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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조계종 15대 宗正 性坡 스님

“초발심으로 돌아가 새로 출발하자”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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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로 현직 대통령 참석한 종정 추대 법회
⊙ 통도사 주지 시절, 사찰 개발 백지화해 청정 가람으로 되돌려놔
⊙ “진채를 품고 있던 불화가 조선 말기 세상에 나온 게 민화, 진정한 한국화는 민화다”
⊙ 16만 도자대장경과 반구대 암각화로 전통을 새롭게 재현
⊙ 책 100만 권 모으기 운동, “사찰을 미래판 사고로 만들겠다”
3월 24일 통도사에서 열린 15대 종정 추대 기자간담회에서 발언 중인 성파 스님. 사진=연합뉴스
  서울 조계사 마당이 사람들로 가득하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대웅전 앞까지 의자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다. 비 소식이 예고되어 있지만 의자들은 곧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이 들어찼다. 대웅전 앞쪽에 앉지 못한 스님들과 신도들을 위해 곳곳에 법회를 중계하는 대형 티브이가 놓여 있다. 코로나19 발발 이후 순수 종교행사에 이렇게 많은 이가 한자리에 모인 건 거의 처음 본 듯했다.
 
  신도들 사이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주변을 살피며 오갔다. ‘윤석열 당선인이 오는 건가?’ 앞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 신도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3월 30일 대한불교조계종 15대 종정(宗正) 추대 법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종정으로 추대된 주인공은 성파(性坡) 대종사였다. 조계종은 앞서 12월 13일 성파 스님을 만장일치로 차기 종정에 추대했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성파 스님이 종정에 오른 것은 조계종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어떤 분기점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조계종에서 종정은 종단의 신성(神聖)을 상징한다. 조계종단 헌법인 종헌은 ‘종정은 본종의 신성을 상징하며 종통을 승계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종정은 종단 행정에 관여하진 않는다. 종단의 주요 행사와 안거(安居) 등을 맞아 법어를 내리며 종단의 모든 스님에게 계(戒)를 전하는 전계대화상 위촉권을 행사한다. 종헌·종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포상과 징계의 사면 및 경감, 복권의 권한을 행사한다.
 
  종정에 오르려면 자격 요건이 있다. 승려가 된 햇수인 승랍이 45년 이상, 세속 나이로 70세 이상, 수행 계급을 뜻하는 법계가 대종사 이상이어야 한다. 임기는 5년이며 한 차례 중임할 수 있다.
 
  조계종은 통합종단이 출범한 1962년 제1대 종정으로 효봉 대종사를 모셨다. 이후 청담 대종사(2대), 고암 대종사(3~4대), 서옹 대종사(5대), 성철 대종사(6~7대), 서암 대종사(8대), 월하 대종사(9대), 혜암 대종사(10대), 법전 대종사(11~12대), 진제 대종사(13~14대)가 종정의 자리에 올랐다.
 
 
  현직 대통령 참석은 최초
 
3월 30일 열린 성파 대종사 종정 추대 법회엔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참석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최초다. 사진=조선DB
  육법공양, 삼귀의 등 추대 법회의 의례에 뒤이어 총무원장 원행 스님의 봉행사가 이어졌다. 성파 스님의 그간의 행적을 소개하는 영상이 재생됐다. 여기까지는 여느 법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뒤이어 축사가 시작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단상 위에 올라왔다. 대통령이 대형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자 신도들이 웅성거렸다. ‘진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거예요?’ 옆자리 신도에게 확인하는 이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직 대통령이 조계종 종정 추대 법회에 참석한 건 조계종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2017년 진제 스님의 종정 재추대 법회에는 문화체육부 장관이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문 대통령의 축사는 내용을 들어보니 꽤 신경을 쓴 듯했다.
 
  문 대통령은 종정 스님과의 개인적인 인연을 소개했다.
 
  “저는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종정 예하를 여러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큰 가르침을 받았고, 정신을 각성시키는 맑고 향기로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철마다 들꽃이 만발하고, 수천 개의 장독마다 역사와 전통이 담겨 있던 서운암도 눈에 선합니다.”
 
  성파 스님이 그간 걸어온 길도 잘 정리해 소개했다. 조계종이 준비한 소개 영상보다도, 스님의 업적을 잘 표현한 축사였다.
 
  “종정 예하께서는 일과 수행, 삶과 예술, 자연과 문화가 결코 둘이 아니라는 선농일치를 실천하셨습니다. 우리 산야의 햇살과 바람으로 전통 장을 담그셨고, 우리 흙으로 도자 삼천불과 통일을 염원하는 16만 도자대장경을 빚어내셨습니다. 30여 종의 우리 꽃과 식물로 천연염색을 복원하고, 옻칠기법을 개발해 불화와 민화를 새롭게 그리셨습니다. 이 모두가 불교 문화와 전통 문화의 정수이자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예하(猊下)는 종정을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부처님 또는 고승이 앉는 자리라는 뜻이다. 지난해 10월 정청래 의원이 한 ‘사찰 관람료는 통행세’ 발언 때문에 불교계는 정 의원과 더불어민주당에 불만을 표시해왔다. 그런 논란을 의식해 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뒤쪽 자리에서 들려왔다.
 
 
  법문으로 ‘문화 융성’ 강조
 
  축사 행렬이 끝난 후 드디어 성파 스님의 법문이 시작됐다. 참석한 이들에게 인사를 전한 후 본격적으로 스님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시작됐다.
 
  “우리 대한불교는 호국불교라고 했습니다. 과연 이 시대에 호국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내형적으로는 우리 불교는 옛날부터 토목과 건축과 조각과 미술과 모든 생활문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문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볼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남녀평등 문제만 하더라도 1700년 전만 해도 여왕이 세 번이나 정식 국가를 갖추었습니다. 서구에서 여왕이 언제 났습니까? 우리는 천년이나 앞섰습니다. 우리는 출판, 문화, 인쇄 분야에도 우리가 세계에서 으뜸입니다. 한지 종이만 하더라도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우리의 한지입니다. 일일이 다 말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께서는 저보다도 더 잘 아시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스님은 작정한 듯했다. 시작부터 건축과 조각, 미술 이야기를 꺼냈다. 대웅정 앞뜰이 문득 조용해졌다.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역사는 덮어놓고 외래의 것에 눈을 돌리고, 외래의 것만 선호합니다. 새로운 걸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건 좋지만, 우리의 뿌리 깊은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잘 이어나가고 잘 지켜나가고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해야 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 불자 여러분들은 그런 면에서 민족 문화의 책임을 지고, 민족 문화 창달에 노력해야 국태민안을 가져올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에서 염불하고, 목탁 치는 걸 하겠지만, 국가에 기여도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가지 않으려 해도 가는 것이 인생의 길입니다. 인생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 중에 우리는 우리 민족 문화에 대한 것을 불교계에서 많이 해왔고 앞으로도 많이 노력해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많이 알리고 우수성을 드날려야 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본받게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오늘 좀 말하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민족 문화를 미래지향적으로 계승하고 전 세계에 알리자는 법문이었다. 이어진 스님의 말에 경내에 웃음이 번졌다.
 
  “특별한 법문을 많이 준비했는데 양산 통도사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싹 다 잊어버렸어요.”
 
  그러면서 스님은 ‘초발심’을 강조하며 법문을 마쳤다.
 
  “초발심으로 돌아가자. 이때까지 있던 것들을 싹 지워버리고 전부 새로 출발하면 우리 마음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성파 스님의 법문이 놀라웠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불교 신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말을 사용했다. 흔히 고승(高僧)의 법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어려운 불경 말씀이나, 알 듯 모를 듯한 화두와는 달랐다. 둘째, 불교의 호국(護國)정신과 민족문화 창달을 연결해 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새로이 제시했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는 스님의 법문에 대해 “불교와 예술, 삶이 다르지 않다고 역설한 깜짝 놀랄 만한 법문”이라 평했다.
 
  이날 추대 법회엔 정치인뿐 아니라 예술의전당 사장, 정재숙 문화재청장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도 참석했다. 불교나 미술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낯선 풍경일지 모르겠다. 성파 스님은 불교계뿐 아니라 미술계에서도 유명하다. 옻칠 민화, 옻칠 불화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왔다. 그저 한가로운 스님의 취미 생활 수준이 아니다.
 
  성파 스님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면모는 기자가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다. 영적 성취라는 건 애초부터 불립문자(不立文字)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성파 스님의 인간적인 면과,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의 성파 스님을 소개하고 싶다.
 
 
  42세에 통도사 주지 맡아
 
  성파 스님은 1939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성파(性坡)는 법명이고, 법호는 중봉(中峰)이다. 1960년 양산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0년 구족계를 받았다. 1975년 경북 봉암사 태고선원에서 첫 안거(安居)에 든 이래 26안거를 성만(盛滿)했다.
 
  안거는 출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외출을 하지 않고 수행하는 제도다. 겨울 3개월간 행하는 동안거(冬安居)와 여름 3개월간 행하는 하안거(夏安居)가 있다. 안거는 의무 사항은 아니다. 몇 안거를 났느냐에 따라 수행이력을 가늠할 수 있다. ‘풀소유’로 유명해진 혜민 스님의 경우 안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26안거라면 적어도 6년6개월을 수행하며 보냈다는 뜻이다. 수행에 정진하던 스님의 운명은 1980년 신군부 집권과 함께 바뀐다. 그해 신군부는 10·27법난(法難)을 일으켰다. 10·27법난은 1980년 10월 계엄사령부의 합동수사본부 합동수사단이 불교계 정화를 명분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의 승려 및 불교 관련자를 강제로 연행·수사하고, 전국의 사찰 및 암자를 수색한 사건을 말한다. 포고령 위반 수배자 및 불순분자를 검거한다는 이유였다. 연행되어 고문을 당한 스님도 있었다.
 
  조계종에서 주로 행정을 담당하던 스님들이 일거에 신군부에 의해 밀려났다.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선방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이 행정을 맡아야 했다. 성파 스님은 1981년 통도사 주지를 맡게 됐다. 42세의 젊은 나이였다. 주지를 맡았을 때 스님이 겪었던 여러 일화 중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주었다. ‘통도사 골프장’ 얘기다.
 
  “저녁에 전화가 걸려와서 받으니 ‘회원권을 사겠다’는 거예요. 무슨 회원권이냐고 했더니 ‘거기 통도사 골프장 아니냐’는 거라. 알고 보니 통도사 부근에 짓고 있던 골프장이 이름을 ‘통도사 골프장’이라고 정한 거예요.”
 
  ━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당시 국제그룹에서 골프장을 짓고 있었어요. 가보니 공사현장 사장이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던 사람인 거라. 기세가 등등했어요. 양경모 국제그룹 회장을 만났어요. 이름을 바꾸라고 했더니 무슨 소리 하느냐고 펄쩍 뛰는 겁니다.”
 
  ━ 골프장 이름을 못 바꾸겠다는 건가요?
 
  “제가 그랬어요. ‘국호가 신라가 됐다가 고려가 됐다가, 조선에서 대한민국이 됐다. 국가가 바뀌어도 통도사는 창업 이래도 한 번도 이름이 안 바뀌었는데 당신이 왜 장사하는 데 통도사 이름을 쓰느냐. 그런 심보로 사업이 잘될 것 같나.’”
 
  ━ 그랬더니 뭐라던가요.
 
  “‘그럼 통도사에서 사자만 빼면 안 되냐’고 사정하더라고.”
 
  나중에 알려졌지만 국제그룹은 골프장 허가를 받기 위해 새마을성금으로 10억원을 냈다. 그렇게 따낸 골프장이니, 사찰에서 스님이 찾아와 상호를 가지고 호통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 같다.
 
 
  통도사 공원화 반대
 
서운암 된장 항아리 사이에 선 성파 스님.
  주지가 된 성파 스님을 정작 가장 힘들게 한 건 골프장이 아니었다. 사찰 경내에 문제의 씨앗이 있었다.
 
  “주지를 맡고 보니, 통도사 일대를 경상남도 도립공원으로 만드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어요. 통도사, 내원사, 석남사 일대를 공원화한다는 겁니다. 청사진을 보니까 절 안에 호텔이 들어오고, 어린이 놀이공원이 들어와요. 통도사 극락암 앞을 공원으로 꾸미고 경내 도로가 지방도로로 편입되게 됐어요.”
 
  ━ 통도사에서도 찬성을 한 건가요?
 
  “제 전임 주지가 도립공원 추진위원장이었어요. 개발하는 걸로 절 안에서도 여론이 정해진 상태라. 제가 주지를 맡고 이 계획을 백지화하겠다고 했어요. ‘통도사는 불지종가고 나라의 천년 고찰인데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 반발이 없었나요?
 
  “있었지. 스님들 99%가 제 말에 반대했어요. 거기에 일주문을 새로 짓고 사찰 경내에서 영업하던 여관이며 식당들을 절 밖으로 나가라고 했어요. 여관만 세 개가 있었으니까요. 그랬더니 안팎에서 난리가 났어요. 주변 마을 주민들도 경운기를 끌고 시위 나오고 난리가 난 거라. 지금까지 내가 겪은 반대 중 그때가 가장 심했어요.”
 
  공원으로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장사를 해보려 했는데 젊은 주지 스님이 절 밖으로 나가라고 했으니 난리가 안 날 수가 없었겠다. 절 안팎의 반대에 신변의 위협까지 느꼈지만 스님은 끝까지 버텼다. 해병대 출신이었던 게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통도사라는 청정 가람에 숨어 있는 사연이다.
 
  총무원 사회·교무부장과 통도사 주지 임기를 마친 스님의 나이는 겨우 40대 중반이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대찰(大刹)의 주지까지 지낸 입장에서 종단의 다른 직책을 맡기는 어색했다”고 스님은 회고했다. 다시 출가하는 마음가짐으로 스님은 불교 예술이라는 수행 길에 들어섰다. 스님이 예술 활동을 시작한 계기였다.
 
  통도사 암자 중 한 곳인 서운암에 주석한 스님은 전통 옹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파트로 주거 형태가 옮겨가며, 이사 가는 집마다 항아리를 버리던 시절이었다.
 
  “청자, 백자와 값은 비교가 안 되지만 항아리는 수천 년 우리 민족 생활 문화의 정수인데 저렇게 무시당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고물상들에게 ‘50년 이상 된 항아리 모아 오면 사겠다’고 해서 5000개를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인 옹기에 전통 방식으로 된장과 간장을 담갔다. 그 장들이 스님의 활동에 밑천이 됐다. 스님의 회고다.
 
  “나는 돈이 생길 만한 자리에 있어본 적이 없어. 처음부터 자급자족이 기본이라. (작품 활동 위해) 옻도 사야 하지 준비할 게 많아요. 밑천이 많이 들어가요. 그 돈이 어느 특정인이나 사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전부 제가 노력해서 만들어가야 했어요.”
 
  ‘시주받는 걸 쇳물 마시는 것처럼 생각해라’ 스님이 가슴에 새겼다는 말이다.
 
 
  ‘옻칠이야말로 불교 문화’
 
  스님은 비교적 일찍부터 한국의 전통 문화에 관심을 뒀던 것 같다. 1984년 ‘성파 시조문학상’을 제정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외래 문화가 물밀듯이 들어오고, 우리 문화는 자꾸 사그라지고 있었어요. 우리가 문자가 있는 문화 민족인데 이렇게 쇠퇴하면 되겠나, 시조 부흥운동을 해야 하지 않겠나 해서 문학상을 만들었어요.”
 
  만드는 것보다 어려운 게 유지하는 것일 터다. 성파 시조문학상은 지금도 해마다 두 차례씩 부산·경남 지역의 시조시인을 격려하고 발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스님은 이후 옻칠, 도자기 및 한지 제작으로 활동 분야를 넓혀나갔다. 왜 하필 옻이었을까.
 
  “내 고향이 합천인데 어릴 때 속담이 있었어요. ‘꿈에 중을 보기만 해도 옻이 오른다’ 그런 말이 민가에 전해 내려올 정도면 승려들이 옻을 얼마나 많이 취급했겠나. 내가 절집 와서 보면 조선 시대에 그렇게 억불(抑佛)을 했어도 승려가 수만 명이라. 그 승려들이 개개인마다 바리때가 있는데 옻칠을 했어요. 절에는 옻칠을 한 기물들이 많아요. 바루도, 탁자도, 도구도 다 옻칠을 했지. 불단에도 옻칠을 했어요.”
 
  ━ 불교 예술의 한 상징이 옻이군요.
 
  “옻이야말로 불교 문화이고, 불교 예술인 거지요. 고급문화재나 보물은 다 절집에서 나왔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발우를 외부의 옻칠 전문가에게 의뢰해 사서 사용한다는 인식이었어요.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서 옻칠을 시작했어요.”
 
 
  불화가 민화의 원형
 
성파 스님의 옻칠 민화 작품.
  스님은 옻을 이용해 민화(民畵)를 그리기 시작했다. 왜 민화였을까. 스님은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 토속신앙이 이미 있었어요. 미술도 원시 미술이 있었고요. 토속신앙과 불교가 합쳐지고, 불교 미술이 원시 미술과 함께 수용됐어요. 가야, 신라, 고려로 이어져 오는데, 모두 불교 국가였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예술은 조선 시대를 빼고는 전부 불교 예술이에요. 그런데 조선 시대에 억불(抑佛) 정책을 했지요. 이게 뒤집힌 거라.”
 
  ━ 조선 시대에 숭유(崇儒)억불 정책을 말씀하시는군요.
 
  “유교 문화를 받아들여서 사대부들이 중국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사군자, 산수화 같은 동양화를 그렸어요. 이것은 전부 수묵 위주입니다. 채색은 담채(淡彩), 그러니까 엷은 채색밖에 없어요. 그러니 우리 미술사에 진채(眞彩), 즉 원색의 진한 채색은 없어요. 그런데 조선 시대에 진채가 있던 곳이 있어요.”
 
  ━ 어디인가요?
 
  “절과 궁궐입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 해도 원래는 고려 사람이잖아요. 당시 사람들 모두 고려 사람이었지요. 고려 사람들이 모여서 정부를 새로 세운 건데, 나라가 바뀌었다고 갑자기 조선의 건축 양식이 나올 수 없잖아요. 그러니 궁궐을 지을 때, 절 짓고 단청하는 사람들을 절에서 불러서 지었어요.”
 
  ━ 그러고 보니 절과 궁궐 건물이 똑같이 생겼네요.
 
  “궁중 채화라는 게 있어요. 궁중에서 태자가 태어났다거나 축하할 일이 생기면 꽃꽂이나 그림을 그릴 사람들을 절집에서 불러요. 궁중에서 사찰을 지정해놓고 화승들을 불렀습니다.”
 
 
  불교 예술에 기댄 조선
 
  ━ 유교 국가라고 하면서 미술이나 건축은 불교에 기댔군요.
 
  “유교에 예술 양식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거든. 사서삼경 가지고 공부하는 것뿐이지요. 유교에도 육예(六藝)가 있지만 건물이나 단청, 그림 같은 건 정해놓은 게 없어요.”
 
  유교의 육예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뜻한다. 이 중 사(射)는 궁술(弓術), 어(御)는 마술(馬術)이다.
 
  ━ 궁중에 건축이나 미술을 담당하는 이들이 따로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봐요.
 
  “조선 시대 500년 동안 궁궐이 다 해봐야 몇 채나 지어졌나요. 단청이나 궁궐 짓는 일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부서를 따로 둘 수 없죠. 수원 화성만 봐도 기록이 있어요. 건축 총감독이 스님이고 승려들이 참여한 거라 기록되어 있어요.”
 
  ━ 불교계의 영향이 컸네요.
 
  “민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시대에 진채화는 절에 다 있었어요. 민가에서는 진채를 제쳐놨어요. ‘색을 많이 쓰는 건 무당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식이었어요.”
 
  ━ 사군자니 산수화니 하는 문인화를 숭상했군요.
 
  “빛깔 중에서 백색은 다른 색을 다 수용하는 색입니다. 빨간색이 들어오면 빨강이 되고, 파랑이 들어오면 파란색이 돼요. 그래서 유교에서 백색을 숭상했어요. 그런 맥락에서 백의민족이 나온 겁니다. 그런데 절에서는 흰옷만 입지 않았거든. 옷감에 물을 들인 염의(染衣)를 입었어요. 색색가지 진한 컬러를 쓰는 진채화 역시 500년 동안 사찰이라는 창고에 저장되어 있었어요.”
 
 
  한국의 진채화는 민화뿐
 
  ━ 그러고 보니 절에 있는 불화가 진채화네요.
 
  “불화 외에는 컬러 그림이 없었어요. 민화가 어디서 전래되어 들어온 게 아닙니다. 절에 있던 진채화가 조선 말기에 밖으로 나온 것이 민화예요. 한국 미술사에서 사회에 진채화가 나온 건 민화가 처음이에요.”
 
  ━ 절에만 있던 진채화가 왜 절 밖으로 나왔나요.
 
  “개화기에는 음지가 양지 되는 판이라, 돈 있는 사람이 옷 잘 입고 집 잘 지어놓고 양반 행세하는 판이거든. 그림에 대한 수요가 생기는데, 불화 그대로 나오면 민간에 잘 수용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 솜씨로 그린 게 민화라.”
 
  ━ 조선 말기에 시대가 혼란해진 것과 민화의 등장이 연관이 있을까요?
 
  “조선 말기에 정부는 아주 무능했어요. 조선 왕조가 튼튼할 때였으면 민화가 감히 못 나온다고. 민간에 수요가 많으니까 민화를 막 생산해내는 거라. 조선 500년 동안 불교가 억압을 받아도 절에선 화원들이 계속 있었어요. 목수들, 단청하는 사람들, 불화 하는 사람들의 집단 노동 체제는 절에나 있지 민가에는 없었습니다.”
 
  ━ 승려 장인들이 절 안에서 이어져 내려온 거군요.
 
  “조선 시대에 억불 정책을 당해도 계속 일거리가 있고, 명맥을 유지했는데 이게 동학란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들어오고 세상이 혼란해지니 일시에 일이 없어져버린 거라.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림을 그려서 판 겁니다. 서양 사람들도 사가고, 일본인들도 사가고 판로가 생기니 계속 그린 거지. 그렇게 민화가 처음 등장한 게 약 180년 전입니다.”
 
  ━ 얼마 안 됐네요.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 민화가 있어요. 제주도는 섬이니까 배도 등장합니다. 지역마다 조금씩 소재가 달라요.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을 시기에, 이게 가르치고 배워서 퍼지는 거였다면 전국으로 퍼지는 데 수백 년은 걸릴 겁니다. 이미 존재하는 솜씨꾼들이 있으니까 동시에 전국적으로 나온 거예요.”
 
  ━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 화승(畵僧)들은 있었을 테니까요.
 
  “제주도에도, 함경도에도 단청 불화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동시에 길이 난 겁니다. 그런 것만 봐도 민화가 단청 불화 하던 사람들이 그린 거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민화 아닌 ‘한국화’
 
16만 도자대장경이 소장되어 있는 장경각에 선 성파 스님. 2021년 사진이다. 사진=조선DB
  ━ 민화를 한국화라 바꿔 불러야겠네요.
 
  “나도 민화를 한국화라 해야 된다 말하지만, 전 사회가 이미 민화라고 부르고 있는데 한순간에 바꾸긴 어렵겠지요. 산중에 앉아서 하는 것도 없으니 이것저것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문화를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 민화 하나만 제대로 살펴봐도 우리 문화의 뿌리를 제대로 볼 수 있군요.
 
  “물론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는 것도 있어요. 전통만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통 고수한다고 지게 지고 살 수 있나. 지금 시대에 얼마든지 부응해야 되는 거라. 전통을 밟고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님이 단순한 민화나 불화를 넘어 옻칠을 결합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스님은 평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훈계하거나 나무라듯 얘기하지 않는다. 3월 24일에 열린 종정 추대 기념 기자간담회에서도 새로운 정부에 대한 말씀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난 주제넘은 생각은 없고, 말할 여지도 없습니다. 새 정부가 잘하도록 바라고 두고 볼 일이지 간섭할 일이 아닙니다. 정부도 바뀌는데 우리 불교계도 새 정신으로 자정하고 새로운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내가 잘해야겠다 싶지, 새 정부에 바라는 것은 특별히 없습니다.”
 
  그런 스님이 한국의 전통 문화에 대해서는 아쉬운 점을 분명히 말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옻칠로 반구대 암각화 재현
 
경남 양산시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에 수중전시한 반구대 암각화. 옻칠과 자개로 암각화를 재현했다. 사진=유튜브 캡처
  스님의 설명대로 스님은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작업들을 해왔다. 지난해 4월 공개한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도 그중 하나다.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와 ‘천전리 각석’을 옻칠과 자개로 재현해냈다. 옻칠과 나전칠기 공법으로 3년 이상을 들여 완성했다. 두 작품은 각각 가로·세로 3~4·9~7m 크기다. 반구대 암각화와 똑같은 실물 크기다. 옻칠판 위에 자개조각으로 선사시대 고래와 호랑이, 선사인과 그물망을 표현했다. 천전리 각석 역시 자개조각으로 기하학무늬나 문자(한자)를 생생히 구현했다.
 
  특이한 건 전시 형태였다. 서운암 장경각 앞에 얕은 수조를 만들어 그 안에 전시했다.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옻칠을 했기 때문에 ‘수중 전시’를 할 수 있었다. 실물 크기로 반구대 암각화를 재현하고 수중 전시를 한다는 아이디어에 무척 감탄했다. 반복되는 침수와 노출로 지금도 훼손되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의 처지와 이상향을 아름답게 담은 작품이다. 다만 실외가 아닌 조명이 있는 실내 공간에 전시하면 어떨까 싶다. 현재는 전시를 잠시 철수했지만, 다시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서운암 장경각 안에는 ‘16만 도자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1991년 시작해 2013년 완성했다. 이름 그대로 도자기로 구운 대장경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흙에 글씨로 써서 도자기로 구웠다. 양면으로 되어 있는 8만 대장경을 흙에 단면으로 옮기다 보니 16만 대장경이 됐다.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게 아니라 새롭게 재현한 작품이다.
 
 
  사찰을 미래 史庫로
 
  스님은 책 100만 권 모으기 운동도 벌이고 있다.
 
  “책은 인류 지식의 보고(寶庫)입니다. 디지털 시대라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지요. 도서관에 기증하려 해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해요. 1980년대 항아리 신세지요. 언젠가 반드시 책이 필요한 때가 옵니다. 절은 땅도 넓고 늘 스님들이 사는 곳입니다. 통도사만 해도 자장율사가 창건한 지 1400년이지만 한 번도 폐사(廢寺)된 적이 없습니다. 현재 40만 권쯤 모였는데 어느 정도 모이면 분류해서 통도사 경내 소나무 아래, 개울가 등 곳곳에 벤치를 놓고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꾸미는 게 꿈입니다. 조선 시대 실록을 보관한 사고(史庫)처럼 ‘미래판 사고’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책을 물리적으로 잔뜩 모아놓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해 ‘미래판 사고’를 만든다는 발상이 친근하고 반갑다. 성파 종정 시대 한국 불교는 어떤 색으로 나오게 될까. 혼란했던 조선 말기 절에서 나와 세상으로 스며온 민화처럼, 지금까지 불교가 품고 있던 진리가 갈등과 반목의 한국 사회에 어떤 위안을 건넬지 기다려진다. 우리도 이런 종교 지도자를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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