해 공개적으로 한국인을 모욕하는 일이 벌어졌다. 분노한 학생들은 교관을 구타했고, 그 사건에 가담하게 됐다. 학생들은 투옥·퇴학·무기정학을 당했다. 선생은 하급생이라는 이유로 정학 처분을 받고 일주일 만에 헌병대에서 풀려났다.
 
  나라 잃은 설움이 들었다. 조직적인 항일 활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1943년 1월 3일. 경성전기학교와 타교생 및 일반인 총 8명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학우동인회(學友同人會)’를 설립했다. 식민지 탄압의 분쇄, 일본 침략주의자 격멸, 조상의 문화전통 사수 등의 맹세를 혈서로 남겼다. 세부적인 투쟁 목표도 설정했다. ‘총독 암살’을 첫 번째로, 일본 정치 고위 관리의 암살, 총독부 행정 마비, 통신 군사시설 파괴, 독립군에 정보 제공, 우리말·우리글 고수 투쟁, 동포들의 문맹 퇴치 등이었다. 선생의 사위인 안헌식 한국유엔봉사단 이사장의 말이다.
 
  “그때 장인어른의 나이가 겨우 열일곱이었습니다. 그 어린 학생이 조선 독립을 위해 일본 총독을 암살하겠다고 무기까지 수집한 거예요. 6발이 장전된 권총 하나, 다이너마이트 3개, 큰 칼 6자루와 극약 2병. 참 비범하고 대범했지요.”
 
  무기 구입비는 신문배달, 찬조금, 회비 등으로 마련했다. 앞서 1942년 11월에는 총독 관저까지 탐색해뒀다. 목표 실행을 눈앞에 둔 1944년 1월. 동우회원인 이춘삼씨가 헌병에 붙잡히면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곧바로 선생도 체포돼 2월 진해헌병대로 이송됐다.
 
 
  광복 후 미술교사 임용
 
김주석 선생의 작품. 〈작가의 일생(1982)〉. 사진=(사)김주석기념사업회 제공
  죄목은 치안유지법, 국방보안법 위반이었다. 진해헌병대를 거쳐 그해 4월 부산형무소로 넘겨졌고 수감 7개월 뒤인 1944년 8월 1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웬일인지 이때부터 지팡이 신세를 져야 했다.
 
  석방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아침부터 동네 친구들이 찾아와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는 일본에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선생은 기뻐하면서 “손가락에 불을 켜서 하늘로 올라갈 기분”이라고 했다. 범상치 않은 표현력이었다. 거리에는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태극기를 그리는 건 선생의 몫이었다. 손이 닳도록 그리고, 그려서 나눠줬다.
 
  그 무렵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교사임용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때는 대학교에 가지 않고도 교사가 될 수 있는 시험이 있었다. 21세에 국민(초등)학교 교원 3종 시험에 합격했고 24세에는 중등학교 미술교사 검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염원하던 그림 그리기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46년간 마산여중, 제일여중고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
 
  선생의 제일여중 제자인 전보경(81) (사)김주석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온화하고 멋진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회고했다. 졸업 후, 결혼 후, 아이를 낳고도 친정에 가는 것처럼 평생을 찾아뵀다고 했다. 전 이사장은 선생의 뒤를 이어 미술교사가 됐다. 개인전도 여러 번 치른 원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한때 미술은 가장 자신 없는 과목이었다.
 
  “저를 포함해 당시에는 그림 그리기를 두려워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선생님은 그런 학생에게 ‘줄 한 번 그어보라’고 했어요. 선을 죽 그으면 ‘어, 잘하네. 이 선 하나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에게 ‘못 그린 그림’이라는 건 없었습니다. 그림에는 정해진 틀이 없다고 했어요. 그저 자신의 꿈을 도화지에 심는 것이라면서요. 그런 선생님께는 당연히 ‘그림을 못 그리는 학생’이라는 것도 없었지요. 저마다 꿈은 다양하며 좋고, 나쁨이 없으니까요. 학생 자신도 모르고 있는 개성을 세심히 찾아주시니, 다들 미술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말수가 거의 없었지만, 한 번씩 하시는 말씀이 그리 따뜻할 수 없었습니다. 훗날 제가 교사를 해보니 더욱 절감이 됐어요. 그때 선생님은 어쩌면 학생들 하나하나에게 그렇게 대했을까요. 일생에 그런 스승을 만난 것이 행운이에요. 저는 행운아입니다.”
 
 
  자유상상화
 
선생은 자유상상화라는 장르를 창안했다. 사진은 〈이산가족(절규)(1984)〉. 사진=(사)김주석기념사업회 제공
  정해진 틀이 없는 것. 다른 말로 독창성. 선생이 창안한 ‘자유상상화’의 핵심이다. 선생은 “자유상상화가 국민운동으로 이어지면 많은 사람이 그림에 자신감을 갖게 되고 창의성은 물론 협동심과 대동정신을 기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점 하나, 선 하나 모두를 기법화해 꼼꼼히 메모해뒀다.
 
  길을 걷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꿈에서 깨어나서도 언제든 적고, 그렸다.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종이에 꿈을 담을 수 있을지, 연구하고 또 했다. 선생으로부터 자유상상화에 대해 전수받은 후배 작가 오창성(75)씨는 《항일운동가 김주석 자유를 꿈꾸다》에 이렇게 썼다.
 
  “하얀 도화지에 아무 의미 없는 자유로운 곡선을 그리고 거기에 연상되는 그림을 그리면서 채색과 장식을 하면서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 ‘자유상상화’다. 이 과정을 통해 창의력과 상상력이 길러지게 되고 미 의식이 점차 자라나게 된다.”
 
  전에 없던 화풍(畵風)이었다. 선생은 화분을 그리고 나무줄기 대신 거꾸로 뒤집힌 사람 다리를 그렸다. 그리고 다리에다 잎을 그렸고, 잎에는 눈알을 그리기도 했다. 긴 곡선을 그리더니 그걸 물고기로, 다시 밥그릇으로 바꾸기도 했다. 수업이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교실에서는 항상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자들의 상상력 또한 교실 밖으로 뻗어나갔다. 전보경 이사장의 말이다.
 
  “선생님은 그림 속 자연을 모두 의인화했습니다. 돌(石)이 아이가 되고, 산이 여체(女體)가 되고, 나무가 노인이 됐습니다. 상상력에 한계가 없었어요. 그 영향으로 저 또한 예컨대, 먼 산을 보면 지금도 사람 형상이 보입니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모든 사물에 저마다의 얼굴이, 이야기가, 생명이 있다’는 걸 가르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그래서 작은 돌멩이 하나도 발로 차지 않았어요. 그 아이 같은 상상력과 어른 같은 온화함 속에 그리 처절한 고문의 기억을 품고 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습니다.”
 
 
  참혹한 기록의 발견
 
김주석 선생의 자화상(1960). 사진=(사)김주석기념사업회 제공
  선생의 큰 사위인 김진태 (사)김주석기념사업회 부회장은 “장인어른은 46년간 지팡이를 짚고 마산 산복도로를 걸어 마산여중, 제일여중고 등으로 출근했다. 그러면서 한 번도 아프거나 괴로운 것을 내색하지 않으셨다”면서 “아내(첫째 딸 김언주씨)는 철없는 자식이, 아버지가 고문 때문에 지팡이를 짚는지도 모르고, 발 한 번 더 주물러드리지 못한 것을 아직도 한스러워한다”고 했다. 김 부회장은 이어 “훗날 장모님까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던 중 장인어른이 기록한 고문 내용과 고문 현장의 그림을 발견했고, 그제야 어떤 고초를 겪으셨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타계 후 10여 년이 지나서야 발견된 수첩 속 기록은 참혹했다. 아래는 그중 일부다.
 

  〈(1944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진해로 온 대원들이 가설 유치장에 감금됐다. 진해헌병대에서 학우동인회 사건의 취조 수사는 친일파 중광(重光) 오장이 맡았다. 갑자기 도어가 열렸다. “가네와 수우샤꾸(金和周錫·선생의 창씨개명 이름), 고찌 데데고이!(이리 나와!).” 무서운 눈초리로 고함치면서 불러댄다. 취조실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고노야로 혼마노 고도 이와나이도 코로시데 시까우(요놈 참말을 아니하면 죽여버릴 테다).” 일본 헌병은 고함을 지르며 긴 일본도를 높이 든 뒤 “얏”이라고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며 내리쳤다. 그 순간 나는 목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 어느 대원 할 것 없이 이런 식으로 위협을 가했다. 권총을 뽑아 들어 실탄을 쏘아 보였다. 벽 창문을 뚫고 피융 하면서 실탄이 날아갔다.〉
 
 
  매일 이어진 고문
 
선생이 직접 목격한 일본군 헌병에게 고문당하며 죽어가는 청년의 모습을 그린 현장 그림. 사진=(사)김주석기념사업회 제공
  〈매일 고문에 시달리던 어느 날이었다. 헌병이 “이리 나와”라고 말해 고랑쇄에 묶인 채 나갔다. 중광은 “네놈을 이제 묻어버리려 하니 순순하게 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창고로 데리고 가더니 사람이 죽으면 넣는 관에 들어가라고 명했다. 나는 관에 들어갔다. 삽으로 흙 뜨는 소리에 이어 관 뚜껑에 흙 퍼붓는 소리가 계속 났다. 호흡이 점점 거칠고 급해졌으며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죽음의 일보 직전까지 갔다. 실신했다.
 
  눈을 뜨니 온 몸이 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지켜보던 보초가 고함을 지르자 2명의 군인이 들것을 가져와 나를 들고서 유치장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러고는 담요 한 장을 덮어놓고 나갔다. 조금 있으니까 복도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내가 누워 있는 곳으로 누군가 들어와 얼굴과 가슴을 만져보고는 “음, 아직 죽지는 않았군” 하면서 나가버렸다. 그 모습은 친일파 중광, 전라도 출생 한국인, 일본헌병 고쪼(伍長·오장)였다. 이런 참상을 한 번 더 당했다.
 
  어느 날 내가 의자에 묶여 취조 심문을 받고 있을 때였다. 내 곁에 힘이 세어 보이는 20대의 건강한 청년이 마룻바닥에 구부린 채 앉아 있었다. 헌병은 고문실에서 두께 6cm의 각목을 들고 와 그 청년의 무릎 사이에 끼운 뒤 무릎 위엔 널빤지를 걸친 다음 그 위에 의자를 얹어 타서 압력을 가해 눌렀다. 앉아 있는 청년은 한마디도 못 하고 비명을 지르며 눈, 코, 귀에서 빨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다.
 
  헌병은 고문 광경을 보여주거나 고문 끝에 죽인 시체를 보여주면서 “너도 저렇게 죽인다”고 공갈했다. 고문의 종류로는 손톱 끝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 방법, 손톱 끝에 뚫린 송곳 구멍에 노끈을 넣어 뱅뱅 돌리는 방법, 양팔을 등 뒤로 넘겨 묶어서 매달아 놓는 방법(이렇게 하면 팔이 탈골되어 불구가 되어버린다), 주전자에 물을 담아 와서 입과 코에 부어서 물을 마시게 하여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되면 헨조카(군화)로 배를 밟아 코와 입으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방법, 옷을 벗긴 뒤 가죽끈으로 후려쳐 온 몸에 붉은 피멍 자국을 만들어 실신시키는 방법, 난롯불에 철근을 붉게 달구어 피부를 지지는 방법, 기둥에 매단 뒤 몽둥이로 패는 방법, 의자에 앉혀놓고 전기감전을 시키는 방법, 일본도로 온 몸을 그어 칼자국을 남기는 방법 등이 있다. 만약 죽으면 여기선 재판도 법도 없고 누구에게 항의할 곳도 없다. 죽어도 그것으로 그만이다.〉
 
 
  ‘차라리 죽여달라’
 
물고문을 당하는 모습(왼쪽)과 고문에 쓰인 도구들 또한 상세히 그려놨다. 사진=(사)김주석기념사업회 제공
  안헌식 이사장의 말이다.
 
  “장인어른은 죽음 직전에 이르면서도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자백하면 살려준다는 회유에도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셨지요. 기록 속 스케치만 봐도 알 수 있어요. 항우 장사 같은 사람도 견딜 수 없는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학우동인회 동지들을 지켰습니다. 전사 중의 전사입니다.”
 
  〈하루 3회 주먹밥과 다꾸앙(단무지) 한쪽을 손에다 바로 주는데 그 양이 얼마나 적은지 20일이 지나도록 용변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겪은 헌병대 유치장 생활은 맞아서 아플 대로 아팠고 공갈협박에는 감각조차 없어져버렸으며 죽음과 삶은 생각조차 안 나고 괴로울 때는 어서 죽여달라고 몇 번을 외쳤는지 모른다.
 
  나는 관 속에 세 번째 들어갔다. “오이, 소꼬니 스위치오 히네레(여봐, 거기에 있는 스위치를 돌려라).” 그러자 관 안으로 물이 들어와 고이기 시작했다. 호스를 관 속으로 넣은 뒤 수도꼭지를 틀어 수장시키는 방법이었다. 코 위까지 물이 올라왔다. 헌병은 “요놈, 이래도 참말을 않을 테냐”고 고함을 쳤다. 관 속에서 물을 계속 들이켰다.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물밑에서 관 뚜껑을 두드렸다.
 
  못을 박을 때는 장시간이 걸렸는데 뚜껑을 뗄 때는 잠깐이었다. 일어서자마자 마셨던 물을 토해냈다. 정신이 아찔했다. 헌병은 일본도를 배에 겨누면서 “이제 바른말을 하겠다고? 좋았어. 그럼 가자”며 나를 취조실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나에 대한 물고문은 한국인 친일파 중광이 일본인 헌병을 시켜서 집행한 것이었다. 내가 취조실에 들어갔을 때 벽에는 몽둥이, 막대기, 판자, 각목, 수막줄, 고랑쇄, 가죽혁띠, 집게, 송곳, 주전자, 물통 등이 걸려 있고 피투성이가 된 채 묶여 있는 대원도 있었다.〉
 
 
  ‘나에게 원수는 없다’
 
  ‘신체가 정신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선생은 그 반대였다. 그만큼 강인했다는 뜻이다. 김진태 부회장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은 장인어른을 위한 말”이라고 했다.
 
  “집에서는 대단히 자상한 아버지였습니다. 아내가 어렸을 때 크게 앓았던 적이 있는데, 새벽에 장인어른께서 불편한 다리로 아내를 둘러업고 집에서 2km나 되는 창원 파티마병원까지 전력으로 뛰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그때 아버지의 심장소리가 잊히질 않는대요. 아침이면 온 가족이 모여 전날 무슨 꿈을 꿨는지 이야기도 나눴다고 해요. 이런 꿈, 저런 꿈. 그러면서 서로 꿈 풀이도 해주고요.”
 
  안헌식 이사장은 “일체의 경험을 말씀하지 않으셨던 터라 과거 무역업을 하던 내가 무지하게도 장인어른 앞에서 일본인 칭찬을 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그런데도 전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자신의 가치관만 정립돼 있으면 휘둘릴 일이 없다’고만 하셨지요.”
 
  선생의 기록 중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조금만 사색의 공백이 생기면 지난날 고문받으며 고생했던 것이 떠오른다. 곧이어 병 주고 약 주며 자신의 야욕을 채워버린 친일족 시게미쓰(전라도 출생, 사범과 졸업, 현직 교사직 4~5년 했다) 고쪼가 생각난다.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마음속에 파묻은 평생의 골병과 그 사람을 나는 관대히 대하겠다는 자세로 세월을 보냈다. 지금 그를 만나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조용히 말할 것이다. ‘나는 그 지난날의 죄악을 묻지 않는다. 다만 그대가 해방 후에 한국 사람으로서 개심하고 과거를 뉘우쳐 참회의 빛이 보이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이 자리를 떠난다’라고 할 것이다. 나에게 원수는 없다.〉
 
  한편 지난 2004년. ‘시게미쓰’는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이며 한국 이름은 신○○이라고 밝혀졌다. 친일파 청산 논쟁이 한창이던 그해 당시 여당 의장이 시게미쓰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 파장이 일기도 했다.
 
 
  국가유공자 서훈
 
1980년대 들어서는 발가벗은 인체 군상을 그린 연작 〈동(動)〉을 그렸다. 사진=(사)김주석기념사업회 제공
  환청, 심장병, 피부병, 그리고 하반신 불구. 극심한 고문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선생은 생전 1000여 점의 작품을 그렸다. 이 가운데 650여 점이 남아 있다. 〈이산가족(절규)(1984)〉 〈인형(1962)〉 〈모전(1977)〉, 1980년 이후 발가벗은 인체 군상을 그린 연작 〈동(動)〉 등이 대표작이다. 1952년에는 마산 지역 최초의 미술단체인 마산흑마회를 창립해 부회장,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했다. 그 무렵 마산은 6·25동란을 맞아 전국에서 피란 온 유명 미술인들의 활동 무대였다. 그래서 대한민국 미술 역사의 중추를 마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후 1962년부터 1970년까지 마산미술협회 국장과 회장을 지냈다. 1984년에는 마산시문화상도 수상했다.
 
  1993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에서 당시 변상봉 마산미협 장례위원회 위원장은 “목이 메도록 불러보아도 선생님은 여전히 바위같이 묵묵히 웃고만 계신다. 말씀이 적으셨던 선생님, 언제나 빙그레 웃고만 계시던 선생님, 두텁고 따스하게 그리고 힘껏 우리 손을 잡아주시며 격려해주시던 선생님의 손을 이제 잡아볼 수도 없게 됐다”고 했다.
 
  (사)김주석기념사업회는 지난 2016년 12월 선생의 친필 수기를 바탕으로 관련 자료와 증거들을 모아 세상에 소개했다. 타계 20년 만인 지난 2018년 8월 15일, 비로소 국가유공자로 서훈됐다. 그가 남긴 것은 단순히 개인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역사였다. 고문 당사자가 직접 그림으로 남긴 고문 기록은 특히 찾아보기 힘든 사료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그림을 파는 건 혼을 파는 일’
 
  김주석기념관은 선생이 가족들과 마지막까지 살았던 공간에 차렸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중앙고등학교 앞이다. 선생이 화실로 쓰던 2층은 갤러리로 꾸몄다. 가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작고 소박하다. 안 이사장은 “한국과 프랑스 미술작가 교류전시회에 한국 대표작으로 선정돼 10년 이상 출품하며 국제적 인지도도 쌓았으나, 장인은 이를 결코 부(富)를 축적하는 용도로 쓰지 않았다”면서 “예술인의 혼은 돈으로 바꿀 수 없다며 당신의 작품은 대한민국 예술 발전을 위한 용도로만 쓰라는 유언까지 남기셨다”고 했다. 간혹 외부에 걸린 작품들도 있는데 이는 모두 기증한 것이라는 게 안 이사장의 설명이다. 한때 생계가 어려워 푼돈에 판매했던 작은 작품들도 훗날 웃돈을 주고 되사들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통탄했다고 한다.
 
  “내가 혼을 팔았었다.”
 
  김 부회장은 “요즘도 이따금씩 갤러리에 예전 제자들이 찾아오는데, 하나같이 장인어른의 작품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힌다”고 했다. 그들이 만진 건 그림이 아니라 선생의 혼이었던 셈이다.
 
  안 이사장은 “장인어른은 민족의 혼을 담은 문화·예술 융성이 미래 한국의 가치를 높이는 기준이 돼야 참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면서 “당신보다 어려운 제자를 먼저 챙겼던 고귀한 정신은 이념투쟁에 빠져 있는 현재 교육계에 경종을 울릴 것”이라고 했다.
 
  “당시 교사 박봉에도 어려운 제자들을 그냥 못 지나치셨답니다. 학비 못 내는 학생들을 일일이 돌보고 밥도 챙겨주셨대요. 말씀을 안 하셨으니, 이런 선행을 가족들이 알 턱이 있나요. 2016년 기념사업회를 연다기에 가봤더니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분들이 ‘선생님, 아이고 우리 선생님’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군요. 그제야 그들에게 사연을 듣게 된 거예요. 50~60년 전 스승을 기리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제자가 무려 500명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스승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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